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자기 아내 사라가 잉태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상속자는 자기의 종인 엘리에셀이 될 것이라고 고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번성케 하실 것을 믿었다.
키에르케골은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것을 기대함으로써 위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위대했던 사람은 불가능한 것을 기대했던 사람이다"라고 함과 동시에 '불가능한 것을 기대했던 사람'을 '하나님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자'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공포와 전율 중에서..
그러나 아브라함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아브라함이 바라고 믿었다는 것은 자신의 소망에 대하여 믿음을 가졌다는 뜻은 아니다. 더 나아가 개인의 소망이 성취되는 것을 하나님과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바울의 의도와 모순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랐기 때문에 소망이 성취된 뒤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
그는 믿고 바라는 모든 것의 근원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리고 있다. 과학에 있어서 사실에 대한 '확신'은 과학자가 세워 놓은 가설을 추론하여 밝혀진 사실 비록 이 사실이 진리는 될 수 없을지라도 또는 추론에 의해 세워진 가설에 대한 '확신'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앙은 전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믿고 바라는 것이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목적의 결정성, 곧 약속의 신실성을 믿고 바라는 것이기에전제된 가설을 추론하여 믿는 과학적 확신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 이 내용은 창 15:5 b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말씀의 인용구이다. 여기서 '후손'이란 문자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되지만, 창세기 본문에서나 본절에서는 '율법에 속한 자'와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 모두를 지칭한다.
[롬 4:19]"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 바울은 생식 능력이 없는 것을 '죽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헬라 본문에서 '죽은 것 같음'이란 말이 아브라함에게는 완료 수동태 분사형으로 언급되어 있으며, 사라에게는 명사형으로 언급되어 있다. 사라에게 명사형으로 사용된 것은 앞에서 사용된 분사형의 반복이며,
아브라함에게 완료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이미 생식 능력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개역 성경의 번역에서 사용된 '같음'이란 말은 헬라 본문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특히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있지 않으나 헬라 본문에는 '이미'를 의미하는 헬라어 '에데'가 사용되어 두 사람 모두 생식 능력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17절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라는 말씀이 '이미 생식 능력을 상실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생식 능력을 회복시키시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은 24절의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라는 구절과도 연결되어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은 사라의 태가 생산 능력이 없는데서 생산의 능력을 갖추게 된 사실과 영적으로 일맥 상통한다. 영적인 의미에서 생산 능력이 없는 사라가 그의 후손을 생산하게 된 것이나 죽었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셔서 '생명을 주는 영'으로서 잠자는 자의 첫열매가 되신 것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롬 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의심치 않고 - '의심하다'의 헬라어 '디에크리데'는 '디아크리노'의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아브라함의 의심하지 아니한 행위가 개인의 능동적인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디아크리노'는 '가려내다, '구별하다' 또는 '스스로 마음에 갈등을 일으키다'라는 의미인데 본절에서는 아브라함의 '확신'과 반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의심치 않았다'는 것은 소망에 근거해서 믿음으로 살았기에 갈등할 수가 없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뒤나모데 테 피스테이'에서 '믿음' 앞에 전치사가 없이 여격으로 사용되었다. 메첸은 전치사가 없는 단순한 여격은 수단이나 방법을 의미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 예로 '에게이론 타이 토 로고 투 퀴리우'는 '그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일으킴을 받는다'를 의미하는데 주님의 '말씀'이 '일으킴을 받게 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절은 문자적으로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믿음'이 '강하여지게 되는' 수단이 된다.
그리고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강하게 붙들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한 가지 난제가 발생한다. 창 15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이 끝까지 변함없이 믿었다는 사실이 창 17:17의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라는 말씀에 의해 도전받게 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이와 같이 분명하게 의심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고 진술하고 있는가?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은 다음과 같이 해결될 수 있다. 비록 혹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연약하여져서 의심을 하였으나 다시
하나님께서 그것을 강하게 해주셨다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이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다만 아브라함이 의심을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즉 그의 자손이 수없이 많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그 약속은 문자적으로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라를 통해서만 성취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비록 하갈은 사라의 몸종이었지만 하갈의 자식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고하기를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 15장에서 말씀하셨던 그 약속을 재차 창 17:19-21에서 말씀하심은 아브라함의 약해진 믿음을 다시 확고히 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사라의 태에서 난 자만이 그 약속을 성취시킬 것이라는 점을 아브라함에게 못박으신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 본 구절에 대해서 구약성경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다만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창 17:19-21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재보증받은 아브라함은 곧바로 하나님께서 이전에 명하신 할례 의식을 행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방법에 대해 확고히 믿게 되었음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롬 4: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약속하신 그것 - 본문에 언급된 약속의 구체적인 내용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는 것과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고한 것이다. 이약속은 아브라함의 소망과 확신에 의하여 얻어낸 보증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보여 주신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에 근거한다.
아브라함의 확신보다 더 확실한 것은 그분의 약속이다. 왜냐하면 약속은 하나님 자신의 전능성과 신실성을 나타내신 목적있는 작정이기 때문이다.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 이 말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며 또한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라는 말씀에 대한 확신이기도 하다.
본 구절에 대하여 혹자는 본절이 "아브라함의 신앙의 힘과 활기를 완벽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고 진술하기도 한다.
[롬 4:22]"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그러므로 -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그러므로' 다음에 '카이'가 언급되어 있다. '카이'는 일반적으로 접속사로 사용되어 '그리고'를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또한 역시'라는 의미를 지닌다.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은 9절 하반절에서 언급했던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라는 말씀을 다시 반복하면서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롬 4:23]"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실은 동시성과 통시성을 동시에 지닌다. 즉 그 원리는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 모두에게도 적용된다. 이에 대해서 성경 자체의 증거로는 15:4;시 102:18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당신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만 적용되며 모세 이후부터는 율법만이 적용될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것이다.
[롬 4: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 '우리'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 본절은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손길이 열려 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이는 유대인의 특권을 부인하고 있는 23절의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라는 내용과 호응을 이룬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논리를 '믿음의 내용'으로 옮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화제를 끌어내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기가 언급했던 하나님의 약속이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은 동일한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결국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는 것과 신약 시대에 성도가 예수를 믿는 것은 내용상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실현될 '약속'에 대한 것인 반면, 신약 시대 성도의 믿음은 성취된 '약속'에 대한 것이다.
[롬 4:25]"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는...살아나셨느니라 - 본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성도에게 적용시키면서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두 구절을 대조시키고 있다. 즉 '우리 범죄함'과 '우리를 의롭다하심'이 대조되어 있고,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와 '위하여 살아나셨으니라'가 대조되어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내어 줌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 죄를 위한 대속적인 죽음을 의미하며, 우리를 위하여 살아나심은 대속의 결과인 '의'를 보증하고 선포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바울은 24절에서 믿음의 내용으로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것에 대하여 언급했던 것을 성도들에게 다시 적용시키는 논리의 순서를 밝고 있다.
한편 바울이 예수의 대속적 죽으심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은 것은 사 53:1-9과 같이 구약 시대에서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어 유대인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논리적으로 설명되고 증명되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해 구약 성경을 인용하면서까지 굳이 증명을 시도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내용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이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을 위해 더 유익한 것으로 판단되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5장에서 8장까지 줄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성도들에게 어떤 의의를 갖게 되는지에 대해서 진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