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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4강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말씀/눅5:1-11
요절/눅5: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헛그물질하고 돌아서다 예수님을 만나 뜻밖에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된 한 사람이 나옵니다. 시몬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때로는 평범하고 때로는 실패한 시몬의 인생에 찾아오시고 그를 깊은 영적 세계로 인도해 주십니다. 더 나아가 그를 물고기 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취하는 영혼의 어부로 불러주십니다. 헛탕처럼 보였던 그의 인생에 주님이 찾아오셨을 때 위대한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 보면 빈 그물이고 인생의 끝자락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찾아오시면 내 인생에도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더 큰 비전을 향해 비상하게 해 주십니다. 이 시간 시몬을 향한 예수님의 찾아오심과 깊은 데로의 초대와 비전의 음성이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오늘 말씀의 배경이 어디입니까? 게네사렛 호숫가입니다.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는 것을 보니 때는 이른 아침입니다. 서서히 물안개가 걷히고 호수 표면에 반사된 햇살에 눈이 부실 때입니다. 평소 같으면 가끔씩 들리던 물새의 울음소리만이 고요함을 깨트릴 시간대입니다. 그러나 이날만은 북적이는 사람들이 내는 크고 작은 소음으로 호숫가가 요란합니다. 무리가 몰려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한쪽 구석에서 자기 일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시몬을 비롯한 어부들입니다. 그들은 밤샘 조업을 했습니다.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만사를 제쳐 놓고 당장 집에 가서 발 뻗고 자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몬은 다음 조업을 위해 열심히 그물을 씻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일의 고기잡이를 위해 그물을 씻는 자기 생업에 근면하고 성실한 어부들이었습니다. 어부들은 밤새도록 그 호수에서 수없이 그물을 던지며 온갖 수고를 했지만 모두 허탕이었습니다.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날 아침은 어부로서의 실패를 맛본 허탈한 아침이었습니다. 이럴 때는 마음이 힘들고 괴롭습니다. 기분 같아서는 빈 그물 둘둘 말아 배 한 쪽에 던져놓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 샤워하고 밥 먹고 푹 자고만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삶 속에서 이런 상황들을 꼭 나쁘게만 볼 일일까요? 알고 보면 이 순간이 내 인생에 찾아온 새로운 기회일 수 있습니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도무지 빈틈을 찾을 수 없었던 자기 일과 자기 가족을 비롯한 ‘자기 세계’라는 단단한 껍질에 균열이 생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균열이 생긴 틈 사이로 예수님의 은혜의 빛이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시몬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한 배에 오르셨는데 그 배는 전에 안면이 있던 시몬의 배였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어주기를 청했습니다. 이때 시몬은 고기를 못 잡은 허탈감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해 있고 피곤했습니다. 빨리 집에 들어가 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정박시켜 놓은 배를 떼어달라니요! 그렇게 한다면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이 끝날 때까지 꼼짝없이 기다려야 했습니다. 시몬은 어떻게 했습니까? 차마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요청대로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어드렸습니다. 꼼짝없이 옆에서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암만 봐도 시몬이 예수님의 낚시질에 단단히 걸려든 것 같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다시 다가와 말씀하십니다. “배를 빌려주어서 고맙네”라고 하지 않으실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뜬금없는 말씀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 아침에 시몬이 고기잡이에서 헛탕치고 깊은 실의와 허탈감에 빠져있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시몬은 취미로 고기 잡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벌어먹기 위해 그물질을 하고 있습니다. 처자식과 장모님까지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좋아하는 옷도 사주고 아이들 장난감도 사줘야 합니다. 자주 병을 앓는 장모님도 섬겨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그물을 던지고 또 던져 봐도 오늘따라 계속 빈 그물입니다. 얼마나 허탈하고 힘들었을까요? 그러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요? 예수님이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예수님은 그가 헛탕친 그 아침에 찾아오셔서 그의 문제를 먼저 아시고 돕기 시작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배를 빌려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고기 잡는 비법이라도 가르쳐 주시려고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이 말씀은 시몬을 예수님을 아는 깊은 곳, 믿음의 깊은 곳, 영적인 깊은 곳으로의 초청의 음성입니다. 이 말씀을 볼 때 현재 시몬은 얕은 물가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호숫가에 있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얕은 물가에 있다는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가 얕은 물가에 있다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시몬의 예수님을 아는 신앙이 얕은 물가 수준임을 말해줍니다. 사실 시몬은 이번이 예수님과의 첫 만남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친형제 안드레의 전도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예수님으로부터 ‘장차 게바(반석)라 하리라(41)’는 소망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는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 심방오셔서 장모님의 열병을 고쳐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알았지만 아주 얕은 물가 수준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부차적인 일이고 그의 주된 가치는 먹고 사는 고기 잡는 일에 있었습니다. 생업에 있어서도 예수님 없이 자기 경험과 노력과 수고와 성실로 일하는 곳은 얕은 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끔씩은 회당에 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받기도 했지만 여전히 예수님과는 적당한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는 얕은 수준의 신앙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기쁨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시몬을 너무나 잘 아시는 예수님은 그가 얕은 수준의 신앙에서 벗어나 깊은 수준의 신앙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믿음의 경험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가 깊이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럼, 깊은 데는 어디일까요?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있는 곳, 예수님이 가리키는 곳, 예수님 자체가 바로 깊은 데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영적인 세계입니다. 영원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세계, 위대하고 존귀하신 예수님의 세계, 늘 새로운 위로와 힘을 주시는 성령님의 세계입니다. 얕은 데에 머물러 있을 때 시몬은 낙심과 좌절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또다시 반복됩니다. 얕은 데에 머물러 있을 때 깊은 데서 얻을 수 있는 대어를 낚을 수 없습니다. 광대하고 깊은 바다 속 진기한 고기들을 건져 올릴 수 없습니다.
국민일보에서 기독교계를 취재하던 이태형 기자가 쓴 ‘더 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의 내용도 좋지만 짧은 제목이 더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내가 알고 경험한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언가 더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점차 나이 들어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들을 경험하게 될 때 지난 삶들이 몇 줌 되지 않은 얕은 인생 경험에 기초한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인생 경험만이 아니라 아직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하나님의 세계가 얼마나 많을까요? 그 세계가 얼마나 깊을까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더 있으니’ 더 들어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우리도 시몬이 부딪친 것처럼 텅 빈 허탈한 아침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얕은 우리의 경험과 노력과 수고와 성실이 한계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 곁에 다가오셔서 초청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라.” 주님은 우리가 실패와 좌절로 주저앉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깊은 데, 즉 예수님께로 나아가 예수님 안에서 다시 도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깊은 영적 세계를 알 때,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알 때 좌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순간 내 맘대로 내 생각과 노력과 성실로 살고 있으면 돌이켜 즉시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실패와 시련을 통해 겸손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이럴 때 주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그러나 이 말씀을 순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게네사렛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어부 시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어부로서의 상식과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맞지 않습니다. 깊은 데는 호수 가운데를 말하는데 그곳은 바깥보다 물고기가 적게 삽니다. 먹이가 적기 때문입니다. 보통 아침에는 깊은 곳에 물고기가 없다는 것이 이 동네의 상식이라고 합니다. 시몬은 그물을 손질해 그날 일을 모두 접었습니다. 일을 마친 사람에게 다시 일하라는 것만큼 짜증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실패를 맛보면 다시 시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두렵습니다. 어차피 또 안될 것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지배하기 쉽습니다. 지칠 대로 지친 시몬 베드로의 몸과 마음의 상태도 다시 고기잡이를 시작할 상태가 아닙니다. 목수 출신인 예수님이 전문가 어부 시몬에게 어업에 대해 가르치는 것에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낙심이 되고 피곤하고 배고팠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냥 돌아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몬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경험과 상식과 자존심을 내려놓았습니다. 예수님을 몇 차례 만난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했습니다. 시몬은 장모의 열병을 꾸짖음으로 낫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가까이서 경험한 바 있습니다. 자신의 배 위에서 선포되었던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서서히 그 마음에 믿음이 자라났을 것입니다. 여기 ‘잡은 것이 없지마는’이라는 말과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말 사이에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로는 ‘but because you say so'라는 말이 원어 성경에는 나와 있습니다. ‘이런저런 순종할 수 없는 이유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여기 ‘그러나’라는 단어는 위대한 전환입니다.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의 전환입니다. 경험과 이성과 상식의 세계에서 믿음과 순종의 세계로의 전환입니다. 이러한 전환의 근거는 말씀, 곧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의지할 때 실패를 만회하고 예수님의 깊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사야 55장 8,9절은 말씀합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우리의 경험과 상식과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 되지 않는 일일지라도 우리가 말씀을 의지할 때 주님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해가십니다.
시몬은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이때 어떻게 됐습니까? 6,7절을 보십시오. 고기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입니다. 다른 배에 도움을 청해 보았지만 두 배를 가득 채우고도 넘쳐 배가 물에 잠길 지경입니다. 시몬과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까지 모든 사람이 다 놀랍니다. 물고기잡이가 생업인 시몬의 인생에 이렇게 많이 잡아 본 적이 있었을까요? 시몬의 경험과 지혜로 꽤 많이 잡을 수는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배가 잠길 정도로 잡는 것은 스케일이 다릅니다. 이 사건이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세계는 이 정도로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하므로 그 세계를 경험해보면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고 순종하면 놀랍고 풍성한 영적인 세계, 하나님의 세계가 새롭게 열립니다. 그 세계를 경험하고 나면 그때서야 왜 성경이 진리의 말씀인지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
그물이 찢어지고 배가 잠길 정도로 많이 잡은 물고기를 보고 시몬은 예수님께 무슨 말을 합니까? 만약 제가 시몬이라면 예수님께 동업을 하자고 제안할 것 같습니다. 수익은 50대50으로 하여 ‘Jesus & Simon company’를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장 탐지를 하고 시몬이 물고기를 잡으면 됩니다. 갈릴리 수산업계를 평정하고 재벌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베드로의 입에서는 뜻밖의 고백이 나옵니다. 8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간청합니다. 호칭부터도 앞에서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것과는 대비가 됩니다. 그런데 왜 떠나기를 간구했을까요? 시몬 베드로가 방금 전 사건을 통해 예수님에게서 그분의 신성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신적 존재 앞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을 깨닫자,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한 모든 사람이 느끼는 공통적인 감정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성전에서 기도하는 중에 하늘 보좌에 앉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게 되었을 때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야곱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던 도중, 벧엘에서 잠을 청하다 꿈에 사닥다리 환상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을 때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왜 두려울까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감히 설 자격조차 없는 비천하고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크심과 나의 비천함이 동시에 경험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시몬 베드로가 자신의 죄인 됨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착하고 성실하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고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초청을 받기 전, 환상 중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큰 보자기 안에 율법에 부정한 짐승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어나 잡아먹으라는 음성을 듣고 베드로가 뭐라고 말합니까?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행10:14).” 베드로의 삶은 그만큼 율법적으로도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본문의 이 순간, 베드로는 진실하고 진지하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변두리에 밀어 놓은 채 자기 의지와 성실로 자기 세계만을 살아왔던 그 삶 자체가 죄에 물든 삶이었음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삶을 꾸려나가지만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는 잘 모릅니다. 왜냐면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주위 사람들과 비교 속에서 자신을 보려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보다는 더 낫다. 너보다 착하고 너보다 똑바로 산다”는 생각 속에 진짜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기준이 상대적이기 때문에 진정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 사람보다는 잘 살지만 저 사람보다는 못 살 수 있습니다. 이 사람보다는 깨끗하지만 저 사람보다는 더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영광과 임재 앞에서 비로소 내가 얼마나 비천한 죄인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죄인임을 깊이 발견하게 됩니다. 이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에 서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만나게 된 시몬 베드로를 기다리는 새 인생은 무엇입니까?
10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이제까지 물고기를 취하던 인생을 살던 시몬을 사람을 취하는 삶으로 부르십니다. 물고기는 어떻습니까? 물속에 있으면 살고 물 밖으로 나오면 죽습니다. 반면, 사람은 물 속에 있으면 죽고 물 밖으로 나와야 삽니다. 사람을 취한다는 것은 죄의 바다, 죽음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을 건져 올려 그의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 일이 바로 목자의 삶입니다. 이 일은 본래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그 일을 이제 나와 같이 하자고 하십니다. 시몬이 동업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시몬에게 동업 제안을 하고 계십니다. “Jesus & Simon evangelical company” 멋지지 않습니까?
사람을 살리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 중에 소방관이 있습니다. 소방관이 불구덩이 속에서 질식하여 죽어가던 사람을 구해냈을 때 많은 사람이 찬사를 보냅니다. 정말 가치 있고 고귀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지옥 불구덩이 속에서 고통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구해낸다면 어떻겠습니까? 히브리서 9장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에게는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지만 그 후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영원한 지옥 불구덩이에 내던져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사로잡아 구원하는 일이야말로 열렬한 찬사를 받아 마땅한 진정 가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일에 시몬 베드로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일에 부르고 계십니다. 사람을 영원히 살리는 일에 나와 함께 동업하자고 제안하십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이 문장은 미래형이면서 명령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을 취하는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고, 사람을 취하는 삶을 살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취하는 인생이 되게 하실 분은 예수님이시고 또한 예수님의 그 뜻에 순종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어부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11).”
이렇게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시몬 베드로는 이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약속대로 사람을 취하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의 단 한 번의 설교로 일시에 삼천 명, 오천 명이 회개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오늘 그물이 찢어지고 두 배가 잠길 정도로 물고기를 잡은 일이 바로 이 사건들을 암시하는 예고편이 아니었을까요? 부르심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때는 대가가 너무 크고 희생이 많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자기가 무엇을 버렸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신령한 복들과 풍성한 열매들을 거두게 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생업을 위해 성실히 일해야 합니다.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고, 취업도 해야 하고, 건강 관리도 해야 하고, 자녀 교육도 잘 해야 하고, 직장에서 승진도 해야 하고, 노후 준비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업들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생업만 감당하다 마칠 인생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에 예수님과 동역할 사람들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Jesus & Jinju UBF evangelical company”의 사원들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것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라면 필요한 대가와 희생을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취하는 인생으로의 주님의 부르심에 믿음과 순종함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예수님과 동행하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깊은 주님의 세계, 신령하고 복된 세계, 풍성한 은혜와 결실의 세계를 경험하며 살아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