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스토리] 묵자 편-제4회: 죽음, 그리고 겸애와 비공
(사진설명: 묵자의 저서)
제4회 죽음, 그리고 겸애와 비공
묵자는 동분서주하며 가난한 평민을 도와주고 의롭지 않은 전쟁을 막는 동시에 가는 곳마다 연설을 통해 묵가의 주장을 선양했다. 묵자가 연설할 때마다 유가학설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질문하고 심지어 의도적으로 난처하게 굴기도 했다. 하지만 언변이 좋고 논리성이 강한 묵자가 유가 학자들이 제출하는 난제를 두려워할 리가 없었다.
어느 날, 한 유학자가 묵자에게 물었다.
“당신들 묵가는 겸애를 주장하고 귀천(貴賤)과 친소(親疏)에 관계없이 평등을 말하는데 그렇다면 왕은 어떻게 왕의 자리에 있고 부모는 어떻게 부모 역할을 해야 합니까? 이렇게 되면 천하가 혼란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아니오. 오히려 정반대요. 천하의 혼란을 조성한 원인은 사람마다의 평등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오. 제후들이 타인의 나라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병합전쟁이 끊이지 않고 도적들이 타인을 사랑하기 않기 때문에 치안이 좋지 않으며 아들이 부친을 사랑하지 않고 동생이 형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부친이나 형을 시해하는 대역무도한 일이 발생하고 궁중에 난이 일어나며 나라가 나라 같지 않게 되는 것이오. 예를 들어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타인을 사랑한다면 이 세상은 바로 태평해질 것이오.”
“겸애가 괜찮다고 칩시다. 하지만 겸애를 실천한다는 것은 너무 진부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많은 일들은 한 나라의 군주가 좋아하기만 하면 아무리 힘든 일도 쉬워지게 되는 법이오. 이런 말을 듣지 못했소? 초나라 영왕(靈王)이 허리가 가는 사람을 좋아하니 그의 신하들은 매일 식사량을 줄이는 것으로 몸무게를 통제했소. 그래서 결국 1년이 지나서 신하들은 모두 얼굴이 누렇게 떴으며 벽을 잡고서야 겨우 걸어 다니는 사람이 다수였고 심지어 아사하는 사람도 있었소. 월 왕 구천(句踐)은 용맹한 병사를 좋아하고 훈련 시에 고의로 선박에 불을 지르고 그 배에 타라는 명령을 내려 왕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병사들이 너도 나도 불타는 배에 뛰어올라 목숨을 잃은 사람이 적지 않았소. 굶어 죽거나 불타는 배에 뛰어오르는 것이 쉽지 않은데 초나라 신하와 월나라 병사들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겠소? 그것은 그들의 왕이 그런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오. 설마 겸상애가 굶어 죽거나 불 속에 뛰어드는 것보다 더 어렵겠소? 단지 군주가 겸상애를 국책으로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오.”
묵자의 말이 끝나자 그 유학자가 또 말했다.
“군주가 겸상애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겸상애는 실현하기 아주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태산(泰山)을 들어올리고 큰 강물을 건너 뛰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의 비유가 정확하지 않소. 당신이 말한 그런 일을 이룬 사람은 예로부터 없었소. 하지만 겸상애(兼相愛)와 교상리(交相利)는 이와 달리 성군들이 행한 적이 있소. 우(禹) 임금이 물을 다스리고 구주(九州)를 세운 일은 아무리 어려워도 그는 끝내 해냈소. 만약 우 임금이 물을 다스리는 정신으로 겸애를 행한다면 못해낼 일이 있겠소? 주(周) 문왕(文王)은 서기(西岐)를 다스릴 때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지 않고 노인이 봉양을 받으며 어린이는 보살핌을 받으며 모두가 잘 살게 했소. 우리가 이런 정신으로 겸애를 행한다면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것이오.”
또 다른 유학자가 물었다.
“선생은 후장(厚葬)을 반대하시는데 후장이 성군(聖君)의 이치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 말에 묵자가 대답했다.
“상고시대 요(堯) 임금이 북방의 팔적(八狄)을 교화하다가 공산(蛩山)에서 세상을 떴는데 사람들은 별도로 묘지를 선정하지 않고 별세한 그 곳에 요 임금을 묻었소. 옷과 이불도 세 벌만 쓰고 일반 닥나무로 관을 짰으며 봉분도 만들지 않아 장례가 끝난 후 묘지에서는 소와 말이 풀을 뜯었소. 순(舜) 임금이 서방에서 칠융(七戎)을 교화하다가 남기(南己)에서 세상을 뜬 후 순 임금도 현지에서 장례를 지냈는데 이불과 옷도 세 벌만 쓰고 관도 일반 닥나무로 짰으며 봉분을 만들지 않아 묘지로 행인들이 오고 갔소. 우(禹) 임금이 동방에서 구이(九夷)를 교화하다가 회계(會稽)에서 별세했는데 역시 현지에서 장례를 치렀고 이불과 옷도 세 벌만 썼으며 세치 두께의 오동나무 널판으로 관을 짜고 칡덩굴로 관을 묶었소. 장례가 끝난 후 남은 흙으로 봉분을 만들었는데 너비가 석 자에 그쳤소. 그래도 후장과 구상(久喪)이 성군의 이치란 말이오?”
그 유학자가 포기하지 않고 또 물었다.
“후장과 구상이 성군의 이치가 아니라면 중원의 군자들은 왜 줄곧 후장과 구상을 주장하겠습니까?”
“그것은 습관이 몸에 뱄기 때문이오. 과거 월(越) 나라의 동쪽에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서는 부모가 세상을 뜨면 먼저 살을 깎아낸 후 뼈를 묻어야 효자로 인정되었소. 진(秦) 나라 서쪽의 한 작은 나라에서는 부모가 세상을 뜨면 나무더미에 시신을 올려 불에 태우면서 연기가 하늘 공중으로 올라가면 죽은 부모가 선인이 된다고 여기고 그렇게 장례를 치러야 효자라고 여겼소. 자자손손 전해지는 이런 풍속이 모두 인의(仁義)의 이치란 말이오? 아니오. 다만 습관이 몸에 밴 것일뿐이오.”
그 말에 유학자는 할 말을 잃었다. 그 참에 묵자는 묵가의 주장을 역설했다.
“관의 두께는 세 치면 되고 이불과 옷도 세 벌이면 족하오 봉분도 알아볼 정도로만 만들면 되고 울면서 장례를 치르고 울면서 집에 돌아와 제사에 쓸 재물을 구하고 생계를 위해 일을 시작하면 효자라 할 수 있소.”
많은 돈과 재물을 들여 후한 장례를 치르고 3년 동안 생계를 포기하고 부모의 묘소를 지키는 것은 누구에게 득이 되는 것인가? 그로부터 이익을 얻은 자는 아무도 없다. 이와 반면에 후장을 하지 않고 근검하게 장례를 치르며 장례 후 즉시 생계로 돌아오는 것에 관한 묵가의 주장은 고인과 살아 있는 자의 이익을 모두 돌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한 것은 후장과 구상을 주장하는 유가는 무신론자이고 박장(薄葬)과 절약을 주장하는 묵가가 오히려 유신론자라는 점이다. 공자(孔子)는 “삶도 제대로 모르는데(未知生) 어찌 죽음을 알랴(焉知死)?”고 말했고 묵자는 “우리는 신귀(神鬼)의 일을 경외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학자가 공자의 말을 인용하자 묵자는 왜 신과 귀신을 경외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고서에 정묘길일(丁卯吉日)이 기록되어 있고 관리는 천자(天子)를 대신해 신령과 조상에 제사를 지내야 하오. 따라서 우리는 신과 귀신이 현명함에 상을 내리고 폭정을 벌한다는 것을 믿어야 하오. 이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위하는 큰 이치가 될 수 있소. 관리가 비리를 저지르고 남녀가 불륜을 저지르면 귀신이 알고, 백성이 도적이 되어 흉기나 독극물, 불 등을 가지고 무고한 사람을 해치고 타인의 재물을 강탈하면 귀신이 다 알게 되오. 모두가 귀신을 믿고 귀신을 두려워하면 관리는 청렴하지 않을 수 없고 선행을 보면 상을 내리지 않을 수 없으며 악을 보면 벌하지 않을 수 없소. 그리고 백성도 쉽게 도적이 되어 악행을 통해 사적인 이익을 챙기려 할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게 되오. 다시 말하면 머리 위에서 천지신명이 지켜보고 사람이 하는 일을 하늘이 지켜본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나쁜 일을 할 사람이 어디 있겠소? 이렇게 되면 천하를 다스리기 용이하오.”
묵자는 자신의 주장을 진일보 천명했다.
“우리는 신과 귀신을 경건하게 참배하고 신과 귀신에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하면 좋은 점만 있지 해로운 점이 없다. 통상 부친이 아니면 모친이 먼저 세상을 뜨거나 혹은 형이나 누나가 먼저 세상을 뜨게 된다. 이 때 우리가 술과 곡물로 망령에 제사를 지낼 때 귀신이 있다고 치면 부모형제자매들과 함께 미주를 마시고 음식을 맛보는 셈이며 귀신이 없다고 쳐도 우리는 술과 음식을 버린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함께 모여 정을 나눈 셈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귀신의 존재를 믿고 귀신에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는 성군의 이치이다.”
물론 세상에는 귀신이 없고 오늘은 무신론자들이 다수이다. 다만 묵자는 신과 귀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빌어 세상을 다스리고자 한 것이다.
묵자는 궁극적으로 겸애와 비공을 선양하는 길에서 삶을 마감했다. 박애(博愛)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평화를 위해 평생을 기여한 이상주의자 묵자로 말하면 이는 삶을 마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