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7월 27일. 이라크의 T-62 탱크 수백대가 이라크-쿠웨이트 국경에 집합했다.
미국은 관망했다. 당시 까지만해도 이라크의 호언장담은 있었지만, 이라크가 미국과 영국등의 도움을 받는 쿠웨이트를 침공할 것이라는 예상은 거의 없었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이라크의 행동이 단순한 위세로 끝날 것이다." 라는 발표까지 했다.
"미국은 일만명의 군사를 잃는것 조차 두려워 하는 나라다."
-사담 후세인. 1990년 7월 31일
마침내 1990년 8월 1일. 이라크의 T-62 탱크 수백대가 국경을 돌파했다. 하필이면 쿠웨이트가 자신들의 돈으로 건설한 이라크-쿠웨이트 우정 고속도로를 따라서 탱크들은 3시간만에 쿠웨이트의 중심부에 도달했다.
발발 한시간 만에 수 많은 항공기들이 쿠웨이트를 향해 비행했다. 당시 미국인들이 운영하던 Hwak 발사대는 일순간에 미사일을 발사, 한시간도 안되는 시간에 23대의 이라크 항공기(당시에는 MiG-23 같은 고급기체도 있었다.)을 격추시켰다. 하지만 미사일의 수가 떨어지자 이 미사일 발사대는 모두 제압당했다.
전쟁 발발직후 쿠웨이트 공군에서는 소수의 A-4KU 전투기와 Mirage F-1 전투기를 발진시켰다. 이들은 총 16대의 헬리콥터를 격추시켰다. Mirage F-1 기체는 출격한 기체 6대중 모두가 2대씩 격추시켰고 한대는 3대를 격추시켰다. 하지만 쿠웨이트공군의 출격 기체들은 연료와 무장이 떨어졌고 모두 사우디 아라비아로 대피했다.
1990년 8월 1일 11시 45분에 시작한 쿠웨이트 점령 작전은 다음날 1990년 8월 2일 12시에 이라크 공보국이 공식적으로 쿠웨이트 점령과 자신들의 26번째 공구로 편입?榮募? 보도를 내보냈다. 그렇게 순식간에 쿠웨이트는 점령당한 것이다.
전 세계는 경악했다. 후세인은 허세를 부리기 좋아했고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허세가 아니였다. 세계 원유 생산에 10%를 차지하던 쿠웨이트가 그렇게 무너진 것이다.
순식간에 베럴당 25달러 선에서 고정되다 시피했던 원유가는 30달러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무러 39달러까지 진입했다.
연합군에 행보가 빨라졌다. 미국은 초강경대책을 사용할 것을 암시했다.
8월 24일. 16대의 F-15C가 랭글리 기지를 이륙, 16시간의 긴 비행에 돌입했다. 8번의 공중급유 끝에 그들은 사우디의 다란 공군기지에 착륙할수 있었다.
당시 F-15 전투기들은 모두 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비행할때 이라크가 사우디 아라비아를 공격할지 모른다는 판단에서 였다. 8발의 공대공미사일을 무장한 F-15C는 긴 비행을 접고 대기 상태에 돌입했다.
F-15C
당시 사우디에는 미 공군의 A-10이 두 달간 사용할수 있는 무장이 보관중이였다. 30mm 기관포는 물론 클러스터 폭탄, 레이져 유도폭탄, 메버릭 공대지 미사일까지 모두 대기중이였다.
이번 전쟁을 맡아야만 했던 중부사령부는 1980년대 세워진 신생 사령부였다. 그들은 경험이 부족했지만 타 사령부의 지원을 받아서 전쟁 계획을 수립했다. 다방면의 전쟁 방향을 예측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들의 전쟁 계획은 상당한 차질을 빚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쟁의 예측이 어떻게 되는 것이냐였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은 토네이도 전투기 8대를 지원했다. 영국 외무장관은 토네이도 전투기를 '600마일로 날아가는 전투함'이라 불렀는데, 공군은 이렇게 일주일도 안되서 전쟁에 대비할수 있었다.
국제 공조도 훌륭했다.
UN은 '이라크가 쿠웨이트에서 철수해야 한다.' 와 '이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군사력을 사용해도 좋다.' 라는 합의문을 이끌어냈고, 프랑스도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아랍국가들중 사우디 아라비아를 필두로 바레인, UAE, 카타르가 참전을 결정했다. UN 창설이후의 두번째의 본격적인 다국적군이였다.
참전 국가 (공군 전술기)
미국
케나다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영국
UAE
프랑스
이탈리아
카타르
원본 출처 : Aircrft
편집 : 101공수사단506연대이지중대
첫댓글 걸프전은 미국의 신무기 시험장이었습니다. 덕분에 미국의 방산업체들은 호황을 누렸지요.
신무기 시험장 뿐만 아니라 재고를 완전히 처리 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