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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9월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청주] 현대의 순교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지혜 3, 1 - 9
† 제2독서 : 로마 8, 31ㄴ - 39
† 복음 : 루카 9, 23 - 26
오늘 전례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우리가 받은 복음 말씀은 신앙 선조들의 피로 전해진
것입니다. 그분들은 주님의 말씀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기나긴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이어 온 선조들의 고귀한
정신을 되새기는 가운데 오늘 우리 자신의 믿음을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 지혜서의 저자는 의인들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전한다. 하느님의 은혜를 크게 얻어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 민족들을
통치할 것이라고 단언한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어떠한 역경과 고난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외친다. 도살될
양처럼 여겨지더라도 주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그것을 이겨 낼 것이다
(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을 알려 주신다. 곧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아야 한다.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이
오히려 목숨을 잃을 것이고,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이 목숨을 구할 것이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은 한국 순교 성인의 대축일입니다. 이 땅의 103위 순교 성인은
오늘 복음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실천하신 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그런데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오늘의 우리에게는 선조들의 영웅적인
순교 이야기가 가슴 깊이 와 닿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목숨’이라는 말은 영어로 ‘라이프’(life)입니다.
이 ‘라이프’는 ‘생명’ 또는 ‘목숨’으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인생’이나
‘생활’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오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되새겨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로 ‘정녕 나 때문에 자기 인생을 바친 사람은 그 인생을 살리게
되는 것이다.’라고 새겨봅니다. 이는 수도자의 삶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쳐 주님을 증언하는 이가 바로 수도자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정녕 나 때문에 자기 생활을 바친 사람은 그 생활을
살리게 되는 것이다.’라는 생각입니다. 이 경우에는 우리 교우들, 곧
평신도들의 삶을 새겨볼 수 있습니다. 여가 활동이나 취미 생활 등 삶의
여러 부분에서 자신을 희생하며 주님을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공인된 말은 아니지만, 이 땅의 수많은 순교자들처럼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킨 것을 ‘적색 순교’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일생을 바쳐 신앙을 증언한
삶을 ‘백색 순교’, 일상생활을 주님께 봉헌하며 희생하는 삶을 ‘녹색
순교’라고도 합니다.
종교 박해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순교의 또 다른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현대의 순교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2013년 다해 9월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 9,23-26
현대의 순교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셨습니다(1요한4,10-12).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또한 그분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에서는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고 십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우리 신앙의 씨앗인 순교자들은 주님을 사랑하기에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았습니다. 그분들의 신앙을 본받고 지금 삶의 자리에서 순교의 삶을
살기를 기원합니다.
순교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무수한 순교자들이 등장하는 데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믿음의 가르침을 사랑으로 실천하였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미래에
대한 확고한 희망이 현재의 모든 시련과 고난을 극복케 하였습니다.
1독서의 말씀 그대로 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지혜3,9). 그들은 온전히 주님을 의지했고 사랑 안에 살고
은총과 자비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우리의 처지는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 받습니다’라는 성경 말씀대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5-37).고
한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몸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마음이 순교자들의
공통마음입니다.
천주교는 초기에 사교, 곧 사회에 해를 끼치는 못된 종교로 단정
되었고 이 사교를 뿌리 뽑는 것이 나라의 정책이었기 때문에
천주교와 관계를 맺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받아들였고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성사를 본다든지, 미사참례를 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박해를 피해 깊은 산골로 가서 교우촌을
형성하며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웠고 추호도
하느님을 원망하는 기색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서로 돕고 위로하며 사랑과 인내로써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기에 영원한 생명을 고대하며 오늘을
살았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5-6).
옛 말에도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풍요로운 수확을 생각하면 지금의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받지 않을
것이다. ….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지혜3,1-5).
우리도 고통 속에 하느님의 축복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 하며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서로
도웁시다. 몸은 비록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하며 하느님을 위한 죽음이 영생이라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김성우 안또니오는 박해 속에서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이오.”하면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이순이 누갈다는 옥중수기에서“앉거나 눕거나
구하는 바는 오직 치명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순교성인
중 가장 나이 어렸던 유대철 성인은 1814년 기해박해 당시에 스스로
포도청에 찾아가 천주굣ㄴ자라고 밝혔고 옥리들이 담뱃대를 불에
달구어 쇠끝으로 그의 살을 지졌지만 태연자약하게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1791년 신해박해로부터 1866년 한불 수호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기까지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자수가 늘어갔습니다. 그것은 감옥에
갇히고 처형당하면서도 하느님을 찬양하며 평화롭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배교를 강요당하면서도 그들은 결코 타협하지 않고
영생을 그리며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씨앗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성경도 있고,
성직자도 많고 신앙에 관련된 자료를 찾고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지만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타협도 합니다. 신자나 비신자나
구별이 없습니다.‘남들도 다 이렇게 하는데 뭐!’, ‘나만 이러면 손해
보는데?’,‘바보소리 듣는데’하면서 합리화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해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이권과, 재물과 명예와 위신, 체면, 심지어
취미생활과도 타협한다면 그 안에 주님의 모습은 자리할 수 없습니다.
내 삶의 모습 안에 주님이 비쳐지지 않으니 어떻게 신자가
늘어나겠습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가9,23-24)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것은 힘들게 고생하며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신의 뜻을 비우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타협하고 싶은 마음들이 십자가 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하느님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은총과 자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지혜3,9).
선조들은 피의 순교를 통해 신앙을 증거하고 지켰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들이 물려주신 신앙을 땀의 순교로 지켜야 할 때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일상
안에서 분명히 ‘예’할 것은‘예’하고,‘아니오’할 것은‘아니오’하면서
주님을 과감히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자, 제가 한마디 하면 ‘그래도 사랑하여라’ 하고 답하십시오.
그가 원수 같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가 나를 욕하고 다닌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만나고 싶지 않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만나기만 하면 상처 받는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가 말을 함부로 한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가 너무 이기적이고 안보면 편하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보면 정말 밥맛이 떨어지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그를 도무지 사랑할 수 없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정말 내 맘에 들지 않아도 사랑하십시오. 사랑스러워질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 날이 안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사람을 변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사랑은 그 안에 하느님을 담고
있기에 하느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으로 내 의지를
접고, 내 생각을 죽이고 주님의 생각으로, 주님의 입으로, 주님의 손발로
움직인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순교입니다. 사랑의 순교입니다.
성 알퐁소는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도
“만일 어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자기 의지를 희생으로 바쳤다면
그 사람을 감히 순교자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사랑의 순교자가 되십시오. 일상의 삶의 온전한 봉헌을 통해
땀의 순교자가 되십시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자신을 버리고
2013년 다해 9월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IT 업계에서 큰 획을 그은 인물인 스티븐
잡스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IT 업계에
새로운 혁명을 일으켜 성공가도를 달렸던 기업가이지요. 이러한
그가 스텐포드 대학 졸업식에서 이러한 축사를 남겼습니다.
“열일곱 살 때 이런 경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정말로 그렇지요. 지금 어떠한 결정을 내리려는 순간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순간의 부끄러움, 외적으로
보이는 화려한 것들, 나의 이기심과 욕심들, 실패와 좌절들……. 이
모든 것들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대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하려는 순간,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이 일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죽음
자체를 혐오해서이기도 하지만 죽음을 아직 오지 않은 것,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 치부하며 눈앞에 닥친 현실을 살아가기에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선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것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운 생각을 가지고 살라는 것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그보다는 지금이 마지막 순간이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바른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한 한국의 모든
순교성인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생명을 주님을 위해 내어 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날에 지금 하려고 하는 이 일을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고, 그 질문의 답으로 주님 사랑하는 것이
최고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과연 주님
사랑을 가장 첫째 자리에 두고 있을까요? 혹시 세상의 것들에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어서 주님의 자리를 만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과거의
우리 순교 성인들의 삶을 기억하면서 눈에 보이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주님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님께
청하도록 합시다.
이 세상에 가치관이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 가장 친밀해지는
경우는 모든 생각이 전혀 다른 가운데 딱 한 가지 생각이 서로 통할
때입니다(니카타니 아키히로).
한가위 보름달
희망을 포기하지 맙시다.
어느 가정의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에 대한 가족들의
충격은 대단했지요. 그리고 이 가족들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게 되었답니다. 심지어 명절날에 모여도 말이지요. 자신들의 마음속에
담고 있는 고통의 상처를 가족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 것이지요.
만약 이 가족에게 있어 아버지 죽음이 자연적인 것이었다면 아마도 가족이
모였을 때 아버지와의 추억을 계속해서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뜻밖의 죽음이었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죽음이기에 잊으려고만 하는
것이지요.
스스로 목숨을 포기한다는 것은 이렇게 자기 안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타인에게 때로는 더 큰 아픔과 상처를 주게 된다는
것이지요. 자살할 이유보다 살아야 할 이유가 많습니다. 절망은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순교란 무엇일까?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9월20일 금요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복음묵상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루카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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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는 지금 순교자 성월을 보내고 있고, 오늘은 그 초석이
된 김 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동료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순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는 대축일이다.
순교란 무엇일까?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순교란 무엇일까?
순교란 한마디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포기하지 않은 것일까?
가장 옳고 소중한 것이라고 믿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비록 다른 소중한 것들을 잃는 상황이 주어져도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는 것이다.
순교자들의 선택, 즉 죽음을 통해서까지 지키려 했던 것,
그것은 결국 가장 옳고 소중하다고 믿는 것을 포기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옳고 소중한 것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신앙 안에서 받아들인 진리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얻어낸 하느님의 약속이다.
세상의 악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가장 옳고 소중한 것을 빼앗으려
한다. 그것이 악의 일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나, 지금의 삶을 보나, 악은 늘 우리를 흔들어놓으려
한다. 때로는 달콤해 보이는 것으로, 때로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며
우리가 지키려는 것을 손 놓게 하려 한다.
사실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던진 순교자들을 바라보던
당시의 세상은 순교자들을 한심한 바보나 정신이상자들로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순교자들께서는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는 것을 지금의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의 삶을 뒤돌아본다.
순교자들이 흘리신 거룩하고 아름다운 피, 그 피의 대가로 우리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고마운 마음과
그 숭고한 모범을 따르고자 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순교 정신, 혹은 순교 영성이 없이 교회는 존속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순교의 의미에 대한 아름다운 공감 없이, 순교 정신은 만들어질
수도 없다. 만약 교회가 세속적이고 이기적으로 변하고 있다면 그 안에는
순교정신의 부재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각자의 삶 안에서, 옳음을 위해 자신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으려는 작은
우리의 노력에서부터 순교 정신은 자라난다.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라는
악의 힘이 다가왔을 때, 늘 순교자의 마음을 생각해야 한다.
오늘 1독서의 지혜서 한 구절과 제 2독서의 로마서 한 구절을 가슴에
새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지혜서3,2-9)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로마서 8,31)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2013년 다해 9월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추석에 가족들과 함께 모이셨는지요? 저는 형님 가족과 어머니와
함께 연도를 드리고,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동생 수녀님은 본당에
미사가 있어서 오후에 집으로 온다고 합니다. 저도 본당에 있을
때는, 추석 당일에는 가족들과 함께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추석에
많은 사람들이 쉬며, 가족들과 함께 지내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도 추석 연휴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조카들은 대학을 다니면서도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저녁을 먹은 후에 설거지는 조카들이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학비를 스스로 마련하려는 조카를 보면서, 자신들이 먹은
음식은 자신들이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비록 경제적으로 살 살지는 못하지만 신앙 안에서 오순도순 기쁘게
살아가는 것도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늘 잔병치례를 하셨던 어머니께서도
올해는 건강하게 잘 지내시는 것도 제게는 기쁨입니다. 2년 전에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님께서 어머니의 잔병까지 함께 가지고 가신 것
같습니다.
우리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필요 없지만 우리가
아프거나, 사고가 나거나, 피해를 입었을 때 보상해 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있을까요? 예 그것은 보험입니다. 보험의 종류도 무척
많습니다. ‘자동차 보험, 생명 보험, 저축 보험, 화재 보험, 암 보험,
건강 보험, 상조’등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런 보험은 우리들이
위급할 때 도움을 주는 것들입니다.
저도 부모님을 위해서 ‘평화상조’에 가입을 했습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평화상조에서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건강보험을
들었기 때문에 병원비의 혜택을 받습니다. 자동차 보험을 들어서 26세
이상이면 누구나 저의 차를 운전할 수 있습니다. 저축 보험도 들어서
매달 조금씩 이자가 나오고 그것으로 부모님을 위한 용돈을 준비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어떤 보험도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주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보험도 죽게 될 질병에서 치유해 주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살아
있을 때 혜택을 받는 것이 전부입니다. 혹 내가 사망을 하면 나의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는 보험은 있습니다.
오늘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합니다.
돈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인내, 겸손, 온유, 나눔, 희생,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이는 세상의 어떤 보험도 줄 수 없는 확실한 이야기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이 말씀을 따라서 살았고, 우리는 세상을 떠난
신앙인들이 천상에서 영원히 살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천국에서
성인들이 우리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이것이 가톨릭의
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많은 여인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시중을
들고, 자신들의 재산을 기꺼이 내어 놓았습니다. 그 여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세상을
따르는 것 보다, 훨씬 좋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보험을 들은 사람들은 보험회사가 망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희망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역시 우리들의 신앙, 우리들의 교회가 더욱 발전하고 성장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하느님 나라를 향해 사는 사람이라고
2013년 다해 9월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하느님 나라를 향해 사는 사람이라고
인터넷교리 과제 중 첫 과제가 주변에서 천주교신자 찾기입니다.
인터넷 서핑 중 천주교에 관심 있던 사람이 혼자 교리를 시작합니다.
천주교회 밖에서 이 과제를 이행하는 게 아주 힘들다고들 합니다.
수줍은 건지, 겸손인지, 점잖은 건지 암튼 신자 찾기가 힘들다는 겁니다.
천주교 신자들끼리는 가족처럼 통하는 우물 안 개구리식인가 싶네요.
하느님 나라를 향해 사는 사람이라고 좀 적극적으로 살아야 되겠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루카 9,26)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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