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상식’의 시대에
한줌의 ‘상식’을 말하다
한겨레 권태호 기자가 그리는
‘함께 잘 사는’ 사회
『느리고 불편하고 심심한 나라』는 한겨레신문 권태호 기자가 2000년부터 최근까지 한겨레 지면에 연재한 칼럼, 사내 통신망 쓴 뉴스메일과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글을 엮어 펴낸 책이다.
“권태호의 글은 쉽게 읽힌다. 그의 글은 미리 설정된 이념의 좌표를 따라가지 않고 일상적 삶의 구체성을 통과해 나오면서 논리의 구조를 이룬다. 그는 소리 질러서 몰아붙이지 않고, 낙인찍지 않고, 웅성거리지 않고, 깃발을 흔들지 않는다. 그의 글은 여론형성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를 거칠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읽는 사람의 마음에 스민다.” (추천사 中, 소설가 김훈)
이 시대 가장 비타협적인 관찰자이자 이야기꾼인 김훈이 예리하게 집어낸 대로, 권태호의 칼럼은 좋은 글이 가져야 할 덕목들을 고루 갖추고 있다. 그의 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거나 부화뇌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로지 성실하고 엄격하게 추적한 사실의 궤적을 겸손하고 따뜻한 필체로 꿰어, 우리 사회의 비틀린 모습을 펼쳐 보일 뿐이다. ‘지존파’에서 ‘도도맘’까지, ‘꽃분이네 가게’에서 ‘65세 소녀 박근혜’까지, ‘베테랑’에서 ‘5천 원짜리 치킨’까지, 그가 손을 대면 어떤 이야기든 공감의 메시지가 된다.
“성장과 발전, 이를 위한 경쟁의 결과가 ‘헬조선’이다. 남보다 잘 살려 애쓰다보니, 다 같이 못살고 힘들게 됐다. 흩어져 있던 글들을 추려 묶어보니, 말하고자 하는 바가 하나로 요약됨을 발견했다. ‘세금 더 내자. 지금보다 덜 입고 덜 먹자. 다만 마음은 편하게 살자’다. ‘더불어 함께’는 도덕론이 아니라, ‘같이 잘 살아야’, 나 개인도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지극히 실용적인 사회적 방법이라 생각하기에 지난 글들을 재탕해 또 제안해 본다.”
“성공해서 행복하게 잘 살자”를 외치는 책들은 넘칠 만큼 널렸다. 하지만, 이런 책들이 서점의 판매대에 아무리 많이 깔려도, 독자들은 여전히 쫓기고 불안하다. 저자가 서문에서 에둘러 표현한 것처럼, ‘남을 밀어내는 꼼수’가 ‘삶의 지혜’인 양 떠받들어지는 세태 때문이다. 이 점에서, 권태호의 『느리고 불편하고 심심한 나라』는 흔히 접할 수 있는 에세이집과는 격을 달리 한다.
그는 “진보냐, 보수냐”를 따지기 이전에 먼저 “이게 상식에 부합한가”부터 물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분법적 대결의식이나 흑백논리는 옳고 그름 여부를 떠나 사람들을 질리게 만든다. ‘밀어내기’와 ‘편 가르기’로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야비하고 천박한 심성이 ‘몰상식’과 ‘무경우’를 부추긴다. 권태호가 글을 쓰면서 넘어서려 했던 지점이 바로 여기다. 독자들은 육하원칙에 충실하면서도 가슴으로 읽을 수 있는, 제대로 쓰인 글이 주는 감동을 맛봄과 함께, 희망의 세계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이다.
책 제목 『느리고 불편하고 심심한 나라』는 2016년 5월 11일자 한겨레 칼럼 ‘느리고 불편해야 선진국이다’에서 땄다. 미국이나 유럽 등 잘사는 나라를 가면, 민간이든 공공이든 대부분 일처리가 느리고, 불편하다. ‘줄(queue)’을 서는 게 일상이다. 서비스요금(사람값)이 비싸 어딜 가나 사람 만나는 게 힘들고, 이미 탄탄한 시스템이 갖춰져 무엇 하나 과정을 건너뛰거나 쉽게 되는 게 없다. 그 과정에서 안전(security)과 공평(fairness)이 자리 잡는다.
심심함은 이런 나라들의 또 다른 요소다. 사회가 안정되면 놀랄 만한 일이 잘 안 일어나고, 늘 예측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그날이 그날 같다. 심심해야 몸과 머리와 마음에 여유 공간이 생겨날 수 있고, 그래야 건강, 창의력, 관용이 좀 더 쉽게 생겨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참고로, 제목에서 ‘선진국’을 뺀 이유는, ‘선진-후진’이란 개념 자체가 서구 우월주의 산물인 데다, 21세기에는 더 이상 용납하면 안 될 프레임이기 때문이다.
○ 1부 「기자들이 사는 법」에서는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신문사 내부의 사정과 기자들의 고민을 다룬다. 스마트폰이 대세가 되면서, 그동안 여론의 나침반 역할을 해 왔던 ‘종이신문’은 한없이 뒤로 밀리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신문사들은 어떻게 응전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보루 가운데 하나인 ‘알 권리’는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가. 사회부·경제부 사건기자로 출발해 사회부 기동취재팀장, 워싱턴특파원, 정치부장, 인터넷한겨레 에디터, 논설위원 등 신문사의 주요 보직들을 두루 거친 저자의 솔직한 경험담은 ‘언론고시 준비생’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 2부 「뒤로 뜀박질하는 대한민국」은 ‘몰상식’과 ‘무 경우’가 판을 치는 우리 사회에 대한 고발이다. 고발이되 분노와 절망에 머무르지 않고, 어떻게든 희망의 단서를 찾아보려는 저자의 합리적인 비판의식이 빛을 발한다.
○ 3부 「꼬인 정치 풀어보기」는 우리 정치 이야기다. 대구 출신이면서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출입을 오래 한 덕분에, 저자는 이른바 ‘보수정당’을 자처하는 정치세력 내부의 정서와 행태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런 그가 물고 물리는 우리 정치의 왜곡된 지형에 정통으로 메스를 댄다.
○ 4부 「워싱턴에서」는 저자가 워싱턴특파원으로 근무하며 쓴 글들을 모았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미국, 우리가 몰랐던 미국에 대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독자들은 그의 글을 통해 미국의 진면목을 엿보는 한편,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을 따라가려 했던 대한민국이 놓친 게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 5부 「취재하며 훔쳐 본 세상」는 저자가 20년 넘게 잔뼈가 굵은 사건 현장의 취재후기다. ‘지존파’, ‘삼순이’, ‘종부세’, ‘김영란법’ 등 한때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이슈의 한 가운데서 저자가 목격한 현실과, 그 현실 뒤에 도사린 이해관계의 충돌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 6부 「봄날은 간다」에서는 저자가 개인적으로 겪은 크고 작은 일화들을 소재로 풀어낸 성장과 성찰의 에세이들을 묶었다. 후배 아이의 죽음, 아내가 만든 샌드위치, 할아버지의 한시(漢詩), 나스타샤 킨스키, 에포닌, 스즈키 이치로, 그 누나…. 일상의 사소한 단편 하나가 던지는 물음조차 놓치지 않으려는 저자의 성실함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돋보인다.
사자는 배가 부르면 눈앞에 토끼가 뛰어다녀도 그냥 내버려둡니다. 그러나 표범은 배가 불러도 사냥을 멈추지 않고, 나무 위에 숨겨둡니다. 하이에나는 닥치는 대로 뜯어먹습니다. 맨 꼭대기 포식자들이 이리 게걸스러우면 어떻게 될까요? 가뜩이나 힘든 토끼들은 살 수가 없습니다.
함께 살 생각은 안 하고 저만 대대손손 잘 살겠다고 패악을 부리다, 모두를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몰상식’은 언제 사라질까요? 그때까지, 저는 쓰렵니다. ‘상식’에 목마른 이웃에게 물 한 그릇 건네는 마음으로.
책속으로
┃책 속으로┃
김 선배는 저와 대여섯 살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다른 경찰팀 후배 기자들은 마치 아들, 딸 대하듯 편하게 대하면서도 캡인 저에게만은 깎듯하게 존대말을 쓰고, 의도적으로(제가 보기에는) 어려워했습니다. <한국일보>에 있을 때 김 선배의 후배였던 기자가 <한겨레>에서 부장을 맡고 있기도 한데 말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처사가 조금 서운하기도 했지만, 조직과 계통을 중히 여기려는 김 선배가 의식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됐습니다.
김 선배는 아침에 종로경찰서에 나가 아침보고를 마치고 나면 취재를 나가거나 종로서 앞 참여연대 느티나무카페 또는 인근 커피숍에서 원고지에 기사를 씁니다. 연필로. (김 선배는 필통을 가지고 다니는데, 직접 칼로 연필을 깎아서 썼습니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한 뒤, 왼손으로는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움켜쥐듯 머리를 받칩니다. 왼손 둘째와 셋째 손가락 사이에 끼인 담배에서 담배연기가 피어오르고, 오른 손으로 기사를 씁니다. 끈 달린 뿔테 안경을 쓰고서. 이 모습을 매일 바라보는 중년의 커피숍 아주머니가 그 모습에 반했다든가 어쨌던가 하는 이야기도 전해오긴 합니다.
- 59~60p, 김훈이 <한겨레>를 떠난 이유
왜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한겨레> 기사의 문패가 ‘잊지 않겠습니다’이어야 하는지 알 것 같다. ‘잊으려도 잊히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너무도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들은 의지로 잊지 않아야 하는 게 사람 세상이어야 할 것이다.
어쩌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사자가 달려들면 정신없이 도망가다 가장 자그마한 새끼 노루 한 마리가 사자의 거친 앞발에 픽 쓰러지며 죽어나가고 나면, 더 이상 사자떼가 자신들을 덮치지 않으면, 그저 아무 일 없었던 듯 까만 눈동자를 천연히 하고선 다시 태연히 풀을 뜯는 노루떼들이, 짐승이지만 ‘어찌 저럴까’라는 생각이 가끔 들곤 했다. 사람 세상은 ‘동물의 왕국’과는 다른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거듭 든다.
이듬해 삼풍 사고라는 더 엄청난 참사를 겪기도 했지만, 엄청난 참사 앞에서 무감각했던, 철부지로 그날들을 살았던 ‘나’가 20년 지난 오늘 부메랑으로 돌아와 나를 찌른다.
- 86p, 성수대교 사고가 나던 날
기사가 소설과 다른 점은 픽션이냐, 논픽션이냐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수필과 다른 점은 객관과 주관의 차이입니다. 객관을 밑바탕에 깔기 위해선 사실(fact)에 대한 접근이 필수입니다. 그런데 사람과의 접촉은 없이, 그저 맨눈으로 휘휘 둘러보면서 자신이 느낀 감상이나 떠오른 생각들만으로 기사를 채우면 그 글이 아무리 유려하더라도 기사로서의 가치는 없습니다.
그 다음, 취재한 걸 다 쓰면 안 됩니다. 10을 취재하고 4~5를 쓰면 훌륭한 기사가 되지만, 10을 취재해서 10을 다 쓰면 중구난방, 중언부언이 되고, 5를 취재해서 5를 쓰면 헐거운 기사가 됩니다. 인터뷰한 사람을 다 적어 넣으면 곤란하고, 멘트는 각각이 나름의 개별적 의미를 지닌 경우에 한해서만 기사에 실어야 합니다. 따라서 똑같은 인터뷰를 여기저기 계속 따는 것은 시간낭비입니다. 그래도 ‘내가 고생한 걸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면, 인터뷰 내역은 기사가 아닌, 함께 제출하는 취재일지에 적어 넣으면 됩니다.
- 95p <한겨레> 입사평가위원의 “악역을 마치며”,
그리고 박상옥은 얼마 뒤 대법관이 되었습니다. 아마 박상옥은 억울했을 겁니다. 당시 그는 2년차였고, 자기 위의 선배들은 줄줄이 잘 나갔는데, 자기만 ‘불이익’을 당한다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나라 엘리트들의 공통된 특징은 절대로 ‘불이익’을 용납지 않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박상옥 입장에서 보자면, 억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 ‘박종철’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는 자체만으로도 30년 뒤 억울해야 합니다. 왜 억울함은 ‘박종철’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어야 합니까? 박상옥은 억울하려 하지 않은 죄이고, 그 죄는 평생 단 한 번도 억울하지 않은 박상옥은 씻을 수 없을 것입니다.
- 117p, 박종철, 박종운, 박상옥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의 유대인 희생자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고, 독일 정부가 나치 잔당들을 수십 년이 지나도 지구 끝까지 쫓아가 법정에 세우는 것은 독일인들이 일본인들에 비해 유달리 양심이 고와서가 아니라 과거 세력과 단절됐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가 청산되지 않은 채 세워진 일본은 지금도 과거의 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이승만의 ‘국부 어쩌고’ 하는 움직임에 결코 동의할 수가 없다. 이승만은 자신의 정적 김구를 억누르기 위해 친일파와 손을 잡고, 이 땅에 ‘친일파의 나라’를 세웠다. 그리하여 이 땅은 독립군을 육성했던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아닌, 독립군 쫓는 일본군인을 배출했던 만주군관학교 출신이 대통령이 됐다. 70년 전, 히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