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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의 여름 방학은 두 달이 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학은 참으로 짧았습니다. 두 달 8주의 방학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어린이 여름 성경학교 준비와 성경학교, 전국 대학생대회 참석, 교회 대학부 수련회 참석, 농촌 하기 봉사 참석 이러다 보면 개학을 맞이했습니다.
그때에 거제도의 사량도에 가서 여름성경학교를 하면서 봉사활동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섬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북을 치고, 여름성경학교와 영화상영을 알리면 예배당도 없는데, 초등학교 운동장의 나무 그늘에서 여름성경학교를 열었습니다.
그때에 지도 전도사님께서 함께 하시다가 급하게 떠나시면서 대학교 1학년인 저에게 설교를 하라고 하시면서 떠나갔습니다. 졸지에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설교를 그때 했습니다. 주일학교 반사를 하면서 성경공부를 가르쳤던 경험을 가지고서 ….. 함께 했던 친구들이 ‘너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무엇을 전했는지, 기억은 하나도 없지만 ….. 그 후에 얼마 안되어서 그 섬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 시절에는 북을 치고, 확성기로 모임을 알리면 동네 아이들이 다 모여들었습니다. 어르신들도 밤 시간이 되면 영화를 보러 나오셨습니다. 요즈음에 그렇게 한다면 아이들이 모일까요? 마을 어르신들이 오실까요? 제가 지금 해 보지를 않아서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모일 아이도 없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모여들지 않을 것입니다.
시대가 변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삶의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이러한 때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말씀을 잘 들을까요? 그것도 아닐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죽음에 목전에 두고 제자된 디모데 목사에게 복음 전파를 당부하였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했습니다. 오래 참으며 가르치되, 책망하고, 꾸짖어 올바로 살도록 권하도록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어서 시작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4)
우리 성경에는 생략되어 나오지 않습니다만 헬라어 성경에는 “그러므로”(갈)이라는 접속사가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오래 참으면서 책망하고, 바로잡아 올바르게 살도록 가르쳐라.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 쭉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로 하여금 오래 참으면서 복음을 전파하면서 가르치기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때가 오기에”…… 그 때가 바울의 다음 세대 디모데의 활동 시대가 됩니다. 그 때, 그런 시절의 모습을 보십시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3-4)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합니다.
바른 복음이란 사도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구원 복음’입니다. 나아가 사도 바울이 이미 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는” 성경 말씀입니다. 복음의 메시지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원의 도입니다.
이 복음을 사람들이 듣지를 않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불신자)만을 말하고 있을까요? 교회 밖의 전도 대상자들도 바른 복음을 받지 않습니다. 나아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소위 믿는 자, 성도들도) 잘 듣지 않습니다. 귀한 복음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시대도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살았던 시대가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땅에서 잘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방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이면 그들의 습관을 따라서 우상을 따랐습니다. 그들을 쫓아갔습니다.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양다리를 걸치고 살았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는 바른 교훈의 말씀을 잘 받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바른 교훈을 받지 않는 때의 모습을 지적합니다.
“귀가 가리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여기서 ‘가려운 귀’은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서 못 견디는 인간의 욕망’을 말합니다. 흥미롭고 그럴싸한 하찮은 정보를 갈구합니다. 이런 가려움증을 풀어줄 문명이기는 오늘날은 너무나 발달되어 있습니다.
어떤 새로운 지식이나 정보를 얻고자 하면 어떻게 합니까? 구태여 책을 참고하지 않아도 인터넷 구글에 들어가면 됩니다. 최근에는 더 디테일한 정보, 마춤형 정보를 ‘쳇 GTP’ 비롯한 수많은 에이아이(AI) 시스템을 통해서 얻습니다.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을 말 한 마디면, 버턴 하나만 누르면 수없이 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구글나 쳇 GTP을 많이 이용합니다. 아주 간단하고 쉽게 정보를 얻습니다. 어떤 제품에 문제나 집에 문제가 있으면 유튜브를 통해서 많은 해결점을 찾습니다. 넷프리스와 같은 엡을 통해서 좋은 드라마나 다큐들을 언제든지 볼 수 있고, 접근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 폰 하나만 있으면 얼마든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는 이 편리한 시대에,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문명의 이기 가운데, 그 해악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문명 이기로 인해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 바른 교훈에서부터 떠나 있는지, 얼마나 멀리하고 있는지……, 얼마나 낭비된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수시로 후회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바른 교훈을 받기에 힘든 때가 되었다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3)
‘사욕’이란 ‘본능적인 욕구 따른 이기적인 욕심’입니다. 인간의 자기 주관적인 취향입니다. 이 사욕에 사로잡히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습니까? 자신의 가려운 귀를 끍어줄 선생을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 줄 선생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남 유다 백성들이 양다리를 걸치고 하나님과 우상 사이를 오락가락할 때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가르치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 떠나 우상 숭배하고 악한 행위에 대해서 심판을 예고하고 회개를 촉구했을 때에 백성들은 귀를 막았습니다. 자신들이 듣고 싶은 축복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만하라. 그 심판 소리, 회개하라는 소리 그만 집어 치워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에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예레미야 선지자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외치니깐 유다 사람들이 선지자를 핍박합니다. 나아가 죽이고자 음모를 꾸밉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 하나이다”렘 18:18)
무슨 말입니까? 우리에게는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을 해줄 선지자도 있고, 제사장도 있고, 지혜로운 선생도 있으니 구태여 예레미야가 필요하냐, 그를 없애 버리자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자기의 입맛에 맞는, 자기의 취향에 맞는(자기 욕망에 유한) 말씀만 듣겠다는 모습이 오늘 현대인에게도 얼마나 많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현대 교회의 설교자들은 책망이나 회개, 나아가 심판과 지옥에 대한 설교를 하지 않습니다. 그저, 위로의 말씀과 축복 그리고 긍정적인 자아, 성공에 대한 지친 현대인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데 치중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당은 교인으로 넘쳐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가를 보십시오. 사욕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내가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에 대하여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한 주에 한 번 내가 예배보는 장소로, 예배에 한 번 참석하고, 헌금 한 번 해 주면 고마운 줄로 알라는 그런 마음으로 갑질 비슷하게 부리는 자들이 많습니다.
교회 단체 사진을 찍었는데, 아주 구도가 맞고 잘 찍어진 사진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모습이 약간 어색하거나 표정이 굳어 있는 모습이면, 아무리 전체적인 구도나 배율이 맞아도 그 사진은 잘못된 사진이 됩니다.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은 사진 찍는 기술이 형편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 자기 취향, 나아가 이기심, 인간의 본성의 발로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심성을 들어다 보고 반성하고 성찰하며 온전한 삶을 추구하는 기능과 능력이 바로 말씀입니다.
성경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딤후 3:16-17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 말씀을 근거해서 전해지는 설교 말씀도 그대로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되어져야 합니다. 듣기 좋은 위로와 권면 뿐만 아니라 잘못된 길로 가는 것에 대한 따끔한 책망 그리고 바르게 바로 잡는 말씀도 아프지만 들어야 합니다. ‘아멘’하고 들어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자로 성장하고 성숙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말세의 때가 되면 자기 사욕에 사로 잡혀서 자기 입맛에 맞는 스승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시 말합니다.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4)
바울 시대에 복음보다는 허탄한 이야기를 전하는 영지주의자들의 헛된 지식을 추구하며 따라가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의 뭔가 철학적인 심오한 진리에 혹하는 것입니다. 뭔가 지적이고 철학적이고 영적인 것 같은 …. 교회에서 가르치는 복음의 진리와는 색다른, 신비스러움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아주 똑똑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모님 대부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기대를 걸었습니다. 교회의 일꾼으로 성장되기를 ….. 그런데 그분의 성향이 늘 새롭고 신비로운 무언가를 찾았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러 받는 정통적인 신앙보다는 뭔가 색다른 것을 추구했습니다. 저와 함께 하는 성경공부도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듣고 싶은 새로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이단에 들어갔고,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른 교훈의 말씀을 받아드리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이 많은 때가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말세지말로 더더욱 그러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말씀을 전파하라”는 재차 당부합니다. 시대가 어떠하든지, 사람들이 어떠하든지 간에 너 만은 ‘다르게 되기를’ 당부합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그러나 너는 …. 너는 ….’이라고 너만은 달라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복음 전파자로, 설교자인 너는 세상과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느냐는 권면입니다.
4가지의 명령입니다.
(1)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세상 일이 영적인 하나님의 일인 것을 인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2) 너는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손해를 감수하는 예수 바보로 살라는 것입니다.
(3) 그래서 너는 복음 전파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4) 그러면서 너는 너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은 무엇입니까? 바른 진리의 말씀을 거부하고 세상의 허탄한 이야기에 사로 잡혀 몰려가는 시대에 있지만 ‘그러나 너는 너만은 달라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드리고 있습니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삶은 말씀으로부터 떠날 수가 없습니다. 말씀의 사람이 곧 말씀 전파자가 됩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의 다섯 손가락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듣기, 읽기, 묵상, 암송, 성경공부의 자리로 나아오십시오. 말씀에 노출된 삶을 추구하십시오. 가난한 심령으로 말씀 속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에
“주여 한 말씀이라도, 한 말씀이라도 저의 마음 밭에 심어 주십시오”
“저를 치료하여 주옵소서. 저는 고쳐 주옵소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간절함으로 주님의 말씀으로 충만하면 영적 각성이 일어나고, 예수 사랑으로 삶의 자리를 지키며, 주어진 일을 해나갈 때에 저와 여러분은 틀림없는 복음 전파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바른 진리의 말씀으로 충만하여 진리이신 예수님을 전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