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는 새로운 의병전쟁 준비의 근거지를 모색하다가 1910년에 잠시 머물렀던 장백현 왕개둔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다시 그곳으로 들어가기는 쉽지가 않았다. 권업회가 1914년에 독립운동기지로 설정하고 토지를 매입하고 한인을 집단 이주시켰던 곳이 있었다.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군사를 일으키려는 구상이었다. 북만 항카호 부근의 봉밀산으로 휘하 의병을 이끌고 들어가 둔전병식의 생활을 통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그곳 한인 이주민의 민족주의 교육과 경제력 신장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봉밀산의 백포자(白泡子) 한흥동을 중심으로 인근의 ‘십리와’와 ‘쾌상별’ 등지에서 고등소학교, 소학교 등의 교육기관 설립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휘하 의병을 근간으로 하는 둔전병식의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여 머지않아 펼쳐질 항일독립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홍범도는 봉밀산 부근으로 한인 이주가 이루어지는 1914년 무렵에 그곳으로 들어와 북간도로 이동할 때까지, 즉 1919년 3ㆍ1운동 직후까지 약 5년 정도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홍범도와 함께 이곳에서 활동하였던 정태는 자신의 회고담에 이 시기 봉밀산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약간 긴 내용이지만 귀중한 자료여서 소개한다. 1900년 조선이 일본제국주의에 강제 합병이 된 후 조선 애국자들은 탁족할 땅이 없게 되었다. 이런 형편에서 조선 애국자들은 외국에 나가서 토지를 사고 그에 이민을 시키고 청년들을 모집하여 교양함으로써 일본에 복수하려고 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런 경향하에서 중국 길림성 봉밀산을 탐구하여 내었다. 봉밀산은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에 있으며 앞에는 홍개호가 가로 놓여 있으며 북쪽은 청림(靑林)이 꽉 들어섰다. 교통은 소왕릉으로와 목릉현으로 가야 철도가 있다. 조선 애국자들 중에서 안창호의 주선으로 밀산 십리와에 토지 30여 팍지를 구매하고 토지의 주인으로는 김성모를 지적하였으며, 또한 이상설의 주선으로 밀산령감 백포자에 토지 12팍지를 구매하고 토지 주인으로는 김학만으로 지적하였다. 그리고 조선 평안도와 함경도와 노령 연해주에서 조선 빈민들을 이주하였다. 그러나 이주된 인민들은 토지를 개간할 힘도 약할 뿐만 아니라 흉년이 자주 들어 생명도 근근히 유지하여 왔다. 이때 조선 애국자들은 그를 후원할 금전도 없었다. 이러한 형편에 홍범도는 군인을 거느리고 봉밀산으로 들어왔다. 그리해서 홍범도는 군인들을 먹여살리기도 바쁜데 주민들의 생활에도 걱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홍범도는 군인들을 농촌 건설사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홍범도는 빈민 300여 호 조선사람들과 상종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몽매한 자와 불량자들도 있고 청년 아동들은 공부 못하고 허송세월하는 것이 그에게 불만을 더욱 일으켰다. 그리하여 지방에 있는 모모한 자들과 토의하였으나, 자기 군인 중에는 교육사업을 지도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는 딱한 일이 되었다.
이때 마침 이전 교원이며 나재거우(羅子溝) 사관학교 출신인 정태라는 자가 홍범도가 군인을 다리고 봉밀산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큰 희망을 품고 홍범도의 뒤를 따라 밀산으로 1916년에 들어갔다. 그러나 희망하던 바와는 딴판이었다. 홍범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태를 교육사업에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영남 백포자 한흥동에 소학교를 설립하고 또한 십리와와 태상별이에 소학교를 설립하였으며 홍범도는 한흥동 학교에 고장과 교감으로 책임을 맡았고 십리와의 쾌상별이 학교에는 찬성장(贊成長)으로 사업하였다. 홍범도는 학교 수리와 교구를 장만하는 데와 운동장을 닦는 데 손수 일을 하였다. 학생모집은 집집이 다니면서 자식들을 학교로 다니라고 권면하면서 우리나라가 망한 것도 인민이 문명하지 못한 탓이며 도로 찾는 것도 문명에 있으니 아동을 학교에 보내라고 하면서 끌어오곤 하였다. 홍범도는 박포자에 사는 의병대원의 집에 유숙하면서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서 제일 어린 학생을 업고 좀 큰 학생은 손목을 끌고 큰 학생들은 앞에 세우고 학교로 간다. 풍설(風雪)이 나는 때에는 학교에 와서 학과시간을 끝마추는 것을 기다려 학생들을 데리고 집으로 간다. 학생들은 홍범도를 친부모와 같이 여긴다. 홍범도는 매월 일요일이면 학교 운동장으로 지방 주민들이 스스로 모여 오도록 준비하여 놓는다. 학생들로 하여금 연속 유언체조, 유희 등과 행진법, 철봉과 집장고도 하는 것을 주민들에게 즐겁게 유쾌하게 구경시킨다. 오후에는 운동장에 연설회를 열고 미리 준비하였던 학생 4~5명을 연단에 올려 세운다. 학생들은 애처로운 말로 애국사상을 고취한다. 어떤 노인과 여자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홍범도는 청년들을 사랑한다. ‘우리 동무회’란 청년단체를 조직하고 청년들을 그에 입회시키고 야학(夜學)에와 운동에 의무적으로 참례하게 하였다.
홍범도는 운동하는 것을 매우 즐긴다. 그리하여 단오날에는 대운동회를 소집한다. 1917년 단오에는 조선인 청년 대운동회를 십리와에 소집하였는데, 여기서는 지방 중국 육군도 참가하였다. 운동과목을 필한 후 조선 씨름판을 열었는데 마지막 판가리에 힘 장사요 평양감옥을 부수고 도망친 유상돈과 정벽이 마주섰다. 둘이 서로 승부를 결단하지 못하고 군중의 외치는 소리에 중단하였다. 1918년 단오일에는 쾌상별이에서 조선청년 대운동회를 소집하였다. 운동과목을 필한 뒤 군중의 요구에 의하여 학교 지도부의 장기를 구경하려고 하였다. 정태는 집장고도를 세 키 높이로 뛰고 홍범도는 사팔제비(두 팔을 꾹 펴고 땅을 짚으면서 옆으로 돌아감) 운동으로 운동장을 한 꼽패 돈 후 말하기를 “젊어서 하던 장난이 나이 먹으니 숨이 차서 더 못하겠으나” 하고 땅에 앉으니 군중의 요란한 박수로서 끝을 맞추다. 정태의 이 글을 읽으면 홍범도는 마치 시골 초등학교의 인자한 교장 선생과 같은 모습이다. 고려 말기의 최영 장군을 두고 ‘출장입상(出將入相)’이라 불렀다. 칼을 들고 나서면 장수요, 방안에 들어 앉으면 재상이라는 뜻이었다. 홍범도는 어디까지나 장수요, 재상감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할 형편이 못 되었다. 해서 겨우 한글을 깨우치는 정도였다. “홍범도는 - 정자(丁字)도 모른다. 자기의 성명을 쓸 수 없는 사람이라 아직까지 부하에게 연설 같은 것을 한 일도 없다. 다만 유기운이란 자가 일체의 일을 처리하고 있다.” “홍범도는 - 정자(丁字)도 모르며, 부하에 대한 명령 같은 것도 모두 유기운이란 자가 일체의 일을 처리하고 있다.”
홍범도는 비록 공부가 짧고 학식이 부족했으나 품성이 넉넉하고 리더십이 있어서 부하들과 지역주민들이 잘 따랐다. 본격적인 항일전을 구상하면서 봉밀산 일대의 한인 거주지에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에게 민족의식을 가르쳤다. 당시 왕족과 고위관리 그리고 많이 배운 자들이 매국노가 되거나 친일파로 변신하여 민족을 배반했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
홍범도는 이곳에서 장기전에 대비하여 둔전병(屯田兵)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둔전병제는 고려ㆍ조선조에서 평시에는 토지를 경작해 식량을 자급하고, 전시에는 전투원으로 동원되던 병사제도를 일컫는다.홍범도는 봉밀산에서 “둔전병식으로 독립군을 양성해 냄으로써 3ㆍ1운동 이 후 1920년대의 ‘독립전쟁’의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정태가 밀산(密山)을 ‘조선 독립군의 발상지’라고 규정하였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