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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가 인천작전 말고는 잘한게 없다고 구박했는데
그럼 우리는 우리땅에서 벌어진 우리전쟁에 대해 과연 잘한게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잘한게 별로 없다..
외세에 의한 개입없이 서로 깔끔하게 맞짱 떴다면 초전에 박살나고 끝났다.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엥겨붙어 군수장비를 지원받긴 했지만
신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대하여 발빠른 체계를 잡은데 반해
대한민국은 혼란스러운데다, 미국이 군사력 강화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국군이 전쟁중 손가락만 빨고 있었냐 하면 그건 아니다..
개전초기에 청성부대인 6사단은 춘천으로 밀고오는 북한군 2군단을 박살내서
거꾸로 38선을 넘을지말지 생각까지도 하여 김일성으로 하여금
이 춘천반동 아바이들, 당췌 어디서 나타난 간나들이야?
하며 군단 재편성을 강요하고 군단장,사단장까지 전원 파이어라는 처방까지 내리게 했다.
춘천은 지금 전선과 멀리 있지만 당시는 38선에 가까운 최전방이었다.
1950년 6월28일 서울을 접수한 북한군이 한강을 건너지 않고
주력부대가 3일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시간을 지체했던 미스테리가 있었다.
몇년전 KBS 역사 스페셜에도 나왔던 얘긴데
서울을 점령한 서쪽주력과 춘천쪽에서 진군하는 2군단이 수원을 앞뒤로 포위하면서
국군을 무력화하여 조기 종전을 하려던 계획이었던게, 춘천쪽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6 사단의 춘천 선전은 북한군의 당초작전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고
전체전선으로 인해 밀려 내려가긴 했지만 국군전력의 보존에 큰 보탬이 되었다.
인천작전후 워커의 8군으로 편성되어 한국군 진격사단으로서
초산까지 발바닥 땀나게 들이댄 것도 6사단이었다.
초산이란데가 어딘고하니 신의주와 중강진 사이의 압록강변이다.
그러나 6사단이 잘한 일은, 군용수통에 압록수를 담아 경무대로 보낸것 까지였다.
압록강에 손한번 담궈보고 발바닥 땀이 채 식기도 전에 뒤로 돌아서
또 다시 냅다 쫒겨 오게된건 알다시피 중공군 때문이다.
중공군의 참전을 공갈포로 여긴 맥사령부는, 크리스마스 전에 집으로 보낸다는 일념만으로
골인지점인 한만국경을 향한 무한 레이스를 계속 독려한다.
장진호로 향하는 해병 1사단만이 불참한 레이스에 6사단은 10월 26일 결승 테입을 끊었다.
그러나 폼나는 북진을 하고 있을때인 10월 19일, 마오의 전격적인 결단으로
압록강을 넘은 중공군은 한반도 북부 깊숙히 야간에 산을 타고 남하하여
초산과 북진사이의 산속에서 이미 포진중 이었다.
그러니까 6사단의 선발인 7연대가 초산으로 달려갈때 그들을 숨어서 지켜 봤지만
중공군 지휘부는 교전이 벌어지게 되면 주력이 발각되므로 걍 냅뒀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됐다싶었던 중공군이 일제히 들이대기 시작한 날짜는 10월 25일이다.
즉 7연대는 중공군의 출현을 알고도 10월 26일 압록강으로 올라갔단 얘기다.
사태의 심상찮음을 느낀 김종오 6사단장이 7연대장에게
속히 본부가 있는 회목동으로 철수지시를 하지만
이미 그들의 후퇴는 온정리에 있던 2연대의 지원이 있어야 가능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 2연대는 또 다른 이리떼에게 따로 포위된줄도 모르고 있었다.
2연대는 7연대의 퇴로 확보때문에 회목동으로 이동중이었는데
거기서 부터 이리떼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상황이 불리해 우회하려 해봐도 나갈곳이 없었다.
포위가 된 상태에서 밤이되고 공중지원도 무산되자 사방에서
총소리와 꽹가리,나팔,피리소리에 의해 연대전체가 급속히 공포에 휩싸였다.
김종오는 2연대의 급박한 상황에 대해 짧지만 중대결심을 하고 지시한다.
휴대가능의 화기만 제외한 모든 장비를 소각하고 회목동으로 집결하라.
7연대의 퇴로확보 때문에 이동하던 2연대가 먼저 포위를 당한 형국이라
도와줄 방법이 없으니 알아서 탈출하라는 최후 통첩이었다.
사단본부와 함께 있던 19연대뿐 아니라 옆사단인 8사단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더 북쪽의 선봉인 7연대가 받은 본부의 지시란게,
귀 연대는 현재 위험상황에 놓여있으니, 최선을 다해 철수에 성공하길 바람..
이것은 명령이라기 보다 소망에 가까웠다.마치 마켓가든의 어카트소장 대사같다.
우리가 갈수 없으니 자네들이 이리로 올수 없겠냐던..
심야의 7연대는 꽹가리와 피리 소리에 넋이 나가며 괴멸직전 이었다.
읍써 보일지 몰라도..이 무식한 피리,나팔소리의 효과는 공포를 부르는 대단한 심리전술이었다.
전의를 상실한 7연대가 계속 격파 당하자 연대장은 소리쳤다.
전 장병은 적진을 각개돌파하여 구장동에서 만나자..
6사단 예하 부대원들은 뿔뿔히 흩어져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추위와 배고픔을 극복하며 묘향산맥을 넘는 형극의 행군을 해야 했다..
11월6일 초산의 포위망을 뚫고 나온 6사단 병력은 반도 채 안됐다.
6사단이 엄청나게 당했지만 그들만 이런 수모를 겪은게 아니었다.
미군도 중공군의 만만치 않은 이런 신비로운 전술에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상황에도 맥사령부는 오히려 단말마적인 저항으로 인식하고
크리스마스 공세에 들어감으로 인해 레이싱 후퇴를 자초하게 된다.
결국 1월4일 다시 서울을 내주고 평택 강릉선까지 밀려 내려온다.
아군의 필사적인 방어가 없었더라도 중공군은 더 급하게 내려올수 없었다.
중공군은 5일이 보급의 한계인데 보급로가 길어져 문제가 되기 때문이었다..
워커의 급사로 리지웨이가 부임하면서 슬로건이 생겼다.
전선의 구멍으로 인한 몰락의 보상 심리랄수도 있는
Hand in hand, Shoulder to shoulder를 외치며
촘촘한 연결상태에서 밀어 올리는 전략으로 바뀌었다.
이런 와중에 지평리에서의 승리로 서울을 재차 수복하게 되자..
수세의 중공군이 초반에 재미보았던 우회작전을 하려 미군의 서부쪽을 뚫어 보았으나
별무신통.. 한국군이 지키고 있는 중동부로 시선을 옮긴다.
우리 입장에서야 기분 드러운 일이지만 얘들이 한국군을 호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개막 초기 육탄전도 불사하며 선전하던 국군의 위상이
중공군 개입후 어느새 중공군에 대한 공중증으로 번져 있었다.
실은 1.4후퇴 이후 급격히 편성된 한국군의 퀄리티는 영 신통치가 않았다.
초기 병력들은 낙동강을 거치면서 많이 죽어 나갔으며 새로 징집된 병사들은
신병훈련받다 말고 북진대열에 동참했고, 나중엔 이런 자원마저 고갈됐지만
살아남은 병사들은 중공군의 포위에서 겪었던 무서운 악몽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고
그것은 초급 지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국군은 중공군의 못보던 전술에 당황했고 체계적인 대응능력도 부족했다.
미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처지는 화력도 무기력증을 더하게 했다..
전선의 중앙을 담당하던 6사단도 초기의 기백은 사라지고 초산의 기억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51년 4월 중공군 주력이 광덕산 6사단 지역으로 몰려왔다.
그때 6사단은 김화로 이동중 이었는데 사창리에서 중공군과 맞닥트렸다.
중공군은 험한 지형을 이용해 6사단 틈새를 뚫고 은밀히 침투에 성공하였고,
밤이되길 기다려 다시 꽹가리소리가 시작 되었다.
한밤중에 정적을 깨는 나팔, 피리소리 만으로도 머리카락이 곤두섰고
사방에서 총알이 날라오면서 6사단 병사들은 몇개월 전의 악몽으로 내몰렸다.
소리 공포에 빠진 병사들의 머리속에는 초산의 끔찍했던 기억이 오버랩 되었다.
포위되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이 싸워 보지도 않고 도망치라고 강요한다.
이런 기가막힌 행태는 예비대의 역습 기회마저 날려버리고
후미의 미군 포대마저 포위되는 어처구니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6사단의 줄행랑은 서쪽의 미 해병1사단과 동측의 미 24사단 사이에 커다란 구멍을 냈다.
그러나 그림이 초산때와 비슷하긴 했어도 주변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고립되어도 지평리 미 2사단처럼 교두보에서 완강히 저항하면 전세를 역전시킬수도 있었다.
그러나 6사단은 "구원 투수가 없으니 알아서 강판하라"는 악몽만 되살린채
사창리에서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해보고 패닉상태의 개판퇴각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장도영 6사단장은 수습코자 사창리 남쪽에서 방어선을 만들려 했는데
장교나 사병할것 없이 지시가 먹히지를 않으니 제갈공명인들 뭔 소용인가..
전체전선의 붕괴를 우려한 벤플리트는 6사단에게 더이상 기대하지 않고
즉각 예비대인 영연방 27여단을 투입시켰다.
도망쳐 오는 6사단을 쳐다보며 북으로 내달린 27여단은 4월23일 가평에서 중공군과 만난다.
그때부터 이틀동안 쉬지않고 혈전을 벌여, 3배나 많던 적을 물리친 27여단이 승리하게 된다.
27여단이란게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등으로 구성된 혼성 여단임에도 일사분란하게
그들이 보여준 용맹함은 도망간 6사단을 머슥한 쪽팔림으로 만든 앵글로색슨의 쾌거였다..
벤플리트는 천신만고 끝에 잔여병력을 추스린, 아들뻘의 28세 장도영에게 물었다.
헤이 유, 전투나 해봤냐?
이 치욕적인 물음에 그의 유창한 영어실력을 써먹지도 못하고 간신히 네라고 대답한다.
장도영의 눈빛을 유심히 관찰하던 8군 사령관 밴플리트는
유엔군 사령관으로 영전된 리지웨이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한국군 6사단을 해체하지 않고 재건하겠읍니다.
지들이 왜 졌는지 잘알고 있는듯하고 명예회복에 대한 의지가 보였습니다..
밴플리트의 아들은 폭격기 승무원이었는데 한국전에서 죽었다.
구멍을 틀어막은 27여단의 분전으로 다시 소강상태가 됐는데
주변 미군들이 6사단에 겁쟁이 청성부대(Coward Blue Star)라는 별명을 붙였다.
사실 객관적인 전력을 보자면 6사단이나 27여단이나 거기서 거기였으나
차이란 일천한 하급 지휘관들의 능력과 병사들의 결전의지였다.
그즈음의 국군은 포위만 당했다 하면 조건없이 내빼기 바빴다.
5월말 가평에서 영연방에게 당한 중공군 주력은 다시 동쪽으로 더 이동한다.
왜냐..이곳에 한국군 3군단이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공군 바램대로 국군 역사상 최악의 패배인 현리전투로 나타나게 된다.
후방퇴로가 차단되면서 공황상태가 된 3군단은 장교들까지 계급장 떼고 달아났다.
"군기빠진 오합지졸들의 나살기 경쟁"이라고 미 전사에 독설로 기록된 패전이었다..
한국군 3군단의 붕괴에 대해 이번에도 대타로 구멍을 틀어막은 것은 미 3사단이었다.
이제 리지웨이나 벤플리트는 한국군을 전력으로 치지도 않았다.
롬멜이 북아프리카에서 이태리군을 전력계산에서 뺀것과 같은 맥락이다.
서글픈 현실이지만 그들더러 뭐라 할수 없는게
그들 생각에 싸우다 지는것은 용서가 되지만
포위만 되면 다 내팽개치고 도망가는 행태를 이해할수 없었다.
국군 총사령관 정일권과 함께 밴플리트는 3군단 사령부로 급히 날아갔다.
당신의 군단 지금 어디있냐는 질문에 잘 모르겠다고 하자,
열받은 밴플리트는 유재흥 군단장을 그 자리에서 해임하고 3군단 전체를 해체했다.
한국군의 자존심때문에 그간 육본을 통하여 간접 지휘하던 형태도
미 8군이 직접 지휘한다 선언했지만 뭔 할말이 있겠는가..
사창리 패배로 가평 집결후 재편에 들어간 6사단은 재건을 위해 몰두했다.
장도영의 촛점은 장교 사병 할것없이 정신교육 이었다.
위기의 순간에 명령이 먹히질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라 생각했다.
더우기 자신들의 패배를 영연방이 멋지게 만회하는 놀라운 모습을 주변에서 보았고
중공군의 꽹가리,피리소리등이 살상무기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반복 주입했다.
포위되도 방어만 잘하면 이길수 있다는 신념을 귀가 닮도록 교육했다.
장도영과 부하들은 끝까지 싸우리라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맹세문 중 한귀절이다..
이 땅이 뉘땅이며, 이 민족이 뉘라서 살릴것인가..
그들은 겁쟁이 부대로서 패전의 치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으며
엄청나게 빡세진 훈련에 대해서도 불평하는 사병은 아무도 없었다.
5월16일 현리에서 국군 3군단이 무너지고 있을때
용문산을 방어하던 6사단 주위로도 중공군의 집중 공격이 시작 되었다.
중부전선중 구멍이 틀림없을 6사단을 부수고, 현리쪽의 중공군과 연결키 위함이었다.
장도영은 좌측에 19연대, 우측에 7연대를 배치하고 진지를 구축하였으나
적이 북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오면 문제가 된다고 판단하여
2 연대를 정면에 배치하는 역발상의 초강수를 둔다. 6사단의 죽기살기 결전의지였다.
5월18일 밤이 되자 중공군 63군의 나팔소리와 함께,총알들이 쏟아졌지만
2연대는 전혀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응사했다.
예상과 다른 야무진 반응에 당황한 적이 압도적 우위의 수로 포위하려 하자
2연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포위 밖의 진지로 일사분란히 철수하였다가 다시 방어전을 펼친다.
여적지 보지 못했던 2연대의 체계적이고 능란한 결사항전은 중공군 전체가 이곳으로 집결되도록 유인했다.
2연대는 고슴도치처럼 격렬히 저항했고 10여 차례나 막아내자, 적은 때리다 지쳐갔다.
2연대와 함께 동분서주하며 목이 터지도록 독려하던 장도영은,
드디어 좌우의 19연대와 7연대에 동시 돌격명령을 내린다.
그동안 중공군에 수도없이 당해온 한맺힌 리벤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2 연대에만 정신이 쏠려있던 중공군이, 등뒤에 나타난 아군의 공격에 당황하였고 순식간에 분리 되었다.
포병과 공군의 지원하에 진지를 고수하던 2연대와 좌우 연대가 연결이 되자 적은 역포위 되었다.
포위된 이리사냥은 이틀간이나 계속 됐고, 치명상을 입은 이리떼는 21일 북한강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용문산 전투는 사단급전투에서 한국군이 중공군에게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그것은 개전이래 처음이었다.
현리지역을 미 3사단이 메우게 되어 6사단은 전선을 인계하고 24일 도주하는 적을 쫒아 전선을 박차고 나간다.
초산에서의 공포와 사창리의 치욕에 대한 복수극은 북배산에서도 이어졌다.
대일항전의 전통을 자랑으로 여기고, 팔로군으로 구성된 중공군 최정예 63군은
국공내전의 경험에도 6사단의 신속한 차단작전으로 또다시 북배산에서 고립되었다.
그물을 좁혀가자 그들은 우왕좌왕하며 쏟아지는 포탄에 저항도 못해보고 질퍽거렸다.
그들이 피난처로 찾은 곳은 북쪽의 화천방향이었고, 그곳 밖에 없기도 했으나
포탄을 피해 도망간 그곳은 화천댐에 의해 담수된 화천호가 뒤를 막고 있었다..
북배산을 빠져나와 화천호로 밀려 도망간 그들 앞에 6사단이 다시 나타난다.
그들은 히딩크처럼 아직도 배가 고팠고, 그간 당한 앙금이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63군은 등뒤의 호수로 배수진을 치고 맞섰으나, 이미 푸른별에 압도당한 공포의 상태였으며
그들의 필살의 무기였던 피리나 나팔도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이 대목에서 장도영은 흥분하거나 자만하지 않았고 끝까지 침착했다.
근접전투를 벌이게 되면 아군에게도 희생이 예상되어
적의 중심부에 포격을 가하면서 서서히 좁혀 들어갔다.
이제 63군이 할수있는 선택이란 포탄에 맞아 죽거나 화천호에 뛰어들거나 였다.
여적지 간신히 살아남은 수천명이 물속으로 뛰어들기 시작했지만 이내 익사하여 거의 죽어갔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6사단 전 장병은 두손을 하늘로 향하며 환호를 외쳤다.
그 환호성은 스스로의 감동이었으며 1,300년전 을지문덕이 이룬 살수대첩의 재현이었다.
죽은자가 1만7천명이 넘고 포로가 2200명이었다.
8천명으로 구성된 6사단이 2만5천의 정예부대 63군을 통채로 날려버린 것이다.
이 전과는 1.4후퇴후 선전하던 미군도 못한 일이었고 이후로도 이를 능가하는 승리란 없었다.
현리에서의 참담한 패배로 국군에 대한 불신감이 만연하던 시점에서,
그것도 불과 한달전에 도망치던 겁쟁이들이 이룬 전과라 8군 지휘부는 보고를 믿지 않았다.
보고서 숫자가 잘못됐으니 다시 올리라고 도로 내려보낼 정도였다..
바로 얼마전 3군단을 해체시킨 벤플리트는 현장을 방문하면서
오는 길가에 널부러져 있는 즐비한 중공군 시체를 보고 입을 못 다물었다.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나서 그가 장도영에게 건넨 말은 감격에 겨운 오직 이 한마디였다.
정말 잘싸웠소..
그의 회고록을 보면 그때 정말로 더이상 할말이 없었으며
사창리 패배후 6사단 해체를 보류한 자신의 판단이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했다.
그간 한국군이 보여준 나약함과는 분명히 달라 보였기에 재기할수 있을걸로 생각했지만
한달만에 이런 위대한 승리를 해낼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노병은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전투이후 중공군은 더이상 한국군을 구멍으로 생각하지 않게 됐으며
그간 지긋지긋하던 공중증에 대한 컴플렉스를 일거에 날려버렸고
전 한국군에게 전파되어 떼거리 각설이 타령을 사라지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훗날 백마고지 전투시에도 자신감을 심어준 원동력이 되었다.
서두에 잘한게 별로 없었다는 대목은, 이쯤되면 있긴 있었다고 정정함이 마땅하다.
기쁨에 겨운 이승만은 6사단을 방문하여 오랑캐를 섬멸한 곳이란 뜻의
파로호(破虜湖)란 휘호를 직접 써주었고 전적비는 지금도 남아있다.
파로호의 물고기들이 중공군 익사체를 먹고 자랐다하여 10년동안 고기를 잡지 않았다는..
후배 살수대첩이 얼마나 감격스러웠으면 계집아이들의 고무줄 놀이할때도 등장한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백만이냐, 대한남아 가는데 초개로구나.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청성부대는 그렇게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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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6.25를 앞두고 정작 한국군 얘기만 쏙 빠진것 같아 전쟁 얘기 끝으로 올립니다.. 그간 무식하게 긴 글 보시느라 .. ^^
음냐음냐
시방 잠시 들오긴 했는데...낭중에 다시

휘리릭


강하고 집돌이 된 아들녀석이 밥
래요
엄마 ,밥줘



난 언제 밥..에서 해방되나아
글짓기는 계속 하시라는....

거시기 고수님의 글은 첨 만나면 

하며 숨이 막히는데...읽어내려가다보면...언제 끝인가 싶게 정말 글 잼있게 잘 쓰시는 마력의 펜을 휘두르신다는....
요래해도 안쓰까이
뭐, 요상한 얘기두 더러 나오고 당췌 기분이 벨루라.. 지 좋아서 하는 일 이었는디 지가 안 좋으니 우짜것슈.. ^^ 항상 내 얘기가 내 글에 대해서 이견을 제시함은 외려 환영하는 바이지만, 왜 이런 글을 올리냐는 듯한 논조에는 대번에 뚜껑이 열린다는..
언넘이 고수님 뚜껑 열리게 한겨

아래 줄줄이 댓글 쓴 팬들을 위해 다시 펜을 드시옵소서

불가하옵니다. 형님 절필이라뇨? 본디 선비란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쓰는 것이라 했거늘 어찌 이리 자장면 젓가락 분질르듯 붓을 꺾는단 말이요. 부디 더 많은 백성을 위해 붓을 드시어 세상을 밝게 하시옵소서... 부디 통촉하소서....
죠락님
만쉐이



절필이라니께 무신 필화사건 겪은 진짜배기 글쟁이 같구먼..지가 기분 풀리면 우짤까 몰라도 시방은 좀 거시기헌 상태라 걍 냅둬유..본좌의 글 이란게 있어두 그만, 읍써두 그만 전혀 상관 읍따는..
어떤 이유로도 사람이 같은 사람의 목숨을 빼
는 건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제 정신 상태에선 있을 수 없는 전쟁 특히나 작전권도 없이 미국의 주도하에 치뤄진 비극적인 한국전쟁 얘기는 
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단 참고로 말씀드릴 것은 우리나라 국군의 날이 광복군 창설일인 1940.9.17 혹은 오늘날 국군의 모체가 된 국방경비대 창설일 1946.1.14을 기념하지 않고 10.1일인 까닭은 그 날이 바로 한국전쟁 때 국군 3사단(백골부대) 23연대가 최초로 38선을 돌파한 날이고 또 한국전쟁 당시 최북단 혜산진까지 진격한 부대도 바로 3사단 22연대 임을 알려드립니다.글고 제가 바로 3사단 23연대 출신이라는 점도.
장문의 글 잘 읽었습니다
알몬드의 10군단이 혜산진에 무혈 입성한 날짜는 11월 21일이고, 그 혜산진 방향은 애초 작전 입안때 부터 국군 3사단이 아니라 미 7사단 이었으며 국군 1군단 예하의 3사단은 백암으로 진격하였다는.. 수도 사단은 청진까지 진출했지만, 그후 동북진출 전 부대가 거기서도 출현한 중공군 때문에 철수개시 하던 중 장진호 쪽의 해병1사단이 중공군 주력을 막아 내는 동안 흥남으로 철수 하였다는.. 그부대 출신이니 연혁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 되지만 혜산진쪽은 미 7사단이 분명 맞고, 국군 3사단의 연혁에 등재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아마 미 7사단에 배속된 소규모 부대가 아닐까 한다는..
목정 아짐 글 보면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진다는.. 꾹 참아가매 봐야 할 이유가 없고, 댓글을
아야 할 의무는 더욱 읍쓰니, 미안이구 자시구 이자 끝났다는.. 

전 일케 솔직하신 목정님이 참 입브고 좋아요.

그동안 정말 잼있게 읽었습니다~ 캼샤~
하마님께서는 그간 조용히 보구 계셨나 보군요.. ^^ 암튼 재미있게 보셨다니 캼샤..

맞아, 한국군 이야기가 너무 없어서리..
뭐, 의도한건 아니었지만 6.25 도 됐고 허니 끝내면서 나름 의미도 있는듯하여..^^
햐..중공군의 피리 나팔의 심리전술 참 재밌기도 하고 오싹하기도 하네요.우리군엔 정신교육이.. 중공군은 한국전때 포로로 잡은 미군들에게 사상교육을 시켜 그때부터 세뇌교육이란 단어를 쓰게됐다죠
아 그러고 보니 곧 6.25네요 "전쟁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콤한 것"이란 말이 떠오르며...6월이 오면 우리에게 평화의 염원은 더욱 간절해지는것 같네요...그간 전쟁에 관한 글 
미롭고 재밌게 읽었음을 감사드리며^^ 다음 주제는 여성동지들이 재밌어 할 주제에 대해 고심을 해보셔야할듯 ....


피리,꽹가리, 나팔이란게 우리 농악할때 쓰는 악기자나요..그걸 가지고 전쟁하러 나온다는 발상이 참 기가 막히다는.. 암튼 아는분이 그 얘기를 해줄때 난 정말 실감이 났었어요, 그게 그렇게 무섭더라는군요..^^ 담글은 당분간..... 별루 쓸 기분도 아니라는..
투덜고수 님의 매력은 논리적인 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 삶의 고독과 고뇌가 눅진하게 녹아 내리고 있는 것이 보이지요. 이스트노 님의 글로 인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하고 또는 아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해서 여러모로 도움이 됩니다. 저는 방학도 했는데 가까우면 투덜고수 님과 차도 한 잔 마시며 세상사는 야그나 하고 싶지만 엉캉 멀어서 고거시 쉽지가 않군요. 헤헤 ^^ 저는 지금까지 기말고사로인해 온 몸을 기를을 짜는 듯 했습니다. 글을 쓰는 작가는 덧글만 봐도 그 사람의 정서를 충분히 교감할 수 있지요. 저는 전쟁을 잘 몰라서 언급을 잘 하지 못하겠고 눈이 아파 컴으로 읽지
못하고 프린트로 빼서 읽었습니다. 줄 간격 안 줄이고 바로 뺄려고 하니 에이포용지 12장 분량이라고 나왔습니다. 우쨌든지 장문의 글 쓰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에구
프린트까정 해서 볼 정도는 아닐텐디.. ^^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 앞으론 무식한 글 올릴 일도 
로 없을듯.. 으음, 근디 제가 나대는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게으르기로 얘기하면 강호의 고수인지라 내려가지는 못할듯 하고 그린님께서 일보러 오실때 잠시라도 뵙게 되면 가문의 영광으루 알것다는.. 제가 따땃한 커피 쏘께유..저도 함 뵙고 싶습니다..^^
짝짝짝...고수님! 수고하셨습니다.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마치 그 현장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어릴 적 고무줄 놀이 하면서 의미도 모르고 불렀던 저 노래가 바로 그분들의 정신을 기린 그런 노래였군요. 그분들이 계셨기에 반토막이지만...그래도 내나라 내땅에서 내나라 말을 하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고마울 따름입니다. 어서 빨리 통일을 앞당겨 옛날 애기하며 살았음 좋겠습니다./ 제 카페로 소중히 모셔 갑니다.
현장감까지 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저도 그리해보려 한거 였거든요..

고무줄 놀이 하면 면도날로 많이 끊고 도망 갔었는디.. ^^ 목련화님 카페는 어캐 들어가면 되는지요.. 블로그는 닫혀 있던디.. 긍금해서유..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는 일이지만 열강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우리나라의 비애를 생각하면 1945년 해방 직후 미국과 소련이 이 땅에 진주하지 않았다면? 미국의 지지를 받는 이승만과 소련의 지지를 받는 김일성의 분단국가가 아닐 수도 있었겠다? 해방 직후부터 6·25 이전까지 농민반란, 노동쟁의, 게릴라전, 38선 주변의 무력충돌 등으로 10만명 이상이 이미 목숨을 잃었지요. 6.25는 단순히 ‘1950년 6월25일 평화로운 일요일 새벽 4시’의 문제가 아닌. 이웃과의 불화에도 간단치 않은 사연이 있는데 민족 전체가 전쟁의 참화 속으로 들어간 사연이 그렇게 단순 명쾌할 리가 있겠는가요. 수고에 감사.^^"
이미 "헤쳐모여"가 되버린 미국과 소련의 냉전 이데올로기에 의한 첫번째 전쟁이자, 아직도 존속하고 있는 유일한 국가지요.. 미국이 필요했던건 이 땅의 지정학적 위치이지 이 땅에 사는 사람은 아니었지요.. 동기야 어찌됐건 그들의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된건 사실입니다..전쟁중에도 미국에 예속되야 했던 우리의 현실이지만 장도영처럼 수모를 딛고 일어나 미국 빨랑 보내고 자주국방을 해야할듯.. ^^
어찌이리 상세히도 승전의 기쁨을 기록하셨는지 궁금키도 하지만 글 마지막에 오랜만에 들어보는 "무찌르자 오랑캐..."도 감개무량 하네요
제가 그때 태어났을리도 읍꼬, 그저 이것저것 똥개 식식대며 마냥 책읽는걸 좋아하다 보니 들은 풍월 지껄이는거라는.. ^^ 메이디님도 무찌르자 오랑캐 할때 고무줄 많이 짤라 먹었을것 같다는..

이 땅이 뉘땅이며, 이 민족이 뉘라서 살릴것인가 ... 한국전쟁에 아까운 목숨을 앗긴 모든 젊은이들을 생각하며 올 6.25를 맞으렵니다.
맹세문이 아주 와 닿지요
sophee님은 항상 제가 느끼는데서 뭔가 와 닿으시는게 있는듯 하다는.. ^^
마치..참전용사 같으시다는^^
스포츠를 왜 좋아 하느냐면 드라마 같이 짜고치는 고스톱이 아니라 좋아 하는건데, 언놈이라구 전쟁을 미화하고 전쟁하자는 의도로 이 글을 쓴게 절대 아니지요..스포츠에 열광하듯 그런 맥락으로 전쟁 영화나 전쟁 스토리를 좋아하다 보니 이래 됐습니다.. 또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던, 아프던 안아픈 과거이던 지대루 알고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해서요.. 알아야 또 다시 되풀이 되지 않게 할수 있는거 아닐까요.. 그간 파스는 떼셨나유
^^
파로호가 왜 파로호냐
정
히 알았다는...잘 읽었습니다. 관심 밖의 부분을 이렇게 인터넷 팬카페로 말미암아 접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라 생각 합니다. 감사 합니다. 동식이 성의 지속적인 건필을 기원 드리며.... * 추신 - 담엔 전쟁 얘기 말고 "남여상열지사" 이런걸로..으음.... 헤헤..
만날 각방에서 각성하여, 여코님께 잘해 드리라는..
상렬지사 야그 허다가 넘 야하다구 뭐락하믄 채금지실껴
정말 긴 글...그래도 찬찬히 읽었습니다. 소석책 한 권을 읽는 느낌으로
내가 전에 수석 수집은 잠시 한적 있지만 소석이란 금시초문이라는.. 으음
6.25 를 맞아서 올려주신글...... 참 잘읽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합니다 ... 유익한 글들을 읽을수있게 해주셔서.....가슴아픈 과거지만 목숨바쳐 지켜낸 이땅에 사는 우리후손들이 꼬옥 제대로 잘 알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파로호란 이름의 유래도 이글을통하여 알게되었네요........어린시절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무찌르자 오랑캐......란 노래를 부르며 고무줄놀이 많이했는데..... 이스트노님이 올리신글들이 항상 최고의 조횟수를 보여주듯이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과 인기를 끌고계신데............앞으로도 계속해서 좋은글들 많이 올려주시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파로호의 유래가 재미있죠
여기 나타나는 조회수라는게 기껏해야 실제로는 100명 되기도 바쁘다고 생각합니다..조회수가 중요하다기 보다 지 좋아서 하는 일이었지요.. 그래도 관심 갖고 보아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
아..정말 재밌게 잘봤습니다.전쟁전 이승만대통령이 미국에게 탱크지원을 거절당하자 국민성금으로 캐나다에서 탱크인가 경비행기를 한대샀다던데..근데 이노므 짱꼴라들은 삼국통일(?)때도 그렇고 정말 병충해이네요...앞으로도 계속 멋지고 시원한 글 계속 예약합니다.^^;
코다신님 요즘 한줄 메모장에 잘 안보이셔서 내심 궁금하다는.......
어럽쇼, 코다친님은 우째 느닷읍씨 등장 하셨다요
긴글에 질려 버렸담서.. 후반전님은 코다친님이 보이던지 말던지 궁금해 하지 마시라는..으음
아~니 왜 궁금해하시지 마시라는겨~..글구 'The winner take it all.'..아직도 기억에 남는 시원한 글입니다.
오
그래두 아직까정 The winner take it all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건 진정 놀라운 일.. 으음
고수님 제가 이 글을 그린언냐처럼 프린트뽑아서 봤다는 사실! 그래서 이해 안 되는 대목 밑줄그으가며 이해했는데 사실 6사단이나 2연대 의 병력 인원은 잘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쨌던 6사단장님 장도영사단장님이 시킨 그 정신교육이 위기의 순간까지도 인간에게는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것을 알게 되었구요 전쟁중에도 꽹과리나 피리소리가 큰 무기가 될수있다는 사실을 알았네요 그리고 저는 좁은 소견이지만 사창리패배후 해체될뻔한 6사단을 보류했던것이 승리를 이루어내었듯이 한번의 실수로 성급하게 결론내어버리는것은 안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면 우리 고수님은 어떤 말씀을 해주실련지요?
내가 민폐 끼친 분덜이 제법 되네유.. 코골유자님, 그린님, 후리지아님 이상이 제 글을 출력해서 보신 분덜이라는..

사단장은 3명의 연대장이 부하에유.. 그러니까 2, 7, 19연대장 죄다 장도영 사단장 예하부대지요.. 장도영이 후일 이 전투를 기반으로 육참총장까지 되지만.. 5.16 혁명때도 총장이었는데, 박소장 한테 엄청 휘둘리다가 5 기생들과 반혁명을 했는데, 실패한후 도미했지요.....뭔 소린지 더 골치 아퍼 하실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