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서른두 번째
실건실제失健失諸
모처럼의 여행인데 여행 내내 몸이 아팠습니다. 약속한 일정이라 손녀들에게 약속을 어기지 않으려고 강행했지만, 몸이 영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통증이 심해질수록 매사에 짜증이 나는 게 당연했지만, 손녀들이 좋아하며 즐기는 모습에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여행이라기보다는 손녀들 보모에 다름 아닌 여행을 한 셈입니다. 실건실제失健失諸,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을 실감한 여행이었습니다. 여류소설가 고 박완서는 생전에 “젊었을 적의 내 몸은 나하고 가장 친하고 만만한 벗이더니, 나이 들면서 차차 내 몸은 나에게 삐치기 시작했고, 늘그막의 내 몸은 내가 한평생 모시고 길들여온 나의 가장 무서운 상전이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마음대로 움직여주던 몸이 나이 들면서 제멋대로 나를 움직이니 상전일 수밖에요. 젊어서는 몸이 나를 살게 하더니 이제는 내가 몸을 살리려고 애를 써야 하니 인과응보일까요? 몸이 아파도 몸을 믿고 괜찮아지겠지, 그러면서 호질기의護疾忌醫했던 어리석은 세월이 이제 그 값을 받으려 하나 봅니다. 바로바로 의사에게 내 몸을 보이고 적절한 치료를 받았더라면 괜찮았을까요? 그러지 않은 것은 내 몸에게 내가 교만을 떤 것이지요. 몸에게 교만했으니 이제 몸에게 야단맞을 차례인가 봅니다. 몸이 그럴지 모릅니다. ‘수이불실秀而不實, 자넨 일찍부터 싹수가 노랬었다. 그래도 참고 견디어줬더니 제가 잘난 줄 알고 나대더니 결국이 이렇게 되었잖은가.’ 옛사람들은 건강한 사람이란 병이 없는 게 아니라 잠재적으로 질병의 위험에 노출돼 있지만 당장 치료가 필요하지 않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환자란 그 질병의 증상이 특히 심해서 치료가 필요한 사람일 뿐 우리 모두 환자 상태라고 했습니다. 건강하다고 나대지 말라는 경고였던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