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씬한 다리를 훑으며 카메라가 여자의 상체를 더듬어 위로 올라간다. 얇은 체크무늬 이불을 덮은 여자의 새끼손가락이 허리 즈음에서 남자의 손가락과 닿아있다. 에로물 같은 시작이다.
“외박할 거면 미리 알려주던가.”
치카가 언니에게 투덜거린다. 치카는 3자매 중 막내로 둥글둥글한 성격에 걸맞게 스포츠용품점 알바를 하고 있다. 남자 취향이 독특해 ‘자연인’ 윤택 분위기를 풍기는 점장과 썸 타는 중이다.
“알려고 하지 마. 어른들 세계엔 그런 게 있어.”
은행원 요시노는 3자매 중 둘째. 모든 집의 둘째가 그렇듯 사고뭉치다. 남자보는 눈이 지지리도 없어 만나는 놈팡이마다 밥 사주고 돈 빌려주고 무-대책이다. 외박을 들켜 오늘도 언니에게 잔소릴 듣지만 귓등으로 흘려버린다.
“넌 꼭 일 있을 때마다 외박하더라.”
맏이 사치는 간호사다. 바람이 나 집을 나간 아빠와 재혼한 엄마를 대신해 두 동생을 건사하고 있다. 모든 맏이가 그렇진 않겠지만 자신의 삶을 희생할 정도로 책임감이 강하다. 완고한 틀딱이지만 의외로 유부남과 만나고 있다.
남다른 연애 스타일의 3자매에게 15년 전 가출한 아버지의 부고가 전해진다. 부고를 전한 이는 아버지의 세 번째 여자. 무심하고 한심했던 아버지는 두 번째 여자에게서 얻은 딸 하나를 남기고 떠났다. 이복동생 스즈가 장례식에 참석한 세 언니에게 아버지가 남기고 간 사진을 건넨다. 매사에 치밀한 맏언니는 세 번째 부인이 아닌 어린 이복동생이 아버지의 병간호를 했으리라 짐작하고, 배웅을 나온 스즈에게 함께 살자고 한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스즈는 고민도 하지 않고 언니들 집으로 향한다. 의붓어미보다는 한 방울이라도 피가 섞인 이복언니가 나은 모양이다.
토닥거렸다가 깔깔거렸다가. 4총사를 완성한 자매들의 평범한 일상이 펼쳐진다.
“앉아서 먹어”
“그럴 시간 없거든”
“벗어. 내가 한 번도 안 입은 블라우스야”
“언니도 내 부츠 신었잖아”
상황에 의해 조숙한 아이가 되어버린 스즈가 너무 조심스러워한다는 점만 빼놓곤 무난하고 화기애애하다.
막내 스즈가 술에 취했다. 언니들이 담근 매실주. 맛만 본다는 것이 과음을 했다.
“새엄마 제일 싫어. 아빠 바보.”
주정을 한다. 속마음이 비어져 나온다.
“여기 점이 있네.”
“속눈썹이 길어.”
“귀가 언니랑 닮았어.”
언니들이 대자로 뻗은 막내를 관찰한다.
잔멸치 덮밥을 해먹고, 예쁜 그림을 그려 창에 붙이고, 해묘식당에 가 맥주를 마시고...
평범한 일상을 깨는 전화벨이 울린다.
맏이 사치가 “요시노, 전화~”,
둘째 요시노가 “치카~”,
셋째 치카가 힐끗 막내 스즈를 본다. 아니다 싶었는지 전화를 받으러 뛰어간다.
할머니 기일에 딸인 엄마가 제일 늦게 온다.
“정원관리도 힘든데...”
제사가 끝나자 재혼한 엄마가 한번 찔러본다.
“엄마가 무슨 자격으로!”
집을 팔자는 소리에 열 받은 맏이가 한소리 한다.
“우리 언니, 일찍 가길 잘했네. 이 꼴 저 꼴 안 보고.”
지켜보던 이모할머니도 소란에 동참한다. 어디나 똑같다. 사는 모양은. 지금은 작고한 고레에다 패밀리- 키키 키린이 이모할머니 역을 맡았다.
아주 사소한 첫 번째 갈등은 금방 화해가 이루어져 없던 일이 된다.
“이모할머니에게 혼났어. 그 집은 너희들 거라고.”
맏이는 돌아가는 엄마에게 예전에 할머니가 담가둔 매실주를 선물한다. 사소한 소란에 스즈는 공연히 눈치를 본다. 막내의 술주정을 기억하고 있는 언니들이 다독여준다.
“누구의 잘못도 아냐.”
맏이의 안색이 어둡다. 미국으로 떠나게 된 남자가 함께 가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갈등이다. 역시 아주 사소한.
뜬금없이 배를 사들고 귀가한 언니를 보며 둘째가 말한다.
“분명 남자 문제야. 예전 실연당했을 땐 사과를 사 왔잖아.”
남자보는 눈은 없어도 언니의 연애에 대한 촉은 날카롭다.
“나와 치카만으로도 스즈를 보살필 수 있어.”
에둘러 말하고 있지만 그 정도 했으면 충분했다고 이젠 떠나도 된다는 의사표현이다. 하지만 맏이는 남자를 포기하고 동생들을 선택한다.
“스즈는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어린 시절을 잃어버렸어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천천히 되찾아. 잃어버렸던 것들.”
남자는 여자를 응원해주며 발길을 돌린다.
다시 평범한 일상이 된다.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져봐야 돌이 가라앉고 파문 몇 개 밀려나면 그만인 것처럼. 스즈에게 신발을 골라주는 셋째 언니, 발가락에 매니큐어를 발라주는 둘째 언니, 마지막으로 스즈의 키를 재주는 맏언니. 그렇게 4자매는 자연스레 서로에게 녹아든다. 소금인형처럼.
스즈에게 풋사랑이 찾아왔다. 이제 막 수염이 굵어지려는 촌뜨기와 함께 등교를 하고 공을 차고... 그렇지만 데이트는 역시 꽃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해야 제맛이다. 스즈의 클로즈업이 유난히 길다. 고레에다 감독은 스즈가 적잖이 안쓰러운 모양이다.
(다른 영화들도 그렇겠지만) 고레에다 감독 영화에도 ‘갑자기’가 가끔 등장한다. 식당을 운영하며 4자매를 살갑게 챙겨주던 이웃집 내외에게도 ‘갑자기’가 찾아온다. 연락이 끊겼던 아줌마의 동생이 나타나 자기 몫의 유산을 내놓으라고 한다. 모름지기 화禍는 불단행不單行. 식당이라도 팔아야하나 고민하던 차에 선우은숙을 닮은 해묘식당 아줌마가 몹쓸 병까지 얻는다.
맏이가 할머니가 입던 유카타(전통 옷)를 스즈에게 입혀준다. 불꽃놀이 때 입는 옷이다. 외국인이 한복을 보며 느끼는 감정이 이런 것일까. 신비감 같기도 하고 이질감 같기도 하고... 아무튼 묘한 느낌이 든다. 장례의식이나 방안의 신주, 고옥&거리도 마찬가지다. 아! 이런 게 일본적인 것이구나. 확 체감이 된다.
불꽃놀이와 연애질을 마친 스즈가 귀가했다. 언니들도 모두 유카타 차림이다. 4자매가 마당에서 그녀들만의 불꽃놀이를 한다. 유카타는 재질이 뭐지? 담배-빵 안 나나?
맏이가 스즈를 산언덕으로 데려간다. 어릴 적 아버지와 가끔 올라왔던 곳이다.
맏이가, “아버지는 바보~”
스즈가, “엄마도 바보~”
“엄마에 대해 얘기해도 돼. 여기가 네 집이야.” 맏이가 스즈를 안아준다.
“응, 여기 있고 싶어.” 막내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해묘식강이 문을 닫았다. 미노미야 아줌마는 결국 숨을 거뒀다. 남편 아저씨는 좋은 인생 살다 갔다며, 죽음 앞에서도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느낄 수 있는 삶에 감사했다며... 오히려 자매들을 위로해준다. 자상했던 남편 후쿠다 역은 고레에다 패밀리의 또 다른 1인- 릴리 프랭키가 맡았다.
조문을 마친 자매들이 바닷가에 들렀다. 언니들이 파도와 희롱하는 스즈를 보며 소곤거린다. 원망스러운 아버지였지만, 막내 같은 딸을 남겼으니 다정한 분이었을 거라고.
“언니들 무슨 말 했어?”
“글쎄...”
감독으로서의 고레에다는 착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엔 악당이 없다. 악당이 없으니 히어로도 없다.
뜨악한 사건이나 갈등도 거의 없다. 뜨악한 것이 없으니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 않고 당황스러운 반전도 없다.
그럼에도 극장을 나오는 관객들이 불평을 않는 것은 오래 기억에 남을 수묵화 한 폭을 접한 느낌 때문일지도 모른다.
첫댓글 여자매들이라 가능한 스토리일지도. .
(아. .키키 할머니 돌아가셨군요.😥)
저도 좋아하는 감독이에요. 이 분 영화는 출연진들이 항상 다들 참 선해요. . 그래서 맘 편하게 볼 수 있는. .
저 영화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죠.
저 집 근처에서 독신주의자에 겉으로만 냉정한 남자사람 이웃으로 살면서
잡일을 도와주거나 천둥 번개 칠 때 버팀목이 되어주면 좋겠다고.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