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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손 창 섭
통행 금지 사이렌이 울도록 병우 녀석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아무리 밤낮 쏘다니기 좋아하는 녀석이지만, 예비 사이렌이 울기까지는 으레 돌아올 줄 알았던 애다.
“이 녀석이 웬일요. 오늘 밤은 안 돌아올 모양 아뇨?”
“그러게 말예요. 혹시 무슨 사고라도 생긴 게 아닐까요.”
오인성 씨 내외는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중학교 2학년생인, 불과 열다섯 살짜리가, 놀러 나간 채 무단히 귀가하지 않으니 부모로서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가뜩이나 병우는 사고를 잘 저지르는 말썽꾸러기고 보니 더욱 그러했다.
하기는 병우 때문에 오씨 내외가 속을 썩이고 걱정을 하게 된 것은 오늘에 비롯한 일은 아니다. 국민학고 때부터였다. 잠시도 차분히 집에 들어앉아 공부를 하는 일이라곤 거의 없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로 책가방을 아무렇게나 방구석에 휙 집어던지고는, 번개같이 밖으로 달려나가면 으레 어두워서야 돌아오게 마련인 병우였다.
그러기에 녀석은 저녁 식사를 가족들과 한 식탁에서 먹어본 일이 별로 없을 정도다. 대개는 가족들이 상을 물리고 한참이나 있어야, 씨근덕거리며 뛰어 들어와 가지구 부리나케 아귀아귀 퍼 넣고는, 어느 틈엔가 도로 집을 빠져나갔다가 밤이 이슥해서야 돌아오는 나쁜 버릇은 국민학교 4∼5학년 때부터 이미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런 버릇을 고쳐주려고, 오씨 내외는 특히 부인 쪽이 더욱 애가 타서, 여러 가지로 노력해보았지만, 꾸중을 해도, 매질을 해도 혹은 갖은 수단으로 달래보아도, 병우의 천성이 그런지 무가내였다. 개심(改心)했다 싶어도 고작 하루 이틀뿐이었다. 심지어는 방에다 가두고 밖으로 문을 잠가보기도 했으나, 사흘이 채 못 가서, 마치 큰 병이나 앓고 난 애처럼, 입맛을 싹 잃고 전신의 살이 쪽 빠지도록 대번에 몸이 수척해질 뿐 아니라, 얼빠진 사람 모양, 생기없이 축 늘어져버리는 바람에 도리어 부모 쪽이 당황한 나머지 어서 실컷 나가 놀라고 풀어놓아 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부터 병우는 잘 때 이외에는 집에 붙어 있지 않는 애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머리는 과히 나쁜 편이 아니었던지 학교 성적은 항시 중 이상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어른들은 그것만이라도 다행으로 여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에 있었다. 국민학교 상급생이 되면서부터 병우는 나가다니면서 차츰 사람을 치는 못된 버릇을 배우게 된 것이다. 그 증거로는, 병우에게 얻어맞아 상처를 입은 아이를 그 보호자가 데리고 와서 강경히 항의를 하는 일이 종종 있었던 것이다. 그때마다 오씨 내외는, 물론 정중히 사과를 하고, 상처가 심할 경우에는 치료비까지 부담하였지만, 부인과는 달리 오씨는 병우를 별로 나무라지 않았다.
“애들하고 좀 싸웠다고 그 앨 너무 윽박지르지 말아요. 지각이 있다는 어른들도 걸핏하면 맞붙어 싸우기가 일쑤인 요즘 세상에 애들이 어떻게 싸움을 안 하고 지낼 수가 있겠소.”
병우를 꾸짖는 부인을 오씨는 이렇게 탓했을 뿐받 아니라,
“어쩌다 싸우는 건 할 수 없다 쳐도, 번번이 남을 때려서 상철 입히니 걱정 아녜요. 그러다 사람 치는 게 재미가 들어 깡패라도 되어버림 어떡한단 말예요.”
부인의 이런 걱정에도,
“괜찮아요. 주먹이 세다고 다 깡패가 되는 건 아니니까. 사내자식이란 어려서부터 딴 애들에게 만날 얻어나 맞고, 비실비실 피해 다니게 돼선 못써요. 아이 적부터 상대가 어떤 놈이든 비위에 거슬리면 때려눕힐 만한 실력과 자신을 길러둬야 하는 거요.”
도리어 이렇듯 애보다도 한술 더 뜨는 오씨 였다.
지나치게 엄한 조부와 부친 슬하에서 기를 못 펴고 성장한 탓인지, 오씨 자신은 유소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누구와 주먹다짐을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소심하고 패기가 없어, 항시 남에게 눌려서만 살아온 것이 한이 되고 보니, 내 자식만은 이런 무기력한 아비를 닮지 말고, 배짱도 있고 주먹도 센 놈이 되어주기를 은근히 바라온 씨라, 무리도 아니었다.
그만큼 완력, 권력, 금력에는 인연이 먼 오씨는, 40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오직 무력하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갖가지 억울한 일들이 골수에 사무쳐 있었으므로, 우선 사람이란 주먹부터 세고 봐야겠다는 것이 씨에게 있어서는 굽힐 수 없는 지론이었던 것이였다. 더구나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까운 한국 사회에 있어서는, 힘(여러 가지의 미의) 없는 사람은 만사에 죽어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니 그럴 만도하다.
특히 씨가 자식 놈에 대해서 흡족히 여길 수 있었던 것은 병우는 저보다 작고 약한 아이들을 괜히 못살게 건드리거나 때리는 일이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밖에서 싸우는 현장을 목격하거나, 얻어터져가지고 보호자에게 끌려온 놈을 보더라도, 상대는 으레 병우보다 덩치가 큰 놈이었다.
약자를 농락하고 들볶는 짓는 소인의 비겁한 소행이라 하겠지만, 저보다 센 놈과 대적해 싸우는 경우에는 대개 참을 수 없는 의분과 용기가 필요한 법이라, 무작정 비난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오씨는 병우가 만일 저보다 작고 약한 아이들을 마구 건드린다면 단단히 꾸짖고 타이를 생각이지만 저보다 크고 센 놈하고는 아무리 싸우고 두들겨 맞거나 상대방에 상처를 입힐지라도 과히 탓하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자식에 대한 오씨의 이러한 태도는, 자연 가뜩이나 과격한 병우의 성격과 생활을 더욱 조장하는 결과가 되어서, 중학교에 들어가서부터는 학교 성적도 나쁜데다가 잭나이프 같은 것을 숨겨가지고 다닌다든가, 중과부적인 때는 그것을 마구 휘둘러서 여러 명에게 창상을 입히는 일조차 있었으므로, 오씨로서도 더 이상 관용을 베풀 수는 없어서, 몇 번인가 불러 앉히고 엄하게 책망을 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병우의 거칠어가는 생활은 이미 부모의 잔소리나 단속으로 시정될 단계는 지난 탓인지, 혹은 부모의 눈을 피해가며, 혹은 부모에게 반발해가면서까지, 저 하고 싶은 짓은 다 하고 돌아다니는 눈치여서 그렇지 않아도 오씨 내외는 병우 문제로 요즘 와서 부쩍 걱정이 더해졌던 참이다.
그러던 차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통금 시간이 지나도 병우가 돌아오지 않으니, 부모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쏘다니다가 시간이 늦어서 부득이 친구네 집에서라도 자고 온다면 또 모르지만 걸핏하면 상대 여하를 막론하고 싸움을 잘 걸다 보니 자연적이 많을 것이라, 혹시 복수를 노리던 여럿에게 몰매라도 맞고 기절해서 길가에 쓰러져버리지나 않았을까 생각하면 오씨 내외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12시가 훨씬 넘은 지금, 허턱 찾아 나가볼 수도 없는 노릇이요, 그들 내외는 잠 한숨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다.
“아무튼 난 출근을 할 테니 그 녀석이 돌아오든지, 무슨 소식이라도 있건 곧 알려줘요.”
부인에게 일러놓고, 보림 여자 중고등학교의 서무과 직원인 오씨는 일단 출근을 했으나,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10시 가까이 되어서다. 사환애가 오 선생님 전화예요, 하기에 옳지 아내에게선가보다 싶어, 씨가 얼른 전화를 받아보았더니, 웬 낯선 남자의 음성으로 당신이 오인성 씨냐고 물었다. 오씨가 그렇다니까, 전화의 목소리는 그러면 오병우의 부친이 틀림없느냐고 재차 묻는 바람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댁은 누구십니까? 그리고 우리 병우가 어떻게 됐습니까?”
어리둥절한 가운데 거푸 반문했더니, 상대방은 의외에도 ○○경찰서 수사계라면서 댁의 아들을 지금 여기에 보호 중인데, 곧 좀 서로 와달라는 것이었다. 오씨가 깜짝 놀라서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고 되잡아 물어도 상대방은 와보면 알 거라면서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필시 남의 애라도 때려서 심한 상처를 입히고 서에 연행 되었으려니 정도로 여기고 급히 ○○경찰서를 찾아간 오씨는 병우가 단순한 폭행 치상 혐의가 아니라 뜻밖에도 금품을 강탈한 노상강도의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소년 문제 담당 주임 형사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오씨는, 그만 눈앞이 아찔해져서, 한참이나 눈을 지그시 감고 한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있었다.
형사의 설명에 의하면 병우는 어젯밤 으슥한 골목에서 모 고등학교 1학년생을 협박하고 현금 700원과 손목시계 한 개를 뺏아가지고 도주하다가 마침 순찰중이던 형사에게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사실을 밝히고 난 형사는, 오씨네 가정 환경과, 병우에 대한 가정 교육의 방침과, 병우의 성격 및 평소의 소행, 취미, 장점과 단점, 교우 관계 등에 대해서 세밀히 캐물었는데, 오씨는 마치 자기 자신이 범행을 저지르고 취조라도 받듯이 굳어진 채 떨리는 음성으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형사는 연방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 대답의 요점을 메모하고 나서,
“줄창 쏘다니며 싸움하기 좋아하는 걸 방임해두셨다는 건, 분명히 큰 실수였군요. 더구나 그 교우 관계에 너무나 무관심하셨다구요. 어땠든 앞으로 감독을 철저히 하셔야 하겠습니다.”
사뭇 걱정이 된다는 표정이었다.
오씨는 자식 놈이 이런 엉뚱한 과오를 범하게 된 것은, 오로지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면서 수없이 머리를 숙인 다음,
“차후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제가 책임지고 철저한 감독과 엄한 지도를 하겠습니다. 그러니 그 녀석의 장랠 생각해서 한 번만 관대한 처분을 내려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부탁입니다. 부탁예요.”
울먹이는 소리로 애원하듯 했다.
형사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한동안 말없이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2 대 1이긴 하지만 자기보다 큰 놈을 맨주먹으로 협박 끝에 금품을 강탈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배짱이 대단한 상습적인 소년범이거나, 아니면 배후에서 사주해온 강력한 주모자가 따로 있지나 않나 하는 점에서 예의 추궁을 해보았지만, 그런 증거는 잡을 수 없다는 점, 엄연한 학생이라는 점, 가정 환경이 나쁘지 않다는 점, 학교의 성적은 좋은 편은 아니나 출석률은 나쁜 편이 아니라는 점, 그러니
평시에 주먹에 자신을 갖고 있었으므로 일시적인 지나친 호기심과 그릇된 영웅심에서 순간적으로 저지른 범행 같다는 점, 그리고 이 사실이 부모와 학교에 알려질 것을 겁내고 벌벌 떨면서, 진심으로 과오를 뉘우치는 빛이 있었으므로, 보호자가 정말 책임을 진다면 이번만은 특별히 훈계방면키로 할 테니 앞으로는 가정에서 좀더 적극 선도해달라는 담당 주임 형사의 말을 들으며 오씨는 수치와 자책과 감격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연방 훔치기에 바빴다.
잠시 후, 오씨는 신병 인수서에 서명날인한 다음 병우 녀석을 데리고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에도 자식 놈에게 말 한 마디 건넬 기력과 여유가 없었다. 내 자식이 강도질을 하다니 하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오인성 씨는 자식에 대한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전과는 딴판으로 사사건건이 간섭을 했고 엄격해진 것이다.
씨는 우선 병우의 일과표를 손수 작성해주었다. 기침 시간에서부터, 등교 시간, 하학 후의 귀가 시간, 학습 시간, 자유 시간, 그리고 취침 시간에 이르기까지, 세밀히 계산을 해서 기입했고, 비록 자유 시간일지라도 대개는 집 안에서 주로 놀도록 하되, 밖에 나가 놀 수 있는 시간은 저녁 식사 후 40분뿐이었는데, 그 경우도 반드시 어디 가서 누구와 함께 놀다 오겠다는 사전 승낙을 받게끔 만든 것이다.
한편 이 규율을 엄수하면 하루에 10원씩 계산해서 상금을 주고 만일 규율을 어기는 때는, 한 번 어기는 데 대해서 한 끼씩 밥을 굶기고, 그것이 거듭될수록 딴 방법의 엄한 벌을 가중하기로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규율을 병우는 불과 한 주일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첫째로 하학 후, 귀가하는 시간이 늦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교내 운동 서클인 유도부에 들어 있었던 병우는 그 모임과 연습 때문에 늦어졌다면서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저녁 식사 후의 자유 시간을 이용해서 외출했다가는 10시가 넘도록 안 돌아오는 일이 많았고, 그렇다고 꾸중이 심해지면 일단 집에 돌아와서 자기 방에 들어가 공부하는 척하다가 어느 틈엔가 담을 타고 넘어서 몰래 빠져나가버 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벌칙대로 밥을 굶겨도 보았지만, 친구네 집에라도 가서 얻어먹는지 보통으로 여겼다. 도리어 하루 한 끼씩은 집에서 먹지 않을 테니 그대신 맘대로 나가 늘게 해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오씨는 생각다 못해 학교의 유도부는 그만두게 하고 저녁 식사 후에는 씨 자신이 마치 감시병처럼 병우를 지키기로 했다. 그래도 신통한 효과는 없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가며 학교에서 늦게 돌아오기는 매일반이었고, 밤에는 변소에 가는 척하다가 곧장 밖으로 도망쳐버리거나 심지어는 씨가 변소엘 가든지 잠시 딴 데 정신을 파는 사이에 후닥닥 집을 뛰쳐나갈 만큼 병우는 노골적인 태도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는 회초리를 장만해놓고, 멍이 들고 피가 내번지도록 종아리도 쳐보았지만, 막무가내였다. 병우는 흡사 외출증이나 옥외 배회증이란 병이라도 있어서 거기에 걸린 사람 같았다.
하도 속을 썩이던 나머지 오씨는 아들놈을 붙들고 훌쩍훌쩍 울면서, 네가 아비 어미를 말려 죽이려느냐고 사정도 해보았는데 그때만은 병우도,
“아버지, 용서해주세요.”
하고, 방바닥에 엎뎌져 엉엉 소리 내어 울기에,
“네가 그처럼 잘못을 뉘우칠 줄 안다면, 이제부터라도 제발 좀 맘을 바로잡아 규율 있는 생활을 해주려무나.”
졸라보았지만 병우는 눈물을 닦고 일어나 앉아 괴로운 표정으로 한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전, 저 자신을 맘대로 할 수 없어요. 정말예요, 이젠 어떻게도 할 수 없어요.”
이러고 다시 쿨쩍거리기 시작했다. 이 말을 들은 오씨는, 마약 중독자가 아무리 맘을 굳게 먹어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말과 비슷한 뜻으로 해석하고, 부인과 함께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쉴 뿐, 당장은 무어라고 대꾸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병우가 저렇게까지 자신의 그릇된 생활 태도를 반성하고 괴로워하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걸 보니, 천성이 그런데다가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 생활이 이미 몸에 깊이 밴 모양이라, 단시일에 시정할 도리는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장기전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각오한 오씨는, 자연 아들에 대한 감독을 좀 늦추게 되었는데, 그러고 보니, 병우의 생활은 나날이 더욱 무질서해지고 거칠어만 가는 것 같아서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부모의 심정이었다.
집에 돌아오나 직장엘 나가나 아들의 일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오씨는, 신문이나 라디오 같은 데서 불량소년 문제가 다루어지면 빼놓지 않고 읽고 들었고 한편 여자 중고교에 직장을 갖고 있느니 만큼, 불량기 있는 아이들을 다루는 훈육 선생들의 태도에 비상히 관심을 모아왔는데, 한번은 탈선 행위로 자주 말썽거리가 되어 온 한 학생의 퇴학 문제를 놓고 열렸던 직원회의를 마치고 나온 훈육 주임과 얘기를 나누던 끝에, 오씨가 아들놈의 얘기를 슬쩍 비치고 걱정을 했더니,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온 가운데서 특히 불량 소년 소녀들을 조사해보면, 그 대부분이 좋지 못한 교우 관계에서 온 경우가 많으니, 그 점을 잘 알아보고 나쁜 친구가 있으면 멀리하고, 좋은 친구와 사귀게 해주라는 말이 유난히 가슴에 박혔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병우 일로 경찰에 불려 갔을 때, 주임 형사가 교우 관계를 잘 살피라고 한 말이며 신문이나 라디오에서 불량 소년 문제가 취급될 때도 흔히 교우 관계에 대한 말이 나오던 것이 생각나서, 역시 그 점에 너무 무관심해왔음을 깨닫고, 오씨는 그로부터 병우의 교우 관계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세히 캐보기 시작한 것이다.
오씨는 자신의 중학교 시절을 회상하고, 그 당시 가장 다정하게 지내˙던 진구들의 얘기를 들려준 다음 지내놓고 보면 역시 중학교 때 허물없이 사귀어 놀던 친구들과의 일이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면서, 병우더러도 가장 가까운 친구가 몇이나 되느냐, 누구누구냐고 넌지시 물어보았지만, 별로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없다면서, 그 문제에 대해서 병우는 이상히도 명확한 대답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 병우는 국민학교 상급반 때부터, 친구를 집에 데리고 오는 일이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동네에서 친구들과 얼려 노는 것을 본 기억조차 오씨에게는 별로 없었다. 그러면서도 병우는 집에 붙어 있는 일이라곤 거의 없이 줄창 밖으로만 쏘다녔는데, 도대체 누구와 어디에 가서 무슨 짓을 하며 노는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에 더럭 의심이 커지기 시작한 오씨는 직접 병우를 통해서가 아니라 병우의 국민학교 때 동창생들을 갖은 수단으로 이용해서 병우가 주로 어떤 애들과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며 노는지를 알아보았는데, 그것도 두세 애만 가지고는 요령부득이어서 한 달여를 두고 10여 명에 달하는 동네 아이들을 끈기 있게 접한 끝에, 씨가 겨우 그 윤곽을 포착해낸 병우의 교우 관계란 이런 것이었다. 즉, 병우와 국민학교 동창생 가운데 ‘장대’ 라는 별명을 가진 장대식이라는 아이가 있어서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벌써 자기 반에서 뿐만 아니라, 전교에 아무도 적수가 없을 만큼 무서운 아이로 알려져 있었는데 당시부터 장대는 주먹깨나 쓴다는 애들만 골라서 부하를 삼았으며, 병우도 그 당시 장대의 심복이었으니까, 지금도 장대 패에 섞여 다닐 것이라는 얘기다. 이만한 사실도 주위에서 잘 모를 만큼 장대 일파는 놀랍도록 비밀히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
오씨는 내친겉음에 장대식이라는 아이의 집을 알아냈고, 동네 노파들의 입에서 그의 가정 내막까지 얻어들을 수가 있었다. 장대식은 늙은 외조모와 40쯤 되었을 어머니와, 성이 다른 형과 네 식구가 비교적 깨끗한 판잣집에 살고 있었는데, 그 어머니는 근처의 시장 모퉁이에서 조그만 대폿집을 경영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런 조사를 오씨가 내막적으로 진행하고 있을 무렵에 하루 저녁은 병우가 또다시 한쪽 손에 붕대를 감고 창백한 얼굴로 돌아와서는 어른들에게 외면한 채, 말 한 마디 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수상하게 생각한 오씨 내외는 병우를 안방으로 좀 건너으라고 불렀다. 그려나 병우는 대답도 하지 않았고, 아무리 불러도 건너오려고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어른들 쪽에서 병우 방으로 건너가 보니 병우는 핏기 없는 얼굴로 얼빠진 사람 모양 멍청히 앉아서 한쪽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씨 부인이 먼저,
“얘야, 너 또 웬 손을 다쳤느냐?”
걱정스레 물으며 붕대가 감긴 오른손을 만져보려니까, 병우는 불시에 으흑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동시에 어머니 무릎 위에 푹 쓰러져 엉엉 몸부림치며 울기 시작했다.
오씨 내외는 영문을 몰라 불안한 얼굴로 마주 보고 나서, 아들놈을 간신히 달래어 일으켜 앉히고 봉대를 끌러보았더니, 끔찍하게도 새끼손가락 끝마디가 절단되어 있었다. 오씨 부인은 숨이 막혀 몸을 부들부들 떨며 한동안은 말도 하지 못했고, 오씨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어찌 된 일이냐, 이게? 응, 손가락이 왜 이렇게 됐어, 왜?”
다급히 사유를 캐물었다. 그래도 병우는 좀처럼 입을 열려 하지 않다가,
“이놈아, 너 장대 일파와 몰려다니며 행팰 부리더니 종래 이 꼴이 됐구나. 이 녀석아, 이러다가 나중엔 뭐가 될래, 징역살일 할 테냐, 징역살일?”
고함을 지르니까, 그제야 병우는 장대 일파란 말에 놀란 듯이 부친을 돌아보고,
“알고 계셨군요.”
힘없이 말했다.
“내가 모를 줄 알았니? 죄다 알고 있다. 네놈들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죄다 알고 있단 말야.”
오씨는 이렇게 넘겨짚고 나서,
“네가 한시바삐 그놈들과 손을 끊지 않으면 손가락 한 개나 징역살이 정도가 아니라, 네 몸뚱이가, 아니 언제 누구 손에 무슨 변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놈아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겠느냐.”
닦아세웠더니, 병우는 마침내 체념한 듯, 호소하듯 그러나 주저주저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병우가 대식의 부하로 점 찍히게 된 것은 국민학교 5학년 때였는데, 어느 날 대식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슬그머니 병우를 불러가지고, 병신 같은 것들 가운데서 그래도 너만은 쓸 만해서 골랐으니, 오늘부터 내 꼬봉이 되라고 했을 때, 병우는 감히 거절할 용기도 없었거니와, 한편으로는 영광으로 생각하고 우쭐하기조차 했다는 것이다.
병우는 대식의 명령대로 부하가 될 것을 응낙했더니, 대식은 호주머니에서 손칼을 꺼내어 그 끝으로 자기의 오른쪽 무명지 끝을 1센티 가량 짼 다음, 거기서 나오는 피를 병우더러 빨아먹으라고 했다, 병우는 어쩔 줄 몰라 쩔쩔매다가, 재촉을 받고야 할 수 없이 하라는 대로 했더니, 이번엔 병우의 오른손을 끌어다가 칼끝으로 역시 무명지 끝을 1센티쯤 째고, 거기서 흐르는 피를 대식이가 쭉쭉 빨아먹었다. 그리고는 위압적인 목소리로,
“우린 이제 남이 아니다. 피를 나눠 먹었으니 부모나 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사람이다.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헤어져도 안 되고, 배신을 해도 안 되고 우리의 비밀을 지켜야 한다. 알았니?”
이렇게 다짐을 했고, 병우는 겁에 질려 떨리는 음성으로 겨우 알았다고 대답했다. 대식은 그만큼 아이들에게 미치는 ‘힘’의 영향력이 컸다. 그렇다고 그가 반드시 몸집이 남보다 크다거나, 여력(臂力 : 완력(腕力))이 과인한(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것도 아니건만 그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위압하는 무서운 기백 같은 것이 있었다. 실지가 대식이보다도 덩치가 크고 뚝심이 센 놈도 감히 대식이에게는 덤비지 못했고, 멋모르고 붙었다가도 대번에 야코(‘콧대’ 를 속되게 이르는 말)가 죽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한 대식이었지만 함부로 까불거나 괜히 남을 못살게 건드린다든지 들볶는 일은 거의 없었고, 성적도 중 정도였으며, 평시에는 눈에 띄지 않을 만큼 평범한 아이였다. 다만 웃는 낯을 보이는 일이 없는데다가 말수가 적고, 대개는 저 혼자서 탐정 만화나 소설 같은 것을 탐독하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그 중에서도 「홍길동진」은 그가 가장 애독하는 책으로서, 거의 암송하다시피 했는데, 한번은 선생님이 반 애들에게 커서 어떤 인물이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대식은 서슴지 않고,
“전 홍길동 같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해서 선생님을 웃기고, 반 아이들을 놀라게 했을 정도였다.
그러한 대식은 주먹깨나 쓰고, 좀 괄괄한 애들을 거의 자기 수중에 넣고 있었는데, 결코 부하 전원을 한자리에 집합시키는 일은 없었다. 네댓 명씩을 단위로 여러 개의 조(組)를 편성해놓고, 날짜와 시간을 조마다 따로따로 배정한 다음, 그 한 조씩만 이끌고 한강변 모래사장이나, 근교의 산록이며 들판 같은 데 나가서, 달리기, 씨름, 유도, 권투, 당수 연습과 흉내로 심신을 단련시키는 것이었다.
대식은 부하들에게 세 가지의 엄명을 내리고 있었다. 첫째는 자기의 명령에 불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 둘째는 자기들의 관계를 아무에게도 부모나 형제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것, 셋째는 시간이나 그 밖의 약속을 엄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만일에 이 지시 사항을 어기면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밖에 더 무서운 사실은, 일단 대식의 부하가 된 이상은 아무도 그와 임의로 인연을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를 배반하고 돌아서는 놈은 반드시 죽여 없애고야 말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두려워서 병우는 지금까지 장대패에서 발을 빼지 못하고 오늘까지 질질 끌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1년 전까지만 해도, 그저 괜히 까불고 다니거나 재고 다니는 애들을 때려주자는 명령이 고작이었으나, 얼마 전부터는 마차나 트럭 위에 날쌔게 뛰어올라, 거기에 싣고 가는 물건을 훔쳐내라는 지시를 내리더니 최근에 와서는 반반하게 차리고 다니는 돈푼이나 있어 보이는 중고교생을 협박해서 현금이나 시계나 만년필 같은 것을 강탈하라는 명령이 내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것들을 훔치고 빼앗아서는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는 게 목적이라고 하지만, 병우로서는 차마 남을 치고 금품을 강탈하는 짓까지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마침내 결심하고 딴 짓은 다 명령에 복종하지만 그 명령만은 복종할 수 없다고 거절했더니, 명령에 불복한 본보기라면서 이렇게 새끼손가락을 썩둑 끊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대략 이런 경위를 병우에게서 듣고 난 오인성 씨는 어이가 없는 가운데도, 대식이란 놈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병우에 대해서까지 치솟는 분노를 금할 수가 없었다.
“이 병신 같은 녀석아, 그래, 그 지경을 당하고도 잠자코 돌아왔어. 당장에 그놈의 손가락을 같이 잘라주고, 다신 너 같은 놈 상댈 않겠노라고 절교를 선언하고 오지 못해.”
“아버진 몰라서 그래요. 장대는 정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애예요.”
“말론 그러지만 제 놈이 정작 사람을 어쩔 테냐.”
이러긴 했지만, 오씨는 내심 찔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병우의 태도가, 대식이 능히 사람을 죽일 수 있으리라고 너무나 굳게 믿고 있는 표정이었을 뿐 아니라, 자기의 명령을 거역했다고 해서 이토록 잔인하게 남의 손가락을 잘라버리는 놈이라면 과연 어떤 무서운 짓인들 못할까 겹도 났기 까닭이다.
“아네요, 그 앤 무서운 애예요.”
공포에 찬 얼굴로 몸을 부르르 떨며, 병우가 혼잣말처럼 다시 중얼거리는 말에,
“그런 악독한 놈을 그냥 둬. 당장 경찰에 고소해서 잡아넣고 말아야지.”
오씨는 쏘아대고 나서, 병우의 손가락을 이렇듯 무참히 찍어버린데 대해서나, 병우를 불량 조직에 묶어놓고 놓아주지 않을 뿐 아니라 절도와 강도질까지 강요하는 행위에 대해서나, 정말 그놈을 고소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대체 누가 그 앨 걸어서 고소해요?”
“누구라니. 이 지경이 되고도 가만있을 테냐. 내가 하지, 내가 고소하마.”
오씨는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안 돼요, 안 돼요, 그건 안 돼요.”
병우는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내저으며 외쳤다. 오씨가 만일 대식이를 고소하게 되면, 병우와 오씨는 반드시 그들 일당의 손에 귀신도 모르게 죽게 되리라는 것이다.
“두목이 들어갔는데 설마 밑엣놈들이 그렇게까지 나올 수 있겠느냐?”
“아녜요, 건 아버지가 몰라서 그래요. 몰라서 그래요.”
병우는 절망적인 어조로 중얼댔다.
“그렇지만, 누가 고소했는지 모를 거 아니냐? 경찰에 부탁해서 비밀히 해달라면.”
“왜 몰라요. 결국은 다 알게 될 덴데, 꼬붕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꼬봉들 중엔 장대를 위해서 목숨이라도 바치려는 놈이 수두룩하니까요. 그리고 장대가 풀려나와가지고, 잠자코 있겠어요?”
대식을 고소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장대 일파에 대해 완전히 공포증에 걸려 있는 병우와 더 얘기해봤자, 그 앨 일층 불안케 하고 흥분시키는 결과밖에 안 되겠으므로 다행히 상처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왔기에 그대로 푹 쉬게 해주고, 오씨는 겁에 질려 혼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는 부인을 재촉해가지고 안방으로 건너와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 사건을 이대로 넘겨버릴 수는 도저히 없었다. 후환이 두려워 내버려둔다면 병우는 언제까지나 그들의 깡패단에서 발을 빼지 못할 테니, 전도를 완전히 망치게 될 뿐 아니라, 어떤 무서운 비극을 초래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그래서 오씨는 결심하고, 병우에게는 물론 부인에게도 몰래 ○○경찰서의 소년범 담당 주임 형사를 찾아가서, 병우가 당한 일을 낱낱이 털어놓고, 장대식을 고발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내놓고 나서, 병우의 말대로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실수였는가를 오씨는 마침내 깨닫게 되고야 말았다.
오씨가 경찰서를 다녀온 이튿날 저녁 때였다. 마침 가족들이 저녁상을 받고 있노라니까, 별안간 병우가 얼굴색 이 새까맣게 죽어가지고, 흥분해서 뛰어 들어오는 길로,
“아버진 너무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너무해요. 배신자예요. 왜, 왜, 장댈 찔러 넣었어요? 네, 왜 고솔 했느냐 말예요. 이젠 난 죽어요. 난 죽는단 말예요. 아버지 때문에 난 죽는 거예요. 그렇다고 아버진 무사할 줄 알아요? 아버지도 결국 복술 당하고 말 거예요. 아버진 바보예요, 바보, 바보…….”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펄펄 뛰는 것이었다.
“병우야, 얘야, 좀 진정해라, 진정해. 이러지 말구 우리 찬찬히 얘기 해보자.”
오씨 내외가 사정하듯 아무리 붙들고 달래어도, 병우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점점 더 격앙해가지고,
“난 죽어요, 죽는단 말예요. 내가 경찰서에 쫓아가서 아버지가 한 말은 전부 거짓말이라구 하구 아무리 장대를 변호해주었지만, 그래도 걔들은 날 용서해주지 않을 거예요. 날 배신자로 단정하구, 걔들은 저희들끼리 복수 계획을 짜구 있어요. 아버지와 난 영락없이 걔들 손에 죽어요. 며칠 못 가서 죽는단 말예요. 며칠이 뭐예요. 난 낼 안으르 없어질 거예요. 낼 안으로……그럴 바엔, 난 내 손으로 죽을 테야요. 차라리 내 손으로 자살해서 ˙배신자라는 억울한 죄값을 할 테예요. 난 나쁜 놈예요. 장댈 배신한 난 정말 나쁜 놈이란 말예요. 그러니까 난 죽어야 해요. 당장 죽어 없어져야 해요. 칼, 칼 어딨어요.”
병우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르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제정신이 아닌 듯 대뜸 부엌으로 뛰어가는 것이다.
“얘, 이놈아.”
소리를 지르며 금시 오씨가 쫓아나가 두 팔로 아들을 얼싸안았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병우는 정말 식도를 찾아 들고 무슨 끔찍한 짓을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날 밤, 오씨 내외는 병우를 지키고 앉아 밤을 새우다시피 했는데, 사태가 이쯤 되고 보니 까딱하면 과연 어떤 엉뚱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터라, 오씨 자신도 차츰 겁이 났으므로,
“병우야, 내가 너 꼴래 대식일 고발해버린 건 실수였다. 내, 내일 아침 일찌감치 경찰에 찾아가서, 내가 잘못 알고 고소한 것이라고 충분히 해명을 하고, 대식일 데려올 테니 안심해라.”
이런 말로 병우를 열심히 달랬다. 그제서야 병우는 다소 흥분이 누그러져서,
“그렇다고 장대가 우릴 용서해주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렇게 해주신다면 복수를 당해도 한이 없겠어요. 그리구 한 가지만 더, 아버지가 대식을 만나서 꼭 사과해주세요.”
겨우 병우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게끔 된 것이다.
이튿날 아침, 꼭 중병을 치르고 난 사람처럼 하룻밤 사이에, 몰라보게 수척해진 병우 곁을 잠시도 떠나지 말고 지키라고 부인에게 일러놓고, 오씨는 분주히 집을 나섰다. 그러자 15, 6세짜리 웬 소년이 두 명, 골목 모퉁이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씨가 모르는 체하고 골목을 빠져나가 한길 쪽으로 꺾으려니까, 그중 한 놈이 슬그머니 따라오다가,
“명우 아버지죠?”
물었다.
“그렇다, 넌 누구니,”
“병우 친구예요.”
그러고도 그냥 따라오기에 오씨는 기분이 좋지 않아서,
“난 지금 대식일 데려 내오려고, 경찰서에 가는 길이다.”
일부러 그걸 밝히고 돌아서려는데,
“대식인 벌써 풀려나온 걸요.”
소년은 비웃듯이 대답하였다.
“그래, 언제?”
“어젯밤 늦게요.”
뜻밖의 대답이어서 오씨는 머쓱해지며 맥이 탁 풀렸다.
오씨가 가서 사정을 해서 데려 내온 것이 아니라 저절로 풀려나왔다면 일은 더욱더, 오씨 부자에게 불리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이왕 나섰던 걸음이니, 그것이 사실인지도 알아볼 겸, 오씨는 그 길로 경찰서에 찾아가보았다.
낯이 익은 주임 형사는 오씨에게 의자를 권하고 나서 병우가 급히 찾아와가지고, 자기 손가락은 절대로 대식이가 자른 것이 아니고, 담력 내기를 하다가 제 손으로 찍었다면서, 자기가 줄창 대식이와 얼려 놀러만 다니고 공부를 안 하니까, 아버지가 홧김에 오해한 나머지, 이번 일은 모든 것을 아버지가 잘못 말한 것이니 아무 죄도 없는 대식이를 놓아달라고 필사적으로 졸라대는 것을 보니 댁의 아들과 대식이와의 관계는 보통 사이가 아닌 모양이더라고 의미있게 말한 다음, 한편 즉시 뒷조사를 해보았지만 아직은 대식이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객관적인 증거를 잡을 수가 없었으므로 잘 타일러서, 출두한 자기 어머니를 따라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형사는 다시 말을 이어, 그렇지만 대식이 경찰서에 끌려와서도 조금도 겁을 집어먹거나 당황해하지 않고, 시종일관 침착한 태도로 신문에 응하는 것이라든지, 어딘가 영악해 보이는 눈치라든지, 그리고 좋지 못한 가정 환경으로 보아서 족히 우범 소년이 될 수 있다면서 하루 속히 병우로 하여금 그 애와의 접촉을 끊게 하고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런 말을 듣고 돌아오는 오씨는,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걱정이 되고 겁이 났다. 형사가 저럴 적에는 대식이란 애는 병우가 말했듯이 정말로 무서운 놈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느새 그놈은 벌써 부하를 보내서 오씨네 집 동태를 살피게 하고 있지 않은가.
오씨가 집에 돌아왔을 때도, 아침과는 다른 소년이 한길 건너편에 은신하고 오씨네 집 쪽을 여전히 지켜보고 서 있었다. 씨는 전신에 찬물을 끼얹듯이 소름이 오싹 돋았다.
방 안에 들어서는 길로 오씨는,
“병우야, 일이 무사히 됐다. 알고 보니 그런 게 아니라고 취소시켜달라고 사정을 했더니, 그렇다면, 딴 범행을 한 뚜렷한 증거도 없으니, 데리고 가라고 대식일 내보내주더라. 그래서 그 애를 집에까지 데려다주고 나서 이번 일은 내가 내용을 모르고 그랬으니 용서하라고 충분히 사과도 했다.”
이렇게 거짓말로 아들놈을 일단 안심시켜 주었다.
“그러니까 뭐래요?”
“뭐라긴, 알았습니다. 그러더군.”
“나보구 오라구 안 그래요?”
“음, 널 좀 보내라구 하더라. 그러나 상처의 출혈이 의외로 심해서 빈혈증으로 누워 있기 때문에 2∼3일간은 외출을 못할 테니, 그리 알라고 잘 일러놓고 왔다.”
“무섭죠, 그 애?”
“으, 음. 정말 독하게 생겼더군.”
이런 식으로 돌려대고 나서, 오씨는 부인과 함께 한편으로는 병우를 피신시킬 계획을 짠 것이다. 두 사람은 의논 끝에, 진주에 있는 저희 이모네 집에 우선 병우를 보내놓고, 차차 학교도 그리로 전학을 시켜버리자는 데 합의를 보았다.
이렇듯 대책이 선 이상, 시일을 끌면 그만큼 더 불리할 뿐이니 하루라도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오씨 내외는 병우를 설득시켜가지고, 그날 밤으로 단행하기로 한 것이다. 오씨 부인이 아들을 데리고 밤차로 서울을 떠나기로 하고, 장대 일파에게 눈치채이지 않게 뒷담장을 넘어서 딴 길로 집을 빠져나가버렸다.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어서 오씨 부인은 무사히 병우를 진주 언니네 집에 맡겨 놓고 사흘 만에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뒤부터였다. 병우가 집을 떠나면서 걱정했듯이, 장대 일파의 복수의 손길은 차츰차츰 오씨에게 집중되기 시작한 것이다.
오씨 부인이 진주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날 저녁 무렵이었다. 밖에서 병우를 찾는 소리가 나기에, 오씨는 이상한 예감에 가슴을 두근거리며 나가보았더니, 바로 장대식이가 대문 밖에서 버티고 서 있었다. 대번에 장대식임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빈구석이라곤 없이 야무지게 생긴 소년은, 쥐 눈처럼 조그맣고 새까만 눈이 유난히 반짝반짝 빛났다. 영롱하다거나 총명한 것과는 달리, 그것은 표독하다거나 영악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날카로운 광채를 뿜고 있는 눈이었다. 그 눈에서 오씨는 부지중 살기를 느끼고 몸서리가 쳐졌다. 첫눈에 역시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다. 소년은 두 손을 잠바 주머니에 찌른 채, 머리를 꾸뻑하고 나서 태연히,
“병우 있어요?”
물었고, 오씨는 얼떨결에, 없는데요, 소년은 누구요, 할 뻔하다 말고,
“병운 집에 없는데, 너 누구지?”
하고, 간신히 체모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장대식이라구 해요.”
“오, 그러냐. 참말 이번엔 내가 내용을 잘 모르고 실수를 했는데, 과히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라.”
모르는 사이에 오씨의 입에서는 이런 사과조의 말이 흘러나왔다. 대식은 이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병우 어디 갔어요?”
추궁하듯이 물었다.
“오, 병우 말이지, 손의 상처로 유혈이 심해서 그런지 갑자기 몸이 허약해져서 수양차 시골에 좀 보냈다.”
쩔쩔매면서 오씨가 둘러대니까,
“시골 어디예요?”
캐고 드는 바람에,
“뭐, 그리 멀지 않은 데다.”
우물쭈물했더니, 대식은 잠자코 오씨의 얼굴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고 작고 새까만 눈을 날카롭게 빛내면서.
그러한 소년의 태도는 꼭 기회를 보아 덤벼들려는 것같이 느껴져서, 오씨는 부지중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병우 주소 가르쳐주실 수 없어요?”
이 말에 오씨는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곧 딴 데로 옮길 테니까, 주솔 아나마나다.”
겨우 이렇게 얼버무렸더니,
“그럼, 병우에게 이거나 보내주세요.”
하면서 대식이 주머니 에서 잭나이프를 꺼내서 날을 쭉 펴는 바람에, 오씨는 흠칫 놀라 다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지만 그 칼로 오씨를 어쩌는 것이 아니라, 의외에도 대식이 자신의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대문 기둥에 대고 탁 쳐서 떨어뜨렸다. 다음 순간 소년은 진통을 참느라곤지 이를 사리물고, 재빨리 잠바 주머니에서 붕대를 꺼내어 손가락의 상처를 여러 겹 친친 감아쥐더니, 땅에 떨어져 피와 흙투성이가 된 손가락의 한 토막을 주워 들고,
“장대는 이런 사내라는 말과 함께 전해주세요.”
오씨 앞으로 그것을 내밀었으나, 씨는 어쩔 줄을 몰라 머뭇거리면서,
“대식아, 용서해다구. 그 녀석은 2대 독자로서 우리 집안에는 소중한 놈이다.”
영문 모를 소리를 비굴하게 중얼거리려니까, 소년은 손가락 토막을 억지로 오씨 손에 쥐어준 다음,
“언제구 아저씨 신세도 갚아야겠습니다.”
묘한 말을 남긴 채, 머리를 꾸뻑하고는 성한 손으로 상처 입은 손을 꼭 싸쥐고 유연히 돌아가버린 것이다. 오씨는 소년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등골과 이마에 식은땀을 느끼며 꼼짝 못하고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 오씨는 갑자기 깜짝깜짝 놀라는 버릇이 생겼는데 대식의 표독스럽게 빛나는 눈과 잭나이프로 손가락을 탁 쳐서 끊던 잔인한 광경과, 아저씨의 신세도 갚아야겠습니다 하던 말이 범벅이 되어 퍼뜩퍼뜩 머리에 떠오르곤 하였기 때문이다. 실지가 장대패에서는 ‘신세’를 갚기 위해선지 그림자처럼 오씨 주변에 출몰하는 일이 잦았다. 대식이 「홍길동전」을 애독한다고 하더니, 그 자신 길동이처럼 변화무쌍하게 변장하고 나타나는 것인지, 아니면 구의 부하들을 교대로 동원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호젓한 외딴 골목이나, 비가 내려서 행인이 드문 거리나, 캄캄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면 오씨의 배후에 자주 수상한 소년의 그림자가 따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병우 녀석 이 걱정을 했듯이 쥐도 새도 모르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노리는 것만 같아서 오씨는 그때마다 오금이 저리고 등골이 오싹해지곤 하였다.
그래서 씨는 밖에 나다닐 때면, 되도록 행인이 많은 길을 택해 걸었고, 밤에는 외출을 삼가도록 했으나, 직장 사정이나 그 밖의 부득이한 용건으로 밤길을 걷게 되는 경우에는 애써 아는 사람과 동행을 하였고, 그럴 수도 없는 때는 으레 부인이든지 애들이라도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그 수상한 소년은 결코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지어는 혼자 거닐 때만 수상한 소년을 보게 되는 것은 공포증에서 으는 일종의 환각이 아닌가 하고 의심도 해보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앞서 말했듯이, 그들은 오씨를 귀신도 모르게 해칠 목적에서 반드시 혼자 걷는 기회만을 노리고 미행하는 것에 틀림없을 것 같았다.
그들이 그만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구 덤비는 것이 아니라, 그들대로의 주밀한 계산과 도덕 비슷한 것을 지니고 있는 모양임은, 가령 국민학교 5학년짜리와 5학년짜리인 병우 여동생과 열아홉 살 먹은 식모애를 위협해서 병우의 피신처를 기어코 알아내려한다든지 아예 납치를 해감으로써 복수를 삼을 수도 있을 것 같고, 사실 처음에는 그렇게 나올지도 몰라서 은근히 걱정도 하였으나, 길목을 지켰다가 병우 여동생들과 식모에게, 그나마 꼭 한 번씩만, 나는 병우와 다정한 친군데, 편지라도 보내게 병우가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넌지시 떠보았을 뿐, 실지로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 애들이 모른다고 잡아뗐더니, 그 뒤로는 일체 애들을 귀찮게 구는 일이 없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오씨 부인에게도 결코 접근하는 일이 없었다. 도리어 집 앞 골목 어귀 같은 데서 오씨 부인 쪽이 먼저 수상한 소년을 발견하고 겁을 집어먹으면, 저쪽 편에서 얼른 외면을 하고 슬그머니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이려한 점들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다만 병우와 오씨만을 복수의 상대로 삼아 괴롭히고 기회를 노릴 뿐, 가족들에게까지 위협이나 해를 가하려고는 하지 않는, 말하자면 그만큼 신사적인 일면이 있기도 했다. 그 반면에 그들은 무섭도록 집요하고 악착같은 데가 있었다.
하룻밤은 가족들이 한 방에 모여 과일이랑 나누어 먹으며 늦도록 지껄이고 놀다가, 이제들 그만 자라면서, 식모 애더러 방을 치우라 이르고 변소엘 나갔던 오씨 부인이 별안간 “아'’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대로 댓돌 위에 털썩 주저앉아버린 일이 있었다. 그 바람에 오씨가 깜짝 놀라 뛰어나가보았더니, 마침 시커먼 사람의 그림자가 제법 높은 블록 담장을 막 타고 넘는 순간이었다. 오씨는 그만 목이 칵 메어서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덜덜덜 떨고만 섰다가 좀 만에야 겨우 부인을 부축해가지고 들어왔는데 부인의 말에 의하면, 어둠 속이라 얼굴은 분별할 수 없었지만, 몸집으로 보아서 병우 또래의 소년에 틀림없더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장대 일파의 그 수상한 소년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처음엔 그들이 오씨를 해치기 위해 마침내는 뜰 안까지 침입하게 된 것으로 알고, 며칠 동안은 맘 놓고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겁이 나기도 했으나, 나중에 찬찬히 그때의 여러 가지 정세와 직감을 분석해 추리해보니, 그게 아니라, 가족들의 담화 속에 혹시 병우의 피신처 얘기라도 나오지 않을까 여기고 그것을 엇들으러 왔던 것 같았다. 그것은 수상한 소년이 골목 근처에 지키고 섰다가 우체부가 나타나면,
“오인성에게 오는 편지 없어요?”
하고, 묻는 장면을 부인과 식모가 목격한 일이 있다는 사실로도 그들이 병우를 찾아내기 위해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들이 아직 오씨에게 직접 복수를 하지 않는 건 오직 병우를 찾아낼 때까지 그 시기를 미루고 있는 데 불과한 것 같았다.
어쨌든 오씨는 그들 수상한 소년의 그림자가 갖은 방법으로 가해오는 위협과 공포감 때문에 잠시도 마음을 놓고 지낼 수가 없었다. 한번은 직장 사정으로 밤 10시가 넘어서야 퇴근해 돌아오게 되었는데, 전차를 내려보니, 때마침 가을비가 부슬부슬 뿌리는 변두리 길에 동행이 될 행인이 없었다. 그래서 길가의 처마 밑에서 얼마쯤 비를 그으며 서성거리노라니까 마침 한 청년이 우산을 받고 오씨네 집 방향으로 걸어가기에 그제야 안심하고 부탁해서 그 우산을 같이 받고 나란히 걷고 있었을 때, 어둠 속을 웬 소년이 앞쪽에서 뛰어오다가, 오씨의 옆구리를 탁 치고 지나가는 순간, 오씨는 별안간 두 손으로 그쪽 옆구리를 움켜쥐고,
“으악, 칼에 맞았다.”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린 것이다. 그러자 동행한 청년이 깜짝 놀라 우산을 집어던지고 덤벼들어 씨가 움켜쥐고 있는 옆구리를 들치고 라이터 불을 비춰보았지만, 칼자국은 고사하고 손톱 자리 하나 없이 멀쩡하였다. 청년은 입맛을 다시고, “아저씬 참 이상한 분이군요” 하고 어이없어 했고, 오씨는 아랫도리가 척척해오는 가운데도 무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지내놓고 생각해보니, 소년은 물탕을 밟지 않으려고 어둠을 땅바닥만 보며 비를 피해 뛰어가다가 실수해서 오씨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들이받고 달아나버린 모양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오씨도 이러다가 내가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고 그것을 방지할 방도를 연구해보았다. 그결과,
ⓛ 이런 사실을 경찰에 알려서 경찰의 보호를 요청하는 방법과,
② 아주 멀찍이 딴 곳으로 이사를 가버리는 방법과,
⑤ 그놈들과 정면으로 맞서서 대결해나가는 방법과,
④ 그들을 슬슬 주물러서 무마해보는 방법 등이 있기는 한데, 이런 정도를 경찰에 신고해보았댔자, 상대가 미성년자인데다가 무슨 뚜렷한 범행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니 경찰로서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것이요, 게다가 씨 자신 경찰에 과히 신뢰를 결지 못하는 편이라 ①의 방법은 기대할 수가 없었고, 이사를 가는 문제도 그들이 직장을 알고 있는 이상 직장까지 그만둔다면 모르되 지금의 직장도 간신히 얻어걸려 밥줄을 달고 있는 씨로서는 그럴 수도 없는 누릇이라 ②의 방법 또한 불가능했고, ③의 방법은 소심하고 담력 없는 씨로서는 아예 어림도 없는 일이고 보니, 결국 최후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과 사귀어 친해지면서 회유해보는 ④의 방법뿐이었다.
마침내 그러기로 결심한 오인성 씨는 용기를 내서 은근히 장대일파에게 접근을 꾀하기 시작한 것이다. 씨는 우선 어느 날 집 앞 골목 모퉁이에서 수상한 소년을 발견했을 때, 전처럼 무조건 피할 생각을 않고 조심히 다가가 말을 걸어보았다.
“너, 병우 친구 아니냐?”
소년은 경계하듯 오씨를 힐끔 쳐다보고 나서 간단히 그렇다고 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아도 너희들을 만나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는데 어떠냐? 내 한턱낼 테니까, 우리 어디 가서 저녁 식사라도 나누며 얘기를 좀 해볼까?”
이런 식으로 유도해보았지만, 소년은 성큼 응하지 않을뿐더러 더욱 의심하는 눈치기에, 나를 믿을 수 없고 네 임의로 행동할 수도 없거든, 그럼 내가 꼭 할 얘기가 있으니, 대식일 한번 만나게 해줄 수 없느냐고 오씨는 간청 해보았다.
“장대에게 물어보겠어요.”
소년은 그러고 사라져버렸는데, 다음날 대뜸 대식에게서 직장으로 전화가 걸려오더니, 이번에도 자기를 꾀어서 경찰에 넣으려는 속셈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래서 하늘에 맹세코 절대로 그렇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여러 가지로 사과도 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러노라고 했더니, 그러면 오는 공일 오전 10시에 한강 인도교 옆 보트장 앞의 백사장으로 나오라는 즉답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도리어 오씨 쪽이 불안해서,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만나자고 청하니까, 대식은 이내 그 눈치를 알아차리고,
“전 아저씨나 병우처럼 비겁한 인간이 아녜요. 절 믿을 수 있건 나오시구, 그렇지 않건 그만두세요.”
하고, 전화를 끊으려 하는 바람에 오씨는 당황하여 그러면 대식의 인격을 믿고 그 시간에 안심하고 그리로 나가겠노라고 수락을 한 것이다.
약속한 일요일은 마침 쾌청한 늦가을 날씨였다. 철 지난 강변에는 아베크족이 간혹 눈에 띄었고, 수영객은 전혀 없으며, 물 위에는 유선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오씨는 마치 무슨 어마어마한 비밀 단체의 두목이라도 은밀히 만나러 가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긴장하였다. 오늘의 회견이 결국 자기와 병우의 어떤 운명을 좌우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 소심한 오씨로서는 무리도 아니었다.
약속 시간에 현장에 다다라서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그곳에서도 수백 미터 이상의 모래사장 한가운데 한 소년이 우뚝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곧 그 소년이 대식이임을 알아보고 오씨는 조심조심 다가갔다.
서로 표정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있는 거리에 이르자, 대식은 양쪽 손을 잠바 주머니에 찌르고 선 채, 머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오씨는 당황히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해 보이고 가까이 가서, 땀도 안 나는 이마를 괜히 수건으로 문지르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아부조로 말을 거니까,
“앉으세요.”
권하고, 대식은 그 자신이 먼저 모래 위에 주저앉았다. 오씨도 지시에 따르듯이 간격을 두고 엇비슷이 마주 앉았다. 대식은 입을 다문 채 잠자코 있었다. 오씨는 묘한 압박감에 견디다 못해,
“바쁠 텐데, 이렇게 만나주어서 정말 고마워.”
또, 안 해도 좋을 소리를 했다. 대식은 그대로 입을 열지 않았다. 물론 웃지도 않았다. 영악하게 생긴, 유난히 빛나는 조그맣고 새까만 그 눈으로 자주 오씨를 주시할 뿐이었다. 그때마다 오씨는 그 시선을 감당하지 못해 바삐 외면했다.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이놈이 만일 왜정 때에라도 태어나서 올바른 지도만 받을 수 있었다면 저 장한 항일 투사나 의사들처럼, 세계를 진감시킬 만한 거사를 능히 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만큼 좋은 의미에서도 무서워 보였다. 불과 열여섯쯤의 아들뻘밖에 안 되는 소년에게서 받는 무서움이란 뒤집으면 그만큼 강한 존경일 수도 있었다. 오씨는 이런 놈을 상대로 제대로 무슨 말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이런 놈을 슬슬 주물러서 회유해보겠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임을 깨달았다.
오씨는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좋을지 몰라 자꾸만 망설이고 있으려니까 그 눈치를 챘는지 소년은,
“오늘만은 원수로 여기지 않을 테니, 하고픈 얘기가 있으면 하세요.”
불쑥 한 마디 했다. 그 말에 오씨는 흠칫 놀라며 덮어놓고 사과의 말부터 나왔다.
“난 대식에게 사과하러 왔어. 그때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실술 했어. 그러니 가슴속에 너무 깊이 새겨두지 말라구.”
“절 나쁜 놈으로 알고 그러신 거죠?”
“그땐 정말 모르고 그랬어. 대식 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그랬다니까.”
“지금도 속으론 절 나쁜 놈으로 알고 계시죠?”
“처, 천만에. 난 대식이 같은 용감한 소년을 존경해. 대식인 결코 보통 소년이 아니야. 무서운 소년이야. 난 사실이지 대식이가 무서워서 못 견디겠어. 병우도 그래서 숨겨둔 거야. 대식이가 무서워서 말야.”
“그럼 병우의 배반 행위를 한 번만 더 용서해줄 테니, 도로 데려오세요. 그 자식은 제가 5년이나 키워온 동지예요.”
이러고 대식은 그 날카로운 눈으로 오씨를 쏘아보았다.
“대식 군, 그것만은 용서해줘. 그놈은 우리 가문의 대를 이을 놈야. 무사히 공부를 마치고 대를 이어야지 만일에 무슨 사고라도 있으면 안 될 놈야. 정말 그것만은 양해해줘. 내 다시는 추호도 대식에게 해롭게 안 할 뿐 아니라, 웬만한 청이면 다 들어줄 테니, 제발 그놈만은 이대로 잊어버려줘. 그리구 나도 어떻게 좀 봐줘. 이대로 나가면 미칠 것 같아. 당장이라도 미칠 것만 같다니까.”
오씨는 입을 열기 시작하니,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이런 탄원조의 말만이 줄줄 흘러나와버 렸다. 대식이 잠시 오씨를 쳐다보다가,
“제 청이면 뭐든지 들어주실 수 있다고 하셨죠?”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 들어주겠어. 우선 내가 여기에 한 천 원 넣구 나왔는데 필요하면 써.”
하면서, 씨가 양복저고리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더니, ˙
“아저씨, 사람을 너무 시시하게 보지 마세요.”
대식이 거칠게 쏘아붙이고 노려보았다.
“그럼, 뭐든지 청이 있음 말해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들어줄 테니까.”
오씨가, 당황한 나머지 비위를 맞추듯 하고, 소년의 얼굴을 지켜보자니까,
“제 동지가 돼주세요.”
대식은 뜻밖의 말을 내놓았다.
“동지라니?”
“병우 대신 아저씨가 제 동지가 되어달란 말씀예요.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병우와는 완전히 인연을 끊고 다시는 상관 않겠어요.”
“내가, 대식 군의 동지로 뭐 할 일이 있을라구?”
“아저씨 같은 분도 제겐 꼭 필요해요. 고문으로 모시겠어요. 싫다곤 안 하시겠죠?”
“그렇지만·…….”
“싫으시면 좋아요. 전 목숨을 걸고라도 기어코 병우를 배신자로 처치해버리고야 말 테니까요. 지금 진주에 가 있다죠?”
“…….”
오씨의 얼굴은 차츰 기운 없이 수그러지기 시작했다.
“어떡허시겠어요?”
“좋아. 병우만 건드리지 말아준다면 대식 군의 동지가 되어도 좋아.”
오씨가 마침내 체념한 듯 대답하자, 대식은 주머니에서 조그만 손칼을 꺼내더니, 그것으로 자기의 오른손 무명지 끝을 1센티 가량 쨌다. 그리고는 그 손가락을 오씨 앞에 내밀며,
“이 피를 빨아잡수세요.”
명령하듯 하는 말에 씨는 할 수 없이 입을 벌려 쩝절한 피를 빨아먹었다. 대식은 다시,
“오른손을 내놓으세요.”
이번엔 오씨의 손을 끌어다가 무명지 끝을 1센티쯤 칼로 찢고 거기서 내솟는 피를 쭉쭉 빨아먹었다.
“자, 이제부터 아저씨와 전 남이 아닙니다. 피를 나눠 먹었으니, 부자 사이보다, 더 가까운 사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헤어져서도 안 되고, 배반해서도 안 되고 이 비밀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만일 이 약속을 어기면 그땐 목숨을 대신 내놔야 합니다.”
이렇게 위압적인 말로 다짐해놓고 벌떡 일어서더니,
“앞으로는 만일 어떤 놈이든 아저씨에게 해를 끼치는 놈이 있으면 제가 목숨을 걸고라도 해치울 테니 걱정 마세요. 오늘은 딴 동지의 훈련이 있어서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다음번 만날 날을 아무도 모르게 연락해드리겠습니다.”
이런 말을 남기고, 소년은 사각사각 모래를 밟으며 인도교 쪽으로 멀어져갔다.
모래 위에 펄쩍 주저앉은 채, 꼼짝을 않고, 점점 작아져가는 대식의 뒷모습을 겁에 질린 듯 취한 듯 바라보고 있던 오씨는 그 표정이 차차 체념으로 변하며 마음속 한구석 에서는 뜻하지 않게 은근한 자랑과 우쭐해지는 기분마저 느껴보는 것이었다.
-끝-
2016년 10월 31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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