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벽당(環碧堂)
광주호 상류인 창계천의 충효동쪽 언덕 위에 서있는 환벽당은 1500중반에 벼슬길에 나섰다가 은퇴한 김윤제(金允悌,1501-1572)가 노장사상(老莊思想)에 귀의하여 고향의 명승지에 정자를 짓고 은둔과 무위자연의 도를 즐기며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환벽당은 정면3칸, 측면2칸, 팔작지붕의 목조와가(木造瓦家)이며, 가운데 2칸을 방으로 하여 앞쪽과 오른쪽을 마루로 깐 변형된 형식이며 원래는 전통적 누정(樓亭)형식이었으나 후대에 증축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바뀐 것으로 추증된다.
증암천(甑巖川)이 광 주호로 흘러드는 곳 에 놓인 충효교를 지나 좌측길로 200 여m가면 긴 흙담으 로 쌓인 야트막한 동산 위의 고즈넉한 환벽당은 광주와 담 양을 경계로 흐르는 자미탄을 사이에 두 고 무등산에서 북성 산에 이르기까지 산 들의 경관을 보여주 는 선경에 자리해있 다. 창계천 동북쪽으 로 250m쯤 떨어진 곳에는 식영정(息影亭)이, 환벽당 곁의 마을과 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취가정(醉歌亭)이 있다. 인근에는 독수정(獨守亭)과 소쇄원(瀟灑園)까지 자리 잡고 있어 바로 이 일대가 조선시대 원림문화(苑林文化)의 중심지역을 이루었다.
환벽(環碧)은 푸르름이 고리를 둘렀다는 의미이니, ‘푸르름으로 에워싸인 집’이란 말인 환벽당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의 일부처럼 보이는 별서원림(別墅園林)으로서 호남의 대표적인 누정(樓亭)문화를 보여준다. 송순은 식영정과 환벽당을 형제라 하며 소쇄원과 더불어 ‘한 마을의 세 명승(一洞之三勝)이라 칭송했다. 참고로 환벽당은 배롱나무 꽃이 활짝 핀 8월에 가야 그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축대 아래로 내려앉은 마당에는 아직 피지 않은 상사화가 애잔하고 자그마한 연못도 고풍스럽다. 소나무와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있는 비탈진 곳에 축대를 쌓고 지은 정자인 환벽당의 온돌방은 문을 걷어 올려 천정에 매달게 하였고 방 앞으로는 측면 반 칸을 앞마루를 깔아 대청과 연결하였으며, 환벽당은 원래는 벽이 없는 정각(亭閣)형태였다는 후대에 중건할 때 지금 모습으로 바뀌었다한다.
본관이 광산(光山)이며 호는 사촌(沙村)인 김윤제는 1501년 충효동 돌밑마을에서 태어나, 1528년 진사가 되고, 1532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교리겸춘추관(承文校理兼春秋官)으로 벼슬길에 나아간 뒤 홍문관교리(弘文官校理), 나주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을사사화로 관직에 염증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환벽당을 짓고 당대최고석학들인 송순, 임억령, 양산보, 김인후, 기대승 등과 교류하며 고향인 충효리를 풍류문화의 극치를 이룬 조선시대 사림문화중심지로 만들었다. 후학양성에도 매진한 사촌의 대표적 제자로는 송강 정철(鄭徹,1536~1593)과 서하당 김성원(金成遠)등이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金德齡),김덕보(金德普)형제는 그의 종손(從孫)이다.
환벽당 아래를 흐르는 창계천 동북쪽으로 250m쯤 떨어진 곳에는 식영정(息影亭)이, 환벽당 곁의 마을과 밭이 내려다보이는 거의 동일한 거리의 좌측언덕에는 취가정(醉歌亭)이 있고, 인근에는 독수정(獨守亭)과 소쇄원(瀟灑園)까지 자리 잡고 있어 바로 이 일대가 조선시대 원림문화(苑林文化)의 중심지역을 이루었다. 무등산의 원효계곡과 절골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을 흘러 광주호로 진입하는 창계천을 옛날에는 자미탄으로 불렸다고 언급한 최초의 기록이 송순(宋純,1493~1582)의 면앙집(俛仰集)이니, 자미탄(紫薇灘)은 최소한 16세기이전부터 사용되었던 고유한 명칭이라 하겠다.
배롱나무가 자미탄을 따라 수많은 붉은 꽃을 피웠고, 자미탄 자갈밭을 흐르는 물소리가 환벽당과 자미탄 사이 언덕의 무성한 대숲 사이로 마치 옥이 구르는 소리처럼 들렸다한다. 정철이 멱을 감았다는 '용소(龍沼)'는 지금도 환벽당 아래에 창계천에 남아있지만, 담수호인 광주댐이 만들어지면서 물의 흐름을 막아 자갈밭을 흐르던 그 맑은 물소리는 사라져 버렸으나, 한여름 도시락 들고 양산으로 햇볕을 가린 청춘들의 쉼터 역할은 한다.
자미탄 건너에 식영정과 서하당이 자리하고 있어 서하당, 김성원과 사촌인 김윤제는 지금은 없어져 버렸지만, 자미탄 위에 무지개다리를 놓고 약 300m 거리를 수없이 오가며 친하게 교류하였다하며,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이 쓴 제액(題額)이 걸려있는 환벽당은 정철의 4대손 정수환(鄭守環)이 김윤제의 후손으로부터 매입하여 현재는 연일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역사문화적가치가 뛰어나 1972년 광주광역시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가 2013년 11월에 대한민국명승 제107호 광주 환벽당 일원으로 승격되었다.
싱그러운 소나무가 녹음을 이루는 숲을 배경으로 높다란 석축 위에 세워진 운치 가득한 정자왼쪽에 있는 온돌방벽에 기대어 고담준론을 즐겼을 옛 선인들이 모두 신선이 되어 이백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가? 예전에는 있었다는 환벽당 아래의 본채 자리의 넓은 잔디밭 한 귀퉁이를 차지한 네모난 연못가의 말라비틀어진 상사화는 한 여름 꽃 필 날을 기다리고 있다. 김윤제가 꿈에 정철을 만난 우측마루에 걸터앉아 나도 꿈이나 꿀까?
환벽당 아래의 집터, 우측에 작은 사각형연못에는 연꽃이 피었다
취가정(醉歌亭)
취가정은 임란 때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金德齡 1568-1596)을 기리려고 후손인 난실(蘭室) 김만식(金晩植) 등이 세운 정자였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1955년에 후손 김희준(金熙駿)이 다시 세운 것이다.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 정자의 이름인 취가정은, 정철의 제자였던 권필의 꿈에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취시가(醉詩歌)를 부르자, 권필이 이에 답시를 시어 원혼을 달랬다는 전설에 기인하며, 정자 기둥에는 송운회가 쓴 취가정 현판이 걸려있다.
주변 정자들 가운데 가장 늦게 야트막한 산 위에 누대처럼 지었는데 강변을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세워진 대부분의 정자들과 달리 넓게 펼쳐진 논과 밭들을 아래로 전망으로 펼쳐지는 언덕에 세워져 동네를 굽어보고 있다. 환벽당에서 약 200m에 위치한 정자인 취가정은 앞면3칸 규모이며, 가운데 온돌방과 주위에 마루를 두고 있는 형태이며 마을 사람들의 생활터전인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소쇄원, 환벽당과 식영정 등이 있는 증암천를 후경(後景)으로 한 입구에는 ‘충장공 김덕령장군 취시가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 취시가(醉時歌)는 김덕령이 권필의 꿈에 나타나 부른 시였다.
취할 때 부르는 노래여
이 곡조 듣는 사람 없네
나는 화월(花月)에 취함도 바라지 않고
나는 공훈을 세움도 바라지 않네
공훈을 세우는 것도 뜬 구름이요
화월에 취하는 것도 뜬 구름이네
취할 때 부르는 노래여
이 곡조 아는 사람 없네
내 마음은 장검(長劍)으로
명군(明君)께 보답만 하고 지고
이 시를 듣고 권필은 그의 억울한 죽음을 달래주기 위해 다음과 같은 화답시를 짓는다.
장군께서 예전에 칼을 잡으셨으나
장한 뜻이 중도에 꺾이니
이 또한 운명이로고
지하에 계신 영령의 한없는 원한이여
분명 이 노래는 취가시로다
이 시를 지은 석주(石州) 권필은 정철(鄭澈)의 제자로 19세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였으나 나중에 한 글자를 잘못 쓴 것이 밝혀져 합격이 취소되었다 하며, 임란 시에 김천일의 의병으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김덕령의 6촌 고종형인 송제민의 딸과 결혼하였고, 광해군4년에 국왕을 조롱한 시를 지었다는 죄목으로 고문후유증인 장독으로 죽었다.
취가정
조선의 서예명인들의 서체를 익혀 독특한 설주체를 완성한 설주 송운회(雪舟 宋運會;1874∼1965)는 정자 정면의 네 기둥에도 주련을 남겼다.
‘충관일월(忠貫日月) 충성을 해와 달을 꿰고’
‘기장산하(氣壯山河) 기개는 산과 강을 뒤덮었다’
‘취가어지(醉歌於地) 취한 채 땅에서 부른 노래’
‘성문우천(聲聞于天) 감동해 하늘도 들었구나’
본관이 광주(光州)인 김덕령은 정철, 김성원과 함께 김윤제로부터 학문을 배운 사람으로서 힘이 세고 지략도 풍부했다하며, 임란(壬亂)중이던 1593년(선조27년)에 모친 상중에 의병을 일으킨 공으로 선조로부터 형조좌랑 직함과 함께 충용장 군호를 받았고, 다음해 광해군의 분조(分朝)로 세워진 무군사에서 용맹을 떨쳐 익호장군 초승장군 군호를 받았으며 이후 의병장 곽재우와 함께 권율 막하에서 영남서부 지역의 방어를 맡았다.
임란이 끝나자 선조는 전쟁 중에 공을 세운 신하98명을 공신으로 포상하였는데 그 중 80명이 자신의 몽진을 도운 신하와 의주까지 호송한 환관이었으며 전쟁에서 싸운 무신은 18명에 불과 했다. 이런 차별에 불만을 품고 부여에서 일어난 것이 ‘이몽학’의 난이다. 이몽학의 난을 토벌하라는 명이 김덕령에게 떨어지자, 김덕령은 부대를 이끌고 부여로 향했다. 김덕령이 온다는 소문이 반란군에게 전해지자 이몽학 무리는 혼란에 빠져 반란은 쉽게 제압됐다.
반란군취조과정에서 ‘곽재우와 김덕령이 동조세력이라.’는 허위자백이 나와 선조의 친국을 받은 김덕령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으나,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살이 터지고 뼈가 부스러지는 고문 끝에 그는 마침내 29살의 나이로 옥중에서 사망하였으나, 1661년(현종2)에 김덕령은 신원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병조참의에 추중됐고, 1681년(숙종 7)에 병조판서로, 1788년에는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됐으며 부조특명(不祧特命; 국가에 공훈이 있는 인물의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서 지내게 하던 특전)으로 광주의 벽진서원에 제향됐으며 이듬해 의열사로 사액됐다. 1975년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에 충장사가 건립되었고 광주 중심상권의 길 이름이 충장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