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前고려)와 북위의 혼인관계에 대해 기록한 3개의 사료입니다. 우선 원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54년조>
54년(466) 위(魏)의 문명태후(文明太后)가 현조(顯祖)의 육궁(六宮)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왕에게 교서를 내려 왕녀를 올리라고 하였다. 왕이 표를 올려 말하기를
“딸은 이미 출가하였으므로 동생의 딸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이를 허락하고 안락왕(安樂王) 진(眞), 상서 이부(李敷) 등을 보내 국경에까지 폐백을 보내왔다. 어떤 이가 왕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위(魏)는 예전에 연(燕)과 혼인을 하고도 얼마 안 되어 이를 정벌하였습니다. 이는 행인을 통하여 지리의 평탄하고 험함을 다 알았기 때문입니다. 본받을 만한 전례가 멀지 않게 있으니, 마땅히 방편을 내세워 이를 거절하여야 합니다.”라 하였다.
왕이 드디어 글을 올려 그 여자가 죽었다고 설명하였다. 위(魏)는 그것을 거짓이라고 의심하고 가산기상시(假散騎常侍) 정준(程駿)을 보내 심히 꾸짖으며.
“만일 그 여자가 참으로 죽었다면, 종실의 딸을 다시 골라서 보내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만일 천자께서 그 전의 허물을 용서한다면, 삼가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라 하였다. 마침 현조가 죽어 그만두었다.
五十四年 魏 文明大后以 顯祖 六宫未備教王令薦其女王奉表云女已出嫁求以弟女應之許焉乃遣 安樂王 真 尚書 李敷 等至境送幣或勸王曰: 魏昔與燕婚姻, 既而伐之, 由行人具知其夷險故也, 殷鑒 不遠冝 以方便辭之. 王遂上書稱女死 魏 疑其矯詐又遣假散騎常侍 程駿 切責之若女審死者聽更選宗淑王云若天子恕其前愆謹當奉詔 㑹顯祖崩乃止.
뒤에 문명태후(文明太后)가 현조(顯祖: 헌문제)의 6궁(六宮)이 채워지지 못하였다 하여, 조칙으로 연(璉: 장수태왕)에게 그의 딸을 보내라고 하였다. 公이 표를 올려,
“딸은 이미 출가하였으므로 아우의 딸 중에서 구하여 조칙에 응하겠습니다.” |
라고 말하자, 조정에서 허락하였다. 이에 안락왕(安樂王) 진(眞)과 상서(尙書) 이부(李敷) 등을 보내 국경까지 가서 예물을 보내게 하였다. 그러나 연(璉)은, |
“위(魏)는 지난 날 풍씨(馮氏)와 혼인을 맺었다가 얼마 안되어 그 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殷鑑이 멀지 아니하니 당연히 핑계를 대고 거절하여야 할 것입니다.” |
라는 좌우 신하들의 말에 현혹되어, 마침내 글을 올려 그의 조카딸이 죽었다고 거짓말하였다. 조정에서는 속이는 것이라 의심하여 다시 가산기상시(假散騎常侍) 정준(程駿)을 보내 엄중히 문책하고, |
“조카딸이 참으로 죽었다면 宗親 중의 어진 딸을 뽑아 줄 것을 허락한다.” |
고 하였다. 璉은 |
“천자께서 이전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신다면 삼가 조칙을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그 무렵 懸祖가 崩하여 그 일은 중지되었다. 後文明太后以顯祖六宮未備, 敕璉令薦其女. 璉奉表, 云女已出嫁, 求以弟女應旨, 朝廷許焉, 乃遣安樂王眞·尙書李敷等至境送幣. 璉惑其左右之說, 云朝廷昔與馮氏婚姻, 未幾而滅其國, 殷鑒不遠, 宜以方便辭之. 璉遂上書妄稱女死. 朝廷疑其矯詐, 又遣假散騎常侍程駿切責之, 若女審死者, 聽更選宗淑. 璉云: 若天子恕其前愆, 謹當奉詔. 會顯祖崩, 乃止.
<위서 정준 전> 연흥 말, 고려왕 연이 액정(掖庭)에 들일 여자를 바치겠다고 청하였다. 현조(顯祖)가 이를 허락하였다. 가산기상시 정준이 안풍남 작호와 복파장군을 가작 받고 절을 가지고 여자를 맞이하러 고려로 갔다. 준이 비단 백필을 갖고 평양성에 이르니, 어떤 사람이 연에게 권하여 이르길, “위(魏)는 예전에 연(燕)과 혼인을 하고도 얼마 안 되어 이를 정벌하였습니다. 이는 행인을 통하여 지리의 평탄하고 험함을 다 알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지금 여자를 보내면, 풍씨의 경우와 다르지 않음이 두렵습니다.” 연이 드디어 거짓으로 여인이 죽었다고 말했다. 이듬해 준이 연에게 다시 가서 연을 의로써 꾸짖으니, 연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드디어 준의 종자와 주식을 끊겼다. 연이 핍박하고 욕보이려 했으나, 꺼리는 바가 있어서 해치지는 못했다. 때마침 현조가 죽어 돌아오고, 비서령을 받았다. 延興末, 高麗王璉求納女於掖庭, 顯祖許之, 假駿散騎常侍, 賜爵安豐男, 加伏波將軍, 持節如高麗迎女, 賜布帛百匹. 駿至平壤城. 或勸璉曰: 魏昔與燕婚, 既而伐之, 由行人具其夷險故也. 今若送女, 恐不異於馮氏. 璉遂謬言女喪. 駿與璉往復經年, 責璉以義方, 璉不勝其忿, 遂斷駿從者酒食. 璉欲逼辱之, 憚而不敢害. 會顯祖崩, 乃還, 拜祕書令. |
<삼국사기>에는 장수태왕 54년 즉, 466년에 북위의 문명태후가 현조의 6궁이 미비하다는 이유로 장수태왕에게 납비를 청한 기록이 기재돼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삼국사기>의 장수태왕 54년조의 기록은 <위서 고구려 전>과 <위서 정준 전>을 짜깁기 한 것입니다. 이 두 사료에서 짜깁기 한 부분은 제가 본문에서 <위서 고구려 전>에서 가져온 문장은 빨강색으로, <위서 정준 전>에서 가져온 문장은 파랑색으로 구분했으니 참고 바랍니다. <삼국사기> 찬자들이 <위서 고구려 전>과 <위서 정준 전>을 짜깁기하여 기록한 것으로 볼 때 삼국사기 편찬진들은 이 두 사료를 모두 본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위서> 어디에도 혼인사건이 있었던 시기를 정확히 466년으로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만, <위서 정준 전> 같은 경우 애매하지만, 연흥 연간(471~476년)으로 기록했을 뿐입니다. 이는 <삼국사기> 찬자들이 위서 정준 전을 살펴보긴 했지만, 이를 신뢰하지 않고 임의로 장수태왕 54년조(466년)에 끼워넣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삼국사기> 찬자들은 고구려와 북위의 혼인건에 대해 <위서 고구려 전>과 <위서 정준 전>을 모두 검토하고 짜깁기 했지만, <위서 정준 전>의 기록으로부터 가져온 문장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위서 정준 전>에 기재 된 연도도 신뢰치 않았기에 임의로 466년으로 비정한 것입니다. 즉, <삼국사기> 찬자들은 기본적으로 <위서 고구려 전>에 신빙성을 둔 반면 <위서 정준 전>에는 별로 신빙성을 두지 않은 것으로 이 같은 원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삼국사기> 찬자들이 자신들이 신빙성을 둔 <위서 고구려 전>의 기록을 466년에 비정한 원인은 "문명태후(文明太后)가 현조(顯祖: 헌문제)의 6궁(六宮)이 채워지지 못하였다"는 내용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선 현조는 465년에 12살의 나이로 황제에 올랐기 때문에 계모인 문명태후가 섭정을 하고 있었으며, 6궁이 미비하다는 것은 당시 현조가 아직 제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6궁을 채우려는 것도 아직 현조에게 후사가 없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서 고구려 전>에서 북위가 고구려에게 납비를 요구한 시기는 자연스레 문명태후가 섭정을 하고 현조가 아직 후사가 없던 시기로 좁혀집니다. <삼국사기> 찬자들은 문명태후가 현조의 섭정을 469년까지 했고 현조가 첫 아들을 본 시기가 467년이라는 것을 감안하여 467년보다 1년 빠른 466년으로 비정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 찬자의 이러한 비정은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근래에 <위서 고구려전>의 기록을 466년으로 비정한 <삼국사기>의 비정을 신뢰하지 않고 <위서 고구려 전>과 <위서 정준 전>에 기록된 고구려와 북위의 국혼 기록을 하나의 사건으로 본 후 그 시기를 <위서 정준 전>에 기록된 연흥 말년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는데, 과연 이들의 견해처럼 하나의 사건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타당성을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위서 고구려 전>과 <위서 정준 전>의 내용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청혼국의 주체와 시기가 다릅니다.
<위서 고구려 전>에 의하면 466년에 북위의 문명태후가 고구려에 혼인을 청하고 고구려가 이를 수락해다고 하는데, <위서 정준 전>에 의하면 연흥 말(474~476)에 고구려가 북위에 혼인을 청하고 (황위를 고조에게 물려주고 태상황제로 지내던) 현조가 이를 허락했다고 합니다.
둘째. 북위의 1차 사신들의 구성과 도착장소가 다릅니다.
<위서 고구려 전>에는 1차 사신으로서 안락왕 진과 상서 이부가 예물을 갖고 고구려의 국경까지 갔다고 하지만, <위서 정준 전>에는 정준이 1차 사신으로서 안풍남작호와 복파장군을 가작 받고 평양까지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북위의 1차 사신행 이후의 기록에는 공통점이 한 가지 나오는데, 바로 고구려 내부에서 북연의 예를 들며 북위와의 국혼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일어 장수태왕이 이 견해를 수렴하고 북위에게 보내기로 한 조카딸이 죽었다는 거짓말을 하고 북위가 이를 의심하여 2차 사신으로 정준을 평양성으로 보내서 장수태왕을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2차 사신으로 간 정준에 대한 장수태왕의 대응이 다릅니다.
<위서 고구려 전>에는 정준이 장수태왕을 꾸짖자 장수태왕이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위서 정준 전>에는 장수태왕이 노하여 정준과 그의 종자들을 핍박하고 억류시킵니다. 그러나 두 사료 모두 국혼건이 중지 된 원인이 현조의 죽음이라는 공통점을 두고 있습니다. 사실 정준에 대한 장수태왕의 대응이 다른 부분은 비교적 간단히 해결 가능한 부분입니다. 정준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간 원인이 애초에 장수태왕이 북위와 국혼을 하기 꺼려서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장수태왕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작정하고 북위와의 혼인을 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위서 고구려 전>처럼 정준의 꾸지람에 바로 순응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위서 정준 전>의 기록처럼 장수태왕이 노하여 정준 일행을 핍박한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간단하게 두 사료를 검토해봤는데, 이 문제는 고구려와 북위의 국혼건이 466년 경과 연흥 말년으로 두 건이 있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만일 466년 경 내지 연흥 말년에 1차 사신으로서 이부와 진 그리고 정준이 함께 갔다면 셋 모두 평양성까지 갔거나 아니면 고구려의 국경까지만 갔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록에 전하듯이 이부와 진은 고구려의 국경까지만 갔지 정준처럼 평양성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이부와 진 그리고 정준은 서로 다른 시기에 고구려에 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또한 최근의 견해처럼 이 두 사료에 기록된 기록들을 하나의 사건으로 파악한 뒤 그 시기만 <위서 정준 전>에 기록된 연흥 말년으로 간주하는 견해도 문제가 있습니다. 연흥 말년이면 현조는 이미 성년이며, 장남인 고조(효문제)에게 양위를 하여 태상황제에 있었습니다. 사실 말이 양위이지, 문명태후와의 알력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명태후가 아직 어리지만 현 황제에 있는 고조라면 모를까 정적이자, 갑작스레 이미 수년 전에 퇴위한 황제인 현조의 6궁을 채우기 위해 현조의 힘이 될 여지도 있는 고구려 왕실에서 여자를 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무엇보다도 <위서 정준 전>에는 청혼국의 주체가 북위가 아니라 고구려이며 현조가 이를 허락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비록 현조가 일선에서 물러났다고는 하나, 여러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조정 안팍에서 여전히 현조의 측근들이 활발히 활동을 한 것으로 볼 때 분명 권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것은 분명합니다. 문명태후가 현조를 암살한 뒤에야 자신의 정적들인 현조의 측근들을 숙청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의 반증이 될 것입니다. 연흥 말년에 고구려의 청혼을 허락한 주체가 현조인 원인은 그가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었으며, 그는 자신의 힘에 보템이 될 수도 있는 고구려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466년경 국혼 기록과 연흥 말년의 국혼 기록은 별개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료에 기록된 상이한 기록들을 한 개의 사건으로 보기에는 공통점은 두 개에 불과하고 상이한 점이 크게 세 개이며 이를 세부적으로 검토했을 시 더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공통점이 두 개가 나온 원인은 위서의 찬자들이 고구려와 북위의 국혼건을 한 개라고 오해한 것에서 비롯된 혼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부와 진 그리고 정준은 각기 고구려에 간 시기에 대해 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위서 고구려 전>에는 466년경 안락왕 진과 상서 이부가 문명태후의 명을 받아 예물을 갖고 1차 사신으로 고구려 국경까지 간 것으로 나오고 <위서 정준 전>에는 정준이 연흥 말년에 현조의 명을 받고 1차 사신으로 비단 100필을 갖고 평양성까지 간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언뜻보면 이부와 진은 466년 경에, 그리고 정준은 연흥 말년에 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위서 고구려 전>과 <위서 정준 전>에는 일관되게 2차 사신으로 간 사신이 정준이라고 기록했으며 정준이 간 원인이 장수태왕의 거짓말이며 국혼이 무위로 돌아간 원인이 현조의 죽음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정준이 466년 경에 2차 사신으로도 가고 연흥 말에는 1차, 2차 모두 사신으로 총 3번 사신행을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 부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정준의 2차 사신행은 장수태왕의 거짓말이 원인으로 장수태왕이 466년 경에도 거짓말을 했는데, 연흥 말년에도 466년경과 똑같은 이유로 똑같은 거짓말을 했다고 보기 어려우며 마찬가지로 똑같은 이유로 정준이 고구려에 두 번 갔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장수태왕의 거짓말과 여기서 비롯된 정준의 2차 사신행이 10년 간격으로 <위서 고구려 전>과 <위서 정준전>에 똑같이 기록된 원인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위서>의 찬자들이 고구려와 북위의 국혼건이 두 번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한 번 있던 사건으로 오해한 것에서 비롯된 혼선일 가능성이 큽니다. 즉, 장수태왕의 거짓말과 여기서 비롯된 정준의 2차 사신행은 466년경 내지 연흥 말년으로 보아야 하는데, <위서 고구려 전>과 <위서 정준 전>에 그 단초가 보입니다. 이 두 사료에 의하면 정준이 귀국한 시기가 바로 현조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정준이 466년 경의 이듬 해인 467년에 2차 사신으로 왔다고 했을 때 정준은 현조가 죽는 476년까지 무려 약 10년 동안 고구려에 억류되있던 셈입니다. 그러나 이 10년 동안 고구려와 북위는 여전히 교류를 했으며 정준반환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정준은 황흥연간인 467년~471년에 북위 내에서 활동한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정준의 2차 사신행은 476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위서 정준전>의 정준이 비단 100필을 갖고 평양성까지 갔었던 1차 사신행 기록 역시 연흥 말년인 475년 경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정준이 고구려에 466년~467년 두 번에 걸쳐 간 것이 맞다면 <위서 고구려 전>에서 안락왕 진과 상서 이부가 사신으로 예물갖고 고구려의 국경까지 간 시기는 466년경으로 비정됩니다.
앞서 정준이 연흥 말년인 475년, 476년 한 해에 한 번 씩 총 두 번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고구려가 북위에 청혼한 시기와 정준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온 시기를 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구려는 475년 2월과 8월에 북위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는데, 이 중 2월에 북위에게 청혼을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8월에는 백제와의 전쟁 준비 기간으로 국혼에 신경 쓸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의 이같은 청혼의 배경은 472년 백제가 북위에게 접촉을 시도하고 북위도 비교적 백제에게 호의적인 태도롤 보였기 때문에 아직 어린 북위 황제와의 혼인을 매개로 북위 내에서 고구려의 정치적 입지를 갖추고자 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현조 역시 이를 승락한 이유도 문명태후와의 권력싸움에서 최소한 밀리지 않기 위해 고구려라는 외부세력 자신의 힘에 보테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장수태왕과 현조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자연스레 양국간의 국혼이 결정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변수가 하나 생깁니다. 하필이면 이때 백제에 첩자로 가 있던 도림이 백제 공격의 적기임을 알리며 귀국을 한 것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장수태왕이 7월에 백제를 공격했다고 하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장수태왕이 9월에 백제를 공격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장수태왕의 백제 공격 시기를 7월로 본 원인은 최소 그때부터 장수태왕이 백제 정벌전에 본격적인 준비를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장수태왕의 백제정벌의 본겨적인 준비는 도림의 귀국부터인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도림의 귀국시기를 정확히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7월로 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장수태왕이 도림을 파견한 시기는 최소 475년 7월 이전이 되겠습니다. 7월에 귀국한 도림이 지금이 백제 정벌의 적기임을 알리고 고구려는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을 8월 즈음에 북위의 정준이 예물을 갖고 평양성에 사신으로 온 것입니다. 전시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있던 고구려 내부에서 북연이 북위와 혼인했다가 정보가 빠져나가서 멸망당한 사례를 들며 북위와의 국혼을 반대하는 견해가 등장하고 장수태왕이 이를 받아들입니다. 북위가 백제에게 정보를 주고 북위와 백제가 협공한다면 그야말로 위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475년 8월에 고구려가 북위에 보낸 사신은 조카딸이 죽었다는 내용의 서신을 갖고 갔을 것입니다. 북위와의 국혼을 물리면서까지 백제 공격의 적기를 놓치지 않은 덕분에 장수태왕은 백제정벌 전을 성공적으로 마칩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476년에 고구려는 북위에 2월, 7월, 9월에 사신을 보냅니다. 476년에는 정준의 2차 고구려행이 행해진 시기인데, 그가 귀국한 시기는 현조의 죽은 시기입니다. 현조가 476년 6월에 죽었으므로 정준의 귀국은 476년 고구려가 북위에 사신을 보낸 7월이 될 것입니다. 물론 9월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만일 정준이 9월에 고구려의 사신과 함께 귀국했다면 고구려는 정준을 7월에도 억류한 셈입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7월에 사신을 보냈을 때 정준에 반환에 대한 언급은 없는 것으로 보아 7월에 고구려가 북위에 사신으로 보내면서 정준도 이와함께 귀국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준의 2차 고구려행은 476년 2월이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고구려와 북위의 국혼건에 있어 <위서 고구려 전>과 <위서 정준 전>에 존재한 혼선을 나름 바로 잡고자 했는데,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466년 경 북위의 문명태후가 현조를 섭정하면서 현조의 6궁을 채우고자 고구려 장수태왕에게 청혼을 하고 장수태왕이 수락합니다. 이에 상서 이부와 안락왕 진이 문명태후의 명을 받고 예물을 갖고 고구려의 국경에 도착합니다. 이 국혼의 성사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추가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실패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약 10년 뒤인 475년 무렵 고구려가 북위에게 청혼을 하고 현조가 이를 허락합니다. 현조의 명을 받고 정준이 평양성에 도착할 무렵 고구려 내부에서 북연이 북위와 혼인을 맺었다가 혼담을 빙자한 북위의 사신들 때문에 정보가 새어나가서 북연이 북위에게 멸망당했다면서 북위와의 혼인을 반대하는 견해가 나옵니다. 장수태왕은 이를 받아들이고 정준에게 조카딸이 죽었다는 거짓말을 합니다. 정준은 잠시 귀국했다가 다음 해인 476년에 다시 고구려에 사신으로 와서 장수태왕을 꾸짖으나 장수태왕은 이에 노하여 정준 일행들을 6개월가량 핍박하고 억류했다가 476년 현조가 죽었을 때 돌려보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글이 많이 조악한데, 아무쪼록 고견들 부탁드립니다.^^
첫댓글 흠. 다른건 몰라도 기록마다 연대가 불확실하다는 것은 미처 생각치 못 했던 부분입니다. 한번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잘 봤습니다~
사실 이 글 자체도 상당히 엉성해서 보다 다양한 의견들이 필요합니다.ㅠㅠ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고려 왕실과 위 황실간에 혼인이 이루어젔다고 보기에는 무리죠, 포악한 전제군주 낙랑공 연의 학정에 못견딘 발해 고씨 가문이 위국으로 도망가서 위 황실의 외척이 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먼저 혼인을 요청했던 위가 그걸 애써 숨길 이유도 없구요. 더구나 고려측에서는 위의 침공이 두려워 혼인을 거절했는데 자발적으로 혼인을 요청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위의 침공을 무마하기 위해 공녀를 바치는척 하면서 내뺀것이죠. 설령 고조가 고려계라고 하더라도 고려 왕실에서 보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려에게 이득이 될게 없다고 보입니다. ^_^*
연흥 말에 있던 고려의 청혼은 처음부터 위의 침공을 의식하지 않은 듯합니다. 북위의 액정에 들일 목적으로 청혼을 한 것으로 보아 단순히 공녀가 아닌 황후나 비빈 급을 바라고 한 것으로 북위에서 어떤 정치적 이득을 획득하기 위한 목적으로 청혼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조도 그것을 허락했는데, 고구려 내부에서 반대의 움직임이 있어서 장수태왕이 거의 일방적으로 파토낸 듯합니다. 고조 같은 경우 일가가 북위에 투항하긴 했는데, 장수태왕이 그들을 협조세력으로서 이용하려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조 동생 고현 같은 경우 북위 내 고구려 인물들을 북위 조정에 천거하는 고려국대중정직에 있었으니까요.
재미있네요. 2건의 청혼일 수도 있다라...
사실 몇년 전에 김용만 선생님과 유정님께서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하셨었는데, 여기서 많이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