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안된 갓난애를 업고 세 살짜리
아들과 갈 곳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던
시절이 있었다.
요행 의탁할 곳을 찾아갔더니
어미인 내 나이가 너무 어려서 난감하다는
투로 거부하는 것이다
내 나이 27세 두 아이의 어미가 너무
젊어서 여승 같은, 수녀원 같은 이곳에서
못 배긴다는 염려와 귀차니즘 섞인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어쩌면 좋을까,
이 기회를 놓치면 또 거리를 헤매야 하고
또 다른 기회란 있을 수 없다는 절망감
몇 날 몇 밤을 근심 걱정으로 보내고
그 짓도 지칠 무렵이면 최악을 (죽음) 생각하기에
이르는데
생각과 마음이 거기까지 닿으면
그제야 몸과 마음이 육탈이 되어
기절하듯 잠이 들곤 하던 그 몇 달간의
지옥 같던 일상을 또 어떻게 감당하라고
나는 급했다 이것마저 놓치면 끝이다
내가 제일 잘하는 거 뭐지?
글을 쓰는 것이다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글로
그분 마음을 움직여 보자
을사조약의 억울함에 피맺힌 절규로 황성신문에 쓴
장지연 선생의 시일야 방성대곡보다? 더
절절하게 쓰자 써 보자
당시 우리 세 식구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이
나라가 넘어가는 것보다 더욱 절실하고 암담하고
슬픈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해서 글을 써 올렸다
연필로 쓰고 또 쓰고
원고지 수십 장에 띄어쓰기도 없이 빡빡 채워
보내고 기다리길 일각이 여삼추
답이 왔다.
오라고 아기들 데리고 오라고
이곳에서 아기들 키우고 엄마는 일 도우라고
그곳에서 몇 년
갓난쟁이 팔랑팔랑 뛰어다닐 만큼 자랐고
아들 8살이 되었을 때 급료로 받은 돈 알뜰히 모아
사회로 나오려 할 때 그분께서 하시던 말씀
“진철이 엄마 너무 젊어서 아이만 맡기고
가라고 그렇게 설득했는데 고집 부리길래
훗날 생각해서 저도 안 부르려고 했어요
”제 경험으로 젊은 여자는 이 폐쇄된 곳에서
오래 못 버티더군요
그런데 그 편지에 제 마음이 흔들렸지요
그날 그 편지 읽으면서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이 다 울었지요
여기서 45전 그 편지 내용을 기억나는 대로
옮겨 볼께요
~~~~~~~~~~~
1980년 7월 모일
선생님 저와 제 아이들을 구해주세요
저는 지금 막다른 곳까지 몰렸습니다.
선생님께서 아이들만 맡기고 저 혼자
인생을 찾아 가라고 하셨지요
선생님 말씀도 옳습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과 신념은 다릅니다.
선생님 조언대로 제가 아이들 버리고
제 인생을 찾아 나섰다가
운 좋게 팔자라도 펴서 좋은 곳에 시집가
용상 같은 대접을 받고 산다고 한들
비단 두른 그 가슴 속엔 평생 버리고 온
어린 것들 생각에 피눈물이 고였을 텐데
그것이 무슨 좋은 팔자며 축복이라 하겠습니까?
선생님
저를 한 어미로서 인간답게 살아가게 해주세요
평생 누더기를 걸치고 세상없는 고생을 하고 살아도
제 자식들 곁에서 살아가게만 해주세요
그렇게 사는 것이 하느님 뜻이며
제 신념이고 그것을 선생님만이 해주실 수 있습니다.
선생님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저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보수도 안 받겠습니다.
제 자식들만 곁에 두고 살 수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자신이 있습니다.
.................이하 생략
나는 그곳에서 아이들과 지내는 동안
주부 생활 산문부에 수필도 써 보내서
(심사위원은 소설가 강신재님)
당선되는 기쁨도 누렸고
신군부 들어서고 경기가 펴서 월급도 받았으니
거지꼴로 들어가 일반 사람 꼴로 거듭나서
나오게 된 것이다
알량한 글재주로 굶어 죽지 않고 살아냈고
글재주로 상도 받고
글재주로 자식들에게 좋은
평가도 받고 이렇게 잘 먹고 잘사니
그때의 편지 내용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살은 셈이다.
성로원 영아원
김종찬 원장선생님 감사합니다.
역시 한단어도 서운치 않을 운선님 글
뭘 또 이젤님도 요새 제가 바뻐서 아름문학상 방에 뜸하네요
연재는 무리 없이 진행하시고 계시죠?
그 어린 나이에
어쩌면 그렇게 반듯한 마음가짐으로
사셨을까요.
존경스럽습니다.
제라님도 뭘 반듯하긴요 그냥 눈앞에 닥친 불끄느라 제 정신이
아니였을 때였지요 감사합니다 늘 댓글로 오래전 부터
고맙고요 제라님 ~
저도 일곱 살 딸아이 손잡고 한 살 아들 업고 부모님의 집으로 들어 갔으니
운선님에 비하면 막다른 길은 아니었지만, 운선님의 그 때의 그 심정을 감히 짐작하고도 남슴니다.
다만 엄하고 독선적인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고자 섣부른 선택을 했던 제가
다시 아버지 품으로 들어가기가 너무나 면목이 없었을 뿐 이였습니다.
그래도 혹을 달고 들어온 딸을 내치지 않고 품어주고 '외 손주는 방앗고' 라고 하시면서도
외 손주들까지 다 후원해 주시며 보살펴주신 부모님이셔서
지금까지 고생 모르고 살아왔으니 그저 감사하며 살고 있답니다.
만약에 제가 운선님 이었다면 헤쳐나갈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더 장하고 또 장하신 운선님이세요.
그 길고 모진 세월을 잘 이겨내신 운선님 .
남은 날들은 지난날의 행복까지 갑절로 보상 받으시며 행복한 날들만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셨군요 과정이야 어쨌든 속이 무너진 어미 마음이야 저나 리진님이나
매 일 반 이였을 듯요 저는 부모도 애시당초 존재 했었나 할 정도로
고아 아닌 고아로 살았으니 불행도 혼자 몫이고 일어서기도 혼자 일어서는 법을
배웠지요 우리 형제 오 남매 다 그렇게 살았지요 나만 그런게 아니고
리진님 댓글 고맙습니다 행복하게 사세요~ 증말요
그래도....사회 복지시설이 있다는것이 참 다행이다 싶은 대한민국입니다
부모사정에 의해서 오고갈데 없는 어린애들을 거들어주는 시설이 참 고맙기로요
너무너무 맘 아픈 사연이라서 관심있게 읽어보고 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어려운 고비를 잘 헤쳐나오신 용기에 박수 보냅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정말로 엄마는 강합니다.^^
그렇지요 그땐 그런 시설에 공급되던 물자가 거의다 선명회 재단에서
나오던데 매일 분유와 쌀 헌 옷가지 등등 그래서 우유와 쌀 헌옷으로
받는 급료는 한 푼도 안쓰고 저축할 수 있었지요
지금은 정부에서 지원 하겠지요
그곳은 홀트에서 아기들 데려다 입양만 보내는
입양기관이었지요 감사합니다 섭이님
먹고살으라고
자식품고 살아내라고
그 재능을 주셨나봅니다
장하셔요
어미라면 당연하다 할지 몰라도
누구나 그리할수 없는 모성입니다
스물일곱
결혼도 안하고 철부지로 지내던 때였는데
자식둘 업고 안고ㅠ.ㅠ
그랴 쩡아는 처녀 였구랴 얼마나 이뻤을꼬 ㅎㅎ
난 오갈데 없어서 아무 남자에게나 따라가서 살아서
그런 넘을 만났나봐 그렇다고 집은 지옥이니
휴 ,,다 내 잘못이제 자식에게 젤 미안해서 몬살겠더라
지금도 화가 나면 마구 퍼부으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선
내가 저애들에게 뭘 잘했다고 이 난리야 하는 자책감이 들지
너무 고생 시켰거든
운선님
그야말로 보석같은
글 재능으로 오늘까지 성공하셨군요
더한 고난을 격고있는 분들도 마음뿐 글로도 표현을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진짜
어미라는 자리는
굶어도 자식보듬어 내 눈에 보이는곳에
보듬어 안고 살아야 하지요
백번 잘 견듸고
잘
키우셨어요.
늘
존경 합니다~^^
아고 별거 아닙니다 제 자식 제가 키운걸 가지고
감사합니다 정말이지 신께서 주신 재능 글 아니면
어려운 많이 못 넘겼을 거예요 그후도 몇 번 글로써
위기를 넘겼거든요 ㅎㅎ 하느님께 감사드리지요
상젤리제 님 댓글 너무 감사드려요
ㅠㅠ
엄마라는 이름만으로도
모든 걸 감내할 수 있었나봅니다.
이제 지난 날로 추억할 수 있으니
그 분 재능도 감사로 돌릴 수 있는
지금일 수 있는 운선님 존경합니다.
맞아요 엄마라는 이름이 얼마나 책임감과 의무를
강조하는지 때론 도망쳐 나오고 싶어 극단적인 마음까지
수없이 했지요 하지만 제가 낳은 이상 그 불쌍한 아기들을
제 몸이라고 제 마음대로 하면 안되잖아요 그렇게 살다 보니
이렇게 살아 왔네요 종이님 감사합니다
운선님!
아드님,따님 그어려움 속에서도 잘 키워내신 장한 어머니세요~~
존경합니다!
아유 강님이야 말로 모범이신 어머니신 분이 별말씀을
ㅎㅎ 잘계시지요 그저 운동 열심히 하시고 좋아 하는 취미
하시면서 우리 서로 이렇게 안부 전하며 살아봅시다
고마워요 강님..
지난날을
소상 하게 지금 까지
기억 하고 계신
운선 언니의
글이
얼마나 절실 했을까를
생각 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 😢
엄마 라는
두글자에 먹칠 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 오신
운선 언니. ~~♡♡♡
사랑 💕 합니다.
어머 볼매님 오셨군요 반가워요~♡ 절실했지요 살면서
그때처럼 진심을 다해 기도 해본적 없고 그 때처럼 믿음이 강했던적도 없었을 거예요 ㅎㅎ이제 이렇게 웃으며 답글 씁니다 볼매님 건강하세요~
어쩐지 글이 굉장히 매끄러우면서 군더더기 없이 잘쓰신다 했습니다
글로써 어려운 시기를 넘기고 또 평생 살아오셨고
여기서 또 우리들을 만나셨으니 이곳에서 글보따리를 풀어 놓시고
평안한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뭘요 글은 그 산님께서 담담히 잘 쓰시지요 전 살아 온 게 글의 밑바탕이 되어 작은 재주로 살을 붙이고 옷을 입혀 내 놓곤하지요
별거 없지요 아시잖아요 ㅎㅎ감사합니다 그 산님~
어려운 시절을 지내 온 운선 님의 그 시절 이야기, 참으로 먹먹합니다.
1980년 그 해는 저도 참 힘든 시절이었네요.
5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두 달 후 갑자기 형님이 돌아가셨지요.
졸지에 20대에 집안의 가장이 된 나.
정말 막막하고 앞이 캄캄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을 겪고 살아온 내가 이제는 노년이 되었으니..
그러셨군요 얼마나 황망했을까요
고작 이십대에 말이죠
나라 안도 어수선하고 제 가정도
산산조각 나고 진짜 살면서 그렇게 암울했던 적이 그 후론 없었던 거 같아요 초반에 혹독한 고생을 해서 그렁가 그 후의 삶은 아무것도 ? 아니더라구요 고마워요 주현님
네 작가님 훌륭하세요
ㅎ 그래 보여요? 고마워 자연님~
밤바람 살랑한 시간 운선님 글에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어미는 자식없인 숨도 쉬어지지 않지요!
운선님 ~앞으로에 행복여정을 응원합니다 ^^
글..넘 잘보았읍니다~^^~
미라보님 반갑습니다
그렇지요 자식이 품에서 나가면 제 정신이 아니지요 어릴 땐 엄마가 꼭 있어야 하는 이유지요
한편의 드라마 같은 내용의
삶을 살아오신 겁니다.
그어려운 처지에 자식들 손
부여잡고 살아오신 장한 의지의
엄마 이시기도 하고요.
그런 쓰라리고 힘든 역경이
있었기에 글 에 모두다 그 절절한 심정이 녹아 들어가고
사람들의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거 겠지요.
근데 전 무슨재주가 있었을까요?? 그중 나쁜것중
하나가 정이 많아 사달을 자주
내었구 쓸때없는 오지랖이 넓기도 했구요.
일 능력 추진력 기술은 제법
있어서 나름 인정받구 살아는
온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