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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글을 올려 봅니다. 3월 신규 발령을 받아 초딩들과 함께 이제 막 한 학기를 보냈네요. <오늘의 교육>을 읽은 지는 꽤 됐는데 이제야 교육의 근본에 대한 고민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써 보았습니다. 그냥 글쓰기 연습이면서 한 번 저 스스로 읽었던 글들의 내용을 정리하는 글이라 참 부족합니다. <오늘의 교육> 뿐 아니라 다른 책 읽은 것도 포함되어 나름대로 논의를 종합해 본 것이지만 그래도 <오늘의 교육>의 사유들이 큰 바탕이 되었기에 '오늘의 교육을 읽고'에 올리기에 부합하는 것 같아서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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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과 성찰을 위한 사유1)의 주춧돌 세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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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오랫동안 글쓰기를 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 같다. 게으름 탓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짧은 시간 동안 속에서 자꾸만 뒤엎어지는 가치관과 사고의 흐름 때문에 도저히 생각을 정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해야겠다는 마음은 계속 있어왔지만 매일매일 수업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벅찼기에 노트북을 열고 몇 자 끄적이다가 닫아버리기만 몇 번째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 본격 방학이 찾아온 어느 날, 페이스북 친구인 함영기 선생님(현 서울시교육연구원 교육연구관)이 쓰신 포스팅을 읽게 되었다. 국어교육에 관한 생각에 대해 쓴 글이었는데 쿵 하고 마음을 때린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의 학생들은 잔인한 대학시험을 보기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준비한다. 극단의 경쟁이 학생들의 자살률을 높인다. 이 어리석은 시험을 통과하여 대학에 들어가면 학생들은 독서와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독서와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문득 나의 초중고등학교 시절, 그리고 대학교 1학년 시절을 되돌아보면 지금 읽고 쓰는 것에 견줄 수 없이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갑자기 두려워졌고, 그래서 이 방학 기간에 교사생활을 시작하면서 다양한 글을 읽으며 또 수업을 경험하며 고민해온 교육에 대한 사유를 정리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막막하긴 하지만, 이전에는 그저 개인적인 생각과 감정을 배설하는 글쓰기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물론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지만, 보다 전문적인 글쓰기를 하고 싶다는 동기도 있고 그래서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한 번은 필사적인 자세로 써야겠다는 생각에 이렇게 오래간만의 글쓰기를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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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삶을 시작한 후 본격적인 교육에 대한 사유의 시작은 학교 수업동아리에서 교감선생님께서 읽어 보라고 주셨던 한 보고서를 읽으면서 시작되었다. 연구부장님이 친히 인쇄해서 건네주신 A4용지 400페이지에 가까운 이 종이뭉치는 한국교육개발원에서 발간한 <21세기 창의적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의 미래전략 연구>라는 제목의 연구보고서였다. 이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을 요약하면 '오늘날 국제적인 지식기반경제사회에서의 산업이 요구하는 역량이 바로 창의성이며,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경쟁력 확보를 위해 학교교육에서는 창의적 인재 양성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보고서를 읽고 "교육의 목적이 참 멀리 떨어져 있어 학생에게도 교사에게도 와 닿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장 먼저 했다. 수업 시간에 만득이 장난감을 주물럭대며 놀다가 선생님에게 혼나는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 "세상은 오늘날 이러이러하니까 너는 창의적 인재가 되어야 해."라는 말에 어떤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을까? 또한 그러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는 이 미래지향적인 창의적 인재상에 얼마나 공감하고 이를 뚜렷한 비전으로 가르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경제적 성장을 목적으로 하여 교육의 영역에마저 효율과 시장경쟁의 방식을 들여온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교육관은 1995년 5.31.교육개혁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진행되어 오고 있는 것인데2), 1991년에 태어나 이 교육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자라온 나 자신과 친구들을 돌아봤을 때 우리가 우리나라의 공교육을 통해 시장이 요구하는 창의적인 인재로 자라왔는가라는 질문에 매우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지난 학창시절을 돌아봤을 때 내게 유의미하다고 생각되는 경험들은 국가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그저 '나 스스로가 행복했던' 시간들 가운데 더 많이 존재했다. 리코더가 좋아 혼자서 게임 음악을 리코더로 카피하기도 했던 초등학교 4학년 때, 열정적이었던 체육 교과 담임 선생님 덕에 반 대부분의 학생들이 참여해 춤을 연습하고 학교 축제에 올렸던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 청소년수련관에서 연습하고 길거리에서도 공연했던 중학교 3학년 때, 좋아하는 친구를 생각하며 개인 누리집에 사진과 함께 글을 써서 올렸던 중고등학교 시절 등등... 이렇게 다시 쓰며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니 오히려 공식적인 학교 수업에서는 내게 의미 있는 경험을 거의 주지 못했다고 해도 크게 잘못되진 않을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이 연구보고서에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고, 수업동아리에서 보고서를 읽은 생각을 나눌 때 이런 불편한 마음을 담아 이야기했다. "저는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한 창의적 인재 양성에 두는 시각에 잘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너무 멀게 느껴지기도 하고, 몸소 이 교육관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교육을 초중고 12년 경험한 제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의미 있는 영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학생들이 미래에 어떠어떠한 인재가 되어야 하니까 잠시 오늘의 행복을 유예하자고 하는 교육보다는, '지금 오늘 나의 수업을 통해 아이들이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저는 던지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진행된 나의 생각 가운데 이미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교육개혁안의 총론이 얽매인 관습을 넘어 교육 최전선인 수업 현장에 적용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가? 학생들이 창의적 인재가 되기 위해서는 과연 오늘의 행복을 유예해야만 할까? 그러나 그 모든 질문들에 앞서 먼저 지금까지 한 번도 던져보지 않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기로 했다. "학교 교육은 왜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교육에 대한 내 나름의 생각들이 재점검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공립학교 교사이다. 그런데 만약 공교육의 역할이 국가로부터 어떠어떠해야한다고 요구받고 있다면 나는 하나의 독립된 교사라기보다는 국가의 교육공무원으로서의 정체성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공교육의 역할이라는 것이 내가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나는 나의 시선을 공교육 바깥, 그러니까 대안학교라든지 탈학교 학생들이라든지 이런 쪽으로 돌리거나 아니면 아예 새롭게 교육의 역할을 스스로 정립해야 할 것이다.
교육은 왜 존재하는가? 사회학자이자 교육학자인 뒤르켐E.durkheim은 "교육은 곧 사회화"라고 했다. 즉 교육을 전체사회의 한 하위체제로 파악하여 사회의 존속을 위한 나름대로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본 것이다.3) 1858년에 태어난 이 학자의 의견은 오늘까지도 일반 대중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큼 상식적인 주장으로 들리지만, 나는 이 의견이 상당히 국가 중심적이라고 생각했다. 교육이 곧 사회화라는 말 속에 배움의 주체인 학생은 어디에 있는가? 아니 그 전에, 국민이 국가의 존속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의 존속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 아닌가? 비록 세월호 참사를 통해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라는 주장이 국가와 국민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국가에 세금을 내고 복지를 이야기하고 하는 것들은 본질적으로 국가는 국민의 어떠함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즉, 국가보다 국민―보다 바람직한 표현은 사람―이 먼저이다. 그렇다면 다시, 교육의 존재 이유는 국가보다 먼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다 할 수 있다.
한 사람. 여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한숨이 나왔다. 교육이 관심을 두는 대상은 과거에는 국가였고 오늘날에는 시장이 아닌가? 한 번도 교육이 사람을 위한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 국가를 위해 맞추어져 있던 반공과 독재로 점철된 야만의 시대가 부모님 세대가 자라온 교육의 환경이었다면, 절차적 민주주의가 획득된 이후의 교육은 시장에 맞추어지도록 급격하게 전환되었다. 그 전환의 시작이 바로 5.31.교육개혁안이었다. 여기에 IMF 구제금융체제가 들이닥치고 나니 이제 ‘교육은 무엇이다’라는 거창한 담론들 따위는 상관없이 교육은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상급학교를 진학하여 학력과 학벌을 얻어 남들보다 먼저 시장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교사들은 최규석의 만화 <송곳>에서 공장의 조장들이 했던 일과 비슷한 일을 하게 되었다. “조장들은 매주 잘라야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올리는 것 같았다. 일을 잘 배우지 못하는 사람, 게으른 사람, 실수하는 사람, 조장에게 밉보인 사람,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무언가 문제가 있었을 사람들.” 그저 맡겨진 학생에게 교과서에 주어진 내용을 전수하고, 공부를 잘 하지 못하는 학생, 게으른 학생, 실수하는 학생,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무언가 문제가 있는 학생들을 보며 그들의 미래를 입시의 실패로 귀결 지은 채 그저 얼른 졸업시켜 상급학년과 상급학교에 진학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아 버렸다. 그 과정에서 모든 책임은 학생이든 교사든 ‘개인’에게 덧씌워졌다. 더 안타깝게도, 이태백이니 십장생이니 88만원 세대니 하는 말이 유행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제는 자본주의의 성장이 한계에 다다른 상황 속에서 교육을 통해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계층 상승을 할 수 있다는 신뢰마저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 새삼 격월간지 <오늘의 교육>이 창간 때부터 다루었던 담론인 ‘교육 불가능’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학교는 영토를 다 잃어버린 제왕이 되었다. 이 현실에서 새로운 변화를 기약하기에는 삼박자가 다 부족하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학부모는 학교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못할 것이다. 달리 다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부응하여 교육 관료들은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지금껏 해 왔듯이 모든 것을 수치화하고 그것으로 서로 경쟁시키는 데 몰두할 것이다. 교사 집단은 이미 깊숙이 계층화되어 있다. 그저, 별 탈 없이 오늘 하루가, 한 학기가, 1년이 마무리되기만을 바라는 보신주의가 득세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질 것이다. 먹고살기가 강파르게 변해 가면 작은 기득권이나마 쥐고 있는 세력은 물질적 이해관계 외에는 철저하게 무심해진다. 교원노조는 이런 현실을 추종하는 경향이 짙어질 것이다. 혹시 모른다. 경제 상황이 더욱 나빠져서 감봉이나 감원을 해야 할 때, 그때는 아마도 폭발적으로 분출할 것이다. 교사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아이들은 삶의 기술도 가르쳐 주지 않고, 성장의 경험도 제공해주지 않으며, 노동시장으로의 진입도 보장해 주지 않는, 오직 자신들을 통제하려고만 하는 학교를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교육 불가능은 이제 대세가 될 것이다.
(이계삼, <오늘의 교육> 창간호, ‘오늘날 교육 현장의 ‘교육 불가능’에 대한 사유’ 중에서)
막 교직에 첫발을 내딛은 교사로서 지금이 ‘교육 불가능의 시대’임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현 상태를 유지하면서 ‘교육에서 희망을 찾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허망하고 기만적이라는 것은 나도 다른 사람들도 경험자로서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오늘의 교육>이 말하고자 하는 바 역시 ‘교육은 더 이상 불가능하니 좌절하자고 절망하자’가 아니라 그 폐허를 직시하고 폐허 위를 출발선 삼아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타치아노의 그림 <그리스도의 매장>에서의 아리마대 요셉처럼, 슬퍼하고 분노하되 현실을 직시하고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이 예수의 시신을 무덤으로 옮기는 일이며 나는 이 일을 무사히 마쳐야 한다’고 생각하며 다부지게 예수의 다리를 부여잡는 강인한 팔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4) 그렇다면 다시, 그 새로운 전환을 논하기 위해 교육의 의미를 다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인식 속에 깊이 뿌리내린 ‘교육=학교교육’이라는 잘못된 등식부터 바꾸어야 한다. <오늘의 교육>이 내게 준 영향 중 하나가 학교 밖의 공간으로 시야를 넓혀준 것이다. 교육은 학교 안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학교 밖에서도 있으며, 어쩌면 우리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을지도 모르고, 새로운 대안을 창조해낼 수 있는 공간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이야기되어온 ‘교육 불가능’이라는 담론은 정확히 말해 ‘학교 교육 불가능’, 더 엄밀히 말해서는 취업과 출세를 위한 관습적인 학교교육의 기능적 역할이 소진되어 가는 ‘관습화된 학교교육’의 불가능이다.5) 관습적인 학교교육이 갈 길을 잃자 학생은 학생대로 무엇을 위해 공부해야 하는지 혼란스럽고, 교사는 교사대로 어떤 가르침과 배움을 지향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는 과정 가운데 있는 것이다.
물론 초등학교는 노골적으로 취업과 출세를 지향한다기보다는 기초적인 생활 습관과 학습 습관 형성을 주된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관습화된 학교교육’의 모습이 대학교나 고등학교, 중학교보다는 훨씬 교육 불가능의 정도가 약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교실에서 소위 ‘문제 많고’ ‘산만한’ 아이들을 만나다 보면 문득문득 머릿속에서 이 아이들의 학력과 학벌, 미래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떠오르곤 하는데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에 소름이 끼치곤 한다. 초등학교에서 완전학습에 대한 기대를 버린 지는 이미 오래다. 배움이 느린 아이들을 나름대로 열심히 지도하는 선생님들도 계시지만 그마저도 ‘선생님은 회의 갔다 올테니 문제집 풀고 검사 맡고 집에 가라’는 식인 경우가 많으며, 학원이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경우가 솔직히 대부분이다. 이미 학원과 초등학교가 적대적 공생 관계가 아닌 협력적 공생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관습적인 학교교육’이 위기에 다다랐다는 것을 나는 초등학교 교사로서 실감나게 느낀다. 위에서 이계삼이 묘사한 ‘삶의 기술도 제공해주지 않고, 성장의 경험도 제공해주지 않으며, 노동시장의 진입도 보장해주지 않는, 오직 자신을 통제하려고만 드는 학교’라는 말이 그토록 안타깝게 공감되는 교사는 나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학교는 그나마 학생들을 한데 모아놓은 데서 발생하는, 학생 서로간의 상호작용에서 일어나는 배움과 경험과 즐거움이 있기에 겨우 버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비관적으로 보이는 이 위기도 다르게 보면 새로운 전환의 기회이지 않을까? 취업과 출세를 위한 관습화된 학교교육의 비정상이 무력해지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점점 실패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와 싸우는 데 힘을 덜 쏟는 대신 그 힘을 새로운 교육에 대한 상상력을 학교 안팎에서 더욱 펼치고 실천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학교교육의 존재 의미에서부터 시작해 상상력을 펼쳐 보아야 할 것이다. 이혁규는 이미 이 질문을 던지고 학자답게 면밀하고 정확하게 사유를 펼치고 있다.
학교교육의 의미와 관련하여 교육학자들의 논의를 조금 더 끌어와 보자. 학교교육의 가치에 대해서 교육학계에는 교육 내재론적 접근과 교육 외재론적인 접근이 존재한다. 교육 내재론적 접근은 무엇인가를 배우고 사유하고 성찰하는 삶 자체가 가치 있다는 입장인 데 비하여 교육 외재론적 입장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 사회경제적 지위 획득, 국가 경제 발전, 사회정치적 통합과 같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교육 내지 학교교육을 바라보는 입장이다. 현재의 학교교육의 위기는 교육 활동에 참여하는 개인의 입장에서 보나 국가 전체의 입장에서 보나 교육의 외재적 효용성이 낮아진 상태에 있다. 오늘날 취업을 위한 준비라는 입장에서 보면 학교보다는 사설 취업 준비 기관이 더 효율적인 경우가 많다. 기업은 기업대로 학교에서 기업에 필요한 인력을 길러 내지 못하고 있다고 투덜대며, 정부는 정부대로 우리 공교육이 국가 경쟁력을 갖춘 인재를 양성해 내지 못한다고 위기론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위기론 속에서 학교교육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자. 학교교육이 한 개인이 직장을 얻는 데도 별로 기여하지 못하고 집합적으로 국가 전체의 경제성장에 미치는 효과도 생각보다 크지 않다면 학교교육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 우리는 교육 내재론적 입장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몇 년 전 100만 권이 넘게 팔린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라는 책에는 ‘교육을 더 시킨다고 나라가 더 잘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장이 있다. 장하준은 “높은 교육 수준이 국가 번영으로 이어진다는 증거는 사실 놀라울 정도로 빈약하다”, “경제를 발전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교육을 확장하면 크게 실망하지도 모른다. 교육과 국민 생산성 사이의 연관성이 약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교육 외재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경제성장을 위해서 학교교육은 그다지 가치 있는 투자처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학자인 장하준은 교육에 대해서 어떤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가? 그는 이 장의 마지막에서 “교육은 소중하다. 그러나 교육의 진정한 가치는 생산성을 높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잠재력을 발휘하고 더 만족스럽고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장하준의 주장에서 교육 내재론자와 다소 유사한 주장을 발견하는 것은 흥미롭기까지 하다.
(이혁규, <오늘의 교육> 19호, ‘‘교육 불가능의 시대’ 이후를 사유하기’ 중에서)
이혁규는 이 위기론 속에서 학교교육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자고 하면서, 그 역할을 교육 내재론적 입장에서 찾아보자고 말하고 있다. 그 역할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뒤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그 전에 나는 이 위기를 기회로 여기는 자세를 다시 한 번 역설하고 싶다. 학교교육이 그동안 국가와 시장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왜곡되어 왔으나 이제 그 밑천이 드러나 너덜너덜해진 상황 속에서, 학교교육이 본래 담당해야 했던 역할을 찾아 ‘이렇게 하자!’고 서로서로 도전하며, 관습적으로 달려왔던 죽은 교육의 트랙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만드는 여정에 함께 동참하고 싶은, 아니 동참해야만 숨을 쉴 수 있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냥 이대로 관습적으로 흘러가는 교육의 흐름에 앞으로 남은 교직 생활을 맡긴다고 생각하면 끔찍하고 참을 수 없기에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동참의 시작은 교육의 근본에 대한 사유일 것이다. 다행히도, 먼저 그 길을 정찰병처럼 나서서 사유하고 실천하고 성찰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다. 꼭 학교교육에 한정되어 있지 않더라도, 앞선 사람들에 의해 던져진 사유와 성찰들을 정리해보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으로 그 여정을 시작한다면 아주 좋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내가 그동안 읽어왔던 글에 등장하는 사유를 중심으로 교육의 근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려 한다.
‘교사의 교사’라 불리는 파커 파머Parker J. Palmer의 사유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기독교적 관점이 강하긴 하지만, 그가 그의 책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에서 근대 이후 교육에 팽배해진 객관주의의 문제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온전성’을 회복하자고 말하는 것은 앞으로 살펴볼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이야기하는 <오늘의 교육>의 사유나 ‘자립’과 ‘공생’을 말하는 윤구병의 사유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파머가 위의 책에서 펼치는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객관주의의 영향 때문에 관습적 교육은 세계를 조작의 대상으로 보고 있으며, 앎을 자의적 과정으로, 세계를 자체의 필연적 모양이나 질서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 2) 그러나 진정한 앎은 사랑의 행위로서, 앎의 주체와 대상을 묶으며 서로를 관련성, 상호성, 책임성으로 부른다(call). 따라서 사랑으로 변화된다면 본래 창조된 모습인 공동체를 회복하고 재창조하는 일에 지성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3) 이 창조적 역할을 회피하려고 하는 우리에게 ‘회심’이 필요하며, 그 회심이란 바로 진리에 대해 순종하는 것이다. 4) 그러나 객관주의적으로 진리를 무엇(whatness)화한다면 결코 진리를 알 수 없으며, 전인으로서 관계를 맺을 때만이 진리를 알 수 있다. 진리는 인식 주체와 대상 사이의 개방적이고 신실하고 모험적인 상호 침투인데, 진리를 이렇게 인격적으로 보는 관점은 외부성과 책임성을 가진 세계, 관계와 대화의 상호 변화의 공동체로 이끌며, 우리는 존재의 거대한 사슬의 한 고리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5) 가르침이란 곧 ‘진리에 대한 순종이 실천되는 공간을 창조하는 일’인데, 관습적 교육이 교실을 실천을 ‘준비’하는 곳으로 보는 것과 달리 교실은 진리의 규칙이 지배하는 세계의 축소판이며 이 규칙 안에서 아는 법과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여기서 ‘상호성’, ‘관련성’, ‘책임성’, ‘본래 창조된 모습인 공동체를 회복’, ‘인식 주체와 대상 사이의 상호 침투’, ‘관계와 대화의 상호 변화의 공동체’, ‘우리는 존재의 거대한 사슬의 한 고리’, ‘교실은 진리의 규칙이 지배하는 세계의 축소판’과 같은 표현에 책갈피를 꽂아 두고 교육공동체 벗의 논의로 넘어가보자. 벗이 격월간지 <오늘의 교육>을 통해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다시 논의하고 있는 요즘, 편집위원들의 글을 읽으며 나는 파머의 논의와 일맥상통하는 어떤 흐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정용주는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농적 전환, 동시대적 전환, 정치적 전환으로 범주화하여 논한다. 각각의 논의를 순서대로 살펴보자.
바렐라와 마뚜라나에 의해 정교화된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라는 개념은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한다. 하나는 우리의 인지가 여러 가지 감각 운동 느력을 지닌 신체의 경험에 의존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별적 감각 운동 능력들 그 자체가 보다 포괄적인 생물학적, 심리학적, 문화적 맥락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인지와 활동, 즉 신체와 정신은 근본적으로 분리 불가능한 것이며 인지 체계에서 지각과 활동은 함께 진화하는 것들이다. 이것은 인지를 이미 세계에 존재하는 속성들에 대한 재현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며, 배움 활동에 참여하는 자가 국지적 상황들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행위들을 이끌어 가는가 하는 점을 연구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지적 상황들은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고 배움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의해 부단히 변화하는 것이며, 듀이식으로 말하는 대상과 주체 사이의 경험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주체와 대상이 총체적으로 만나는 장을 연다. 경험은 주체 전체가 대상과 총체적으로 만나는 체화된 인지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체화된 인지는 근대 교육이 분리했던 신체와 정신이 사실은 긴밀한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을 분리시키고 하나의 우월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말한다.
(중략)교육의 생태적 전환의 체화된 인지 개념을 구체화시키는 것은 교육의 농적 전환이다. 근대가 전근대적인 것이라고 추방한 농적 경험은 몸 교육을 통해 인지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을 통합하여 순환과 자급적 삶을 경험하게 하는 핵심이다.
근대적 교육학은 주체가 실천을 통해 자기를 변형시키는 과정인 실천과 경험의 문제를 지워 없애며 교육을 이해의 성장이라는 인식론의 문제로 바꿔 놓았으며 학교 밖을 담장으로 나누고 맥락을 제거한 지식의 탐구를 해 왔다... 근대 교육학은 학생 개개인을 주체라는 근대적 틀 속에 묶어 두고 개인적 삶을 지웠다. 또한 교육의 공간에서 현재 시제는 사라지게 되었으며 현실 참여와 직접 행동은 학생으로서 하지 않아야 할 도덕으로 작동했다. 미래의 불확실한 삶을 염려하게 되고 타자와 공감하는 연대 또한 사라졌다. 학교와 교육에서는 미래 시제만을 다루게 되는데 이러한 미래 시제는 시험이라는 분류와 줄 세우는 시선과 결탁해 개인의 현재적 삶을 제거했다.
(중략)본래 교육은 삶을 위한 것이었으며 오늘을 수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는 현재의 거부를 통해 미래를 산다. 현실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현실성을 존중하고 자유를 실천하는 것을 제거하고, 우리가 행하고 사유하며 말하는 주체로서 스스로를 구성해 가면서 실험적 태도를 통해 우리 자신을 자유로운 존재로 실현하는 데 다가갈 수 없게 만들었다. 교육의 동시대적 전환은 현행적인 사유의 체험을 통해 모든 가능한 바를 현재화함으로써 미래를 소거하는 전환을 의미한다.
교육적인 활동의 공간, 시간, 형식의 분할 체계를 좀 더 섬세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언어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모두 이해하는 공유물이지만 지배자만이 말할 수 있고, 피지배자는 단지 듣는 존재가 될 때 전자만이 정치적 존재가 된다. 이처럼 교육은 탁월함에 따른 분할 체계, 무능과 유식이라는 분할 체계를 수립하면서 학생들과 불평등한 지능을 수립한다.
또한 학생들은 공동체의 어떤 공적 사무도 담당하지 못한다. 이유는 학생들이 학교라는 틀 속에서 공부하는 일 이외에 어떤 것에도 종사할 시간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략)따라서 교육의 정치적 전환은 학생을 능동적 존재로 만들고, 수업과 교실을 정치적 행동의 장소로 전환하고, 학생들이 지능의 평등을 전제로 교사들과 자유로운 질문과 탐구 속에서 새로운 사회관계의 모델을 창안하게 하고 나아가 모든 참여자로 하여금 공동의 감각을 구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용주, <오늘의 교육> 26호, ‘생태적 탈근대로서의 교육의 생태적 전환’ 중에서)
농적 전환, 몸의 교육의 ‘경험을 통해 주체와 대상이 총체적으로 만나는 장을 연다’는 표현에서 파머가 말한 ‘인식 주체와 대상 사이의 개방적이고 신실하고 모험적인 상호 침투’가 겹쳐진다. 동시대적 전환에 관한 논의는 교육의 현장을 ‘준비’라는 미래 시제에 지배당하게 하지 말고 오늘, 지금, 현재를 살고 실천하며 스스로를 구성해가는 교육을 하자는 것으로, 파머가 ‘관습적 교육이 교실을 실천을 ‘준비’하는 곳으로 보는 것과 달리 교실은 진리의 규칙이 지배하는 세계의 축소판이며 이 규칙 안에서 아는 법과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 것과 일치한다. 모든 참여자로 하여금 공동의 감각을 구현하자고 말하는 정치적 전환은 파머가 ’관계와 대화의 상호 공동체‘라고 말한 것과 겹쳐질 수 있다.
파머가 근대의 객관주의로 인해 갈기갈기 찢어지고 깨어진 우리를 다시 온전성으로 부르고 하나의 공동체로 엮어주는 영적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고 말한 것과 관련해서는 편집위원 윤상혁의 사유를 살펴보자.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과연 이 명제는 참인가. 데카르트는 신체와 정신은 상호 간의 연관을 필요로 하지 않고 독자적인 권리에 따라 별도로 존재하며 독립된 개별적 실체라고 가정하였다. 그러나 신체와 정신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자연을 추상적인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로 보고, 각 부분들을 쪼개어 분석하는 기계적 세계관에 대하여 전체적 연관성을 망각하게 함으로써 각 유기체가 그 환경과 맺는 올바른 관계를 무시하게 된다고 비판하였다.
(중략)파국을 막기 위서는 세계관의 전환이 필요하다. 세계관을 재구성한다는 것은 새로운 행동을 유발하는 새로운 가치 체계를 만든다는 뜻이다. 인간의 사유와 실천은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이제 우리는 구조와 체계에 대하여 총체적으로 사유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치, 경제, 교육을 분절적이 아닌 통합적인 방식으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생태적 사유이다. 생태적 사유는 무엇보다도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가 살아가는 집으로서의 지구를 지키는 사유이다. 나와 지구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내가 바로 지구라는 인식이 생태적 사유의 바탕을 이룬다.
(윤상혁, <오늘의 교육> 26호, ‘전환을 위한 사유’ 중에서)
파머가 기독교적 관점에서 창조의 온전함의 회복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윤상혁이 말하는 바와는 약간 다르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근대적 사고를 극복해야 한다는 점과 온전함과 총체성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둘은 상당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윤상혁은 끝없는 성장이 결국 가져다 줄 파국을 합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성찰하며 경쟁, 일중독, 소비생활, 세계화, 타율성 등 소유와 지배를 추구하는 가치를 지양하고, 협력, 여가, 사회생활, 지역 경제, 자율성 등 삶과 해방을 추구하는 가치와 생산과 소비를 일치시키는 자급자족적 삶의 기술을 전수하는 탈성장 시대를 지향해야 한다6)고 말한다.
농적인 삶을 몸소 살아가고 있는 변산공동체의 윤구병은 교육의 목표를 자립(스스로 앞가림하는 힘을 길러 주는 것)과 공생(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힘을 길러 주는 것)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정용주가 말한 농적 전환, 즉 몸의 교육과 윤상혁이 말한 총체성과 탈성장, 그리고 파머가 말한 온전함에 대한 사유가 통합되어 있다.
아이들에게 머리 쓰는 일에 앞서 손발 놀리는 일을 가르쳐야 합니다. 머리만 잘 쓰면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은 저주받은 세상입니다. 저주받은 세상에서는 모든 일이 거꾸로 돌아갑니다. 한참 손발을 놀려서 일해야 할 젊은이들은 손발이 묶인 채 딱딱한 책걸상에 시체처럼 뻣뻣하게 앉아 있어야 하고, 머리를 써서 일머리를 가르쳐야 할 지혜로운 늙은이들은 들판에서 후들거리는 다리와 여윈 팔로 뼈가 휘게 일해야 합니다.
저희가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할 때, 교육의 목표는 스스로 앞가림하는 힘을 길러 주자는 것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힘을 길러 주자는 것이었어요. 이것은 우리가 세운 목표가 아니라 인류가 이 땅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이래로 암묵적으로 세운 목표지요. 이 두 가지 목표를 이루면 교육하는 사람이 할 일은 끝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실제로 이 교육을 시키려고 할 때 도시에서는 스스로 살아남는 힘을 기르기도, 함께 살아가는 힘을 기르기도 힘듭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자연과 함께 살아야 하는 생명체거든요.
(윤구병, <변산공동체학교: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중에서)
그런데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생태’라는 말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문명에 반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체르노빌과 후쿠시마가 주는 교훈이 있고, 많은 통계들이 끝없는 성장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만, 현실적으로 사회와 경제는 끊임없이 정보화되어가고 있고 우리의 삶은 이미 너무나 도시적인데 생태를 사유하는 것은 지나치게 멀게 느껴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옳은 지적이다. <오늘의 교육>의 또 다른 편집위원인 공현이 바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녹색의 이미지를 벗고 생태적 전환을 이야기해보자고 말한다. 그는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 삶과 사회에 총체적으로 연관되는 연관성을 중심 테마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의 교육이 생태적이지 않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학교 건물이 온통 콘크리트로 지어져 있어서? 탈핵 문제를 다루지 않아서? 농사를 짓지 않아서? 나는 더 정확히 말하면 학교교육이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학교교육은 지금의 사회와, 사회경제적 삶과 무관한 것처럼 구성되어 있다. 교사는 단지 정해진 지식을 가르치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학생은 단지 ‘다른 생각’은 말고 공부만 하면 되는 존재처럼 전제가 되어 있다.
(중략)교육이 반드시 눈에 띄게 실용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 안에는 실용적인 내용부터 추상적인 내용이나 흥미로운 내용 등이 모두 담겨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교육은 의미가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자신의 삶과 사회에 총체적으로 연관되어 있어야 한다.
(공현, <오늘의 교육> 27호, ‘‘녹색 없는’ 교육의 생태적 전환’ 중에서)
지금까지 파커 파머와 윤구병,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인 정용주와 윤상혁, 공현의 사유를 살펴보았다. 그들의 선구자적인 사유와 성찰에 감사하며 정리해보면, 우리가 사는 이 세계와 세계 내의 구성원(인간과 자연 모두)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총체적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삶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삶을 위한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 삶이라 함은 몸의 적극적 사용, 평등한 관계 속에서 주체성을 발현하는 것, 오늘 우리가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사회경제적 삶, 우리가 맞닥뜨릴 파국에 대한 성찰을 교육의 내용 속에 녹여내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이 미래를 위해 준비되어야 한다는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과 배움의 공간 속에서 실천되고 구성되어야 한다.
여기에 덧붙여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내용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교육받은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앞서 한국교육개발원의 보고서는 ‘창의적 인재’라는 답을 내리고 교사에게 그런 인재를 길러내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사람을 미래 시장의 생산력과 노동력으로 보는, ‘현재’가 없고 ‘삶’이 없고 ‘사람’이 없는 이 답안을 거부하기로 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이어야 할까? 이에 대해 이혁규는 ‘공적 시민’이라는 답을 제안하고 있다.
학교교육이 취업을 위해서도, 기능적 지식의 효율적인 전달을 위해서도, 혹은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서도 별로 기여를 못 한다고 해도 학교교육만이 담당해야 할 중요한 역할은 변함없이 존재한다. 공교육으로서 학교교육은 사교육이 관심을 두지 않거나 잘 감당할 수 없는 고유한 ‘공적’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협력과 연대의 즐거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 그리고 지구적 시민성에 기반한 책임 있는 지식의 탐구와 공유 등은 누가 더 좋은 직업을 얻고 약육강식의 국제 질서에서 비교 우위를 차지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계산적으로 이루어지는 교육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교육이다. 학교교육은 이런 공공성에 대한 안목과 실천 의지를 지닌 공적 시민을 길러 내야 한다. 우리 학교교육이 이런 공공성을 갖춘 시민을 길러 내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학교교육의 위기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던 것이다. 학교교육의 외재적 기능이 비교적 효율적으로 수행되는 동안에 우리는 위기의 본질을 망각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혁규, <오늘의 교육> 19호, ‘‘교육 불가능의 시대’ 이후를 사유하기’ 중에서)
이혁규가 말한 공적 시민은 공공성에 대한 안목과 실천 의지를 지닌 사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앞서 정리한 ‘삶을 위한 교육’을 통해 길러질 수 있는 사람이다. 물론 앞서 정리한 의미에서의 ‘교육’은 학교교육을 포함한 교육 전반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혁규가 학교교육의 역할에 국한해서 말한 이유는 그가 오랜 기간 공교육 교사였고 수업에 대한 질적 연구를 해왔던 사람이기 때문이며 이를 지금 논의에 포함시키려는 이유는 나 역시 학교교육을 하는 교사에 정체성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지금까지의 사유가 현실화되는 최전선인 교실에서 수업과 생활교육의 실천으로 구체화하는 일임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실천의 측면에서는 권재원의 글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균형 잡힌 관점을 갖고 있기에 철학에만 치우치지 않고 실천으로 나아가도록 스스로를 도전하는 데 동기를 준다. 그는 그의 책 <학교라는 괴물>에서 전문성과 실천으로 말하지 못하는 교육운동은 설 자리가 없다고 강력하게 말한다.
하지만 아이들 건강도, 교육 희망도 누가 세우나? 일선 교사들이다. 뭘 가지고 세우나? 수업이다. 그럼 그 수업은 무엇을 가지고 짜나? 교육학이다. 기성의 교육학으로? 아니다. 지배자들의 손길에서 아이들을 자립시킬 수 있는 참된 교육학을 세워야 한다.
(권재원, <학교라는 괴물>, ‘희망이 없는 유일한 희망’ 중에서)
특별히 그는 이 '참된 교육학'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비록 참된 교육학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참교육의 평등을 말하는 그의 논의를 살펴보면 관습화된 학교교육의 위기를 뛰어넘어 사회를 보다 민주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혁규가 말한 ‘공적 시민’의 개념과 지향하는 바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덧붙여 그가 말하는 참교육의 평등이 곧 교육복지라는 주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밑바탕 철학이 되기에 충분히 가치가 있다.
따라서 교육이 불평등 해소에 기여한다면, 즉 사회 진보에 기여한다면 이는 교육을 통해 빈곤층의 자녀에게 더 높은 소득을 올릴 능력을 길러 줌으로써가 아니라 그 사회를 보다 민주적으로 개혁하기 위해 나설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길러 냄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교육 평등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사회 전반적인 개혁이 가능하게 한다는 데 있지, 결코 교육받으면 더 잘살게 되는 데 있지 않다. 따라서 교육운동은 지성인 교사들이 끊임없이 비판적 의식을 일깨우는 분위기 속에서 사회적 평등의 열망과 조건을 개척하는 것이지 기존의 잘못된 제도와 체제하에서의 기회 균등을 요구하는 것에 있지 않다.
(권재원, <학교라는 괴물>, ‘진보교육이 되기 위한 조건’ 중에서)
이제 우리는 학생을 재료로 보며 그들을 질식시켜 생산력으로, 노동력으로 만들어 내려는 일체의 인간자본론적 교육관을 거부한다. 우리는 교육이란 무엇보다도 교육받는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이며, 그 행복은 미래에 유보된 것이 아니라 교육받는 순간에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학교가 미래의 행복을 위해 고통스러운 훈련을 견뎌내는 장소가 아니라, 그 자체로 즐겁고 행복한 학습의 공간이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소수 학생의 성공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다수 학생의 행복을 위한 교육, 그리고 이 행복에서 배제되는 학생들을 최소화하는 그런 교육, 한마디로 “복지로서의 교육”을 원한다.
(권재원, <학교라는 괴물>, ‘우리가 교육복지를 말하는 이유’ 중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먼저 이 세계의 상호 연결성과 관계성. 총체성에 대한 인식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파머의 사유가 핵심이다. 주체와 대상, 즉 너와 나, 생태계와 나,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교과와 교과, 교과와 학생은 분리되어 있지 않고 연결되어 있으며, 사랑의 관계 속에서 서로를 책임지는 것을 회피해서는 안 되며 그 가운데서 전인격적인 진리를 경험할 수 있다. 2) 그 인식의 바탕 위에서 삶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찬란한 미래를 위한 ‘준비’로서의 교육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몸을 사용하는 교육(농적 전환),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경제적 삶(가사노동이나 살림살이에서부터 노동, 소비, 윤리, 자본주의 경제까지 포괄하는)의 현실을 아는 교육(동시대적 전환), 권력 분배의 불균등과 지능의 다름을 최소화한 평등한 관계 속에서 능동성과 주체성을 발현하도록 하는 교육(정치적 전환), 파국을 성찰하고 생산과 소비를 일치시키는 탈성장을 지향하는 교육이다. 3) 이러한 삶을 위한 교육은 총체성과 공공성을 성찰하고 실천할 수 있는 ‘공적 시민’을 길러내도록 요구받으며, 교육받은 자가 사회를 민주적으로 변혁시킬 수 있는 시민이 되는 것을 지향한다. 4) 그리고 교육은 소외되는 자 없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행복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상이 내가 생각하고 읽어온 것들을 나름의 주관을 가지고 정리한 것이다. 물론 짧은 교직의 경험과 읽어왔던 몇 안되는 글들 안에서 이루어진 정리라 관점은 매우 협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제야 마음이 좀 편하다. 계속해서 수정되고 덧붙여지겠지만, 일단 오늘 놓은 이 사유의 주춧돌을 밟고 나 자신의 수업과 학교에서의 행위들을 계속해서 실천하고 성찰하는 일이 앞으로 쓸 글쓰기의 주제가 될 것이다. 회복적 생활교육, 배움의 공동체, 질문이 있는 교실과 같은 이미 이루어진 실천들에 대한 실천, 삶의 글쓰기, 삶을 위한 평가, 민주적 학급 운영처럼 삶과 분리되지 않은 교육의 실천, 내면 성찰과 수업 나눔과 같이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회복의 실천과 같이 구체적인 각론의 실천과 성찰에 대한 글쓰기가 될 것으로 본다. 정책이나 교육과정은 아직 아는 것이 너무 적어서 다룰 순 없겠지만 계속해서 공부하고 싶은 분야이기도 하다. 혼자 밥 먹지 말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고 하던데 이 교육 불가능의 시대를 직시하고 새로운 교육의 전환을 함께 고민하고 실천하고 성찰하는 증인으로서 살아갈 많은 선생님들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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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전에서 '사유'를 검색하면, 기본적인 정의는 '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로, 철학적인 정의는 '개념, 구성, 판단, 추리 따위를 행하는 인간의 이성 작용'으로 되어 있다. 내가 주로 했던 고민은 주로 "교사는 누구인가?", "공교육은 왜 존재하는가?"와 같이 존재론적 질문에 가까웠기에 철학적 정의로 '사유'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2) 흔히 5.31.교육개혁으로 불리는 문민정부 교육개혁방안은 한국교육의 패러다임적 전환을 가져온 획기적인 결과물이며 이후 역대 정권들의 이념적 성격이나 정책지향과 상관없이 자신의 교육정책의 근간으로, 또 가장 중요한 준거로 인정되어왔다. 그런 의미에서 문민정부의 교육개혁방안은 지난 20년간 한국 교육의 중심축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연섭, 웹진 교육개발에 실린 <5.31.교육개혁 20년, 한국교육의 오늘과 내일> 중에서)
3) 온라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구조기능주의 교육학’에서 인용
4) 윤상혁, ‘오늘, 다시 출발선에 서서’, <오늘의 교육> 24호, 101-102쪽
5) 이혁규, ‘‘교육 불가능의 시대’ 이후를 사유하기’, <오늘의 교육> 19호, 27쪽
6) 윤상혁, ‘전환을 위한 사유’, <오늘의 교육> 26호, 43,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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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리한 생각 나눔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흥미진진한 글이네요...ㅎㅎ 잘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_^
음냐, 프린트해서 천천히 읽어봐야겠어요. ㅋ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