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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싸야 해? -관 만들어 놨어?”
“진짜 미국으로 떠나자는 거야? -미국 화장터로?”
“죽어도 자식 있는 데로 갑시다. -제사 받자고?”
중국에서 사업을 꾸린지 10년으로 자식들과 떨어져 살다가, 병세가 악화 된 2008년 4월 어느 날이었다.
죽을 때는 다들 빈손으로 간다는데 내 팔자는 마지막 길, 갈 채비를 하면서도 짐 보따리를 꾸린다. 지난 10년간 동고동락한 중국인 도우미까지 합세해서 한 개, 두 개씩 여행 가방이 늘고 있다. 입던 옷들은 미제라 좋아하고, 사용하던 가구나 식기는 한국산이라 좋아하고, 먹다 남은 식량까지, 이웃 중국인들은 B형간염 말기 간암환자의 물건임을 알면서도 안타까운 표정만 잠깐 지었을 뿐, 하나 둘씩 잘도 가져간다.
죽은 자의 고물 모두는 산자를 위한 재활용품으로 태초부터 생산적이라 했었다. 그동안 함께 했던 의리도 없이 모두가 생긴 모양대로 새 주인들을 따라 나선다. 네모진 침대는 4명이 영차~, 길쭉한 소파는 2명이 번쩍, 각자의 준비된 용달차에 실려 나간다.
이젠 전화 받을 기력조차 없다. 마지막 앉아 있던 단골 소파까지 들어 낼 때는, “아~ 내 생애 마지막 10년의 마감을 칭다오 소파에서 하는구나.” 했다.
며칠 더 살아보자는 심정으로 삼성병원과 칭다오 대학병원에서 처방해준 약봉지를 큰 놈 핸드백에 넣고 또 확인한다. 칭다오 국제공항은 샌프란시스코까지 연결편이 없어서 북경, 라스베이거스를 거쳐 샌프란시스코까지 18시간의 비행은 환자로서 배려를 기대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다.
말기 간암환자가 과연 18시간을 버틸 수 있을지, 동방항공과 TWA를 열심히 저울질하는 아내의 울음 섞인 통화 목소리가 옆방에서 들린다. 30년 이상의 적지 않은 탑승경험으로 보아 지금상태로 TWA 태평양 고공비행은 생의 마지막 여행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나는 칭다오 대학병원에서 작성해준 ‘무지 건강하다’ 책임증서(?)를 비상시 대비했으며 인민폐 500위안과 책임증서를 핸드백에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릴 적 기억에 상여 나갈 때 ‘어영차’ 뒷걸음에 비하면 500위안은 공짜나 다름없다.
“그토록 원하던 자연사를 태평양 상공에서 한다면야…….”
우선 자살충동으로부터 자유스럽게 되고, 처자식이 원하는 대로 몸을 움직여주는 상황이니 그들에게도 恨이 되지는 않겠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항공기 죽음은 억세게 운이 좋은 편이다.’라고 스스로 자평도 해 본다.
이 상황이 될 줄 알았으면 비행 사망보험 티켓이나 제일 비싼 것을 구입해서 탑승 할걸…….
10년간의 중국생활 모두와 산사람으로서 이곳 사람들과 이승에서의 이별식은 끝났다. 칭다오 공항서 국내선 북경공항, 국제항공 라스베이거스 행 비행기 교차에서 별것도 아닌 7개의 가방 화물들은 왜 그리도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던지. 열 발자국도 딛기 힘든 몸이었으므로 국내선과 국제선의 거리는 더욱 더 멀게만 느껴진다. 이승과의 이별이 이렇게 질기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지나야만 하는 걸까, 정말 숨 쉬는 것조차 힘이 든다.
항상 그렇듯이 이륙과 동시에 임산부 같은 복수는 고공에서 더더욱 지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한다. 마지막 이륙과 동시에 피곤에 지쳐 잠시 눈을 감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한없이 불쌍해 보인다. 남다른 성장과정을 통해 경주마처럼 삶을 질주하듯 살아온 내 삶의 결과가 말기암환자 지금의 모습이라니, 내 꾐에 넘어와 32년간 동서양 고향도 없이 타향살이를 해 온 그녀, 옆 지기로 가족을 지켜주며 든든한 안방이었던 그녀는 나와 함께 했던 지난 세월을 후회하기도 할까, 아니면 그리워하면서 살아갈까.
60년 인간사 여정도 끝난 듯하고, 영원히 잠들기로 예약된 장소를 찾아가는 18시간이 삶의 마지막 비행이려니 하니 잠도 오지 않는다. 이 시간동안 지난 60년간의 내 모습을 반성해 봐야 하고, 얼마 안 남은 시간 동안 해야 할 일들도 정리 해보기로 했다. 아비를 데리러 나왔던 큰놈이 내년에는 손자를 보게 해 드리겠다고 약속하면서 할아버지가 건강하셔야 손자도 안아보시지 않겠냐고 지난주에 너스레를 떨며 다녀갔다. 내친김에 작명가로 나섰다. 굳세고 건강하라는 의미의 ‘朴健’이라 지어 보았다. Dylan Gunn. Park 은 현재 15개월째 나의 친구다.
갑자기 지난 성장과정이 주마등처럼 공중곡예를 한다. 나는 48년 삼팔선 장단태생으로 1.4후퇴 시절에 가족 전체가 경남 밀양으로 피난을 왔다. 중학교 3학년 나이에는 가출을 했을 정도로 정체성이 서지 않은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보냈다. 결국 가출소년은 종로바닥을 휘저으며 청소년 시절을 보냈고 그 상황에서 행한 100가지 행위 모두는 용서받지 못할 망나니 행동이었다. 지금 그 시절의 반성과 후회를 모두 거두어 가지 못함에 더-더욱 마음이 착잡하기만 하다.
때늦지 않게 중, 고등과정을 검정고시로 이어오며 가져온 생활방식과, 월남전에서 ‘내 차례는 언제일까?’ 하며 죽음을 목전에 두고 전투하는 수많은 청룡 동지들의 주검들을 지켜봐야 하는 임무는 양가적인 감정으로 모진 가슴앓이를 하게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사라호 태풍으로 뒤집힌 학교운동장(6.25때 제16육군 병원)에서는 장렬하게 순국한 수백 명 용사들의 유골 발굴 현장에서, 어린나이에 불구하고 발굴 작업의 가이드를 해야 했으며, 그러한 체험들은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할 수 있는 항체를 갖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중국 301병원, 톈진 제일병원, 칭다오 대학병원, 일원동 삼성병원 12층에서 만난 적지 않은 간암환우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져가는 쓸쓸한 모습들을 보면서 더욱 단단한 면역체를 보유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60년간의 생애 중 죽음과 연관된 세월이 15년쯤 이라면 죽음이라는 정해진 코스에 편승하여 닫힌 세월을 산지는 한 150년쯤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잊고 싶어도 잊어버릴 수 없는 죽음의 각인이었기에 지난세월 죽은 자들과의 고공대화 18시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다. 나만 살아남았다는 미안함에 한없는 참회와 가슴 저린 눈물들을 부족하지 않게 쏟은 날이기도 했다.
이런 죽음에 깊이 관련된 삶의 경험은 70년대 말 가전담당 주재원시절, 낯선 세계를 떠도는 삶을 선택하게도 했다. 극한대의 죽음과 비교하면서 두려움을 떨쳐버렸고 삶의 한바탕, 한바탕에 승부수를 두고 배팅을 하며 nomad(유목민)의 세계를 즐기기도 하였다. 지금 되돌아보니 세계를 떠돌며 산 세월은 나름대로 행복했고 보람도 있었으므로 후회하지는 않는다.
라스베가스 미국내 첫 단기입원
기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으므로 라스베이거스 공항에 도착함과 동시에 네바다병원으로 실려 갔다. 무슨 영문인지 흰 가운의 펠로우가 엉성한 한국말로 물어 온다.
“한국 사람이요?” 끄덕이는 화답에
“거주지 샌프란시스코로 가시오.”라고 한다.
주별 거주지(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와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따라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이 다르다는 설명이다. 장기 치료, 전간이식, 예후치료 목적에 따라 거주지에서 병원 출입이 월등하게 편하다는 설명과, 간이식, 신장이식으로는 UCSF병원이 좋으니 그 곳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우선 급한 불을 꺼야 하는 상황으로 복수 뽑는 시술을 해야 했다. 중국이나 서울 같았으면 2시간 안에 걸어 나올 수 있는 복수 뽑기 시술을 3일이나 입원이 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복용 중인 처방약에 대해서도 Hepsera, Humalog(Insulin)만 아는 척하고 우루사 등 비싼 홍삼엑기스까지도 아예 아는 척도 하지 않는다.
그러고도 조상이 한국인이라 한다. 희귀 성씨로 바로 알게 되었지만, 그는 사원시절 바로 직장상관의 아들이었다. 복수로 인해 한국병원에서 처방하여 복용중인 이뇨제(알탁톤, 라식스) 등은 안 된다기에 그 자리에서 모두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중국. 서울에서 병이 발병한 초기부터 환자가 같고 병명은 똑같은데도 미국병원에서의 처방은 완전히 다르게 한다. 질기기도 한 것이 생명이라고는 하지만, 1박 후 회진에서 당신은 하루 이틀 사이에 죽지 않으니 엄살 좀 피지 말라고 경고장을 준다. 3주전 84kg 체중이 66kg으로 18kg이나 팍, 자동 다이어트가 됐는데도 당연하다는 듯이 원인을 묻지도 않는다.
미국에서의 첫 진료는 15분 정도는 의사의 진료진찰이고 15분 이상은 환자 질문시간이 되어서 40분가량 진료 후 입원실로 직행 했다. “왜 복수란 넘은 왼쪽으로만 찔러 빨아 퍼내느냐?” 라는 질문에 바로 3자 전화통역으로 갖다 붙인다. 한국인끼리 3자 전화대화가 시작 된 것이다. 그 후 요령을 터득해서 간호사, 영양사, 목사, 청소 미화원, 채혈 임상관리사, 대소변 화장실 검사원, TV 전기 맨, 방문자 족족 모두 3자 전화통화로 시간제한 없이 한국과 중국에서 누리지 못했던 의사와의 진정한 대화가 시작 된 것이다. 의사 수준의 펠로우는 백인과 중국인 간혹 가뭄에 콩나듯 한국인이고, 간호사 등 서비스 직분을 가진 이는 백인과 필리핀 사람이 대부분인 것 같다. 행정요원 대다수는 남미 쪽 사람으로서, 3교대로 매일 30명 정도가 내방을 드나드는 것 같다. 병실에서 틈만 나면 한글로 질문서 작성하는 것이 나의 본업으로 변했고, ‘6개월은 살아 버틸까?’ 하며 고민 해보는 밤이다.
이곳은 한국. 중국과 마찬가지로 친절한 서비스도 훌륭하지만, 먹는 것과 책, TV(케이블) 등 요구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는 물자 공급 서비스가 더욱 돋보인다.
3일 후 샌프란시스코, LA에서 날아온 두 명의 아들과, 칭다오에서 헤어진 후 2주일 만에 반가운 부자간 악수를 나누고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왔다. (그들은 아비 미국행을 설득하고자 2주 전에도 중국에 왔었다)
모두가 아내의 지략(?)대로 아들들은 참모요, 하던 사업 모두 포기하고 빈 몸에 빈사 상태가 되어 돌아 온 나는 패자인 것 같다. 큰아들의 준비된 스케줄대로 나는 UCSF에 실려 갔고, 둘째 놈의 법무노력으로 앞으로는 병원진료 모두가 일생 공짜라 한다. 그 넘은 UCSF 등록 후 간암에서 죽어나간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고 아비를 안심 시킨다. 장가가더니 이젠 거짓말도 하는구나, 했더니, 역시나 주치의도 “죽어 나간 자 없으니 향후 내 집이려니 하고,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나 계획을 잡으시오.”라고 한다.
UCSF는 라스베이거스와 다르게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데, 보이는 대다수 사람들은 근무자이거나 서비스 클릭들이다. 조금이라도 불편해 보이는가 싶으면 빨강 비상벨을 누르지 않았는데도 간호사가 직행으로 찾아오고, 잠시 후에는 내과의가 손 흔들며 나타난다. “어디 불편하냐?”는 당연한 첫 질문이 있어야 하는데 이들은 엉뚱하게도 서울 이야기부터 꺼낸다.
“서울은 너무 아름다운 곳이라는데 …” 로 시작이다.
“서울은 우루사를 으뜸으로….”
“우루사가 언제 때 왕궁이냐?”
“헵세라와 동시대 한국형 왕자다.”
그제야 한바탕 웃는다. 환자 웃기는 방법도 교육이 있었는지 중국에서 왔다고 하면 ‘자금성이 좋다’고 하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분명 김치와 갈비에 찬사를 보낼 것이다. 아내가 출근 때마다 홍삼 캔디를 들고 와 모둠 나누기를 하는데도 항상 한 봉지가 모자란다.
내 ․ 외과 협진제도
중국이나 서울과 다른 점은 간암환자의 경우 내과 외과가 같이 진료를 한다는 것이다. 오전에 내과의가 다녀가면 오후에 외과의가 다녀가고, 더구나 찾아오는 펠로우는 80%는 다른 사람이고 꼬부랑 명찰표기로는 그 많은 소속감을 알 길이 없다. 아침 정기 회진 때는 내. 외과의, 약사, 수간호사 포함 12~3명의 회진군단이 찾아드는데 환자 한사람을 두고 회진군단 모두가 질문 하나씩을 하는 상황에 한계가 있었는지 3자 통역이 아닌 직접통역사까지 준비 시켜온다. 역시 이방인 환자가 많은지 준비된 안내판에는 8개국 언어가 준비 되어 있다. 아래 7번째 글자판에는 한글이 쓰여 있는데 미국은 다민족 국가이고 한국 사람들이 간이식 수술을 위하여 알게 모르게 빈번한 출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확인한 셈이다.
한국, 중국과 마찬가지로 의료진의 개인의술은 미국도 평균적이라는 개인생각이 있으나, 확실한 차이점은 진료시스템이 아닐까 한다. 내, 외과가 동시로 하는 진료는 무엇을 의미 하겠는가? 한국, 중국에서 기억해온 부서선택은 환자가 죽기 전에는 간경화, 간암 환자를 책임지는 내과가 “외과로 가시요.” 라는 진료의뢰는 환자당신이 죽어 화장이 끝날 쯤 일거다. 무슨 과별로 매상 금메달 쟁탈전이 있거나 잘못된 진료기록에 문제가 있었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면, 시스템의 현대화는 병원관계자나 환자들 모두를 위해서도 절실하다고 느꼈다.
병원까지는 25 마일로 왕복 50마일 거리를 매 주마다 실려 다녀야 한다. 오는 길에 처방전 수납처에서 스위스제 잭나이프 열십자에서 본 듯한 Logo의 Disabled Person(장애인) 이란 플라스틱 한 장을 준다.
지금까지 미국시내 어디든 (광화문 사거리, 청와대 정문 같은 곳은 제외) 주차 공간만 있으면 모두 공짜로 시간제한 없이 주차가 가능 하다. 나는 병원 종사자들에게 쉬운 발음으로 '마패'라고 알려 준다. 한 번 주차에 26불 가량이며 베이브릿지 한 번 건너는데 4불(지금은 5불)을 내면서, 또 정기검사 3주마다, 주치의는 매달, 당뇨 치료도 매달, 초기 매 달마다 7~8회는 겁도 없이 대장의 왕복 운전에 실려 다녀야만 했다. 한 달 후 “정말 미안하다. 안내가 섬세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거듭 이야기를 하며 환자번호 스티커를 100여장 인쇄 해주고 동네 제일 가까운 “LabCorp(미국 임상진단 시스템 개발업체)”를 찾아서 걸어 다니면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피검사 1분 정도를 한 번 뽑기 위해서 중국서 일원동으로 왕복 비행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같은 흡혈귀(?)와의 만남까지도 즐겁기만 하다.
그 후 지금은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Lab Corp 분점에 매달 한 번씩 출입하고 있다. 그리고 뭔가 처방전을 한 장 만들어 주면서 DMV 자동차 사업소로 가란다.
이렇게 변화한 환경을 이 나이 되도록 모르고 지나온 주원인은 어디 있을까. 죽어라 평생 동안 읍소자리 지키는 자들의 큰 감투를 세습하는 집단이나 특급 취재니 뭐니 하는 받아쓰기 9단 기자들의 은혜가 아닌가도 해본다. 그들만을 의지하고 세상물정 다 아는 척해온 책임 또한 자신에 대한 중죄인이 되고도 남음이다. 흡혈귀는 본인 공간에서의 출입자만을 제한하여 모두를 빨아들이고, 타 병원 출입은 허용치 않는가 보다.
한국, 중국에서 16회의 복수천자 경험이 있지만, 입원하면서까지 복수를 제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왼편 옆구리 푹 찔러서 팬티고무줄로 4,000~5,000cc 정도를 쓰레기통에 담는 곳이 중국의 대다수 현실이었는데 이곳은 꼭 하루 이상 주무시고 가라고 당부한다. 복수천자 한 번을 위해서 소모되는 일회용품들은 가슴까지 오는 위생 쓰레기통에 하나 가득이다. 막장쯤에는 3일 만에 복수가 다시 차오르는데도 죽지 않겠는지“12,000cc도 흔한데 아직 멀었다며” “빼곡히 활짝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까지 환자 말을 전혀 듣지 않는다. 제거가 끝났어도 최소 4시간 이상은 손목에 팔찌를 착용한 채 침대에 눕혀 놓는다. 삼성병원, 톈진 제일병원 등에서 뽑기 종료 전 허리춤 혁대 재정비하던 잽싼 탈출준비와는 전혀 다른 대우다. 그리고 인턴 두 명은 이미 여자 B컵 이상 되는 말기 간암환자 내 젖가슴을 마지막 그리면서 부인과 취급을 한다. 최종 오른쪽 복수 뽑기는 더 이상 무리라며 왼쪽 뽑기 후 Tips시술을 했다.
18시간 정도를 견뎌낼 수 있을까, 했던 어둠의 터널을 지나 산 자로서 어느덧 4개월째를 지나고 있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은 직감하였는데, 대장 내시경 때 입는 가운을 갈아입히고 이동침대로 멀쩡한 사람 눕히더니 도착한 곳이 마치 인체를 조각조각 해부할 듯한 분위기의 영상의학과였다.
Stress Test M/C검사는 CT, MRI와 또 다른 상하반신을 눕힌 채로 매달고 세우고 먹이고 1시간 이상을 야단법석이다. 그리고 옮겨서 8개월 임신 복수 배를 바르고 읽고 듣고 하드니 저희들끼리 미팅하고 내일 오란다. 역시나 우편 사타구니 동맥을 순대 자르듯이 또 자른다. 큰형님 뻘 되는 암 하나가 아직은 8.2cm에서 모자라는 모양이다.
암 덩어리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건지 휴면상태로 만든다는데 암에 은팔찌 채우면 뭘 하나? 월드시리즈 같은 큰 경사 때 되면 벌떡 깨어나 암이란 넘은 더더욱 크게도 자라는데. 체중이 올라서 70kg로 유지하고 있는데 간이 1.4kg 정도라고 간의 무게는 그렇다 치고 암의 무게가 얼른 자라서 오히려 2kg쯤 되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배보다 배꼽이 커지면 세상 하직하는 거랑 같은 논리다.
지난 8년간의 습관에 솔직히 암 덩어리 커가는 것은 특별히 걱정을 하지 않았다. 복수의 고통은 암 덩어리 성장에 비교가 되지 않았으니까. 암의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복수가 주는 비아냥거림은 사람 체통을 말이 아니게 한다. 조형시술로 오른편 서혜부 동맥칼질이나 동맥압력으로 쏟아지고 치솟는 핏줄기는 시술자 가운으로 충분히 받아 냈으리라. 저 핏줄기 가운데 B형 간염바이러스와 암 덩어리가 산산조각 부서져 나와 주면 서로 좋잖아, 하며 엉뚱한 망상도 해본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시간적 느낌으로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왜 시술해야 하는지는 중국이나 한국서도 많은 설명들을 듣고 또 들었다.
입국 5개월 후부터 심한 복수는 사타구니 옆 자락에 발생하는 탈장은 크기도 엄청나서 손가락 없는 팔뚝 하나가 사타구니에도 생기나 했다. 침대 누워서 튀어나온 넘을 위로부터 압력을 가하면 분수물기둥 사라지듯 없어지고, 일어나기만 하면 역시나 또 팔뚝이다. 20대도 아니고 현관문 한 번 배꼼 내밀기도 겁난다. 생긴 꼴로 봐서는 무슨 대단한 정력가인줄 알겠다.
젊을 때 발기를 해도 이정도 우람하지는 않았을 거다. 문제는 탈장상태 8시간이 지나면서부터 대장, 소장 탈장 부위자체가 염증으로 썩기 시작 한다는 거다. 의자지팡이 신세로 몇 걸음 살아 움직이는데도 탈장이 여간 힘들게 하지를 않는다. 더구나 당뇨환자(Humalog, Lantus 두 가지 인슐린 사용자)로서 외과의 칼질은 신경이 가는 모양이다. 간이식 후에 탈장수술 하자는 걸 “언제 이식인데?”하며 10년을 고행해온 내게 미국 놈들까지도 또 한 번 거짓말들이다. 수술 후 망사덮개만 뼛속으로 씌우면 된다기에 무조건 하자고 엄살을 부렸다. 짧은 수술 시간은 견딜 만 했으나, 그 후유증으로 하반신 전체가 검붉은 피 멍으로 확장이 되어 볼 수가 없다. 골반 내에서 핏줄이 터졌다는 것, 재수술은 안 된다는 것, 하반신 전체를 검붉은 혈관으로 도배해 놓은 것 같아 정말 가관이다. 더구나 복수 임신배도 보기 민망한 지경인데, 얼마나 이스트를 많이 쳤는지 하반신 붓기가 이미 심벌을 잡어 먹은 지 오래다. 간암으로 인생을 마감하는 줄 알았더니, 이젠 검붉은 모습이 기형아 같아 보이면서 시체 같기도 하다. 어차피 마감할 인생으로 죽기 전 100보라도 걸어보자는 심정이었고, 결국은 200보도 걷게 되었다. 탈장도 사라질 만 했고 피부색도 사람다워져 가는 보름 만에, 이번에는 오른쪽 탈장이 솟아오른다. 피 멍이 엄연히 가시지 않았는데도 또 한 번 엄살이다. 조형시술 동맥 옆자리는 내. 외과 단골인 모양이다. 차차, 사지 모두가 그들 임상실험 본격 대상자로 내가 지목했구나, 생각하니 진료하는 모든 이가 이젠 편안하게 보이지가 않는다. 젠장, 간암이란 썩어빠진 간만 도려내면 되는 게 아니었다.
Tips(Transjugular Intrahepatic Shunt(경내경정맥 간내문맥-간정맥 단락술)시술
죽을 자의 마감 때가 되었는지 복수의 고행도 한계점에 다다른 모양이다. 23회의 복수조절은 복수천자와 이뇨제를 투여하였는데 그 결과로서 신장에 문제가 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뇨제는 또 다른 고통을 수반해서 변비, 수면장애와 함께 다리 비틀림, 매일같이 쥐가 나는 등 문제가 되어 이젠 Tips 시술을 할 때가 되었다고 한다. 또 전신을 눕혀 묶여 들어가니 수술대 옆 자리에 준비 된 연장들이 예사롭지 못하다. 길게는 1미터가 넘는 가느다란 카데타(catheters), 생검용기구 등 30여점 넘게 보이는 시술기구들이 만능 횟집환경이다. 이번에는 임산부 배를 찔러서가 아니라, 아예 칼로 횟감을 떠서 케이블 구멍으로 설거지 통로를 만드나, 하면서 잠이 들었다.
깨어나니 이미 4시간이 지나 있었다. 우측 목덜미에는 혈관조형용 도관 하나가 꼽혀있었으나 임산부 배는 여전히 멀쩡하다. “크게 숨 들여 마시고 멈춰” 하면서 바로 뽑아내는 게 눈 익은 파이프다. 길기도 한 그 넘을 통해서 스텐트(stents) 하나를 임시로 삽입했다고 한다. 위에서는 위내시경, 아래서는 대장내시경 인체 내 케이블 관광은 다 했을 것인데, 이제는 목덜미를 천자하여 간내에 간정맥과 문맥의 shunt(통로)를 만들고 스텐트라는 금속으로 공급공사를 했다. 후에 간이식 할 때, 고물인 간은 모조리 들어냄과 동시에 금속스텐트는 함께 버린다고 한다. 물론 이뇨제 복용은 중단 되었고, 3주 후부터 장마철 개천에서 물 빠지듯이 복수 배는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그 후 철천지원수 같았던 복수와 영원히 이별했다. 복수의 고통은 빠르게 죽음이란 놈을 선택하게도 하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환자 본인들만이 가져야 하는 힘겨운 짐들이 될 것이다.
꼭 만나고 싶은 사람도 있고, 그 동안 알아왔던 지인들과 생의 마지막 악수를 나누고 싶어서 모임에 실려가 봤다. 뒤편에 앉아서 보니 아내를 보는 자 마다 “남편은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
환장 할 일이다. 107kg 나갈 때 보았던 지인들이라 70 kg도 안 되는 나를 기억 해 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는 후문이다.
깜짝 들놀라며 “소문과는 다르게 아주 건강해 보인다.”고 말한다.
죽일 놈들, 차라리 “내일 자네 추모예배에 참석 할게…….” 했으면 오랜 만에 한바탕 호탕하게 웃었을 텐데…….
그 날 이후, 이승에서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인지 지인들이 한 사람씩 돌아가며 문병을 온다. 주기도문도 못 외우는 내 앞에서 열심히들 흐느끼는 기도까지 곁들인다. 건강 찾게 해달라고 무릎까지 연신 구부린다.
그 분들 중 11년이나 손아래였던 건장하고 건강했던 한 사람이 2주 전에 운동을 하다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본인 자신도 갑작스럽게 닥친 죽음이었겠지만, 남아 있는 가족들은 얼마나 황망했을까, 아까운 사람이었는데. 골골천수라는 말을 음미 해본다.
Tips 시술 후 3주가 지난 아침, 부작용으로 간성혼수가 발생하여 가족의 도움으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깨어보니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었다.
언제 여기 입원했어?
“33년간 동거해오면서 당신 배설물 보기는 처음이다.”
그래? 기회가 없었는데 잘됐구먼.
3일이 지났다고 했다. 간암이란 요물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혼수상태까지 몰고 갔다. 간성혼수에 빠져 앰뷸런스를 타고 응급실에 갔다는데 전혀 기억이 없다. 식물인간에서 깨어나기 10분 전 쯤 TV소음이 잠깐 스쳐갔을 뿐이다. 지금까지도 간성혼수 3일간의 기억은 전무하기에 생일 날짜도 3일을 뒤로 밀어줘야 공평할 것 같다. 3일간 감쪽같이 뇌수면에 빠져 기억에서 사라졌는데도, 또 다른 나는 평상시와 똑같이 먹고 배설하고 어눌하게 말까지 했다고 한다. 아내가 한국식 가지나물을 입원실로 가져와서 먹인 모양인데, 음식물이 입 밖으로 흘러내리는 모습은 내가 봐도 입맛이 떨어진다. 아들이 문병 와서 아비의 식사장면을 본 후론 지금까지 가지로 만든 반찬은 모두 멀리한다고 한다. 차라리 간성혼수에서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고통은 겪지 않았을까 했기도 했다. 하지만 소문으로만 들었던 식물인간에서의 부활은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 주었고, 질기게 이렇게 살아 낸 이상 인생을 제대로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했다. 기억하지 못하고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삶은 결코 나의 삶으로 인정할 수 없다. 앞으로도 언제나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정신과 육체를 소중하게 아끼고 사랑해야겠다는 각성을 하게 한 사건이었다.
뇌사자 간이식수술을 받다.
미국으로 업혀온 지 9개월 지나서 새벽 2시경에 급히 병원에서 나오란다. 습관대로 실려 다니는지라 병원에 도착 했더니 오늘은 나와 맞는 “O”형 이란다. 눕혀 기다린 지 4시간 경과 후에 집으로 돌아가라 한다. 소위 대기 조였었다. 대기조의 의미는 지금 누군가의 인체해부학 실험이 옆방에서 진행 중인데 팀들 중에 조그만 실수 하나라도 있다면, 그 자는 들것에 실려 나갈 것이고 다음 타자인 내가 대신 인체실험대 위로 올라가 홀라당 벗는 모양이다. 차례가 오지 않아 아쉬운 맘에 질문을 했는데 화답은 “도너는 22살 청년으로 스키장서 공수해왔다.”고 한다. 동양인인 내 속에서 천수를 같이 할 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후 1주 만에 같은 새벽시간 또 나오라 호출이다. ‘대기 조? O순위요?’ 질문에 그렇다고 한다. 2009년 1월 30일 새벽에 도착과 동시에 숙달된 솜씨로 홀라당 벗기기, 가운 바꿔 입히기, 침대 눕히기 등을 절차 있게 마치고 처음 보는 의사가 약간 뒤에 수술실에 들어가면 곧 수면상태가 될 것이고 그냥 잠자고 깨어나면 된다고 한다. 뭐 3국 돌아다니면서 한두 번 의사에게 속아(?)본 나도 아니고, 내가 할 일이란 잠자고 일어나는 게 전부라니,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원래 칼잡이 의사들은 “조금 따끔 합니다.”하고 죽여 놓은 뒤에 난도질 하는 것 내가 다 아는데. 누워 묶여서 끌려 들어가니 색깔 별 가운 입은 7~8명의 의사들이 흰 복면을 뒤집어쓰고 횟감을 째려보는 듯하다. 얼떨결에 보게 된 구석진 곳에서는 사진에서나 본 좌우 전면 간을 알루미늄 같은 박스 위에서 통째로 꺼내서 씻고 있었다.
“저놈이 내 것이랑 바꿔 치기 해서 나랑 천수를 나눌 중고품인가?” 생각 외로 엄청나게도 크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순간 “이름이? 생년월일 ?” 듣기는 했는데 깊은 잠에 빠져 든 모양이다.
어딘가 아득히 간호사 신발 끄는 소리에 깨어났는데, 기억에 남는 방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다르다면 주렁주렁 20여개 수액튜브에 매달린 열매(주사액)의 색갈이 가지가지이다. 빨간 비닐 주사액은 분명 누군가의 채혈이 분명한데, 결국 헌혈자의 채혈은 내 몸 속의 피랑 바꿔치기를 하는구나? “엿장수도 주는 고물이 있어야 구멍 엿 하나 되돌아오는 것인데…….” 나는 평생 헌혈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기억들에 반성과 후회를 했다. 옆자리에서는 아내의 웃는 모습이 보인다.
“뭐야? 수술하기는 한다고 해?”
“응, 방금 끝났어!”
복수 뽑기보다 이렇게 쉬울 수가, 믿기 어려워 아내에게 거울을 가져오라고 했다. 진짜 벤츠마크 조각을 했는지 눈으로 확인해야만 믿음이 가기에 재촉을 했다. 간호사와 아내가 동시에 들어오면서 간호사는 능숙한 솜씨로 거울을 비춰 보인다. 깨어나면 누구나 거울 찾기 운동을 하는지 모두들 확인심리는 같은 모양이다.
첫 거울의 반사모습은 벤츠마크 모형의 칼자국에 철사로 바느질한 프랑케슈타인 옆모습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리고 통증이 오면 한 번씩 핑퐁을 누르라고 모르핀 공 하나를 손에 쥐어준다. 심리적인 모르핀 공이란 건 나중에야 알게 되는데 아무리 손아귀를 잡아줘도 통증이 여전하기에 간호사가 가져 온 진맥주사로 그 차이점을 알게 되었다.
간이식 1주 전에 공여자가 22살 백인청년이라 했는데, 결국 나는 55살의 백인 여자로부터 이식을 받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주변에는 스키장이 많은 탓에 사고 시 헬리콥터로 이동해 10월부터 4월 사이에는 도너 걱정은 별반 하지 않는다. 도너가 누군지 알고 싶지 않느냐고 묻기에 깊고 짧은 생각을 해봤고, 더 이상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삶이 네모였는지 세모였는지는 모르겠으나 5년 더 많이 세상살이 한 나에게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해 본다. 수술실에 들어가면서 도너자인 그녀의 실체를 직접 봤고, 진실로 나의 남은 생은 그녀의 뜻을 생각해서라도 실망할 만한 삶은 없을 거라 다짐해 본다. UNOS의 규칙은 도너의 구체적인 신상을 발설 하지 못한다 했는데, 주치의는 쉽게도 질문에 기록을 펼치며 답을 해준다. UCSF 건물 옥상에는 6개의 헬기 이착륙장이 있다는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병원 신뢰도
환자가 읽는 병원에 대한 신뢰도는 한국이나 중국(북경 301, 톈진 제일병원)이나 시설의 차이, 의료진의 출신 학교, 개인 간의 칼잡이 명의 기록자랑은 몽땅 과대포장으로 큰 의미가 없었다. 네바다 종합병원은 한국의 종합병원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편안했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의료진에게 개인적으로 신뢰가 간다.
대한간학회 간경변 합병증 치료 가이드라인에 ’난치성 복수의 치료에 있어서 TIPS의 시행여부는 대량 복수 천자의 빈도에 달려 있는 데, 한 달에 3회 이상의 대량 복수 천자를 시행하여야 하는 경우에 TIPS를 고려하며, 대량 복수 천자에 순응하지 못하는 경우나 다발성 유착이나 국소적인 복수로 인해서 대량 복수 천자를 못하는 경우에도 TIPS를 시행할 수 있다. ‘고 되어있지만 한국, 중국에서 단 한 차례도 들어보지도 못한 TIPS 시술을 도착과 함께 듣게 된 곳이다. 설렁탕, 자장면 먹고 체면치레로 내는 것이 Tips인 줄 알았다. “네, 좋아 졌습니다. 3개월 후에 뵙지요.”3분 진료로는 질의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이따위 무성의한 대답 한 마디 듣고자 어젯밤에 중국서 진료 차 동방항공 표로 왔는지, 올 때마다 “이건 아닌데” 했다. 당연히 국가별, 병원 별 신뢰도에 대한 자가 평가를 해본다면, 그 동안 관련된 모든 과정과 결과에 대해 의문과 의심으로 화가 나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닌가.
주치의 제도
미국에서 병원출입을 하자면 병원과 의사를 환자 스스로 선택하는 “주치의 제도”가 있다. 주치의를 선택한 후 주치의가 정해주는 진료에 따라서 병원도 선택되고, 부서가 연결되어 환자에 관한 모든 진료결과는 환자가 출입한 기록들 모두가 주치의에게 자동 송달되고 정기적으로 주치의와 진료면담을 듣게 되며 향후 대책들을 논의 하게 된다. 초기 UCSF내. 외과의의 주문에 의해서 UCSF 자체 내에서 주치의를 소개 받았다. 기존 내. 외과 외에 주치의가 안내한 안과, 피부과, 그리고 당뇨를 정기적으로 치료 및 진료를 받았는데 HBIG, 피검사까지 내 주치의는 모든 결과를 훤히 알고 있어서 이식내과에서 못 다한 궁금증은 모두 주치의가 대신해 주고 있다. 주치의와 어긋나는 시간은 항시 전공의가 대신해주고 있다. 주치의는 개인병원을 통해 지정할 수도 있으나 동일병원 내에서 컴퓨터기록이 함께 되어 있고, 언어소통이 걱정스러울 때는 개인병원(한인 병원)을 통해서 두 명의 주치의에게 의탁할 수도 있다. 나는 기록송달에 엇박자가 나는 일이 있어서 현재는 한인주치의와는 의뢰를 만료한 상태다.
주치의 제도의 편리함은 의료쇼핑이 필요 없고 주치의가 잡아주는 병원의 일정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편리하고 혹시나 하는 의심 병에서 완벽하게 정리가 되는 것 같다. 서울과 중국 8년간 내과, 외과, 안과, 혈당진료 그리고 처방전을 받아 천사약국에 매 번 방문하지 않아도 된다. 환자 본인이 직접 예약하고, 묻고 물어서 찾아다니며 엇박자를 냈던 불편함을 기억한다. 주치의 제도는 진료부서가 다르고, 의사가 다르고, 예약 일정이 다르고, 장소가 크게 달라도 주치의의 사인 한 장으로 진료 받고자 하는 또 다른 의사와 자리만 함께 하면 된다. 잘 통하지도 않는 전문용어 굳이 알려 할 필요도 없다. 내일 6주차 주치의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손자 첫돌 기념 타월 한 장을 봇짐 해서 가려 한다. 이변이 없는 한, 내 주치의는 나의 천수를 돌보아 주리라 확신한다.
미국 간이식 총비용 처리현황
한국서는 엄두도 못 낼 바가지 치료비가 미국이라는 기사소문은 사실인 듯 했다. 그러나 엄청난 치료비용에 대한 대처방안에 대해서 읽어본 적도 소문도 듣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미국서의 사회보장제도에 의한 저비용 지불 혹은 무료혜택에 대한 상식은 사실상 접해 본 기억이 없었다. 극소수의 무주택자, 거리주민을 위한 General Hospital의 최악의 의료 환경만을 읽었고, 훈련이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간질환은 미국, 한국, 중국 어디서도 돈으로 때워야 한다는 반복정보들에 이미 세뇌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뇌사자 간이식에 대한 공급은 특정인만으로 나는 이미 부자격자임을 전제로 입국초반 간이식 전 9개월 내내 의아심으로 견뎌야 했다. 혹시나 자식들에게 막대한 채무유산이나 넘어가지는 않는지, 이들이 정말 나를 살린다는 건지, 등등 망각되지 않는 의아심과 병고의 연속이었다. 곱게 나이 드신 Social Worker(사회복지사)가 입원실로 찾아와 문답형식으로 개인신상정보, 병원비 지불능력 등 문답형식으로 20분정도 보낸 후 사인하라 한다. 이식 전 9개월 치료비 및 각종 시술. 수술 포함 46만불(약값별도)과 뇌사자 간이식 전후 6일간 52만불 합계 98만불 이었다. 그 후 20개월 현재까지 치료비 포함 약값 전액을 Medical (Medi-California)로 혜택을 받고 있고, 이후 특별한 실소득(년 $15,000불미만 소득까지 허용) 발생이 없다면 영구토록 무료혜택이다. 현재는 무소득자로 오히려 월 $1,230을 주 정부로 부터 지급받고 있다. (참고로 본인은 22년간 미국시민권자로 영주권자도 동일한 혜택이 주어짐).
※참고: Medical (Medi-California), Medicaid (Medi-New York) 등 각주(50개주)마다 비슷한 내용의 의료혜택에 대한 조례가 있고, Medicare (Medi-Federal)은 하나있는 연방정부의 의료보장 보험으로 만 65.7세가 되면 미국인 전체가 자동부여 되고, 암환자 등 특정 환자경우는 나이 제한이 없음
‘한국간이식인협회’에 드리는 말씀
현재 환자들의 최대 요구사항인 장기기증 활성화와 일부 치료제의 건강보험급여 확대가 조속이 이루어져야 한다. 외국의 선례를 지금과 같은 한국간이식인협회 발족은 대단한 보람을 얻을 거라 믿는다. 협회는 유일무이한 비영리 민간단체로서 협회에서 목적으로 하는 10개항 모두가 단순구호로만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항시 표어중심이 아니라 실질적인 대변자로서 중요 사명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협회자체도 활동(구호) 예산이 있어야 원대한 희망을 베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첫댓글 윗글은 미국에 거주하고 계시는 sanf님 투병기입니다.
투병기가 파란만장 합니다. 그래도 역경을 딛고 일어서서 건강하시다니 축복입니다.
sanf님 ~ 좋은 소식 많이 전해 주세요. 그리고 클로버님의 노고에 감사 드립니다.
좋은 자료.. 많이 접할수 있어 감사하구요. 이렇게 좋은 글도 맛보게 하시니.. 항상 고맙습니다.
적지않은 동종의 체험자 분들이 계실 것이고, 각기 판단방법과 주어진 환경에 따라서 각오들이 나름 다르리라 봄니다. 저는 솔직히 "살만큼 살았다" 자위를 했었고, 남겨질 가족들에 대한 아픔만이 절대 고통 이었답니다. 지나고 봐서는 편히 받아들이는 운명만이 유익한 결과였고, 암환우들을 위한 정책당국의 과대 홍보성에 대한 신뢰성을 못 갖은점은 지금까지도 맞는 일이었다. 체험에서 말씀드릴 수가 있읍니다. 저는 투병기보다는 단순 환우 한사람의 체험기로 봐 주십시요. 클로버님 소개 해주셔서 감사 드림니다.
잘읽었습니다. 위의내용으로 유추해보면 간암사이즈가 국내에서는 이식불가사이즈였던것 같네요. 여하튼 잘회복되신것 축하드립니다.정확히 이식하신지 얼마지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간암으로 이식한후에는 몇년간 살엄음 걷듯이 일년,이년 삼년등등진료보고들 계시거든요. 어렵게 얻은 새로운 삶 쭉 건강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