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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태풍 '차바'의 영향으로 엄청난 비바람이 몰아쳤지만 이미 계획된 산행일이라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출근길 사람들은 이런 날씨에 왠 등산인가하며 미친 X보듯 히끗히끗 쳐다본다.
국가안전처에서 외출 자제하라는 문자와, 아들과 사위의 안부전화 뒤로 아버지는 좀 지나쳤다는 투다.
연이은 천등산시리즈다.
능인(能仁)대사가 수도할 때 천녀가 내려와 불을 밝힌 굴이 천등굴(天燈屈), 이 천등굴이 있는 산이니 천등산(天燈山)이란 이름도 지어졌다.
천등산(안동)의 주 테마는 국보와 보물을 간직한 유서 깊은 사찰기행으로 펼쳐진다.
봉정사(鳳停寺)엔 국보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건물 극락전(국보)이 있다.
봉정사는 2점의 국보와 4점의 보물을 간직한 보배로운 사찰이다.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개목사(開目寺)의 원래 이름은 흥국사였다.
조선 초기 재상인 맹사성이 안동부사로 와서 안동의 지세가 눈병이 많을 형상이어서 이름을 개목사(開目寺)로 바꾸었더니 소경들이 없어졌다고 한다.
원통전(보물)마저 새로 단장하여 옛 멋은 느낄 수가 없었지만 자세히 보면 뒤쪽 처마보다 앞쪽 처마가 더 긴 비대칭으로 지붕의 독특함을 알 수 있다.
과거 99칸 큰 절이었던 개목사는 포은 정몽주가 10년을 머물며 공부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영산암(靈山庵)은 비구니 암자로 봉정사와 담하나 사이 계단위로 인접해 있어 마치 부속건물처럼 보인다.
조그만 절마당은 'ㅁ'자 형으로 꾸며져 사대부집을 닮아있다.
영산암 절마당의 귀품있는 반송 한 그루를 살피는데, 어디선가 들릴듯말듯한 목탁소리가 들린다.
가만히 법당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더니 작은 법당 위엄서린 삼존불 앞에 정좌하신 스님이 가만가만 목탁을 두드리고 계신다.
나는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카메라를 돌려 세우고 돌아서고 말았다.
차에서 내려 처음 만나는 유적지는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강학하던 '명옥대(鳴玉臺)'다.
이 명옥대는 1665년(조선 현종 6) 후학들이 지은 누정으로 정자 옆에 폭포가 있어 원래 이름은 '낙수대(落水臺)'였다.
그러나 퇴계는 '옥구슬 소리가 나는 정자’란 뜻으로 '명옥대(鳴玉臺)‘라 이름을 바꿨다.
옛날 이곳에서 빨래하다가 떨어져 죽은 처녀가 있어 명옥대에서 더러운 걸 빨면 안된다는 속설이 전해져 온다.
명옥대 폭포옆 바위의 '鳴玉臺'라는 각자는 퇴계선생의 뜻을 추모하는 후학들이 새겨 넣은 글이다.
귀가길에 서후면 금계리에 있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1538~1593)의 종택을 들렸다.
학봉은 퇴계의 제자로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은 학자로 27세에 사마시, 1568년(선조 1)에는 문과에 합격해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종택 옆의 학봉기념관에는 임진왜란 때 학봉이 영남초유사로 일하면서 쓴 말안장과 철퇴 등 각종 유품이 전시돼 있다.
GPX
6.8km에 3시간 20여분.
고도표
참고
천등산봉정사 표석 옆에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촬영장소 라는 둥근 동판이 세워져 있다.
매표소 아래의 안동 시내버스 시간표와 봉정사 입장료 안내
경북으로 올라오자 바람은 다소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다.
원점회귀이니만큼 각자 알아서 하라는 당부 외에는 더 할 말이 없어 3명만이 채비를 갖추고 산을 오른다.
산행은 제2코스로 단축하기로 하였다.
천등산휴게소 입간판 우측 포장도로를 따라...
2주차장 앞 등산로 3코스를 지나...
돌아본 2주차장과 아래 '제3 등산로' 푯말이 보인다.
제일 위쪽 3주차장 좌측으로 제1,2등산로 들머리가 보이지만 나는 명옥대를 찾기위해...
'기와 그림 전시관' 옆 직진으로 조금 오르다 내려왔다.
다시 내려와서 눈을 닦고 살피니 제3등산로 방향 계곡에 명옥대가 살짝 보인다. 따라서 명옥대를 가려면 '제3 등산로' 방향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는 더 이상 내려가지 않고 이 논두렁을 따라 질러 들어가...
100여미터 거리인 명옥대에 닿는다.
명옥대란 물이 옥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누대라는 뜻이다.
이곳에서는 천등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작은 줄기를 이뤄 흐르다가 바위 아래로 작은 폭포를 이루며 떨어진다.
명옥대는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이 16세 때 이곳 봉정사를 찾아 공부하며 놀던 곳이다.
낙수대(落水臺)란 이름을 50년이 지난 1665년(현종 6) 이곳을 다시 찾아 명옥대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명옥대란 이름은 육사형(陸士衡)이 쓴 "폭포수 튀는 물이 옥구슬 소리 같다(飛泉漱鳴玉)"라는 시 구절(句節)에서 따왔다고 한다.
세찬 빗줄기 속에서 명옥대의 편액과 천장 써까래를 살펴본다.
명옥대라는 해서체 현판 옆에 창암정사(蒼巖精舍)라는 초서체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는데 창암이라는 글자는 퇴계의 시에서 따왔다.
'창암정사'는 <依舊蒼巖白水懸. 푸른 바위에는 여전히 하얀 물줄기 걸려 있는데.>에서
퇴계 선생은 이어 50년 후 이곳을 다시 찾게 된 감회를 표현하고 끝에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적었다.
<절의 입구에 기암이 있어 몇 층에 달한다.
그 높이도 가히 수 미터에 이른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면서 한 곳에 기가 막힌 경치를 만들어낸다.
지난 병자년(1516) 봄 나와 사촌 동생 수영이 이곳 절에 머물며 책도 읽으며 논 적이 있다.
그때 함께 공부한 사람이 권민의와 강한종인데 이미 세상을 떠났다. 다시 만날 인연이 없나 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동생 역시 일찍 죽었다.
권공과 강공 둘 다 죽은 지 이미 오래다. 나도 지금 힘이 들기는 하지만 혼자 터덜터덜 걸어 이곳에 왔다.
세상사 그러려니 하며 위로해 보지만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 심경을 시로 말한다.>
此地經遊五十年' 이곳에서 노닌 지가 50년이 지났으나
韶顔春醉百花前 늙은 이 얼굴도 수백 가지 봄꽃에 취하는구나.
只今攜手人何處 손잡고 놀던 이 지금은 어디 갔나,
依舊蒼巖白水懸. 푸른 바위에는 여전히 하얀 물줄기 걸려 있는데.
명옥대 각자를 찾기 위해 옆의 바위를 빙빙 돌아 폭포가 있는 상단에서 다시 두리번 거렸다. 그 참~ 오랜 세월에 닳아 찾을 수 없어졌나...
명옥대 안내판.
오형님을 만나 각자가 안보인다고 하였더니, "저기 있네." 한다. 눈 어둡다고 하더니 나보다 더 잘 보이능갑다.
살짝 당겼다. 명옥대라고 쓴 각자(刻字)는 퇴계선생의 뜻을 추모하는 후학들이 새겨 넣은 글이란다. 퇴계선생이 다녀간 지 2년 후의 일이다.
(辛乃玉 李宰 文緯世 尹剛中 欽中 端中 隆慶元年夏 同遊開林 築臺題詩 以追退溪先生之志)
신내옥, 이재, 문위세, 윤강중, 흠중, 단중 형제가 융경 원년(1567) 여름에 이곳에서 수풀을 헤치고 노닐다가 대를 쌓고 시를 지어 퇴계선생의 뜻을 기렸다.
* 융경(隆慶)은 명나라 융경제의 연호(元号) 이다. 융경 원년이면 1567년이다.
명옥대에서 나오자마자 일부 회원들은 '3코스'로 올라가고...
우리는 논두렁을 타고 '3주차장'으로 다시 나와서 빨간 화살표 방향으로 진행을 한다.
입구의 푯말엔 '등산로 1,2코스'
3주차장 입구 들머리엔 송이버섯 채취 관계로 '입산금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작은 고개마루에 올라서선 비포장 직진으로...
조금 내려서면 다시 포장임도. 직진은 1코스 들머리인 고개안부로 가는 길, 2코스인 우리는 우측으로 120도 꺾는다.
'등산로 2코스' 푯말을 따라...
좌측길은 민가의 농장이고, 이 갈림길 모서리 숲속에...
누군가 道를 닦는 듯 '위산암'목판이 걸려있다.
다리를 건너지 않고 좌측으로...
식수탱크를 지나면...
이내 '등산로 2코스' 푯말이 산길로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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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은 전형적인 육산으로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과 빗물에 의해 뿌리가 드러났다.
능선에 올라오자 왼쪽 등로는 '1코스'로 가는 길. 이후 이정표는 대부분 정상과 주차장을 표시한다.
곧 '관음굴' 이정표를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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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으로 비켜섰더니 전망바위. 관음굴은 이 바위 아래에 위치한다.
조금 손을 본 자연석굴에 관음상을 모셨다.
동굴 입구엔 목탁이 있는 걸로 보아 자주 불공을 드리는 듯하다.
오른손에 정병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상.
다시 올라와...
너른 봉우리(474m)에 시 한 편이 걸렸다.
- 숲속 결혼식 -
아카시아향 자지러지던 날/ 천등산 숲에서/ 모처럼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서후의 까투리 양과/ 북후의 장끼 군이/ 온갖 산새들의 합창 축가 속에/ 결혼식을 마치고/
장끼가 까투리를 안고/ 학가산 쪽으로/ 신혼여행을 갔습니다/
그다음 일은 난 몰라요/ 정말로 모른다니까요/
설령 안다고 해도/ 차마 말할 수가 없어요'.
<이 수 일>
곧 갈림길을 지나자...
좌측 뒤 소나무 사이로 도드라진 봉우리가 보인다.
살짝 당겼더니 장끼와 까투리가 신혼여행을 갔다던 학가산이다.
"상곤씨가 이거 그거 맞제? " 한다. "아이다. 그놈은 대가리가 동그랗다." 내려와서 확인해 보니 피어버린 송이에 둥강나 버렸으니 아까워라.
천등굴 갈림길이다.
안내판엔 천등산을 개목산이라고도 한다네.
이 지점의 이정표. 우리는 천등산 정상을 찍고 다시 이 지점으로 돌아와 천등굴을 거쳐 내려간 후 개목사를 들릴 참이다.
좌측 천등산 정상석 직전의 갈림길 이정표.
정상의 3등 삼각점.
필자하고 행동을 같이한 두 분.
그리고 나.
아까 그 안내판이 있는 천등굴 갈림길로 되돌아가 천등굴에 닿았다.
<봉정사 지은 능인 스님이 산 정상 바로 아래 동굴서 정진하고 있었다.
강산이 한 번 바뀔 즈음 아름다운 한 여인이 스님 앞에 나타나 그의 귓전에 속삭였다.
“스님의 지고한 덕에 감복해 찾아왔습니다. 스님과 함께 산다면 여한 없겠습니다.”
“난 부처님 공덕만 사모할 뿐 세속의 환락은 바라지 않는다. 썩 물러나 네 집으로 돌아가라!”
“대단하십니다. 옥황상제 명으로 스님을 시험코자 왔었습니다. 인천의 사표가 되어주시기를 비옵니다.”
여인이 떠난 자리에 청명한 기운 내려오더니 굴 주변을 환하게 비췄다. 여인 목소리 하늘서 다시 들려왔다.
“수행처로 삼으신 굴이 어둡습니다. 옥황상제께서 보내신 등불 전하오니 더욱 정진하시어 도를 이루옵소서.”
하늘이 내린 등 ‘천등(天燈)’이 스님 갈 길 비췄던 것일까? 능인 스님은 깨쳤다.> -법보신문에서...-
천등굴은 산신굴이였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산신령. 우리는 비 가리는 이 천등굴에서 늦은 점심 보따리를 풀었다.
산신령 앞에서 밥을 먹으며 잡숴 보라고 하지도 않았으니, "신령님, 죄송함당~"
내려서자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
그리고 내려선 작은 고개마루는 개목사 갈림길.
갈림길 고개마루에서 좌측 개목사를 내려다 본다.
개목사 뒤 능선은 정상에서 곧바로 내려서는 길. 개목사는가 터를 잡은 곳은 상당히 넓어 99칸 거찰이 있을 수 있었겠다.
절문을 들어서며...
'천등산개목사' 현판을 올려다 보고...
보물로 등록된 원통전을 살피는데, 원통전이 보이지 않는다. 보물인 만큼 고색창연한 모습일 텐데...
정면의 3칸 맞배지붕의 건물이 원통전이다. 실망스러워진다. 새로 단장하고, 또 단청을 하여 돈 많은 절집의 흔한 구조물로 보였기 때문이다.
개목사 원통전(보물 제242호)은 1969년 중수할 때 나온 상량문에 ‘천순원년(天順元年)’이라고 적혀 있어 1457년(세조 3)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응진전(應眞殿) 중앙 칸은 법당이었고, 좌우 협간(夾間)은 돌방이었으며, 서쪽에는 1.5칸 크기의 부엌을 덧달았다고 한다.
그러나 1969년 해체, 보수하면서 부엌과 방 구조를 없애고 모두 마루를 깐 법당(法堂)으로 만들었다.
개목사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로서 관음보살을 안치하고 있는 소규모 법당이다.
툇간을 맞물린 전퇴간(前退間) 5량 구조에 주심포계(柱心包系) 양식으로 되어 있다.
기둥은 배흘림이 매우 약한 둥근기둥으로 전면의 각 기둥 사이에 정자살문[井字살門]을 달았다.
후면 북쪽 협간에 한 짝의 정자살문을 단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벽으로 처리하였다.
내부와 툇간 바닥에는 마루를 깔고 내부 중앙 칸 후면에는 조그마한 불단(佛壇)을 마련하여 그 위에 관음보살좌상을 안치하였다.
후불벽에는 석가모니 탱화를 걸어 놓았으며, 불상 위로는 간단한 형식의 닫집[唐家]이 가설되어 있다.<자료 요약>
안내판
개목사에서 봉정사로 가는 산길은 호젓하기 이를 데 없다.
봉정사 일주문 위로 나와...
봉정사 안내판을 살핀 후...
180년 수령의 소나무 돌계단을 올라...
만세루에 오른다.
만세루(萬歲樓) 오르는 길은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고, 계단 오른쪽으론 멋진 자태의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건물 2층 누각에는 '천등산봉정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천등산봉정사' 편액엔 '동농노어서(東農老漁書)' 라는 관지(款識)가 적혀있다.
'농사도 짓고 고기도 잡는 동방의 늙은이'라는 뜻.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 1846∼1922)은 1877년 문과에 급제해 조선 말기로부터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행정 요직을 두루 지낸 문신이었다.
1891년 안동부사를 지냈고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하였다.
만세루 통로의 돌계단을 밟고 오르면 대웅전은 만세루와 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만세루(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5호) 2층을 뒤돌아 보면 만세루 안에는 법고와 목어가 있다.
봉정사 만세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이층 누각으로 앞면에서 보면 2층이나 경내에서 보면 단층이다.
아래층 가운데 칸에 출입문을 두었고, 위층의 경우 네모난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마루 바닥에 평난간이 둘러져 있다.
1680년(숙종 6)에 건립되었다고 전하며, 그 후 수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
원래 이름은 덕휘루(德輝樓)였으나 언제 어떤 연유로 만세루(萬歲樓)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자료요약>
만세루 2층 누각의 편액과...
누각 천장의 모습.
안동 봉정사는 의상대사와 그의 제자인 능인(能仁)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봉정사 대웅전(국보 제311호)은 봉정사의 주불전으로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1999년 대웅전 해체공사를 하면서 1435년에 쓴 '법당중창기(法堂重創記)' 등 4종의 묵서(墨書)가 새롭게 발견되었다.
'법당중창기'에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500여 년이 흐른 1435년(세종 17) 대웅전을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봉정사는 통일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경내에 있는 석조물들도 시기적으로 유사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자료인용>
돌계단 옆 석주는 괘불대.
대웅전 편액엔...
광서(光緖) 8년인 임오(壬午)년 여름(夏)에 개채(改彩)했다는 낙관이 보인다. 즉 고종(高宗) 19년인 1882년에 다시 채색한 글씨다.
연화대 위의 이 석물은 어디에 쓰는 무엇인고?
대웅전의 겹처마
옆 모습.
대웅전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법당 뒷면의 공포와 처마의 부재가 습기로 부식이 심하여 건물 전체의 뒤틀림 때문에 1999년 전면적 해체·복원 수리를 했다.
그때 파손된 포벽화는 새 포벽에 그림을 새로 그려 넣었으나 품격이 뒤떨어진다.
후불 벽화는 따로 떼어내어 정밀한 보존 처리를 하고 현재 봉정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55호로 지정되어 2011년 현재 봉정사가 소유하여 관리하고 있다.
대웅전 좌측에 국보 제15호 '안동 봉정사 극락전(極樂殿)이 있다. 그러니가 봉정사는 주전(主殿)이 2개가 되는 셈이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주심포계(柱心包系) 맞배지붕이다.
건물 바깥쪽으로는 정면 가운데칸에 판장문을 달고 양 옆칸에는 광창(光窓)을 내었으며, 그 밖의 3면은 모두 벽으로 막아 감실형(龕室形) 건물을 구성하였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로 알려져 있다.
극락전의 단순해 뵈는 건축미를 보완해 주려는 듯 '봉정사 삼층석탑(유형문화재 제182호)' 주위로 예쁜 꽃밭이 형성돼 있다.
봉정사 삼층석탑은 무게로 인하여 기단부의 일부가 약간 파손되었고 상륜부(相輪部) 일부가 남아 있지 않으나 거의 완형에 가까운 석탑이다.
높이는 3.18m로 기단부(基壇部)는 한 변이 237㎝인 지대석(地臺石) 위에 하대저석(下臺底石) 없이 하대중석을 올렸다.
중석(中石)에는 네 귀에 모서리 기둥이 있고 각 면에 사잇기둥이 2주(柱)씩 있다.
하대갑석(下臺甲石)의 상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이 바로 상대중석을 올렸다.
상대중석은 각 면마다 1주씩의 사잇기둥이 있고, 상대갑석의 상면에는 2중의 옥신받침을 새겼다.
1층 옥신(屋身)에는 남면에 감실 문을 조각하였고 문에는 자물쇠까지 새겼다.
1층에서 3층까지의 옥신에는 사잇기둥 없이 모서리 기둥만 모각되어 있다. <자료요약>
극락전 편액은 1386년 병인년(丙寅年) 송파(松坡) 동몽(童蒙)이 썼다.
이는 안동 권씨 권행의 15세손 송파(松坡) 권인(權靷)을 말하며 동몽(童蒙)은 자신을 낮춰 부른 말이다.
그 옆에는 광서(光緖), 즉 청나라 덕종 광서 8년이므로 1882년 임오년(壬午) 4월에 채색하였다고 쓰여 있어 극락전과 같이 현판도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건물의 내부는 바닥에 네모반듯한 벽돌을 깔고 뒤쪽에만 2개의 고주를 세워 그 사이에 불단(佛壇)을 설치하였다.
불단 위에는 불상과 불화(佛畫)를 봉안하였는데, 그 주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 윗몸을 짜맞춘 뒤 다포식(多包式) 구성을 지닌 지붕을 씌워
닫집(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을 마련하였다.
맞배지붕의 극락전 옆모습.
대웅전과 극락전 사이에 있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호인 '안정사석조여래좌상(安定寺石造如來坐像)'
경상북도 안동시 미질동에서 발견된 것으로 안정사에 있었던 것인데, 안동댐 건설로 인해 안정사가 없어지면서 봉정사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금가루가 칠해져 있어 자칫 금동불상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석불이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있고 얼굴은 둥근 편이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가슴부분에 표현된 나비 리본 모양의 매듭이 인상적이다.
손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가락이 아래로 향한 모습으로 땅속의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반원형으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문화재청>
대웅전 좌우에는 무량해회(無量海會)와 화엄강당(華嚴講堂)과 )이 있다.
무량해회는 '헤아릴 수 없고 바다처럼 넓은'이라는 뜻으로, 원래는 율원(律院)이었으나 현재는 요사채로 사용된다.
이곳이 율원이었음은 기둥에 걸린 주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지금부터 이 몸이 부처가 될 때까지 自從今身至佛身
계율을 굳게 지켜 범하거나 훼손하지 않겠나이다. 堅持禁戒不毁犯
원컨대 모든 부처님께서 증명을 해 주소서 唯願諸佛化證明
비록 목숨을 다 바치는 한이 있어도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寧捨身命終不退
봉정사 화엄강당은 강당으로 사용되지 않고 주로 종무소 기능을 하고 있다. 남측에 있는 1칸의 부엌도 폐쇄되어 창고로 쓰고 있다.
1967년 6월 23일에 보물 제448호로 지정되었다. 2009년 현재 봉정사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장대석(長臺石) 댓돌 위에 두꺼운 판자를 쪽마루처럼 깔아 놓았는데, 사분합(四分閤) 띠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중앙간(中央間)과 북쪽 간이
하나로 되어 있는 온돌방이 되어 있다.
나머지 남쪽 간을 부엌으로 만들어 놓았으나, 그 박공 쪽 벽을 헐어서 내부를 넓힘에 따라 건물 원래의 모습이 약간 손상되었다.
무량해회(無量海會) 편액. 융희4년 경술이면 1910년 일본놈에게 나라를 빼앗긴 해이다.
* 융희(隆熙)는 대한제국 순종 때의 연호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연호이다. 1907년에서 1910년까지 4년 동안 사용되었다.
석능(石能) 김두한(金斗漢)은 ‘무량해회(無量海會)’ 외에도 만세루 현판과...
화엄강당(華嚴講堂)’ 편액에도 김두한의 낙관이 있지만, 어떤 인물인지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경술단장서 석능 김두한'
보물 제449호의 고금당(古金堂)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단층건물로 맞배지붕이다.
극락전 왼쪽에 있는데, 1969년에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는 1616년(광해군 8)에 손질하여 고쳤다고 한다.
1969년 이전에는 북쪽 지붕이 팔작지붕이었고, 건물 앞쪽에는 쪽마루가 놓여 있었으며, 앞면의 각 칸마다 외짝 여살문을 달았다.
고금당은 요사(寮舍)로 사용된 건물로, 마주 보고 있는 화엄강당(華嚴講堂)과 제법 비슷한 점이 많지만, 공포를 3칸의 기둥 위에만 올린 주삼포(柱三包)를
택하여 다소 다르다.
고금당 편액
봉정사 후문을 빠져나와 영산암 돌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올라서면 마치 'ㅁ'자형 사대부집처럼 보이는 봉정사 영산암(鳳停寺 靈山庵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26호)이다.
2층의 우화루(雨花樓)는 바깥채 역할을 하고 있고, 1층 문을 지나면 계단을 통해 영산암 안마당으로 진입하게 된다.
밖에서는 영산암 내부를 제대로 볼 수 없는 구조다.
우화루(雨花樓)라는 현판을 올려다본다. 낙관이 없어 누가 쓴 글씨인지 알 수 없으나 달필(達筆)이다.
영산(靈山)에 있는 암자(庵)에 꽃비(雨花)가 내리는 누각(樓).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안내판
누각을 지나 영산암 안마당에 이르면 온갖 화초가 조성된 꽃밭이 눈에 들어온다.
마당의 가장자리에는 자그마한 동산이 있고, 그 옆에는 장명등(長明燈)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유독 눈길을 끄는 반송 한 그루.
우화루 마루 한쪽으로 다향실(茶香室)이 마련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이곳 우화루가 일종의 강학공간 역할을 하는 것 같다.
편액이 걸린 다향실 대들보는 자연목 생긴 모습 그대로이다.
반송 뒤로 아주 고풍스런 건물 송암당(松岩堂)
이 반송((盤松)이 송암당의 이름을 있게한 것.
송암당 편액과 대들보와 용 문양.
“시작도 끝도 없어라. 나지도 죽지도 않는 이 한 물건! 마음 달이 물 밑에서 차오를 때, 나의 주인공은 어디로 가는가?
강남에서 온 제비야 고향 길은 어디로 나 있더냐. 네가 물어간 볍씨 한 알에 황금빛 수선화는 입을 열더냐?”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년)?'이야기다.
이 영화의 배경이 바로 영산암이다.
영산암에 주석하는 영화 속 '혜곡' 노스님은 동자승 해진, 젊은 승려 기봉에게 화두를 던져주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준다.
그들은 진정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을까? 노스님은 죽고, 기봉은 번뇌하고, 해진은 아직 깨달음이 뭔지도 모른다. 그것은 생각보다 멀리 있었다.
어디선가 들릴 듯 말 듯한 목탁소리. 응진전 열린 문으로 가만히 다가가 안으로 고개를 넣었더니, 부처님 전 정좌하고 기도하시는 스님.
그렇게 가만가만 목탁치는 모습은 생전 처음. 놀란 듯 뒷걸음을 쳐서 내려오고 말았다.
단청은 빛이 바래 일견 낡아 보이지만 옛스러운 고색(古色)으로 보면 정감이 느껴진다.
장명등(長明燈) * 무덤 앞이나 절 안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을 일컫는다.
일주문을 빠져나와...
일주문 편액을 살핀다.
은초 정명수(隱樵 鄭命壽, 1909~2001)선생의 글씨다. 은초 선생은 진주 출신으로, 성파 선생의 추사체에다 온유하고 강직한 성품이 밴 독특한 서체이다.
봉정사 일주문 관지.
주차장에 도착이다.
화장실 앞의 등산로 안내판.
일찌감치 산행을 마치니, 언제 태풍이 불었느냐며 거짓말처럼 날이 개였다.
귀가길에 '학봉 종택'을 들리기로 하였다. <경북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856>
학봉종택은 학봉 김성일의 종가이다.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156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와 호조의 낭관을 거쳐 1576년(선조 9)에는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대간, 홍문관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1579년(선조 12)에 함경도 순무어사(巡撫御史)로 나가 6진(鎭) 등 국경지대를 살펴보았고,
1583년(선조 16)에 다시 황해도 순무어사로 나가 민정을 살피고 돌아왔다.<자료>
대문채 솟을 삼문에는 '학봉선생구택'이라 쓰여있다.
잔디가 곱게 갈린 종택 마당.
종택 건물은 일(一)자형의 안채와 사당, 문간채, 풍뢰헌, 운장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봉종택은 1995년 12월 1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었다.
1590년에는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정사(正使) 황윤길 등과 함께 일본으로 갔다.
1591년 일본에서 돌아온 황윤길은 현지의 분위기를 볼 때 일본이 침공해올 것이라고 보고했으나, 김성일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 보고했다.
황윤길 외에 다른 수행원들도 일본의 침공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으나 조선 조정은 김성일의 보고를 믿는 우를 범했다.
이듬해인 1592년 일본이 침공해오자 선조 임금은 김성일의 처벌을 명했으나 김성일은 그와 동문수학했던 유성룡의 변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김성일은 초유사에 임명되어 함양, 죽산 등지에서 격문을 띄웠으며 곽재우의 도움을 받아 의병을 일으켜 경상도 지역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어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가 되어 관내 각지를 순행하며 독전하다가 이듬해 진주공관에서 순직했다.<자료>
당호(堂號)는 풍뢰헌(風雷軒)이다.
풍뢰헌 편액
대문을 나와 기념관인 운장각을 향한다. 운장각(雲章閣)은 학봉 선생의 유물관으로 1987년에 개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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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자 형의 안채를 기웃거리다 편액 한 점을 담았다.
광풍제월((光風霽月)은 중국 송나라 황정견(黃庭堅)이 대표적 성리학자 주자의 인품을 형용하여 ‘가슴 속의 맑고 깨끗함이
광풍제월(光風霽月: 화창한 날씨의 바람과 비 갠 뒤의 달)과 같다’라고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필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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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기념관을 들어가 일단 두서없이 셔터를 누르기로 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道와 德을 널리 알았으니 文이요,몸을 바쳐 나라를 받들었으니 忠이다.
- 학봉기념관의 소제목을 두서없이 나열한다. -
* 바다에는 이순신이요, 육지에는 김성일(진주대첩을 총 지휘하다.)
* 학봉과 육전의 영웅들.
* 민심과 국가안전을 위하여(귀국보고의 진실)
* 의병의 아버지(임진왜란을 역전시킨 3대전략
* 목민의 이상을 펴다(순무어사,나주목사)
* 목숨을 건 외교투쟁(일본 통신부사)
* 정파를 초월한 조정의 호랑이
* 퇴계학의 적통을 잇다.(학문과 사상)
* 퇴계선생께서 병명(屛銘)을 내리다. 도통전수(道統傳授)의 징표. '우 선생수제김학봉병명'
翼翼文心 蕩蕩武極(익익문심 탕탕무극): 공경하고 삼가는 문왕의 마음이요, 넓고 넓은 무왕의 진리로다.
博約兩至 淵源正脈(박약양지 연원정맥): 박문약례 두 가지를 모두 至極(지극)하게 하였으니 道統淵源(도통연원)의 바른 脈(맥)을 이었도다.
이것은 朱子를 칭송한 말이다. 박약(博約)은 박문약례(博文約禮)의 준말이다.
학봉이 썼던 말안장과 가죽신, 안경,철퇴,유서통,각대 등이 진열돼 있다.
말안장
가죽신
안경은 우리나라 최초이기도 하지만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것이라고 한다.
철퇴
호패
유서통(諭書筒)
* 유서(諭書)는 임금과 지방에 있는 관찰사,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등 일선 지휘관과 군사적인 문제를 지시 보고하는 중요한 내용의 문서이다.
각대
퇴계선생의 학맥도
학봉이 초유사로 진주성에 도착하니 성은 텅 비어 있었다.
의병장 조종도와 이노가 학봉을 찾아와 "적의 칼날에 쓰러지느니 강물에 빠져 죽자"고 말한다.
학봉이 이들을 설득한 뒤 쓴 결사항전을 맹세한 시다.
'촉석루 위에 마주 앉은 세 장사/
한잔 술 비장한 웃음으로 남강 물에 맹세하네/
남강 물 쉬지 않고 도도히 흘러가듯/
저 강물이 마르지 않는 한 우리의 넋도 죽지 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