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1년조선교구가 중국교구에서 분리 설정되고
파리외방선교회에서 주교와 사제가 파견된다
그들이 조선에 들어와서 처음한것은 박해시절인만큼 모든것을. 기록으로 남겨라고 했고
공동체를 형성하라고 했다 이는 박해시절인지라
교회를 세울수가 없었지만 이것이 교회의
정신이라 여겼던 것인데
그런데 그들이 놀라워한것은 사제없이 공동체
생활을 하고있는 모습을 본것이다
선교사의 지도로 박해사실을 기록한 덕분으로
103위성인을 배출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내포 호남지역에서 피해 경상도 충북 강원도등
산간지역으로 흩어져갔다. 중국인 주문모신부보다
더 신경이 쓰였다고한다 서양인은 체형이 달라
늘 다닐때는 상주처럼 행세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각지역에 흩어진 교우촌은 여전히
평신도 여신도의 몫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문경에서도 많은 교우촌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3군데만이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문경성당 관할지역인데 등록신장2000명이고
주일미사참여자가 공소 두군데를 합쳐서
200남짓인 아주 열악한곳이다
가을이연 단풍시즌과 성지순례로. 전국에
많은 인원이 몰려서 그들은점심식사는
읍내에 있는 문경성당을 이용한다
성당내에는 여러분들이 식사를 하는공간이
있고 자고갈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별걱정없이 많은것을 보고 느낄수가있다
본당에서는 교우촌에 사람은 살지않지만
봉사자들이 시설관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안되는 이들 봉사자들로 본당이 굳건해
지는데 성서형제회도 이와 유사한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일미사때 시작전후로
교우들을안내하는 것도 도움이 될것이다
미사후에 마당에서 따뜻한커피를 제공하는
것도 말입니다 이런일은 아주 사소한일처럼
비쳐질수가 있지만 성서형제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할수있고 본당내 다른교우와 친교를
이루는데도 도움이 된다
원곡동에 있을때 구역에서 돌아가면서
커피봉사를 했고 일년에 한두번 벼룻시장을 열어
본인이 사용하지 않는 것을 기증받고
아주 저렴하게팔고 나머지는 사회복지시설에
기증하였다
우리는 이런연결고리를 이용해서
친교를 다져나갈수가 있다
서울에 살때 집근처에 큰개신교회가 있었더
그곳에 가보면 느끼는데 신자들중 많은 사람들이 봉사를 하는 것이었자요
세례를 받은지 얼마 안된 사람이나 아니면 다른곳에 살다가
이사온사람들을 예배시간후에 따로 모임을 가져서 그들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한때 외부사람들이 천주교를 신뢰하는 이유중에 하나가
개신교처럼 다가와서 설득할려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탓인지 우리는 본당에서 모르는 사람이 와도 모르는체하는 것이
습관화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주 사소한 것부터 관심을 가진다면 그 상대는 바로
응답하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신앙생활하는데 큰 보탬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본당에서 가장열심히 하는 계층이 주일학교교사인데요
그들은 성당에 일주일에 몇번나오고 그리고 방학때에도 여러가지
일을 하지만 그 기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다는듯이 전혀 봉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일학교교사는 청년인데 어떻게 된것이지
청장년층으로넘어가면서 성당에서 그들을 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천주교친목회형격인 하늘나라 모임에 갔더니
주일학교교사를 만났자요 기가 막힐정도로 성서와 교리에 해박하였지요
그러나 그의 생활은 그러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느꼈지요 자신의 신앙수준에 비해 지나치게 많이 아는 것은
다소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그런의미에서 성서형제회의 프로그램도
다소손질을해야 할것입니다 제가 느끼는 것은 코이노니아팀장이상인 말씀선포자는
반드시 수련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행사시작전에 봉사자들만이라 모여소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요즈음 제단체가 어려운점은 제대로 된 단체장이 양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수련을 시켜야 한다는
것인데 가장 좋은 사례가 레지오 쁘레시디움 단장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기도회 봉사자는 기초교육을 받고 월례모임에 참석을 의무화시킨것입니다
월례모임은 그냥 모여서 회의만 하는것이 아니라 회의후에 철야기도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전국적인 모임에서는 하기가 어렵기에
가능하다면 지구별 모임에서 적용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