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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일 오후 9시쯤 서울 종로. 수은주가 영하 5도까지 내려간 가운데 일본 오사카에서 온 관광객 나오미(43)씨와 그의 친구들이
상점가를 두리번거리며 다니고 있었다.
나오미씨는 "일정을 마치고 샤워를 한 뒤 술을 한 잔 마시려고 호텔 바로 내려갔는데, 술값이 너무 비싸 다른 술집을 찾아 나왔다"며
"한국의 다른 물가에 비해 호텔 술값이 지나치게 비싼 것 같다"고 말했다.
#2. "나는 한국에서 교육을 받을 일이 없는데 교육세는 또 뭡니까. 세금을 세분화해서 뽑아주세요."
지난 10월 서울 한남동 하얏트 호텔. 전날 밤 호텔 바에서 술을 마신 한 미국인 관광객이 체크아웃 과정에서
100만원이 넘는 술값을 확인하고 강하게 항의했다.
이 호텔 구유회 식음료 부장은 "호텔 술값이 비싸다고 항의하는 외국인 손님들이 종종 있다"며
"술값에 붙은 세금 등을 설명해주면 교육세 등이 지나치다고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본지 취재팀이 지난 1일부터 7일까지 서울과 도쿄, 뉴욕, 홍콩 등 세계적 대도시의 특급 호텔 술값을 조사한 결과,
서울의 호텔 술값은 미국은 물론 같은 아시아권 국가인 홍콩·일본에 비해 2~3배까지 비싼 것으로 나타났다.
◆출고가 3만5000원짜리 위스키가 40만원에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위스키 가운데 하나인 '조니워커 블랙라벨' 700mL짜리 한 병의 국내 출고 가격은 3만5000원.
하지만 서울 반포동 JW메리어트 호텔 바(bar) '루즈'의 메뉴판에 적힌 가격은 29만원이다.
여기서 소위 '텐-텐(10-10)'으로 불리는 10%의 부가가치세와 10%의 봉사료가 더해지면 35만900원이란 최종 가격이 나온다.
하얏트 호텔 JJ마호니에서는 같은 술이 45만원이다.
출고가 82만5825원짜리 발렌타인 30년산의 경우 신라호텔에서는 175만4500원, 쉐라톤워커힐 호텔에서는 181만원에 팔리고 있다.
해외 특급 호텔에서는 어떨까. 같은 조니워커 블랙라벨 700mL짜리를 기준으로 비교했을 때 일본의 뉴오타니 호텔 바 '카프리'에서의 가격은 2만1600엔(27만8000원), 홍콩의 그랜드하얏트에서의 가격은 1540홍콩달러(22만8000원)였다. 미국과 비교하면 격차는 더 크게 벌어졌다. 뉴욕의 경우 위스키를 병 단위로 바 또는 레스토랑에서 파는 곳은 거의 없었고, 룸서비스를 통해서만 파는 경우가 많았다. 힐튼뉴욕 호텔의 경우 기본 가격 120달러에 각종 세금이 붙어 최종 가격은 155달러25센트였다. 원화로 환산하면 약 17만9000원. 시카고의 리츠칼튼 호텔 바에서는 위스키를 병째 팔고 있었는데, 1L짜리만 판매하고 있었고 최종 판매 가격은 250달러58센트, 원화로 28만9000원이었다.
◆실질 소득 기준으로 하면 미국보다 4배 이상 비싸
맥주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했다. 하이네켄 한 병의 가격을 기준으로 했을 때 미국의 힐튼뉴욕 호텔이 13달러70센트(1만5800원), 홍콩의 인터컨티넨탈 호텔이 77홍콩달러(1만1400원), 일본의 뉴오타니 호텔이 1000엔(1만3000원)인 데 비해, 서울의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는 2만원에 팔리고 있다.
구매력에 따른 1인당 국민 실질 소득을 기준으로 하면 가격차는 더 벌어진다. IMF가 발표한 작년도 우리나라의 실질 국민 소득은 2만7000달러이고, 미국은 4만7000달러, 일본은 3만4000달러, 홍콩은 4만4000달러이다. 이를 기준으로 환산하면 국내 호텔에서 35만~45만원에 팔리는 조니워커 블랙라벨의 경우 홍콩에서 13만원, 도쿄에서 22만원, 뉴욕에서는 10만원에 팔리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손님이 밖에서 가져간 술을 마실 수 있도록 잔과 얼음 등을 제공해 주는 '코키지 차지(corkage charge)'도 우리나라 호텔들이 지나치게 비싸게 받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리츠칼튼·밀레니엄힐튼 등 국내 호텔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판매하는 가격의 30%를 코키지 차지로 받고 있다. 자신들이 팔지 않는 와인을 가져온 경우에는 아예 자체 소믈리에를 동원해 술값을 판정한 뒤 코키지 차지를 받는 곳도 있었다. 반면 홍콩에서는 술값에 상관없이 3만~8만원, 일본에서도 3만9000원 정도의 일정액만 내면 코키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호텔 판매 가격 60만원짜리 술을 가져갈 경우, 외국 호텔에서는 3만~8만원만 내면 마실 수 있지만 국내 호텔에서는 20만원 이상을 내야 한다.
◆관광업계 "관광객 더 끌어오려면 호텔 술값 낮춰야"
이에 대해 호텔업계는 "호텔 술값을 외부 술값과 단순 비교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반박했다.
롯데호텔 남재섭 팀장은 "호텔 술값에는 품격있는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비용이 모두 포함된다"고 말했다.
세금에 대한 불만도 컸다. 대부분의 호텔에서는 기본 술값에 세금 10%를 붙인 뒤 다시 10%의 봉사료를 붙인다. 메뉴판 등에 제시된 가격에 1.21을 곱하면 최종 가격이 나온다. 하지만 JJ마호니 등 일부 바에서는 세금이 36.73%까지 치솟는다. 세법(稅法)상 춤을 추는 무대가 설치된 경우 '유흥업소'로 분류돼, 개별소비세와 교육세가 가산되기 때문이다. 한 호텔 관계자는 "이 법은 유흥업소들의 탈세를 막기 위해 만든 법인데, 호텔의 경우 투명한 구조인데도 이러한 세율이 적용된다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다"고 말했다.
관광업계는 이처럼 비싼 호텔 술값이 외국인 관광객에게 부정적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일본인 관광객 가이드로 활동하는 황연하(28)씨는 "관광객이 저녁에 술을 마시고 싶다고 요구할 경우 번거롭더라도 가급적 호텔 밖으로 안내한다. 우리나라 호텔 술값은 돈 많은 일본인에게도 부담스러운 수준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경기대 관광대학 엄서호 교수는 "외국 호텔은 술집을 없어서는 안 될 하나의 기본 인프라로 보는 반면 우리나라 호텔들은 식음료를 적극적인 수입원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객실 이용률이 높은 서울 시내 특급 호텔들은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라도 술값을 낮출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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