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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들의 내용이 너무나 새롭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로 알게 된 시오노 나나미의 전쟁 3부작이란 책을 소문을 듣고 보게 되었다.
1부.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 콘스탄티노플이란 도시가 지금의 이스탄불, 2년 전 내가 방문했던 도시이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한번 가보고픈 아름다운 도시이다.
터키인. 투르크인. 중국에서는 이들을 돌궐족이라 한다.
중국에 쫓겨 서아시아로..
유럽으로 진출한 투르크인이 비잔틴제국의 상징이자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빼앗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전쟁3부작의 제1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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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제국이 멸망의 길을 걷던 330년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수도로 콘스탄티노플이란 명칭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후 1123년 동안 비잔틴제국의 수도로써, 명실상부한 지중해의 중심도시이자,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해냈다.
서방 카톨릭 교회와는 달리 비잔틴 제국은 그리스 정교를 택하고 있기도 했다.
1000년 넘게 유럽을 이끌던 비잔틴 제국은 1400년대에 이르러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하고 모든 지역이 오스만투르크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비잔틴제국은 이제 콘스탄티노플에만 존재하며, 강화조약으로 도시의 생명을 간신히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중요기점으로 지중해의 주요 무역도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452년 오스만투르크에 20살을 갓 넘긴 메메드 2세가 술탄 자리에 오르게 되면서 상황은 급전하게 된다.
메메드 2세의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이런 낌새를 알아챈 비잔틴제국의 당시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서로마 지역(라틴지역)에 용병지원을 요청한다.
하지만, 당시 서로마 지역에는 각 공화국간의 분쟁이 있거나 거대한 오스만투르크와의 강화조약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적극 지원해 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결국 제노바와 베네치아에서만 형식적인 용병지원을 해주게 된다.
이런 용병지원을 받기 위해 많은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동방 그리스정교와 서방 카톨릭교의 연합을 하게 된다. 이에 교황의 대리인은 서로마에서는 이시도르스가 연합을 주도하게 된다.
...
한편, 오스만투르크의 새로운 술탄 메메드2세는 자신의 본심을 숨긴 채, 소아시아 난동을 막는다는 핑계로 속주의 군대를 집결시킨다. 그리고 협박과 위협으로 그들을 콘스탄티노플 정복에 합류하게 한다. 그리고 헝거리 출신의 기술자로 하여금 개량 대포를 만들게 하여 후에 이를 긴요하게 사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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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3중 장벽으로 되어 있는 콘스탄티노플의 성곽, 해상 전에 우위를 점하고 있는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용병들에 비해 해전경험이 거의 없는 투르크인..
이런 요인으로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메메드 2세가 믿는 것은 오직 병적 우세와 시간이었던 것 같다.
몇 번의 총공격 실패를 거듭한 후, 공격 5개월만인 1453년 5월 29일 드디어 콘스탄티노플은 많은 희생자를 남기고 메메드 2세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로써 유럽 기독교의 중심도시가 오스만투르크의 이슬람교가 점령하게 된 것이고, 그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 마지막 전투에서 콘스탄스누스 11세는 전사하고, 제노바와 베네치아 용병들은 간신히 도망하게 된다.
이 전쟁에 참여했던 오스만투르크인, 제노바, 베네치아인들의 기록에 의해 이 전쟁이 상세함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오스만 투르크인이 점령한 콘스탄티노플 내에 있는 성 소피아 대성당을 비롯한 성당들도 이슬람교의 모스크로 모두 바뀌어 갔다.
그리고 오스만투르크는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으로 서아시아와 유럽으로 나뉘어져 있던 세력을 한데 묶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세력을 더욱 확장해 나가 흑해 일대 전부를 차지하고, 헝가리를 거쳐 로마 본국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21세에 술탄에 오른 메메드2세는 이런 무지막지한 영토 확장을 하고 49세에 숨을 거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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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에서...
죽은 일개 병사를 생각해본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유럽의 정세는 바뀌었지만...
이름 없이 죽어간 일개 병사들..
그들은 무엇을 위해 싸운 것일까....
그저 지휘자의 명령에 의해...
돌진하고 어디선가 날아온 포탄에, 화살에 한낱 파리 목숨은 사라진다.
그리곤 역사와 함께 알아주는 이 없이 묻히고 만다.
마치 원래 그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과연 나도 역사 속에 그냥 알아주는 이 없이 묻히고 말 것인가?
그럴 확률이 무지하게 높다.
욕심을 내지 말고, 내 삶을 사랑하며.. 이 세상을 이루는데 아주 작은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이에 만족하고, NG를 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한다.
전쟁3부작 2
로도스 섬(장미가 피는 섬이라는 뜻이라도 함)
역사에 관한 책을 접하면 접할수록 흥미롭고, 더 숨겨진 역사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지심일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내내 십자군 전쟁이 어찌 전개되었으며, 그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물음표가 머리 속에 계속 새겨져 있었으니 말이다.
십자군 전쟁에 관한 책을 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략 책의 내용을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십자군전쟁은 기독교도 연합이 이교도인 이슬람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이다.
이 십자군전쟁 때, 기독교도에서는 3개의 연합 종교기사단이 있었는데, 성 요한 기사단, 신전 기사단, 튜튼 기사단이 그들이다.
이들은 서아시아에서 항전하다가 결국 이슬람교도에 패배하여 쫓겨나 동지중해의 키프로스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곳에서의 난민생활은 기사단의 존재이유가 흐려지게 만들어 신전 기사단은 결국 해체되었고, 튜튼 기사단은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하지만 성 요한 기사단은 로도스 섬을 정복하게 되어 이곳이 성요한 기사단의 근거지가 된다. 이때가 1308년이다.
이후, 성 요한 기사단은 로도스 섬에서 요새를 구축하고, 이슬람교도를 상대로 해적활동을 하는 한편 병원을 운영하기도 한다. 오스만투르크의 확장일로를 걷는 메메트2세가 술탄이 시절, 눈엣 가시인 이 로도스섬을 정복하려 했지만 성 요한 기사단은 그들을 물리치게 된다.
그리고 1522년...
이 당시 상황을 간단히 정리하면, 서유럽에서는 신성로마제국의 떠오르는 세력으로 당시 황제는 카를로스 5세였으며, 베네치아 공화국은 상업적인 이유로 오스만투르크와 강화조약을 맺은 상태이고, 오스만 투르크는 25세의 젊은 술탄 술레이만 1세로써 로도스 점령에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서유럽 기독교도들의 최전방이라고 불리워도 손색이 없는 로도스섬이 이슬람교인 오스만투르크의 위협을 받고 있어서, 이런 십자군 정신으로 기독교국가 들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자신들의 국내정세 및 오스만투르크와의 이해관계 때문에 로도스 섬의 지원은 소극적이어서, 실제 지원은 극히 적은 양이 된다.
그리고 1522년 여름 술레이만1세는 직접 친정함으로써 로도스 섬에 진군하게 된다.
엄청난 군사량과 쫓기지 않은 시간을 담보로, 연일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입증에 대포와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지뢰를 이용하여 로도스의 견고한 성을 공격하게 된다.
로도스섬의 기사들과 원주민들은 힘을 한데 모아 힘겹게 막아낸다. 하지만, 오스만투르크의 물량에는 어쩔 수 없었다.
결국 1522년 8월 1일 시작된 공방전은 12월에 가서야 오스만투르크의 강화조약 협상을 성 요한 기사단이 받아들이면서, 끝을 맺게 된다.
이로써, 로도스섬은 투르크령이 되고, 원주민과 기사단은 자신의 의사대로, 잔류하고 싶으면, 잔류하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도 되는 신세가 되었다. 대부분이 로도스 섬을 떠나 또다시 피난민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기독교도의 최전선인 로도스섬에서 끝까지 싸워 지키고자 한 명분이 있어서, 신성로마제국의 대제 카를로스를 비롯해 각 국에 지원요청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의 노고는 인정하지만, 그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에 고심한 끝에 카를로스는 서지중에 조그마한 섬 몰타섬을 그들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성 요한 기사단은 만족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기독교도의 최전방인 로도스섬에 비해 후방인 이곳에서 투르크를 상대로 해적질 등을 할 수 있는 명분도 없어졌지만, 그들에게도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 이에 그들은 몰타에 정착하게 된다. 그 이후로 쭉~
한편 눈엣가시로 여겼던 로도스 섬을 점령한 오스만투르크는 동지중해 대부분을 점령하므로써, 자유로이 해상무역을 할 수 있으며, 더욱 세력 확장하는데 기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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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
결혼도 안하고, 오직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명예를 먹고 사는 기사단.
붉은 망토에 흰색 십자가 망토를 두른 성 요한 기사단들의 기개가 눈에 선하다.
비록 그들의 모습이 영화 속에 그려진 기사단의 모습일지라도 말이다.
그들이 끝까지 투항했지만, 수에는 어쩔 수 없었다.
전쟁3부작 3
3부의 이야기는 1569년 가을 베네치아에서 시작된다.
오스만투르크의 세력 확장과 함께, 지중해의 판도가 많이 바뀐 것은 사실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자국의 상업적 이익과 안정을 위해 이교도인 오스만투르크와의 강화를 맺게 된다. 이로써 다른 나라의 비난을 사기도 한다.
그러던 중 막강 해군력을 자랑하던 베네치아의 국영조선소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오스만투르크의 진보파를 흔드는데 충분하였다. 당시 투르크의 술탄은 방탕한 생활만 즐기는 셀림2세였는데, 그는 진보파의 의견을 수렴하여 선대에서 하지 못한 베네치아령인 키르프스 섬 점령을 계획하게 된다.
이 정보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대사 바르바로에 의해 베네치아에 전달되고, 원로원 결정에 의해 전쟁준비에 들어간다.
하지만, 막강한 투르크군을 막기에 역부족이란 것을 안 베네치아는 십자군정신을 명목으로 주위 국가에 도움을 요청한다.
세력이 갑자기 커진 신흥국가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교황만이 마지못해 참가하는 형식이 되었다.
이로써, 서유럽의 이교도인 투르크와의 전쟁을 위해 십자군 이후 다시 연합하게 되었다.
그리고 1570년 출항을 하게 되지만, 삐걱거리는 요소가 처음부터 많았다. 연합군의 총사령관 선정 문제를 놓고, 에스파냐와 베네치아의 신경대립이 있었다. 결국 교황이 파견한 콜론나가 총사령관이 되었지만, 그는 그런 대군을 이끌 통솔력을 가지고 있다는 않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었다. 그리고 베네치아 군에 찾아온 역병으로 많은 군사들을 잃게 되고, 에스파냐군의 시간약속을 지키지 않아 출항이 연기되고, 거기에 폭풍까지 만나 어려움을 겪는다.
결국 키르프스에 도착하기도 전에 투르크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계절도 전쟁의 휴식기에 접어드는 가을이 되어 철군하고 만다.
다음해 다시 연합군이 만들어진다. 이번에는 작년보다 규모가 더 커져 제노바의 도리아가 이끄는 용병들과 몰타 섬의 성 요한 기사단도 작은 규모이지만 파병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도 총지휘관 자리를 놓고, 의견대립을 보인다. 이번에는 오스트리아의 왕 돈 후안이 총사령관이 된다. 그는 에스파냐의 왕 펠리페 2세의 배다른 동생으로 자신의 입김이 작용할 것을 생각하고 적극 추천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총사령관 자리에 오른 돈 후안은 자신의 업적을 위해 페리페2세의 의견과 달리 하며, 전격적인 출항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레판토 앞바다에서 사상 최대의 해전이 벌어지게 된다.
그리고 5시간의 혈투 끝에 이교도의 주요 지휘관이 모두 죽고, 서유럽 기독교도들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된다.
실로 오랜만에 맞이하는 승리의 기쁨인 것이다. 전투에 참가했던 연합군들은 각기 자신들의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개선식을 벌였으며, 전쟁에 참여했던 지휘관들은 각기 자신들의 고국에서 권력이 향상하게 된다.
물론 이 기독교 연합군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은 건 사실이다. 그리고,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주인공으로 설정한 바르바리고도 이 전쟁의 유일한 기독교연합군의 지휘부의 희생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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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세력은 급격하게 쇠퇴하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승리를 거둔 기독교 연합군의 세력이 확장된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들도 세력이 약화되었다고 한다. 신흥세력인 영국이 신무기와 함께 세력이 확장되었다고 한다.
즉, 지중해의 시대가 끝나고 대서양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라고 한다.
중세 유럽 정세에 영향을 끼친 세개의 전쟁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것이 작가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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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부분에 역자 후기에서 전쟁에 희생된 이들을 애도하고 있다.
나 또한 지금 역사속의 하나의 전쟁을 읽었지만...
전쟁 속의 그들은 전쟁이 현실인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두려워진다.
우리나라는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상태이기는 하지만,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에 살고 있다.
얼마 전에 "태극기 휘날리며"란 영화를 보면서
줄곧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길고 긴 인류 역사에서..
내가 50년만 일찍 태어났으면 나의 삶을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그 영화 속의 주인공이 바로 나였을 거라는 생각에 몸서리 쳐지기도 하였다.
첫댓글 우리 역사만을 공부하면 짜증날 때가 많아요 우리 민족은 허구한날 외세에 당하기만 하며 살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질 않나 이내 조상들을 원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세계사에 눈을 뜨게 되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역사가 보이게 되더군요 근대에 이르러 아시아는 태국만 남겨두고 모든나라가 유럽 아니면 일본의 식민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현실(제국주의 침략)이었으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