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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거래혜] 11.군웅대회(群雄大會)의 대단원
바야흐로 준결승전이다.
제 1경기는 사문도 대(對) 주은비. 제 2경기가 모용화운 대 이세혁이다.
사문도가 결승까지 올라가는 덴 별 어려움이 없을 거라 예상되는 가운데, 이세혁과 모
용화운의 일전은 혼전을 빚어낼 것으로 예상되어 부근 무림인들의 입씨름 대상이 되고
있었다.
여기는 경기가 시작될 비무장.
강천비에게 신신당부를 받고 비무장에 올라온 사문도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주위
를 한 번 둘러본다. 사문도의 눈에 주은비의 모습이 비친다. 그리고 사문도의 시선이
그리로 고정된다.
둥!
북소리가 한 번 울리자 관중들이 숨을 죽이고, 사문도와 주은비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둥!!
다시 한 번 북소리가 울려 퍼진다. 경기 시작이다.
"사 소협, 하나만 여쭤봐도 괜찮겠죠?"
"좋을대로 하십시오."
예상치 않았던 일이지만, 사문도는 간단히 응낙한다. 주은비의 차갑게 굳었던 얼굴이
조금은 풀리고, 숨을 한 번 들이쉰다.
"강 소협은... 강천비 소협은, 괜찮아요?"
"!!"
사문도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한다. 분명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란 걸 알고 있기에,
정말 뜻밖의 말이라 여겼기에 안색이 변한 것이다.
"괜찮습니다, 표연공주님. 심려치 마십시오."
"...?!"
주은비의 전신이 미미하게 떨려 온다. 이미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자만이 낼 수 있는
사문도의 비릿한 미소 탓이다.
그리고 그 무렵, 사문도의 우수(右手)에 검이 쥐어진다.
"후후... 제가 공주님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이 놀라울 테지요. 혹시 비밀이라도 됩니
까?"
"어, 어떻게... 그, 그 사실을...!!"
주은비의 떨림이 점차 약해지고 있다. 하지만 마음의 동요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 듯
하다.
"안심하십시오. 전 이 사실을 천비 말고 다른 사람에겐 말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 에?!"
주은비가 허탈한 신음을 흘린다. 사문도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
졌기 때문이다.
"어, 어디로...?"
주은비의 검을 뽑아 쥐고 있는 손이 점차 떨려 온다. 분명 상대는 사라졌건만, 상대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하늘을 봐도, 왼쪽, 오른쪽을 봐도 사문도는 간 데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방금까지 있던 사람이, 이렇게 쉽게 사라질 순 없는데...!'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온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쉬는 순간, 목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 분명, 철(鐵)이다.
"후후... 눈이 안 좋은 모양이군요, 공주님."
"... 아...."
바로 뒤에 사문도가 서 있다. 사문도의 손이 스르르 움직이더니, 주은비의 목을 겨누
고 있던 검이 스르르 떨어진다.
"공주님께서 적이셨다면, 제게 목이 떨어졌을 것입니다."
목에서 검이 떨어지자, 주은비가 황급히 돌아서서 멍하니 사문도를 주시한다.
'비록 방심했다 치더라도, 분명 내 안력(眼力)은 나쁜 편은 아닌데...'
걸릴 듯 말 듯한 미소가 사문도의 안면에 걸려 있다. 그 모습에, 다시 한번 주은비는
아찔한 뭔가를 느낀다.
'안 돼... 집중력은 흐트러지면, 절대 안 돼...!'
주은비가 양손으로 검을 꽉 움켜쥐고,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어본다.
자신의 실력으로 옷자락 하나도 벨 수 없는 상대란 걸 알았기에, 점차 싸울 의욕을 잃
고 있었다. 멀리서 이를 보고 있는 이세혁의 이마에서도 구슬땀이 흐른다.
"공주님께서 지금의 다섯 배 이상 강해진다 한들, 저를 이길 순 없습니다. 기권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심사숙고해야 할 대사를, 사문도가 너무 쉽게 발설한다. 주은비의 안면이 수치심으로
물들더니, 고개를 떨군다.
"포기하시든 안 하시든, 그건 공주님 자유겠지요. 전 말입니다, 꼭 달려드시는 길 외
에 다른 길이 있다는 걸 가르쳐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 사문도의 우수에 쥐어져 있던 검이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5초 드리겠습니다. 선택하십시오."
기권이냐, 패배냐. 5초 내에 결정해야 한다 하니, 주은비의 마음이 서글픔과 착찹함으
로 물든다.
"3초 남았습니다."
그 말일 끝나기가 무섭게, 주은비의 눈에 투혼이 일어난다. 그리고 검을 쥔 쌍수로,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사문도를 향해 달려든다.
"천지파멸(天地破滅)!!"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기(剛氣)가 그대로 사문도를 압사시킬 듯 소용돌이친다. 그리
고 일제히 사문도를 향해 뻗어 나간다.
주은비의 반응을 감지하자, 사문도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난다.
'후후... 권주(勸酒)를 사양하실 거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공주님께 말을 막
한 이유 등이 거기 있으니까요!'
사문도가 좌수를 공중을 향해 뻗는다. 그러자 얼마 전에 우수로 던진 검이 놀랍게도,
정확하게 사문도의 좌수에 철컥 하고 쥐어진다.
"천비의 무공으로 모시겠습니다...!!"
번쩍-! 하고 섬광이 일어난다. 가히 눈도 뜨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섬광에, 관중들과
주은비가 눈을 가린다.
주은비가 당황하는 사이, 사문도의 검에서 흘러나온 초식이 주은비의 천지파멸을 상쇄
시킨다. 그리고 사문도가 곧바로 주은비를 향해 검을 긋는다.
"대지양단(大地兩斷)!!"
사문도 주변으로 끓어오르는 기의 위력에, 비무장 전체가 흔들거린다. 제일 가까이 있
는 주은비가 황급히 방어하려 해 보지만, 이미 상황은 자신에게 너무도 불리하다.
얼마 못 가 몸이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이 들더니, 주은비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사문도는 이 광경을 비무장 위에서 빠짐없이 봤다. 입가에 웃음이 걸리더니, 바로 주
은비 곁에 사뿐히 도약해 선다.
"이 느낌이... 패배로군요..."
주은비는 일국 공주의 신분으로, 패배라는 걸 모르고 자라왔다. 오늘, 사문도에게 처
음으로 패배를 당했지만, 그리 분하거나 아쉬운 기색은 없다.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이유가... 대체 뭘까요, 사 소협..."
주은비가 상반신만 일으켜, 허무한 눈길로 사문도를 바라본다.
사문도가 싱긋 웃더니, 자신이 할 말만 하고, 그대로 밖으로 걸어간다.
"후후... 오늘의 패배로, 더더욱 강해질 공주님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그런 사문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주은비의 두 눈에 복잡한 감정이 피어오른다.
'내일... 대영반이, 저 사람을 이길 수 있을까...?"
듣던 것보다 수배는 강하다는 걸 주은비는 몸소 느꼈기에, 이세혁의 승리를 쉽게 점칠
수가 없었다.
뒤는게 심판장(審判長)의 판정이 떨어지고... 관중들은 하나같이 비명을 내지른다.
너무도 쉽게 종결된 승부였지만, 신기에 가까운 사문도의 무위는 관중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던 탓이리라.
주은비는 몸을 일으켜 검을 쥐고, 푸른 하늘을 주시해 본다. 주은비의 눈망울에 떠오
른 푸른 하늘은, 티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하기만 하다.
사문도와 주은비의 경기가 끝난지도 어느덧 한 시진이 흘렀다.
모용화운과 이세혁의 일전이 크게 벌어진 가운데, 강천비의 몸이 안 좋은 상태로 사문
도아 강천비는 가지 못했다.
"주군, 모용 누님... 이길 수 있을까요?"
"휴... 글쎄다."
최소한 이틀은 이렇게 있어야만 한다니, 활발히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강천비에겐 너
무 가혹한 일이다.
'모용 소저... 힘들 테지. 아마 근소한 차이로, 대영반(大領班)께서 이기실 게야.'
명색이 동창(東廠)의 대영반인 이세혁이 쉽게 이길 리 없다. 허나 새외무림(塞外武林)
최강 세력이라 불리던 북해빙궁(北海氷宮)의 소궁주(小宮主) 역시 약할 리가 만무한
것이다.
'전투경력... 변방에서 수십 년을 보낸 대영반께서, 모용 소저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이유다.
모용 소저가 10년만 일찍 태어났다면, 내가 예상하는 승자가 반대로 될지도 모를 일이
다.'
사문도는 실력 상으로 두 사람의 차이는 그리 심하지 않지만, 대결 때의 노련함이나
약점 포착 능력 등은 이세혁이 월등히 뛰어날 것이라 예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같은 날씨 역시 대영반 나리의 편이다. 겨울이었다면 몰라도, 이런 날
씨 속에서 모용 소저는 금방 지치니까 말이지...'
북해의 빙촌(氷村)에서 살아온 모용화운이 압도적으로 유리할 거란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후후... 내일, 상대가 누가 되더라도 일 각은 놀아 보리라. 그게 모용 소저가 되든,
대영반 나리가 되든!'
"빙백신장(氷白神掌)!"
"지옥염화(地獄炎火)!"
벌써 이들이 대치한 지도 한 시진이 넘었다. 하지만 둘은 지친 기색도 없이 엄청난 내
공을 바탕으로, 관중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재미있는 경기를 하는 중이다.
쾅! 하고 두 기류가 충돌하기가 무섭게, 새하얀 증기가 되어 샅샅이 흩어진다.
"칫!"
모용화운이 이를 보고 짜증이 나는 듯 투덜거린다. 그도 그럴 것이, 빙백신장을 사용
할 때마다 이세혁이 이를 무위로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이대로느 승부가 안 나! 허나, 저 자에겐 빙백신장이 안 통힌...!!'
얼음의 상극은 불. 빙백신장과 지옥염화가 충돌할 때마다 급속도로 기화되어 공중으로
흩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세혁은 이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질풍귀(疾風鬼) 강 소협의 무공 수위도 놀라울 정도인데, 그보다 겨우 두, 세살 정도
많은 소녀가 이 정도 수준이라니...'
상대를 압박시키며 쏘아대는 빙백신장의 위력이나, 파고 들어올 때의 날렵함 등, 어느
것 하나 이세혁을 놀라지 않게 만드는 게 없었다.
'저렇게 가냘픈 소녀에게서 엄청난 공력이 뿜어져 나올 거라고, 과연 몇이나 예상할
수 있을 거란 말인가.'
생각을 정리하며, 이세혁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검을 한 번 훑어본다. 곧이어 모용화운
의 눈에서 성가신 기색이 역력하게 떠오른다.
'설마... 또 그 무공을...?!'
이세혁은 검을 훑어보고 전열을 가다듬기만 했는데도, 전신에서 열풍(熱風)이 휘몰아
친다. 극열지공(極熱之功)을 쓰려는 것이다.
'질 순 없어!'
모용화운 역시 마음을 가다듬고, 쌍수(雙手)를 이세혁에게 쭉 뻗는다. 그러자 모용화
운의 주위에서 얼음보다 차가운 칼바람이 몰아친다.
서로 공격준비는 끝났다. 이세혁의 음성이 모용화운의 귓전에 울려 퍼진다.
"허허, 북해빙궁의 무공이 중원(中原)만큼이나 강할 줄은 미처 몰랐구려, 모용 소저."
그러자 모용화운의 입가에 짙은 고소(苦笑)가 떠오른다. 자신이 불라할 것이란 걸 직
감적으로 알아챘기 때문이다.
'저 영감님의 열혈수라(熱血修羅)... 아마 빙백신무(氷白神武)로도 힘들 테지...'
북해빙궁의 36대 궁주, 모용백(慕容伯)의 머리에서야 겨우 정리된 북해빙궁 최강의 무
공, 빙백신무.
빙백신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파괴력을 자랑하며, 12성 대성(大成)하면, 어떤
열공(熱功)으로도 막을 수 없다고 알려져 있는 무공이다.
허나 모용화운은 이제 겨우 3성을 익혔을 뿐이라, 그 위력이 제대로 펼쳐질 리가 없다
.
"열혈수라!"
이세혁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던 열기가 극대화된다. 이세혁이 검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의 검 위에서 열기가 한 말이 아수라를 만들어 낸다.
"빙백신무!"
중원으로 건너와선 단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빙백신무. 더 늦기 전에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모용화운 역시 필사적이다.
제법 거대해지는 이세혁의 기류와는 달리, 모용화운의 기류는 점차 쌍수 정중앙으로
조그맣게 모여든다. 구슬보다 작은 크기다.
'여기... 내가 가지고 있는 내공의 모든 것을 건다!'
열혈수라를 막아보려는 듯, 모용화운의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투지로 불타오른다.
이를 바라본 이세혁이, 곧바로 검을 긋는다.
"한 시진 이상 끌어온 이 경기도 종결이외다, 소저! 막을 수 있으면 내 열혈수라를 막
아 보시구려!"
이세혁의 검이 열기에 번뜩인다. 그리고 섬전(閃電)같은 속도로 모용화운을 향해 들이
닥친다.
"흥! 나 역시 쉽게는 안 진단 말예요, 영감님!!"
좌수, 우수를 천천히 움직이는 모용화운. 그리고 빙백신무의 빙기(氷氣)를 양손으로
살짝 포개고 손가락을 서서히 떼어내자, 빙백신무의 크기가 사람 주먹 정도까지 커진
다.
'이게 깨진다면, 내가 버틸 리 만무하겠지!'
모용화운이 좌수를 빼고, 그 기 덩어리를 우수에 움켜쥔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날아
오는 열혈수라를 향해 전력으로 던진다.
"가라, 빙백신무!!"
이세혁이 땅을 박차고 모용화운을 향해 날아들다가, 가공할 정도의 한기를 느낀다. 그
리고 미처 열혈수라를 제대로 운용하기도 전에, 열혈수라와 빙뱩신무가 정면충돌을 한
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열기와, 그에 맞서는 빙기의 정면충돌. 삽시간에 일어난 기압
차로 비무장에는 거센 바람이 불어닥친다.
'으윽, 내공으로 따지면 내가 불리한데...!!'
서서히 팔끝이 떨려오기 시작하고 있다. 이제가 고비인 것이다. 하지만 그와 대조적으
로, 이세혁의 안면엔 희색이 돈다.
'놀랍군, 아직까지 저 정도의 힘이 남아 있다니!!'
여태 모용화운이 써 온 내공은 자신의 상상을 훨씬 초월할 정도다. 족히 1갑자에 근접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세혁이 반세기 이상 살아오며 쌓은 내공은 3갑자 남짓. 하지만 눈앞의 이 소녀는 자
신이 40줄에서야 겨우 이룩한 내공과 맞먹는 수준이다.
'역시, 1성으론 절대 안 돼... 끌어올려 볼 테다!'
모용화운의 쌍수에서 다시 한 번 냉기가 폭발한다. 그러자 빙백신무의 강기가 두 배
이상 강해진다.
"!!"
이번에는 열혈수라가 눈에 띄게 밀리기 시작한다.
'저, 전력을 다한 공격이 아니었단 말인가...? 하지만, 내가 이길 승부다!'
이세혁 역시 내공을 끌어올린다. 그러자 다 꺼진 불씨처럼 빌빌거리던 열혈수라가 다
시 불길을 뿜으며 되살아난다.
현재 이들이 이루고 있는 대세는 평형이란 단어 하나로 설명이 가능하다. 이 이상의
단어는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이들의 대결은 평형을 이루고 있다.
'정말 대단해... 내 비록 아직 2할의 힘을 숨겨놓고 있었다고는 하나, 이렇게까지 전
세가 균형을 이룰 줄은...!!'
이세혁이 내심 감탄을 터트린다. 감탄을 터트리는 건 모용화운도 마찬가지.
'대, 대단해... 빙백신무를 2성까지 사용했는데, 저 영감님은 그걸 다 소화하고 있잖
아...!!!'
내공이 진탕되기 직전인 듯, 모용화운의 얼굴에서 난감한 기색이 떠오른다. 그러자 모
용화운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다. 최후의 결심을 한 듯, 모용화운의 전신에서 세찬
기류가 일어난다.
이를 직감적으로 늒니 이세혁은 혹시나 하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킨다.
'이 정도의 위력에서, 더 이상 내력을 끌어올릴 수 있을 리가 없어... 그건 거의 불가
능에 가까운 일이...'
하지만 다시 한번 이세혁에게 느껴지는 중압감.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정말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됐다! 잘 먹히고 있어!!'
급속도로 평형이 깨지고 이는 걸 느낀 모용화운은 희색에 찬 얼굴이다. 반면, 이세혁
의 얼굴은 착찹하게 물든다.
'열혈수라가 깨지기 일보직전이라니, 북해빙궁의 소궁주란 소녀가 이리도 대단할 줄은
...'
남은 2할의 힘을 조금 꺼내 열혈수라 초식을 되살리려 힘써 보지만, 이미 때는 늦은
듯하다. 곧이어 이세혁이 고소(苦笑)를 힘없이 날린다.
'이 소녀를 상대로, 이것까지 쓰게 될 줄은 몰랐군.'
굳게 결심한 듯, 이세혁의 신형(身形)이 흔들린다. 그러자 갑자기 이세혁의 주변으로
모이는 전기(電氣)!!
'내 생에 단 세 번 밖에 사용한 적이 없는 무공이거늘...'
단 세 번이라고 했는데, 그 세 번이란 처음 금의위(錦衣衛)에 입대할 때, 그리고 변방
에서 여진족들에게 애초에 침략근성을 끊어주기 위해, 마지막으로는 10년 전, 만력제(
萬曆帝)의 청에 의해서다.
"벽력뇌검(霹靂雷劍)!!!"
자신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오는 빙백신무를 향해 이세혁이 검을 들이댄다. 그 순간은,
이 경기의 마무리를 알리는 순간이었다.
모용화운이, 빙백신무가 이세혁에게 격중됐다고 느낀 찰나, 별안간 빙백신무 속에서
한 줄기 뇌전(雷電)이 번쩍인다.
쿠구궁!! 하는 묵직한 소리... 그 소리를 시작으로, 빙백신무가 파괴된다. 한 줄기 일
어난 뇌전이, 빙백신무를 파괴함과 동시에, 모용화운의 쌍수에 정면으로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 아앗?!"
모용화운은 빙백신무가 파괴된 데 놀랄 틈도 없이, 쌍수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황급히
손을 추스린다.
놀랍게도, 썅수에서 연기가 무럭무럭 올라오고 있다. 손을 움직이려다, '찌릿'하는 고
통으로 모용화운의 고운 아미(蛾眉)가 가볍게 찌푸려진다.
"... 세상에..."
빙백신무의 가장 큰 단점은, 그 시술자조차 자신이 뿜어낸 빙기를 이기지 못해, 사용
후엔 동상(凍傷)으로 한동안 고생한다는 점이다.
허나 지금 모용화운의 쌍수는 전혀 그런 걱정할 필요가 없는 상태다. 동상으로 얼어붙
은 게 아니라, 시커멓게 그을려 있다. 화상을 입은 것이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모용화운이 고개를 내저으며 이세혁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이세혁
역시, 무사하지는 못한 듯하다.
'분명 벽력뇌검은 모든 게 완벽했다. 그럼에도, 내 손에 붙어 있는 이 빙편(氷片)은
대체 뭐란 말인가...'
비록 놀란 사실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지, 이세혁이 입은 심리적 충격은 모용
화운과 맞먹을 정도였다.
황궁 최고의 고수로, 만력제에게 신임 받고 있는 자신이, 이 정도까지 실력을 쏟아 부
어야만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하다.
"훗... 졌군요."
모용화운이 쌍수를 쓸 수 없게 됐다는 건, 전투불능을 뜻한다. 이세혁 역시 이를 간과
하고 벽력뇌검을 전개했던 것이다.
"제가 질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북해빙궁의 소궁주가 돼서, 이렇게 질 줄은... 정
말 몰랐어요..."
경기 전까지만 해도, 중원에서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상대는 열 명도 채 안 된다고 생
각했다. 그러기에, 자신이 손쉽게 제압할 줄 알았던 이세혁에게 느낀 패배감은 클 수
밖에 없었다.
"모용 소저, 중원은 넓소이다. 소저의 고향에서는 소저가 강한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중원 무림엔 나 말고도 날 능가하는 자가 상당수 된단 말이외다."
이야기를 끝마치며, 이세혁이 쥐고 있던 검을 검집에 넣는다. 그리고 정처없이 돌아서
서 비무장을 빠져나간다. 하지만 그 찰나,
"저한테 이겼다고 너무 자만하지는 마세요! 제 주군(主君)이라면, 분명 영감님을 이기
실 거니까요!"
칼이 숨어있는 말에, 이세혁이 멈칫하다 고개를 돌리고 모용화운을 주시한다.
"헛헛, 모용 소저. 난, 여기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거외다. 소저의 주군이 어느
분인지는 내 알 수 없으나, 난 강하기 때문이오!!"
"!!"
모용화운이 뭐라고 반박하기도 전에, 이세혁은 어느새 심판장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친다.
"어이, 경기가 끝났으면 끝났다고 신호를 보내야지. 안 그래?"
"아앗! 대영반 나리,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심판장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기침을 몇 번 하다가 크게 소리친다.
"이세혁, 결승행 확정!!"
언제나 그래 왔듯이, 관중들의 함성이 항주(杭州)를 뒤흔든다. 그리고, 모용화운이 비
틀거리며 사문도와 강천비가 있는 숙소로 발걸음을 돌린다.
'저 영감이... 감히 주군을 얕봐...? 누군지 몰라...?? 영감 주제에, 강해 봐야 얼마
나 강하다고...!!'
결승행을 눈앞에 두고, 결국 모용화운이 발을 접게 된 군웅대회. 패배의 쓴잔이 억울
했던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발걸음을 옮기는 모용화운의 두 눈에 눈물이 엷게 고인다
.
'망할 영감... 두고 봐! 주군께 말씀드리면, 한 방에 끝내 주실 테니까 말야!'
여인이 한은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던가. 이세혁의 오만함인지, 자신
감인지 모를 발언에 모용화운은 자극을 상당히 받은 듯하다.
'두고 보자... 내 그 영감을 다음에도 못 꺾는다면, 성을 확 갈아버릴 테다!!'
숙소로 돌아온 모용화운은 만사가 귀찮은지, 들어오자마자 사문도에게 예도 취하지 않
은 채 바로 자신의 방으로 가 누워버린다.
"주, 주군... 모, 모용 누님이..."
"... 졌군 그래."
사문도가 말을 끊고 한숨을 내쉰다. 예상했던 일인지라 미련은 없다만, 뭔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찜찜함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극한의 무공을 사용하는 화운의 손에, 화상(火傷) 자국이 있었다. 그럼, 대영반 나리
의 내공은, 모용화운보다 반 갑자(甲子) 이상은 더 많다는 소리로군.'
누가 보더라도 이세혁은 인상 좋은, 동네 할아버지처럼 생겼다. 그런 이세혁이, 비록
괴멸됐다고는 하지만, 북해빙궁의 소궁주, 모용화운을 제압했다 생각하니, 모용화운의
자존심도 엔간히 상했을 것이다.
'모용 소저가 비록 지긴 했지만, 자존심 강한 그 본성을 뜯어고칠 수 있는 기회가 될
지도 모르겠군.'
사문도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강천비의 낮은 음성이 사문도의 귀를 훑고 지
나간다.
"주군, 모용 누님 눈가에 눈물 자국... 보셨는지요?"
"..."
질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문도는 그저 떨어트린 시선을 들어 강천비를 한 번 바라
본다.
'하긴, 인정하기 싫을 테지. 인상 좋은 할아버지한테 그렇게 비참하게 깨졌으니...'
사문도가 고소(苦笑)를 지으며, 허리에 메인 검집을 한 번 쓰다듬어 본다. 별안간 고
소가 지워짐과 동시에, 빛나는 두 눈동자에서 불꽃이 이글거린다.
'이유야 어쨌든, 화운(花芸)에게서 눈물을 뽑아 놓으셨으니... 그 눈물값은 받아 가겠
습니다, 대영반 나리.'
자시(子時)가 됐음직한 늦은 밤이다. 모용화운을 꺾고 결승까지 올라온 이세혁이 잠을
쉬이 못 이루는 듯, 초롱초롱 빛나는 밤하늘의 별만 주시하고 있는 중이다.
'내일이면 이 군웅대회도 종결이다. 마지막까지 승리해, 공주마마께 실망을 안겨드리
진 않으리라!'
주은비가 낮에 했던 충언을 상기하는 이세혁의 얼굴에, 한줄기 불안함이 엿보인다.
'대영반... 사 소협(小俠)은, 대영반의 예상보다 세 배 이상은 강한 사람이에요. 부디
, 몸조심하시고... 못 이기셔도 좋으니까, 안 되겠다 싶으면, 무조건 기권하세요.'
마침, 이세혁의 머리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불나방이 있다. 이세혁의 손이 스르르 움
직인다 싶더니, 검을 쥐기가 무섭게 불나방을 향해 단 두 번 검을 긋는다.
팟- 하고 검이 허공을 가르는 파공성이 일어나더니, 나방이 몸체에서 날개만 깨끗하게
끊어져 바닥에 툭 떨어진다.
"휴..."
30년 넘는 세월동안 황궁(皇宮)에 몸담아 온, 당대 최고의 충신 이세혁. 그에겐 정말
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장 수보(首輔)께서 10년만 더 사셨다면, 대명제국은 영락제(永樂帝) 이후 제 2의 부
흥을 맞게 됐을 텐데...'
이세혁, 그는 남에게 패한 적이 없었다. 일대 일 승부라면 언제나 그가 이겨왔다. 하
지만 만력(萬曆) 원년에 만난 장거정(張居正)과 검학(劍學)을 나눠봤지만, 너무도 간
단히 패하고 말았다. 장거정은 무예를 익히지 않았을 뿐, 검학에 있어서는 당대 무림
의 일류고수보다 높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검학을 얘기한 뒤로, 이세혁은 장거정에게 발탁되어 금의위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리
고 3년 후에는 동창의 대영반을 겸직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장거정의 뜻이었던 것이
다.
벌써 장거정이 쓰러진 지 어언 2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약관(弱冠)에 불과하던 만력
제가 이젠 마흔을 넘긴 중년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만력제를 성군(聖君)으로 만
들기 위해 이세혁이 밤낮으로 고심한 지도 21년이 흘렀다.
'허나 난... 장 수보 나리처럼 할 수 없었다... 장 수보께서 돌아가시자 마자 환관과
간신들의 횡포에... 폐하께선 점차 정치에 뜻을 잃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세혁의 성격 같아서는, 정변(政變)이라도 일으켜 환관과 간신 숙청 작업이라도 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자금성(紫禁城) 곳곳에 환관들이 깔려 있고, 그들의 눈과 귀가
깔려있는 터라 오히려 그가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검을 쥐고 있는 이세혁의 팔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주은비가 결코 자신에게 헛된 충
고를 할 사람이 아니란 걸 눔도 잘 알고 있기에... 약관도 안 된 소년이, 자신을 능가
할 무공 수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기에 떨리고 있는 것이다.
'공주마마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난 사문도의 10초지적도 못 된다. 그 나이에, 그 정
도 무공 수위가 가능할 리가 없건만...'
검을 거두고, 침실로 향하는 이세혁의 발걸음이 유달리 무겁게 느껴진다.
군웅대회(群雄大會) 마지막날. 마지막 축제를 즐기려 몰려든 인파는, 가히 5천 명을
넘어선다.
남은 경기는 결승전, 하나 뿐. 최후의 승자는 황금 천 냥과 승리의 영광, 그리고 명성
을 동시에 얻게 된다.
사문도, 이세혁 모두 진정한 목적은 서로를 이기는 데 있지, 황금 때문은 절대 아니다
.
이세혁은 금의위와 동창의 명예와 황실 무사 출신의 저력을 만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문도는 사파인들의 우상과 자존심으로 등극(登極)하려 하기 위해서다.
이제 날은 밝았다. 하늘은 이들이 좋든 싫든,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누구는
승자로, 누구는 패자로 만들고 말 것이다.
'고독랑(孤獨郞) 사문도'란 이름은, 이미 항주(杭州)의 유명인사가 돼 버렸다. 홀몸으
로, 묵묵히 걷고만 있는 사문도의 주변에는, 언제나 그렇든 수많은 인파들이 구름처럼
몰린다.
'부, 부럽다... 젠장!!'
'욱... 정말, 내가 봐도 반할 것만 같은 얼굴이라니...!!'
사내들은 하나같이 부러움 반, 질투심 반 이 담긴 시선을 던진다.
'세, 세상에... 저런 미남이...!!'
'취한 거 같아... 아아...'
소녀들은 하나같이 감탄을 터트리며, 몽롱한 시선으로 사문도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사문도는 이 모든 시선들을 무시한 채, 묵묵히 비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휴... 잘 생긴 것도 죄로군. 잘 생긴 것도 죄야...'
사문도가 한숨을 내쉬고, 언제나 그러듯 흘러내린 앞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린다. 비무
장을 향하는 걸음속도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얼마나 더 걸었을까? 문득 자신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한들이 눈에 들어온다.
하나같이 득의의 웃음을 짓고 있다. 허나 사문도는 상대하기 싫은 듯, 발길을 돌려 그
들 옆으로 빠져나가려 한다. 그러자 그 거한들이 그리로 발걸음을 돌린다.
사문도의 키는 결코 작은 편이 아니다. 허나 거한들은 적어도 7척 이상은 되는 장신인
지라, 사문도가 가까이 다가서자, 고개를 들어 그들을 봐야만 했다.
"뭐요?"
그들을 하나하나 둘러보고, 사문도가 맨 처음 뱉은 말이었다. 상대는 모두 다섯이다.
"고독랑이란 별호를 달고 다니는, 새파란 애송이가 너냐?"
제일 연장자인 듯한 자가 물음을 던진다. 그러자 사문도가 피식 웃으며 반문한다.
"항주에서 아직 날 모르는 사람이 있다니, 당신은 이 곳 사람이 아니오?"
"애송이 주제에 거만하구나, 너...!"
분위기가 점차 험악하게 돌아간다. 그러자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넓게 둘러선다.
"훗, 그래. 날 찾은 이유는 뭐요?"
"큭큭... 뭐, 별로 원하는 건 없다. 네 어깨 위에 있는 하찮은 물건이 필요할 뿐이니
까."
"힘들 거요. 내 머리값은, 당신들 다섯 개 값으로도 모자랄 테니."
말이 안 통하는 상황이다. 다섯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고 사문도를 빙 둘러싼다. 다섯
방위를 점령해 선제공격(先制攻擊)을 막고자 하는 것이다.
"후후... 설마, 당신들 다섯이 조무환(趙武煥)보다 강하다는 건 아닐 테고... 역시,
무리겠군."
그 순간, 사문도의 손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움직인다. 그리고 단 1초 후, 그 거
한들의 옷고름이 모두 바닥을 툭 떨어진다.
"!!"
그저 바람이 지나갔으려니 했던 거한들은 하나같이 놀란 듯하다.
"마지막 경고다. 염라대왕의 면전 앞에 가고 싶다면 덤벼."
이젠 경어(敬語)고 뭐고 없다. 강한 명령조다. 어느샌가 무심하게 가라앉았던 사문도
의 눈이, 이젠 아예 차갑게 굳어 있다.
"거, 겁먹을 것 없다! 수적으로 우리가 우위니까, 덮치자!"
다섯 개의 검이 사문도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든다. 얼마 후면 사문도의 전신이 이렇게
찢어질 듯하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사문도가 움직인다.
푸학- 하고 다섯 거한들의 심장 부근에서 피가 분수처럼 치솟더니, 털썩 쓰러진다. 가
히 빛만큼이나 빠른 움직임이었다.
어느샌가 사문도는 그들의 포위에서 벗어나, 가던 길을 계속 걷고 있다.
"죽일 가치도 없는 것들이..."
자세히 보면, 분명 그들은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문도가 사람들에게로 다가서자, 사람들이 슬금슬금 피한다. 그 때, 갑자기 사문도의
모습이 장터에서 사라진다.
사문도를 공격했던 다섯의 거한. 그들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크... 크윽... 소, 소문보다... 열 배 이상은... 더 강한 놈... 일 줄은...!!"
이들의 상처를 자세히 바라보면, 놀랍게도 하나같이 이화(梨花) 모양의 상처가 새겨져
있다. 포위를 당해 막기도 힘든 상황에서, 사문도는 오히려 먼저 공격하고, 이화 모
양의 상처마저 새긴 것이다.
"다, 당주(黨主)님께... 알려야 한... 다...!!"
그러나 생각보다 이들의 상처는 심각했다. 결국 이들은 몇 걸음 움직이지도 못하고,
하나같이 바닥으로 다시 고꾸라진다.
그런데 당주란, 그들이 말했던 당주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사문도가 비무장(非武裝)에 도착한다. 마침 딱 경기 시간이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유난히도 크다. 사문도가 비무장 한쪽에서 발걸음을 멈추자, 이세
혁이 반대편에서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군요, 대영반 나리."
"허허, 나 역시 마찬가지라네."
둘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들은 서로를 향해 발을 옮긴다.
"대영반 나리, 제가 이길 거라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대영반 나리께서 이기실 거라 생
각하십니까?"
사문도의 질문에, 이세혁이 잠시 생각에 잠긴다. 사문도의 질문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
지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투는 비꼬는 어투다. 그러나 묻고 있는 사문도의 표정은 너무도 진지했다. 결국, 이
세혁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생각을 정하고 굳은 표정으로 대답한다.
"허허, 사 소협(小俠). 내 비록 쉰이 넘은 나이지만, 명색이 동창의 대영반이라네. 게
다가 금의위 제독(提督)까지 맡고 있는 몸이니 늙은이라고 얕봤다간 큰코다칠 거네."
이세혁이 말을 끊자, 사문도의 연분홍색 입술에서 감미로운 미소와 함께 은은히 울리
는 목소리가 이세혁의 귀전에서 울린다.
"후훗... 그렇게 자신이 있으시다면, 부탁 하나 드려도 될런지요?"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해 줄 의향은 있네."
사문도가 헛기침을 하고, 앞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린다.
"간단합니다. 만일 제가 대영반 나리를 꺾고 우승할 경우, 소협이란 칭호 대신에 대인
(大人)이란 칭호를 사용해 주십시오."
"!!"
오만방자한 말이다. 이세혁이 대영반이란 사실을 뻔히 알면서, 사문도는 이런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세혁이 비록 내색은 하지 않고 있지만, 불쾌함이 피어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두 사이의 거리는 약 6장(丈). 둘 정도의 실력이라면 한 걸음하고도 반 밖에 안 되는
거리다.
"둥... 둥...!!"
하고 북 치는 소리가 항주 하늘에 울려 퍼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세혁이 요대(
腰帶)에 매 놓은 검을 뽑아 쥐고 사문도에게 묻는다.
"대신 내가 이긴다면, 소협의 그 오만방자한 성격을 뜯어고쳐 줄 터이니, 각오하고 있
으시게!!"
이세혁의 신형(身形)이 번쩍인다 싶더니, 그대로 사문도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사문도는 그저 빙긋 웃더니, 좌수(左手)만 앞으로 죽 뻗는다.
"빙백신장(氷白神掌)!!"
"...!!"
놀랍게도, 사문도가 빙백신장을 날린 방향엔 정확히, 이세혁의 왼발이 빙백신장에 봉
인(封人)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이럴 수가... 분명, 보이지도 않았을 터인데 어찌...!!'
저만치서 이를 바라보고 있던 금의위 무사인 황보성(皇甫省) 역시, 두 눈을 부릅뜬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비벼댄다.
"대, 대영반 나리의 경공술(輕功術)이 잡혀!?"
무림(武林)에서도 경공술로 이름을 날리는 자들 이상의 경공술을 지닌 이세혁이란 걸
잘 알고 있는 황보성이었기에, 놀랄 수밖에 없다.
"경공술은 좀 쓰실 만 하군요. 그럼, 이번엔 초식으로 넘어갈까요?"
이세혁이 미처 왼발에 손을 쓰기도 전에, 사문도의 우수(右手)에서 나온 혈사장(血死
掌)이 빙백신장으로 굳은 왼발을 완전히 정상으로 돌려놓는다.
"내 비록 경공술이 잡혔다고는 허나, 검대 검으로 내게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 사 소협!!"
쏜살보다도 빠르고 잔혹한 손속이다. 이세혁의 검에서 흐르는 검기(劍氣)에, 사문도
역시 검을 손에 쥐고 가볍게 몸을 움직인다.
"유령쾌검(幽靈快劍)을 12성 대성하셨군요. 그럼, 저도 갑니다!!"
유령쾌검이란 단어에, 이세혁은 이번에도 적잖게 놀란다.
'유령쾌검을 알아...?!'
유령쾌검은 2백년 전, 명 제국의 3대 황제(皇帝), 영락제 때 1대 대영반이 창안해 낸
무공으로, 200년 넘어 황실 무공의 꽃이란 이름으로 내려온 무공이다.
유령쾌검은 원체 익히기 힘든 초식인데다가, 동창의 대영반에게만 전수되는 초식인지
라, 무학(武學)에 정통한 이라도 모르는 이가 많다. 그런 초식을, 사문도는 한눈에 알
아봤으니 이세혁이 놀란 것이다.
'허나 난 유령쾌검을 극성까지 연마한 사람이다... 황실 무공의 꽃이라 불리는 유령쾌
검을, 쉽게 깰 수 있을 리가 없어!'
자신의 무학에 대한 자신감과, 사문도에겐 안 질 거란 자존심, 자신의 무학과 경험을
믿기에, 이세혁은 금시 평정을 유지한다. 이를 본 사문도 역시 속으로 감탄하며 초식
전개 자세에 들어간다.
'역시 심기가 대단한 인물이다. 바로 평정을 되찾다니.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태
극검법(太極劍法)을 다시 써 볼까?'
사실, 사문도 자신이 만든 무공은 모두 검기나 검강(劍强)을 이용한 기술이라, 근접전
을 잘 하는 고수들을 상대하는 덴 불리한 면이 적잖게 많은 편이다. 그래서 태극검법
을 쓰리고 결정한 것이다.
'이 검식(劍式), 유용하게 쓰이는군...!'
사문도의 검과 이세혁의 검이 허공에서 부딪칠 때마다 '쨍' 하는 경쾌음이 들려 온다.
그리고 곧바로 이세혁의 유령쾌검이 이어진다.
정말 빠르다. 바람 지나가는 소리밖에 나지 않는다. 움직이는 팔과 검(劍)은 범인(凡
人)의 육안으로는 구분할 수 없는 경지까지 이른 것이다.
이젠 둘의 모습도 관중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검끼리 부딪치는 소리만 챙챙
거리며 날 뿐이다. 나타났다 싶으면 다시 사라지는 걸 반복하는 두 사람의 대결에, 관
중들이 양손에 땀을 쥔다.
그렇게 붙기를 1각 여, 이세혁의 이마에서는 조금씩 땀방울이 떨어진다. 그에 비해 사
문도에게서는 땀이란 건 찾아볼 수가 없다.
재빨리 움직이는 사문도의 안면에서, 미소가 서서히 드러난다.
'후후... 이젠 이러기도 지겨우니, 끝내 볼까?'
한창 잘 막아내던 사문도가, 실수를 한 듯 갑자기 몸을 휘청인다. 그러자 이세혁은 빈
틈을 놓칠세라 번개같이 달려들어 사문도에게 검을 죽 긋는다.
"?!"
허나 이건 어떻게 된 일인가? 분명, 검에 그야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어야 할 사문도
는 말짱하다. 오히려 그었던 검이 퉁겨나가며, 자신이 휘청이게 된 것이다.
"헛...?"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기엔 이미 늦었다. 사문도의 섬섬옥수(纖纖玉手)가 이미 이세혁
의 우수(右手)를 향해 뻗고 있다.
"광마혈장(狂魔血掌)!!"
피보다 진한 적색 기류가 사문도의 좌수에서 그대로 이세혁의 검(劍)을 쥐고 있는 우
수(右手)로 뻗어 나간다.
"윽...!"
이세혁이 답답한 신음을 날리고, 곧이어 우수에 쥐고 있던 검을 바닥에 떨어트린다.
그 틈을 놓칠까 봐, 사문도가 곧이어 반격하려 들어온다. 그러자 이세혁이 얼른 몸을
피해 비무장 끝으로 도약한다.
이제 경기는 일반적인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세혁은 우수(右手)에 상처를 입은 반면,
사문도는 상처 하나 없이 만족한 표정으로 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훗... 걸려드셨군요, 대영반 나리."
"현문강기(玄門剛氣)... 인가?"
이세혁의 질문에, 사문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이세혁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대체 내공이 몇 갑자가 쌓여 있기에... 2갑자의 공력을 넣은 유령쾌검을 상대하고도,
그 정도의 현문강기를 형성시킬 수 있단 말인가?"
"7갑자(甲子) 이상입니다."
"... 7갑자라..."
보통 무림에서 내공이 2갑자가 넘으면, 정파 6대 고수(六大高手)를 제외하고 나머지와
는 붙어볼 만 하다고들 한다.
"이미 인간의 경지를 넘은 몸이로군. 허허..."
선혈이 흘러내리는 오른손을 꽉 움켜쥔 이세혁이 허탈한 웃음을 날린다.
"하늘이 절 도왔을 뿐입니다. 인간의 경지를 넘었다니, 전 아직 멀었습니다."
사문도가 검을 이리저리 빙빙 돌리다가 공중으로 휙 집어던진다. 우연인지, 실력인지
검이 정확하게 검집에 박힌다.
"항복하실 테지요?"
"...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니, 공주마마께서도 이해해주 실 테지.
내가... 졌네."
황실 제일의 고수, 동창의 대영반이자 금의위의 지휘자 이세혁이 졌다. 약관도 되지
않은, 마치 서생(書生)으로 보이는 소년에게...
한순간의 판단 오류로 패배를 인정하기엔 너무 아쉬운 탓이었을까. 항복한 노장의 얼
굴엔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사문도가 부근에 떨어져 있던 이세혁의 검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러자, 검이 둥실 떠
오르더니 사문도에게로 곧장 날아온다.
"겨, 격공섭물(隔空攝物)!!"
관중들이 이를 보고 벌린 입을 다물 줄을 모른다.
허나 사문도는 그저 덤덤하게 공중에 떠 있는 검을 움켜쥐고 대강 훑어본다. 가히 신
병(神兵)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날이 곧고 깨끗한 검이다.
"대영반 나리의 검, 명검(名劍)이군요."
"아, 그럴 테지. 중원 제일의 대장장이가 황실에 납품한 것을 내가 받은 거니까."
"중원 제일의... 대장장이라..."
황실에 무기를 납품하는 돈으로 살아가는 대장장이를, 사문도가 모를 턱이 없다.
낙양(洛陽)의 한성도(漢成道), 바로 한화경의 부친이자 선친(先親)의 죽마고우(竹馬故
友)니까.
잠시 회상에 잠겨 있던 사문도가, 문득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이세혁에게로 다
가간다.
"검 여기 있습니다."
공손하게, 양손으로 검을 받쳐들어 넘겨준다. 그러자 이세혁이 고소(苦笑)를 짓는다.
"고맙소, 사 대인(大人). 그리 오만방자한 인물이 아니라서 다행이군."
'대인'이란 말에, 사문도가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그 때, 이세혁이 사문도에게 왼손을 내민다. 그리고 사문도가 기꺼이 왼손을 내밀어
이세혁의 주름진 손을 잡는다.
다시 한 번 관중들의 함성이 항주의 하늘을 가득 메운다. 심판장이 뭐라고 소리지르는
게 함성에 묻혀 지워질 정도로 큰 소리다.
"사 대인, 이젠 무림에서도 꽤나 유명인사가 됐겠구려. 내 비록 무림인은 아니나, 무
당파(武當派) 조무환(趙武煥)의 무공 수위는 대강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를 간단히 제
압했으니..."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라 생각합니다."
"... 단지?"
그 말만 남기고, 사문도가 이세혁에게 간단히 포권(抱券)을 하고 출구 쪽으로 걸어간
다. 이세혁이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저런 이들이 있는 이상... 대명제국은 적어도 폐하 대에서 망하지 않을 것이다. 대명
제국은... 결코 망하지 않아!"
질풍귀(疾風鬼) 강천비와 고독랑 사문도. 후일 대명의 존속을 위해 싸울 인재들이란
걸 이세혁은 너무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 이세혁에게 심판장이 다가오더
니, 염려스런 표정으로 묻는다.
"... 괜찮으시겠습니까?"
"허허, 물론."
"아, 아니... 제 말뜻은, 이렇게 깨지셔도... 괜찮으시다는 겁니까?"
그러자 이세혁이 만면에 미소를 띠며 왼손으로 사문도를 가리킨다.
"... 됐네. 우리 대명(大明)은 이걸로 된 거야. 저런 소년들이 있는 이상... 이젠 나
도 여진(女眞) 일은 한시름 놓을 수 있다네. 저런 소년들이 있는 이상은..."
진시(辰時) 정각에 시작했던 군웅대회의 대미가 장식되고, 이제 군웅대회의 시상식이
다. 비무장 한가운데엔 단 두 사람이 있다.
심판장이 사문도에게 황금 열 냥 짜리 전표 백장을 전달한다. 사문도가 그걸 받아 쥐
고 포권을 하자, 비무장을 박수소리가 뒤흔든다.
'훗, 전표(傳票) 백 장이라니... 하긴, 황금 천 냥을 어떻게 끌고 가겠어.'
속으로 피식 웃으며 전표 100장을 들고, 비무장 밖으로 나가는 사문도를, 수백 명의
사람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왜... 귀혼오마(鬼魂五魔)가 돌아오지 않은 거냐?"
"그, 그것이... 저기 있는 애송이에게 당해버렸다는..."
귀혼당주 귀객(鬼客) 장백경(長白鏡)! 그가 비무장에 있는 사문도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휴... 내가 그리 건들지 마라고 했거늘... 쯧!"
장백경이 혀를 차더니, 곁에 있는 수하에게 명을 내린다.
"귀혼오마를 이겼다니, 3백으로는 안 된다. 3백을 추가하라 이르라."
"그, 그럼... 6백이나 쓰실 생각이십니까?"
수하가 놀란 듯 장백경에게 되묻는다. 그도 그럴 것이, 단 한 사람을 잡는데 600명이
나 되는 인원을 쓴다니. 제아무리 고독랑이라 하더라도 600 정도는 숫자가 좀 많은게
아니냐는 것이 수학의 견해다.
"얕볼 상대가 아니잖느냐. 깨끗하게 제거하라는 독고천(獨孤天)의 명령이다."
"..."
"더 이상 되묻는 건 용납지 않겠다. 즉시 300을 더 끌고 오라!"
"... 존명(尊命)!!"
장백경이 다시 고개를 돌려 고독랑 사문도를 바라본다.
'흐흐, 덤으로 황금 천 냥도 내가 맡기로 하마. 기생오라비 같은 네놈에게 맡겨 봐야,
기루(妓樓)에서 탕진밖에 더 하겠느냐?'
득의의 웃음을 짓는 장백경이 비무장에서 발걸음을 돌린다. 어느새 그의 안면에는 사
악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전표 뭉치를 보따리에 정리해 두고, 사문도가 숙소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숙소까지
약 50보 정도 남았을까? 숙소로 가는 귀퉁이를 돌아서자, 사문도의 눈에 한 명의 소
녀가 들어온다.
"... 공주님 아니십니까."
표연공주(漂燕公主) 주은비, 그녀가 귀퉁이 벽에 기대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 이제야 오셨군요. 많이 기다렸어요."
"저를... 말씀입니까?"
의아한 눈초리로 사문도가 자신을 가리키며 묻자, 주은비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인다.
"긴히 할 얘기가 있는데... 시간 좀 내 주실 수 있겠죠?"
"후후... 다른 분 부탁도 아니고, 공주님 부탁인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승낙하겠다는 사문도의 발언에, 주은비가 먼저 발걸음을 옮긴다.
'공주님께서, 일개 무림인에 불과한 내게 무슨 볼일이...?'
사문도가 주은비의 뒤를 따르며 한 번 생각을 해 보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머릿속이 더 복잡하게 꼬일 뿐.
결국, 주은비에게 맡기기로 하고 사문도가 맘을 푹 놓는다. 설마 하니 공주가 자신을
해할 리는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은비가 사문도를 데리고 온 곳은 비무장 근처의 작은 주막(酒幕)이다. 그곳에서 자
리를 잡고, 간단하게 조향라 한 접시를 시켜 그걸 먹으며, 사문도와 주은비가 이야기
를 나누고 있다.
"제가 여기까지 사 소협을 안내한 이유가 궁금하실 테지요?"
"예. 솔직히 그렇습니다."
덤덤한 눈길로 주은비를 바라보는 사문도 말문을 연다.
"그리고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왜 공주님과 대영반께서 이곳 항주에 계신 건지
,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탁 하고 술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는 사문도의 얼굴엔, 진지함만이 엿보인다.
"휴... 그럼, 전자(前者)부터 설명해 드리도록 하죠. 괜찮겠죠?"
주은비가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자, 사문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
인다.
"사 소협, 이제 어디로 가 볼 생각이시죠?"
"글쎄요. 현재 천하를 방랑하는 중이라... 어디로 가야할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다'는 사문도의 솔직한 답변에, 주은비에게서 일말의 희색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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