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영화배우라는 타이틀보다
교수라는 직함이 더 자연스러운 장미희.
그가 대학강단에 선 지도 벌써 10년째 접어든다.
올해로 마흔, 아직도 독신을 고집하고 있는 그가
얼마전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냈다.
어린 나이에 영화계에 입문하여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이젠 후배 배우들을 가르치며
강단에서 정열을 불사르고 있는
그가 말하는 일과 사랑.
한국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 ‘시대의 연인’으로
불리던 영화배우 장미희. 75년 <성춘향>으로 데뷔, 정윤희
유지인과 더불어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던 그는 올해로
연기생활 23년째를 맞는 대배우이자, 10년째 대학강단에
서고 있는 교수다.
어느 덧 마흔 살, 그는 지금의 자신을 ‘가을 나무’에 비유한다.
“미완의 봄, 열기 가득한 여름을 지나 이제 막 단풍이 시작되는
나무라 할 수 있을 거예요. 비로소 자기 색깔을 내기 시작하는
거죠. 원숙하고 풍요로운 색깔… 그래서 가장 화려한 시기이기도
하구요.”
깔끔한 바지 정장, 수수한 화장에 선이 단정한 단발머리.
우아한 말투로 조용조용 말하는 장미희는 여전히 독특한 그녀만의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시험공부 하느라 며칠 밤을 새운 학생 마냥
입가가 부르터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요즘 좀 바빴어요. 2월부터 명지대 사회교육원에서 명지전문대
연극영상학과로 적을 옮기게 됐거든요. 학생들 입학 준비하느라
하루종일 학교에서 서류들과 씨름해야 돼요. 작년부터 준비해오던
책도 나왔고, 2월부터 들어가는 MBC드라마 <육남매> 촬영도
시작했어요.”
도대체 휴식이란 걸 모른다. ‘너무 바빠서’ 외로움을 느낄
시간조차 없다는 장미희는 강의하고 연기활동하면서 틈틈이 책을
써 최근 에세이집 <내 삶은 아름다워질 권리가 있다>(가야미디어)
를 세상에 내놓았다.
최근에 펴낸
에세이집
〈내 삶은 아름다워질
권리가 있다〉
“사십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음의 눈으로 보는 세상을 알게
됐어요. 앞으로도 계속 노력해야 할 삶이겠지만, 이제 세상에
무엇을 베풀어야 할 것인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살아온
인생과 앞으로 살아갈 인생,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느낌을 담은 책이에요.”
장미희는 이 책을 통해 자신과 생각을 같이 하는 친구들을 많이
갖고 싶다고 했다. 목표를 세우고, 그걸 이루기 위해 달려온 인생.
그런 인생의 목표가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이다.
그는 지금 어릴 적부터의 꿈이었던 ‘선생님’이 되어 있다.
철없던 시절 얼떨결에 시작한 배우 생활로 최고의 자리에도
올랐고, 돈도 벌만큼 벌었지만 그는 이 꿈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배우로서의 절정에서 결행한 외국 유학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비쳤을 것이고, 때문에 무수히 많은 의혹의 눈초리와 기분나쁜
소문에 시달렸던 기억도 있지만 차가운 빵 한조각으로 끼니를
때우며 공부에만 매달렸던 유학생활은 지금의 그녀를 완성시킨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젠 강의와 강연도 완전히 몸에 익었고, 교수 장미희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도 스스럼이 없다. 학교 관계자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회식자리에서 아무 음식이나 가리지 않고 먹는 그녀를
보고 “맨날 이슬만 먹고 사는 줄 알았더니 자장면도 먹네요?”
하고 신기해하던 동료 교수들도 이제는 평범한 동료로 그녀를
대한다.
오로지 영화와 공부만을 위해 살다 보니, 미처 만끽하지 못한
젊음은 어느새 저만치 달아나고 말았다. “교수님은 꼭 엄마
같아요”라는 학생들의 말을 들을 때면 놀라움과 수줍음을 함께
느낀다. ‘그랬구나, 젊음은 이제 이 아이들의 몫이구나.’
새삼스런 눈으로 학생들의 젊음을 본다. 저 충만한 젊음의
에너지를 올바른 곳에 쏟아부을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것이 내
몫이겠지 하는 생각에 그녀는 밤 늦은 시간까지 연구실에 앉아
강의 준비에 즐거이 몰두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배우로서의 연기생활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학교에 들어오면서 아무리 바빠도 2년에 한 번씩은 연기자로서
대중 앞에 설 것을 스스로에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계속할 공부의 주제는 ‘연기’이며 나는 언제나 ‘연기자’
입니다”라고 말하는 그는 <사의 찬미> <애니 깽> <아버지> 등에
출연한 것으로 그 약속을 지켜오고 있다. 6년 만에 드라마
<육남매>로 TV에 복귀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1960년대를 배경으로
육남매를 이끌고 힘든 세월을 이겨가는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게 될 이 작품을 장미희는 특히 자신의 어머니에게 바치고
싶다고 했다.
“우리 어머니 정말 대단하신 분이세요. 어려서부터 ‘아비없는
집안 자식들’이라는 소리 안 듣게 하려고 철저하게 유교적인
가정교육을 행하셨죠. 제가 가는 촬영장에도 항상 어머니가 함께
계셨어요. 산간 오지로 촬영을 떠날 때면 명주솜이불까지 챙기
셨고, 영화계에서 우리 어머니 음식맛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그 지독한 사랑이 힘겨워 품을 떠나고 싶었던 적도 많았지만,
지금의 어머니는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다. 어머니도 그녀도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강의할 때 학교 오시라 해서
강의실에 앉아 계시게도 하고, 드라마 촬영장에도 오랜만에 같이
나갔다. ‘영화배우 장미희’를 만들었던 그녀의 어머니는 지금의
‘교수 장미희’를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는지 모른다.
마음에 주름지는 것이 진짜 늙는 거예요
아직도 혼자 살고 있는 그녀를 두고 사람들은 “정말 결혼
안하실 거예요?”하고 묻는다. 그의 변치않는 대답. “왜 안해요?
저 독신주의자 아니에요.”
“이 나이에 혼자 사는 사람치고, 독신이고 싶어서 독신으로
사는 사람 별로 없을 걸요. 저도 그래요. 아직도 누군가를 만난
다는 건 기분좋은 꿈이고 희망이에요. 결혼해서 아이 키우고,
시댁 식구 모시고 사는 정윤희씨나 유지인씨처럼 저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결혼하는 데 마지노선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리고 스스로 정한 이상적인 상대의 수준을
조바심 때문에 낮추지는 말아야죠.”
‘삶의 철학이 비슷하고 마음과 신체가 건강한 사람’이 그가
말하는 이상적인 상대의 기준이다. 언젠가는 그런 이상적인
상대를 만나 첫눈에 ‘아!’하고 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한편으로, 어차피 사람은 홀로 태어나고 홀로 가는 거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고, 그 도움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역시 삶을 결정하는 것도, 그 속에서 자신을
보는 것도 오로지 자신 혼자 해야 할 일이다. 고독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정신의 일부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흔히 혼자 사는 사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외로움’
이라고 하죠? 제 생각은 달라요. 외로움이란 다른 사람이나 사물과
자신이 단절됐을 때 찾아드는 감정이고, 그렇게 보면 혼자 있더
라도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의사소통을 하고 연대감을 가질 수
있다면 외롭지 않은 거죠. 여럿이 함께 있어도 외로울 수 있는
것이 인간이고 보면, 그건 독신자의 전매 특허는 아닌 거예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고, 잘만 이용하면
스스로를 정리하고 촉진시킬 수 있는 힘이 되어주는 거죠.”
눈치 볼 사람없이 음악을 들을 수 있고, 밤 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앉아 책을 읽을 수 있고,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느라
부산을 떨지 않아도 되는 지금의 독신생활이 정신적인 자유를
느끼게 해준다는 그녀는 ‘홀로 있는 것의 미학’을 아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돌볼 식구가 없는 건 아니다. 동물을 유난히 좋아하는
그녀의 집에는 ‘메리다’ ‘미루’ ‘통일이’ ‘살구’ 같은
예쁜 이름을 가진 개와 고양이가 아홉 마리나 산다. 장미희는
한때 모피의류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동물 애호운동과 환경
운동을 시작하면서 그 광고가 지니고 있는 반 환경적인 상징성을
고려해 그만두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가꾸는 그녀도 어느날
갑자기 늙어가는 자신을 느낄 때가 있다. 햇빛에 드러난 손 등을
바라보자면 통통하고 소복하던 것이 어느 새 수척하게 말라 있다.
그럴 땐 새뮤얼울만의 ‘청춘이란 이름의 시’를 떠올린다.
‘나이를 먹었다고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잃을 때 비로소
늙는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을 더하지만 정열을 잃으면 마음이
주름진다.’
자신이 좋아하고, 해야 할 일을 위해 묵묵히 한길을 가겠다는
그녀. 언젠가 다가올 누군가와의 만남을 바르고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리겠다는 그의 모습이 난초처럼 향기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