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먼지가 아름답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 ============
[먼지가 아름답다]
박재화 제4시집 / 인간과문학사(2014.06.05) / 값 90,000원
================= =================
먼지가 아름답다
박재화
아홉 해 만에 이사하며
삐걱이는 장롱을 들어낸다
지하 아지트 같은
시간들 거기 모여 있다
옹기종기 가슴 부비며 모여 있다
곱고 푹신하다
포근하고 앙증맞다
오랜 부대낌과 견딤의 퇴적물
이처럼 은은하고 환하다니!
어느새 교외까지 달려온
막차의 뒷자리에
흔들리며 가는 밤의 한가운데
고즈넉이 외치는 저것들!
이삿짐을 들어낸 방 안
켜켜이 쌓인 눈물자국
아니 새로 손 내미는 시간들의
다정한 무게
아득한 그 보료에
한 마리 짐승처럼 눕고 싶다
슬금슬금
박재화
한밤중 주차장 귀퉁이
고양이 한 마리 버티고 앉았다
못 보던 녀석이다
새로 온 도둑고양이인 듯
도둑고양이라니?
버리고 간 사람이 도둑이지
내가 왜 도둑이냐?
유난히 번득이며
검은 고양이 한 마리
도도하다
비켜줄 성싶지 않다
내치고 간 사람이 도둑이라는
저 쏘아보는 눈망울!
내 비겁함이 들킨 것 같다
얼른 돌아 다른 곳에 주차한 뒤
비켜 나왔다
슬금슬금
장어운전이라고?
박재화
방어운전이란 말 들으면
불편해진다
불안하고 무섭다
목에 명치에
무언가 걸린 것 같다
방어운전이라니?
그럼 공격운전도 있나?
살려면 알아서 기고
알아서 피하라는
익명의 위협들…
도처에 숨어 있다
무턱대고 설치는 돌격대
무턱대고 가로막는 진압군
낙법落法
박재화
이기려 하기 앞서
지지 않는 법 배워야 해!
공격 전에 방어부터!
먼저 잘 넘어져야 하니까!
상처 없이 일어서야 하니까!
쓰러져도 견디며 버텨야 해!
콩꽃
박재화
너무 바빠 못 내려가요, 어머니…
명절날 아침
짐짓 전화 거는
실직失職 가장家長처럼
낮고
아득하여
무거운
저 꽃,
숨은 꽃!
산 넘는 법
박재화
산에 들어서야 산 넘듯이
산 오르는 마음들이 모여
작은 돌탑 쌓듯이
먼 길에서 막막하고 막막할 때
검은 숲에서 길을 헤맬 때
아픔 이기려면 먼저
아픔에 한 걸음 다가가야 하고
어둠 넘으려면 우선
어둠에 한 발짝 다가서야 된다고
가슴 무너진 사람들 풍어 안는
경주 남산 골골마다
엎드렸다 일어서는 바람이
나직이 속삭였습니다
아직 봄 오기 전
얼음 풀며 구르는 냇물 소리도
진양조 넘어 중모리장단 있노라고
어깨 톡톡 두드렸습니다
산에 들어야 산 넘듯
어둠 넘으려면 우선 어둠에 다가서라고
가지 끝 매달린 햇살도
따뜻이 등 밀어 주었습니다
겨울 다 가
경주 남산 오르는 길
얼마나 아름다우냐
박재화
흔들리면서도 한 길을 가는 사람
얼마나 아름다우냐
여기저기 상처로 떠돌다
늦은 가을날 돌아오는 사람 또는
쓰러졌다 일어나
애오라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
얼마나 아름다우냐
전철에서 외치다
박재화
두 번 말고 한 번만 믿어보세요 가진 것 없지만 양심은 있습니다 제 양심 걸고 파는 거니까 믿어보세요
치과에선 최소한 삼천 원입니다 이 자리에선 단돈 천 원! 큰돈 아니니 속는 셈치고 인간적으로 사보세요 제가 분당에서만 삼 년 이걸 팔고 있습니다 분당선에서 저 말고 이 칫솔 파는 사람 없습니다 여기 전화번호는 여주 ○○공장 번호고요 그 옆 휴대번호는 제 껍니다 사장이 제 친구로 특별히 봐주고 있어요 그러니까 두 번 말고 새 번도 말고 한 번만 믿어보세요…
- 나도 누구에겐가 믿어 잘라 저처럼 외칠 수 있을까?
유난히 덜컹거리는 이 하오下午!
꽃잎들이 냇물을
박재화
꽃잎들이 우, 우, 우
시냇물 무동 타고 몰려간다
눈부시게 계곡을 물들이곤
소리 없는 함성으로 나아가는 저것들
산발한 햇빛 속
물길 찾아
광야를 건너는
아프리카 누 떼 같다
어둡고 그윽한 늪을 지나
어느새 천지를 흔드는 폭포의
고독한 낙하 같다
4월에서 5월을 건너며 꽃잎들이
저리 몸부림침은 때로
이루지 못한 사람의
꿈들을 대신 앓는 걸까
4월에서 5월 사이
희고 붉은 꽃잎들 냇물을 물들이고
거기, 희고 붉었던
시간들 함께 떠간다
물흐르는 소리 듣다
- 장애인의 집 1
박재화
노성마비인 그는
언덕과 별과 나뭇잎을 노래하고
사랑을 노래한다
곰인형과 꽃병이 지켜보는 낡은 방에서
사지가 멀쩡한 나는
고장난 차와 신용카드와 허무를 얘기하고
사람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거리를 얘기한다
책상도 없이 식탁뿐인 거실에서
찾는 이 거의 없는 그는
세상을 푸르다 하고
이웃도 여럿인 나는
세계가 검다고 한다
그는 멀리 물 흐르는 소리 들으며
가슴에 내일의 물길을 내고
나는 여전히 두통 속에
오늘의 커튼을 닫는다
비극
박재화
곰곰 생각하니 여태껏
고독이 나를 지켰다
…그러나
혼자 보내는 시간을 빼앗긴
저간의 나의 비극이여
이름부르기 2
박재화
오래된 이름들
설흔 해 마흔 해 흐르니
불현듯 낯설다
설레던 시간들
벅차던 공기들 어디 가고
그 이름 왜 낯설까
이젠 잊으라는 뜻?
웬만큼 이승에 머물다가
때 되면 다 잊어야 한다는 뜻?
그 이름 놓지 않으면 나도
훠어이 훠어이 떠날 수 없다는 뜻?
우리는 하나라고?
- 휴전선休戰線 1
박재화
싸우자거나
싸우지 말자는 것들은
가끔 보았는디
싸움을 쉰다는 건 뭔 소리여?
시비를 가리면
시비가 그칠 줄 알았는디
시비是非를 말하니
시비是非가 끊이지 않는 건
또 뭔 일이여?
우리는 하나라고
하나가 되자고
다들 그리도 바라고 외치는디
어째서 잠시 쉬었다가
또 싸우겠다고 난리인 겨?
잘난 것들은 제멋대로 해도 되는 겨?
거기는 다수결도 없는 겨?
공원 한 쪽이 기울다
박재화
이른 아침 도심을 지나는 부부
손잡고 아슬아슬하게 건너
비둘기 몇 마리 기다리는
공원을 찾는다
환갑이나 되었을까
서로 잡은 두 손 반대쪽에 풍을 맞은 내외
아내는 왼팔 왼다리가 흔들거리고
남편은 오른쪽이 마냥 흔들린다
하늘이 시샘하신 걸까
저승길도 이승처럼 동무하며 가란 걸까
사이좋게 왼쪽 오른쪽 나누어 병을 얻어
꼬옥 잡은 두 손으로
기우뚱한 세상
간절히 끌고 가는 내외
아침마다 길 건너 비둘기 떼와
눈 맞추고 온다
무량한 침대
박재화
딸이 딸을 낳았다
내 품에서 재롱떨던 것이 어느새
제 분신을 내놓은 것!
딸이 낳은 딸을 보며
저리 똘망한 생명을 불러온
위대한 모성 앞에 무릎 꿇었다
중앙아시아 초원
모래바람 속에 혼자 새끼 낳으며
사투를 벌이던 흑염소 앞에서
떨며 두 손 모았듯
딸이 딸을 낳은 무량한 침대 앞에서
나도 모르게 두 손 모았다!
스쳐 지나다
- 고향시편 2
박재화
어린 날 들풀 속에 묻혀 있는
언덕을 고속열차로 지난다
몇 차례나 오가며 한 번도
내리지 못했다
머물지 못했다
고향이 그대로여야 하는 건 아니다
사람이 바뀌는데
산하山河라고 변하지 않으랴
허나 내려서 들르지 못하는 고향처럼
아픈 것도 없다
철둑 가 상기 남은 빈 집
바그만 포도밭을 스칠 때처럼
누구에게도 말 못 한
어린 날의 내부를 아리디아리게
드러내는 것도 없다
그 공원에 갔네
박재화
그대 보냐고 잊은
시간들 꿈처럼 흘러
아득한 노래 한 소절 더불어 흐를 때
홀로 그 공원에 왔네
차마 찾을 수 없었던 작은 공원
햇살도 애닯게 비탈을 내려가면
그대 떨리던 눈빛
온몸으로 보듬고 있는 벤치 보이고
그 벤치에 낯선 한 쌍
오래 비둘기와 눈 맞추고 있네
멀리서 그 자리 비길 기다리며
마음을 저문 강물 따라 출렁이네
아직도 정물靜物이 된 연인을 위해
자귀나무는 꽃잎을 오므리고
별들은 서둘러 길을 나서네
희미한 바람 한 줄기 속
축복처럼 분수가
갑자기 솟더니 멎네
그대 남기고 간 그 벤치 너머
좋은 일
박재화
개울물이 줄었다고 장마 뒤
매미 쓰르라미들 요란하다
산책로 건너편 나무들도 물비늘을 털고
개울에선 왜가리도 다리를 재고 있다
물살에 휩쓸린 부들이며 갈대 버들가지
아직도 허리 못 펴고 있는
시냇가를 무장무장 걷노라니
여기저기 지렁이들 하얗게 널려 있다
새로 깐 포장길을 건너 어디로 가려 했을까
장마 끝에 닥친 그들의 참사에
발걸음 무뎌지는 순간
온몸 뒤틀며 아스콘과 사투를 벌이는
한 녀석이 보인다
얼른 들어 숲가 흙길로 보냐주니
모처럼 좋은 일 했다!
어린 날처럼 뭉게구름 부풀어 오르는 하루…
병실
박재화
가없이 펼쳐진 풀밭
구릉 사이 갇힌
양 한 마리 무연히
나를 보고 있다
그림자 길게 동무할 뿐 그의
하늘엔 구름조차 없다
왜 무리를 떠낫는지
일행과의 거리는 얼마인지
언덕 아래 홀로 서
이쪽을 보는 눈길이 깊다
조금은 두려움이 담긴 눈!
(생은 기실 두려운 것?)
그가 건너온 초원의 바람 마른내
고단했던 휴식까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언덕의 그늘이 먼 데 늪을 적신다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할
낮은 풀들 따라서
기약 없이 정향定向 없이 떠나온
양 한 마리 오늘도
고개 들어 나를 본다
한 장의 몽골 초원 사진 앞에서
나는 시방
어느 광야를 헤매는
양 한 마리?
기생란
박재화
나 맘 잡고 살라며
방모님이 보내온
기생란 두 뿌리
있는지 없는지
겨우내 몇 번
눈 맞춘 게 고작인데
어느새 꽃을 피웠다
서너 해 지나도
아무 소식 없는
딴 붙임의 난초들 틈
고것 참 신통하다
사노라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 세상
그래, 아주 무겁지는 않은
이승이라고
깜박 잊엇다는 듯
이 늦은 봄에
기생란, 꽃을 피웠다
겨울산이 내게
박재화
신도시에 쫓겼는지
새집 하나 보이지 않는
겨울 산을 오르며
새가 날지 않는 하늘을 본다
눈도 없이 흐린
저녁 하늘 본다
생각느니 새 없는 산이
어디 산이랴
우리네 삶도 이와 같아서
소리 없는 삶 빛깔 없는 삶도
삶일까 보냐고
신도시에 치인
겨울 산이 내게 물었다
.♣.
=================
■ 시인의 말
자꾸 늘어나는 침묵의 말….
세계와 맞서지 못한 채 건너온 몸이 둘이다.
반향 없는 거리를 떠돌다 벼랑에선 느낌이지만 이쯤해서 다시 떠날 수밖에.
애달픔 없이 떠올릴 수 없는 얼굴들에게 이 작은 노래를 바친다.
2014년 봄
朴 在 和
=============== == = == ===============
박재화 제4詩集 [※먼지가 아름답다※]
[ 해설 ] -
이성적 탐미, 원형의 복원
이덕주(시인, 문학평론가)
박재화의 시는 그의 일상에서 이루어진다. 진솔하게 살아내는 그의 시적 진술은 언제나 투명하다. 시적 대상이 그의 심경을 경과하며 변주되는 모습이 다양하지만 또한 일목요연하다. 그만이 확보하고 있는 필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대상에 대한 연대감을 수용하고 대상의 깊이를 본다. 그 깊이에서 깨달음을 형사화하면서도 군더더기를 남기지 않는다. 대상을 아우르며 대상의 본질을 자신의 구도에 자연스럽게 정치한다. 오랜 기간 시를 작업해온 그의 내력이 그에게 주어진 독창적인 시적 공법을 지시한다.
박재화는 실체적 체험을 중시한다. 자신이 설계한 인생지침서를 흐트러짐 없이 준수하려 한다. 규범을 지키면서도 그의 내면은 언제나 자유로운 의지를 확산한다. 그가 일탈할 수 없는 일상에 대한 반작용이다. 그의 내면은 따라서 본질로 가는 지향을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을 복원하려는 의지다. 그의 시는 이 원형을 복원하려는 의지를 그만의 언어로 드러내려 한다. 그 자리에는 그의 천진성과 대상에 대한 통찰력이 공존한다.
그가 응시하는 일상은 시의 훌륭한 질료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내부의 탄력을 생성시킨다. 낯설고 실험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해도 그의 사유는 그의 시와 함께 변화의 빛깔을 띤다. 그 파동은 격하지 않지만 물결을 먼 곳까지 전파시킨다.
때로는 그 먼 곳, 낯선 지평에 서 있는 자신을 되돌리기 위해 자기 정화 시스템을 작동시킨다. 상실의 경험을 부재의 이미지로 만들지 않고 복원을 지향하는 이미지로 변주한다. 그 결과, 시적 이미지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확장되고 시의 문면을 파고들어 적재적소에 새로운 언어로 안치된다. 때문에 그의 시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시적 화자는 그의 시 문면마다 익숙한 페르소나로 존재한다. 박재화의 시적 역설이 차원 높게 층위를 끌어올리며 객체화를 이루고 나아가 실존적 상황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 공간은 그의 내면에서 분출되는 원체험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의 연동하는 실재적 삶은 그곳에 존재한다. 그곳은 언제나 삶의 연장이다.
비틀대며 여기까지 왔지만 많은 주먹을 맞았지만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지만 나여기 서 있다! 심판도 관중도 내 편이 아니지만(야유가 차라리 내겐 힘이다) 수없는 터널을 지나 예까지 왔는데 누가 수건을 던지라 하느냐 마지막 라운드에 타월이라니? 비록 체력은 바닥났지만 정신은 말짱하다 말해보라 내 주먹이 허공만 가른 건 아니잖느냐 가끔은 카운터 펀치도 날렸지 않느냐 그러니 내게도 박수를 보내다오 박수까진 몰라도 끝까지 지켜는 보아다오 여기서 흰 수건 던지면 누가 내 대신 링에 오르겠느냐네가 아무리 주먹을 휘두르고 일방적 응원을받아도 나를 이길 수는 없다(나도나를 이기지 못했는데 네가 나를 이긴다고?) 좋아하지 마라 너의 손이 올라가기 전 나는 링을 내려갈 것이다 축하는 해주겠다 나를 이만큼 버티게 해준 링사이드의 특별관중과 모처럼의 찬스에서 나를 제지한 레퍼리에게도 목례는 하겠다 그러나 잊지마라 네가 승자라면 나도 승자다!
- <복서> 전문
시적 화자는 생이라는 링 위에서 수없이 접속되는 타자들과 경쟁하는 복싱선수다.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화자는 지쳐간다. “심판도 관중도 내 편이 아니지만” 화자를 지켜주는 것은 화자, 자신이 되고 있는 ‘복서’다. 생의 속성이다. 화자는 “체력은 바닥났지만 정신은 말짱하다”고 자신을 위안한다.
육체는 낡아가지만 아직도 정신만큼은 젊은이 못지않다고 화자는 자위한다. 신산한 화자의 삶이지만 그 누구도 대신하지 못한다. “여기서 흰 수건 던지면 누가 내 대신 링에 오르겠느냐”며 화자의 삶은 오로지 화자만이 지킬 수 있음을 언술한다. 그래서 “(나도 나를 이기지 못했는데 네가 나를 이긴다고?)” 던지는 독백이 마치 독자에게 던지는 우문우답으로 들린다. “너의 손이 올라가기 전 나는 링을 내려갈 것이다” 화자는 타의에 의해 패배하지 않는다. 패배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 포기하는 순간 화자의 삶은 생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올곧게 살아온 인생에게는 그만큼의 가치가 상존하고 있다는 화자의 자위는 일종의 안타까움으로 보인다. 화자는 스스로 존재해야 하는 당위성에 손을 드러준다. 지금까지 견뎌온 화자의 생을 시의 힘을 차용하여 문면에 각인시키는 필연적인 작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나 잊지 마라 네가 승자라면 나도 승자다!” 외치는 화자의 마지막 절규가 공허하게 들리는 것만은 아니다. 이 문면의 이면은 화자 자신에 대한 절대긍정을 내포한다. 역설적이지만 역설 그 이상을 시인이 화자의 외침으로 형상화한 극적 장면이다.
시인은 이 반어적 표현을 통하여 시적 진실 속의 대상이 된 타자를 끌어안음과 동시에 자신의 생에 대한 적극적 포용마저 용해시킨다. 나이 듦이 있어야 연출되는 자연스러움이다. 박재화, 그는 격변하는 시대를 핍진하게 살면서 결코 평탄하게 살지 못했다. 마치 ‘복서’처럼 휴식의 시간을 갖지 못한 채 격정의 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그 위기의 순간들마저 이제는 과거사가 되었다.
시간이 경과한 지금 시대의 아픔과 동병상련하면서 시적 대상이 투사된 타자들을 모두 수용해야 한다. 생의 경과에 대한 반향으로 빚어진 시적 자아의 이성적 탐미가 그래서 더 순연하게 보이는지도 모른다.
걸핏하면 무얼 깨달았다는 사람들 두렵다 무언가 알아 냈다고 목청 높이는 사람들 무섭다 나는 깨달은 적이 없는데 어떡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깨닫기로 말하면 대체 무엇을 깨닫지? 이것인 듯하다가 저것인 것 같은 생의 한복판에서 깨달음까진 몰라도 바람 흘러가는 쪽이나 좀 알았으면…유난히 긴 밤 잠 못 들면서도 깨달음은 아니 오고 깨달음은 왜 나만 비켜갈까 나의 깨달음은 대체 언제일까 깨달음의 깨달음에 매달리는 밤…
- <깨달음의 깨달음> 전문
‘깨달음’의 의미를 묻는 시적 화자는 화자 자신에게 되묻는다. 저렇게 깨달은 사람들이 많은데 화자인 그대는 왜 깨닫지 못하느냐? 누구나 쉽게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는데 그대는 왜 그 길을 외면하고 가지 못하느냐? 등등 다의적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깨달음’이란 사실 어떤 외부에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물음이다. 자기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영역에 대한 밝힘이다. ‘유레카!’하고 자기 자신도 모르게 소리 지를 수 있는 존재에 대한 빛이다. 진리의 존재를 확신하는 자기 물음이다. 그것은 때로는 모든 지식의 한계를 초월하기도 한다. 때문에 “내가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깨달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은 말이 없다. 깨달은 사람은 먼저 깨달은 사람만이 그를 인정해준다고 한다.
‘깨달음’을 중시하는 선가禪家에서도 선지식이 인정하지 않으면 ‘한 소식’의 인가를 쉽게 못 받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이 시의 문면에서 화자가 지향하는 ‘깨달음’이라는 명제는 시적 화자의 화두다. 시인이라는 숙명을 안고 “이것인 듯하다가 저것인 것 같은 생의 한복판에서” 방황과 번뇌를 거듭하는 화자는 “바람 흘러 가는 쪽이나” 제대로 알기를 다만 희구해본다.
화자의 심경을 그대로 표출하는 “깨달음은 왜 나만 비켜갈까” 하는 물음을 통해 화자가 제시하는 사유의 확산을 그려본다. 삶에 대한 끊임없는 지향과 ‘깨달음’에 대한 다른 질문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깨달음’에 대한 다른 질문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깨달음의 깨달음에 매달리는 밤…”이 화자를 향해 친근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물음만 남는 것이 ‘깨달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어쩌면 화자 자신은 ‘깨달음’의 도정에 이미 들어섰음을 <깨달음의 깨달음>을 통해 가정해본다. 그만큼 시인의 혜안이 확장되고 있다고 해야겠다. 그 또한 시인이 자신의 본질인 원형으로 가기 위한 복원력이 작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도 말고 한 번만 믿어보세요 가진 건 없지만 양심은 있습니다 제 양심 걸고 파는 거니까 믿어보세요 치과에선 최소한 삼천 원입니다 이 자리에선 단돈 천원! 큰돈 아니니 속는 셈 치고 인간적으로 사보세요 제가 분당선에서만 삼년 이걸 팔고 있습니다 분당선에서 저 말고 이 칫솔 파는 사람 없습니다 여기 이 전화번호는 여주 ○○공장 번호고요 그 옆 휴대폰번호는 제 껍니다 사장이 제 친구로 특별히 봐주고 있어요그러니까 두 번도 말고 세 번도 말고 한 번만 믿어보세요…
- 나도 누구에겐가 믿어 달라 저처럼 외칠 수 있을까? 유난히 덜컹거리는 이 하오下午!
- <전철에서 외치다> 전문
시적 화자가 출퇴근길에 듣는 것은 분당선 칫솔 외판원의 외침소리다. 외판원의 ‘믿어’ 달라는 판매 소구, 그 진행되는 스토리에는 생의 이면이 그대로 축소되어 재현된다. “양심 걸고 파는 거니까 믿어보세요”가 반복되고 있는 이 시의 1연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엔 극도로 불신이 팽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세상이지만 ‘삼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영업을 했으니 이만하면 신뢰해도 되지 않겠느냐 하는 고객에 대한 호소로 연결된다. 칫솔을 판매하기 위한 고도의 영업 전략이다. 세태에 대한 풍자까지 배면에 스며 있는 디테일 스토리다.
시적 화자는 칫솔 외판원의 디테일 스토리를 들으며 문득 자신을 되돌아본다. “-나도 누구에겐가 믿어 달라 저처럼 외칠 수 있을까?” 비감하게 자문을 던지며 그동안 살아온 자신의 생을 반추해본다. 그 이면에는 화자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 빚어진 어두운 부분이 파노라마처럼 순간 스쳐 지났을지도 모른다. “유난히 덜컹거리는 이 하오下午!” 라는 시간이 기막히게 배치된다.
2연에서 시적 화자가 보여주는 언어의 정치는 따라서 시인의 고도의 전략이기도 하다. 칫솔 외판원의 판매 전략을 뛰어넘는다. 진솔하게 생을 살고 있는 한 시인의 전형을 시적 진술을 통해 그 반전의 의미마저 독자들에게 전시한다. 누구든 이시를 읽으며 반전이 주는 역설의 묘미 속에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잠시 반추해야한다는 의미까지 부여받을 것이다.
함박꽃은 풀이고 모란은 나무다
여러해살이풀 함박꽃은 작약이라고도 하고
근심 잊자는 망우초 원추리는 하늘 바라 서며
땅나리중나리말나리…나리꽃은 땅을 그려 고개 숙인다
…(중략)…
북한산 털개회나무가 개화기 때 선교사 따라 네델란드가서 진한 보랏빛라일락이 되었고
미군정청의 한 장교는 미국까지 데불고 가 연보랏빛 미스김라일락을 내놓았다
오,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사물의 현현顯現!
- <이름 부르기1> 부분
오래된 이름들
설흔해 마흔해 흐르니
불현 듯 낯설다
설레던시간들
벅차던 공기들 어디가고
그 이름 왜 낯설까
이젠 잊으라는 뜻?
웬만큼 이승에 머물다가
때 되면 다 잊어야 한다는 뜻?
그 이름 놓지 않으면 나도
휘어이휘어이떠날 수 없다는 뜻“
- <이름 부르기2> 전문
징기스칸은 제 이름도 쓸 줄 몰랐다니 참말일까
하기야 이름은 남이 불러주는 것
해와
달과
신神까지도 남이 부르는 것!
- <이름 부르기3> 전문
<이름부르기1>에서 시인은 “모든 사물이 언어를 갖고 있으며 ‘말함’으로써 사물은 창조되고 인식된다, (발터 벤야민)”고 부연설명하고 있다. <이름 부르기>시리즈에서 시인이 시적 화자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이름을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대상의 의미도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오,같은 듯다르고 다른 듯 같은/사물의 현현顯現!” 이 문면을 통하여 인간의 존재도 사물과 다르지 않음을 은유한다. 나아가 화자는 인간은 저마다 삶에 생의 의미를 부여해보지만 남는 것은 결국 이름뿐임을 언술한다.
삶의 과정 중에 그토록 구현했던 의미는 시간이 지나면 퇴색할 수밖에 없다. 이름에 의미를 좇아 살던 삶이 “불현 듯 낯설”고 “설레던 시간들 벅차던 공기들 어디가고/그 이름 왜 낯설까”하는 생경함에 의문을 더한다. 익숙한 대상들이 계속 낯설어진다. 기억의 틀에서 지워진다. 시적 화자는 “웬만큼 이승에 머물다가/때 되면 다 잊어야 한다는 뜻?”으로 나름 새롭게 기억의 부존재를 해석한다.
누군가 불러주던 사물들도 망각에 묻혀들면 이미 관심에서 멀어진다. 기억의 한계를 인식하는 해마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려 한다. 나이 듦의 전조현상이다. <이름 부르기3>에서 화자는 “이름은 남이 불러 주는 것”이라는 이치를 깨닫는다. 이름은 이름으로 부를 때만 이름인 것을 인식한다. 어쩌면 우리들 인생 자체가 이름일 수도 있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이름의 소멸로 부재의 공간은 확장된다. 그렇다. 이름은 단지화자가 명명한 그대로 ‘사물의 현현顯現!’일 뿐인 것이다.
이른 아침 도심을 지나는 부부
손잡고 아슬아슬하게 건너
비둘기 몇 마리 기다리는
공원을 찾는다
환갑이나 되었을까
서로 잡은 두 손 반대쪽에 풍을 맞은 내외
아내는 왼팔 왼다리가 흔들거리고
남편은 오른쪽이 마냥 흔들린다
하늘이 시샘하신 걸까
저승길도 이승처럼 동무하며 가란 걸까
사이좋게 왼쪽 오른쪽 나누어 병을 얻어
꼬옥 잡은 두 손으로
기우뚱한 세상
간절히 끌고 가는 내외
아침마다 길 건너 비둘기 떼와
눈 맞추고 온다
- <공원 한 쪽이 기울다> 전문
시적 화자는 ‘공원’에서 “손잡고 아슬아슬하게 건너” 가는 “서로 잡은 두 손 반대쪽에 풍을 맞은 내외”를 주목한다. 유심히 그들 부부를 관찰해보니 “아내는 왼팔 왼다리가 흔들거리고/남편은 오른쪽이 마냥 흔들”리고 있다. 아내의 오른 팔과 오른 다리를 남편의 흔들리지 않는 왼쪽에 의지하면 중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무심히 넘겨도 될 일이지만 화자에게 이들 부부가 시적 대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만큼 화자의 심상을 지배하는, 무언가 동요의 요인이 존재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사이좋게 왼쪽 오른쪽 나누어 병을 얻”은 부부가 “꼬옥 잡은 두 손으로” 서로 의지하며 “기우뚱한 세상”을 “간절하게 끌고 가”는 광경이 지금 화자에게 ‘간절’한 기원일 수 있다는 것이다. 화자가 보는 그들은 기울어져 있겠지만 그들 부부는 서로 ‘간절’하게 의지하며 “기우뚱한 세상”을 바르게 세우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공원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대해 <공원 한 쪽이 기울다>라고 명명하지만 시적 공간속의 부부의 화합을 통하여 기울지 않은 균형을 반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시적 화자가 그려내고 싶은 것은 기울지 않은 ‘공원’이다. 이는 어쩌면 시인과 시인이 호명하는 자신의 안해(아내)가 기울어질 위험에 처해 있다는 상황을 예고하는 징후라고 유추해본다. 따라서 이 문면은 시인의 아내에 대한 ‘간절’할 만큼의 지극한 애정의 역설적인 시적 표출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박재화의 시집 4부는 가족과 고향을 대상으로 한다. 그곳은 시인의 내면에 은밀하게 존재하는 특별한 ‘공원’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떠올리는 <여쭈오니>, “딸이 딸을 낳은” <무량한 침대> 앞에서 기도하는 부정, “집으로 향하는 이국의 마지막”<아들과 함께 밤을> 지새우는, 시인이기 이전의 아버지, 생모에 대한 절절한 연모를 그린 <요즘 들어>등 그만이 구성하고 연출할 수밖에 벗는 가족 ‘공원’이다. 그 때문에 그가 보여주는 고향 시 네 편이 가족‘공원’의 한 부분으로 친밀하게 공유되는 것이다.
음지말 아낙네들해동갑하여빨래하던 시내가 없어졌다
내동상걸린손발아리게담그던대동천
이낯선시멘트도로아래아직도살고있을까
- <냇물을 잃다> 고향시편 1부분
몇차례나 오가며한번도
내리지못했다
머물지못했다
- <스쳐지나다> 고향시편2부분
둘이서겨우넘던산길은
이제차로막힘없이드나든다
마흔해건넌길이저리넓다
멀리예배당자리찾을길없고
표정없는아파트만빼곡하다
눈윳움남기고그애는 갔지만
어린날들품어주던산사는
살아있었다
온통바뀌고사라졌어도때로는
그냥버텨주는세월의힘!
- <고산사高山寺> 고향시편 3부분
열 살 무렵
사나운 여름해도 어느새 기울고
둘이서 걷는 저녁은 유난히 숨찼다
절룩이며 돌아오는집은먼데
아버지는 애써 앞만 보고 가셨다
가끔 헛기침과함께
- <인동시장仁洞市場 가는 길> 고향시편 4부분
시인의 출생지는 충북 옥천이지만, 여섯 살 이후 성장기를 보낸 현재의 대전시 동구 판암동 ‘음지말이’이 그의 고향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나이 스무 살 그곳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그곳에서 성장하고 머물렀다. 고산사가 멀지 않은 식장산 자락이다. 대전 시내인 “철둑길로 시오리 인동시장”(<仁洞市場 가는 길>)과 한참 떨어진 곳이다.
“음지말 아낙네들 해동갑하여 빨래하던 시내가 없어”진 시적 화자의 고향은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이 낯선 시멘트도로 아래 아직도 살고 있”는 것은 소거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남아 있는 실체는 없다. 하지만 시인을 대변하는 시적 화자는 자신에게 기억의 부존재를 확인한다는 그 행위를 왜 그런지 용인하고 싶지 않다. 고향에 대한 트라우마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자는 그동안 자기가 성장한 고향 근처에 가까이 다가갔으면서도 자신이 고향을 외면하고 우회하였음을 뒤늦게 시인한다.
시적 화자의 고향은 농사를 지을 농토가 없어 노동판에서 전전하다가 생을 마친 아버지의 죽음을 그의 나이 스무 살에 받아들인 곳이다. 우울한 성장기의 기억이 쉽게 소멸되지 않는 곳이었다. “열 살 무렵/사나운 여름 해도 어느새 기울”던 그 시절 “애써 앞만 보고 가”시던 아버지가 못내 그리움보다 안타까움의 대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화자의 고향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이제 차로 막힘없이 드나”드는 다시 찾은 고향은 “마흔 해 건넌 길이 저리 넓”어졌음을 확인한다. “표정없는 아파트만 빼곡”한 그 자리에는 “눈웃음 남기고 그 애는” 기억 속으로 사라졌지만 “어린 날들 품어주던 고산사는/살아 있었”던 것이다. 상실의 이미지만 남아 있던 화자의 기억을 회생시켜주는, 겨우 찾아낸 고향의 흔적이다. 은폐되어 있던 기억의 부존재를 현전해주는 장소다.
고향의 실재를 확인하는 그곳에서 화자는 “온통 바뀌고 사라졌어도 때로는/그냥 버텨주는 세월의 힘!”을 본다. 긍정의 시선으로 고향을 향유하는 것이다. 애써 외면해온 고향을 수용하기 위한 그의 지향이 접점을 찾아낸 것이다.
박재화는 자기긍정을 통하여 스스로 자신의 고향을 환원시켜본다. 본향을 향한 의지의 동력을 회복하기 위한 탐미적 작업이다. 그는 지금 그의 내면 깊은 곳, 생의 경사진 부분을 비로소 제 위치로 돌려놓는 복원작업을 기껍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개울물이 줄었다고장마 뒤
매미 쓰르라미들 요란하다
산책로 건너편 나무들 물비늘을 털고
개울에선 왜가리도 다리를 재고 있다
물살에 휩쓸린 부들이며갈대 버들가지
아직도 허리를 못 펴고 있는
시냇가를 무장무장 걷노라니
여기저기 지렁이들 하얗게 널려있다
새로 깐 포장길을 건너 어디로 가려 했을까
장마 끝에 닥친 그들의 참사에
발걸음 무뎌지는 순간
온몸 뒤틀며아스콘과 사투를 벌이는
한 녀석이 보인다
얼른 들어숲가 흙길로 보내주니
모처럼 좋은 일 했다!
-<좋은 일> 전문
시적 화자는 “시냇가를 무장무장 걷”는다. 일탈의 시간이다. 화자 자신이 자연의 한 부속물이 되어 함께 배경이 된 주위의 경관들을 휘둘러본다. 그러다가 발 끝에 “여기저기 지렁이들 하얗게 널려 있”는 광경을 보며 주의를 환기시킨다. “장마 끝에 닥친 그들의 참사”를 보는 화자는 순간 ‘그들’과 인간사와 진배없는 연대감을 형성한다.
살아남기 위해 “온몸 뒤틀며 아스콘과 사투를 벌이는/한 녀석”을 보며 기억 속에 존재하는 동병상련의 교감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지렁이’를 “얼른 들어 숲가 흙길로 보내주”는 행위는 부지불식간 동시동작으로 진행된 이타의 자비행위다. 살려야 한다는 측은지심의 발로다. 화자는 그 순간 하나의 생명을 다시 살려 냈다는 사실에 희열을 만끽한다. 공존하기 위한 존재에 대한 동감이다. “모처럼 좋은 일 했다!”며 화자가 지어 보이는 득의의 표정이 문면에 스쳐 지난다. 그래서 “어린 날처럼 뭉게구름 부풀어 오르는 하루…”가 화자가 회상해보는 환희의 시간으로 감득된다.
화자에게 ‘어린 날’은 회귀하고 싶은 동경 속에 존재한다. 순간이동이 된 그곳은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어린 날’이다. 그 때문에 화자에게 이성적 탐미로 복원을 향한 지향이 맞닿는 시적 공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충청도 산골 어디에선
닭들이 새집에서 산다고 한다
나이 든 미루나무 꼭대기
햇살 제일 먼저 찾아와 재잘대는 곳
까치 떠난 둥지에서 닭이 산다고 한다
낮에는 강아지와 소들과 놀다가
저녁이면 서너 길 높이로 날아올라
잠자고 알도 낳는다고 한다
TV에선 쪼르르 나무를 오르는
필사적인 닭 삼남매를 비춰주었다
닭은 날지 못한다고?
천만에!
검둥수리의 습격 이후
개벽開闢에 눈뜬 닭의
날갯짓 모르는 소리!
새 박사는 세상 박사가 아니니까
세상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많으니까
조사반이 망원경을 들이대자
닭들은 대낮부터 미루나무를 탄다
- <치명적致命的인> 전문
시적 화자는 일상적인 상식을 깨고 있는 역설적인 사례를 장면전환을 통해 전개하고 있다. <치명적致命的인>장면은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2008.7.29.)라는 TV프로에서 <날아라 꼬끼오> 타이틀로 일반에게 방영되었다.
야생 닭은 인간들의 필요에 의한, 인위적인 진화로 날개가 퇴화해서 날지 못한다. 닭이 공중을 난다는 사실은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지식 밖의 일이다. 고정된 관념을 벗어나는 일이다. 시적 화자가 강조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 갖고 있는 고착된 인식과 개념이 절대적이 아닐수 있음을 문면을 통해 전시한다.
“검둥수리의 습격 이후/개벽開闢에 눈 뜬 닭”이 공중을 날아 “까치 떠난 둥지에”살고 있는 현장을 TV통해 확인하면서 화자는 강변한다. “새 박사는 세상 박사가 아니니까” ‘새 박사’ 그들이 모르는 세상이 따로 존재하니까, 그들의 말만 전적으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닭 세 마리가 공중을 나는 것은 저들에게는 ‘검둥수리’의 습격을 피해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생존본능의 발동이다. 저들이 살아남는 과정에 많은 닭들이 이미 희생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살아남은 닭들이 공중을 나는 행위는 종족본능을 위해, 야생 닭으로 회귀하는, 처절한 근원적 존재구현의 실행이다.
이는 시인의 잠재의식에 억제되어 있던 본연을 향한 의지를 닭들이 공중을 날 수 있게 된 자유와 비견하며 시적 진실을 통해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이 점을 주목하면서 화자를 통해 “세상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많으니까” 자신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함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이 또한 근원을 향한 지향이며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인간사회의 인식은 쉽게 깨지지 않는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인은 36년 전 4세였던 미아가 현재 40세가 된 모습을 “지금 모습으로 찾습니다”라고 <어떤 벽보>를 통해 보여준다. 반전이며 역설의 묘미라고 할 수 있다. 덧붙여 미아의 어머니가 지닌 근원적인 모정에 대해 궁구하며 견자가 된 입장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며 다의적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꽃피는 가을을 선사하고 깊다/아니 꽃 지는 봄을 보여주고 싶다”(<봄이 꽃을>)는 문면 역시 시인이 화자를 통해 발견하고 싶은 시적 역설의 풍경이다. “바다를 잃은 섬/한 귀퉁이를 지키는 개의/슬픔을 모르는/슬픈 눈”(<묶인 개>)에서 발견하는 것 또한 파격의 아이러니로 화자가 시적 대상을 형상화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또한 시적 화자가 진술하는 “오랜 부대낌과 견딤의 퇴적물/이처럼 은은하고 환하다니!”(<먼지가 아름답다>)하며 외치는 강렬한 느낌은 시인이 발견하는 모순적 국면이다. 시인이 구축하는 언어의 세계가 ‘은은하고 환하’게 빛나는 장면을 연출한다. 이는 시인의 시적 역설이며 반전의 미학이다.
시적 역설은 시의 요체를 심도 있게 확산하는 시인의 고유권한이다. 그래서 박재화의 시적 역설은 상의적인 언어의 관계를 이성적 탐미의 세계로 한 차원 끌어 올리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작업이 실행되는 시적 공간은 원형을 향한 그의 복원의식이 현현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우리들 인간 삶의 부조리를 극복하고 보편적 명제를 확인하는 이성적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의 시 곳곳에서 그의 복원 의지를 발견할 수 있음은 그의 시를 읽는 또다른 묘미가 될 것이다.
후기
이 자리는 시인 박재화가 차마 공개할 수 없는 사적 진실을 조금이나마 말할 수 있도록 그에게 허락 받은 공간이다. 그가 말할 수 없다는 것은 그가 갖고 있는 비밀이 많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
.♣.
=================
◆ 표사의 글 ◆
일상에서 이루어진다. 진솔하게 살아내는 그의 시적 진술은 언제나 투명하다. 시적 대상이 그의 심경을 경과하며 변주되는 모습이 다양하지만 또한 일목요연하다. 그만이 확보하고 있는 필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대상에 대한 연대감을 수용하고 대상의 깊이를 본다. 그 깊이에서 깨달음을 형상화하면서도 군더더기를 남기지 않는다. 대상을 아우르며 대상의 본질을 자신의 구도에 자연스럽게 정치한다. 오랜 기간 시를 작업해온 그의 내력이 그에게 주어진 독창적인 시적 공법을 지시한다. - 이덕주(시인, 문학평론가)
.♣.
=================
▶ 박재화朴在和 시인∥
∙ 1951년 충북에서 출생
∙ 1984년《현대문학》2회 추천 완료로 등단
∙ 시집으로는《도시都市의 말》《우리 깊은 세상》《전갈의 노래》등이 있음
∙ 기독교문학상, 성균문학상, 다산금융인상茶山金融人賞 등 수상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