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일 수요집단상담 모임을 안내합니다.
삭막해져 가는 사회를 두고 내가 왜 참회할 사람이 되는지
글을 읽고 내 마음을 살펴 이야기를 펼쳐보는 시간되면 어떨지요.
아침에 줌주소 올리겠습니다.
바닥을 치는 도덕성을 어이할까!
문은희_한국알트루사 여성상담소 소장
심리학박사, 계간 「니」 편집장
강화모녀 살해사건같이 끔찍한 일은 사실 최초의 사건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용의자들 가운데는 누이동생을 죽이고 그의 아버지가 의심해서 경찰에 고발되기까지 했던 이도 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보험금 탄 내막을 잘 알고 있는 이웃의 소행이라 하니 ‘이웃사촌’이라는 말은 물 건너간 지 오래된 옛말 같다. 이제는 이웃이 더 무섭고,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얼마나 따스하고 흐뭇한 말인지 아무런 느낌이 없어질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옛 시절과 요즘의 차이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우리네 유전인자에 차이가 생겼다던가 성격이 갑자기 달라진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마음씀씀이가 그만큼 각박해졌을 뿐이다. 사람이 소중하다는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과 쾌락에 견주어 사람의 비중이 그만치 가벼워진 것이다.
이렇게 끔찍한 범죄사건이 일어나면 우리는 그 범죄자가 괴물이라도 된다는 듯이 호들갑떤다. 적어도 ‘정상인’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와는 아예 상관없는 비정상의 사람들이 저지르는 일이라고 여기고 혀를 찬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되고 있다. 이쯤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입으로만 죄인이라고 눈물 흘리며 건성으로 기도하는 것에 멈추지 말고, 스스로 옷깃을 여미고 머리에 재를 쓰고 참회해야 할 것이다. “내가 한 일이 아닌데 왜 내가 참회해야 하는가?”하고 묻는다면 우리가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할 이웃을 모른 척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본받아 살려면,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시대가 흉흉할수록 이 시대를, 우리 자신을 성찰할 기회로 여겨 감사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동으로 똑같은 수준의 도덕성을 갖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니다. 부전자전(父傳子傳)으로 양심의 수준이 유전되는 것도 아니다. 주변환경, 특히 양육자의 적절한 교육이 중요하다. 집집마다 가풍이 다른 것을 아마도 많이들 보아왔을 것이다. 자기가족만을 애틋하게 아끼며 사는 집이 있는가 하면, 바깥사회의 문제 풀기에 골몰하는 집도 있다. 여성을 아끼는 집안이 있는가 하면, 남자중심으로 판단하는 집안도 있다. 어른 섬기기가 우선인 가정도 있고, 아이들 위주로 움직이는 가정도 있다. 각기 집안마다 어른들이 가르침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모범을 통해 가풍이 대를 이어간다. 가정단위뿐 아니라 소속집단이나 더 큰 사회가 소속구성원의 행동기준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교회도 그 중에 하나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행동기준들이 있다는 것을 그저 인정하는 것으로 문제가 다 풀리지 않는다. 저마다 ‘내 가족 잘 살기’만을 목표로 한다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될까 생각해볼 일이다. 마찬가지로 남자만을 소중하게 여기면 인류의 반은 불행해질 것이다. 노인과 아이가 다 소중하게 존중받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건강하고 살기 좋은 착한 세상이 되려면 기본으로 어떤 도덕성을 갖추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우리는 적극 해결해야 한다. 동물과 달리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본능에 따라 자기만 편하게 살 수 없음을 뜻한다. 본능의 욕구만을 추구하는 것에서 벗어나 좀더 높은 도덕성을 갖추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일이 당연하고 의미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쯤에 이르러 우리가 아이들의 도덕성 교육에 얼마나 관심을 두었던가 생각해보면, 할 말이 별로 없을 것이다. 내 아이가 어수룩하게 착해빠졌다면 이 험한 경쟁사회에서 도태될세라 친구를 이길 만큼 때로는 모질게 행동하라고 채근하듯 가르치지 않았던가? 절대로 손해볼 짓은 해선 안 된다고 아이들을 몰아붙이지는 않았던가? 다른 사람을 지휘·지도하는 자리에 가야지, 아랫자리 또는 섬겨야 하는 자리에 가지 말라고 귀엣말 해주지는 않았던가? 아니, 우리 스스로 경쟁에서 이기려 들고, 눈에 불을 켜고 손해볼 짓을 피하고, 남 섬기기를 주저하는 데 모범이 된 건 아닌가? 이익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러한 지금 세태의 산물이 곧 그 끔찍한 범죄로 나타난 게 아닌가?
우리는 심각한 도덕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도덕성 교육을 평생의 과제로 삼았던 콜버그(L. Kohlberg)에게 귀를 기울이자. 그는 겉으로 드러나는 도덕적으로 보이는 행동보다 행동의 동기에 관심을 두었다. 마음으로 미워하면 이미 살인한 것이라는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자신만을 위하는 동기로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와 타인을 공통으로 위하는 일을 함께 찾아서 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자기만을 위한 동기는 원시적인 것이라고 여겼다. 좀더 보편적인 원칙에서 우러난 동기를 높은 수준의 것으로 보았다.
그는 도덕성의 발달을 믿었고, 높은 단계에 오른 사람은 뒷걸음질치거나 퇴행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그의 이론은 암담한 오늘의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준다. 보기를 들면 환경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자신과 자기가족의 임박한 문제해결만을 위하는 수준에서, 생태계에 대한 순수한 사랑의 동기라는 데까지 동기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 쓰레기 소각장을 우리 집 근처 말고 딴 데 세우라고 주장하는 수준에 머물러있으면서 도덕성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교육문제에 적극으로 참여하는 사람을 보기로 하자. 자기아이가 당장 혜택을 받게 되기 때문에 교육운동을 하던 사람은, 자기아이가 다 자란 뒤 다른 아이들을 위해서도 그 열심을 잃지 않는 도덕성의 수준으로 높아질 수 있다.
먼저 우리의 수준을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중심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하여 행동하는 것이 가장 밑바닥 수준이다. 이 수준의 1단계는, 벌받을 것이 무서워서, 그리고 상을 받으려고 하는 행동동기이다. 이나마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다면, 즉 힘 있고 돈 있는 사람이 벌을 받지 않는다는 판단의 습속에서 자랐다면, 이 동기마저도 통하지 않게 된다. 자기에게 필요한 도구라는 생각으로 지키려는 동기가 2단계다. 이 단계는, 엄마는 밥해주는 사람으로, 아내는 아이 기르고 살림해주는 사람으로, 남편은 돈 벌어오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그 틀 안에서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는 수준이다. 그런데, 이렇듯 자기중심의 낮은 상태의 도덕성으로 평생 살아가는 사람들을 뜻밖에도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둘째 수준은, 일상으로 누구나 지키는 통상의 수준을 말한다. 인간관계를 잘 해가는 것이 행동의 동기인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고 경험하고 있다. 주변사람들에게 인정받아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며 사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우리의 경우, 이것이 어쩌면 모든 영역에서 제일 영향력을 가진 항목인 것 같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혈연, 지연, 학연뿐 아니라 어떤 교회에 다니고 있는가 하는 것도 추가되어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관계보다 위의 것, 즉 사회규칙이나 법질서를 지키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지킬 동기를 품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지막 셋째 수준은 보편성 원칙을 존중하는 동기를 말한다. “누가 내 어머니요 내 형제인가?”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도덕성의 수준을 일러주신 것이다. “이웃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자기중심, 자기가족중심에 매여있는 동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하나님 안에 노예와 상전, 이방인과 유대인, 남자와 여자가 모두 하나라” 하신 것에서 우리가 속한 어떤 정체성도 부정하고 초월해야 한다는 것을 엄격하게 지시하신 것이다. 우리는 혈연·지연·학연·교회·민족·국가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목표를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 가져야 할 도덕성은 그렇게 호락호락 손쉬운 것이 아니다. 아주 높은 수준의 것이다. 재 쓰고 참회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