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여 년 전 영일정씨가 터 잡은 경북 청도군 매전면 북지리 마을!! 총 50여 가구 중 30여 가구가 영일정씨
전국 황소 싸움으로 이름난 경북 청도군 영일정씨 집성촌을 찾았다. 매전면 북지리에는‘속칭 북지 영일정씨 마을’이 있다. 300여 년 전 그러니까 1708년(조선 숙종 34년) 이곳에 처음으로 자리 잡은 입향조(入鄕祖) 정원교(鄭元僑: 字時中號慶慕)선조 이후로 북지(北旨) 마을은 타성 (他姓)은 거의 없고 오직 영일 정씨만 날로 번성해 한 때는 100여 가구가 넘게 살아 왔으나 6· 25 전쟁을 전후하여 마을사람들이 보다 나은 삶의 터전을 찾아 하나둘씩 떠나가면서 지금은 타 성(他姓) 까지 포함하여 50여 가구 중 30여 가구만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북지리 영일정씨들은 논농사와 감농사를 주업으로 삼으며 촌수가 가깝고 멀고를 떠나서 모두 형님, 동생, 아저씨, 조카로 부르며 한 집안 식구처럼 지내고 있다.
어느 누구네 집이 길ㆍ흉사를당하면 모두 모여가 내일 처럼 도우며 오순도순사이좋게 지내고 있다. 이곳 입향조이신 정원교선조는 포은선조의 12세손이며 설곡 정보(雪谷鄭保)선조의 3남 윤관공 (允寬公)의 후예로 300여 년 전 이곳에 전거(奠居: 머물러 살 만한 곳을 정하다) 하였다. 원교 선조는 당초에는 설곡 선조의 배소 (配所: 유배된 곳)인 단성문태촌(丹城文泰村)을 떠나지 않다가 일부 후손들이 합천 종간으로 청송 상평으로, 또 일부는 경주 기계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가문의 온갖 풍파를 겪어 가며 살아오다가 이곳청도 북지리에 들려 산세와 지세가 좋음을 알고 전거(奠居) 하였다고 전한다. 이곳 북지리의 산세(山勢)와 지세는 용각산 줄기에서 뻗어 나온 산맥이 어쩌면 이렇게도 두텁 고 넓은 곳을 차지할 수 있을까 하여 감탄케 할정도로 잘 에워 쌓고 있다. 그중에서도 매전리의 덕산에서 하평을 거친 산마루는 효양산이란 험준한 산의 등허리가 높다랗게 이 마을을 안고 있다. 또 서쪽으로는 용당산, 남쪽으로는 아미산이 있고동쪽으로는 운문천(雲門川)이 잔잔하게 흐른다. 또 마을 앞은 용산리에서 달려 온 구름이 눈 아래로 보이나 그래도 경사로 인해 흘러 빠지는 지령 (地靈)을 어느 정도는 막아주는 고마운 산등이기도하다. 북지리의 역사는 그 어느 마을보다 앞서고 있다.
이런 좋은 산세와 지세를 골라 앞으로 자손들 이 천만대를 누리며 번영할 곳이라는 풍수지리설 을 근거로 하여 입향조께서 이곳에 처음 터를 잡지 않았나 여겨진다. 북지(北旨)는 원래 한자로 표기한 동명 (洞名)이고 애당초는‘북마을’이‘북말’로 다시 음이 변 하여‘북마리’등으로 불리다가 들의 북쪽에 있는마을이란 뜻으로 북지 (北旨)라고 한 것이다. 현재 북지리는 입향조 경모 정원교공의 묘소와 이곳 후손들이 경모공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경모재와 경모공의 현손인 양심재 환주공(養心齋煥˝公)의 효자각과 경모공 9세손 순조(順祚)의 열부비(烈婦碑)가 세워져 있다.
■ 경모재 (敬慕齋) 북지리 마을 위쪽에 자리 잡고 있는 경모재는 300여 년 전 처음 이곳에 터 잡은 입향조(入鄕 祖)인 경모 정원교(敬慕鄭元僑)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이 마을에 살고 있는 경모공 후손들이 뜻을 모아 세운 재실이다.
■ 환주공의 효자비와 효자각 북지리 마을에는 입향조인 경모 정원교 공의 현손(玄孫)인 양심재 환주공(養心齋煥˝公)이 부
(조선 순조 10)에 영일정씨 문중에서 효자비와 비각을 세워 후손들이 추앙하고 있다. 효자비에는 환주공의 효행이 아래와 같이 씌어져 있다. ※ 주(註) : 길에 떨어진 물건도 자기 것이 아니면주어가지 않는다는 청도인(淸道人)의 인심(人心) 그 뒤편에는 순수한 인심 못 지 않은 백행의 근본(百行의 根本)인 효(孝)의 정신이 면면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수많은 효자·효부 중 효자인 환주(煥˝)는 매전면 북지리에서 가정이 빈곤한 가운데서도 하루 세끼를 별미 음식으로 부모에게 공양 하였으며,어느 해 겨울 아버지께서 오랜 병환으로 몸져 누 워있으면서 물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는 말을 듣고그날 저녁 강가에 나가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아 다가 추어탕을 끓여 드렸다. 또 아버지께서 뱁새(붉은 머리 오목눈이 새)탕을 먹고 싶다기에 빈 집 에 그물을 쳐서 뱁새 10마리를 잡아 끓여 드렸으며 부친이 70세 때에 다리에 종기가 나자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고 지우초를 부쳐 낫게 하는 등 지극한 효행으로 아버지를 봉양 하였다.
부친께서75세에 돌아가시자 5km나 떨어진 묘소에 비가 오나 눈이오나 가리지 않고 3년 동안 하루
도 빠짐없이 묘소를 지켰으며 묘소 앞 같은 자리에는 웅덩이 패어 비가 오면 물이 고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환주공의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행에 감동한 산속의 호랑이도 언제부터인가 환주공과 함께 묘소를 지키는 동무가 되었다고 한다.
■ 열부비(烈婦碑) 북지리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열부비는 순조(順祚)의 남 편인 입향조 경모공의 9세손 이종해(李鍾海)씨가 일본 징용으로 끌려 갔다가 중풍이 걸려 3년 만에 집으로 돌아 왔으나 병 이 낫지를 않자 소문에 인육(人肉: 사람의 고기)을 먹으면 완치 된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허 벅지 살을 떼어내 육회라고 속여 남편에게 먹여 중풍병을 고쳤다고 한다.
이같은 사실은 시아버지가 며느리의 아픈 다리 상처를 캐물어 알게 되었으며 소문은 마을주민
을 비롯하여 면민·군민이 모두 알게 되어 청도군에서 사림장 포상(士林狀褒賞)과 동시에 열부
비를 세워 오늘날까지 추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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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존정보 감사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