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는 휘핑크림보다 부드럽고 선교효과는 시럽보다 더 달콤했다
성당에 근사한 카페 만들어 쉼터로 제공 맛좋고 가격 착해 지역민 발길 사로잡아 수원교구, 성당 신축시 카페 설치 의무화
'악마의 음료'라 불렸던 커피가 성당에 와 세례를 받고 '검은 천사'로 등극했다. 요즘 몇몇 성당은 근사한 카페를 갖추고 신자는 물론 지역민들을 위한 쉼터가 되고 있다. 아이들도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을 데리고 성당 카페에 와서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어렵게 말문을 열어 "성당에 가자"고 하지 않아도 먼저 성당을 찾는다. 커피 때문에 확 달라진 본당 분위기는 휘핑크림보다 더 부드럽고, 선교 효과는 시럽보다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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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흑석동성당 카페 '하랑'에서 이경훈 주임신부가 커피를 만들려고 커피 원두를 갈고 있다. |
#천국의 커피, 카페 '하랑' 서울 흑석동성당 카페 '하랑'(cafe HARANG, '하느님 사랑'의 줄임말). 카페에서 만난 커피 봉사자 서경숙(로사, 54)씨는 요즘 성당에 갈 때마다 자신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낀다. 서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업주부였는데 (이경훈) 신부님에게서 커피 만드는 법을 배워 부평에 커피전문점을 열었다"며 "삶과 신앙생활에 활력을 얻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성당카페에서 즐겁게 봉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1년 7개월 전만 해도 서씨가 성당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미사참례가 전부였지만, 지금은 평일에도 성당에서 봉사할 정도로 열심인 신자로 거듭난 것이다. 오전 10시 40분이 지나자 평일미사를 마친 신자들이 카페에 들어와 취향대로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를 잡는다. 주문을 받는 이는 다름 아닌 이경훈 주임신부다. 이때부터 이 신부와 서씨를 비롯한 봉사자들 손놀림이 빨라진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서부터 향기로운 드립 커피까지 주문도 다양하다. 커피 만드는 봉사자들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봉사자들은 모두 바리스타(커피전문가) 이 신부에게 교육을 받았다. 새콤한 레몬향이 나는 에티오피아산 이가체프 원두로 커피를 만든 이 신부는 "로스팅(커피 생두에 열을 가해 볶는 것)한 지 얼마 안 된 신선한 커피일수록 물을 부었을 때 원두 한가운데가 솟아오른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랑 카페는 커피 생산국 최고의 생두만을 골라 직접 로스팅하기 때문에 맛과 향이 국내 최고임을 자부한다"고 말했다. 이 신부는 미사가 끝난 뒤 신자들이 성당 밖 카페에서 만나는 것을 보고 본당 활성화를 위해 고심하다 아예 바리스타가 됐다. 이 신부는 "고급 커피에 대한 신자들 관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성당을 카페로 만들자'는 생각에 무릎을 탁 쳤다"며 "하루에 커피 한 잔도 잘 마시지 않던 사람이 바리스타가 돼 커피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고 웃음 지었다. 하랑 카페는 커피가 맛있는 곳으로 소문이 나면서 지역 주민이 자주 찾는 커피 명소가 됐다. 얼마 전에는 커피마니아들이 찾아와 "한국에서 맛있다는 커피는 다 마셔봤지만 이렇게 맛있는 커피는 태어나서 처음"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날도 자녀를 동반한 한 가족이 카페를 찾아와 로스팅머신 작동법과 커피 만드는 법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아예 커피 교육 수강신청을 하고 갔다. 성당 마당에 있는 창고에는 로스팅 머신도 있어 매주 40㎏의 생두를 로스팅한다. 이 신부가 직접 로스팅한 원두들은 하랑 카페는 물론 타 교구 본당 카페에서도 사용될 정도로 인기다. 하랑 카페는 매주 두 차례(수ㆍ금요일) 커피 교육을 실시한다. 커피 교육은 카페 덕분에 본당 자모회 회원 수가 10배 이상 늘어날 정도로 본당이 활성화되자 커피를 사목에 연결하고자 하는 인근 본당과 사목자들 요청에 따른 것이다. 하랑 카페는 커피 판매로 본당을 활성화시킨 데서 그치지 않고, 월 150만 원 가량인 커피 판매 수익금 대부분을 지역 주민 복지를 위해 사용하고 있어 운영에서도 모범이 되고 있다. 이 신부는 "성당에서 단순한 봉사를 요청하면 호응이 적지만, 전문 지식이 필요한 커피 봉사는 젊은 주부부터 앞다퉈 하려 한다"며 "신자들이 필요로 하고, 관심 갖는 분야를 사목과 접목하면 본당 활성화와 선교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행운동의 천국 '마리아홀'
서울 행운동본당(주임 이상용 신부) 카페 마리아홀 역시 동네 자랑거리다. 올해 1월 1일 문을 연 뒤 신자들은 물론 지역주민 사이에서 만남의 명소로 손꼽히기 시작했다. 성당 1층 절반 이상의 넓은 공간에 자리 잡은 마리아홀에서 나는 은은한 커피 향기가 문화적 혜택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지역 주민들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 행운동성당이 주택 밀집지역에 있어 인근 주민들은 시내에 나가지 않고도 고급커피를 즐길 수 있게 됐다. 본당은 카페뿐 아니라 성당 주차장 등 성당 주변을 성모공원으로 꾸며 주민 쉼터로 개방했다. 성당 곳곳에 파라솔을 갖춘 티 테이블을 둬 테이크 아웃 커피와 함께 느긋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일반 커피전문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착한 가격(1000~2500원)으로 양질의 커피를 판매하는 것도 지역민 발길을 사로잡는 비결 중 하나다. 카페장 이미경(엘리사벳, 54)씨는 "마리아홀이 눈에 띄는 위치가 아님에도 스스로 찾아오거나 손님 접대를 위해 카페를 찾는 이들이 많다"면서 "주민 중에 자연스레 천주교에 관심을 두게 된 이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귀띔했다. 마리아홀은 주말과 주일엔 신자들로 넘쳐나지만 평일 낮에는 청소년들 쉼터가 된다. 학교를 마친 신자 청소년들이 자기 반 친구들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성당에 오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에게는 절반값인 500원에 아이스크림을 판매하기에 큰 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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