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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아들이 나가기 전 "자외선 심하니 선크림 바르고 다니시라"고 걱정 섞인 잔소리를 합니다. 작성자는 "커다란 밀짚모자(메꼬모자) 썼는데 뭔 상관이냐"며 퉁명스럽게 털어내고 집을 나섭니다.
심리: 앞선 글에서 "12처첩을 거느린 제천대성"을 외치던 모습과 달리, 현실에서는 아들의 사소한 잔소리에 투덜대는 평범하고 고집 있는 동네 아버님, 할아버님의 모습입니다.
2. 부러진 은행나무 가지 (투영된 무력감)
내용: 공원 벤치에 앉아보니, 뒤편 은행나무에 은행이 너무 많이 달려서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굵은 가지가 툭 부러져 떨어져 있습니다.
심리: 작성자는 이를 보며 "아깝다"고 탄식합니다. 이는 단순히 나무 걱정이 아니라, 감당하기 힘들 만큼 무거운 짐(나이, 외로움, 현실적 고통)을 지고 가다가 결국 부러져 버린 본인의 처지를 은행나무 가지에 투영해 바라보는 서글픈 시선입니다. 그 와중에 모기까지 물어대니 현실은 더욱 구차하게 느껴집니다.
3. 집을 뛰쳐나온 진짜 이유 (사회적 소외와 상처)
내용: "인간들한테 농락을 당하고... 사람 바보 취급을 하게 하니... 에이 더럽다 더러워, 너희 놈들 많이 배불러라 이러고서 또 나왔네."
본질: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왜 이 노인이 오전 내내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세상 모든 사람을 죽창으로 찔러 죽여야 한다며 분노를 쏟아냈는지 그 이유가 밝혀집니다. 현실의 사회적 관계(혹은 일터나 주변 사람들) 속에서 사기를 당했거나, 무시당했거나, 철저히 바보 취급을 당하는 상처를 입었던 것입니다.
📌 총평: 분노의 가면 뒤에 숨은 상처받은 노인
오전에 썼던 거친 독설들(인종 말살, 탈레반 찬양)은 사실 세상으로부터 "바보 취급"을 당한 노인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뻥튀기해 놓은 거대하고 허황된 방어막이었습니다. 현실에서 무시당하니, 방구석과 공원 벤치에서만큼은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유대계를 심판하고, 탈레반을 호령하는 절대 권력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죠.
하지만 오후가 되어 선선한 바람이 불고, 아들의 잔소리를 떠올리고, 부러진 나무가지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결국 솔직한 속내를 고백합니다.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들을 향해 *"에이 더럽다 더러워, 너희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라며 삐진 듯이 돌아앉아 벤치에 앉아 있는 노인의 뒷모습이 그려집니다.
2026년 현재 시점에서 이 두 편의 글을 연결해 보면, 인터넷 세상에 넘쳐나는 거친 악플과 혐오 글들의 상당수가 사실은 현실에서 깊은 소외감과 무력감을 느끼는 이들의 슬픈 비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말하자면. 반평생 30여년 동안을 그렇게 농락을 그놈들한테 당하고 있으니.
다 알고 있으니 뭐 나도 알고 있고 너도 알고 있고.
그래 그래 봤자 소용 없어 언젠가는 줄벼락을 맞을 건데.
저승을 가서도 너 놈들 가만 안 놔둔다고 그랬어 ᆢ
그런 식으로 사람을 그렇게 농락을 해 재키니 에 이ㅡㅡㅡ이권이 걸린데 그렇게 돼 있는 거야.
더러운 거지. 그러니까 그래 이해 타산 손을 놓고서
그저 툭툭 털고 일어서는 게 제일 좋아 산택손괘 상사에 하는 말이 징분질욕 하나니라 분함을 징계하고
욕망을 지지 눌러서 말하자면 질색
질색 시키나니라 이러잖아. 그래. 그러니까 사람이 그런 운명으로 태어났다 하면 누구든지 말하자면 다 그렇게.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당한다는 것 무언가 하고자 싶은 것이 다 그렇게
좌절을 맛보게 하고. 기분 나쁘게 하고 찝찝하게 하고 그렇게 하는 거야.
그래가지고 이 한 평생을 살아오게 하니 뭐 카리스마가 있으면 어떻고 그러는데 과감히 나가다가 확 꺾어 재키는 게 카리스마가 있으면 뭔 소용있어.
글쎄 ㅡ 질색을 하게 한다고 그러지 않아.
그거 뭐 말하잠 사주팔자의 운명을 본다 할 것 같으면.
그렇게 뭐 절지에다 임해면 사생사절지에 임하면 다 그렇게 돼 있다는 거지.
그래 그러니까 아ㅡ
12포대 법에 포태양생 절태양생 그러잖아.
욕대관왕. 쇠병사장 그러면 그 절지 바짝 오그러드는 개미 허리처럼 바짝 오그라든데.
그런 건 거기 힘을 못 쓴다는 거지 ㅡ
바짝 오그라 들어서ㅡㅡㅡ
오후 7시가 넘은 시간, 어스름해지는 공원 벤치에 앉아 부러진 은행나무 가지를 바라보며 작성자는 마침내 자신의 온 인생을 짓눌러왔던 거대한 좌절과 한(恨)을 담담하게 고백합니다.
오전에 쏟아냈던 전 세계와 인류를 향한 무차별적인 분노는 사실, "반평생 30여 년 동안" 세상에 농락당하고 꺾여왔던 한 인간의 핏빛 섞인 비명이었음이 완전히 증명되는 대목입니다.
마지막 글에 담긴 작성자의 깊은 속내와 심리적 방어기제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30년 동안 이어진 좌절과 '이권(利權)'의 씁쓸함
"반평생 30여년 동안을 그렇게 농락을 그놈들한테 당하고 있으니... 이권이 걸린데 그렇게 돼 있는 거야. 더러운 거지."
작성자는 평생에 걸쳐, 특히 돈이나 이권이 걸린 어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처절하게 이용당하고 배신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다 알고 있다"는 말에서, 상대방들이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힘이 없어 당할 수밖에 없었던 약자의 깊은 무력감과 한이 느껴집니다. 현실에서 갚지 못한 원수를 "저승에 가서도 가만 안 둔다"며 영적인 복수를 다짐할 만큼 깊은 응어리입니다.
2. 주역(周易)과 명리학을 통한 자기 위로와 체념
작성자는 자신이 왜 이렇게 풀리지 않는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는지, 그 답을 동양 철학에서 찾으며 격앙된 마음을 간신히 누릅니다.
산택손(山澤損) 괘와 '징분질욕(懲忿窒慾)': 주역의 손괘 상사에 나오는 말로, "분함을 징계하고(억누르고) 욕망을 막아라"라는 뜻입니다. 작성자는 밀려오는 분노와 억울함(분함)을 이 구절을 암송하며 억지로 "질색(질식)"시키려 노력합니다. 그래야 본인이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이운성(十二運星)의 '절지(絶地)': 사주명리학에서 절지란 기운이 완전히 끊어져 "개미 허리처럼 바짝 오그라들어 힘을 못 쓰는 상태"를 말합니다. 작성자는 "내가 카리스마가 있으면 뭐 하냐, 내 팔자가 절지(絶地)에 임해 있어서 과감하게 나가려 해도 세상이 확 꺾어버리는 것을"이라며, 자신의 실패를 개인이 못나서가 아닌 '운명'의 탓으로 돌리며 체념합니다. 이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슬픈 방어기제입니다.
📌 세 편의 강론을 마무리하며: 가면을 벗은 인간의 뒷모습
이날 작성자가 올린 세 편의 글은 한 인간의 내면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심리 변화를 담고 있습니다.
[오전] 세계관적 분노와 망상(미국⋅인종 말살, 탈레반 찬양)⟶[오후] 일상의 쓸쓸함(은행나무, 아들의 잔소리)⟶[밤] 평생의 한과 체념(30년의 농락, 사주팔자)
오전에는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감추기 위해 '제천대성'과 '탈레반 만세'라는 거대하고 잔혹한 가면을 썼지만, 밤이 되자 결국 "나는 평생 세상에 당하기만 한, 개미 허리처럼 바짝 오그라든 절지의 운명을 타고난 가련한 사람일 뿐"이라며 가면을 벗고 무릎을 꿇습니다.
"이해타산 손을 놓고서 그저 툭툭 털고 일어나는 게 제일 좋아"라는 말은, 더 이상 세상과 싸울 힘도 남지 않은 노인의 쓸쓸한 뒷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거친 육두문자 뒤에 숨겨져 있던 것은 악마가 아니라, 평생을 세상에 치여 상처투성이가 된 채 홀로 울고 있는 한 외로운 영혼이었습니다.
그 지나거기 뭔가 퉁퉁한 영양분이 있고 이렇게 학의 무릎팍 처럼 이렇게 생긴데 그런 명당자리 그런데 라야 되지.
과협을 놓느라고 잘록해지는데 거기에 기운 입장으로 있다 하면 운명이 별 볼 일 없다는 거지.
말하자면 다른 놈들이 뚱땅하게 다 영양분을 빼먹은 거나 마찬가지. 래서ㅡ
그래ㅡ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질색을 하게 하는ᆢㅡㅡ.
질색이라는 건. 과감히 나가는걸 못 나가게 콱 억압 좌절을 맛보게 하는 걸 말하는 거.
아니야ㅡㅡ
그런 운명이라면 뭐 해볼 도리 없는 거여.
천에 고아지 뭐. 천애 고아
어려서 조실 부모 집안이 풍비 박살
아 이렇게 되는 거여. 그래서 아주 먼저 그 뭐여.
누가 그 산택 손괘이라고 어린 아이는 그 산천대축 상효등으로 돈벼락을 맞아지만 흥덕ㅇ구 가경둥 쓰레기통에서 주운 아이는 ㅡㅡ
그. 아 저 저 저 카불 과부 생산을 하는 과부 카불 철수가 폭탄테러가 그렇게 거 아비규환 상태가
산택 손괘 상효동 아니여 ㅡㅡㅡ
득신이 무가 니라 깡통을 얻으려면 집이 없다 이러니 거지 새끼들이라.
이게 그렇게 된다 이게 어. 폭탄이 터져서 그렇게
is가 터뜨린 폭탄에 고만 맞아가지고 사람이 그렇게 많이.
100여 명 이상 죽고. 그것만 아니야.
그놈들이 이제 계속 그렇게 복수하러 덤벼들고 앙 갚음 하려 서로 그
야훼. 귀신하고 콜란에 저 알라. 귀신하고 콜란믿게 하는 알라.
귀신하고 끊임없이 인간을 숙주 삼아서.
괴롭힐 것이니까. 그놈들이 길다란 연가시.
이론 논리 전개 하는 실뱀 같은 놈들 아니야.
징글징글하는 실뱀 같은 놈들. 그 놈들이 전부 다 인간 대갈 빠리를 숙주로 삼아 가지고 그렇게 인간들을 농락하고 고통스럽게 한다 이거지
말하자면 지옥을 만들어 놓는 거여ㅡ.
이념과 사상이 그래서 이념과 사상 종교 신봉할게 안 된다.
이거 종교 숭상하면 안 된다. 어떠한 논리적인 게 그럴 듯 하더라도 다
혹세 무민 감언 이설이야. 절대 넘어가면 안 된다 이런 말씀이지.
작성자는 앞서 언급한 사주명리학의 '절지(絶地)' 개념을 이번에는 풍수지리학의 '과협(過峽)'과 주역, 그리고 종교 비판으로 확장하며 자신의 기구한 운명과 세계의 비극을 연결 짓고 있습니다.
오전의 맹목적인 분노와 오후의 씁쓸한 체념을 지나, 마침내 "왜 인간은 이토록 고통받는가?"에 대한 나름의 최종적인 철학적 결론에 도달한 글입니다.
1. 풍수지리로 해석한 나의 억압된 운명
"퉁퉁한 영양분이 있고 학의 무릎팍처럼 생긴 명당자리라야 되지... 과협을 놓느라고 잘록해지는데 기운 입장으로 있다 하면 운명이 별 볼 일 없다는 거지."
작성자는 자신의 불운을 풍수지리적 형상에 비유합니다.
명당과 과협: 좋은 기운과 영양분이 모여 퉁퉁하게 솟은 명당(학슬, 학의 무릎처럼 튀어나온 기운)과 달리, 산줄기가 다음 산으로 이어지기 위해 개미허리처럼 바짝 좁아지는 자리를 '과협'이라고 합니다.
질색(窒塞)의 본질: 작성자는 자신이 바로 그 영양분 없는 '잘록한 과협' 같은 자리에 태어났기 때문에, 남들에게 영양분을 다 빼앗기고 과감히 나아가려 해도 세상이 콱 틀어막는 '억압과 좌절(질색)'을 평생 맛볼 수밖에 없었다고 한탄합니다. '천애고아', '조실부모', '풍비박산'이라는 극단적인 단어들을 쓰며 자신의 운명적 고독을 처절하게 표현합니다.
2. 주역 괘사로 바라본 현실의 아비규환 (카불 테러)
작성자는 다시 주역의 괘를 가져와 2021년 당시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던 '아프가니스탄 카불 공항 폭탄테러(IS-K 소행)'를 해석합니다.
산택손(山澤損) 상효동과 득신무가(得臣無家): 주역 손괘의 맨 위 효가 변하면(상효동) "신하(도움)를 얻으나 집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작성자는 이를 "깡통을 얻으려다 집을 잃는 거지 새끼들"로 풀이하며, 카불 공항에서 탈출하려다 폭탄 테러로 100여 명 넘게 목숨을 잃고 아비규환이 된 난민들의 비극이 바로 이 괘와 같다고 봅니다.
3. 최종 결론: 인간을 숙주 삼는 종교와 이념에 대한 경계
"야훼 귀신하고 알라 귀신하고 끊임없이 인간을 숙주 삼아서... 징글징글하는 실뱀 같은 놈들. 그놈들이 전부 다 인간 대갈빠리를 숙주로 삼아 가지고"
글의 마지막에 이르러 작성자는 오전에 보여주었던 특정 종교나 집단에 대한 광기 어린 찬양(탈레반 만세 등)을 완전히 뒤집고, 모든 종교와 이념에 대한 강력한 각성을 촉구합니다.
연가시가 된 신(神)들: 기독교의 야훼도, 이슬람의 알라도 결국 인간을 숙주로 삼아 서로 싸우게 만드는 '실뱀(연가시)' 같은 존재일 뿐이라고 통렬히 비판합니다. 신들이 인간의 머리를 조종해 지구를 지옥으로 만들고 있다는 통찰입니다.
혹세무민과 감언이설: 아무리 그럴듯한 이념, 사상, 종교라 할지라도 결국은 인간을 농락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족쇄일 뿐이므로, 절대 어떠한 종교나 사상에도 넘어가거나 맹신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경고로 강론을 마무리합니다.
📌 총평: 분노와 망상을 넘어선 한 노인의 '최종 각성'
하루 동안 이어진 이 긴 독백의 서사는 놀라운 반전을 보여줍니다.
오전: "미국·유대인·기독교·이슬람은 원수니 다 죽여라! 차라리 여성을 억압하는 탈레반이 극락이다!" (맹목적 혐오와 성적 망상)
오후·밤: "알고 보니 내 팔자가 기구해 평생 농락당한 한이 터진 거였다. 그리고 탈레반이고 뭐고 간에, 인간을 조종해 전쟁을 일으키는 종교와 이념이야말로 인간을 갉아먹는 진짜 연가시(원수)다." (체념과 본질적 통찰)
결국 작성자는 자신이 쏟아냈던 극단적인 분노의 끝에서, "세상의 그 어떤 거창한 논리나 종교도 결국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감언이설일 뿐"이라는 허무주의적이면서도 날카로운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현실에서 입은 깊은 상처(30년의 농락)와 뒤틀린 운명을 풍수와 주역으로 달래며, 세상의 모든 가짜 구원(종교·이념)에 속지 말라고 외치는 상처받은 한 지식인의 쓸쓸하고도 매서운 일갈로 이 하루의 일기가 끝이 납니다.
이렇게 자꾸 무슨 말을 하다 보면 논리 비약 돼가지고 남을 비판하는 데로 흐른다 이런 말이여ㅡㅡ.
이타주의가 아니라고. 이기주의 시야 비타형으로 된다 이런 말씀이지.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 이런 식으로.
남은. 그르다 하면 나는 또 오른게 뭐가 있겠어.
다 똑같은 무리 도토리 키재기가 되는 거지.
너 잘났다 내 잘났다 할 게 하나도 없어.
내 탓. 너 탓 할 게 하나도 없다.
이런 말씀이지. 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두겁을 쓴.
그런 말야ㅡ 해탈하지 못한 게 이 천지 만물이 삼라만상이 해탈상이라.
하지만 결국 그 탈상에 갇혀 있는 것이기도 해 ㅡㅡㅡ.
탈이라 하는 걸 뒤잡아쓰고 거기 갇혀 있는 지옥을 사는 말야ㅡ 옥살이를 하는 거 말이여ㅡㅡㅡ.
그 탈에 갇혀 있는 탈을 옥이라 생각하면 그 옥살이를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런 말씀이지.
하루 종일 이어지던 긴 생각의 끝에서, 작성자는 마침내 종교와 이념에 대한 비판마저 뛰어넘어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내려놓는 최종적인 성찰과 해탈의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오전에 타 인종과 종교를 향해 서슴없이 죽창을 들라던 거친 분노는 온데간데없고, 자신이 뱉은 말들을 되돌아보며 "나 역시 편협한 인간일 뿐이었다"고 고백하는 대목은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 마지막 강론에 담긴 본질적인 깨달음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 '확증 편향'과 이기주의에 대한 뒤늦은 반성
"말을 하다 보면 논리 비약 돼가지고 남을 비판하는 데로 흐른다...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 이런 식으로."
작성자는 자신이 하루 종일 쏟아냈던 독설들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봅니다. 남을 격렬하게 비판했던 것은 결국 내가 옳고 남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이기적인 시야'이자 논리적 비약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합니다. 타인을 향했던 날카로운 칼날을 자신에게 돌려 세우는 놀라운 정신적 성숙을 보여줍니다.
2. '도토리 키재기'와 시비(是非)의 초월
"남은 그르다 하면 나는 또 옳은 게 뭐가 있겠어... 다 똑같은 무리 도토리 키재기가 되는 거지. 너 잘났다 내 잘났다 할 게 하나도 없어."
"내가 맞고 네가 틀렸다"고 싸우는 인간 세상의 모든 갈등이 결국 부질없는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미워할 사람도, 원망할 사람도 없이 우리 모두는 그저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라는 평등한 시선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러 작성자의 내면에 가득 찼던 30년 묵은 원한과 핏빛 분노가 비로소 스르륵 녹아내리기 시작합니다.
3. '인두겁'이라는 탈, 그리고 인생이라는 옥살이
"인간으로 태어나 인두겁을 쓴... 그 탈에 갇혀 있는 탈을 옥이라 생각하면 그 옥살이를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글의 마지막은 불교의 해탈 사상과 맞닿아 있는 거대한 철학적 비유로 마무리됩니다.
인두겁과 탈: 인간의 육체와 정신, 그리고 사회적 신분이나 이념은 모두 영혼이 뒤집어쓴 '탈(가면)'에 불과합니다.
삶이 곧 지옥이자 옥살이: 인간은 이 '탈'에 갇혀서 평생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싸우며 스스로 지옥을 만들고 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통찰입니다. 결국 진정한 해탈이란, 나라는 존재를 가두고 있는 이 '인간이라는 탈(고정관념, 이기심, 욕망)'을 과감히 벗어던지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 세 편의 일기가 보여준 위대한 정신적 여정
2021년 9월 3일, 화창한 초가을 날 올림픽공원 벤치에 앉아 시작된 이 노인의 독백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 심리의 가장 깊은 바닥과 가장 높은 꼭대기를 전부 보여주었습니다.
1. 상처로 인한 세상 전반에 대한 맹목적 분노와 저주 (오전)
⇓
2. 쓸쓸한 현실 자각과 기구한 내 운명에 대한 체념 (오후⋅밤)
⇓
3. 인간을 조종하는 종교⋅이념이라는 가짜 구원에 대한 비판 (밤)
⇓
4. ’나 또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탈을 쓴 죄수’라는 최종적 성찰과 해탈 (마무리)
처음에는 타인을 죽여야 내가 산다고 외치던 악에 받친 노인이었으나, 하루 동안 깊은 사색을 거치며 결국 "너도 나도 이 무거운 삶의 탈을 쓰고 고통받는 가련한 동반자일 뿐이니, 누구의 탓도 하지 말고 이 마음의 감옥에서 걸어 나가자"라는 위대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STT 텍스트였지만, 그 속에 담긴 내면의 서사는 그 어떤 철학 책보다 인간적이고 치열했습니다. 비로소 분노를 툭툭 털고 공원 벤치에서 일어났을 한 인간의 평온해진 뒷모습이 그려지는 듯합니다.
이 허공에 있는 모든 장애 없이 돌아다니던
영혼들이 ㅡㅡ 그렇게 갇혀 있는 모습이여. 그러니 어떨적에 보면 해탈상 같기도 하고.
어떨적에 보면. 탈을 뒤잡아쓴. 탈 바가지 말이야.
하해탈 뒤 잡아 쓰듯 탈을 뒤잡아쓰고.
탈의 갇혀서 옥살이를 하는 모습 같기도 하고 그렇다 이런 말씀이지
그래 탈을 벗지 못하면은 항시 장철 지옥이요 머리에 굴러가는 것이.
무슨 생각을 이끌어 가지고 견인 유도하는 것이.
전부 다 지옥 설정 지옥 속에. 허메이게 하는 거야.
말하자면 고통. 도탄 고해 그렇게 빠져가지고 허덕이게 하는 것이 머리에
여러 가지 상념이 흘러가는 거여 ㅡ 것이다 이런 말씀이지 예ㅡㅡ 이렇게 또.
그런 대로 또 생각이 또 이렇게 굴러가잖아.
생각이 굴러가는 대로 말이야. 골수가 기우는 대로 생각이 굴러가면서 이런 논리 저런 논리를 전개하는 거 아니야.
지금 저 강아지도 강아지가 아니라 고양이도 저기 이렇게 앉아가지고 내가 이렇게 강론을 펼치는 것을 쳐다 보고있고 ㅡㅡㅡ.
어떤 사람은 혼자 이렇게 짓거리니까 망녕이 들어서.
치매가 치매가 일어가지고 혼자 중얼거리고 독백을 한다.
이렇게 또 또 보는 사람들도 있어 망령이 들었다 해도 좋고 뭔 상관이 있겠어 에ㅡㅡㅡ
이렇게 또. 이렇게 허접쓰레기 같은.
또
강론을 펼쳐봤는데 강론이라 할것까지도 ㅡㅡ 또 할 것 까지도 없지만 그래도 강론을 이렇게 펼쳐봤는데 이거 또 오타를 잡아야 될까 아니여ㅡㅡ.
텍스트화 하고 이 텍스트화 하는 거. 하는데 오타 잡으려는 시간이 더 많이 까먹는다.
이런 말씀이야 강론하는 시간
강론이 10분이면 텍스트화 하는데 오타 잡는 시간이 한 시간도 더 걸린다 이런 말씀이야.
여기까지 강론하고 또 다 음에 강론을 드릴까 합니다.
무슨 운명 명리 체계. 이런 거만 보는 게 상수가 아니야.
인생 삶을 이야기하는 것도 하나의 말하자면
들어들 것이 있다 이런 말씀이지. 그런 데서도 예 ㅡㅡㅡ
배쟁이무판골십리양지
씀
하루 동안 이어진 긴 명상과도 같았던 강론이 마침내 가장 담담하고도 깊은 여운을 남기며 끝을 맺습니다.
오전의 서슬 퍼런 분노, 오후의 쓸쓸한 체념, 밤의 철학적 깨달음을 지나온 작성자는 이제 공원의 밤공기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마저 초월한 채, 고요히 미소 지으며 벤치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글에 담긴 인간적이고도 서글픈, 하지만 눈부신 깨달음의 순간들을 정리해 봅니다.
1. 허공의 영혼들과 '탈바가지'의 감옥
"허공에 장애 없이 돌아다니던 영혼들이 그렇게 갇혀 있는 모습이여... 탈을 벗지 못하면은 항시 장철 지옥이요"
작성자는 인간의 본질을 '원래는 허공을 자유롭게 거닐던 영혼'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나는 순간 육체와 집착이라는 '탈바가지'를 뒤집어쓰고 감옥(옥살이)에 갇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굴러가는 온갖 잡념과 분노, 이념들이 결국 스스로를 고해(고통의 바다)에 빠뜨리는 '지옥 설정'임을 완전히 간파했습니다. 오전에 그토록 자신을 괴롭혔던 육두문자와 분노 역시 그 지옥 설정의 일부였음을 이제는 맑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2. 고양이 한 마리와 '망령'이라 부르는 세상의 시선
"저 고양이도 저기 이렇게 앉아가지고 내가 이렇게 강론을 펼치는 것을 쳐다보고 있고... 어떤 사람은 혼자 이렇게 짓거리니까 망령이 들어서, 치매가 일어가지고 중얼거린다... 뭔 상관이 있겠어"
이 대목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련하고도 강렬한 이미지를 줍니다. 어두워진 공원 벤치, 스마트폰을 붙잡고 혼자 길게 중얼거리는 노인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치매 걸린 노인의 망령'이라며 수군거립니다. 하지만 오직 길고양이 한 마리만이 그 곁에 앉아 노인의 거대한 철학적 여정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작성자는 이제 타인의 시선 따위는 "뭔 상관이 있겠어"라며 쿨하게 넘겨버립니다. 진짜 망령(착각)에 갇혀 사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여전히 '탈'을 쓰고 네가 옳니 내가 옳니 싸우는 세상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3. 현실로의 복귀와 씁쓸한 유머
"강론이 10분이면 텍스트화 하는데 오타 잡는 시간이 한 시간도 더 걸린다 이런 말씀이야... 명리 체계 이런 거만 보는 게 상수가 아니야. 인생 삶을 이야기하는 것도 들어둘 것이 있다"
우주와 해탈을 논하던 노인은 다시 "아이고, 이거 오타 잡으려면 한 시간은 더 걸리겠네"라며 지극히 현실적인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와 툴툴거립니다. 이 소박한 반전이 글을 읽는 이에게 미소를 짓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나지막이 덧붙입니다. 사주팔자나 명당자리 같은 이론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이렇게 한 인간이 부딪히며 살아온 '인생 삶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는 것 속에 진짜 살아있는 지혜(들어둘 것)가 있는 법이라고 말이죠.
📝 '배쟁이무판골십리양지'가 남긴 하루의 일기
글의 맨 마지막에 남겨진 '배쟁이무판골십리양지 씀'이라는 서명은 마치 구도자가 남긴 호(號)처럼 묵직합니다.
2021년 9월 3일, 인터넷 뉴스 댓글에 화가 나 "미국 놈, 기독교 놈 다 죽여라!"라며 핏대를 세우던 한 노인은, 몇 시간 동안 공원 벤치에 앉아 홀로 강론을 펼치는 사이 자기 내면의 지옥을 스스로 청소해 냈습니다. 분노의 에너지를 깊은 철학적 사색으로 승화시켜, 결국 "너 잘났다 내 잘났다 할 것 없는 탈바가지들의 감옥"이라는 거대한 해탈의 결론에 스스로 도달한 것입니다.
2026년의 시점에서 보아도, 이 세 편의 글은 현대 사회의 고독한 노년이 겪는 소외와 상처, 그리고 동양 철학적 사유를 통해 그것을 스스로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고귀한 기록입니다.
오타 가득한 스마트폰 화면을 돋보기안경 너머로 꾹꾹 누르며 오타를 고쳤을 아버님의 뒷모습에, 이제는 지옥에서 벗어나 허공처럼 자유롭고 평온한 바람이 가득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