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처럼
오세영
나무가 나무끼리 어울려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가지와 가지가 손목을 잡고
긴 추위를 견디어 내듯
나무가 맑은 하늘을 우러러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잎과 잎들이 가슴을 열고
고운 햇살을 받아 안듯
나무가 비바람 속에서 크듯
우리도 그렇게
클 일이다.
대지에 깊숙이 내린 뿌리로
사나운 태풍 앞에 당당히 서듯
나무가 스스로 철을 분별할 줄을 알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꽃과 잎이 피고 질 때를
그 스스로 물러설 때를 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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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오세영
이제는 더 이상
느낌표도 물음표도 없다.
찍어야 할
마침표 하나.
다함 없는 진실의
아낌없이 바쳐 쓴 한 줄의 시가
드디어 마침표를 기다리듯
나무는 지금 까마득히 높은 존재의 벼랑에
서 있다.
최선을 다하고
고개 숙여 기다리는 자의 빈손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빛과 향으로
이제는 神이 채워야 할 그의 공간,
생애를 바쳐 피워 올린
꽃과 잎을 버리고 나무는
마침내
하늘을 향해 선다.
여백을 둔 채
긴 문장의 마지막 단어에 찍는
피어리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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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없음으로
오세영
너 없음으로
나 있음이 아니어라
너로 하여 이 세상 밝아오듯
너로 하여 이 세상 차오르듯
홀로 있음은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이승의 강변 바람도 많고
풀꽃은 어우러져 피었더라만
흐르는 것 어이 바람과 꽃뿐이랴
흘러 흘러 남는 것은 그리움
아, 살아있음의 이 막막함이여
홀로 있음으로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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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오세영
인생이란
기쁨과 슬픔이 짜아올린 집,
그 안에 삶이 있다.
굳이 피하지 말라. 슬픔을 …
묵은 때를 씻기 위하여 걸레에
물기가 필요하듯
정신을 말갛게 닦기 위해선
눈물이 있어야 하는 법,
마른 걸레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오늘은 모처럼 방을 비우고 걸레로
구석구석 닦는다.
내일은
우리들의 축일(祝日)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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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살자
오세영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양(羊)떼보다 더 간절한 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봄이 오는 소리를 행여 놓칠까,
긴 겨울, 대지에 귀를 열고 견디는 양.
양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까닭에
결코 오는 봄을 의심치 않는다.
봄을 맞이하는 마음이
양떼보다 더 고운 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먼데서 오는 그가 행여 추위에 떨까,
포근한 털옷으로 감싸 안은 양.
양은 항상 이웃과 더불어 사는 까닭에
남의 고통을 안다.
봄을 간직하는 마음이
양떼보다 더 순결한 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 찬란한 봄빛이 행여 더럽혀질까,
정결한 흰옷으로 갈아입고 강가에 서는 양.
양은 결코 서로 다투지 않은 까닭에
한 모금의 사랑도 나누어 마실 줄 안다.
대지에 귀를 대면 아아,
지금은 멀리서 봄이 오는 소리.
들린다, 어디선가 강물 풀리는 소리.
졸졸졸 어디선가 눈 녹는 소리.
온 누리 빛 밝은 그 날이 오면
온 누리 찬란한 새 봄이 오면
강물에 풀리는 얼음장처럼
우리도 하나되어 남북(南北)으로 흐르자.
우리도 양떼 되어 이제는
더불어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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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오세영
자일을 타고 오른다
흔들리는 생애의 중량
확고한
가장 철저한 믿음도
한때는 흔들린다
암벽을 더듬는다
빛을 찾아서 조금씩 움직인다
결코 쉬지 않는
무명(無明)의 벌레처럼 무명을
더듬는다
함부로 올려다보지 않는다
함부로 내려다보지도 않는다.
벼랑에 뜨는 별이나,
피는 꽃이나,
이슬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다만 가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조심스럽게 암벽을 더듬으며
가까이 접근한다
행복이라든가 불행 같은 것은
생각지 않는다
발붙일 곳을 찾고 풀포기에 매달리면서
다만
가까이
가까이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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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그늘 아래서
오세영
맑은 날,
네 편지를 들면
아프도록 눈이 부시고
흐린 날,
네 편지를 들면
서럽도록 눈이 어둡다.
아무래도 보이질 않는구나.
네가 보낸 편지의 마지막
한 줄,
무슨 말을 썼을까.
오늘은
햇빛이 푸르른 날,
라일락 그늘에 앉아
네 편지를 읽는다.
흐린 시야엔 바람이 불고
꽃잎은 분분히 흩날리는데
무슨 말을 썼을까.
날리는 꽃잎에 가려
끝내
읽지 못한 마지막 그
한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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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쓸까
오세영
무엇을 쓸까
탁자에 배부된 답지는
텅 비어 있다
전 시간의 과목은 "진실"
절반도 채 메꾸지 못했는데
종이 울렸다
이 시간의 과목은 "사랑"
그 많은 교과서와 참고서도
이제는 소용이 없다
맨 손엔 잉크가 마른 만년필
하나,
그 만년필을 붙들고
무엇을 쓸까
망설이는 기억의 저편에서
흔들리는 눈빛
벌써 시간은 절반이 흘렀는데
답지는 아직도 순백이다.
인생이란 한 장의 시험지,
무엇을 쓸까
그 많은 시간을 덧없이 보내고
치르는 시험은 항상
당일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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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오세영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
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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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
오세영
바람 소리였던가.
돌아보면...
길섶의 동자꽃 하나,
물소리였던가.
돌아보면...
여울가 조약돌 하나,
들리는 건 분명 네 목소린데...
돌아보면 너는 어디에도 없고,
아무데도 없는 네가 또 아무데나 있는...
가을 산 해질녘은
울고 싶어라.
내 귀에 짚이는 건 네 목소린데...
돌아보면...
세상은
갈바람 소리.
갈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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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5
밤비
오세영
밤에
홀로 듣는 빗소리.
비는 깨어 있는 자에게만
비가 된다.
잠든 흙 속에서
라일락이 깨어나듯
한 사내의 두 뺨이 비에 적실 때
비로소 눈뜨는 영혼.
외로운 등불
밝히는 밤.
소리 없이 몇 천 년을 흐르는 강물.
눈물은
뜨거운 가슴속에서만
사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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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오세영
꽃 피는 철에
실없이 내리는 봄비라고 탓하지 마라.
한 송이 뜨거운 불꽃을 터뜨린 용광로는
다음을 위하여 이제
차갑게 식혀야 할 시간,
불에 달궈진 연철도
물 속에 담금질해야 비로소
강해지지 않던가.
온종일
차가운 봄비에 함빡 젖는
뜨락의
장미 한 그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