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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신앙 – 참회] 참회의 길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앞두고 40일 동안 광야에서 단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는 사순 시기를 단식하고 기도하며 보내고 있습니다.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이 경건한 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참회’입니다.
참회의 첫 번째 길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걸어온 길을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럽게 여겨라”(에제 36,32).
하느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걸어온 길을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이 참회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참회의 구체적인 길이 무엇인지 전하며 그 첫 번째 길은 ‘죄를 고백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대는 죄인입니까? 낙담하지 말고 참회를 앞당기기 위해 교회로 오십시오. 죄를 지었습니까? 그러면 하느님께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씀드리십시오. … 죄를 없애기 위해 죄를 인정하십시오. … 죄를 곰곰이 생각하고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참회에 관한 설교」, ‘둘째 설교’, 2,1).
참회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첫 사람이었던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은 뒤에도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자녀였던 카인도 죄를 짓고 나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반면 다윗은 죄를 지은 이후 하느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참회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크나큰 죄악에도 그의 후손 가운데에서 메시아가 탄생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성인이 전하는 참회의 두 번째 길은 ‘죄를 슬퍼하는 것’입니다.
“참회에 이르는 또 다른 길이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입니까? 죄를 슬퍼하는 길입니다. 죄를 지었습니까? 슬퍼하십시오. 그러면 죄가 지워집니다”(‘둘째 설교’, 3,10).
지은 죄에 대해 슬퍼하는 것 또한 참회입니다. 죄를 짓고서도 슬퍼하지 않을 때 우리는 같은 죄를 쉽게 반복합니다. 죄를 지었을 때는 곧바로 죄를 지은 자신의 나약함에 슬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를 찾고 온 마음을 다해 주님께 용서와 자비를 청하게 됩니다.
겸손, 자선 그리고 기도
참회의 세 번째 길은 ‘겸손’입니다. 성인은 성경의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이야기를 들어 이렇게 말합니다.
“바리사이는 의로움을 송두리째 잃고 성전에서 내려왔지만, 세리는 의로움을 얻어 내려왔습니다. … 바리사이는 자신의 의로운 행동을 온전히 망가뜨렸고, 세리는 겸손한 말로 의로움을 얻었습니다. 사실, 바리사이의 말은 겸손이 아니었습니다. 겸손은 훌륭한 사람이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리의 말도 겸손은 아니었으나, 진실이었습니다. 그는 죄인이었습니다”(‘둘째 설교’, 4,25).
참회를 통하여 자신이 비천한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참회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가 하느님께 바친 기도를 보면 온통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자랑밖에 없습니다. 그와 반대로 세리는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죄인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하느님의 자비만을 간절히 청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회하는 세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성인이 권고하는 참회의 네 번째 길은 ‘자선’입니다.
“자선은 위대한 것입니다. … 성경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너의 기도와 너의 자선이 하느님 앞으로 올라가 좋게 기억되고 있다’(사도 10,4). 여기서 ‘하느님 앞’이란, 여러분이 온갖 죄를 지었다 해도 자선을 변호인으로 두고 있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 자선은 죄로 지은 빚을 갚습니다. …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주님께서 몸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니고 있든지 간에, 여러분이 행하는 자선은 그 죄를 모두 없애 줍니다”(‘셋째 설교’, 1,6).자신의 비천함을 참으로 깨달은 사람은 자신보다 더 비천한 사람에게 눈길을 돌리기 마련입니다. 성인은 자선이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를 없애 준다고 말합니다. 자선을 행하는 대상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도와 드림으로써 우리가 주님께 지은 죄를 갚아 드리는 것입니다.
성인은 자선의 또 다른 길로 ‘기도’가 있음을 알립니다.
“하루의 모든 순간에 기도하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청하는 일에서 용기를 잃거나 게을러지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굳건히 버티면,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서 돌아서지 않으시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며 여러분의 청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시면 계속 기도하며 감사를 드리십시오.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응답받을 수 있도록 계속 기도하십시오”(‘셋째 설교’, 4,15).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뉘우치며 자신의 비천함을 깊이 깨달은 사람은 하느님께 끊임없이 기도드리게 됩니다. 기도가 아니면 또다시 죄의 구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영혼 안에는 참회가 없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야말로 참회의 외적인 표지가 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
지상에서만 힘을 지니는 참회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사순 시기를 보내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태하고 거만한 사람은 자기 영혼을 위해서 대단한 일을 하지도 않고, 참회를 위한 분명한 기간이 길게 주어져도 게을러서 하느님과 화해하지도 않습니다. 반면에 활동적이고 열성적인 사람은 큰 열정으로 자신의 참회를 드러내며 오랜 기간에 걸친 잘못들을 한 번의 결정적인 순간에 지워버릴 수 있습니다”(‘다섯째 설교’, 2,5).
성인의 말대로 지금 우리에게는 참회를 위한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과 화해하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나태하고 거만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사순 시기에 큰 열정으로 자신의 참회를 드러내어 오랜 기간에 걸친 자신의 잘못을 한 번의 결정적인 순간에 지워버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참으로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인은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죽음이 갑자기 닥치면 참회라는 치료법은 아무런 효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참회는 지상에서만 힘을 지닙니다. 저승에서는 힘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주님을 찾읍시다. 훗날 지옥의 끝없는 벌에서 구원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하늘 나라에 합당할 수 있도록 선한 일을 합시다”(‘아홉째 설교’, 7).
[교부들의 신앙 - 성체성사] 세족례로 완성되는 최후의 만찬
공관 복음(마태오, 마르코, 루카)은 예수님의 출생과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 배경은 ‘땅’입니다. 반면에 요한 복음의 시작 배경은 ‘하늘’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 그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14).
최후의 만찬 장면도 공관 복음과 요한 복음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공관 복음에서는 최후의 만찬만 언급한 반면, 요한 복음에서는 “식탁에서 일어나시어”(요한 13,4)라고 짧게 언급하고, 예수님의 ‘발 씻김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이어갑니다. 그렇지만 요한이 최후의 만찬 내용을 모를 리 없습니다. 요한은 제자들과 함께하신 ‘식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허리를 굽히시어 무릎을 꿇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모습’에 주목한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당신의 자리는 바로 그렇게 낮은 곳이었습니다. 저 높은 ‘하늘’에서 시작한 요한 복음은 이제 가장 낮은 곳, ‘제자들의 발아래’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가장 높은 곳으로 오르실 준비를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
요한 복음이 증언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 만찬 성목요일 전례에서 기념하는 두 가지 큰 사건, 곧 ‘최후의 만찬’과 ‘세족례’는 별개의 것이 아닌, 따로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하나라는 점입니다. 최후의 만찬은 세족례를 통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신 최후의 만찬은 ‘성체성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당신의 허리를 굽히시고 무릎을 꿇으시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세족례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섬김’을 의미합니다. 성체성사는 겸손과 섬김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기에, 최후의 만찬과 세족례는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은 우리가 겸손해지도록 가르치시려는 뜻입니다. … 그리고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 주신 일만 아니라 다른 것으로도 겸손을 보여 주시는 것을 눈여겨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일어나신 것은 기대어 앉기 전이 아니라 그들이 모두 앉은 뒤였습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그냥 씻어 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겉옷을 벗고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몸소 수건을 두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않으시고, 몸소 대야에 물을 부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시켜 부은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이 모든 일을 몸소 하심으로써, 어떤 좋은 일을 할 때면 겉으로 보이는 행동만 할 게 아니라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보여 주셨습니다.”(「요한 복음 강해」, 70,2).
오늘날에도 재현되는 예수님의 삶
둘이 아니라 하나인 최후의 만찬과 세족례는 2000년 전 단 한 번 행해진 뒤에 끝나 버린 유일무이한 사건이 아닙니다. 두 사건은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재현되어 왔습니다. 최후의 만찬은 성체성사를 통해 오늘도 재현됩니다. 그렇다면 세족례는 어떤 형태로 계승되었고, 우리는 어떻게 이를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프랑수와 바리용 신부는 아직 축성되지 않은 제병을 두고 이렇게 묵상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빵을 돌멩이 보시듯 보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빵에는 인간의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빵을 손에 들기까지 씨 뿌린 사람, 밭을 간 사람의 노동이 필요했고 농기구를 만든 사람, 농약을 만든 사람들의 노력, 또한 밀을 수확한 사람들과 제빵업자들, 그들 모두의 수고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밀’을, ‘밀’이라는 ‘자연’을 ‘인간의 것’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 많은 이의 땀과 희생을 통해 얻어진 이 빵이 제대 위로 옮겨지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으로 만드십니다. ‘인간의 것’을 ‘하느님의 것’(그리스도의 것)으로 변화시키십니다”(「믿는 기쁨 사는 기쁨 4 –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기쁨」, 생활성서사).
인간의 희생이 쌓이고 쌓인 이 빵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희생을 통하여 당신의 몸인 성체로 변화시키십니다. 나아가 성체성사 안에서 당신의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를 ‘당신의 것’으로 변화시키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것을 주시려고 기꺼이 당신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세족례로 완성되는 성체성사
그렇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희생’이라는 나무에서 열린 열매를 얻으려면 우리도 희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따라서 성체를 거룩하게 받아 모시지만 겸손해지지 못하고 이웃을 섬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성사가 될 뿐입니다.
누군가의 발을 씻겨 주려면 발 아래에 자리해야 합니다. 그 가장 낮은 곳에 예수님께서 당신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반역자요 신성 모독자, 유다처럼 구제할 길 없는 자까지 발을 씻어 주시고 당신 식탁에 앉게 하셨습니다”(「요한 복음 강해」, 71,1).
그리고 그 자리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성인은 그런 예수님에 대해 말합니다.
“당신 스스로 먼저 본보기가 되심으로써 우리를 작은 빚을 진 채무자로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분께서 먼저 이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요한 복음 강해」, 71,1).
성체성사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중요한 성사입니다. 하지만 세족례의 정신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성체성사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
성목요일 전례가 끝나면, 감실이 비워지고 수난 감실로 성체를 모셔 갑니다. 그리고 파스카 성야까지 성체 조배가 이어집니다. 하지만 수난 감실 앞에서 예수님의 고통을 감상적으로 묵상하는 것으로 성체 조배를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과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얻은 ‘성체라는 열매’를 합당하게 받아 모시고자 나 자신이 얼마나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희생했는지 가슴을 치고 성찰해야 합니다.
제대 앞에서 세족례가 거행되는 순간,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가 상처를 주고 미워했던 이들의 발을 씻어 주는 ‘마음의 세족례’를 거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겸손과 섬김’을 통해 성체를 합당하게 받아 모실 수 있도록 늘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성모 성월 특별기고] 교부들과 성모 마리아 - 교부 시대 초기부터 에페소공의회까지 사상 중심으로
참 하느님이자 참 인간 그리스도 낳으신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Θεοτοκοs)
5월은 성모 성월이다. 교회는 성모 성월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모범인 성모 마리아를 기억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전구할 수 있도록 기도할 것을 권하고 있다. 본지는 성모 성월을 보내며 성모 신심과 관련 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 특집을 마련했다. 대구대교구 김준년 신부의 특별기고를 통해 교부들과 성모 마리아에 대해 알아본다.
성모 성월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어머니이시고 우리의 어머니이시며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에 대해, 가톨릭신문 독자들과 함께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참으로 크다고 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하고 궁금해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성모 신심과 교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전수 받은 교부들이 오래전부터 주장한 결과이며, 그것들을 오늘날까지 실천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부들은 하느님의 명령을 실천에 옮긴 첫 사람들이었습니다. 초기 6~7세기까지 그들이 활동한 시기는 신약의 계시가 발생한 역사적 시기에 가까웠습니다. 그 시대에 활동했던 교부들이 오늘날 우리 교회가 인정하고 있는 교의의 토대를 놓았습니다.
교부들은 일찍부터 성모 마리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러한 관심은 항상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육화와 관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육화는 하느님의 인간 되심을 말합니다.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육화 없이 인간 구원이 불가한 만큼 그 육화를 거스르는 모든 이단과 맞서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분의 육화를 수호하기 위해 반드시 따라오는 것은 바로 그분 어머니의 출산이었습니다. 마리아라는 한 여인이 낳으신 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분을 출산했고, 그리스도는 그의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실제로 육을 취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말하기 위해 그분 어머니의 출산에 대한 논쟁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많은 이단들이 나타났는데, 그 이단들은 한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고, 다른 한때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들 이단을 거슬러 정통교리를 수호했습니다. 교회가 성모 마리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설명하기 위해 그 어머니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론은 항상 그리스도 중심적입니다.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마리아의 동정 출산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참으로 인간이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인간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참으로 육을 취하셔야 했으며, 그리스도가 참으로 하느님이심을 이야기하기 위해 마리아의 동정 출산과 성부로부터의 탄생(물론 피조물의 창조는 아닙니다)을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그 어머니를 만나게 되고 그 어머니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마리아에 대한 과도한 신심, 빗나간 신심을 경계하면서 올바른 신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이제 교회 전통의 초기에 ‘사도 교부들’이라고 부르는 저술가들을 만나봅시다. 그들 중에는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이냐시오),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 로마의 클레멘스,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 헤르마스 등이 있습니다. 조금은 지루하게 몇 분을 열거한 이유는 그들이 모두 성모 마리아의 탁월한 변호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1세기 말쯤, 초기 교부 문헌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에 관한 드문 언급 중 하나인, 우리가 잘 아는 이그나티우스(이냐시오)의 주장을 살펴봅시다. 그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신앙고백을 합니다.
우리 주님은 진정 육에 따라 다윗의 혈통에 속한다.
하느님의 의지와 권능에 따라 하느님의 아들이다.
그는 진정 동정녀로부터 탄생하셨다.
(스미르나인들에게 보낸 편지 1,1)
그리고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스티노(100년에서 110년 탄생)는 평신도이면서 신학자다운 면모를 보입니다. 유다인 트리폰과의 대화에서 유스티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동정녀를 통하여 사람이 되셨는데, 이는 그 뱀에게서 비롯한 불순명이 시작된 바로 그 동일한 길을 거쳐서 불순명을 없애시려는 것이다.”
이어서 3세기에 주로 활동한 오리게네스(253년 선종)의 주장을 살펴봅시다.
“그는 ‘요한복음 주해’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이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 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믿지만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믿지 않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동일한 인간을 믿기도 하고 믿지 않기도 한다.”
그 후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들이 등장합니다. 바실리우스는 예언자들이 예고한 임마누엘의 어머니를 거룩한 동정녀라고 봅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94년경 선종)는 정통교리의 준거로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라는 칭호를 제안합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390년 선종)는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라는 마리아 칭호를 받아들이는 것은 올바른 신앙 안에 머물기 위한 불가피한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교회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 중에서 으뜸에 서 있는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430년 선종)의 마리아 사상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잉태할 때에도 동정녀, 출산할 때에도 동정녀, 임신 중에도 동정녀, 동정녀 어머니, 평생 동정이십니다. 오, 인간이여, 왜 그대는 그것을 놀라워합니까?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기에 합당할 때 그러한 방식으로 태어나셔야만 했습니다. 그녀로부터 만들어진 그분께서 그녀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또 하느님의 어머니 교의를 반포한 에페소공의회(431년)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두 인물, 콘스탄티노플의 프로클루스(446년 선종)와 키릴루스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프로클루스는 그의 설교에서 하느님의 어머니의 동정을 이렇게 찬미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시여, 동정녀이시며 어머니시여, 빛의 운반자이시며 오염되지 않는 그릇이신 마리아여, 하례하나이다. 오, 동정 마리아여! 어머니이시며 여종이시여, 하례하나이다.”
육화 교의의 순수성을 위협했던 네스토리우스를 거슬러,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키릴루스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냅니다.
“거룩한 교부들은 거룩한 동정녀를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라고 부르기를 의심하지 않는다. 이는 말씀의 신적인 본성이 그녀로부터 기원을 가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그녀로부터 이성적 영혼이 부여된 거룩한 육신을 받았다는 의미이다.(중략)”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친 후, 에페소공의회에서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장엄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431년 6월 22일 저녁에 에페소의 신자 무리가 열광했는데, 그들도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는 찬미받으소서!” 그리고 “키릴루스 만세!”라고 외치면서 주교들의 숙소까지 동행하며 환영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령과 우리(교회)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성령”
성부(聖父)는 창조주(Creator) 하느님으로서 우주와 인류 역사를 주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성자(聖子)는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이시며, 세상에 파견되어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세주(Kyrios)이시고, 강생(Incarnatio)의 신비로 역사 안에 개입하시어 인간과 함께하시는(Emmanuel) 하느님이십니다.
성령(聖靈)은 인간 안에 내재하시는 하느님이시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이 인간과 역사 안에 완성되도록 일하십니다. 즉, 성령은 인간이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생명에 참여하도록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성령은 인간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적 생명의 온갖 풍요로움에 참여하도록 이끄시는 인간의 성화(聖化)와 신화(神化)의 주역이십니다.
1. 성령은 하느님의 내재(內在, immanens)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 그 물 위에 하느님의 영이 떠돌고 있었다.”(창세 1,1-2).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신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모든 피조물과 창조의 친교 안에 내재(immanens)하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피조물들 안에 현존하시며 그들을 생기있게 하시고 당신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요한 바오로 2세 ‘생명을 주시는 주님’ 10-12 참조).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1코린 3,16-17)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께서는 내 가장 깊은 속보다도 더 속에 계시는 분”이라고 말하였습니다(고백록 Ⅲ, 6, 11 참조).
2. 성령은 하느님의 케노시스(자기 비움)
성경에서 보면, 성령에 대한 ‘계시’는 성부, 성자의 위격과 다르게 주체적이거나 명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사람들은 성령의 비움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성령은 한편으로 하느님과 그리스도 곁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름 받은 사람들 곁에서 온전히 관계적으로 존재하기 위하여, 자신의 고유한 인격을 스스로 비우셨다는 것입니다(이브 꽁가르, ‘나는 성령을 믿나이다(Je crois en l’Esprit)’(I), 백운철 역, 가톨릭출판사, 2004. p.10).
성령의 위격의 특징 ‘케노시스’를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에서 묵상해 봅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인간을 무(無)에서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아무런 부족함이라곤 없는, 내적 생명의 풍요로움을 지니신 분인데, 당신의 선하심 안에서 스스로 자신을 무(無)로 비우시고 낮추시는 자기 제한(自己 制限)을 통해 당신의 풍요로움을 밖으로 분출(processio)하시기에 세상과 인간이 창조되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을 무(無)로 돌리시는 가난 안에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십니다.
3. 성령은 숨어서 일하시는 하느님
교부 이레네오 성인은 “성자와 성령은 인간을 빚어내시는 성부의 두 손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동양적인 관점에서 이 세상은 ‘스스로 이루어진 것’[自然]임에 비해, 신앙인의 세계관은 세상과 대자연을 하느님의 창조 안에서 바라봅니다. 그러기에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은 사랑을 얻기 위한 명상에서 “어떻게 하느님께서 나를 위하여 땅 위의 모든 피조물 안에 일하시고 수고하시는지 생각할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무생물, 생물, 식물, 곡물, 가축 따위의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성장케 하시고, 감각케 하심으로써 마치 일꾼처럼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지를 생각하고나 자신에게 반영해 볼 것이다.”(‘영신수련’ 236)라고 권고합니다.
‘성령’에게 드리는 칭호와 상징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 ‘하느님의 손가락’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창조 위업 안에서 성령의 역할을 잘 보여줍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3-1. 성령의 일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성령의 위격의 특징 중 하나는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의 궁극적인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므로, 예수님과 성령의 관계를 중심으로 묵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을 준비하셨다.’는 주제는 ‘성탄 이야기’를 전하는 복음서의 말씀들과 일치합니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마태 1,18) 요셉의 꿈에 나타난 천사도 이를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1)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는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의 인성(natura humana) 안에 깃든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성(natura divina)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희로애락을 느꼈으며,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 안에 깃들어 있는 신적 생명, 곧 신성(神性)에 대한 지각과 의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온전히 충만한 신성(神性)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콜로 2,9-10)
예수님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 중 한 분이면서 가장 완전한 ‘하느님의 모상’(2코린 4,4)이십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란 예수님께서 당신이 누구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졌는지, 당신이 어떻게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자각과 분명한 자의식이 있음을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3-2.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자기 정체성의 확인
이러한 예수님의 자의식은 세례 때에 확인됩니다(마르 1,9-11; 마태 3,13-17; 루카 3,21-22 참조).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9-11)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다의 문화와 전통을 넘어 하느님 안에서 찾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외아들로서의 정체성을 세례 때에 확인하고 체험하셨는데, 이는 성령 안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를 아버지(聖父)와 아들(聖子)의 애틋하고 친밀한 혈육(血肉)의 정(情)으로 맺어주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일치의 끈이시며, 두 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는 예수님께서 매일 바치시는 기도에서 지속되고 성장하였습니다(마르 1,35; 요한 17 참조).
예수님에게 성부 하느님은 ‘아빠, 아버지’이십니다(루카 22,42; 마태 26,39; 마르 14,36 참조). 이는 예수님께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이 세상에 파견된 자로서 자신의 사명(mission)을 의식하고 계셨음을 말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이자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사제 직무를 수행하며, 우리 봉사직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자문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모습을 갖추실 때까지 나는 다시 산고를 겪고 있습니다.”(갈라 4,19) 성령께서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선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이끌어 주시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로마 8,14-16)
“그러나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갈라 4,4-7)
4. 성령과 우리(교회)
성령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혼(얼)이며 숨결이고, 호흡이며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을 이룩하셨고 당신의 구원 사업을 제자 공동체인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교회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의 몸이며 신비체입니다(1코린 12,27-31 참조). 그리고 교회의 정신과 혼(얼)은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1-23)
‘숨어서 일하시는 하느님’이신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비체인 교회 안에 살아 계시며, 그 구성원인 신자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구원 사업을 이 세상과 역사 안에서 계속하십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협력하기 위해 우리에게 요청되는 점들을 정리해 봅시다.
1) 소공동체에서 신자들이 함께 기도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나누며, 전례를 거행하고, 가진 것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에 성령께서 함께 일하십니다. 재화(財貨)를 형제적으로 함께 나누는 초대 교회 신자들의 공동체 생활은 성령께서 함께 계셨기에 가능했습니다(사도 2,42-47; 4,32-37).
2) 하느님 백성의 신앙 감각(sensus fidei)과 은사(charisma) :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은 또한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도 참여한다. (…) 성령께 도유를 받은 신자 전체는(1요한 2,20.27 참조) 믿음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으며, ‘주교로부터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신앙과 도덕 문제에 관하여 보편적인 동의를 보일 때에, 온 백성의 초자연적인 신앙 감각의 중개로 이 고유한 특성을 드러낸다. 실제로 진리의 성령께서 일깨워 주시고 지탱하여 주시는 저 신앙 감각으로 하느님의 백성은 거룩한 교도권의 인도를 받는다.”(교회 헌장, 12)
3)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주님’ : 우리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 성령을 ‘생명을 주시는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성령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살아 계신 주님의 생명이십니다. 오늘날 특히 죽음의 문화가 기승을 부리는 한국 사회에서 생명 존중과 보호, 생명의 복음을 위해 일하면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