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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성탄을 지내고 공현 대축일과 함께 내일 주님 세례축일을 마감지어면서 우리는 성탄 시기를 막을 내립니다. 그렇다면 성탄 시기는 무엇이고 공현 시기는 무슨 뜻이며 세례 축일에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제가 여러분에게 강론을 드릴 때는 언제나 관계 안에서 거기서 역할을 해석하는 식으로 강론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탄은 바로 나에게 준 표징이라고 그럽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이제는 너에게 징표라고 얘기합니다. 말이 좀 거꾸로 바뀌었습니다. 표징이 징표로 바뀌었습니다. 그 표정은 어쩌면 신비라고 말할 수 있고, 징표는 계시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탄은 나에게 온 것이고, 공현은 너에게 주는 것인데 이제는 우리가 내일 주님 세례축일을 만나는데 주님 세례축일은 바로 연중과 함께 움직입니다. 그래서 성탄식이 끝나는 날이 주님 세례 축일인데 그 날이 바로 연중 제1주일입니다. 그리고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로 결국은 부활 시기가 끝나는데 그때도 바로 연중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면 분명히 이렇게 받아들인 것에 현장에서 실천해 옮겨 나가라 이런 뜻으로 저는 해석을 해봅니다. 그럼 성탄과 공현에 대해서 말씀을 올립니다. 성탄이 공현으로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선물이 제물로 바뀝니다. 진실이 사실로 바뀌고 순종이 순교로 바뀝니다. 나에게가 너희로 바뀌고 표정이 징표로 바뀝니다.이것이 바로 나에게와 너에게, 그 부활은 너에게 그 부활은 또 어떤 것인가 여기는 작은 목표라고 한다면 부활은 큰 목표라고 이렇게 해석을 해 주시면 좀 정확히 말씀드릴 수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 세례축일을 만나면 바로 연중과 연관되는 데 세례축일을 우리는 표징이라고 또 말씀드릴 수 있고 이제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날 성체를 하게 되는데 그 성체를 영하는 것을 징표라고 또 말씀을 바꿔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곧 연중 시기를 만나게 되는데 연중 시기가 도대체 뭔가 이런 생각을 갖고 계시지만 연중 시기는 바로 현장 파견이라는 것입니다.
현장 파견이라고 알아들으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탄식이 끝나면 연중을 몇 번 하고 그다음에 사순 부활하죠. 부활 시기 끝나면 연중이 34주간까지 가는데 그 연중 시기에는성탄 시기가 끝나는 연중 시기는 바로 하늘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부활 시기 끝나는 연중 시기는 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정확한 답이라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그 동방의 별을 봤다. 동방의 별, 우리 또한 동방의 별입니다. 나를 보면서 아 저 사람만 쫓아가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내가 동방의 별이 돼서 바로 이것이 공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근데 제각기 보는 눈이 좀 달랐습니다.
예루살렘 시민들은 무관심의 별로 봐서 배은망덕의 별이 되었고, 헤르데 왕은 두려움의 별로 보아서 위협적인 별로 변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이론적인 별로 봐서 바로 별 볼 일 없는 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동방박사와 목동들은 작은 샛별로 봐서 이것이 바로 생명의 별이 되었다. 이렇게 저는 설명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명의 별은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고 오늘 이 독서의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분명 우리는 나에게 온 신비가 바로 너에게로 계시로 드러날 때 그 계시를 내가 움직일 때 다른 사람이 다른 나로 인해서 계시를 보고 또다시 신비를 알아듣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나는 계시를 통해서 신비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계시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 있는 그 하느님의 영을 만날 수 있다는 뜻으로 그렇게 해석을 해 주셔야 된다. 이렇게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해드립니다.
오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우리 천한 마구간 한구석에 알몸으로 오셔서, 당신의 모습을 만인 앞에 드러내심을 기념하는 축일이며 동시에 우리의 신앙을 남 앞에 증거하는 축일이다 이렇게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공현이라는 말은 공적으로 드러낸다. 이런 뜻으로 해석을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구세주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대로 어둡고 차가운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저기 높은 데에 계신 분이 하느님의 영광을 받으며 낮은 데로 오셨습니다. 수치심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비좁은 악취가 나는 마구간에 당신의 귀한 몸을 누이셨습니다. 그러나 초라한 마구간에서 부끄러운 처녀의 몸에 가난하고 주변 없는 목숨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빛이 되어 이 세상을 비추시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세속의 눈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늘의 별빛이 구세주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그 별이 온 누리를 비추었음에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모든 이에게 구원의 표징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구원의 결정에 대한 네 종류의 반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루살렘 시민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구세주의 별이 뜬 것조차 모릅니다. 아예 하늘을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먹고사는 문제에만 골몰할 뿐 생사의 문제인 신앙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반응은 헤로데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하늘의 빛은 구원의 표정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별을 보면서도 오히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렇게 볼 수 있을 겁니다.
세 번째로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그들은 별빛의 의미를 또한 그 별이 어디에 멈추게 될지도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삼아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경배하고 찾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도 이론적으로는 거의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거의 다 알고 있습니다.그래서 이론적으로 알고 있다고 해서 결국은 실제적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가는 좀 다른 차원입니다. 바로 체험을 해야 됩니다. 사도 바오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율법학자 중에 율법학자로 똑똑하기로 말하면 난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표현을 내용에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결국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정말 무지의 소치였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알고부터 나는 모든 것을 다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에 나 자신도 쓰레기입니다 라고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바로 하느님을 제거했기 때문에 결국은 새로운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 모두 다 예수님이 생존해 계실 때 바로 선택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승천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 사도 바오로는 선택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몰랐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너는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물으니 ‘제가 언제 박해했습니까? 나는 예수님 박해한 적 없습니다.’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박해한 것이 곧 나를 박해한 것이다. 바로 하느님의 자녀 이 사람들을 미워한 것이 결국 하느님을 미워한 것이다. 이런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표징입니다. 계시입니다. 성사입니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이분들은 따로 하느님께서 오늘 저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선물이 부르심이었습니다. 그 부르심의 말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응답이 해야 됩니다. 부르심은 응답이 있어야 됩니다. 이 선물에 대한 응답은 제물입니다. 내가 만나는 이 사람한테 고개를 숙이고 이 사람을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하게 만들어질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인 의식을 가지되, 주인 행세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인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이십니다. 우리는 많이, 많이도 본인이 주인이 아니면서도 주인 행세를 함으로써 상대를 너무 천하게 다루고 있는 것 아닙니까? 상대가 천하게 다뤄진다해도 그래도 상대가 오히려 더 나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니 이제는 우리는 항상 주인 의식만 갖고 주인 행세를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사제 역시도 예외가 될 수 없고 수도자 역시도 예외가 될 수는 없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 한 형제요 자매라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 사람만이 이제는 내가 선물을 받을 수 있고 선물을 받은 사람만이 내 안에 가슴이 구유입니다. 그 구유에 아기 예수님이 탄생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안 보이지만 속으로 보면 보인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공현입니다. 이것이 계시입니다. 이 점을 여러분들이 깊이 깨달으시고 여러분들이 움직이는 곳마다 다른 사람이 저 별을 쫓아가면 분명히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거야, 하는 것 같은 정도로 여러분들이 그렇게 우리가 살아줄 수 있어야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 향기가 돼야 된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쨌든 이 세 부류는 그 별빛에 의지하거나, 위협적이거나 머리로만 되새길 뿐 기쁨의 초대장이 되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마지막으로 살펴볼 동방 박사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구세주의 별빛을 찾았고 따라갑니다. 제2 독서에서 선포된 것처럼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에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이 탄생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한번쯤 자신에게 물어보고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오로는 어쩌면 정말 예수님 이상으로 일을 했는지도 모릅니다.당연히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야 되지만 사도 바오로는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사도 바오로는 로마 시민권이 있었기 때문에 로마 시민권이 있는 사람은 십자가형만은 면하게 돼 있어서 결국은 십자가형을 받지 않고 참수형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왜 본인이 그렇게 똑똑하고 정말 제일가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 때문에 그렇게 미친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우리도 그 내면의 세계를 그리스도의 그 진정한 공현과 주님께서 보여주신 그 계시를 우리가 알고 그 계시를 통해서 신비를 찾아 나설 수 있어야 된다.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나는 계시를 통하여 신비를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제2 독서에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밤하늘의 찬란한 별빛이 베들레헴으로 동방 박사들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거기서태어나신 분을 알아보고 경배하였습니다. 그들은 구세주를 보고 경배하며 큰 기쁨을 얻었습니다.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께서는 온 인류에게 구원의 소망을 비춰주고 있습니다. 동방 박사들의 여행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의 별을 의지하여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들어가는 여정은 많은 노고가 위험이 따를 것입니다.
진리를 찾아 나서는 우리의 길도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쾌락의 위험, 불신의 위험이 늘 주변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여정은 커다란 용기와 도전의 정신이 있어야 된다고 저는 감히 여러분에게 말씀을 올립니다. 우리에게도, 우리를 진리인 분에게로 인도하는 구원의 빛이 비춥니다. 구세주를 만나고 경배하는 기쁨은 인생의 여러 가지 경로를 헤맨 뒤에 주어진다.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사건 망설이고 당황하는 삶 속에서도 그 빛은 우리를 늘 비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빛을 찾아 나갈 때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구세주의 신성을 알아보는 기도와 희생을 바칠 때 커다란 기쁨을 보았습니다. 베들레헴은 신앙의 확신과 기쁨을 주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어두운 밤을 비추고 있는 베들레헴의 별빛은 골고타 십자가의 길에서 구원이 완성되는 종착점까지 늘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고 죽음이 어쩌면 이 삶의 완성 작품이고 그 죽음이 나를 부활로 만들어 줄 거다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박해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희생된 십자가의 성녀 베네딕타 수녀는 죽음의 예감 속에서 주님의 공현 묵상을 남겼습니다. 성녀가 남긴 묵상의 구절은 달콤한 위안으로서의 크리스마스만을 떠올리는 이들에게 성탄 축제가 저 깊은 곳에서 어떤 구원의 신비와 만나고 있는지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녀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읽어드리니 여러분들이 깊이 묵상에 잠겨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남기고 바로 가스실로 들어가는 길을 갔습니다. 바로 이 수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베들레헴에서 시작된 그 길은 당연히 골고타로 인도되고
그리하여 구유로부터 십자가로 인도됩니다.
베들레헴의 별은 주위 어두운 밤을 비추고 있습니다.
구유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그 빛줄기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습니다.
불 꺼진 성금요일이 어둠 속이지만 부활절 아침에는 은총의 태양이 더욱 눈부시게 떠오를 것입니다.
어쩌면 시메온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제 탄생한 것을 부둥켜 안고서 ‘이제 다 이루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봤습니다. 오늘 구원을 봤습니다.’ 뭘 봤다는 겁니까 구원을 받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리고 뭐라 그랬습니까 ‘이 아기는 반대하는 표적이 될 겁니다.’
엄마에게는 뭐라 그랬습니까 ‘당신은 예리한 칼에 찔릴 것입니다.’ 반대 받는 표정이 돼서 어떻게 됐습니까 죽었습니다. 이 십자가에 달려서 어떻게 됐습니까 결국은 처절한 그 고통과 희생이 있다. 라는 우리의 방향 설정을 똑바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우리 인생입니다. 아니다 한 줄기 연기입니다 한 토막 밤과도 비슷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너무 비관적으로 얘기하는 건 아닙니까 따지겠지만 따지려면 따져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제 마음을 그대로 여러분께 전해 드리고 싶은 것뿐입니다.
엄마 손 자꾸 갈 때가 엊그제입니다. 초등학교 때 말입니다. 저는 손수건을 달지 않고 학교 가서, 집에 다시 돌아가 손수건 달고 초등학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벌써 6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근데 남은 시간이 얼마 남았습니까.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는 길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사는지를 깊이 헤아릴 것이고 내 자신을 통해서 분명 아버지께서는 하고 싶은 것이 있을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만 계속해서 한다면 그게 진정한 하느님의 직무를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직업은 인간이 택하는 것이지만 직무는 하느님이 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가 바로 직무라는 단어를 쓰고 있으니 우리들도 그 직무를 하느님께서 맡긴 것이니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산다면 우리 또한 또 하나의 계시가 되고 또 하나의 공현으로 세상에 드러나면서 다른 사람이 나를 바라보면서 저분을 쫓아가면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래 이리 오너라 하고 우리는 함께 그들을 안아줄 수 있을 때 이것이 진정한 공현 대축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방법론만 다르지 존재로는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일은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이타적 존재, 너를 위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나를 위한 존재로 계속 살아갑니다. 소아병적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제가 되어서도 정신을 못 차리니 주님께서 단죄할 것입니다. 그 따위로 살면 안 될 것이다. 이제 좀 더 성숙한 신앙생활이 있는 것인지 깊이,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이 주신 선물을 깊이 인식하고 이걸 가지고 이제는 나는 잘 조립하고 잘 활용해서 평화의 제물로 쓸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도 평화의 선물로 꽃을 맺었으니 우리 또한 평화의 제물로 써주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우리 또한 동방의 별입니다."
명심하며 주님이 걸어가신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