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5일 부활 제4주간 토요일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요한 14,7-14)
"Have I been with you for so long a time and you still do not know me, Philip? Whoever has seen me has seen the F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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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하게 증언한다. 그들은 유다인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자신들을 박해하자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떠난다(제1독서). 예수님과 오랫동안 함께 지냈던 필립보는 아직도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이시기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당신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신 것이다(복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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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딕(Dick)과 그의 아들 릭(Rick)의 부자(父子) 이야기가 텔레비전에 방영되어 사람들을 감동시킨 적이 있습니다. 릭은 뇌성 마비와 경련성 전신 마비라는 중증 장애를 지닌 채 태어납니다. 그는 혼자서는 걷지도, 말을 하지도 못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릭이 컴퓨터를 통해 처음으로 한 말은 “나는 달리고 싶어요.”였습니다. 아버지는 이 말에 직장을 그만두고서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칩니다. 휠체어에 앉은 아들을 아버지는 뒤에서 밀며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라톤 24회 완주, 철인 3종 경기 6차례 완주, 미국 대륙 횡단이라는 놀라운 일을 합니다. 이것은 건강하고 젊은 사람도 하기 힘든 일입니다. 이 모든 일을 이루고 난 릭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아버지가 없었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아, 나는 네가 없었다면 그 일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고 대답합니다. 아들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합쳐져 이 놀라운 일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으면 그분 안에 있는 힘이 우리 안에서 살아나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건너감입니다. 믿음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세상으로 건너가게 합니다. 그리하여 믿음은 우리를 이 세상의 힘과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이르게 합니다. |
말씀의 초대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가는 곳마다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다. 그러나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살던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자, 바오로는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라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에 따라 이방인을 위한 사도의 길을 걷는다(제1독서). 필립보가 예수님께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청한다.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필립보는 예수님 안에 온전히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복음).
☆☆☆
오늘의 묵상
이스라엘 백성이 늘 바치는 ‘기도’이자 ‘성가’라고 할 수 있는 시편에는 곳곳에 하느님 얼굴을 그리워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의 얼굴을 드러내신 적이 없습니다. 창세기에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과 함께 걷고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신화적 표현은 있지만 그분의 얼굴은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오로지 목소리나 천둥과 구름 같은 표징으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얼굴을 드러내셨습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초월적인 하느님께서 우리의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오셔서 예수님을 통하여 당신의 얼굴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먹기도 하시고 마시기도 하시며 함께 지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뜬금없이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에게서 유다의 남자, 비범한 나자렛 사람의 얼굴은 보았지만, 그분 삶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온전한 ‘사랑의 얼굴’은 아직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나자렛 사람으로 그려진 초상이 아니라 그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안에 심어 있는 ‘하느님의 모상’, 그 참된 ‘사랑의 나’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사랑 받는 나’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얼굴을 드러내는 ‘사랑하는 나’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되지 않으면 주님께서 함께 계셔도 주님의 얼굴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주님에 대한 그리움의 목적지는 우리 자신 안에 있습니다. 오로지 사랑을 해야만 그분 얼굴을 만날 수 있습니다.
☆☆☆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겠다.” 예수님께서 무심코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진정으로 사람들의 청을 들어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께 간청했던 병자들은 예외 없이 치유를 체험했습니다. 나을 수 없다고 체념했던 사람도 예수님 앞에 나아갔기에 기적을 안고 돌아갔습니다. 복음서 안에서 자주 만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머뭇거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면 되는데도 미적거립니다. 이유가 무엇일는지요? 절실하게 다가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름에는 힘이 있습니다. 간절하게 부르면 ‘영혼’이 듣습니다. 주님께서도 그런 목소리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애절함이 없기에 머뭇거리게 됩니다. 애절함은 인연에서 생깁니다.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인연을 만나는지요? 맺고 싶다고 맺어지는 것이 아니고, 끊고 싶다고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 때문에 괴로워하고, 인연에서 늘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기에 애절함이 생기는 것이지요.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 왔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기도를 시작하고 끝냈습니다. 오늘만큼은 인연을 위해 정성과 간절함을 더해야 합니다. 좋은 인연을 악연으로 만들지 않도록 늘 애써야 합니다.
★★★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눈이 번쩍 뜨이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왔습니까? 얼마나 많이 그분의 이름을 기억하며 지내 왔습니까? 그럼에도 별다른 느낌이 없다면 그 이유를 찾아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기도 끝에 예수님을 찾습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수도 없이 이렇게 기도를 마쳤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성호를 그을 때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며 삼위일체의 주님을 찾습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예수님을 부르며 살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늘 답을 주십니다. 우리가 겪는 수많은 사건과 만남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몰랐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기도를 새로이 시작해야 합니다. 좋은 일에는 감사를 드리고, 시련에는 그 의미를 묻는 기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사건과 만남을 통하여 ‘그분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깨달음은 그냥 지나가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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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를 켜면 제일 먼저 메일함을 열어봅니다. 그러면 50여 통의 메일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스팸메일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이 스팸메일의 제목은 참으로 선정적입니다. 오늘 받는 스팸메일 제목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9세 이상 성인이라면 꼭 한번 들려 보실 만한’, ‘최저가로 여자 꼬시는 곳’, ‘한동안 안녕히 지내셨나요? 대체 편지가 불가능해 궁금했어요.’ 등등…….
저는 이러한 제목에 넘어 가지 않습니다. 그냥 과감하게 체크를 한 뒤 싹 지워버립니다. 사실 처음에는 많은 메일이 와서 기대를 하지요. 그런데 대부분이 그러한 스팸메일이라는 사실에 실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을 유혹하는 제목은 100% 불법 스팸메일임을 알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특히 스팸메일의 제목들은 아주 그럴싸합니다. 예쁜 아가씨들을 만날 수 있다고, 돈 때문에 곤란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쉽게 돈을 벌 수 있다고, 다이어트를 해서 아주 쉽게 몸짱이 될 수 있다고……. 그러나 이렇게 쉽게 될 수 있습니까? 제목만 그럴싸할 뿐,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꼭 보아야 할 메일은 이렇게 꾸미지 않습니다. ‘신부님, 저 ***입니다.’, ‘신부님, 고민이 있습니다.’,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즐거운 부활시기 되십시오.’ 등등.... 화려하고 자극적인 제목이 없는 것은 물론 저와 관련되어 있는 단어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또한 메일 보내신 분의 이름을 보고서는 스팸메일이 아닌 반드시 읽어야 할 메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메일만 보아도 진짜와 가짜메일이 이렇게 혼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안에도 진짜와 가짜는 서로 함께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잡한 세상 속에서 진짜를 찾아내는 것이 헛고생하지 않고 이 세상을 잘 살아가는 비결일 것입니다.
스팸메일처럼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이 세상 안에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들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이고 아주 화려하며 자극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나를 참으로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가짜입니다.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줄 뿐, 결국은 후회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에 반해 진짜가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자극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따분해보이고 뜬 구름 잡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 행복과 참 기쁨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시는 참 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이 말씀이 가능한 것은 주님만이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진짜와 가짜와 혼합되어 있는 세상 안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고 계십니까? 이제 진짜이신 주님만을 선택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말과 행동에 남을 생각하는 배려가 들어 있느냐는 것이다(링컨).
믿음의 척도
-허광철 신부-
신앙생활의 연수年數가 과연 믿음의 척도가 될 수 있을까? 가끔 얼마나 오래 성당에 다녔느냐가 마치 좋은 신자의 구별법인 양 여겨지는 현실에 복음은 경종을 울립니다. 필립보처럼 이미 그분을 만난 우리도 역시 예수님의 질문을 받습니다. “○○야, 너는 그리 오래 나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바로 그분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느냐 아니냐가 우리 믿음의 척도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명확하게 우리는 ‘아들’이신 그분을 ‘아버지’ 곧 ‘하느님 아버지’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보이는 그분’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아직 필립보가 부족한 신앙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그가 본 예수님은 아직 수난과 부활 이전의 예수님입니다. 필립보는 아직도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기적만을 바랐을지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곧 수난과 부활 사건을 통해 그분을 제대로 ‘바라보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온전히 고백할 것입니다. 혹 아직도 내가 원하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먼저 만나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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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의 일치
- 김선류 신부-
제가 기도하기 전에 늘 머무르는 구절입니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저는 아버지 안에 있습니다.’ 이 성구를 되새기며 마음을 가라앉히다 보면 하느님과 하나 된 저 자신, 곧 의미로 충만한 지금의 나와 지금의 현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하신다.’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몸뚱이 안에 자리한 하느님의 놀라운 현존 그리고 내가 머무는 삶의 모든 자리에 가득한 하느님의 손길 (현존) …. 부족함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이 놀라운 사실을 복음 속 필립보처럼 잊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밀착되어 있는 하느님의 존재 …, 언제나 함께하시는 그분의 현존을 필립보처럼 깨닫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그분의 존재를 찾으려 한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분께서 선택한 사람 외에는 기도 없이, 간절한 바람 없이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체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분석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는 ‘있음’ 그 자체이시기에 오직 믿음과 간절한 청원 안에서 느끼고 체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 (13절)
형제자매 여러분, 그분께 믿음을 두고 청원을 드리는 순간, 비로소 그분은 당신 모습을 드러내시며 거부할 수 없는 충만한 의미를 우리에게 부여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너무도 가까이 계시는 주님을 기도 안에서 발견하는 하루가 되셨으면 합니다. 진정 주님은 바로 우리와 함께 호흡하시며 언제나 의미와 희망을 주는 분이십니다. 아멘.
말, 말, 말.
-김찬선신부-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하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말, 말, 말.
듣기 좋은 말. 듣기 싫은 말. 그저 그런 말.
말, 말, 말.
마음에 남는 말. 상처로 남는 말. 아무 것도 아닌 말.
지금도 제가 보람으로 여기는 일 중의 하나가 20여 년 전 프란치스칸 가족 수련자 모임을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임을 시작할 때 처음 하는 것이기에 많은 신경을 썼고, 당연히 힘도 많이 들었습니다. 모임이 끝나고 다음 모임을 위해 평가회를 가졌습니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좋았다고, 수고했다고 만족감을 표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수고한 보람이 있다고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있는데 우리 형제가 맨 마지막에 부족했던 점을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그 한 마디만 없었다면 Perfect, 대만족인데...... 얘기하더라도 처음에 하던지, 아니면 중간에라도 하지 왜 하필이면 맨 마지막에 해서 그 좋았던 기분을 망친단 말인가... 우리 형제가 너무 서운하고 밉고, 앞에 좋았던 기분은 다 날라 가고 상처만 남았습니다. 잠 잘 자는 제가 잠도 안 오고 아픔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새벽에 일어 나 일기를 쓰면서 마음을 정리하니 안 좋다는 말 한 마디에 수없는 칭찬이 날라 간 이유가 있엇습니다. 바로 저의 교만, 완벽한 칭찬을 바란 저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 말이 남습니다. 듣기 좋은 말과 듣기 싫은 말입니다. 그런데 듣기 싫은 말이 좋은 말보다 더 강하게 그리고 오래 남습니다. 좋은 말은 들을 때는 좋지만 이내 당연한 것이 되어버리고 안 좋은 말은 상처로 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처가 되는 이유가 바로 좋은 말만 바라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모독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럼에도 바오로는 담대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어떻게 보면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것 같지만 사람의 말은 듣지 않고 하느님 말만 하는 것이며, 모독의 말은 듣지 않고 긍정의 말만 하는 것입니다.
모욕을 받을 때 얼굴 빛 차돌처럼 변치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드리라고 프란치스코는 권고합니다. 그 모욕 때문에 큰 영예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모독을 하건, 어떤 모독을 하건, 모독은 받는 사람이 받아야지 받는 것입니다. 줘도 안 받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받고 싶지 않은데도 모욕을 받는다는 것은 누가 모욕을 주어서가 아니라 받고 싶지 않아도 받을 수밖에 없는 내적 이유 때문입니다. 몸이 허약하고 면역력이 떨어지면 병에 걸리고 싶지 않은데도 걸리는 것처럼, 그리고 주님의 영으로 강건하지 않으면 악령이 침범하듯, 하느님의 말씀으로 강건하지 않아 모욕의 말에 침범을 받는 것은 아닐까요?
그럴 때 하느님의 말씀은 아무 것도 아닌 말이 되고 오직 인간의 말만 위로가 되건 상처가 되건 남는 말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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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한 마리가 우리 안을 이리자리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열심히 주워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무엇인가 돼지 옆에 툭 떨어졌습니다. 돼지우리 옆에 있는 감나무에서 빨갛게 잘 익은 홍시 하나가 떨어진 것입니다. 돼지는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서 쳐다보다가 입 안에 넣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달착지근한 것이 입에 착 달라붙어 기가 막히게 맛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와~~ 꿀~ 어매.. 이거 꿀보다 더 맛있네……. 꿀~'
그리하여 돼지는 꿀이 또 먹고 싶어서 우리 안을 다 뒤졌습니다. 그러나 나올까요? 나오지 않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문득 돼지는 이 홍시가 땅 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땅 속 아니면 홍시가 나올 곳은 전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돼지는 뾰쪽한 주둥이로 땅을 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멀쩡한 우리를 온통 뒤집어놓은 돼지를 보고 주인이 어떠했겠습니까? 화가 나서 반죽음이 되도록 돼지를 두들겨 팼지요.
움직이지 못 할 정도로 상처를 입은 돼지가 드러누워 하늘을 보고 끙끙거리고 있을 바로 그 순간, 돼지의 얼굴에 너무 익어서 곯은 홍시 하나가 우리의 옆의 감나무에서 철푸덕 떨어졌습니다.
돼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하늘에서는 감이 떨어질리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나 잘 익은 홍시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도 이 돼지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은총과 축복을 찾아서 돼지처럼 땅을 뒤지고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 안에만 은총과 축복이 있다고 그래서 남들이 찾기 전에 그것을 손아귀에 넣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은총과 축복은 이 세상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맛있는 감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처럼(정확하게는 우리 옆의 큰 감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이지만), 은총과 축복도 하느님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도 대가를 요구하는 은총과 축복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무상으로 떨어지는 은총과 축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따라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만이 주님의 이름으로 은총과 축복을 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은총과 축복은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 안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하늘의 선물인 것입니다.
이러한 은총과 축복을 받은 우리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당연히 하느님의 사람답게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하겠지요? 그래야 우리 모두는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우뚝 서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사도 13,47).
삶에서 책임이란 말을 빼면 아무 의미가 없다.(라인홀드 니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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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의 중재자
-전삼용신부-
오상의 비오 신부님 유물 전시관에 들어가면 눈에 띄는 것 중의 하나는 한 벽면을 가득 메운 편지들입니다. 그것도 전 세계에서 비오 신부님께 보내 온 편지들의 일부라고 하는데 몇 통이나 되는지 그 수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이 비오 신부님께 무엇에 대해 하느님께 청해 달라는 편지들입니다.
그러나 왜 본인들이 기도하기보다는 성인들이나 성직자, 수도자들에게 기도를 청하는 것일까요? 과연 그 분들을 통한 기도는 더 큰 응답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바빌론 유배시절 있었던 일입니다. 임금은 크세르크세스라는 사람이었고 그의 인정을 받던 하만이란 신하가 있었습니다. 임금은 큰 잔치를 베풀고 기분이 좋아져 어여쁜 와스티 왕비를 잔치에 초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왕비는 왕의 청을 거절하였고 왕은 격분하여 왕비를 폐위시켰습니다. 이는 남편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 본을 보여주기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새 왕비를 뽑기로 하였습니다. 이 때 유다인 모르도카이는 자기 삼촌의 딸인 에스테르를 맡아 키우고 있었습니다. 모르도카이는 에스테르를 궁궐로 보냈고 그녀가 왕의 마음에 들어 왕비로 앉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하만이란 신하가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인 모르도카이를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임금에게 청하여 모르도카이만이 아니라 모든 유다인들을 페르시아에서 없애버리라는 명을 온 지방에 전달하게 하였습니다.
모르도카이는 어찌할 바를 몰라 이 사실을 에스테르에게 말하였습니다. 에스테르는 비록 왕비지만 함부로 임금 앞에 나설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임금의 허락 없이 임금이 앉아 정치하는 곳으로 들어가면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임금이 왕홀을 내밀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무릅쓰고 에스테르는 임금을 만났고 임금과 하만에게 술을 대접하며 임금의 애를 태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유다인이고 하만이 자신의 종족을 멸하려한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임금이 화가 나서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하만은 왕비에게 엎드려 살려달라고 청하고 있었는데 임금은 그것이 왕비까지도 폭행하려하는지 알고 그와 그의 가족들을 죽이라고 하고 온 나라에 유다인들의 적을 유다인들 마음대로 죽일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이 에스텔서에 나오는 내용의 줄거리입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임금께 순종하지 못한 왕비는 쫓겨났지만 임금의 사랑을 받던 에스테르의 청에 의해 온 민족이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만물의 주권자는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당신께 죽기까지 순종하는 아들에게 당신의 모든 권능을 주시어 당신과 같은 위치로 올려주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처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기에 아들은 아버지와 같아지실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께 청하는 무엇이나 얻어내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한 몸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또 한 분의 중재자가 계십니다. 그 분이 성모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모님과 또 한 몸을 이루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모든 것을 얻어내시는 것처럼 성모님도 마치 에스테르처럼 아들에게 간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얻어내실 수 있는 분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예수님은 성모님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인들의 전구는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더 큰 사랑을 받고 하느님과 더 일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론이요 다른 이들에게도 은총을 전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순종하여 더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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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믿는 사람은
- 서동원 신부-
어느 수도원의 원장님이 많은 제자 가운데 특별히 한 제자만 사랑했습니다. 그는 제자들 가운데 가장 못생기고 머리도 가장 나빴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원장님이 그를 사랑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편애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이런 불만이 점점 불거질 무렵, 원장님은 제자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새를 한 마리씩 나눠 주면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이 새를 죽여 다시 이 자리로 모여라.”고 했습니다.
모두 모였을 때 다른 제자들은 모두 새를 죽여 가지고 왔지만 사랑받는 그 제자만은 새를 산 채로 안고 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말귀도 알아듣지 못한다면서 그를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원장님은 빙긋이 웃으면서 왜 새를 죽이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그 제자는 대답했습니다. “원장님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를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조용하고 으슥한 곳을 찾아도 하느님은 저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차마 새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원장님은 다른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내가 이 제자를 특별히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많은 사람은 세속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그런데 신앙인인 우리는 ‘주님은 어떤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실까?’ 하는 물음을 던지며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필립보는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구약의 성조들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해 달라는 것인데, 예수님은 당신을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본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마치 수도원 원장님의 마음을 깨달은 그 제자처럼 인간적 나약함과 부족함에도 스승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한 주간을 마무리하는 부활 4주간 토요일입니다. 그동안 ‘내 이름으로’ 행했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새겨두도록 합시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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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시는···
- 김연희 수녀-
수도회 피정의 집이 충북 옥천에 있어 오가는 길에 가끔 정지용 시인의 생가에 들른다. 친절하게 맞아주는 자원 봉사자와 반가운 인사를 나눈 뒤 정성스레 차려진 문학관을 둘러본다. 갈 때마다 <향수>·<고향> 등 익숙해진 시에서 새롭게 다가오는 시어가 있고, 나를 기다리기나 한 듯이 내 걸음을 멈추게 하고 나의 기억을 되돌려 놓는 시가 있다. ‘얼골 하나야/손바닥 둘로/푹 가리지만//보고 싶은 마음/호수만 하니/눈감을밖에’ <호수湖水>라는 시다. 작가의 시작(詩作) 의도와 상관없이 성체조배를 할 때 지그시 눈을 감으면서 느꼈던 그 애틋함을 떠오르게 하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하늘 담은 호수가 더 넓어지는 느낌으로 애송하게 된다. 하느님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는 필립보 사도의 청원에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하시는 예수님의 반문이 오늘 내게 던지시는 말씀으로 다가온다. 늘 주님의 현존 의식에 대한 갈망에만 초점을 두어 스스로 안타까워하고 못내 아쉬워하는 내게, 주님께서는 이번 일주일의 복음 묵상에서 특별히 보여주신 당신의 참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신다. ‘송두리째 쏟으시는… 함께 머무르시는… 속속들이 아시는… 분명히 알리시는… 그대로 보이시는… 믿고 보내시는… 길·진리·생명이신…’이라는 묵상 제목을 먼저 눈여겨보며 말씀 체험에서 지닐 수 있는 크나큰 은혜에 저절로 감사와 찬미를 바친다. 덧붙여 그 모든 것을 감싸 안으시는 말씀으로 부족한 믿음을 더 굳게 해주신다. “네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고. “예수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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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아십니까?
-정병덕 신부-
오랜 기간 연애를 하다 결혼한 부부나 중매로 맺어진 부부가 “결혼하고 나니 몰랐던 점이 너무 많다”라고 하는 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사실 평생 살을 맞대고 사는 배우자도 그리고 제 속으로 낳은 자식마저도 그 속마음을 다 알지 못하며 사는 게 우리의 인생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 이유는 자기의 관점을 강조하고, 자신의 눈높이로만 상대방을 바라보려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녀들에게 내 생각만을 말하고 요구하는 데만 익숙해져 있다면 상대방에 대해서 알기란 불가능한 법이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께도 언제나 부탁만 드리고 내 입장만을 호소하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고, 그리고 예수님을 잘 모르겠다고 한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들은 얼마나 예수님을 아십니까?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내가 지금 이웃에게 행하고 있는 이기적인 태도를 주님께도 똑같이 행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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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보기
-오상선신부-
언젠가 이태리를 다녀온 옛 친구를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이태리에서 시작된 새로운 유아교육방법(유치원)에 대한 체험을 그 친구가 이야기 해주었다.
그곳 아이들은 그냥 어떤 물건을 보고 그림을 그리지 않고 음악을 듣고나서 그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냄새를 맡아보고 그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맛을 보고 그 맛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등 어린아이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무수한 가능성에 열려있는 자세가 충격적이더란 이야기였다.
우리는 무엇을 볼 때 늘 우리의 경험안에 고정된 시각으로 만사를 바라보기 때문에 정작 그 안에 숨어있는 깊이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알았으면 그게 바로 하느님을 아는 것이고 나를 보았으면 그게 바로 하느님을 본 것이다>고 하신다.
우리는 자꾸만 예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말을 잘 하는지 못하는지, 감동적인지 별로인지, 거기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정작 그분이 보여 주시려고 하는 하느님을 못보게 되고 정작 그분이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그 하느님을 몰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미사를 봉헌하면서도 그 안에서 우리와 함께 아버지께 찬미와 감사를 봉헌하시는 예수님을 보지는 못하고 사제가 미사를 잘 드리는지, 제대에 꽃이 잘 어울리는지, 독서하는 사람은 잘 하는지, 해설자는 또박또박 잘 하는지, 사제는 강론을 잘 하는지, 마이크 상태는 좋은지... 이런 데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못보고 정작 깨달아야 할 것을 못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필립보처럼 하느님께서 <짠!> 하고 당신 자신을 직접 보여주시기를 바라면서 정작 형제 자매들 안에서 일하시는 그분을 바라볼 줄 모른다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을 뵈올 수 없을 것이고 하느님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내가 꽃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 꽃의 아름다움에만 머물러 있으면서 색깔이 이쁘니, 모양이 이쁘니, 향기가 좋으니만 생각한다면 나는 정작 보아야 할 것, 깨달아야 할 것을 잡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 꽃을 통해 하느님께서 얼마나 아름다우신지 그리고 우리 자신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바라보고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을 뵈올 수 없고 하느님을 알 수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영적인 발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렇게 내가 보고 있는 것을 고정된 시각이 아니라 열려있는 시각, 즉 어린이들의 상상치도 못한 사고와 생각으로 거듭나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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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靈眼) -김찬선신부-
인도에 가면 많은 인도 여성들의 미간에 붉은 점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절에 가면 모든 부처상의 미간에 보석이 박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이 여인의 화장이요 부처의 치장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눈을 인도 사람들은 제 3의 눈(the third eye), 지혜의 눈(the eye of wisdom)이라고 하고 불자들도 慧眼, 즉 지혜의 눈이라고 합니다. 이 혜안은 육신의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그런 것들과 그런 세계를 보는 눈입니다. 이 혜안이 없으면 사람은 그저 눈에 보이는 것밖에 볼 수 없고, 눈에 보이는 세계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제자들, 토마와 필리보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이렇게 주님은 제자들이 당신을 통해 아버지를 알게 되고, 보게 되었음을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은 전혀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하고 대답합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믿어야 알 수 있고 믿어야 볼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만이 靈眼이 열리고 영안을 가진 사람만이 보이는 것 너머의 존재와 세계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 영안을 가진 사람은 그저 예수만을 보지 않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아 뵙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알아 뵙고 성자께서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성자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아 뵙습니다.
뛰어난 영안을 가진 사람 중의 하나가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어느 날 길을 가던 프란치스코가 길에 떨어져 있는 종이쪼가리를 정성껏 줍는 것을 보고는 같이 가던 제자가 프란치스코에게 물었습니다. “왜 아무짝에도 쓸 모 없는 종이쪼가리를 그렇게 정성껏 주웁니까?” 이에 프란치스코는 이 종이쪼가리에도 하느님, “하”자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고 이 종이쪼가리가 설사 이단의 사상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 뵐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영안의 소유자입니까! 이런 영안의 소유자였기에 그는 구더기를 보고 구더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위를 보고 바위이신 하느님을 알아봅니다.
그러나 영안이 없는 사람에게는 종이쪼가리는 쓰레기일 뿐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걸리적거리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일 뿐입니다.
주님마저도 이러하니 우리는 서로간에 더 그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버리는 버림받은 돌, 서로가 서로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영안이 있으면 우리는 주님 성전에 요긴한 모퉁이 돌, 서로를 딛고 하느님께로 올라가게 하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나의 참 가치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나는 주님 성전을 이루는 귀한 돌입니다. 나를 스스로 쓸모없는 돌멩이, 그래서 사람들의 발에 차이고 걸리적거리는 돌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참 가치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그 또한 주님 성전을 이루는 귀한 돌이요 성전이고, 주님께로 나아가는데 걸리적거리는 걸림돌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오르게 하는 디딤돌, 받침돌입니다.
그리고 다음의 말씀을 귀담아들읍시다.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새벽을 열며
어떤 사람이 신발을 사러 가기 위하여 발의 크기를 본으로 떴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장에 갈 때는 깜박 잊고 그 본 뜬 것을 집에 두고 온 것입니다. 신발가게 앞에 와서야 본 뜬 것을 집에다 두고 온 것을 깨닫고는 다시 집으로 되돌아갔지요. 그 본 뜬 것을 가지고 다시 시장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신발가게의 문이 이미 닫힌 뒤였습니다. 이 사연을 들은 사람들이 말했지요.
“아니 본 뜬 것을 가지러 집까지 갈 필요가 어디 있소? 발로 신어보면 될 일이 아니요?”
그러자 이 사람이 한심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려면 발이 본 뜬 것만큼 정확하겠습니까?”
어떻습니까? 발이 정확할까요? 아니면 본 뜬 것이 더 정확할까요? 물론 정확하게 발을 본떠서 똑같을 수도 있겠지만, 이 둘 중에서 더 정확한 것은 당연히 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리석은 모습을 우리들이 취할 때가 상당히 많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물질적인 재화나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질적인 부와 높은 지위를 얻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당연히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우리들은 이러한 세속적인 것들을 얻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다른 사람보다도 많이 가졌어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 부와 명예를 쫒고 있다고 말하는데, 결과적으로는 남들보다 많은 부와 높은 명예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발보다도 발 뜬 것이 더 정확하다고 우기고 있는 모습과 행복보다도 부와 명예가 더 좋다고 우기는 모습.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렇게 부차적인 것이 근본적인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될 때, 우리들은 결코 이 세상 안에서 행복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근본적인 것을 쫓는 우리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 근본적인 것은 바로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하시면서 특히 강조하여 말씀하시지요.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주님께 대한 나의 믿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주님을 믿고 있었는지요? 혹시 이 세상의 것들을 더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요? 그러면서도 나는 행복하지 못하고 늘 투덜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들의 이런 모습이 얼마나 아쉬웠으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고까지 강조하여 말씀하실까요? 이제는 발보다 본 뜬 것이 더 중요하다고 우기고 있는 어리석은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쫓는 그래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빠다킹신부
‘저절로’ 속에는
-김동하 신부-
갓 태어난 아이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이며 선물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점차 커가는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대견함을 안겨줍니다. 먹이고 입혔을 뿐인데 아이는 저절로 몸집이 자라납니다. 가르쳐주었을 뿐인데 아이는 저절로 이해력이 넓어지고 생각이 깊어집니다. 갓난아이가 저절로 성인이 되어가듯이 모든 피조물은 똑같습니다. 숨쉬는 피조물들은 저절로 하늘을 향하여 커져갑니다. 숨이 없는 것들은 저절로 땅으로 내려앉습니다. 심고 물을 줄 수는 있지만 저절로 자라게 하시며 이끄시는 분은 따로 계십니다(1코린 3,7).?? 인간은 본래 타고난 대로 무언가를 온전하게 혼자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가장 큰 사랑을 받는 피조물이라는 덕분에 여러 가지 뛰어난 능력을 받은 것뿐입니다. 뛰어난 능력 덕분에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입니다. 이성과 감성에 더하여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심성으로 인간을 헤아려봅니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절실히 느끼면서 ‘저절로’ 속에는 그분께서 자리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러하시고 앞으로도 그러하시겠지만 세상을 ‘저절로’ 이끄시며 다 이루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따라서 나누는 매 순간순간이 감사할 뿐입니다.
내 안에 계신 하느님
-고진배 수사-
성경에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가 많은 이유는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를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하셨지만 무지한 백성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믿음에 관해서도 여러 차례 권고하십니다. 믿음의 약함을 지적하시면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산을 옮길 수 없으며 병을 치유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바다 위를 걷다가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십니다. 다음은 임상옥과 송이가 나눈 천주 존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임상옥이 송이에게 "어떻게 하늘 위에 천주가 있을 수 있단 말이냐? 너는 천주를 보았느냐?" 하니, 송이가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천주를 어떻게 믿느냐? 보지도 못한 천주가 어떻게 존재하고 있다고 믿느냐?", "하오면 나리께서는 나라님을 믿으십니까?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바로 임금이 아니시냐?", "하오면 임금님은 어디에 살고 계시나이까?", "그야 이를 말이겠느냐? 임금님이야 궁궐에 살고 계시지 아니하겠느냐?", "아직까지 나라님을 뵌 적이 없으시지 않나이까? 하오면 나리께서는 직접 눈으로 뵙지 못하였는데도 어찌하여 궁궐에 나라님이 살아 계신 것을 분명히 믿고 계시나이까? 마찬가지이나이다. 나리께오서 직접 뵙지는 못하셨으나 나라님이 계신 것을 믿고 계신 것처럼 이 소녀 또한 직접 하늘에 계신 천주님을 만나뵙지 못하였으나 하늘 위에는 우리를 만들고 생명을 주관하는 천주님이 분명히 계신 것을 굳게 믿고 있나이다." 필립보가 예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리자 예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하고 힘주어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덧붙여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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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강론> : 하느님의 백성인 유다인으로부터 추방당하는 복음 -경규봉 신부 -
바울로의 복음 선포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올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이에 회당의 핵심 인물들은 바울로에게 위협을 느껴 그를 반대하며 비방하였다. 그러나 바울로 일행은 확신에 차서 담대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계속하여 선포했다.
이처럼 바울로는 회당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들은 복음을 무가치하게 여겼다. 그들이 복음을 거부하자 바울로는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 선포가 정당하며 하느님의 명령에 의한 것임을 선언한다. 또한 자신이 선포하는 복음이 인간의 지혜나 마귀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섬기던 바로 그 하느님으로부터 나왔으므로 자신을 비방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임을 암시한다.
바울로와 바르나바의 설교를 들은 이방인들은 대단히 기뻐하며 신도가 되었고,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점점 널리 퍼져갔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 마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선동하여 바울로와 바르나바 일행을 추방했다. 그리하여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그 마을을 떠났지만, 바울로와 바르나바의 전교로 신도가 된 마을 사람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 이들은 예루살렘의 성도처럼 성령을 받았으며(2,4; 4,31; 10,44) 이 지역 교회는 점점 더 융성해 갔다.
하느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은 바울로가 전하는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였지만, 하느님을 안다고 자부하던 유다인들은 오히려 복음을 거부했다. 그들은 메시아는 정치적인 왕이어야 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은 결코 정치적 메시아일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져온 믿음에 따라 살아왔기 때문에 결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선포하는 바울로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믿음으로 볼 때, 바울로 일행은 분명 이단이며, 하느님을 욕보이는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바울로 일행을 반대하고 추방했던 것이다.
잘못된 믿음, 하느님을 믿지 않고 종교를 믿는 믿음은 자칫 하느님을 거스르기 쉽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며, 하느님을 믿는 백성이었지만 그들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수없이 박해하고 죽였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신을 믿고, 자신의 믿음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했기 때문에 바울로 일행은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을 거부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행하는 자유의지까지도 받아들이실 정도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결정을 그만큼 존중하시기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반대하는 이들을 떠나시는 것이다.
루가복음(2,7)을 보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여관에 들어가시지 못하고 떠나시어 외양간으로 가신다. 그 여관에는 사람이 들어갈 많은 방이 있었지만, 주님을 모실 방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는 수 없이 그 여관을 떠나실 수밖에 없었다. 우리 마음의 방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마음속에 주님을 모실 방이 없으면 주님은 떠나실 수밖에 없다. 바울로 일행이 유대인들의 회당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으로부터 떠나실 수밖에 없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마음의 방을 비우는 것이다. 그 빈 방에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담는 것이다. 때문에 마음의 방을 비우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는 떠나실 수밖에 없다. 오늘 우리 마음의 방을 깨끗이 비우자. 마음속의 빈 방에 주님을 초대하는 하루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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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불식간
-노성호 신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으며, 귀로 들을 수 없는 분. 그분은 바로 야훼 하느님이십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께 대한 체험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부지불식간에 우리 곁을 다녀가시기 때문에 아마도 그들의 그러한 바람은 이미 이뤄져 있을 것입니다. 신학교 3학년 때, 저는 청년성서 연수를 통해 젊은이들 안에 살아 숨쉬고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다들 처음에는 세상의 모든 짐을 자기 혼자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기도도 하지 않던 젊은이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눈에 띌 정도로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기쁨에 가득 찬 찬양과 서로 앞 다투어 하던 떼제 기도, 능동적이고 즐겁게 연수에 임하는 자세 등 그 모든 시간들 안에서 하느님이 분명 이들과 함께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지요. 진정 처음에는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며, 자신들은 늘 어둡고 깜깜한 곳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하느님께 당신이 어디 계시냐며 대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러한 그들을 인도해 주셨고 그 크신 사랑을 깨닫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랍고 신비로운 기적이었고, 하느님께서 분명히 살아 계신 분이라는 것에 대한 뚜렷한 확신이었습니다.
-장훈철신부-
오늘의 복음과 독서의 말씀은 과연 우리는 누구에게 기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진정 우리는 예수님을 얼마나 믿고 따르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내용으로 한 주간 잘 마무리 할 수 있는 좋은 묵상 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내가 이루어 주겠다." 이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서 이루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영광을 실현시키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내 이름으로"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라는 이 말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제 우리들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이루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이름 앞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아로새겨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이 불려지는 이름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 즉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일을 이루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1독서에서 그러한 갈등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지만 배척받게 되고 오히려 이방인들에게서 환영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더 잘 알고 잘 받아들일 것 같았던 유다인들에게는 배척을 당하지만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는 환영받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던져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우리들은 얼마나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과연 믿고 따르기가 쉽지 않다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잘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재차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오늘날 삭막한 도시 생활과 경제 중심의 활동에서는 오는 여러 가지 물질적 욕심도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있지만, 그것보다 더 큰 것은 바로 우리 각자 자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개인주의적인 마음이 더 하느님과 우리들 사이를 방해하는 요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관대히 대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일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 또한 자기 자신일 것입니다. 이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가 아닌 '나 자신의 이름으로'구하는 나의 모습이 우리를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들의 이기적인 모습에 예수님은 무엇이 중요한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은 할 뿐 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내가 내 자신의 이름으로 행한다면 내 안에서 머물고 말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다면 주님이 주신 하느님의 영광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내 자신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내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이 이 지상의 모든 잘못됨의 원인이라는 것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가 단순히 자신만의 안녕과 자신만의 편의에서 벗어나 진정 우리가 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웃 사랑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한 주간을 마무리하는 부활 4주간 토요일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이번 한 주간을 돌아보며 '내 이름으로' 행했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새겨 넣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 다운 마음으로 새로이 한 주간을 시작하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양승국신부-
<연보랏빛 자운영이 펼쳐진 들판에 서서>
논두렁이나 들녘에 만개한 자운영 군락을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들판을 가득 메운 자운영 꽃무리가 보라색 구름 같다고 해서 자운영이라고 한다든가요.
언젠가 들녘을 걷다가 발견한 한 폭의 수채화는 다름 아닌 자운영 군락이었습니다. 아득하게 펼쳐진 자운영 꽃무리의 아름다운 자태에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만 보았습니다.
온천지에 흩뿌려진 연보랏빛 작은 꽃들... 땅을 갈아엎기 전 논이나 풀밭을 가득 채운 연보라색 자운영 꽃이 요즘 남녘지방에서 각광받는 눈요기 관광 상품이 되기도 한답니다.
저는 최근에야 이 자운영이 농사에 큰 보탬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운영은 뿌리혹박테리아가 있는 콩과의 식물입니다. 그래서 공기 중에 있는 질소를 빨아들여 스스로 질소 비료를 만든답니다. 겨우내 심어뒀다가 봄에 갈아엎어 버리면 따로 비료를 줄 필요가 없지요. 자운영 꽃밭은 파종기에 갈아엎어져 그 자리에서 거름으로 돌아갑니다.
그 어여쁜 자태를 기꺼이 포기함을 통해 자운영 군락은 대지를 비옥하게 만듭니다. 그 대지에서는 또 다른 찬란한 생명이 태어나게 됩니다.
태생적으로 자운영은 정녕 슬픈 식물입니다. 아름답게 꽃을 피우지만 잠시뿐입니다. 기껏 꽃피우지만 아무소리 없이 갈아엎어집니다. 채 피어나지 못한 그 고운 꽃들이 땅속에 파묻힙니다. 또 다른 탄생을 위해 기꺼이 꽃이기를 포기합니다.
자운영의 화려한 자태를 바라보며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시다가 짧은 생애를 마감하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우리 부족한 죄인들을 위해 기꺼이 땅에 묻히신 그분의 희생을 기억합니다. 그분의 자기 낮춤과 헌신으로 인해 들녘 가득 보랏빛 구름처럼 피어난 우리이기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 꽃다운 나이에 자운영 꽃처럼 자신을 희생시킨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온 생애는 오로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을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그분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오늘 우리가 아버지께 구할 기도 역시 이런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 전체를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해 달라는 기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는 것은 내 안에 ‘나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를 확장시켜나가는 일입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천해나가는 일입니다. 세상 안에, 가난한 이웃들 안에 현존해 계시는 아버지를 극진히 섬기는 일입니다.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착각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분께서 들어주시겠다는 것은 나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워주시겠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다분히 이기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시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느님 나라 확장을 위한 기도, 성공적인 복음 선포를 위한 기도, 상호 화해와 일치의 촉구를 위한 기도, 전쟁의 종식을 위한 기도, 상호 배려와 용서를 위한 기도들은 하느님께서 틀림없이 들어주실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보다 영적인 기도, 보다 복음적인 기도, 세상과 이웃을 위한 기도, 결국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셨던 기도로 승화되어나가길 기원합니다.
-김형태 신부-
여러분은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계십니까? 저도 신앙인으로서 살아오면서 특히 사제성소의 길에 있어서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자 숱한 질문들을 하느님께 드리고 그분을 만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고 간절히 바래왔습니다. 하느님만 아니 예수님만 아니 성모님만 아니 성인 중에 한분만이라도 만나기를 바라면 그러면 모든 것을 바치겠노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질문들은 나의 삶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삶과 신앙을 구별하여 생각하고 생활 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에 대한 회의와 자신감의 결여로 인하여 갈등과 혼란을 겪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우리의 신앙이 바로 삶이라는 삶이 또한 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성서에서 보면 예수님을 통하여 신앙의 확신을 얻고자 여러 가지 질문을 드리곤 합니다. 오랫동안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또는 직접 그분의 말씀을 듣고 함께 생활해온 그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직접 그분께 묻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더 오래 우리의 마음을 조이게 할 작정입니까?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 주시오." 또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또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이 질문들은 숱한 조상들을 통해 예언되었던 하느님의 사람. 곧 그리스도가 바로 당신이신가하고 묻는 질문입니다. 그들의 질문은 여러 조상들이 하느님께 받으려 했던 그 큰 선물이 지금 자신들에게 와 있는지를 묻는 대단한 질문이며,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오늘 예수님의 대답 속에서 답답함을 느끼고 또한 허탈함마저도 느껴집니다. “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의 답은 바로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라는 말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께 청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 일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따르는 목적을 기억한다면, 어려운 일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마쳐갈 무렵에 제자들을 앞에 두고 확신을 주는 말씀을 남기십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오늘 복음으로 읽고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교 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부활은 지금 우리가 갖는 삶의 모습과는 다르게 살아날 희망을 갖고 사는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모습으로 우리가 살아날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부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부활시기에 가져야 할 마음은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넘치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도 전할 줄 안다면, 부활시기를 지내는 우리를 바라보시고 하느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이 기뻐하실 일을 어떻게 준비하며 사십니까?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아멘
아버지와 예수
-강영구신부-
당신도 필립보처럼 하느님을 만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아내를, 당신의 남편을, 당신의 아들과 딸을 다시 보십시오. 당신이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을 통해서 하느님의 모습을 본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당신의 남편과 아내, 자식들을 하느님처럼 사랑하고 섬겨보십시오. 하늘나라(天國)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 가정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만일 당신이 아내와 남편, 아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불행합니다. 당신이 가장 가까운 가족들 안에서 하느님을 찾지 못한다면 온 세상을 다 돌아다녀도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떼제(Taize)공동체의 찬미가 중에 ‘Ubi caritas et amor, ubi caritas Deus ibi est!’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자비와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 계신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하늘 저 높은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화려하고 웅장한 성당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 계시고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십니다. 동체자비(同體慈悲)를 몸소 실천하시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다른 모습입니다.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당신과 동일시(同一視)하는 예수님(마태25,40)이 바로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을 섬기는 당신은 복된 사람입니다.(一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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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 신부 -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8절)라고 필립보 사도가 주님께 간청하고 있다. 이 질문은 하느님을 보다 명확하게 알고 싶고, 하느님을 체험하고 싶어하는 인간들의 소망을 표현하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니면서도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는 필립보 의 모습은 중요한 초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냥 자신의 지적인 면만을 보려고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또한 이 질문은 하느님을 직접 만남으로서 모든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려는 욕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성서에 아무도 하느님 을 본 사람은 없다(요한1,17)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필립보의 요구에 예수님은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 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니 무슨 말이냐? 너는 내가 아버지 안 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9-10절) 하신다. 즉 예수님은,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이며,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어 떠한 분이신가를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참 모습은 인 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모습이 이미 아닐 것이며 믿음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도록 우리와 똑같 은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으니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 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중심은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고, 어떻게 하라고 하셨는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의 가르침에 충실할 때 우리 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되고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 나아가게 된다. 즉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신비를 깨닫게 된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시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은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고, 하느님 아버지를 계시한다. 이 렇게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친교, 그리고 아버지께 대한 신뢰로 말씀하시고 행하 신다. 즉 아버지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말씀하시고 행하신다. 예수께서 하시는 일 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일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알면 하느 님 아버지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은 이미 하느님 아버지를 체험 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하느님 의 아들이신 그분을 올바로 알지 못한 채,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는 청을 할 것 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이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 으니,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국외자(局外者)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기도하자.
그러나 우문(愚問)은 없다. -박상대 신부-
빵을 받아먹은 유다가 고별식장을 떠나 스승을 넘겨주기 위한 작업을 실행에 옮기고, 수제자 베드로까지 스승을 배반할 것이 예고됨으로써 고별식장의 분위기가 공포와 불안에 싸여있는 가운데, 어제 복음에서 토마는 예수께 "당신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하물며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예수께서는 당신 스스로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라는 대답으로써 토마 사도의 무지(無知)를 불식(拂拭)시키셨다. 무지의 불식은 동시에 불안과 걱정을 제거한다. 이로써 예수께서 제자들과 나누시는 고별식장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고별의 저녁시간이 깊어간다. 이 틈을 놓칠세라 지칠 줄 모르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계속된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7절) 예수께서는 문법상 미래형(알게 될 것이다)과 현재완료형(알게 되었다), 그리고 과거완료형(이미 뵈었다)을 한꺼번에 사용하여 교수(敎授)하신다. 예수님은 작별의 시간이 눈앞에 다가온 것을 피부로 느끼시는 모양이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제자들과 함께 지낸 시간이 제법 길었다는 전제아래 속성법(速成法)을 사용하신 것이다. 그러나 속성법의 의도가 빗나가고 말았다.
이번에는 필립보 사도가 나서서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8절) 하고 엉뚱한 청을 넣는다. 이 간청은 필립보가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바람이다. 즉, 토마 사도의 질문으로 이미 얻어낸 '지상예수를 믿음으로 보는 자는 곧 아버지를 본 자'(7절)임을 필립보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한번 더 확실하게 자신을 밝히신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9절)
이 말씀은 제자들이 지상예수와 함께 지낸 것이 사실 하느님과 함께 지낸 것임을 뜻한다. 예수께서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계심으로써 두 분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예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과 행동은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문(愚問)은 없다는 말대로 토마나 필립보 사도의 우문(愚問)같은 질문이 없었다면 우리는 난감해 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하느님 아버지를 우리 두 눈으로 보려고 애쓰지 않겠는가? 필립보 사도의 소망처럼 하느님 아버지를 한 번만이라도 볼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법도 하다.(8절)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은 이미 인간에게 시청(視聽)되었으며 감지(感知)되었다. 사실 하느님은 인간의 시각적(視覺的) 차원을 벗어나 존재하신다. 따라서 아무도 하느님을 볼 수 없으며, 본 사람도 없다.(요한 1,18; 5,37; 6,46)
인간은 오직 인간이신 예수님 안에서만 하느님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는 다시금 예수께 대한 믿음 안에서 더 큰 일도 행할 수 있으며(12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며(13절), 아들의 이름을 통하여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질 것(14절)을 의미하는 말이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을 내세우는 신앙인 -까따꿈바 묵상팀-
유대인들은 사도들을 시기하며 박해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먼저 율법을 받아들여만 하느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율법의 준수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믿음이 종말에 새로워진 하느님 백성이 되는데 필요한 유일한 조건이라는 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율법 없이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구원된다면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자신들의 믿음이 허사일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자신들의 수고를 보상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에게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과 영생이 중요했다. 더욱이 구원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주어지는 은총임을 굳게 믿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이와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이방인에게로 갈 것이다. 유대인들의 비방과는 대조적으로 이방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며 신도가 된다. 유대인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고 쫓아내지만, 사도들은 계속하여 다른 지역을 찾아가 복음을 전한다.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일수록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 거저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할 수 있다. 구원이 거저 주어지는 은총이라면 자신들의 노력과 수고가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열심히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구분도 없으므로 열심히 살 이유도 없고, 열심히 사는 것이 손해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사람이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들만 바라보기 때문에 갖는 어리석은 생각이며 믿음이 부족한 때문이다. 사람이 하느님을 바라보고 산다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많은 죄를 지었으며, 헛되게 살았는가를 쉽게 깨달을 수 있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티끌과 먼지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고 자신을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면 자칫 자만심과 우월심에 빠지거나 반대로 자기 비하를 하거나 열등감에 빠질 수 있다.
믿음이란 주변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사람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서는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깨닫고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 깊은 사람은 항상 겸손하다. 그러한 믿음이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게 하며, 구원에 이르게 한다. 자신을 드러내고, 내세우며,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기보다 자신의 올바름과 의를 믿었다. 때문에 그들은 하느님께서 율법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구원하신다는 믿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율법을 충실히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신들과 율법을 지키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들을 같이 취급한다고 사도들을 비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복음은 그들을 비켜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었고, 아무 것도 모르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기쁨에 넘쳤다.
오늘 우리가 진정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사람을 보기보다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람 앞에 서기보다 하느님 앞에 서며,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하느님을 내세우자.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간구하며,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겸손한 신앙인으로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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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아버지를 너무 보고 싶습니다†
오늘복음은 묵상시 한편으로 시작합니다.
빵과 포도주를 나누며 / 살며시 다가오는 내 기억 속의 님모습 / 첫사랑 추억같은 분위기 속으로 / 슬그머니 도취되어 필름을 돌려봅니다 / 잠시 스쳐간 인연 하나 / 이 밤이면 떠난다고 달래주는 님 / 아련히 떠오르는 당신의 이름 / 한편의 드라마같은 우리의 추억은 / 한밤의 세레나데가 되어 / 내 기억의 창고에 머물러있고 / 당신과의 소중했던 만남은 / 나 인생의 전 노트로 저장되어 있음에 / 포도주 한잔의 은은한 향기로 / 나의 온 마음과 영혼을 감싸주듯이 / 당신은 나의 영원한 기억의 드라마입니다.....['필립보의 노래, 두올묵상집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보고 싶다' 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 '보고 싶다' 는 말에는 수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 말은 사랑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마음의 신호입니다.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보고 싶다'는 마음은 순수한 애정의 표현으로서 상대에게 전하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보고 싶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해도 됩니다. 오늘복음에서 예수님과 함께 생활해 왔던 제자 중 필립보가 '보고싶다'는 말을 합니다. 다시말하면 주님 당신을, 그리고 당신의 이버지를 진실로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는 장면입니다.
어제복음의 토마 질문에 이어 필립보와의 대화 장면이 오늘복음의 배경입니다. 그냥 편안한 상태에서 일상의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은 주님을 떠나보내야 하는 비감에 젖어 암울한 마음상태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그런 가운데 필립보가 주님께 간청을 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필립보의 이 말은 '주님. 제발 제발(Please, please!)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흡족하여 언제까지고 주님 오실 때 까지 마음놓고 기다리겠습니다...' 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이고 기다린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바보는 없겠지요. 하기야 영화에서는 원수를 갚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극히 일부분이고요.... 필립보의 이 간청은 그냥 한번 보고 싶다는 정도의 단순한 의미가 아니고, 정말로 보고싶어 죽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사랑하는 연인이나 자식들은 미칠만큼 보고 싶은 적이 있을 것이고요, 혹시나 하느님을 미칠만큼 보고 싶어한 적이 있으십니까? 필립보와 같이 주님을 너무 사랑하여 그 아버지를 죽을 만큼 보고 싶은 적이 있습니까? 다시 다른말로 바꾸어, 남편(아내)을 너무 사랑하여 시부모(처기부모)를 미칠만큼 보고 싶어한 적이 있습니까?................(대답은 안들을랍니다.???????)
그런데 마지막 고별 파티장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을 온마음으로 드러내며,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필립보에게 주님께서는 '필립보야,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들과 함께 있었는데도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하고 말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못하느냐?"(요한14,9)...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혹자들은 필립보를 나누라는 것으로 해석합니다마는 저는 그렇게 생각치 않습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에게 먼길을 떠나면서 달래며 이해시키듯이..... '얘야, ... (이래저래서) 다 보여주지 않았느냐'...라고 다정다감하게 가르쳐주시는 장면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첫번째 하느님은 자비와 사랑이시기 때문이며, 두번째는 가족을 두고 멀리 떠나는 사람들은 아무리 성질이 지랄(?)이라도, 멀리 떠날 때는 온갖 사랑스러운 표현을 하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양재오 보나뻰뚜라 신부의 묵상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서 그 사람을 알게 되는 과정과 떠나야 하는 상황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먼저, 우리가 어떤 경우에 만나는 사람은 몸을 지니고 구체적인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상대의 겉모습(外貌)에서 풍기는 인상, 그가 하는 일(職業), 그의 호칭(呼稱)이나 이름 등을 통하여 그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업상 업무적인 경우인지, 개인적인 친교와 우정을 나누는 경우인지에 따라 상대를 아는 관심과 정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몇 년, 아니 몇 십 년을 만나고 왕래하며 살아도, 그의 표면적인 관심과 일상적인 만남 이상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 보다 짧은 기간의 만남이지만, 속내를 드러내고 깊이 있는 만남을 가지고, 깊은 친교와 우정을 나누는 관계도 있습니다.
때문에 오랫동안 만나고 살아온 사람이 세상을 떠나도 그 슬픔과 섭섭함이 그리 크지 않을 수 있는 반면에, 시간적으로 그리 길지 않은 만남을 가져온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내 마음 속에 그 빈 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고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떠난 이후지만 보고싶은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랑했던 사람은 '보고 싶다'고 이미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오늘복음에서 주님은 필립보를 포함한 제자들에게 고별의 장면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내가 그대들과 함께 있었는데도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요한14,9) 고 달랩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필립보에게 하신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들리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의 시간, 그 햇수가 길고 많을수록, 그 만남의 깊이도 당연히 깊어지어야 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그럴까요?
여러분은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고 신앙생활에 입문한 지가 얼마나 되었으며, 그동안 그 분과의 관계는 어떤지요? 깊은 사귐과 만남을 가지고 그분을 깊이 이해하고 알게 되었나요? 그래서 그분의 깊이를 어느 정도 알고, 그분의 뜻을 제법 깊이 헤아려 알게 되었는지요? 혹시 그렇지 못한 분들이 계시다면 오늘복음의 필립보같이 '보고싶다'고 기도해 보십시요. 그렇게 진정한 마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고싶다'고 간청하면, 매일매일 그분과 깊은 만남을 통하여, 해가 갈수록 그분의 뜻을 그만큼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복음에서 주님께서 필립보에게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본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요한14,9) 우리 속담에 '아내가 좋으면 처가집 말뚝보고도 절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혼전에 서로 청혼을 검토하는 하는 과정에서 그 자식들을 보면 그집안 부모나 내력(가문)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주님을 보면 하느님의 집안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상대를 온마음으로 바라보지 않고, 적당히 보게되면, 자꾸만 그 집안까자도 알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표현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드러내주는(啓示) 분' 이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啓示)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아버지를 뵙기를 원하는 필립보에게 설명해 줍니다. 당신(성자 예수)을 본 사람은 곧 아버지(성부)를 본 것이라고. 주님은 바로 하느님(성부)을 찾는 사람, 진리(말씀으로 강생하신 하느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應答)입니다.
요한복음 사가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의 형태를 취하여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셨으니,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고백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께서 곧 하느님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런 까닭(理由)에 주님께서는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聖經)의 진술에 의하면, 한 때는 사람들 심지어 제자들의 눈에 조차 예수께서 예언자 혹은 좋은 스승 정도로 인식되었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예수님은 예언자요 스승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전해주는 체험에 입각하여 볼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한 때 예언자나 스승이기도 했으나, 그 분과 삶을 깊이 나누고 교류할수록,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단순한 예언자요 스승의 관계에서 질적인 비약을 이루어, 마침내 그들 인생의 구원자요, 하느님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골로사이서 1장 15절에도 "그 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 모든 피조물의 맏이다." 라고 언명(言明)하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神的本質)에 대하여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힘 있는 진술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경이 증언(證言)하는 것은 예수께서 하느님과 같을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형상(모상)으로서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요한10,30과 10,38 그리고 12,45 과 14,1-11 참조).
그리고 오늘 우리 교회가 듣는 요한복음에서 그 분께서 필립보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청하면 이루어 주겠다"(요한14,14) 고 하셨는데, 우리가 청할 때 그 분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하고 잠시 묵상해 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이름은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은 곧 부모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이름을 드높이는 행위를 했으면 그것은 곧 부모님을 드높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르게 살면, 그런 우리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리스도께서 찬미를 받으시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하느님을 욕되게 하고, 그리스도와 그 공동체(교회)를 욕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름에는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뜻과 성품, 인격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곧 그 분의 인격으로 대표되는 그 분의 본성, 그분의 뜻(意志)에 생각하고 그 뜻에 맞추어 청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무턱대고 분별없는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그 무엇을 청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 분의 뜻을 헤아리며 살아가는 성숙한 신앙인(信仰人)의 태도(態度)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분의 본성(本性), 그분의 뜻(意志)에 스스로 거스르며, 일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치 마술사에게 기대하는 것과 같은 일을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께 청해서는 안 되겠고, 그분의 뜻과 공동체의 공동선(共同善)을 거스르는 것은 물론 나 자신의 이기적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여 그 무엇을 청하지도 않아야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마음과 뜻을 다하여 성실하고 진실하게 하느님을 따르고, 그분의 뜻을 찾고 행하며 살아간다면, 그리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그 분이 원하는 것을 분별(分別, 識別)해 내어 청한다면, 그 때 그분은 흔쾌히 그분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요한복음 15,16과 16,23에도 나와 있는데, 그 가운데 여기서는 요한복음 15,16 끝 부분에 나와 있는 것을 한번 음미(吟味)해 보고 싶습니다. 여기에서 그분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또 내 이름으로 그대들이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모두 그분이 주시도록, 내가 그대들을 내세웠습니다. 내가 명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청할 때, 그것이 으뜸가는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부합하는 것인지 아닌지도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 그 분의 사랑과 같아지려는 큰 뜻을 품는다면, 그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을 것이고, 그 무엇을 청해도 허락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본성, 그 분의 사랑을 관상하는 이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묵상마무리도 시한편으로 맺으려 합니다. 제목은 '하늘을 보고싶다'...입니다
하늘을 보고싶다. 푸른빛을 보고싶다. 푸른하늘을 보고싶다.
드넓은 하늘을 보고싶다. 광활한 하늘을 보고싶다. 파아란 하늘을 보고싶다.
나의 무거운 마음에 갇혀, 나의 어려운 현실에 갇혀, 나의 못다이룬 꿈에 갇혀,
볼 수 없는 하늘을 보고싶다. 자유로운 하늘을 보고싶다. 나를 품은 하늘을 보고싶다.
나의 주위가 어두워 볼 수가 없다. 어두운 장벽에 막혀 볼 수가 없다. 안개속에 쌓여 전혀 볼 수가 없다.
내 맘속에 창을 내어 볼 순 없는걸까.. 그 장벽에 창을 내어 볼 순 없는걸까.. 나에겐 소중한 하늘을 볼 수 있다면..................◆
-두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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