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見)과 관(觀)>
(1) 견(見)
‘견(見)’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자기의 의견이나 생각, 주장을 말한다.
생각하며 헤아리고 사물에 대한 견해를 정하는 사상, 주장,
정견(正見), 사견(邪見) 등으로 쓰이지만
일반적으로는 편벽된 견해나 주장과 같이 나쁜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
불교용어로서 견(見)은 일반적으로 보는 것, 보는 힘, 보는 작용,
견해를 말하며, 그 외에 심려(審慮: 심사숙고)하고
결탁(決度: 확인 판단)하는 것, 또는 심려와 결탁을 통해
형성된 의견, 주장을 말한다.
즉, 견(見)의 본질적 성질은 심려(審慮)와 결탁(決度)이다.
그러나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에서는 모두 좋은 의미에서
‘견(見)’은 혜(慧), 반야(般若) 또는 지혜(智慧),
즉 판단작용 또는 식별력의 일종이라고 봤다.
견의 분류에는 2견 · 4견 · 5견 · 7견 · 8견 · 10견 · 62견 등이 있다.
대표적인 분류로는 8견(八見)을 들 수 있다.
<구사론>에 따르면, 견은 유신견(有身見), 변집견(邊執見), 사견(邪見), 계금취(戒禁取),
견취(見取)의 5견(五見) 또는 5염오견(五染汚見: 5종의 그릇된 견해)과 세간정견(世間正見),
유학정견(有學正見), 무학정견(無學正見)의 3정견(三正見)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을 통칭하여 8견(八見)이라 했다.
그런데 여기서 특기할 사항은 <구사론>에 따르면
8정도의 정견(正見)이 세간정견, 유학정견, 무학정견의
3가지로 세분돼 정의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세간정견은 유루혜(有漏慧)에 속하고,
유학정견과 무학정견은 무루혜(無漏慧)에 속하며,
무루혜의 일부라도 성취하면 성자가 된다고 했다.
※세간정견(世間正見)---세속의 정견(바른 견해)을 말한다.
※유학정견(有學正見)---유학(有學:무루지를 성취한 성자)의 정견.
예류자 이상의 경지를 실현한 예류자(豫流者), 일래자(一來者), 불환자(不還者)를
유학(有學)이라 한다.
※무학정견(無學正見)---무학(無學:성도를 모두 성취한 성자)의 정견,
아라한(阿羅漢)은 더 배울 게 없는 위이므로 무학이라 한다. 따라서 아라한의 정견을 말한다.
※유루혜(有漏慧)---무루혜가 성인의 지혜인데 비해 유루혜는 범부의 지혜이다.
※무루혜(無漏慧)---더러운 번뇌와 무명(無明)이 없어지고
공(空)ㆍ무아(無我)의 상주실상(常住實相)을 확실히 깨닫는
지혜를 무루혜라 한다. 모든 지혜 가운데 가장 높은 부처님 지혜가 무루혜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견(見)은 바른 견해인 정견(正見)과
진리에 어긋나는 잘못된 견해인 부정견(不正見), 악견(惡見)
또는 사견(邪見)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좋은 의미의 견은 혜(慧) 작용의 하나로 보며,
팔정도(八正道)의 정견(正見) 혹은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 하겠다.
나쁜 의미의 견은 아견(我見) 혹은 5견(五見)의 경우처럼 신견(身見),
부정견(不正見), 악견(惡見) 또는 사견(邪見) 등
부정적인 의미를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그리고 견과 비슷한 개념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전후 문장의 맥락을 살펴서 파악해야 한다.
• 사(思) - 의도가 있는 생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분별이나 판단의 뜻도 있다.
• 염(念) - 생각이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된다. 망념(妄念)이라고 하면
헛된 생각이다. 기억이나 새김의 뜻으로 사용될 때도 있다.
팔정도의 정념(正念)은 바른 기억이나 바른 새김으로 봐야 할 것이다.
• 상(想) - 어떤 대상을 떠올리는 것이다.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다.
(2) 관(觀)
‘관(觀)’은 자기 생각을 떨쳐버리고 보는 것.
보통 일상적으로 사용할 때는 관(觀)이라는 말 속에는
일관성 있는 생각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본다. 꿰뚫어보는 지혜,
생각을 가지고 현상의 이면과 사태의 미래 전개까지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불교에 있어서 ‘관(觀)’의 의미는 특별하다.
단순히 ‘본다’는 차원을 넘어서 보고, 듣고, 공감하고,
심지어 겉으로 드러난 것을 초월해 본질과 핵심을 꿰뚫어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들고나는 생각을 마음 한자리에 놓고,
무(無)의 상태로 집중해, 산란을 멈추고 평온하게 된 상태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어떤 현상이나 진리를 마음속으로 떠올려 그것을 자세히 주시하되,
관(觀)은 자기 생각을 떨쳐버리고
염(染)이 없는 지혜로써 대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함을 말한다.
본래 ‘관(觀)’은 중국 고전에서는 황새를 의미하는 관(鸛)과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견(見)이 합쳐진 형성문자이다.
그리하여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을 본다는 견(見)의 의미가 아니라
신비의 새라고 할 수 있는 관(鸛)이 들려주는
신령스런 소리까지 듣고 보는 형이상학적 행위를 말한다.
이러한 ‘관(觀)’의 의미를 제대로 보여주는 말로는
관세음보살에서의 ‘관(觀)’을 들 수 있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해서 세상 모든 존재가 토해내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소리를 단지 듣는 것만이 아니라
직접 보고 듣고, 심지어 그 고통을 함께 하며, 해탈에 이르도록 보살펴 준다.
<주역(周易)>에서는 ‘관(觀)할 때’는 몸을 씻고도 감히 두려워
제사를 올리지 못하듯, 그렇게 경건하고 엄숙하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관(觀)’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처럼 경건하고 엄숙하게 하라는 것인가.
그것은 생각이 행동을 만들고 행동이 습관을 만들며,
그렇게 만들어진 습관이 인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관(觀)’에는 본다는 뜻뿐만 아니라
반복된 생각과 행동으로 만들어진 정신의 습관까지 포함하며,
일관성 있는 생각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역사관(歷史觀)이라든가 인생관(人生觀), 세계관(世界觀)이라 하는
경우의 ‘관(觀)’이 그것이다. 그리고 어떤 인생관, 어떤 세계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위가 결정되고,
결국엔 그 사람의 인격과 인생이 결정된다.
그런데 불교에서 ‘관(觀)’은 위빠사나(vipasyna, 毘鉢舍那)의 의역이다.
지관(止觀) 수행에서 지(止) 수행을 통해 마음이 지(止)의 상태에 이르면
자신의 마음속에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스스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관(觀)을 통찰명상(洞察瞑想)이라 하며,
통찰명상을 하면 자신이 그동안 무엇에 마음이 흔들리고 욕심을 부리고 조급해 했는지 알게 된다.
즉, ‘관(觀)’은 대상의 변화를 지켜봄으로써
그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수행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이에 의해 얻은 앎은 자신을 지혜의 세계로 이끌고 간다.
즉, 관(觀)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인 실상(實相)을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위빠사나란 법(法)을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위빠사나를 하기 위해서는 일단 찰나삼매,
즉 순간적인 고요한 마음의 집중을 얻어야 한다.
삼매(三昧)는 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ādhi)의 음사로서
자신의 마음을 보는 지혜가 깊어져서 외부의 어떠한 소리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집중하고자 한 대상에 마음이
일심불난(一心不亂)하게 몰입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사람은 참선삼매,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삼매에 들었다고 말하고,
또는 무아지경에 빠졌다고 한다.
이와 같이 마음을 한곳에 모아 움직이지 않는 것을 정(定)이라 한다.
그리하여 불교에서 지(止)는 정(定)에, 관(觀)은 혜(慧)에 해당한다고 한다.
즉, 지는 주체의 확립, 관은 이 주체의 확립에서 모든 현상을 전체적⋅객관적으로 관찰해
정확히 판단하고 자유로이 대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지관(止觀)은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균등하게 담는
수행법으로서, 지(止)는 멈추어 모든 번뇌를 그치는 것이고,
관(觀)은 자신의 본래마음을 관찰하고,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관심을 가지고 엄밀하게 볼 때,
인생관(人生觀), 가치관(價値觀)과 같은 개념으로 발전한다.
관(觀)의 뜻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견(見)과 견주어 살펴보는 것이 효율적이다.
관이나 견, 모두 보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가까이 있는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을 ‘견(見)’이라 하고,
멀리 있는 것을 큰 눈으로 살피는 것을 ‘관(觀)’이라 한다.
이와 같이 겉으로 나타난 뜻은 같으나 사용에 따라서 다름이 있다.
견(見)은 형체인 모양을 보고, 관(觀)은 그 속의 마음을 본다.
그래서 관(觀)자는 모양 속에 들어있는 근본을 본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견(見)이 바깥에 중심을 둔다면
관은 내면에 보다 집중하는 것이다.
관의 눈이란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고, 견의 눈은 육안으로 보는 것이다.
육안으로 상대를 보면 보이는 것에만 마음이 이끌리고 변화에만 현혹돼
뜻하지 않은 함정에 빠지기 쉽다. 항상 마음의 눈으로 전체를 꿰뚫어보고
상대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마음작용,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일상의 경험에서도 사물을 보는 시각과 안목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을 본다.
눈이 트이지 않고 식견(識見)이 막혀 있으면, 그는 흡사 죽통(竹筒) 속으로 하늘을 보는 것과 같다.
다른 발상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자기보다 더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이용하는 법을 모른다.
이게 어디 세속의 일만이겠는가. 초세간(超世間)을 지향하는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 이제까지 사물을 보던 방식을 확 바꾸어야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안목’이다. 사물과 안목은 둘이 아니다.
사물은 우리의 안목에 종속된다. 삼계유심(三界唯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지 않던가.
이는 사물은 없고 안목만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쉽게 ‘사물’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기실 별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물건 자체는 우리가 눈앞에 드러난 것들을 판단하고,
그것들을 연관시키는 방식의 결과물일 뿐이다.
그러니 <금강경>에서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 했다.
사물을 판단하고 연관시키는 방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사물은 각자에게 서로 달리 나타난다.
<법화경>의 비유에, 같은 물이라도 사람에게는 마실 물로 보이고,
물고기에게는 집으로 보이며, 아귀에게는 피고름으로 보인다고 했다.
망상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멈추어 서서(止), 달리 생각하는 법(觀)’을 닦아야 한다.
멈추어 서지 않으면 망상은 해오던 대로 계속 빠른 속도로 삐꺽대며 굴러간다.
수레바퀴의 동력을 멈추기 위해서는 ‘고요한 곳(靜處)을 찾아 틀어 앉아야 한다(坐禪).’
흐르는 물에 얼굴을 비출 수 없고, 더러운 거울은 사용할 수가 없는 법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다르게 보라고, 제발 다르게 보라고 주문한다.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실제,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함을 조건(照見)함으로써
일체의 고액(苦厄)을 뛰어넘으셨다”고 했다.
이는 조견(照見), 즉 보는 행위가 해탈의 관건이며,
실천의 최상승이라는 것을 역력히 일러주고 있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