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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무림(靑春武林) ] 제7장 철기보(鐵旗堡).
그로부터 이십 일 후, 홍무 십오 년 구월 십칠 일.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었지만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찌는 듯한 폭염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마땅히 붉으스레하게 물들어야 할 산의 단풍들도 보이지 않았고, 뙈약볕 속에 매미소리가 아직도 자자했다.
그러한 속에 무창을 나섰던 훤백 일행은 마침내 섬서의 북단(北端)에 위치한 태화성(太和城)에 도착했다.
본시 섬서의 풍물이나 토양은 중원 복판과는 크게 달랐다.
낙양이나 무창에 비하자면 같은 중원안의 성(城)이라고 해도 문물, 발전 등 모든 면에서 손색이 큰 곳.
사방이 거친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황폐한 곳이 많아 벌판마저 붉은 적토 빛을 드리운 곳이었다.
민가(民家)역시 흙벽돌로 쌓아올린 토옥이 대부분.
태화성만은 그래도 인근에 비해 손꼽힐 정도의 번화함과 큰 규모를 지닌 편이었다.
무림맹(武林盟).
백여 리(里) 정도 떨어진 측근, 중조산의 기슭에 진중원의 대명(大名)을 떨치는 천하제일의 방파 철기보(鐵騎堡)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림의 패권(覇權)을 장악한 중원무림맹(中原武林盟)의 심장부인 그 곳...!
따라서 태화성의 번성은 곧 철기보의 역사와 같은 것으로 사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 역시 섬서의 낙후된 일반적인 성과 다를 게 없었다.
그랬던 태화를 융성하게 한 것이 바로 현 무림맹주이자 철기보의 제 오대문주(五代門主)인 유목공(柳木公)이었다.
대산신협(大山神俠) 유목(柳木)!
하나 그 역시 처음에는 이 척박한 땅에 위치한 작은 군소방파 중 하나로서 사대 째 이어져 왔던 철기보의 그다지 이름 없는 자손에 지나지 않았다.
철기보 역시 거저 미약한 이름만을 지닌 작은 방파였던 것.
그러했던 철기보가 무림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은 전대 문주이었던 유양(柳養)이 오십여 세에 일찍 세상을 떠나고 젊은 유목이 이를 물려받은 후부터였다.
유목은 서른이 갓 지난 청년. 당연히 중원 무림은 아무도 그를 주시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오년 사이, 그는 우선 섬서 무림의 판도를 크게 바꾸기 시작했다.
선대(先代)의 가업을 이어받자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강력히 문중을 키워내기 시작한 한편, 비슷한 처지를 가진 섬서 일원의 군소방파들을 형제처럼 결집시키기에 이르렀던 것!
그에게는 선천적으로 주위 사람들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매력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군소방파의 자손치고는 문무(文武)와 지략까지 뛰어나 있었다.
무림은 혼란 그 자체였다.
도처에 사마외도가 난립하고, 개개인의 은원과 방파간의 피비린내 나는 이권다툼으로 아수라장이나 다름없던 상태.
하나 유목은 별반 무림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군소방파의 문주로 만족한 그는 안으로 내실을 다지고 어려운데로 거저 주위의 벗들과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고 있었을 뿐...!
한데 그랬던 그가 마침내 천하사에 도전장을 던지게 된 것은 문주로 등극한지 육년 째 되던 해였다.
사유를 무림인들은 청화문(靑火門)의 난(亂)이라고도 일컬는다.
청화문이란 당시 이 섬서에 자리 잡고 있었던 가장 세력이 큰 대방파(大?派) 중 하나로서 여타의 대방파들과 함께 군소방파들을 거느렸던 수장격인 곳.
그런 만큼 꽤나 위세를 자랑하는 곳이기도 했는데, 어느 날 그들이 군소방파에서 거둬왔던 조세(租稅)을 거의 두 배에 가깝게 대폭 인상한 바가 있었다.
주위 대방파들과 연계해 보다 섬서무림의 세력을 확장시키고 지역을 안정시킨다는 명목이었다.
하나 앞서도 이야기했듯 섬서란 험한 산과 황폐한 땅으로 이루어진 가난한 지역! 영지가 피폐했던 만큼 각처의 군소방파들 역시 그다지 풍족한 운영을 못하는 처지였다.
한데 느닷없이 거두어들이던 조세를 두 배에 가깝게 올려버렸으니, 가뜩이나 운영이 어려웠던 군소방파들은 당연히 불평이 많을 수밖에.
게중에서도 가장 낙후된 지역 중 하나인 송궁(松窮) 비월보(飛越堡)의 원성은 특히 대단했다.
조세를 올림과 함께 유지가 어려워져 폐문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던 것.
이에 비월보는 서둘러 조세를 가감해 줄 것을 청했지만 청화문은 타 방파와 차등을 둘 수 없다는 것을 구실로 청원을 일축했고, 급기야 비월보는 청화문에서 등을 돌려 조세를 내는 것을 중단했다.
무림의 법칙으로 말하자면 불복(不服)에 해당하는 셈!
이에 청화문은 즉시 수하들을 보내 비월보를 공격하기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 비월보는 피비린내 나는 접전 끝에 결국 잿더미가 되고 말았데...!
“심하다!”
이렇게 되자 도처 군소방파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
철기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줄곧 도처의 군소방파들과 형제처럼 지냈던 터였기에 비월보와도 적지 않은 친분이 있었던 것.
이에 변고가 전해지자 유목은 결국 침묵을 깨고 일어섰다.
“멋대로 폭력을 휘두르는 청화문을 친다!"
이후 시작된 철기보와 청화문의 접전...!
이때부터 그의 대명은 전 중원을 떨어 울리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상대가 되지 못할 것 같았던 철기보가 도처의 군소방파들을 몰아 하룻밤 사이에 청화문을 완전히 초토화시켜 버렸던 것!
이로써 청화문이 누렸던 대방파의 지위는 철기보로 넘어갔고 또한 그것은 천하대란의 시작이기도 했다.
철기보가 도처의 군소방파와 인맥을 형성했다면 쓰러진 청화문에게도 대방파의 동맹들이 있을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명백한 하극상이다!”
이에 청화문이 쓰러지자 이번에는 주위의 대방파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철기보를 공격해 왔고, 급기야 비월보의 사건은 섬서 전역의 대혼전(大混戰)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철기보의 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했다.
백전백승!
유목은 격돌할 때 마다 상대 문파들을 무차별로 쓰러뜨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문제는 섬서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대방파 하나가 쓰러질 때 마다 또 다른 동맹들이 싸움에 가담했고 마침내 싸움이 전 무림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연히 섬서 밖의 군소방파들도 철기보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네까짓 것들이 대방파라 해봐야 우리가 아래에 있으니 대방파일 뿐이지!”
일이 천파만파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이후 오년 여에 걸친 군소방파와 대방파간의 처절한 싸움...!
그러나 끝까지 철기보는 살아남았다.
무엇보다 친구를 위해 무림 전역의 대방파와 악전고투를 벌이는 그에게는 도움을 주는 인물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마침내 패권을 잡게 된 유목은 무림정화 차원에서 천하도처의 사마외도(邪魔外道)를 눌렀고, 곧 새로운 조세법과 법령을 만들어 대방파와 군소방파간의 평형을 지키게 하는 등, 피비린내 나는 각 방파간의 이권다툼까지 한꺼번에 종식(終熄)시켰던 것이다.
이후 그는 천하맹주로 등극했고 그의 영도아래 무림은 이십 년 간의 긴 평온을 얻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한다.
아무리 대단한 기략을 지닌 사람이라도 세월을 이길 수는 없는 법.
이에 한계를 느꼈던지 칠순에 이른 유목은 마침내 맹주직에서 은퇴할 것을 천명했고, 무림에는 곧 새로운 맹주가 등장할 때가 도래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천하는 다시 혼란이 예고되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하나 속내야 어찌되었건...!
훤백이 도착했을 때 이곳은 여전히 평화로왔다.
무림맹이 측근에 자리한 만큼 많은 무림인들이 오갔으나 전혀 이렇다할 문제가 보이지 않았던 것.
일행의 모습은 매우 초췌해 보였다.
동행한 것은 황보소미를 제외한 나머지 이십여 명 정도.
이십 일이 걸려 도착했다하나 워낙 거리가 멀다보니 거의 휴식조차 없이 달려 왔던 것이다.
그래도 훤백이나 황보소미의 경우는 조금 나았다.
피로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긴 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화색이 돌아 보였지만, 타고 온 말과 수하들의 모습은 지칠대로 지쳐 거의 파김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태화성의 정경이 보이기 시작하자 훤백은 쓴 웃음과 함께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확실히 천하가 넓긴 하군. 단순히 달려오기만 하는데도 이렇게 시일이 걸리다니.”
황보소미에게 시선을 돌렸다.
“황보소저, 이젠 어디로 가지? 철기보는 성 안이야?”
황보소미는 잠시 뭔가를 생각한 후 대답했다.
“아니, 백 리(百里) 정도 더 가야 해. 훨씬 떨어진 중조산 기슭에 있거든.”
그녀는 계속 염두를 굴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린 먼저 성안으로 들어가야 해. 초대를 받아서 온 것도 아니고, 특별한 용무로 온 것도 아니니까. 불쑥 찾아간들 받아줄 일도 없으니 당분간 머무를 숙소부터 잡아야지.”
훤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런 다음에는?”
“우선 우리 둘만 대내로 가야할거야. 개인적으로 도천오빠를 아니까 면회를 청하면 어떻게 되겠지.”
황보소미는 야릇하게 눈빛을 반짝이며 질문했다.
“그런데 댁에, 오랜만에 말을 꺼냈네? 대체 왜 그래? 집에서 나온 후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잖아? 뭔가 언잖은 일이라도 있었어?”
확실히 그러했다. 지난 이십 일, 황보가를 나와 이곳으로 오는 동안 훤백은 정말 줄곧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간단한 것 정도는 함께 출발한 수하들에게 묻곤 했었지만 황보소미에 대해서는 줄곧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훤백은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없어. 다만 좀 낯설어서...! 사실 황보소저와 난 처음에 아이와 손위로 만났었던 사이였지. 당연히 내가 오빠였고. 한데 뜻밖에 황보소저는 나보다 무려 네 살이나 더 나이가 많은 누님이고 게다가 대명이 쟁쟁한 황보세가의 따님이시거든? 특히 무림에는 선배인데다가 백병소아라는 상당한 위명까지 지녔으니 왠지 크게 어색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딴은 그랬다.
아닌 게 아니라 확실히 훤백과 황보소미의 만남은 기묘하게 이루어졌다.
처음 훤백은 그녀가 다만 황보세가의 일족 중 하나로 화원을 돌보는 평범한 아이인줄로만 알았고 흉허물 없이 무창성을 쏘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알게 된 그녀의 존재는 여간 꺼림칙한 게 아니었다.
우선 나이부터가 그러했다. 겉보기에는 십오 세 가량에 불과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보다 네 살이 나 더 연상인데다가, 또한 무림에서의 배분이나 신분조차도 자신 보다 한참 위인 그녀였다.
이렇다 보니 동생처럼 대했던 모습을 계속 보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누님이라 부르거나 존대를 하기도 어색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황보소미는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상당히 양심이 두툼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꽤 쑥맥이네? 나이가 많다고 내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니고 이대로 좋지 않아? 시작에 어리게 봤으니 계속 어리게 대하면 되지. 나도 그게 더 편하단 말씀이야?”
훤백도 생기가 도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야 나도 좋지만. 사실 나란 놈은 원래 여자에게 별로 친절한 편이 못 되거든. 할말은 아니지만 황보소저는 누님이라 부르기엔 역시 너무 어려 보여. 가능한한 존중하도록 노력은 해 보겠지만.”
황보소미는 훤백을 귀엽게 흘겨봤다.
“너무 정직해서 눈물이 다 난다. 댁에 말을 듣고 있으면 정말 내가 어린애같이 느껴진단 말씀이야? 집이 낙양이라고 했지? 숭양이세가?”
훤백은 코가 쑥 빠졌다.
“뭐 세가라 할 것까지야...! 황보가문과 달라서 명문(名門)도 뭣도 아니거든. 무림인들이 눈 아래로 여기는 상업(商業)에 종사하는 집안이니까.”
황보소미의 눈 속 깊숙이에 반짝 한 줄기 정광이 스쳐갔다.
“그게 어때서? 황족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우리도 상계와 무관하진 않아. 금전을 무시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있을 수가 없고, 내노라 큰소리치는 무림인들이 영역을 지키려고 하는 게 다 이권 때문이지. 상업을 하는 집안이라고 명예가 없을 수는 없다구.”
슬금슬금 특유의 모습으로 다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세가라 불리울 정도면 상계에서 꽤 이름난 거상(巨商)으로 여겨지는데 그렇지?”
훤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확실히 아니라 할 수는 없지. 낙양에서는 꽤 알려진 편이니까.”
“그럼 금우상회도 집안을 통해서 알게 된 거야? 함께 갔었던 상회 말이야.”
훤백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그곳은 집안과 별개지. 그때도 말했지만 아는 형이 있어서... 개인적인 일이야. 물론 상업을 하는 집안이다 보니 친해지긴 한거지만.”
황보소미가 쫙 눈을 째렸다.
“어려 보인다고 바보로 보면 곤란해! 그들이 대행수(大行首)라고 부르던데... 이런 명칭은 결코 아무에게나 붙이는게 아냐. 이건 상인의 우두머리에게만 붙이는 건데 설명 좀 해봐.”
훤백은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야 뭐 대점주가 아는 형이니까...! 그냥 존중해 주는 의미로 그렇게 부르는 것 같어.”
애매하긴 하지만 그럴 수도 있긴 했다.
“그 정도라면 최소한 의형제가 되겠군. 댁에를 무척 위해주는.”
“맞아. 멋진 사람이지. 내가 반한 사람이거든.”
황보소미의 눈이 기묘한 광망을 떠올렸다.
“보다 무서운 사람이기도 하지! 상업을 하는 무인(武人)으로 쓰러져 가던 금우부(金牛府)라는 문파를 불과 삼년 새에 막강한 강호(强豪)로 만들어놓고 뭇 방파들의 눈총을 받는다며?”
훤백은 적잖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황보소저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보니 점원들 하나하나가 모두 쉽지 않은 무력을 지닌 것 같았고 일반 상회 같지가 않았어. 그래서 좀 알아봤지.”
훤백은 쓴 미소를 머금었다.
“황보세가의 따님이란 것을 알았다면 결코 함께 가지 않았을 거다.”
황보소미의 입가에 귀여운 웃음이 떠올랐다.
“걱정 마, 내 입이 가볍진 않으니까. 보다 내력을 알고 나니 금우부에 많은 의문이 생기던데... 독보창(獨步槍) 사도횡(司徒橫)이란 사람 말야. 물론 천하가 넓으니 기인도 많게 마련이지만 왠지 난 금우부의 일이 결코 그 혼자서 이룬 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거든? 어떻게 생각해?”
훤백의 입가에 다소 난처한 미소가 번졌다.
“대체 뭐가 궁금한 건데?”
황보소미는 들은 대로 이야기를 했다.
“첫 째로 금우부의 내력...! 삼 년 전만 해도 금우부는 거의 몰락해가던 방파였다고 들었어. 그러던 것을 사도횡이 물려받았고, 그 후 그는 곧 기반을 다져 방파를 초강호로 끌어 올렸다고 했어. 여기서 의문점은 그의 상업수완이야. 출신이 무림인이니 무력이야 어떻게든 될 수가 있겠지만, 무림인이 처음 시작한 장사를 그 정도로 끌어올리기란 쉽지가 않거든?”
훤백은 고개를 갸웃했다.
“운이 좋았을 수도 있잖아.”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운이라야 고작 점포 한두 개를 성공시킬 정도지. 하지만 금우부는 망해가던 처지에 시작하자 바로 중원도처에 점포를 뒀어! 그럴 돈이 있나? 게다가 대뜸 무역을 시작해서 성공했는데 이건 결코 운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 따라서 난 금우부의 뒤에 분명히 다른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계속 눈을 반짝이며 훤백을 향했다.
“지금 이야기를 듣고 난 더욱 내 생각이 옳다고 확신했어. 솔직히 이야기해 봐. 그들은 댁에를 대행수라 불렀고 댁에의 집안은 오랫동안 상업에 종사해왔다고 했어. 분명 댁에의 집안과 금우부는 어떤 연관이 있지?”
있을 수 있는 추측이었다.
하지만 훤백은 단호하게 휙, 고개를 가로저었다.
“맹세코 말하지만... 우리 집안과 금우부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대행수라 부르는 것은 그대로 횡형님과 상당한 친분이 있어서일 뿐이야.”
실상 이세가와 금우상회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사실...!
황보소미의 표정에 일순 적잖은 실망의 기색이 떠올랐다.
성격으로 볼 때 결코 있는 사실을 맹세코 라는 말까지 해가며 없다고 할 훤백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횡은 정말 대단한 인물이군. 실로 대단한 악당이기도 해! 그만한 실력을 가지고도 몸담은 문파가 쓰러지길 기다렸고 기반을 물러 받은 후에야 수완을 드러냈다면... 조만간 무림이 그의 발치 아래서 움직이겠어.”
훤백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하하...! 악당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렇게는 될 거야. 의지가 있는 사람은 성공하게 마련이지. 지난 날 유목공이 그러했듯이 말이야.”
유목공!
순간 황보소미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그와 맹주님이 무슨 상관이라고?”
“두 사람이 꽤 비슷한 형상이잖아? 실제 유목공도 두각을 나타내기 전까지는 섬서의 힘없는 군소방파 중 한곳의 주인에 불과했다고 들었어. 철기보를 승계 받고 기략을 펼쳤을 때부터 주시 받은 거지. 와중에 청화문의 난(亂)이 일어난거고.”
확실히 그러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과연 금우부와 철기보가 꽤 흡사하다고 볼 수밖에.
“그렇게 보면 유목공도 결코 만만치 않은 악당이지 뭐야? 특히 약자를 핍박하는 대방파에 맞선다는 명분은 좋았지만 그는 너무 많은 피를 흘렸고. 어쩌면 그는 명분을 잡을 기회를 기다렸을지도 모르지. 대개의 사람들은 그를 영웅시할지 모르지만 난 생각이 좀 달라.”
순간이었다.
황보소미는 안색이 싹 변해서 급급히 주위를 살폈다.
“말조심해. 어떻게 여기서 그런 소릴 함부로... 이런 말은 무림맹주를 모욕하는 죄에 해당해.”
훤백은 히죽이 웃었다.
“그런 의도는 아니야. 다만 양상이 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한 말일 뿐이지. 어쨌건 횡형님은 절대 남의 피를 흘리지 않을거야. 성격이 좋거든.”
“그를 크게 믿는가 보네?”
황보소미는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런 그녀를 보며 훤백은 화제를 바꾸었다.
“황보소저, 그럼 이번엔 내가 좀 묻자구. 도천형이 급히 이곳으로 온 이유가 뭐야? 대충 듣기로는 맹의 안위와 관계될 만큼 큰일이 벌어졌다 하던데, 그게 뭔지 알아?”
황보소미는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니까. 실은 무창에서 작은 일이 하나 발생했었어. 우연한 기회로 혼천소마 중 하나를 사로잡았었는데 그에게서 심각한 첩지가 하나 발견됐어. 확실친 않지만 혼천소마들이 결탁해서 무림맹을 상대로 뭔가 흉계를 꾸미려는 것 같은...! 이곳에서 집결하기로 되어있었던 것 같아. 날짜는 지난 구월 초이레였고. 그래서 급히 떠났었던 거야.”
훤백의 얼굴에 일순 적잖은 놀라움의 빛이 떠올랐다.
“확실히 대단한 일이네. 그들이 모이면 실로 무서운 힘을 지니게 될 건데... 한데 왜 하필이면 이곳에서 모이는 거야?”
황보소미는 잠시 염두를 굴려본 후 대답했다.
“헛점을 노린 것 같아. 설마 무림맹 아래서 그들이 운집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거니까. 또, 상대하려는건 무림맹이니 가까울수록 좋잖아? 게다가 군림대회(君臨大會)도 있고...! 혼란을 틈타 뭔가를 하려는 거겠지. 대회 자체를 망쳐놓을 수도 있고.”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훤백은 대소 터뜨렸다.
“하하... 그건 틀렸어! 그렇다 해도 넓은 세상에 만날 자리가 없어서 여기일 리는 없잖아. 무림맹을 상대하려 한다 해도 그래. 보다 안전한 곳에서 만나서 완전히 싸울 계획을 세운 후에 오는 게 더 정상아냐?”
그러했다.
호랑이굴 앞에서 회합을 가지는 것을 단순히 허를 노린 것이라 보는 것은 상당한 억측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기실 당장 싸움을 할 것도 아닌 그들이 이런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모여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황보소미 역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댁에 생각으로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은걸?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반드시 여기서 모여야만 할 그런 이유 말이야. 아마 시급히 알아내야 할 것은 그것일거야.”
황보소미를 주시하며 질문했다.
“첩지를 지녔던 혼천소마는 어디 있어?”
황보소미는 고개를 갸웃 했다.
“죽었어. 좀처럼 입을 안 열기에 회유책을 써서 정보를 받아낸 건데, 어쨌건 그런 자를 풀어줄 수 없고... 죽일 수밖에 없었지.”
훤백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실수를 했군. 그 자는 사실을 다 말하지 않았어. 가장 바보 같았던 점은 정확한 날짜조차 알아내지 않았다는 거야. 올해는 윤(閏) 구월이잖아. 구월이 두 번 든 해로 다음 달도 구월이지. 아직 일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너무 서두른 것 아냐?”
윤(閏)구월!
“그러고 보니...!”
순간이었다.
황보소미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닌 게 아니라 확실히 때는 이미 구월의 중순을 지나 가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도처의 산에는 아직 가을색이 전혀 없었을 뿐더러 여전히 별나게 폭염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인데...!
확실히 이 해엔 구월이 두 차례가 든 윤구월이었던 것이다.
황보소미의 표정에 크게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맞아...! 확실히 다음 달도 구월이네. 한데 아직 일이 시작되지 않았단 소리는?”
훤백은 답답하다는 듯 웃음 지었다.
“눈치를 보면 몰라? 혼천소마는 하나같이 상승무공을 지닌 고수라 들었어. 따라서 싸움이 벌어졌다면 여긴 엄청 살벌한 분위기여야 하는데 주위엔 어디에도 그런 낌새가 없지. 이건 결국 도천형도 그렇고 모두 헛고생을 했다는 소리야. 그들의 모임이 이 달이 아니었단 뜻이지.”
“그런...!”
황보소미의 미간이 기묘하게 찡그려졌다.
사실이라면 확실히 도천도 황보선도, 또 덩달아 자신까지도 관구에게 톡톡히 당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훤백은 계속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혔다.
“한 번 생각해봐. 주동자 서백은 지금껏 천하를 이 잡듯 뒤져도 종적조차 찾을 수 없었을 정도로 약은 자라고 들었어. 그런 자가 일을 이렇게 허술히 처리할 리가 없잖아. 필시 다른 뭔가가 있는 거야. 내 생각이 옳다면 서백이란 자는 필경 첩지를 보내기 전에 사전에 또 다른 어떤 복선을 쳐뒀을 거라고 봐.”
황보소미의 표정이 더욱 미묘하게 변했다.
“또 다른 복선이라면?”
훤백은 크게 웃었다.
“하하... 그렇게 약은 자가 첩지에 서명(書名)과 날짜를 기재했다며? 있을 수 없지. 이건 마치 남에게 보라는 것과 같은 거야. 따라서 첩지내용에는 다른 뭔가가 있는 것이고, 관구라는 자는 그냥 첩지에 있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글을 그대로 말한 뿐인건데, 결국 도천형과 황보세가가 당한 거라구!”
확실히 있을 법한 소리였다.
기실 그도 그럴 것이 서백! 그가 누구인가?
천하를 어지럽히는 혼천소마의 맏이 되는 위인일 뿐만 아니라, 무림의 공적으로서 수백 년 간 존재해온 청부살수집단의 수뇌가 아닌가?
너나없이 이 자와 그 집단을 찾아 붕괴시키고자 끝없이 애를 써온...!
하지만 누구도 그를 찾아낼 수 없었던 만큼, 서백은 그만치 용의주도한 데가 있는 인물이라는 뜻이기도 한 것이었다.
한데 그러한 자가 무림맹을 상대로 일을 도모하는 상태에서 서명까지 남겨 이토록 허술하게 드러나게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가 감히...!”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황보소미의 얼굴에 싸늘한 노기가 치밀어 올랐다.
하나 죽인 자를 살릴 수는 없는 법!
훤백은 빙긋 미소 지었다.
“참아. 아직은 다 추측일 뿐이니. 철기부의 무력이 워낙 강하니 이미 싸움이 끝났을 수도 있고... 일단 도천형부터 만나고 보자구.”
어쩔것인가?
황보소미도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이즈음 그들은 태화성의 성문 앞에 도착하고 있었다.
한데 묘한 것은...! 도착하자 성문 앞에는 관군과 함께 흑의경장 차림을 한 무림인들이 출입하는 인물들을 일일이 조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특징은 가슴 복판에 모두 한철로 만들어진 은빛 고리를 두개의 줄로 엑스형태로 묶어 급소막이 겸 어떤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혹시 철기보 무사들 아냐?”
황보소미는 그들을 훑어보고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역시 댁에 추측이 맞은 것 같아. 내가 아는 한 지금까지 무림맹에서 통행하는 사람들을 검색한 적은 없었어. 혼천소마들을 색출하려는 것 같은데... 미루어 아직 그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도 되는 거지.”
“하하... 웃기는군!”
훤백은 순간 그만 어이없는 심정이 되어 크게 웃고 말았다.
“혼천소마가 원래 그렇게 어리석어? 저렇게 해서 걸려들 만큼 미련하다 이거지? 이건 차라리 너희들 움직임을 알고 있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과 같은데...! 하하...! 그냥 서둘러 숙소를 정한 후 도천형을 만나보는 게 좋겠어.”
황보소미의 코가 한발이나 빠졌다.
“댁에는 나이에 비해 엄청 예리한 데가 있군...! 이런 남자의 말을 안 들으면 손해 보기 마련이지...!”
“하하하... 뭔진 모르지만 꽤 재미있는 것 같에.”
훤백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
한 시진 후.
수하들의 숙소를 잡아준 후 훤백과 황보소미는 이윽고 철기보에 도착했다.
철기보는 말한 그대로 태화성에서 백여 리 가량 떨어진 중조산의 호리병 같은 거친 협곡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앞은 사방이 탁 트인 넓은 벌판이었고 보루는 협곡의 곡구를 가로막아 쌓아올린, 무려 일백 장에 달하는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성벽 안에 있었다.
배후와 사방에는 깎아지른 듯한 천 길 벼랑이 둘러져 있어 그야말로 천험의 요새로 이루어진 철옹성(鐵甕城)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기에 위세를 더해 성벽 위 도처에 휘날리는 형형색색의 각 무림방파의 깃발들과 물샐 틈 없이 사방을 살피는 무인들의 모습은 실로 보는 이의 기를 죽게 할 정도였다.
훤백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엄청난데? 전 중원을 상대로 싸우면서도 함락되지 않았다하더니만 이유가 바로 이거였군? 이건 정말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성이야.”
황보소미는 가벼운 웃음을 머금었다.
“맞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소릴 하지. 성벽 하나만 보고도 기가 질리기도 하고... 나 역시 처음 왔을 때는 크게 놀랐어.”
훤백은 촌놈처럼 휘둥그레 눈을 뜬 채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세워진 곳이 저렇게 협곡 속이어서야...! 너무 답답하지 않아? 앞이 벌판이라 해도 왠지 답답해 보이는데...!”
황보소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 그렇지 않아. 밖에서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하지만 들어가 보면 속은 또 상상 외로 넓어서 놀라게 되지. 자그마치 육당(六堂)에 일만(一萬)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거든.”
훤백은 한 번 더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성에만 일만... 그럼 대체 철기보의 총인원은 몇이야?”
“외부 육십향엔 사람이 더 많지. 아무래도 중원 전역을 총괄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건데, 전체를 합하면 최하 칠, 팔만이 될 거야.”
내외육당, 육십향에 총인원 최하 칠, 팔만!
그야말로 눈이 돌아갈 정도로 엄청난 인원일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나라를 상대로 싸워도 될만한 무력(武力)이로군!”
황보소미는 생긋 미소지었다.
“그만하니 넘볼 자가 없는 거지. 천하를 평정시킨 후 유목공은 혼신의 힘을 기울여 분향들을 키워냈고, 이로 인해 도처의 사마외도가 힘을 쓰지 못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육십향을 친답시고 나서면 내외육당의 일만 정예가 나설 거고, 본성을 친다고 하면 또 육십향의 칠만여 병력이 배후를 칠 테니까 그야말로 무적이지.”
그녀의 말 그대로였다.
이 정도라면 무림이 아니라 황실이라도 섣불리 철기보를 치기가 수월치가 않았다.
규모가 이 정도라면 도처의 몇몇 분향이라거나 설혹 본성을 친다고 해도 문어의 다리 몇을 잘라내는 격일 뿐 그다지 소용이 없는 짓 아니겠는가?
본성과 분향들을 한꺼번에 초토화 시켜버리지 못하는 한 잔여세력들이 곧 다시 결집할 것이고, 설상가상 여기에 전 무림의 방파가 모두 가세할 것이니 이를 막을 만한 세력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이를 상대로 전면전을 펼칠 만큼 강력한 방파 자체조차도 키우기가 불가능했다.
무림맹이 아니고서는 결코 이렇듯 거대한 방파를 일으킬 정도로 막대한 자금동원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설령 자금이 있다고 해도 무림 자체에서 이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래저래 난공불락이로군? 만약 내가 철기보와 싸운다고 보면 어떻게 했을까...?”
순간 황보소미는 실소를 머금었다.
“이기는 것은 고사하고 싸울만한 능력 비슷한 건 있는 거야?”
훤백은 딱 잘라서 말했다.
“아직은 없어.”
“나중엔?”
훤백은 히죽이 웃었다.
“개머리에 뿔날 때 쯤 되면 있을 수도 있겠지.”
황보소미는 쓰잘 데 없는 소리 말라는 듯 훤백을 흘겨보며 재촉했다.
“여기부터는 말에서 내려서 가야해. 아주 급한 일 아닌 다음에는 성문까지 말을 타고 가는 게 금기로 되어있어.”
훤백은 곧 말에서 내렸고, 나란히 황보소미와 걸음을 옮겨 철기보의 성문 앞으로 다가갔다.
좌우에 여덟, 성문 앞에는 도합 열여섯 명의 수문위사가 당당히 버티고 서서 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도착하자 수장인 듯한 사십 대의 인물이 앞을 막아서며 신분을 물어왔다.
“어디에서 오신 누구시오? 관례에 따라 내력과 용무를 밝혀야 통고할 수 있으니 출신, 명호를 밝혀주시기 바라오.”
황보소미가 포권을 취하며 먼저 대답했다.
“황보세가의 백병여아 황보소미라 해요. 추밀원(樞密院)에 용무가 있어 온 것이니 원주께 통고해 주기 바래요.”
“추밀원...?”
사내의 안색이 크게 일변했다.
이 하나만 미루어 봐도 추밀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만한 것인지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을만 한 것!
그는 다시 훤백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포권을 취해보였다.
“소협께서도 추밀원에 용무가 있으신 것인가요?”
말의 억양까지 상당히 조심스러워졌다.
훤백도 마주 포권을 취해보였다.
“낙양에서 온 이훤백이라 합니다. 원주께 전해주시면 아실 것입니다.”
거듭되는 추밀원, 추밀원주를 들먹임에 사내의 음성이 한층 더 조심스러워졌다.
“하오면 별호는...? 방명록에 기재해야 하니 출신문파와 별호를 말씀해 주십시오.”
출신문파와 별호.
훤백은 일순 난감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방파이건 내왕객(來往客)에 대한 명부를 작성하는 것은 상례로 되어있지만, 실제 그로서는 사문도 별호도 지닌 것이 없지 않은가?
훤백은 잠시 머뭇거리는 눈치를 보이다가 곧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별호는 추서소년(追鼠少年)...! 특별히 사문을 섬긴 적은 없습니다.”
“추서...?”
사내의 표정이 일순 기묘하게 돌변했다.
기실 얼결에 댄 별호란게 하필 ‘쥐를 쫓는 아이’라는 애매한 뜻이었으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괴상한 따위는 별호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그렇게 알 수밖에 없는 것.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통고해 올리겠습니다.”
이에 사내는 한 번 더 포권을 취해 보인 후 성문 안으로 들어갔고, 뒷모습을 보며 황보소미가 고개를 갸우뚱 했다.
“댁에, 그거 정말 별호 맞아?”
훤백은 피식, 웃었다.
“당연히 아니지. 사실 무림이란 곳에 처음인 내가 무슨 별호가 있겠어? 급해서 그냥 지은 거야.”
황보소미는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좀 더 그럴싸하게 지을 수도 있었잖아? 무림인이란 별호를 한 번 지어버리면 고칠 수가 없어. 하필 쥐를 쫓는 애가 뭐야?”
그러나 훤백은 괜찮다는 듯 웃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엄청 좋은데? 거창하게 별호를 지어본들 대단하게 봐줄 사람도 없고, 어차피 무림에서 크게 활동할 일도 없으니. 아버님에게 항상 생쥐 같은 녀석이란 소릴 듣다 보니 꽤 익숙해.”
생쥐 같은 녀석!
순간 황보소미는 크게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평소에 댁에가 어떻게 지냈었는지 충분히 알겠어! 정말 엉뚱해.”
확실히 웃을 일이었다.
생쥐 같은 녀석... 쥐를 쫓는 녀석...!
하지만 그녀가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이때뿐이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별호가...! 이제부터 얼마나 크게 천하를 뒤흔들어 놓을지 알았다면 지금도 결코 웃지 못했을 것이니까.
그로부터 약 일각정도 후.
“히히히... 왔구먼!”
철기보의 성문 안으로부터 귀에 익은 괴상한 웃음과 함께 마침내 하나의 인영이 빛살같이 훤백의 앞에 나타났다.
반들거리는 대머리를 향해 훤백도 크게 반색을 했다.
“안에 있었군?”
웃음소리 자체가 그러했지만 도천이었다.
“히히히... 그럼 당연히 있어야지. 턱밑에서 한참 골치 아픈 일이 진행 중인데 아무리 역마살인 나라 해도 어딜 가겠어. 더구나 네 녀석까지 오고 있는데?”
도천의 태도는 여전히 전과 다름없었다.
황보소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히히... 역시 소미도 왔군. 전서구 편으로 도우러 올 거라는 말이 있더니만! 그 동안 잘 지냈지?”
황보소미는 눈부터 째렸다.
“잘 지냈으니 만나게 된 거겠지? 도천오라버니 이럴 수 있어?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무창까지 왔다가 인사도 없이 그냥 가다니?”
“히히... 보자말자 바가지는! 일이 워낙 급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건데 어쩌라구? 아무튼 들어가면서 이야기해.”
도천은 두 사람을 안내해 철기보 안으로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순간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성문을 들어서자 삽시간에 눈앞의 정경이 변했다.
외곽에서 볼 때는 다만 협곡을 가로막은, 위압적이면서도 갑갑하게만 보이던 철옹성이었으나 막상 안으로 들어가자 전혀 예상 밖의 정경이 펼쳐진 것이었다.
살피자면 성의 내부는 호리병 같이 생긴 협곡속의 분지(盆地)로 매우 넓었다.
성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속에 무려 수십만 평에 이르는 대분지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뭇 광활하다고 할만치 넓은 분지 속에는 연무장을 지나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각양각색의 고루거각(高樓巨閣)과 대전(大殿)들, 그리고 별원들이 질서정연하게 중심부에 우뚝 치솟은 한 거대한 팔 층 대전을 중심으로 세워져 있었으니...!
정경이 비단 장려웅대할 뿐만 아니라 환경에도 크게 신경을 쓴 듯 도처마다 보기 좋은 미송(美松)들과 화원(花園), 그리고 외부로부터 물길을 끌어들여 작은 내(川)가 흐르기까지 하는 등 어느 한 곳 정성이 안 들어간 곳이 없어 보였다.
곳곳을 감고 흐르는 물길의 근원은 성의 뒤쪽에 위치한 깎아지른 절벽 위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거대한 폭포였다.
훤백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안에 이만한 분지가 있었다니... 정말 상상 밖인 걸!”
도천이 변함없이 유쾌한 모습으로 웃으며 말을 받았다.
“히히히... 그럭저럭 볼만하지?"
“대단해! 밖에서 보기에는 그냥 싸움을 위해 지어진 요새 같은 느낌이 들더니만... 이렇게 넓은 분지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철기보란 정말 굉장한 곳에 자리를 잡았군.”
도천은 어깨를 으쓱했다.
“천하에 아무리 무림방파가 많다 해도 사실 이만치 절묘한 지형을 차지한 곳은 없지. 풍부한 물과 넓은 분지, 그리고 적당한 숲, 여긴 확실히 하늘이 내린 최고의 요새야.”
황보소미가 입술을 삐죽였다.
“유사시엔 좋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런데 갇혀 살다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기가 어려워. 솔직히 지겹지 않아?”
도천은 부정하지 않았다.
“히히... 그것도 옳아. 사실 나만해도 그런 점이 지겨워서 내부에 있기가 싫거든! 항상 뺑소니칠 핑계거리만 찾는 중이지.”
“호호... 도천오라버니는 솔직해서 좋아. 이만치 소탈한 남자도 드물지. 윗 쪽이 훤하지만 않았다면 내가 반했을지도 모르는데...!”
필시 그의 대머리를 일컫는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즉시 도천은 안색이 싹 변하더니 질새라 맞받아쳤다.
“아, 그래. 위쪽! 그렇다면 난 선천적으로 빛나는 머리에 감사해야겠는 걸? 도통 도토리는 취미가 없어서... 게다가 꽤 사납기까지 하다지? 이런 여자가 내게 반했단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대뜸 황보소미의 쌍심지도 치켜 올라갔다.
도토리란 필경 그녀의 외모와 작은 체격을 한꺼번에 싸잡아 공격한 것.
그러나 황보소미는 더 이상 설전을 계속 할 마음이 없는 듯 휙 고개를 돌렸다.
“흥, 마음 넓은 내가 참자. 말 그대로 여긴 오라버니 홈그라운드니까 불리해! 선오빠는 지금 어디 있는 거지?”
도천은 계속 유쾌하게 웃었다.
“히히히... 나도 잘 몰라. 대충 수하들과 성 외곽을 순찰하고 있겠지. 혼천소마들을 수색하는 중이거든.”
황보소미는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오빠가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하여튼 남자들은 하나같이 다 바보들 같아. 편한 집 두고 대체 왜 이런 위험을 자초해서 하는지...! 관구가 헛소리한 게 천만다행이로군.”
순간 도천의 안색이 크게 일변했다.
“무슨 소리야? 관구가 헛소리했다니...?”
태도를 보면 그는 아직도 죽은 관구의 말을 십분 믿는 눈치인 것 같았다.
황보소미는 입술을 삐죽이며 훤백이 했던 말을 넌지시 자신의 것인 양 비춰서 하기 시작했다.
“헛소리 맞아. 오라버니 그렇게 급히 달려와서 뭔가 얻은 거라도 있어? 소마들의 모임은커녕 그림자조차 잡지 못했지?”
도천은 뭔가 내막이 숨겨져 있음을 깨닫고 되 질문 했다.
“어떻게 알았어? 사실 좀 애매한 입장이긴 한데...! 관구에게서 나온 첩지를 보면 날자가 구월 초이레였지. 우리가 도착한건 열하루. 결국 회합이 끝난 후 도착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놈들은 지금까지 흔적을 보이지 않고 있지. 뒤늦게 생각하니 올해가 윤 구월이더군. 다음 달이 아닌가 싶어.”
황보소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가가(李哥哥)에게 듣고 나서 안건데,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그자에게 속은 것 같아. 자세한건 직접 들어봐.”
댁에... 이가가...!
분명 상당히 존중을 해주는 호칭들이었다.
더불어 도천이 훤백에게 시선을 돌리자, 훤백은 잠시 염두를 굴려본 후 말문을 열었다.
“확실한 건 모르겠지만... 사실 그 첩지에는 의문이 많아. 우선 서백 같이 약은 자가 보란 듯 본명을 남겼다는 것도 이상하고 날짜도 그렇고. 형 같으면 그렇게 했겠어?”
일렀듯 확실히 뭔가 이상한 부분이 있는 것이었다.
도천의 눈이 섬광 같은 빛을 발했다.
“하지만 서백의 필체임은 확실하다. 고의로 남겼다면 어째서 그가 이런 짓을 한거지?”
훤백은 차분히 염두를 굴리며 차근차근 대답했다.
“잘은 몰라도 거의 전면전(全面戰)의 선포로 봐도 될 거야. 우린 싸울 준비가 끝났으니 아무건 봐도 상관없다는 의미로 해석해.”
혼천소마의 대(對) 무림맹 선전포고!
도천은 가슴이 서늘했다.
“아무리 놈들의 무위가 높다한들 설마 무림맹에...?”
훤백은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히 무림맹이 대단하다는 것은 와보니 더 잘 알겠어. 하지만 싸움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지. 그러니까 철기보라 해도 결코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고... 그들도 철기보에 못지않을 만큼 유리한 점이 많거든.”
“유리한 점이란?”
“우선 그들은 워낙 개개인의 무력이 높은데다가 다 모여야 칠십여 명이니 별로 수효가 많지 않아. 따라서 천하 어떤 방파보다 비속(秘速)히 움직일 수가 있지. 이런 경우라면 구태여 정면으로 맞설 것 없이 가지치기 식으로 각처의 분향부터 하나하나 괴멸시키는 게 효과적이야. 본성은 그렇다 치고라도 분향으로서야 무슨 수로 그들을 막겠어? 모였다는 자체가 가공한 거 맞지?”
정확한 지적이었다.
천하를 석권한 철기보의 힘은 확실히 막강한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분향 하나만 해도 그 무력(武力)이 일반의 대방파에 버금갈 만치 강력했던 것!
하나 문제는 누가 상대가 되느냐에 있다.
혼천소마를 볼 것 같으면 하나하나가 거의 일개 군소방파의 전력에 버금간다고 알려진 인물들!
따라서 이들 칠십여 명이 모여 어느 한 방파를 급습한다면 철기보로서도 본성을 제외하고는 감히 이들을 막아낼 수 있을리 없는 것이다.
제 아무리 날고 기는 무림맹의 분향이라 할지라도 하룻밤에 하나씩 핏물 속에 잠길 수밖에...!
더욱이 특별한 본거지를 두고 움직이는 자들도 아니니 사전에 행동을 포착하지 못하는 한 본성으로서도 손 쓸 도리는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정말 기습전을 벌이게 된다면 무림맹 역시 어지간히 타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
“딴은...!”
도천도 이 정도까지는 생각하고 있었던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다면 이곳에서 회합을 한다는 것 자체가 거짓이란 것인가?”
훤백은 잠시 생각을 해본 후 말을 받았다.
“실은 나도 그게 가장 큰 의문이야. 서백이란 자는 첩지에 분명 날짜를 남겼거든. 그리고 관구는 이곳을 회합장소로 택했다 했고...! 여기에서 일단 날짜는 거짓이라고 봐도 무방해.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그들이 사전에 연락을 주고받았다면 뭔가 다른 이야기가 있었을 게 분명하다는 거야. 가령, 이렇게 날짜를 기재해 두면 실제로는 그 날짜로부터 열흘이나 보름 전후에 모인다거나 하는 그런 수법.”
대단한 일!
훤백이 말한 대로 정말 그들이 이런 약속을 한 것이라면 누군가가 첩지를 발견해 장소를 알았다 해도 실제 날짜는 크게 틀려진다.
따라서 날짜에 맞춰 그들을 잡기위해 포위망을 구축했던 사람들의 입장으로서는 헛물을 켜게 되는 것이고, 이에 모두가 철수를 하면 이때 그들은 유유히 그 장소에 모여 안전하게 회합을 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잇 점이 생기는 것이다.
도천의 눈이 순간 노기를 떠올렸다.
“설마 그렇게까지 교묘하게...! 그렇다면 놈들을 잡겠다고 포위망을 치는 것은 헛일이란 것이지?”
훤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그런 거지. 한데 보다 큰 의문은 바로 장소의 선택이야.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미친 자가 아닌 다음에야 죽을 위험을 각오하고 호랑이 굴 밑에서 회합을 가질 사람은 없잖아. 그러니까 모이는 것은 분명한데, 장소만큼은 관구가 사기를 쳤을 수도 있어. 한데 사실이라면 일은 정말 위험해져.”
묵묵히 듣고 있던 황보소미가 끼어들었다.
“이야길 들을수록 머리속이 복잡해지네. 위험해진다면 시월, 군림대회의 혼란을 이용해 본성부터 공격하려 한다는 거야?”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낙양에서도 무창에서도, 그리고 이곳에서도 누누이 거론되는 군림대회(君臨大會)란 무엇일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옛 부터 무림에는 대맹(大盟)이 들어설 경우 철칙이 한 가지 있었다.
무림맹이란 중원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집합체로 무림을 다스리는 영도자의 단체.
따라서 무림에서의 이 힘은 거의 무한에 가깝고 무림맹주는 자신의 경륜과 기략에 따라 도처의 세율을 정하고 나름대로의 법칙을 세워 천하를 이끌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경륜을 지닌 인물일지라도 실수란 있을 수 있어 자칫하면 무림에 큰 소요가 일어날 일이 발생할 수도 있고, 혹은 폭정을 일삼을 수도 있었다.
이에 천하 각 방파에서는 무림맹에 권력을 일임하는 만큼 이런 일들을 막기 위해 맹주가 시행하는 안건들을 검토, 감시하는 봉공(奉公), 즉 사신(史臣)을 세우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봉공들이 지니는 힘 또한 막강하기 이를 데 없어, 이들은 맹주가 행하는 사안들에 어떤 문제가 보일시, 표결을 통해 과반수의 찬성으로 그것을 철폐시키기를 요구하거나 계속 진행해 나가기를 결정했다.
뿐만 아니라 맹주의 정책이나 성격, 다스림에 특별한 문제가 보일 경우 이를 탄핵하고 문제가 심할 경우에는 표결로서 맹주의 직위를 박탈할 수도 있을 정도의 결정권을 지녔으니 실로 대단한 직위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에 각 방파들은 누구나 제 사람을 봉공으로 보내고 싶어 했으나 수천에 이르는 방파의 사람들을 모두 사자로 맞아들일 수는 없는 일! 이에 맹주부로 보내는 봉공의 수효를 도합 일백 명으로 제한했다.
기준은, 각 지역, 각 성(城)의 군소방파 중 스무 곳 이상이 신임장을 써야만 일단 봉공을 보낼 기본적인 자격이 갖춰지는 것이었고, 그래도 수효가 넘치다 보니 더욱 공정을 기하기 위해 삼년마다 한 번씩 신임장을 지닌 방파들의 대표가 나와 무공을 겨뤄 승자가 봉공에 취임하도록 법칙이 정해진 것이었다.
다시 말해 무림맹의 봉공이란 이십여 군소방파들의 신임장을 얻은 방파가 차후 개최되는 비무대회에서 뭇 경쟁자를 눌러야만 주어지는 자격으로 이를 무림인들은 군림대회(君臨大會)라 명명했던 것이다.
봉공의 재임기간은 삼 년.
따라서 이 군림대회의 중요성은 무림맹 뿐만 아니라 무림 전체를 통털어 가장 중대한 사안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이 돌아오는 시월에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번 군림대회의 의미는 더욱 지대했다.
오랫동안 천하를 다스려 왔던 유목공이 마침내 은퇴를 천명함에 따라, 무림맹을 더 존속시키느냐 해체시키느냐 하는 문제까지 딸린 대회이기도 했는데, 그것을 결정하는 것도 새로이 선출되는 봉공들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존속할 경우라면 덕망 높은 인물을 찾아 차기맹주로 추대하는 것 또한 봉공들의 일!
따라서 이 대회는 무림맹의 존속여부와 더불어 차기맹주의 선출로까지 이어지는 대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니 그 혼잡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은 불을 보듯 명확했다.
한데 이런 상황에 혼천소마들의 난립이라니...!
훤백은 차분히 염두를 굴려본 후 다시 말문을 열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어. 그러나 역시 정면공격은 있을 수 없는 거지. 그건 거의 자살행위나 같은 것인데... 아무튼 회합장소가 정말 여기라면 이해가 안가는 점이 많아. 생각 같아서는 뭔가 드러날 때 까지 군림대회 자체를 보류했으면 좋겠다는 느낌이 드는데...!”
순간 모두의 얼굴에 크게 흠칫하는 빛이 떠올랐다.
“이 중대한 대회를 보류해...?”
훤백은 석연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는게 좋을 것 같아. 위험이 느껴지는 만큼 뭐건 무리해서 좋을 일이 없지 않겠어? 어쨌건 지금으로서는 서백 그 자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 셈이니...!”
기가 막힐 노릇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극한의 위험도는 느껴지지만 이렇게 되면 무림맹으로서는 수성(守成)의 자세만 취하고 있어야 할뿐, 혼천소마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역시 어떤 대책도 세울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더욱이 자칫하면 무림사에 가장 엄중하다고 해야 할 군림대회까지 박살날 수가 있었던 터이니...!
특히 관구의 말이 사실이라면 무림맹은 다음 구월 초이레까지 계속 신경을 곤두세운 채 그들의 회합장소를 찾아 헤매야 할 판국이었다.
“짜증나는군. 이거야 말로 진퇴유곡이니! 난 이런 골 아픈 것은 딱 질색인데 말씀이야!”
결국 도천의 입에서 비명 같은 외침까지 튀어 나왔다.
“혹시 뭔가 좋은 방법 같은 건 없어? 놈들도 막고 군림대회도 무난히 치룰 수 있는 방법 같은 거 말이야!”
훤백은 거듭 고개를 갸웃 했다.
“없겠지? 아무튼 현재로서는 어떻게든 군림대회를 보류하는게 최고라고 생각해.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 뿐이야. 아니면 아무리 천하의 무림맹이라도 코가 깨지기 쉬울걸?”
코가 깨진다...!
“일단 건의는 해봐야지.”
확실히 골치가 아픈 듯 도천은 양손으로 북북 머리를 긁어댔다.
그러한 가운데 그들은 마침내 철기보의 중앙을 가로질러 후미, 폭포가 쏟아지는 숲으로 들어섰다.
온통 떨어지는 물소리와 자자한 새소리만 들리는 그런 곳!
멀지 않은 곳에 숲으로 둘러싸여진 분지에 하나의 별원이 으슥하게 우뚝 선 정경이 보였다.
별나게 높은 담장과 알 수 없는 꺼림칙함이 전해져 오는 그런...!
도천은 곧장 이 별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가 추밀원이야. 알다시피 추밀원은 워낙 좀 은밀히 움직이는 곳이라 이렇게 따로 자리를 잡고 있어. 별로 기분 좋은 곳은 아니지.”
“원주님!”
입구에는 철기보의 일반 무인들과 같은 복장을 했지만 보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네 명의 장한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들은 도천을 보자 곧 기립자세를 취하며 인사를 했는데, 그러나 도천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그대로 장원 속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천오백 평 가량의 작은 별원 형태.
우선 보이는 것은 제법 넓다 싶은 뜨락과 즐비하게 늘어선 숙소들이었다.
다시 말해 이 장원은 들어서자 별다른 치장 없이 넓은 뜰과 하나의 툇마루에 연결된 많은 숙소들을 지닌 대전이 우선 보였는데 이는 흡사 학사들이 숙식을 하며 공부를 하는 서원 같아도 보였다.
훤백은 고개를 갸웃했다.
“분위기 작살이군? 외따로 떨어진데다가 위압적... 게다가 숨 막힐 정도로 조용...! 사람들이 거처하긴 하는 거야?”
도천은 고개를 쳐들고 웃었다.
“히히히... 아무래도 부서가 부서다 보니까! 인원은 대충 오십 명이 되지만 어쨌건 지금은 없어. 다들 항상 요소요소에 박혀 시퍼렇게 감시 따위나 하니까! 빈 방을 하나 잡아 숙소로 사용하면 될 거야. 내가 머무는 곳은 좀 더 안쪽이고.”
도천은 계속 걸음을 옮겨 보다 안쪽의 내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또 하나의 작은 별채가 있었는데 도천의 거처인 듯 했다.
들어서자 안은 역시 이렇다 할 장식 없었다.
거실에는 몇몇 책들이 꽂힌 서가(書架) 하나와 팔선탁, 그리고 침실엔 나무침대와 옷가지를 넣는 농 하나가 놓여있는 그런 형상이었다.
도천은 털썩, 팔선탁의 의자에 기대앉으며 웃었다.
“히히히... 편히 앉아. 여기가 내 거처야. 꽤 근사한 모양이지?”
황보소미가 잔뜩 이맛살을 찌푸렸다.
“근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예나 지금이나 홀아비 냄새가 풀풀 나는데, 추밀원주라는 사람의 살림이 이게 뭐야?”
“히히... 뭐 어때서? 혼자 살림에 이 정도면 썩 좋은 편이지. 이것저것 잡다하게 들여놔봐야 쓸데도 없잖아.”
훤백은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뭐 별로 기대도 안했어. 어차피 형 하는 모습이란게 워낙 털털하니. 술항아리 안 보이는게 다행인 것 같어.”
“아, 술...?”
그러자 도천은 금새 벌떡 일어나 내실의 옷장을 뒤적거리는가 싶더니 큼직한 술항아리를 하나 꺼내왔다.
“히히히... 남들에게 보이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옷장 속에다 넣어두고 마셔. 여기서는 함부로 술을 마셔서도 안 되거든.”
도천처럼 격의 없는 인물이 감춰두고 마실 정도라면 규칙이 얼마나 엄격한지 알 법한 일이었다.
도천은 벌컥벌컥 들이킨 후 다시 훤백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이젠 어떻게 할래? 내 손님으로 방문한 거니 어쨌건 이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지만, 그러나 바깥출입 같은 건 꽤 부자유스러워. 게다가 이곳저곳 둘러보기도 힘들고, 그러니까 역시 전에 부탁한데로 내 일을 좀 도와주는게 좋지 않겠어?”
“문서정리 말이야?”
“대충 그런 거지. 하지만 모양으로라도 추밀원의 사람이 되어야해. 외부인에게 문서를 보이는 것 자체가 금기에 속하거든. 대신 그만두고 싶을 때 언제든지 사직(辭職)해도 좋으니까 일단 원사(院師)정도로라도 지내보자.”
훤백은 고개를 갸웃했다.
“원사라...? 그건 뭔데?”
“히히... 뭐 별거 아냐. 그냥 잡다한 문서정리나 하고 내가 자리를 비우면 대신 이것저것 원내의 일을 살펴주는 거야. 청소도 하고...!”
훤백은 피식 실소 지었다.
“간단히 말해 하인이잖아? 자유롭게 다닐 수 있긴 한거야?”
도천은 크게 인심 쓰듯 고개를 끄덕였다.
“히히히... 그야 당연하지. 추밀원의 사람이 되면 맹주의 거처에 드나드는 것 외에는 어디건 제재를 받지 않아. 또 네게 꽤 괜찮은 심법을 가르쳐주기로 약속했던 것 말인데, 그리되면 그것도 일일이 내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돼. 무장원(武臟院)의 출입도 가능해지니까.”
훤백은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무장원은 뭔데?”
도천은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히히... 역시 별로 대단한건 아냐. 각종 잡다한 무공들이 소장된 서각(書閣)이 있어. 철기보의 사람은 아무나 가서 보고 필요한 것을 자유롭게 수련하는 거지. 대부분 쓰레기지만 잘 살펴보면 쓸만한 것도 몇 있으니.”
각종 무공이 소장된 곳!
훤백의 눈동자가 갑자기 광채를 띄었다.
역시 무엇보다 무공에 대해 관심을 컸기 때문이었다.
“알았어. 그럼 당분간 해보기로 하지 뭐. 어차피 온 김에 군림대회까지 보고 갈 생각이니 시간도 남을 거고.”
“히히... 잘 생각했어!”
도천의 시선이 다시 황보소미를 향했다.
“소미는 어떻게 할래? 이참에 소미도 추밀원 사람이 되어볼래?”
“됐다고 해.”
하지만 황보소미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딱 잘랐다.
“자유롭지 못해도 좋으니까 난 이대로 그냥 지내겠어. 누구처럼 바보가 아니거든.”
무슨 소린가?
이에 도천은 움찔하는 기색을 떠올리더니 급히 특유의 웃음으로 말을 얼버무렸다.
“히히히... 알았어, 그럼 소미는 그냥 당분간 시비(侍婢) 정도로 해두지! 열심히 빨래나 하라구.”
“확!”
황보소미의 눈이 즉시 칼눈이 되었다.
하지만 도천은 아랑곳없이 황보소미의 입에서 더 다른 말이 나올새라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훤백을 재촉했다.
“그럼 가보자구! 사자전(獅子殿)에 가서 맹주께 인사부터 드려야지.”
순간이었다.
훤백은 일순 흠칫하는 심정이 되었다.
“맹주라니? 유목공(柳木公) 말하는 거야?”
“어렵게 왔으니 맹주도 만나뵈야지. 이런 기회는 흔하지 않아. 원사가 되려면 허락도 받아야 하고.”
확실히 쉽지 않은 기회였다.
무림맹주를 직접 대면할 기회를 가질 수 있을 인물이 실로 몇이나 되겠는가?
훤백은 이런 도천의 배려가 고마웠다.
“형에게서 얻는 게 실로 적지 않군. 한데 하인 따위의 일도 맹주의 허가가 있어야 되는 거야?”
도천은 웃으며 거듭 훤백의 팔을 끌어당겼다.
“히히... 당연하잖아. 추밀원이란 곳은 뭐건 허가를 받아야하거든. 물론 결정은 내가 하는 거지만, 그럼 어서 가보자구. 마침 오후 집무 시간이니 썩 잘됐어.”
계속 지켜보던 황보소미가 야릇하게 눈을 빛냈다.
“뭔지 모르지만 사전에 다른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아서 아무 말 않는다! 댁에, 어쨌건 도천 오라버닌 보기보다 능구렁이라는 걸 알아야 해. 뭐건 쉽게 믿지 마!”
무슨 뜻인가?
그러나 미처 훤백이 뭔가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역시 도천이 재빨리 큰 목소리로 황보소미의 말을 일축해 버렸다.
“아, 그래! 빨래는 농 안에 가득 있어! 기왕이면 깨끗이 빨아. 속옷에 코 박지는 말고!”
더 뭐라 말할 틈새도 없이 쾅! 문을 닫아버렸다.
황보소미의 눈썹이 꿈틀 했다.
“대체 말 같지 않은 소릴 해도 분수가 있어야 말이지! 추밀원사(樞密院師)의 직책이 청소 따위나 하는 것이라니 지나가던 개도 웃겠다. 한데 가능하기나 한 일인거야?”
역시 뭔가 다른 비밀이 숨겨진게 분명한 것이었다.
“어쨌건 별로 손해 볼 일은 아닌 것 같으니 뭐...!”
콧잔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귀엽기 그지없었다.
첫댓글 즐독했어요
재미있어요.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요
추밀원사~~
즐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