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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T956auVjiS4?si=haqUBJ2p9_XKHxOL
Grieg - Peer Gynt / Piano Concerto + Presentation (ref. record. : Øivin Fjeldstad / Clifford Curzon)
Claudio Arrau (칠레, 1903-1991)
세계 클래식 음악계를 좌지우지하는 3개의 문화권을 북미, 유럽, 아시아로 나눈다고 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연주자의 배출과 음반 시장의 메카로 떠오른 아시아의 급부상은 중남미와 비교해서 괄목할 만한 것이다. 이에 반해 구유럽과의 관계가 오랜 동안 지속되었던 중남미의 클래식 음악 문화는 상당히 정체되어 왔었는데, 몇몇 뛰어난 연주자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 중남미 클래식의 전통을 가장 먼저 확립한 선구자적인 사람이 바로 클라우디오 아라우 일 것이다.
아라우는 1903년 칠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피아노를 잘쳐서 그영향을 받았는지 3세가 되자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전에 벌써 베토벤의 소나타를 암보로 연주해내는 재능을 보인 신동이었다. 최초의 리사이틀은 5세 때였는데,모차르트,베토벤, 쇼팽을 연주했다고 한다. 6세때 산티아고 음악원에 입학, 1911년인 8세때 산티아고에서 정식으로 데뷔를 했다. 이것을 지켜본 칠레 정부는 아라우를 국비로 독일에 유학을 보내게 되고 아라우는 본격적으로 마르틴 그라우제에게 5년간 그 집에서 동거하면서 철저히 배웠다.
아라우는 크라우제 이후 아무에게도 사사하지 않고 주로 독학으로 공부했다. 그는 11세때에 베를린에서 데뷔를 했고,15세 이후부터는 독자적인 연주 활동을 하게되고 니키시, 푸르트벵글러, 멩겔베르크 등과 같은 지휘자도 이 소년과 다투어 공연을 가졌고 런던과 미국, 남미에서도 데뷔 무대를 갖는다. 그리고 1925년에는 22세의 젊은 나이에 시테른 음악원 교수에 취임하고,1927년에는 제네브 콩쿠르에서 우승한 후 그의 국제적 연주 활동은 본 궤도에 진입한다. 이 때 심사위원을 맡은 루빈스타인은 "우리들 모두는 채 2분도 지나기 전에 아라우의 진가를 알았다.
심사위원들은 만족하게 이 결론에 이르렀다. 이 콩쿠르는 마치 경마용의 우수한 말고 마차를 끄는 말과의 시합과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의 연주회는 근면함과 왕성함 그리고 다양성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기록을 보면 1943년부터 1950년 사이에 협연을 포함하여 모두 600여 회에 이르고 있다. 또한 1930년 베를린에서 12번의 리사이틀을 통해 바흐의 건반 음악을 모두 연주한 것은 특히 기록에 남는 사건이다.
그의 레퍼토리는 바로크에서 낭만에 이르기까지 광대하며 특히 베토벤, 쇼팽, 리스트 작품을 통해 스페셜리서트로 인정받고 있다.특히나 바흐나 베토벤의 연주로 유명하며 그는 EMI나 필립스에서 광대한 음반을 남겼다. 그 방대함은 루빈스타인이나 호로비츠를 능가할 정도이다. 그를 흔히 비르투오조의 거장이라고 일컫듯이 쇼팽과 리스트의 작품에서도 상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
흔히들 아라우를 박하우스나 캠프보다 더 독일적인 연주를 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아라우의 연주에서는 악보가 지시하는 것을 성실한 자세로 존중하며, 자의적으로 변경하는 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그는 끝까지 꼼꼼히 연주하는 즉,일점 일획도 소홀히하지 않은 음악을 만들어 가지만, 결코 음악이 조형적으로 어둡지 않으며, 음을 투명하고 정확하게 만들어내면서 곡의 논리성과 자신의 감수성을 하나로 합쳐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의 건반터치의 투명함과 명료함은 쇼팽의 연주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많은 녹음을 해 온 폰카 슈트라우스에 의하면 아라우는 어떠한 순간에도 완벽한 연주를 이룰 수 있었던 피아니스트였다 라고 한다.
지금도 그가 닦아놓은 남미 클래식의 전통위에서 아르헤르치와 겔버 바렘보임 등과 같은 남미 연주자를이 그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https://youtu.be/uUdoxvigIl8?si=I39-RM1mfGdAtcgi
Chopin - The 21 Nocturnes + Presentation (recording of the Century : Claudio Arrau)
2. Vladimir Horowitz (미국, 1904-1989)
생전에 이미 살아있는 전설이 된 피아니스트. 넘치는 비르투오적인 기교로 인하여 70 이 넘는 나이에서야 그에게 알맞는 기교를 가지게 되었다고들하는 뛰어난 기교의 피아니스트. 그가 리사이틀을 연다 하면, 그것이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던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중 한 사람. 투명하면서도 찬란한 음색, 그리고 다이내믹한 터치와 색채의 뉘앙스는 그만의 전매 특허였다.
많은 러시아의 음악가들이 서방으로 망명했지만, 구소련인들은 그들의 위대한 전통을 손상시키지 않고 세게속에서 빛낸 예술가들을 사랑했으며, 그중에도 호로비츠는 가장 열렬한 애정을 받았다. 결국 85년 레닌그라드에서는 그의 귀향 콘서트가 열렸다. 연주의 질을 떠나서 큰화제를 불러일으켰으며, 음반으로 남아 역사적인 명반으로 기록되었다.
호로비츠는 러시아혁명과 두차례에 걸친 대전속에서 나타난 혜성과도 같은 인물이었는데, 그의 등장은 적지 않은 피아니스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루빈스타인은 호로비츠의 연주를 보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더욱 더 정진 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는 완벽한 기교,예민한 감각, 풍부한 서정성을 바탕으로 비루투오적인 성격과 즉물성을 융합한 것 같은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했다.
호로비츠는 1904년 10월 1일에 러시아의 키에프에서 태어났다. 그는 12세때 키에프 음악원에 입학하였다.(그 때 이미 기술적으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다고 한다.)1922년에 하르코프에서 데뷔하여 13회의 리사이틀을 열고, 200곡이 넘는 레퍼토리로 러시아에서만 70회 이상의 콘서트를 열었다. 그는 26년에는 독일에, 28년에는 차이코프스키의 곡으로 미국에 데뷔를 해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1932년에는 토스카니니가 뉴욕 필의 베노벤 치클루스에서 호로비츠를 기용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호로비츠는 이듬해 토스카니니의 딸 반다와 결혼한다.토스카니니와의 이러한 관계는 그의 예술관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오는데, 호로비츠는 2년간 침묵한 뒤1939년 파리에서 리사이틀을 열고 제기했다. 이듬해 미국에서 콘서트를 개최 과거와 다름없는 인기를 확인한다. 당시 미국에서의 반응은 첫 데뷔때와 마찬가지로 놀라운 것이어서, 언론은 그를 가르켜 '대초원에서 온 회오리 바람'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그 때부터 멋있는 기교에 깊은 내면성을 더하고 연주양식도 변화시켜 그야 말로 거장의 풍격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토스카니니의 영향을 받아 그의 지휘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2번,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같은 명연을 남겼지만, 그의 미국 데뷔 25주년 기념공연에서는 토스카니니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흔적을 발견 할 수 있다. 이 공연후 그는 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이 기간동안 그는 소수의 친한 친구들고 몇몇 제자들-게리 그라프만, 바이론 제니스-을 만나는 일 외에는 완전히 고립된 생활을 하였다. 이는 아마도 그의 기질속에 슬라브적인 우울으 기질이나 낭만주의 잔재있었는데, 그의 장인인 토스카니니의 남구적인 기질과는 전혀 다른것이여서 서로 다른 기질의 충돌이 그를 분열되게 만들었고, 이는 그의 육신을 병들게 한 요인이였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호로비츠는 1953년의 리사이틀후 다시 12년 간이나 은퇴생활을 한다. 그의 이런 시간은 건강을 회복하는 동시에 자신의 새로운 양식을 수립하여 그에 적응한 피아노 주법을 탐구하는 시간이였다. 그는 토스카니니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으며, 서정의 투명도가 머리를 들게 되는 시기였다. 그는 CBS와 계약한 후 자기 방을 녹음 스튜디오로 개조하여 녹음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검증을 시작하였다. 일년에 한 두장의 앨범만 발표한 그는 1965년 , 12년 만에 다시 카네기 홀 리사이틀을 개최하였다.
이 연주회에서 호로비츠는 데뷔 이래 43년 만에 고투 끝에 외부와 내면이 평형을 이룬 원숙한 음악을 획득했다고 비평가들은 말하였다.그는 이를 기점으로 최후의 로맨티스트로 살아 있는 전설로 만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된다. 그는 나이를 무색할 정도로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다 1989년 뉴욕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비평가들이 말하는 호로비츠의 음은 섬세한 최약음에서 강인한 최강은까지, 음색의 다양한 변화가 깊은 원근감을 수반하고 있으며, 훌륭한 콘트롤을 느끼게 한다. 특히 중고음은 매우 맑은 투명감을 가졌고, 또한 아주 빛나고 아름답다. 이는 호로비츠와 같은 성격의 음은 다른 누구에게도 들을수 없는 찬란하고 눈부신 음색인 것이다.
3. Rudolf Serkin (미국, 1903-1991)
음악이란 그저 듣기 좋게 귀를 자극하면 된다는 현대 클래식 연주 스타일의 조류에 휠쓸리지 않고 예로부터 씁쓸하고 강건한 음악을 들려주는 연주가도 여전히 남아있다. 피아노로 말하자면 루돌프 제르킨이 그 최고위에 자리잡고 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정력적인 연주 활동을 펼쳤던 제르킨은 수정같이 맑은 톤과 온화한 연주로 바흐를 비롯, 독일 낭만주의 음악에 또 다른 생명력을 불어 넣은 위대한 피아니스트였다. 단순한 의미의 비루투오조에 무관심했던 그는 리스트의 작품도 진지하지 못한것은 절대 연주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무명의 작품일지라도 그 감추어진 가치를 발견하면 가차없이 연주를 시작하였다. 그는 그의 예술을 피아노를 통해 한 음 한 음에 들이는 정성과 전체를 조망하는 듯 한 조형적인 단아함으로서 나타낸 피아니스트이다.
오스트리아계의 러시아인 가정에서 태어난 미국의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은 성악가로 활약했던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9세 때는 빈으로 가서 리하르트 로베르트에게 피아노를, 쇤베르크에게 작곡을 각각 사사했다. 12세 때 빈 필의 독주자로 기용되어 멘델스존의 피아노 협주곡 g단조를 연주, 일약 스타의 자리에 올라선다. 그러나, 공부를 계속하기 위하여 공개 연주를 사절하고, 1920년이 되자 본격적인 연주 활동을 시작했다.
명바이올리니스트 아돌프 부쉬를 만난것도 이 무렵이다. 부쉬는 제르킨의 연주를 듣자 바로 자기의 반주자로 계약을 하고 베를린의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는데, 이 때 부쉬의 딸 이레네는 겨우 4세였다. 그러나, 14년후 제르킨은 그녀를 아내로 삼았다.
베를린에서의 데뷔는 부쉬 지휘에 의한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 5번이었다. 이때 앙코를 요청을 받은 제르킨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전곡 연주해 버렸다는 것은 이미 전설적인 에피소드이다. 1933년 부쉬와 스위스 순회공연 직후 제르킨은 미국에서 데뷔 무대를 갖고, 이어 지휘자 토스카니니의 초청으로 34년과 35년 두 차례에 걸쳐 독주회를 개최해 호평을 받는데, 유태인이었던 그는 나치 정권들어선 독일에서 활동이 불가능해지자,1939년에 온 가족을 거느리고 미국에 정착하게 된다. 부쉬와 제르킨의 콤비는 1952년에 부쉬가 죽기까지 계속되었고 미국 시민권을 얻은 제르킨은 이후 커티스 음악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다양한 음악제와 마스터 클래스를 주재하기도 한다.
부쉬와 제르킨의 콤비 시절, 제르킨은 투명한 음과 정연한 표정으로 부쉬의 바이올린을 무리없이 받쳐주고 있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전에는 부쉬의 그늘에 가려져 있어 명성을 얻지 못한다. 제르킨이 국제적으로 평가를 받게 된것은 제 2 차 세계대전의 일이라고 한다.
레코드를 녹음하는 제르킨은 완전주의의 화신이 되는 것 같았다. 그는 레코딩에 매우 신중을 기하는 연주자였다. 그래서인지 연주 경력에 견줄때 음반 분량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이에 관한 에피소드로 그가 소속된 CBS는 일찍부터 제르킨의 베노벤 소나타 전집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그가 너무나도 완벽을 기하여 녹음한 연주에 OK하지 않았기에 끝내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말년의 그의 레코드와 연주회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였다고 한다. 레코드에서 보여주었던 객관성의 존중이라던지 조형미의 구축은 연주회에서는 주관와 정열, 격심한 집중에서 태어나는 긴장감, 뉴트럴한 색채, 거친 힘이 교차하는 표현이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주요 레퍼토리는 주로 바흐가 아니면,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등이며 음반도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제르킨의 연주는 현대의 청중이 빠지는 달콤한 음악과는 다른 것이다. 오히려 보다 매운 음악이라고들 말한다. 제르킨은 음악이 의미하는 것과 자기 정신의 대화를 도모하고 그것을 성실히 실행해 온 피아니스트이다. 그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실히 자기 음악을 위해 노력한 거장이다.
4. Clifford Curzon (영국, 1907-1982)
미국 데뷔 때 자기 스스로 홀을 빌려 연주회를 열어서 성공하였고, 20세기에 활동하는 연주가의 필수적이라고 말하는 레코딩을 무척이나 싫어한 피아니스트. 그래서 커즌이라는 이름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솔리스트 선정에 엄격했던 조지 셀이 '피아노계 최고의 귀족'이라고 칭한 클리포드 커즌은 1907년 5월 18일 런던에서 태어나서, 1982년 9월 1일 심장병의 발작으로 런던에서 급서한 영국의 대 피아니스트이다.
12세 때 런던 왕립 음악원에 최연소 학생으로 입학해 16세 때에 데뷔하였다. 2년후 아르투어 슈나벨의 연주를 듣고 큰 감동을 받은 그는 연주를 청산하고, 1928년 베를린에서 존경하는 슈나벨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이 때부터 커즌은 스승의 영향을 받아 음표 하나하나에 대한 신중한 접근을 보이는, 깊은 울림을 구사하는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슈나벨에게 배운지 2년만에 그는 다시 무대연주를 하게되고 1930년 파리에서 반다 란도프스카와 나디아 불랑제의 문하에서 수업을 계속한다. 슈나벨의 학구적인 연주 방식이 커즌의 기본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반면, 슈베르트의 소나타나 브람스의 소품에서 구사하는 선율적인 연주의 기본은 반다 란도프스카와 나디아 불랑제의 가르침의 영향이다.
1950년대가 되자 커즌은 독주 활동 이외에도 실내악에 관심을 두고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중에서도 요제프 시게티와 월리웜 프리로즈, 피에르 푸르니에와의 에딘버러 페스티벌 공연은 아직까지도 전설적인 명연으로 남아있다.
미국에서 파리에 유학온 하프시코드 주자 루실 월레스와 서로 사랑하게 된 커즌은 1931년에 결혼을 했다. 금술이 유난히도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없어 적적하게 지내는 중에 소프라노 가수 마리아 체보타리의 두 아들을 양자로 맞아 키웠다. 후년에는 모차르트, 슈베르트, 리스트 등에 집중하여 피아노 예술의 높은 경지에 도달하였다. 1977년에는 피아니스트로는 최초로 기사의 칭호를 받았다.
조용하게 사는것을 좋아했으며, 원예, 산책, 등산, 미술품 수집 등의 취미생활을 즐겼으며, 피아노를 공부하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그는 하루 4-5시간의 연습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욕심이 없고 활달한 커즌이기에 많은 레코딩을 하여 명성을 떨친다거나 인세를 벌어들이는 일에 마음을 쏟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녹음 레코딩을 자주 스톱시켜서 녹음 프로듀스를 골탕먹인적인 많은 커즌의 연습에 대한 마지막 말로 끝을 맺을까 한다.
" 나는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다. 악보를 보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 시간이 허락하는 한 하루 종일 한다. 이 길에는 왕도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글쓴이 : 조소영(피아노나라세상)
https://youtu.be/m5FGjbXS284?si=dKxxiwB_SNQFTsIg
Mozart "Piano Concerto No 21" Rudolf Serkin/Eugene Orman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