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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종교 미술관 원문보기 글쓴이: 빛과 소금
수메르문명
주전 2600년전의 슈메르신
수메르 (Sumer)
요약
고대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있는 지역명이며 고대문명의 발상지. 뒤에 바빌로니아로 불리던 지방의 북쪽 반을 아카드라 하고 페르시아만에 면한 남쪽 반을 수메르라 했다.
설명
고대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있는 지역명이며 고대문명의 발상지. 뒤에 바빌로니아로 불리던 지방의 북쪽 반을 아카드라 하고 페르시아만에 면한 남쪽 반을 수메르라 했다. 다만 수메르라는 호칭은 아카드인이 부르던 이름이었고, 수메르인 스스로는 키엔기라 했다. 이 지역에 언제부터 수메르인이 와서 살았는지 불분명하다.
문자와 언어
출토유물의 비교연구로 유별된 우루크기(BC 3000년경∼BC 2800년경)의 문화가 수메르인에 속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으나, 그것에 선행하는 우바이드기의 문화가 수메르인에 의해 형성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우루크기에 나타난 쐐기문자[楔形文字(설형문자)]의 원형인 고졸문자(古拙文字)는 수메르인이 발명한 것이며, BC 50년경까지 거의 3000년에 걸쳐 고대 오리엔트 전역에서 사용되었다. 쐐기문자를 채용한 주요 민족은 아카드인·아시리인·엘람인·후르리인·히타이트인·카시트인·우라르투인 등이다. 수메르문화의 대부분은 수메르어와 쐐기문자를 통해 고대 오리엔트로 전해졌다. 수메르어는 접두사·접중사(接中辭)·접미사가 발달한 전형적인 교착어(膠着語)이나, 언어적 계통은 아직 해명되어 있지 않다. 수메르인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주권을 상실한 우르 제3왕조 이후부터 수메르어는 사어화(死語化)의 길로 접어들었으나 이후에도 일종의 문화어로서 존속하고 학습되었다. 대역(對譯)된 어휘표 등이 바빌로니아와 히타이트·엘람·우가리트·에블라에서 다수 발견되었다.
도시국가의 형성
우루크기로부터 젬데트나스르기(BC 2800년경∼BC 2700년경)에 걸쳐 도시가 출현하여 이른바 <도시혁명>이 일어나 도시국가시대 또는 초기왕조시대(BC 2500년경∼BC 2350년경)를 맞이했다. 이 시대의 수메르 대도시로는 라가시·움마·우르·우루크·니푸르·슈루파크·에리두 등이 알려져 있다. 아카드지방의 대도시 키시도 수메르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각 도시는 저마다 수호신을 모셨으며, 군주는 수호신에게 선택된 주권의 대행자였다. 군주는 엔시(ensi) 또는 루갈(lugal)이라 불렸다. 라가시에서는 BC 2500년경 우르난셰왕조가 성립되어 약 150년간 지배했다. 3대왕 에안나툼 1세의 <독수리비문>, 움마와의 경계항쟁을 기록한 5대왕 엔테메나의 <원뿔비문>, 왕위찬탈자 우르카기나의 <개혁비문> 등은 창의적인 수메르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라가시의 행정·경제 문서에 의하면, 도시국가에는 수공업에 종사한 전문기술자(금·은·청동 세공인, 보석세공인·대장장이·피혁제조인·모직공·표백인·목수·배목수·소목·도공 등), 전업분화한 어부(바다·담수·운하·늪·투망어부), 원거리 통상에 종사하는 상인 등이 있어서, 신전(神殿)의 분할지가 주어져 있었다. 이들은 신전 직할지의 경영에 참가하였고, 운하·지구(池溝)·제방의 개착과 수리, 성벽의 건조, 기타 공공사업에 종사했다. 가축류는 전문 목축가가 소·당나귀·양·염소·돼지 등을 사육하였다. 곡물은 보리·밀, 야채는 양파류·콩류 등을 재배했다.
우르 제3왕조
BC 2350년경, 키시시(市) 출신의 사르곤이 신도시 아가데(아카드)를 세우고, 수메르의 루갈자게시를 무찌르고 사르곤왕조를 수립하였다. 이것이 수메르·아카드지방을 하나로 묶은 아카드왕국(BC 2350년경∼BC 2150년경)이다. 약 200년 뒤, 아카드왕국은 자그로스의 산악민족인 구티민족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고, 그 뒤 90년간 메소포타미아는 그 지배하에 놓였다. BC 2060년경, 우루크시의 왕 우투헤갈이 구티민족의 지배에서 수메르·아카드를 해방시켰으며, 그의 신하 우르남무가 우르 제3왕조를 수립했다. 우르남무왕은 관료조직에 의한 집권적 전제정치를 했으며, 세계 최고(最古)의 법전(수메르어로 씌어진 우르남무법전)의 제정자로서 유명하다. 아카드왕조시대에 융성해진 세계무역은 이 시대에 한층 박차가 가해졌고, 속주제에 의한 통치방식도 채용되어 국왕은 <사방 세계의 왕>이라 불렸다. 다섯 왕이 지배한 뒤, 셈계 민족 아무르인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여 수메르민족은 정치적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수메르·아카드지방은 바빌로니아라 불리게 되었다. 그때까지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종의 공용어 위치에 있었던 수메르어 대신 아카드어가 사용되었는데, 수메르문화·수메르종교문서 등은 이 시기에 일제히 문자화되어 수메르어 학습을 위한 문법서·어휘표 등이 작성되었으며 수메르어 문서가 번역되었다. 이신라르사왕조시대(BC 1950년경∼BC 1700년경), 바빌론 제1왕조시대 (BC 1830년경∼BC 1530년경)에 수메르어로 씌어진 점토판 문서의 내용은 여러 가지이고 방대한 수량에 이르며, 모두 수메르문화의 높은 수준을 나타내는 귀중한 자료이다.
바빌로니아 남부에 위치하며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이 발상한 지역·민족, 또는 그 문명의 명칭이다. 지금의 이라크 지방에 해당한다. 수메르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두 강으로 형성된 지방으로 BC 5000년경부터 농경민이 정주하여 BC 3000년경에는 오리엔트 세계 최고의 문명을 창조하였다. 이들은 두 강의 중·상류 지역 또는 엘람지방에서 이주하여 온 것으로 보인다. 이 지방에는 소택지(沼澤地)가 많고 두 강에서 연유한 홍수나 페르시아만(灣)의 높은 조수로 인하여 일찍부터 간척·배수·관개·축제(築堤) 등의 토목공사가 필요하여 촌락 간 협동작업이 행해졌고 이를 통해 유력한 씨족은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하였다.
이들의 문명은 시기에 따라 알 우바이드기(期), 우루크기, 젬데트나스르기의 3기로 구분된다.
① 우바이드기는 BC 3300∼BC 3100년경에 해당하는 문명으로 채색토기를 수반한 펴묻기[伸葬]와 니그로풍의 여자 토우(土偶)가 있었으며, 기단 위에 만들어진 신전을 중심으로 한 작은 규모의 도시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은 비(非)수메르적인 서아시아 고(古)민족의 문명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② 우루크기는 BC 3100~BC 2900년경의 문명으로 금속의 사용이나 수메르 문명의 특징인 신전(지구라트)의 건축이 시작되었고 원통인장(圓筒印章)도 발명되었다. 또 여러 가지 기술이 발달하여 도시국가가 성립되고, 고형(古型)의 설형문자가 사용되는 등 수메르문명이 형성되었다. ③ 젬데트나스르기는 BC 2900∼BC 2600년경으로 전기(前期)문명이 발전하여 역사시대로 이행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수메르인의 민족이나 언어의 귀속, 원주지에 관해서는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다. 이 무렵의 정치는 촌락 공동체시대의 평등한 원리가 남아 있어 일반 시민의 성년남자로 구성되는 민회(民會)와 씨족장들의 장로회가 민주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쟁과 같은 도시의 사활에 직결되는 상황에서는 일시적으로 도시의 전권이 위임되는 왕이 선출되었다. 초기 왕조시대에 들어서면 우루크·우르·키시·니푸르 등의 유력한 도시국가가 패권을 다투었다. 이 중 니푸르의 엔릴신(神)은 각 도시의 왕들이 선망하여 수메르의 종교상의 중심적인 신으로 되었다. 초기 왕조시대에는 500년 간 각 도시국가가 병립·항쟁하였고, 각 도시는 신의 소유라고 생각되어 성벽으로 둘러싸인 신전을 중심으로 한 시역(市域)과 주위의 농경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도시에서는 정치·경제·군사·생활 등이 모두 신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므로 신전공동체 또는 신전국가라고 할 정도였다.
도시간의 항쟁이 자주 있자 점차 왕권이 신장되는 한편 세습화되었다. 또한 도시신(都市神)을 제사하는 신전은 방대한 수입이 있었으므로 사제계급은 세속적으로도 큰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도시국가는 수리권(水利權)이나 농경지·교역로의 확보를 둘러싼 인접 도시와의 항쟁과 내부의 왕과 사제계급의 대립으로 약체화되었다. 초기 왕조시대 말기에는 라가시왕 우르카기나의 사회개혁이 있었으나 실패하여 움마의 왕 루갈자기시에게 통합되었다. 그러나 움마도 BC 2300년경에 셈계(系)인 아카드의 사르곤왕에게 멸망되어 수메르의 도시국가시대는 끝났다. 180년 간의 사르곤왕조 후 수메르는 한때 다시 번영하여 우르 제3왕조를 일으켰으나 5대만에 동방의 엘람에게 멸망됨으로써 수메르는 셈족에게 동화되고, 이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수메르의 문화는 세계 최고의 문명으로서 오리엔트 역사상 많은 공적을 남겼다. 그들은 그림문자[繪文字]로부터 독특한 설형문자를 발명하여 고대 오리엔트에서 널리 사용하였다. 또한 12진법과 태음력을 사용하였고 수메르법이라는 법전도 만들었다. 우르 제3왕조시대의 《우르 남무 법전》이나 《슐기 법전》은 단편적이지만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며 문학·신화·종교에 관한 책도 전해진다. 노아의 방주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홍수전설을 담고 있는 《길가메시서사시》도 잘 알려져 있다. 수메르는 자신들의 역사기록은 남기지 못하였으나 《왕명표(王名表)》에는 많은 왕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우르 제1왕조 이전은 전설적인 부분이 많다. 건축·미술·공예에도 뛰어나 신전의 기단에서 발전하였다고 생각되는 지구라트[聖塔]는 평면의 직사각형 기단을 계단상으로 쌓아 올린 바빌로니아 특유의 것으로 바벨탑의 원형이 되었다.
우르 및 에리두·우루크·라가시·키시·납푸르·움마·알 우바이드 등의 발굴은 고도의 도시생활의 자취를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우르의 왕묘에서 발견된 많은 유품은 이들의 높은 기술적 수준과 예술적 재능을 나타내고 있다. 두리새김[丸彫]으로 된 조각으로 우루크의 《여성 두상(頭像)》, 텔 아스마르·마리에서 발견된 《사제상(司祭像)》 《예배자상》이 있고, 부조에는 《와르카의 큰 잔》 《독수리의 비(碑)》가 대표적이다. 수메르에서는 점토 이외의 원료가 산출되지 않아 석재나 광석·귀금속은 모두 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찍부터 원격지무역이 행해져 동쪽은 인더스 유역, 서쪽은 아나톨리아·시리아·이집트까지 미쳤으며, 그 무역을 통하여 수메르문명은 오리엔트 각지로 전파되었다
주택단지들을 파 들어가 보다가 고고학자들은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지금 세계사 책에 보면 인류 문명의 최초의 문명으로 갈대아 우르 지역의 수메르문명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최초의 문명임에도 불구하고 건물 하나가 많게는 수백개의 방이 있는 건물을 비롯해 굉장한 주거지역을 이루며 살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당시에 이미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상수도와 하수도를 만들었습니다. PVC나 스텐파이프는 아니고요, 도자기를 구워 상하수도 시설을 한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 그저 원숭이 비슷한 존재들이 아니고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조차도 상하수도 시설을 제대로 갖춘 것이 이제 몇 년 되었습니까? 그런데 인류 최초의 문명이 이미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래는 2005. 2. 26. 조선일보 기사 '대영박물관이 온다'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라크 남부의 고대유적도시 우르. 1920년대 발굴에서, 서기전 2600~2400년으로 추정되는 여왕 푸아비의 무덤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10명의 여인이 순장(殉葬)됐는데, 한 여인의 주변에서 금빛이 번쩍였습니다. 황소의 황금 가면이었습니다. 황금 황소는 목제 11현 수금(竪琴·하프의 일종)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발굴단장 L. 울리는 “순장된 한 여인의 손은 현이 있던 위치에 놓여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20세기 발굴 유물 중 최고품의 하나로 꼽히는 4500여년전 수메르문명의 수금은 이렇게 발굴됐습니다.
우르 지역에 살던 수메르 인들이 섬기던 신들중에 가장 대표적인 신이 '이난나' 여신인데, 이것이 이난나 여신의 상입니다. 머리에 있는 이것은 뿔이 아니라 '달'(초생달)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여신이 흥분도 하고 땀도 흘리고 하면, 비도 많이 오고 농사도 잘 된다고 생각하여, 봄철에 이난나를 숭배하는 기간동안 모든 여성이 남성들과의 자유로운 성교를 즐길 수 있게 하였으며, 신전은 공공연한 난교의 장이 되었지요. 그런데 이 이난나 여신이 가나안 지역에서는 아스다롯 여신으로 불렸고,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로 들어가면서 이쉬타르 여신이 되었으며, 그리이스로 가서는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되었으며, 결국 로마로 가서 비너스가 되었습니다. 그 신이 다 그 신이고, 그 원조가 이난나 여신입니다. 의학적으로 성병을 베네리얼 디지즈(Venereal disease, VD)라 부르는데요, 이 베네리얼이란 말은 비너스의 형용사로서 비너스 여신으로부터 유래된 말입니다. 비너스 여신이 관련된 병이라는 것이지요. 비너스 신전의 모든 성직자들은 여자들인데, 이 여사제들의 성은 완전개방이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은 하나의 사상으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수메르 문명에 대한 가장 놀라운 발견중의 하나는 수메르 문자의 발견입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자는 수메르 사람들이 쓰던 쐐기문자입니다. 쐐기라는 것은 곤충 중의 풀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고정시킬 때 박는 쐐기(Wedge)를 말합니다. 한자로는 설형문자라고 부릅니다. 보시는바와 같이 이런 수많은 점토판이 발견되었는데요, 그 어순( 語順)이 서양이나 중동 사람 말이 아닌, 한국어와 제일 비슷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문장이 주어+목적어+동사의 순이고요, --'가', --'을' 등의 토시를 붙여서 말을 구성하며, '밭'을 '받'이라고 하고, '길'을 '길'이라고 하고, 아버지를 집에서는 '아바'라 하고, 남에게 말할때는 '아비'라 하며, 높은 분을 높여 부를 때는 이름뒤에 '님'자를 붙입니다. '하늘'을 '아눌'이라고 하고 하늘을 높인 말 즉 '하늘님'을 '아눌님', 혹은 '아누님'이라고 하지요. 그러한 말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또 놀라운 것은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귀하게 숭상하던 꽃이 'Rose of Sharon' 즉, '샤론의 장미'입니다. 예수님의 별명도 '샤론의 장미'이지요. 찬송가 89장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이 꽃의 학명은 히비스쿠스 시리아쿠스(Hybiscus syriacus) 인데요, 그것은 바로 무궁화 꽃의 학명과 동일합니다. 그 옛날 고토 메소포타미아 땅에서 바벨탑 사건 이후에 동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 유래의 언어와 자취와 그들이 사랑한 꽃을 가져와 극동에 위치한 우리나라까지 대장정을 행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수메르인의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된 놀라운 사실중의 하나는 대영박물관의 조지 스미스라는 청년이 평생을 바쳐 연구하여 밝힌 '길가메시 에픽'에 관한 기록입니다. 수메르의 길가메시라는 족장이 기록한 서사시인데, 그 내용이 성경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내용이 거의 같습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의 기록에 노아의 홍수 사건 기록이 나온다는 것인데, 이는 인류 최초의 문명 이전에 분명 노아의 홍수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수메르 문명이 홍수 이후에 생겨난 문명임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수메르라는 말의 어원은 '세메르'에서 왔는데, '셈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노아의 아들중에서 장자권을 가진 자 '셈의 나라'라는 것이지요.
수메르족
인류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문명을 건설한 신비의 민족 수메르족!
그들이 우리 한민족의 조상이라는 말을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기독교의 성경이 그들의 문학작품을 각색해 만든 것이라는 말을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수메르 사람들은 대략 기원전 4500-4000년경에 지금의 이라크 땅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나타나 약 2천년 동안 이 지역을 지배하다가 사라진 민족이다. 현존하는 세계의 민족 가운데 이들의 공식적인 후예는 없어졌지만, 이들은 인류 전체의 뿌리에 대한 비밀을 간직한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인류가 동물을 사냥하고 과일을 따먹으며 살던 원시시대에서 지금과 같이 도시를 건설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문명생활을 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수메르 민족의 덕택이다. 인류가 이렇게 자기의 생각을 글로 써서 남에게 전달하고 후대에까지 남길 수 있게 된 것도 역시 이 수메르 민족의 덕택이다.
러시아 태생의 저명한 미국인 수메르학자 사무엘 크레이머는 인류 최초의 학교, 최초의 민주적 대의제도 등 인류의 문명사, 문화사에서 최초의 중요한 것 27가지가 수메르인들의 발명품이라고 쓰고 있다. 그밖에도 물론 대단히 많은 최초의 것들이 이 수메르 민족의 창작품이었다. 수메르 민족은 오늘날의 인류에게 최초로 빛을 가져다 준 그야말로 전설 속의 영웅과 같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인류 최초의 문자와 도시 발명
수메르 사람들이 인류의 문명사에 남긴 족적은 모든 분야에서 뚜렷하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하고 큰 의미를 지닌 것으로는 문자의 발명과 도시건설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문자는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의 우루크(Uruk)에서 수메르인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처음에는 사물의 모양을 본뜬 기호로 뜻을 나타낸 상형문자였으나, 이것이 점차 간결화되고 개량되어서 나중에는 쐐기 모양의 부호로 뜻을 나타내는 이른 바 설형(楔形)문자가 되었다. 수메르인들은 진흙을 빚어서 말린 점토판을 굵은 갈대펜(stylus)으로 긁어서 문자를 기록했다.
문자의 발명은 인류사를 선사(先史)시대와 역사(歷史)시대로 구분짓게 하는 획기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과 더불어 인류는 역사시대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며, 이점에서 본다면 수메르인들은 인간에게 처음으로 역사라는 것을 가져다 준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출처] 4. 수메르족 (생명의 숲 진리의 샘) |작성자 새벽이슬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1.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은 이라크를 두 번 죽이고 있다. 그 첫번째가 물리적인 것이었다면 두번째는 정신적인 것이었다.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History Begins at Sumer)>의 저자로 유명한 사뮤엘 크레머 교수는 최초의 창조설화를 비롯한 교육제도, 사법제도 등 인류 최초의 39개 사건이 모두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 카르발라 시아파 압바스 사원
수메르인들이 살던 지역은 지금의 이라크 지역을 의미한다. 바그다드 시내에 있는 고대문명 박물관이란 지금으로부터 7000년 된 수메르의 유적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박물관이 이번 전쟁으로 약탈자들에 의해 모두 털렸다고 한다. 이 박물관의 나브할 아민 부소장은 "우리의 유산은 끝났다"고 말할 정도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배우는 인류문명의 4대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메소포타문명은 말 그대로 'meso-potamia'로 양강(兩江) 사이란 뜻이다. 양강이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성서에 나오는 '에덴'동산으로 불리는 딜문동산도 바로 이 양강 사이에 있는 지역이며, 이 동산마저 이번 폭격으로 폐허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지금 세계는 겨우 200년 역사 밖에 안되는 미국이 전세계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3살짜리 아이의 손에 핵폭탄을 들려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아니 미치광이가 손에 미사일을 들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2. 이라크-이란-북한은 '문명의 축(axis of civilization)'
부시가 '악의 축'으로 부른 나라, 즉 이라크 이란 북한은 모두 인류 초고대 문명의 발상지란 점에서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지금 북한 학자들은 '대동강문명'이라고 하여 검은머루 유적지 발견 이후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더 오래 된 문명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고 한다. 부시는 지금 이런 세 나라만 골라 '악의 축' 운운하면서 공격 표적으로 삼고 있다. 이를 미국의 '역사 콤플렉스'라고나 해 두자.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한 무리의 인간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이 장면을 구약성서 창세기는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평야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창세기 11장 2절)라고 적었다. 이 한 무리의 인간들을 '수메르인 Sumerian'이라고 하며 그 뜻은 '검은 머리'라는 뜻이다.
성서는 이 거대한 사건을 몇 줄로 처리하고 있다. 그러니깐 지금으로부터 7000여년 전의 사건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양강 지역에 올 때 문자와 학교제도와 법제도 등 고급문화를 이미 가지고 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도대체 어디서 있다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이주해 왔느냐이다.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남겨져 있는 이 수메르인들의 유래 문제를 소위 '수메르 문제 거리 Sumer Problem'라 할 정도이다.
3월 25일(현지시간) 바그다드에서 이라크 정부가 미국의 공습으로 파괴됐다고 주장하는 건물을 이라크 한 소년이 둘러보고 있다. ⓒ 로이터 뉴시스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문명도 수메르보다 무려 1000년 이후의 것이며,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 문명도 그와 비슷한 후기 문명이다. 이스라엘의 '셈 Shem'족의 유래도 'Shum'에서 유래했다. 수메르인들이 가지고 온 문명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급문명으로, 그 당시 지금의 히브리인들은 말 그대로 'Habiru'로 그 말의 의미는 '떠돌이' 혹은 '산적'의 의미 등을 갖는다.
수메르인들이 설형문자라는 것을 사용할 당시 히브리인들은 문자도 없었으며 옷이란 동물 가죽을 벗겨 입고 다닐 정도였다. 그러나 수메르인들은 직조기술을 발견하여 이미 옷을 물들여 입고 다녔다. 건축술도 발달하여 2층 가옥을 지을 정도였다. 지금 발견되고 이번 전쟁으로 도난당한 토판들은 거의 경제거래 문서들로서 이는 거래를 한 다음 남긴 계약문서들이다. 한국의 강신택 교수는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 분야의 연구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3. 기독교와 수메르 문명
1830년대 처음으로 이라크에서 수메르 문자가 발견되면서 가장 충격을 받은 곳은 기독교였다. 왜냐하면 가장 최초의 사건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생겼을 것이라 여겨져 왔고 에덴동산도 그 지역 어딜 것이라 믿어 오던 터에 창세기의 창조설화와 홍수 설화 등이 수메르의 토판 속에 그대로 그 원형이 기록돼 있었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 남자와 여자가 있었고, 동산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금기, 그런데 슈메르에서는 여자가 아닌 남자가 먼저 따먹는 다는 둥 그리고 홍수가 사람들이 다 죽는 데 지아슈드라는 의인이 있어서 배를 만들어 사람들은 구제한다는 둥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기서부터 성서학자들은 기독교를 보는 눈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으며 기독교 안에서도 성서의 역사를 다시 쓰자는 주장과 그것을 반대하는 주장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한국의 기독교 장로교(기장)과 예수교 장로교(예장) 등이 갈라지는 이유도 바로 성서를 보는 이런 시각의 차이 때문이다.
기장은 고고학의 발견을 수용하는 입장이고, 예장은 그렇지 않는 입장이었다. 이것이 1950년대 한국 교회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수메르의 유산을 성서의 한 유산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고급문화 수메르에 대하여 히브리 문화를 저급문화로 분류한다. 서양문명은 그리스의 합리적 이성과 히브리의 감성적 신앙이라는 두 물줄기로 이루어진다. 이 두 물줄기는 고대 수메르 문명에서 만난다. 기원전 2000년경 수메르 우르 남무 왕국이 멸망하면서 슈메르 문명은 두 갈래로 갈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스의 올림푸스 신전의 원형이 수메르의 딜문 동산의 그것이라고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히브리인들의 정신적 유산은 그대로 수메르의 것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자, 그러면 이라크가 저렇게 무너지고 있다는 것은 인류 문명의 정신적 고향이 황폐화되거나 말살되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텍사스의 한 카우보이가 나타나 한 손에는 미사일을 한 손에는 핵무기를 들고 인류의 정신적 유산을 짓밟고 있다. 아무도 지금 그를 말릴 수 없다.
4. 수메르와 한국
그러면 수메르인들은 과연 어디서 왔는가? 이것이 수메르 문제의 화두이다. 그들의 유래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남긴 문자이다. 토판에 세겨진 설형문자는 아무튼 인류 최초의 문자로 평가받고 있다.지금 전 세계 언어학자들은 어떻게든 수메르어와 자기 모국어의 동일성을 찾아 자기들의 언어가 세계 최고의 언어임을 내세우려 하고 있다.
▲ 이슬람 사원의 사탑.
그래서 헝가리, 프랑스, 독일 등도 자국의 언어가 수메르어와 그 유사성이 발견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극동으로 눈을 돌려보면, 1920년대 볼(C. J. Ball)이 이미 <중국어와 수메르어(Chinese and Sumerian)>을 저술하였다.
방대한 분량을 통해 두 언어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해 놓고 있다. 심지어 일본인 요시와라(R. Yoshiyara)는 1991년에 '수메르어와 일본어'를 저술, 발간하였다.
어느 두 언어가 같은 계통이라면 먼저 언어의 특징이 같아야 하고, 문법 구조가 같아야 하고, 유사한 언어 특히 수사가 같아야 한다. 우리가 인도와 유럽의 언어가 같다고 하는 것은 영어, 독어, 프랑스어, 인도 샨스크리트어가 모두 이 세 가지 점에서 같기 때문이다.
물론 수메르어와의 비교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생각키로는 이 세가지 점에서 거의 완벽하게 같은 언어는 우리 한국어가 아닌가 한다. 먼저 언어의 특징이란 수메르어가 교착언어인데 교착언어란 우리말의 주어나 목적어 다음에 '은, 는, 이, 가' 등이 붇는 언어를 의미한다. 이는 우랄 알타이언어의 공통된 현상이다.
그런데 중국와 인구어는 일단 교착언어가 아니다. 그래서 수메르어와는 그 특징에 있어서 같지 않다. 다음으로 문법 구조에 있어서 수메르어는 '주어+목적어+동사'이다. 이는 영어 혹은 중국어와는 다르고 우리말과는 같은 구조이다.
마지막으로 수사(數詞)에 있어서 같아야 하는 데 <삼국사기>에는 고대 우리말의 수사가 남아 있다. 필자는 수메르 수사와 우리 고대 수사를 비교 한 바 있으며, 최근 히브리대학에서 수메르어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 온 조철수 교수가 더욱 심화연구 하여 발표 한 바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수메르어는 처음 1을 '아스 as'라고 하는 데 이는 <삼국유사> 고(古)한국어의 그것과 일치한다. 처음 빨래를 '아시 빨래'라고 하며 아침은 '아사'라고 하는 것이며 해 뜨는 아침을 의미하는 Asis가 여기서 유래한다.
언어 이외에 수메르 유래의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 '지구라트'이다. 지구라트는 벽돌로 쌓은 인조 탑이다. 물론 피라밋의 유래이며, 구약성서의 바벨탑의 전신이 다름 아닌 지구라트이다. 지구라트는 천문관측소, 고동 회의소, 제단, 무덤 등 다기능를 가지고 있다. 생각키로는 수메르인들이 어느 고산지대에 살다가 양강 유역으로 내려 왔다고 보는 것이다.
지구라트의 기능들이란 산이 가지고 있는 기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걸프 지역으로 통해 들어 온 해양족이 아니고 자고로스산맥을 타고 내려 온 고산족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라크 북쪽 산악지대와 그 너머 어디선가 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다행히 고고학자들은 지금 터키 그리고 몽고 지역까지 수메르의 유적을 찾아내고 있는 실정이다. 기원전 3500년경 과연 그 찬란한 고급 문명을 가지고 있던 지역은 과연 어딘가?
그밖에 수메르와 한국은 묘장제도, 순장제도, 60진법, 최고지도자의 상징을 봉황으로 삼고 있는 점 등에 있어서 앞으로 두고두고 그 유사성이 연구의 대상으로 남겨져 있다. 그러나 역사 콤플렉스에 걸린 미국에게는 이런 역사연구마저도 두려움의 대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인디언 원주민을 학살하고 세운 역사의 원죄 때문에 결국 미국은 끝까지 자기들 보다 오래된 나라들의 민족문화를 말살해 나갈 것이다.
미국의 양대 세력인 유대인과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이익이 의기투합할 때는 무슨 짓이든 저지를 것이다. 이라크 박물관이 약탈당하는 소식을 멀리서 접하면서 가슴 조이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부디 도난당한 유물들이 무사히 박물관으로 되돌아오길 바란다.
김상일 기자 (한신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
새벽이슬(lsh2612647)
[출처] 5.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생명의 숲 진리의 샘) |작성자 새벽이슬
수메르, 수메르 사람들
이 글은 제가 사무엘 크레이머의 저서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를 번역하면서 그 해설부분으로 쓴 글입니다. 제가 외국유학을 떠나면서 이 책의 원고를 한 출판사에 맡겨놓고 나갔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다른 출판사에서 다른 사람이 번역한 책이 나왔습니다. 수십년전에 나와서 아무런 관심을 못받고 있던 책을 제가 번역한 이후에 갑자기 다른 사람이 번역한 것도 이상하고, 하여간, 그 덕분에 제가 그 책의 부록으로 써놓았던 수메르역사에 관한 상당량의 원고는 그냥 사장되었습니다. 저로선 기가 막히는 일이었는데, 간간이 지금 이 글도 다른 분들이 퍼다 마치 자기 글처럼 전재하는 현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주동주에게 있습니다. 이 글의 상업적인 이용은 금지하는 바이며, 이 글을 인용하실 분들은 반드시 원전을 밝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2002. 9. 25)
인류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문명을 건설한 신비의 민족 수메르족!
그들이 우리 한민족의 조상이라는 말을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기독교의 성경이 그들의 문학작품을 각색해 만든 것이라는 말을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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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 사람들은 대략 기원전 4500-4000년경에 지금의 이라크 땅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나타나 약 2천년 동안 이 지역을 지배하다가 사라진 민족이다. 현존하는 세계의 민족 가운데 이들의 공식적인 후예는 없어졌지만, 이들은 인류 전체의 뿌리에 대한 비밀을 간직한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인류가 동물을 사냥하고 과일을 따먹으며 살던 원시시대에서 지금과 같이 도시를 건설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문명생활을 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수메르 민족의 덕택이다. 인류가 이렇게 자기의 생각을 글로 써서 남에게 전달하고 후대에까지 남길 수 있게 된 것도 역시 이 수메르 민족의 덕택이다.
러시아 태생의 저명한 미국인 수메르학자 사무엘 크레이머는 인류 최초의 학교, 최초의 민주적 대의제도 등 인류의 문명사, 문화사에서 최초의 중요한 것 27가지가 수메르인들의 발명품이라고 쓰고 있다. 그밖에도 물론 대단히 많은 최초의 것들이 이 수메르 민족의 창작품이었다. 수메르 민족은 오늘날의 인류에게 최초로 빛을 가져다 준 그야말로 전설 속의 영웅과 같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인류 최초의 문자와 도시 발명
수메르 사람들이 인류의 문명사에 남긴 족적은 모든 분야에서 뚜렷하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하고 큰 의미를 지닌 것으로는 문자의 발명과 도시건설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문자는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의 우루크(Uruk)에서 수메르인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처음에는 사물의 모양을 본뜬 기호로 뜻을 나타낸 상형문자였으나, 이것이 점차 간결화되고 개량되어서 나중에는 쐐기 모양의 부호로 뜻을 나타내는 이른 바 설형(楔形)문자가 되었다. 수메르인들은 진흙을 빚어서 말린 점토판을 굵은 갈대펜(stylus)으로 긁어서 문자를 기록했다.
문자의 발명은 인류사를 선사(先史)시대와 역사(歷史)시대로 구분짓게 하는 획기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과 더불어 인류는 역사시대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며, 이점에서 본다면 수메르인들은 인간에게 처음으로 역사라는 것을 가져다 준 민족이라 할 수 있다.
도시의 발명이 지닌 의의 역시 매우 크다. 인간들이 모여서 집결된 주거지를 건설하고 조직이라는 것을 만들어 서로간의 삶을 규율하게 된 사건은 오늘날까지 인간 삶의 기본 패턴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의의를 지닌 도시 건설이 기원전 3천년대의 후반기에 역시 수메르 사람들에 의해 최초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기원이 밝혀지지 않은 신비의 민족
수메르 사람들은 분명하지는 않으나 대략 기원전 4500년에서 4000년 사이에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이 흐르는 메소포타미아의 평야에 나타나 살기 시작하였다. 인간이 사용한 도구로 시대를 구분하는 통상적인 시대구분법에 따른다면 이때는 목축과 농경생활이 막 시작된 신석기시대였다. 메소포타미아 평야지대에는 수메르인들이 들어오기 이전에 셈어족과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여러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수메르인들은 이들 보다 우월한 문화를 지니고 이주하여 이내 이들을 압도하고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수메르인들이 어디에서 기원한 민족인지, 그리고 이들의 초기 역사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분명한 정설이 없다. 이들의 기원이 매우 불명확한 반면, 이들이 남긴 문화 유산이 너무도 두드러지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수메르인들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신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에 내가 읽은 책 가운데 한 권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는 것도 있었다.
"수메르 문헌의 제시된 증거에 기초해 볼 때, 기자의 피라미드는 시나이 사막에 위치한 우주 기지에서 끝나는, 우주관제센터의 착륙복도의 일부로서 외계인들에 의해 유도 장치로 쓰일 목적으로 건설된 듯 하다"
이 글의 저자에 따르면 고대 수메르인들은 태양계의 일곱 번째 행성인 지구를 일종의 행성간 버스 정거장으로 사용했던 우주 여행자들의 자손으로서 이들이 바로 이집트의 기자에 있는 대피라밋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수메르인의 기원에 관한 이 저자의 추리는 바로 다음과 같은 의문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모든 것의 이전'이었던 문화가 갑자기 등장하여 복잡한 문자, 경제체제, 그리고 잘 구성된 사회구조를 완벽하게 갖출 수 있었을까?"
이 저자에 따르면 수메르인들의 문화적 유산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당시 겨우 석기를 사용하던 원시시대 인간들의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고도의 첨단문명을 가지고 외계에서 이주해온 우주인들의 것이라고 생각해야만 합리적으로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수메르인들의 업적이 매우 뛰어난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 글의 필자가 생각한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수메르인들의 역사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알게 되겠지만, 그것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부단한 실험과 개량을 통해 단계적으로 발전되어 온 것이다.
교착어를 사용한 검은 머리의 사람들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을 "검은 머리의 사람들"(black-headed people)이라고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땅을 수메르(Sumer)라고 불렀다. 수메르인이라는 말은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지만, 이 말의 원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는 설이 없다. 분명한 것은 이들의 생김새가 주위에 있던 셈어족이나 인도유럽어족의 여러 민족들하고는 매우 달랐으며, 수메르인들 자신은 이러한 생김새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자기 민족을 주위 민족들과 구분해 불렀다는 것이다.
이들의 언어 역시 주위의 민족들이 사용하던 것하고는 매우 달랐다. 그들의 언어는 명사에다 토씨를 바꿔서 주어나 목적어로 표현하는 교착어(agglutinative)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것은 지금 우리말이 속해있는 우랄 알타이언어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수메르인들이 검은 머리칼을 지니고 있었고, 교착어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동양의 일부 사학자들은 이들을 동아시아의 민족들과 연관시키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학설들을 제시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른 바 "재야사학자"들 중에 수메르인을 우리 한민족과 연관시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라는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서에 따르면 단군 이전에 한민족이 세운 12개의 나라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로 수밀이(須密爾)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한다. 재야 사학자들은 바로 이 수밀이국이 메소포타미아에 있었던 그 수메르국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수메르 역사를 정통으로 연구해 온 서양학자들은 수메르민족의 기원을 오늘날의 동아시아 민족들과 연계시키는데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사무엘 크레이머는 수메르인들 자신들은 처음부터 메소포타미아에 태어나 그 곳에서 살아온 것으로 믿었다고 말한다. 저명한 아랍사학자인 히티(Philip K. Hitti)는 수메르어가 터키어, 헝가리어, 핀란드어 등에서 발견되는 교착어적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이러한 점을 제외한 다른 어떤 특성도 이들 언어 또는 기타의 우랄 알타이어나 몽고어와 비슷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는 각종 부조물에 나타난 수메르인들의 생김새를 보아서는 그들이 긴 머리의 지중해 인종과 넓은 이마의 북동부 산악지대인인 아르메니아족과의 혼혈로 보여진다고 말하고 있다.
수메르 유적 발굴에 지대한 공을 세운 고고학자 레오나드 울리(Leonard Woolley)와 역시 고고학자인 독일인 세람(C. W. Ceram) 등은 수메르인들이 계단 모양의 신전을 만들어 그 곳에 신을 모신 것을 본다면 산악지대가 그들의 고향으로서 신들은 높은 언덕 위에 산다고 생각한 것 같으며, 수메르 축조물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 목조건물 양식에 따라 지어져 있는 점으로 보아 나무가 무성한 고지대가 그들의 발원지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인류학자인 영국인 아더 케이트(Arthur Kate)는 인더스강 계곡이 수메르인들의 발원지라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주장들은 아직까지 어느 것이 맞다고 분명히 말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 어쨌거나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을 이룩한 수메르민족이 지금의 중동 민족들과 같은 뿌리를 가진 민족이 아니고 어찌 보면 우리 민족과 관련이 깊을 수도 있다고 하는 점은 우리에게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고대 중동세계의 보편문화가 된 수메르 문화
수메르인들이 남긴 문화 유산은 그후 인류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수메르인들의 기술과 생활양식, 종교, 문학 등은 그들 주변의 많은 민족들에게 하나의 전형이 되었고, 수메르의 뒤를 이은 바빌론, 앗시리아, 히타이트제국, 그리고 멀리 이집트 등에도 큰 영향을 남겼다. 마치 오늘날 청바지와 햄버거, 코카콜라로 상징되는 미국문화가 세계를 지배하듯이 인류 역사의 초기 단계에서 수메르 문화는 고대 중동세계의 보편 문화로서의 역할을 했다.
수메르인들이 발전시킨 농경기술은 점차 유목과 수렵생활을 대체해 나가면서 원시 상태에 있던 인류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주었다. 최초로 맥주를 빚어서 마신 민족이 수메르 민족이라는 사실은 이 점을 단적으로 반영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거리라고 할 수 있다. 최초로 도시를 건설한 수메르인들의 건축 기술은 후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우르(Ur)의 수메르 신전 "지구라트"(Ziggurat)는 지금도 그 웅대한 자태를 보존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후 중동 각지에 세워진 신전 양식의 전형이 되었으며,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의 모델이 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수메르인들이 만든 사회제도와 관료제도, 법률 등도 후대의 제국들에 그대로 차용되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왕정(王政)을 이룩한 민족이 수메르 민족인데, 이것이 주위의 민족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훨씬 후대에 이르러 유태인들이 사울을 최초의 왕으로 추대하는 성서 속의 이야기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왕이 있어야 강력한 민족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유태인들이 갖게 된 것은 수메르인들이 이미 소멸하고 난 이후에도 천년 이상이나 지난 시기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기록된 인류 최초의 법률 역시 수메르인들이 만든 것이다. 우르남무라는 수메르왕이 반포한 이 법률은 유명한 바빌론의 함무라비법전에 큰 영향을 남겼으며, 먼 훗날 모세의 법률을 특징짓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유명한 표현이 이 함무라비 법전에 정확히 들어있는 말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이밖에 수메르인들의 종교적 관념과 의식 등도 주위 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남겼다. 마치 로마가 그리스의 신들을 수입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듯이 바빌론과 아시리아제국의 신들은 수메르 신들이 그대로 들어와 이름만 바꾼 것들이 많았다. 수메르인들의 종교의식이나 기도문, 찬송 등도 후대의 제국들에 차용되었고 먼 훗날 유태인들의 종교에도 분명히 반영되었다.
수메르인들의 문학작품들은 여러 민족의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 유명한 수메르의 영웅 길가메쉬(Gilgamesh)를 노래한 서사시는 바빌론과 앗시리아인들이 각색하여 더욱 발전시켰고, 기독교의 성경에도 뚜렷하게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더 나아가 이것이 그리스의 헤라클레스 신화와 일리아드, 오딧세이 등 영웅을 소재로 한 서사문학에까지 영감을 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수메르 문학과 기독교 성서
우리나라에서는 우리의 조상들과 직접적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수메르인들에 대해 지금까지 변변한 책 하나 발간된 적도 없지만, 이와 달리 수메르 역사가 재발견된 지난 한 세기 동안 전세계적으로 수메르인에 대한 연구는 비상한 관심을 모아 왔다. 그 주된 이유는 수메르인들이 이처럼 인류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 나날이 새롭게 발견되고 있는 점에 있다. 특히 수메르인들의 종교문학과 의식이 오늘날 서양 문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에 상당한 영향을 남겼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학계는 물론 일반인들의 관심도 더욱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수메르 문명의 발굴은 성서의 무대였던 이 지역에서 성서에 기록된 사실들을 역사적으로 입증하고자 한 기독교 단체들의 후원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발굴이 진전되면서 성서의 기록보다 훨씬 앞서는 수메르인들의 기록들이 나타나 성서의 독창성과 신비성을 위협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것이 오히려 일반인들의 관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오늘날에는 수메르문명에 대한 연구가 기독교의 뿌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이나 기독교를 비판하려는 사람들 모두에게 지대한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여 이것이 연구의 동인(動因)이 되고 있기도 하다.
사무엘 크레이머의 책에서도 여러 군데 소개되고 있듯이 성서의 천지창조, 에덴 동산, 노아의 홍수, 바벨탑 이야기 등은 뚜렷하게 수메르인들에게서 영감을 얻었거나 차용한 것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이뿐만 아니라 성서의 가장 독창적인 요소들로 꼽히는 시편이나 잠언, 전도서, 아가, 욥기 등의 지혜 문학도 이미 수메르인들에게서 그 원형이 발견되고 있다.
크레이머가 소개한 최초의 욥(Job)이야기는 성서의 욥기와 거의 완벽하게 동일한 주제, 동일한 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욥기가 기록된 후 천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 이것에서 영감을 얻은 독일의 괴테가 파우스트를 썼지만, 성서의 욥이야기는 그 보다 천여년 이상 전에 나온 수메르인들의 이야기에서 그 소재와 구성을 따왔다고 보아도 틀림없을 것이다.
성서와의 관련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은 "길가메쉬 서사시" 에 나오는 홍수 이야기이다. 수메르의 영웅 길가메쉬가 삶의 무상함을 느끼고 영생을 얻는 방법을 찾아 헤매다가 대홍수에서 살아 남은 지우수드라(Ziusudra)라는 노인을 만나 영생의 비결을 듣게 되는데, 이 때 이 노인이 들려주는 홍수 이야기가 바로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의 원전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당시에 이미 여러 민족의 언어로 번역되어 그 사본들이 최근 발견되었고, 바빌론인들이 지우수드라를 우트나피슈팀(Utnapishutim)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더욱 발전시킨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이 우트나피슈팀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번역했다고 볼 정도로 유사한 것이다.
수메르인들과 유태인들은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구약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유태인들이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는 아브라함은 그 아버지 데라를 따라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다고 되어 있다 (창세기 11:31). 그런데 이 갈대아땅은 수메르인들이 활약하던 메소포타미아지역을 의미하며, 우르는 유명한 수메르의 왕조가 건설되었던 바로 그 도시의 이름이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추정한다면 유태인들의 조상은 수메르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떠돌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뒤에서 수메르의 역사를 소개할 때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수메르인들이 도시를 만들고 문명생활을 누리고 있을 때 그 주위에는 유목 생활을 하는 다수의 야만적인 민족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셈족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이들은 수메르인들과 공존하면서 훗날 아카드와 바빌론 등의 대제국을 건설하기도 했는데, 이 셈족이 바로 오늘날의 유태인과 아랍인들의 원형인 것이다.
정리하면 수메르문화가 고대 중동세계에서 보편 문화의 역할을 하고 있을 때 이들 주위에서 떠돌던 유목민족의 일파였던 유태인들이 수메르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높고, 이에 따라 유태인들이 만든 성서에서 수메르적 요소가 발견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성서의 신적 영감성과 독창성에 대한 신앙을 견지하려는 기독교계의 논자들은 이에 대해 다양한 관점으로 반박을 시도하고 있는데, 그들의 논지는 매우 옹색하게 보인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소재와 구성이 동일하지 않다거나 신관(神觀)이 다르다는 등의 논리는 유태인들이 그것들을 자신들의 환경에 맞게 재구성하고 각색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너무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수메르인들의 이야기에서 자신들 이야기의 착상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는 것이다.
참고 싸이트
Twin Rivers Rising
Ancient History: A trip Back in Time
Sumerian Mythology FAQ
수메르의 신은 수천 가지에 이르며 이름만 바뀌어서 바빌론에서도 섬겨졌습니다. 수메르의 3대 신은 안, 엔키, 엔릴 입니다. 황소, 독수리, 사자, 염소, 반인 반수, 용, 태양신은 사탄을 상징한다는 것을 염두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물고기, 말은 마귀를 상징합니다.
a) 안 (아누)
모든 신의 아버지이자 모든 악령의 아버지입니다. 뿔이 달린 머리 장식이 있고 커다 황소로 표현됩니다.
b) 엔릴 (마르두크, 벨)
하늘 신 안이 땅의 여신 키와 결혼해 낳은 자식으로 바람의 신입니다. 마르두크는 번개의 신이자 바빌론의 민족신으로 주인님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신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1세 때 50개의 이름을 가진 최고의 신이었고 지구라트 꼭대기에 마루두크 사당이 있었습니다. 마루두크의 별은 주피터이고 그의 성스러운 동물은 말, 개, 갈라진 혀를 가진 용입니다. 그는 마차를 타고 다니고 웃옷에 별이 있고, 손에 홀을 들고 있으며 벼락을 가지고 다닙니다. 페니키아에서는 바알신으로 섬겨졌고 유대인들도 바알신을 믿다가 여러 번 심판받았습니다. 사탄은 하늘 신의 아들로 불림 받는 것을 좋아하고, 용의 형상을 하고 홀을 가지고 있다면 사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벼락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그리스 제우스와 흡사한 모양입니다.
c) 엔키 (에아)
하늘 신 안과 지하수 여신 남무 사이에 태어난 물과 지혜의 신으로 신들의 노예인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반 염소 반 물고기의 모양이며 마법과 주문을 관장합니다.
수메르인들은 우리 동양인을 닮은 인상을 주는 사람들로서 우리말과 비숫한 교착어를 썼다.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있었던 수메르와 그 주변 산악지대가 선사시대부터 문명의 발원지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라크 북방티그리스강 상류지역 자그로스 산맥 북쪽에 '샤니다르 Shanidar 동굴'이 있었다. 오늘날 민족해방전쟁을 벌이고 있는 쿠르드족의 피난처가 되고 있는 이 동굴은 지난 10만 년 이상 인간의 거주 흔적이 시기적으로 잘 보존된 고고학적으로 귀중한 유적지이다
1957년 콜럼비아대학의 랠프 솔레키 Ralph L. Solecki 교수는 이 동굴을 조사하여 9인분의 초기 인류 유골을 발견했다( 그 중 4인은 동굴 내부에서 떨어진 낙석으로 죽은 곳으로 판명되었다.). 발굴을 계속한 결과 1만 년 전에서 멀리 10만 년~ 13만 년 전에 이르는 초기 인류의 주거 흔적이 나타났다.
그러나 연대에 따른 계통적 발굴이 진전됨에 따라 놀랍게도 인류문화는 차차 진보해 왔던 것이 아니라 반대로 퇴보해 온 사실이 드러났다. 곧 어떤 표준시대에서 시작하여 그 다음 세대들은 전보다 덜 발전된 생활을 해 왔던 것이 드러난 것이다. 특히 서기전 27000~11000년 사이에 이 퇴보가 심했고, 게다가 거주자까지 점차 사라진 듯 마지막 시기에는 거의 무인지경이 되었던 것이다.(수메르의 전승에는 당시 빙하기의 막바지로 극심한 추위와 가뭄으로 인간이 서로 잡아먹을 정도로 사나워지고 세상이 어지러웠기에 곧바로 대홍수가 닥쳐서 징벌을 당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돌연 서기전 11000년 무렵 이해할 수 없는 진보된 수준의 문명생활이 시작되었던 증거가 드러났던 것이다.
고고인류학자들은 터키 중부 차탈휘유크와 유고슬라비아의 레페스키비르와 팔레스타인의 예리코 등지에 실로 9천년 전 이전에 형성되었던 도시의 유적을 발견하고 이것들이 수메르 문명보다 앞섰던 문명의 유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들은 실제로 샤니다르 동굴이나 그 주변 '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곳에서 시작되었던 문화가 전파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게다가 이들은 지역적으로 국한된 점조직 같은 문명 유적으로, 그것들이 더 발전, 확장되었던 증거도 뚜렷하지 않다.
인류 최초의 조직적인 농업활동은 중근동의 '비옥한 초승달 Fertile Crescent 지대' 주변의 산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 되고 있다. 연구가들이 정교한 방사성 탄소 측정법을 이용하여 밝혀 낸 결과. 보리와 야생 '엠메르 Emmer' 종의 밀이 인류가 최초로 재배한 곡물이었으며. 서서히 농업 기술을 터득하여 여러 가지 작물과 가축을 기르며 진보해 왔던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이런 추측은 잘못된 것 같다. 놀랍게도 샤니다르 동굴에서 채취한 아주 초기의 곡물은 이미 종으로서 고도로 특화(特化)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이것은 고도의 유전공학 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중근동에서는 보리와 밀과 함께 기장(millet), 라이(rye)밀, 스펠트밀(spelt)밀 같은 주식이며. 섬유를 얻고 열매로 기름을 짜는 아마(亞麻)와 갖가지 식용 과일이 열리는 관목과 과수가 빠른 속도로 펴져서 재배되었다는 증거가 드러났다. 이것들은 유럽에 알려지기 실로 몇천 년 전부터 중근동에서 재배되었던 것이다.
이 모든 놀랍고 돌연한 농업의 진보는 마치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에 의하여 중근동 지방이 일종의 식물 유전자 실험장이 되었던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또 야생포도의 재배가 북부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북부 산지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놀랄 것도 없이<창세기>실린 노아가 홍수후 첫 포도 재배업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와 일치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지역은 인류 문명의 첫발생지였던 것이다.
사과, 배, 올리브, 무화과, 아몬드, 호도 등 과일나무도 중동이 원산지로 그곳에서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창세기>에서 '에덴'을 과수원으로 표현한 것은 결코 과장도 비유도 아닌 것이다.
가축사육은 어떠했는가?
인간이 처음으로 사귀어 가축으로 만든 동물은 개였다. 이것은 서기전 9500년 무렵의 일로, 가장 오래된 개의 뼈가 이란, 이라크 및 이스라엘에서 발굴되었다. 양과 염소는 개와 거의 동시에 사육되었으며, 서기전 9000년 무렵의 양의 유골이 샤니다르 동굴에서 출토되었다. 그 다음 돼지와 뿔 달린 가축이 길들여졌다.
이처럼 몇만 년 전에서 서기전 11000년 무렵 문명이 중근동에서 처음 시작되었던 시기까지를 학자들은 구석기 지대 Paleolithic Age라고 보고 있다(유럽에서는 이보다 약2천 년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인간은 돌로 된 동굴집에서 살며 돌연장으로 씨를 뿌리며 동시에 가축사육자가 된 것이다. 앞서 말했던, 바위에 새겨진 고글을 쓴 '신'의 보습도 대충 이때(서기전10000년경) 만들어진 것이다.
이때부터 중석기 시대 Mesolithic Age가 대충 3천5백 년쯤 지속되었다가 서기전 7500년 무렵 신석기 시대 Neolithic Age가 도래했다. 그때 인간은 비로소 토기를 빚어 만들이 시작했다. 서기전 5000년 무렵 중동에서는 상당히 수준이 높고 세련되고 환상적인 디자인을 보여 주는 토기 제품이 출현했다.
그러나 서기전 4500년 무렵 문화가 일시적으로 퇴보한 듯한 고고학적 증거가 드러났다. 토기 제품은 전보다 단순한 것으로 변모되었고 석기가 다시금 우위를 차지했다. 토기 제작이 위축되고 제작지가 버려진 것이 유적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바로 그때, 곧 서기전 4000년 무렵 예측할 수도 없이 돌연히 중동지방에서 빛나는 문명이 출현했다. 앗시리아 학자 헨리 프랭크포트Henry Frankfort에 의하면 한마디로 '놀라운 것' 이며, 앙드레 빠로는 '돌연히 타오른 불길'이라고 표현하고, 신화학자 조셉 캠벨 Joseph Campbell은 '놀라운 돌발성…이 좁은 수메르의 진흙바닥에 세계의 고등문명의 씨앗이 발아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18세기 말까지 오랫동안 서양인들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을 자기네 무명의 기원으로 믿어왔다. 그러나 옛 그리스의 학자들은 더 앞선 문명이었던 옛 이집트에 원정했을 때 서기전 196년에 제작된 '오제타 석비' 같은 고대 유물을 발굴, 연구하여 이 옛 문명 연구에 큰 진전이 있었다. 이집트 문명은 실로 그리스 문명보다 2천 년 이상 앞선 서기전3200년 무렵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서구 문명의 시조는 옛 이집트였던가? 그리스 학자들은 이집트 문명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기기는 했지만, 그리스어는 원래 이집트가 아닌 중동에서 생겨나 그리스 문명보다 앞섰던 '미노아 Minda '(트레타) 문명과 미케네 Micenae' 문명을 거쳐 그리스 본토로 도입되었던 것임이 밝혀졌다. 서기전 1300년경 도리아인의 그리스 본토 침입과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에 침입했던 시기가 거의 동시임에 착안한 학자들은 셈족문명과 그리스 문명이 서로 닮은 것에 깊은 흥미를 느끼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메사추세츠 주 브랜다이스대학의 고고역사학자 사이러스 고든 Cyres H. Gordon 교수는 <망각된 기록: 미노아어의 증거 Forgotten Scripts : Evidence for the Minoan Language>에서 셈어로 밝혀진 초기 미노아어[선형(線型)A/Linear A 문자)를 해명하여 이 분야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그는 이로써 히브리어와 미노아문명이 서로 상당히 공통된 점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그 예로크레타가 미노아어로 'ke-re-ta'로 발음되는데, 이것은 히브리어의 'ke-re-et'('성벽의 도시')이며 셈족의 가나안의 '케레트'왕 이야기와 일치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로마자와 현대 서양문자의 근원인 그리스 알파벳도 근동에서 온 것이었다. 옛그리스인들은 '카드모스 Kadmds' ('옛날의'란뜻)라는 페니키아왕이 알파벳을 가지고 왔으며(카드모스 는 전설적인 테베시의 건설자였다.). 원래 그 수효나 순서가 히부리 문자와 같았지만 서기전 5세기경 케오스의 '시모니데스' Simonides of Keos시대에 26자로 증가했다.
옛 그리스문헌에 나타난 페르시아 왕들, 예컨대 '키루스 Cyrus'. '다리우스 Darius'. '크세르크세스 Xerxes'등은 인도-유럽어에 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이 원래 서기전 2000년대 말기에 카스피해 근처 어디에선가 출현했던 아리안족의 한 파임이 확인되었다. 그 무리들은 각기 서쪽 소아시아로, 동남쪽으로는 성서에서 말하는 '메데아'와 '파르시'로,동쪽으로는 인도로 이주했다. 그들이 낯선 이민족이었음에도 북구하고 이상하게도《구약성서》에서는 그들을 동족의 일원인 양 호의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예컨대<에즈라서>에 의하면, 키루스왕은 그 자신을 '야훼에 의해서 기름부어진 자'로 생각했고 야훼를 '청산의 신'으로 믿었으며, 예루살렘의 신전을 재건 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그와 그밖에 페르시아인들은 스스로 '아케메니드 Achae-menids'라고 불렀는데, 그 원어는 '하캄 acham-Anish' 로 아리안어가 아닌 완전한 셈어(히브리어)로 '현명한 인간' 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메소포타미아-유대아로 들어온 페르시아의 세력과 함께 그 신앙인 미트라 Mithra 신앙 -세계는 최종적으로 광명과 암흑의 투쟁으로 끝날 것이라는 종말관을 가진 신앙 - 의 영향으로 유대 /기독교의 의 종말론(Eschatology)이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종교사상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
히브리인의 주인인 야훼와 아케메이드인들이 불렀던 '현명한 주님'은 여러 점에서 유사하며, 이중에서 후자는 날개 달린 구체로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다리우스왕의 문장(紋章)에 나타난 그림이다. 옛 페르지아 제국의 문자와, 종교와 역사적 근원은 그 이전의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1686년 페르시아의 옛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찾았던 엥겔베프트 캄퍼 Engelbert Kampfer는 왕들의 기념비와 문장에 나타난 이 지역 일대의 공통문자로 확인되었다. 1843년 프랑스의 폴 에밀 보타 Paul E. Botta 는 처음으로 이라크 근처에 있는 '호르사바드 Khorsabad'를 선정하여 조직적인 발굴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 곳은 원래 '두르 새루 킨 Dur Sharru Kin'으로 알려졌던 곳이었다. 이 곳은 앗시리아와 사르곤 2세의 도읍지로, 이말 자체는 셈어로 '정의로운 왕의 성곽도시' 란 의미를 가진 것이다. 이 앗시리아왕의 수도에는 중앙에 웅장한 왕궁이 있었고, 연장1마일이 넘는 부조 조각 장식이 붙어 있는 기다란 성벽이 둘러싸여 있었으며, 이 도시 전체와 왕궁 건물을 호령하듯 높은 지구라트가 세워져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신들을 위한 '천상으로 오르는 계단' 이었다.
놀랍게도 이 거대하고 웅장한 도시의 모든 것이 단 5년만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3천년 전 하나의 제국이 그토록 짧은 기간에 왕궁, 성벽과 성문, 신전, 일반 주택 등 하나의 거대 도시를 완성할 만한 국력을 가졌던 것이다. 한편 영국에서는 1850년대에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 Austen H. Layard가 호르사바드에서 10마일쯤 내려와 티그리스 강변의 '쿠윤지크 Kuyunjik'를 발견한 결과 이 곳이 성서에 나온 '니네베 Nineveh'임을 확인했다. 《구약성서》〈열왕기 하〉18:13에, "헤제키아왕 14년에 앗시리아왕 세나테리브가 유다야에 침입했으나, 야훼의 천사가 이들을 단 하룻밤 동안 전멸시키고 세나케리브는 되돌아가 니네베에 돌아갔다." 는 기록이 있듯이 니네베는 앗시리아의 마지막 세 왕 시절의 수도였다. 레이어드에 의해서 또 다시 박굴된 곳은 <창세기>에 나오는 '님르드 Nimrud'로 앗시리아의 군사본부였던 곳이다.
독일의 발터 안드레 Walter Andrae 발굴 팀은 1903년~1914년 사이에 앗시리아의 신앙의 본거지였던 '아수르 Ashur를 발굴했다. 이와 동시에 로베르트 콜데바이 Robert Koldewey 팀은 바빌론을 발굴하여 광대한 왕궁, 신전, 그리고 세계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공중 정원의 유적과 지구라트를 찾아 냈다. 이로써 남쪽의 바빌로니아와 북쪽의 앗시리아라는 두 대제국의 역사를 밝혀 줄 문헌들이 속속 발굴되고 해독 되었다.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라는 두 제국은 서기전 1900년 무렵 일어나기 시작하여 약1천 5백 년간 전쟁과 공존을 거듭하며 흥망성쇠의 역사를 누려왔다. 결국 서기전 612년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아수르와 니네베가 함락되어 앗시리아는 멸망했고, 또 바빌론도 성서의 예언대로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의 공격으로 서기전539 년 불명예스러운 종말을 맞았던 것이다. 이 두 제국은 시종 전투적인 라이벌이었지만 문화나 물질 문명은 별 다른 차이가 없었고 또 앗시리아의 주신은 ' 아수르'( '천리안을 가진신')이고 바빌론의 주신은 '마르둑'(청정한 언덕의 아들')이라고 불렀지만 두 신들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이었다
세계의 유수한 박물관들은 이들 옛 제국의 페허에서 약탈한 장식품-예컨대 의식용 성문(城門), 날개 달린 황소, 조각(bas-reliefs), 전차, 가구, 보석, 인물상 등 풍부한 유물을 자랑하고 잇지만 진정한 보물은 역사적 기록 문서들이다. 그것은 실로 몇만 장이 넘는 설형문자판들 - 우주 창생 전승, 서사시, 왕들의 역사, 신전 기록문서, 상업계약서, 혼인 및 이홍서류, 천문기록, 점성술 예언서, 수학공식집, 지리학 서적, 문법과 어휘 교과서, 신들의 존칭, 능력, 및 의무를 기록한 문서 등등 많은 기록들이다.
이 두 제국의 문화와 종교적 공통성을 이어 주는 언어는 '아카드 Akkad'어였다. 이것은 셈어로서, 히브리어, 아람어, 페니키아어 및 가나안어의 선구였다. 하지만 바빌론-앗시리아인들은 자신들이 이 언어를 고안한 것이 아니라고 했고, 그들이 남긴 많은 문서에는 전의 어떤 원어(原語) 것이라고 주(註)가 많은 문서 말미에 붙어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쐐기 문자를 최초로 고안했고 그처럼 풍부하고 자세한 어휘와 문법을 발전시켰던 것인가? <창세기>10장 27절을 보자.
"쿠쉬(키쉬)에게서 님로드가 났느데 … 세상에 처음 나타난 장사였다. … 그의 나라는 세나르(수메르) 지방인 바벨과 에렉(우르크)과 '아카드'에서 시작되었다.…그(님로드)는 그 지방을 떠나 앗시리아로 나와서 넓은 거리가 잇는 니네베를 세우고, 니네베와 '할라흐' 사이에 '레센'이라는 큰 성을 세웠다."(레센은 아직 미발굴인 곳으로, 대규모 왕실 군마 사육장이 있었던 곳 같다.)
여기에 나오는 아카드가 두 제국에 앞서 있었던 왕도였던가? 발굴된 문서에는 실제로 그 옛적에 '샤루킨 Sarrukin'('의로운 통치자')이라는 이름의 왕이 세웠던 '아카드' 왕국이 있었음을 나타냈다. 또 그는 자신의 제국이 " '엔릴'신의 은총으로 아랫 바다(페르시아만)에서 윗 바다(지중해?)까지 달하는 대제국을 세웠으며, 아카드의 부둣가에 먼 나라들에서 온 배를 정박하게 했다."고 호언하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에 학자들은 경악했다. 실로 5천 년 전인 기원전 3000년대에 메소포타미아에 놀라운 대제국이 있었던 것이다! 앗시리아의 두르샤르킨(사르곤 2세)으로부터 아카드의 사르곤(1세)왕까지 실로 2천년의 도약이 일어났다. 또 계속 발굴된 유적에도 바빌론/앗시리아보다 아주 오래 전에 빛나는 문예와 과학과 정치와 상업활동을 가졌던 문명이 존재함을 보여 주었다. 결국 바빌론/앗시리아는 이 아카드 문명이라는 큰 줄기의 가지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의 아카드의 사르곤왕의 업적과 족보를 기록한 비명(碑銘)이 발견되자 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수수께끼는 더욱 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이 비명에는 사르곤왕의 명칭이 '아카드의 왕, 키쉬의 왕' 으로 나타났는데, 그가 왕이 되기 전 '키쉬의 통차자'의 자문관으로 봉직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 키쉬의 왕국이라는 것이 아카드에 앞서 존재했던가?
앞서 <창세기>의 구절을 보자. "쿠쉬에게서 님로드가 났는데…."학자들은 아카드의 사르곤이 이 님로드가 아닌가 하고 추측했다. 키쉬를 '쿠쉬'로 해석하기만 하면 사르곤이 말했듯 키쉬가 님로드보다 앞서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학자들은 사르곤 비명의 나머지 부분을 문면 그대로 믿기로 했다. "그는 우루크를 공격하여 그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는 '우르'의 주민과 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 그는 '라가쉬'에서 바닷가까지 모든 지역을 굴복시켰다."
성서의 '에렉'은 이 우루크와 같은 곳이었던가? 오늘날 '와르카 Warka' 라는 이라크 남부 지역을 발굴한 결과 사실 그대로 임이 드러났다. 또 우르는 바로<창세기>에 나온 아브라함의 출생지였다. 실로 발굴로 드러난 사실과 성서 기록이 서로 일치했을 뿐 아니라 서기전 3000년대 이전에 메소포타미아에 번듯한 국가와 도시와 문명이 있었음이 확인 되었다. 남은 의문은 문명이 얼마만큼 먼 고대로 소급되느냐 하는 문제뿐이었다
연구가 축적된 결과 학자들은 이윽고 성서와 히브리어이며 아카드어로 된 바빌론/앗시리아의 지명과 인명에도 각기 특정한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다[예컨대 '아브라함'은 '열국(列國)의 선조', '샤루킨' 은 '정의의 통치자'라는 뜻처럼].그런데 사르곤 이전 시대의 이름들은 전혀 무슨 뜻인지 이해할 길이 없었다. 사르곤 자신이 자문관으로 봉사했던 왕의 이름인 '우르자바바 Urzababa'라던가, 에렉의 통치자였던 '루갈자게시 Lugalzagesi' 같은 것이 그 예였다. 이에 1853년 헨리 로린슨경 Sir Henry Rawlinson은 왕립 아시아학회에서, "이러한 이름들은 셈어도 인도-유럽어도 아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언어 그룹이나 민족에 속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 이들 미지의 언어는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이었을까? 학자들은 아카드어 비명들을 다시금 검토해 보았다. 기본적으로 설형문자인 아카드어 문장은 음절(音節)문자로서, 각 문자 부호는 각기 하나의 완전한 음절(ab, ba, bat 따위)을 표시했다. 하지만 이 문장에는 음절이 아니면서도 '신', '도시','나라','생명', '고상한' 따위의 뜻을 가진 부호들이 광범위하게 쓰여져 있었다. 이 의문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이 부호들이 그림문자로 사용됐던 , 더 앞선 문자의 흔적인 것 같다는 점에 있었다. 그렇다면 아카드어 이전에 이집트의 그림문자를 닮은 문자가 있었던 것이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더욱 이른 시대에 문자 형태가 아닌 어떤 형태의 언어가 있었음이 명백해졌다. 학자들은 아카드어 문서에 많은 차용어가 있음에 착안했다[이것은 가령 영어의 weekend(주말)를 프랑스인들이 그대로 쓰는 것 같은 말이다.]. 특히 과학기술 용어에 이런 차용어가 많았으며, '신'과 '천계(天界)'에 관한 종교기록에도 그러했다. 또 A. H. 레이어드 경이 발굴했던 아슈르바니팔 왕 도서관에서 실로 2만 5천 장이 넘는 점토판 문서가 나왔는데, 그 중 많은 것에 '옛날의 텍스트'를 그대로 복사한 것이라는 주석이 붙어 있었다. 예컨대 23장으로 된 한 묶음의 점토판 문서에는, "23번째 판, 수메르어에서 그대로 복사함"이라는 주석이 달려 있었다. 또 다른 문서에는 아슈르바니팔 왕 자신이 기술한 수수께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서기(書記)들의 신께서 그의 재능의 지식의 선물을 나에게 베풀어 주셨다. 나는 기록하는 비법을 처음으로 배웠다. 나는 슈메르어 Shumerian로 된 난해한 문서를 읽을 수 있다. 나는 홍수 이전에 있었던, 돌에 새겨진 수수께끼 같은 말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마지막 구절, 곧 '슈메르어'로 된 홍수 이전 기록을 이해했다는 이야기는 더욱 신비를 두껍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1869년 줄 오페르 Jules Oppert는 프랑스 고전학(古錢學) 및 고고학 협의회에서 전(前) 아카드 시기에 어떤 언어와 민족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 미지의 민족과 그들의 땅을 '수메르인' 및 '수메르'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실로 '슈메르'대신 '수메르'로 잘못 쓴 것을 제외하면 오페르가 옳았던 것이다. "바벨과 아카드와 에렉이 '시나르 Shin'ar'땅에 있었다."는 기록에 있는 시나르가 곧 수메르인 것이다.
이러한 결론을 받아들이자마자 연구가 급진전되었다. 아카드 기록에 인용된 '옛날 텍스트"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가 됐으며, 기다란 단어들이 이어진 점토판 문서들은 다름아니라 아카드/수메르어 사전임이 판명되었고, 이로써 바빌론/앗시리아에서 최초로 필기에 쓰여진 언어인 수메르어를 배우게 되었다.
또 이 사전의 도움으로 발굴된 방대한 점토판 서적들을 해독할 길이 트였다. 또 수메르는 반쯤 굳어진 점토판에 갈대 펜으로 씌어졌는데, 이것은 문명의 환경으로 보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곧 옛 이집트에서는 강변에 무성한 파피루스 줄기가. 중국에서는 대나무 조각(竹簡) 이나 비단이 필기 재료로 쓰여졌듯이 중동에서는 주변에 흔한 찰흙판이 종이 대용으로 사용되었고 거기에 기록하기 편하게 둥글거나 네모진 그림글자에서 쐐기형 문자로 간편하게 정형화되었던 것이다.
수메르어의 해독은 중동의 기나긴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였다 그런 이유로 북부가 아닌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굴 작업이 속속 개시되었다. 1877년 프랑스 발굴단은 처음으로 오늘날 이라크 남부에서 '텔로흐 Telloh'('언덕')하고 불리우는 '라가쉬'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 곳은 아카드의 사르곤왕이 정복했다고 호언한 도시였는데, 발굴된 물량이 너무나 엄청나서 1933년까지도 발굴이 완료되지 않았다.
이 곳은 사르곤왕의 칭호와 똑같은 수메르어 칭호 '엔시 EN. SI(정의 의 통치자)'가 다스렸던 도시로, 이 왕조는 서기전 2900년전 부터 시작되어 650년간 43인의 엔시들이 단절 없이 통치했다고 한다. 각 엔시의 이름, 족보, 재위 기간이 가지런히 기록되어 남아 있다. 또한 곡물의 순조로운 성장과 풍작을 신에게 기원하며 농토에 제대로 물을 대어 주어 곡식이 자라서 익게끔 기원하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이미 조직적인 농업과 완비된 관개시설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또 ' 곡물 창고의 감시자'인 한 여신에게 봉헌된 컵에는, 곡물의 양이 재어지고 창고에 저장되고 또 거래되었음을 기록한 그림문자 표시판이 새겨져 있다. 또 ' 에안나툼'이라는 '엔시'는 수메르의 통치자들이 신의 승인이 있어야만 권좌에 오를 수 있었음을 점토벽돌에 새겨놓았다. 또한 그가 다른 도시를 정복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는 약5천년 전인 서기전 3000년경에 이미 여러 도시가 존재하고 번성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여기에서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통치자의 정치적 정통성과 전쟁과 국방 및 외교에는 신들의 승인이 필수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인간인 통차자들은 신들의 집사나 마찬가지였으며, 그가 다른 도시나 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다른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많은 점토판 문서를 연구한 결과 드러났다는 점이다. 이것은 거의 수메르의 멸망기인 서기전2000년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곧 수메르 시대는 한마디로 '신들'의 전권시대였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들은 또한 앞서 말한, 샤니다르 동굴에서 발견되었던 고도로 특화된 보리와 밀의 종자를 보급하여 인류의 농업혁명을 촉진시켰던 '신들' 이었던 것 같아. 수메르 전승에서는 니누르타가 바로 그런 농업의 신이었다고 한다
첫댓글 수메르 문명과 크리스트교성경과 관계
친구야!
오랜만이구나!
좋은 자료를 올린 것 같구나.
시간 내서 자세히 읽어 보겠구나.
고맙고 반갑구나!!!
사랑하는 친구야!
미안하고 반갑고 기쁘다.
창세기 11장 1절: 세상의 말과 글이 하나요
28장 하란이 데라보다 먼저죽고-
바벨탑 이야기에서
왜 데라는 장남 하란을 화형을 받게 하였는가?
아브람은 조카인 롯을 왜 거느리게 되었는가?
수메르의 우르는 어떤 곳인가?
카인은 아벨을 죽이고 수메르로 도망쳤다.
셩경상으로는 아담 이브 그리고 그 아들 카인과 아벨 뿐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카인이 수메르로 가서 아내를 얻었다.)는 구절에서 그 여자는 누가 낳은 어떤 인간인가?
풀리지 않는 의심을 풒기위해 인터넷 백과사전을 열고 이 카페를 열게 되었다.
복사나 인쇄가 안되어 불가분 스크랩한 것이다.
믿는 것은
바라는 것에 대한 실체라고 말한다.
그럴지라도 무조건 믿는 것은 옳지 않다.
알고 믿어야 바라는 것을 보거나 얻게 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오늘 날 목사들은 중세기 유럽의 신부들보다 더 성경을 악용하고 크리스트 신자를 속이고 있다.
나는 진정 성경을 알고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큰 영광이지만
처음부터 성경이 결코 전체가 인간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목회자들이 이것을 애써 감추려고 하기 때문에 평화와 영혼을 갈망하는 크리스트교가
과학을 부정하려하기 때문에 더욱 저촉되는 것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로마에 지배받은 이스라엘의 열망이지
오늘 날 인류의
열망은 아니라고 본다.
수메르에 대한 이글이 결코 모두 옳다거나 사실이라고 보거나 믿을 수 없으나
목사들이 믿는 것이 바라는 것의 실체라고 말하면서 영혼이나 평화보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신도들에게 그 행복을 팔고 있는 것에 대한 경종이라고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