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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무림(靑春武林) ] 제7장 철기보(鐵旗堡)-2 한편,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도천의 손에 끌려 나간 훤백은 일각이 채 지나기 전에 철기보의 중심부에 위치한 가장 큰 팔층 대전의 앞에 이르렀다. 멀리에서 볼 때 보다 이 대전의 규모는 훨씬 더 거대하고 웅장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건평만 해도 일천 평이 훨씬 웃돌 듯한 규모에 집 채 만한 대리석을 깎아 백여 계단을 쌓아올린 다음, 그 위에 팔층으로 이루어진 대전을 지은 것이라 아래쪽에서는 고개를 완전히 쳐들어야 끝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주위의 경계 역시 극히 삼엄해 계단을 오르자 건물의 주위에는 스무 걸음 간격으로 흑의경장에 금빛 수실을 드리운 허리띠를 동여맨 무사들이 대전 주위를 빙 둘러 지켜 서 있었다. 훤백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토했다. “대단하군. 여기가 맹주의 거처야?” 도천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지. 뿐 아니라 천하 무림의 대소사가 논의되는 심장부기도 하고! 조례(朝禮)나 회의 같은 것은 일층에서 하게 되어 있고, 이층부터는 각 부서의 집무실로 이용되고 있어. 맹주님과 가족들의 거처는 제일 위 팔층이고.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육층 이상은 맹주님의 허가가 없는 이상 아무도 올라갈 수 없도록 되어있어.” 천하 무림의 심장부...! 훤백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겠어. 한데 가족이라면? 수효가 많아?” 도천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별로. 가족들에 대한 일은 세간에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맹주부이기 이전에 여긴 철기보라는 방파였으니까 아무래도 친인척들이 없을 수는 없지. 직계가족으로는 유진학(柳眞學)이라는 아드님 한 분 뿐이지만.” “뭐야?” 훤백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게 무림맹이라던가 철기보, 그리고 유목공 본인의 일에 관한 것들은 삼척동자까지 알고 있을 만치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상 그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이상스러울 만치 알려진 바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아들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금시초문...! “아드님이 계셨었어? 그런데 난 왜 처음 듣는 것같이 느껴지지? 유목공의 후를 이어 최소한 이 철기보의 주인이 될 사람이잖아?” 그러나 도천은 전혀 이상할게 없다는 듯 대답했다. “일반에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 다만 일반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워낙 진학형님이 무림의 일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야. 무림맹의 일은 물론 하물며 철기보의 대소사에도 거의 나서지 없거든.” 기이한 일이었다. 맹주의 아들이 무림사에 관심을 지니지 않았다니...! 크게 의아함이 치솟았다. “이상한 이야긴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 무예에 관심이 없다는 거야?” 그러나 도천은 계속 묘하게 웃었다. “그렇진 않아. 무공만큼은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어. 다만 성품이 문젠데, 워낙 충후하신 편이라 피비린내 풍기는 무림의 일 자체를 좋아하시질 않는 것 같아. 때문에 맹주께서도 크게 심려를 하고 계시지.” 맹주의 아들이면서도 피비린내를 싫어하고 입신에 이른 무공을 지녔으면서도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을 정도의 충후한 성품을 지닌 인물! 훤백은 이 생소한 인물에 대해 순간 적잖은 호기심과 호감이 동시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기가 정말 쉬운 일이 아닌데...! 철기보는 그렇다 치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부친에 이어 누구보다 차기 맹주가 되기 쉬운 인물이잖아?” 그러나 도천은 이미 상투적인 이야기가 된 듯 대충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맹주님도 그 때문에 꽤 아쉬워하셔. 하지만 본인이 무림에 흥미를 가지지 못한 상황이니 억지로 일을 시킬 수도 없고...! 어쨌건 별호는 천비도룡(千臂屠龍)이야. 당년 사십 세고.” 천비도룡 유진학(柳眞學)! 훤백은 이름을 깊이 마음에 새겼다. 더불어 대전 입구에 도착하자 도천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당부했다. “잠시 후 유시(酉時)에 오후 회합이 있어. 여기 사자전에서는 진시(辰時)와 유시, 하루에 두 번 회의가 열려. 재임 중인 봉공(奉公)들과 맹의 간부들이 모여서 중요한 무림의 사안들을 찬반을 거쳐 결정하는 거야. 그런 만큼 몸가짐을 신중히 하고 맹주께서 부르시면 묻는 말에만 대답해.” “그야 뭐...” 확실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자리였다. 훤백은 조심스러운 몸가짐으로 도천을 따라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에는 깨끗하고도 넓은 대기실이 있었고 맞은편에 집무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였다. 전각의 덩치가 워낙 크다보니 사람이 주먹만 해 보일 만치 그 웅장함이야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 ‘대단하다!’ 특히 집무전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훤백은 입이 쩍 벌어짐을 금치 못했다. 위압적으로 넓고 높은 팔백 평 가량의 내부에 붉은색이 돋보이는 서너 아름이 넘을 듯한 기둥들, 천장 가장자리마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금빛 용의 형상들이 그야말로 보는 이들의 기를 죽일 정도로 엄청나게 꿈틀대며 늘어서 있었던 것이다. 또한 맞은편에는 열 계단 가량의 단(壇)을 올린 위에 호피(虎皮)를 덮은 태사의가 놓여 있었고, 뒤쪽 벽에는 용비봉무의 필체로 살아 움직이는 듯 거대한 무(武)자를 쓴 백단(白緞)이 내려뜨려져 있었으며, 태사의의 우측 벽 쪽에는 유독 자주빛 휘장이 내려진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미루어 맹주가 오가는 출구인 듯한 느낌. 단(亶) 아래쪽에는 좌우에 여덟 마리의 거대한 청동 사자상(獅子像)과 웅장한 금고(金鼓), 그리고 서탁(書卓)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또한 회의시간이 가까워서인지 속에는 이미 백여 명 가량의 하늘을 찌를 듯한 웅자들을 지닌 백의장삼인들이 모여 있음도 볼 수 있었는데, 한 눈에 현 무림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봉공들! 즉 천하를 이끌어 가는 각 무림방파의 대표들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더불어 이때서야 훤백은 지금껏 싱겁게만 보였던 도천의 대단함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존안을 뵙소이다, 도원주!” “고생이 많습니다.” 도천을 보자 이런 신분의 그들이 늦을 새라 한결같이 서로 다투어 인사를 했고, 몸가짐 까지 사려가며 표정에 사뭇 경외의 빛을 떠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도천은 거저 간략하게 웃음을 지어 보이거나 답례를 했을 뿐, 누구에게도 훤백을 소개시켜 주지 않았다. 둥-! 그리고 들어선지 일각여가 흘렀을 때, 가벼운 환담만 오가던 집무전 내에 급기야 웅장한 금고성(金鼓聲)이 한 번 울려 퍼짐과 함께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곧 회의가 시작되겠습니다. 맹주께서 납실 터이니 자리를 잡아 주십시오!” 보자 금고 앞에는 언제 나타난 것인지 삽십여 세 가량의 한 무사가 북채를 잡고 있었고, 서탁에도 예순 가량으로 보이는 한 창노한 흑의노인이 앉아 지필묵을 준비한 채 뭔가를 기재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전내의 인물들은 즉시 절반으로 나누어 대전의 좌우에 일열로 죽 나열해 서기 시작했고, 도천 역시 지체하지 않고 훤백의 팔을 당겨 가장 끝자리로 가 열을 맞추어 섰다. 둥-! 그러자 또 한 번의 금고성이 울리며 시작을 알렸던 무사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맹주께서 납시었습니다!” 동시에 가벼운 천 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태사의 우측에 늘어진 자주색 휘장이 걷히며 몇몇 인물들이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열의 제일 끝 쪽 자리에 위치했기에 훤백으로서는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칠순 가량의 나이에 백발홍안을 지닌 백포노인 하나와 마흔에서 쉰 초반까지의 나이로 짐작되는 극히 심상치 않은 풍도를 지닌 여섯 인물들이었다. 현 무림을 이끌어가는 맹주 유목공과 무림맹의 최고서열을 지닌 간부들일게 분명했다. 입증이라도 하듯 들어오자 백포노인은 곧 익숙한 몸가짐으로 태사의에 좌정을 했고, 나머지 인물들은 셋씩 그의 뒤쪽 좌우에 조용히 시립하여 자리를 잡았다.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상황을 알리던 무사의 음성과 함께 둥-! 한 번 더 금고성이 울려 퍼졌다. “천세(千歲)! 천세...!” 대전 안에 시립하고 있던 인물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한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맹주에 대한 경의를 표해 올렸다. 바싹 긴장함을 늦추지 않았기에 훤백 역시 간신히 때맞춰 보조를 맞출 수가 있었다. “무더운 날씨에 수고들 많구료...! 회의를 시작해보십시다.” 더불어 창노하면서도 극히 부드러운 백포노인의 음성이 좌중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좌중의 인물 중 누구하나 긴장감을 늦추는 듯한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회의시작을 알린 무사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홍무 십오 년 구월 십칠 일 하오 조례를 시작하겠습니다! 관례에 따라 맹주께서는 먼저 상오에 논의된 일들에 대한 의문사항이라거나 결과를 알고 싶으신 분의 질문을 받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질서 있게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의문답 내용은 문서화 되어 보관되오니 또한 주지하시기 바랍니다!” “금검부의 냉군이 먼저 말씀 여쭙겠습니다...!” 그러자 열 지워 섰던 봉공들 중 앞 서 어떤 문제나 기안을 제출했던 듯한 인물들이 한 사람씩 손을 든 후 백포노인의 앞으로 나가 결과를 묻기 시작했고, 이에 백포노인은 각자의 질문에 따라 분류별로 뒤에 시립하고 선 여섯 인물들에게 답변을 하게 했다. 비로소 훤백은 백포노인의 뒤에 시립한 인물들이 현 무림맹의 모든 사건사안들을 타개해 나가는 철기보의 내외(內外) 육당주(六堂主)들임을 알게 되었는데, 성명은 각각 이러했다. 제일내당, 정희당(正希堂), 적운협(赤雲陜) 유천소(柳川召). 제이내당, 천희당(天希堂), 삼무흔(三武痕) 용사극(蓉士極). 제삼내당, 지희당(地希堂), 벽력도(霹靂刀) 남혁(南革). 제일외당, 무진당(無塵堂), 적수환월(赤手幻月) 설궁도(雪宮圖). 제이외당, 적진당(敵塵堂), 혈서생(血書生) 독고우(獨孤羽). 제삼외당, 보위당(堡威堂), 불사신검(不死神劍) 막여사(漠如思). 머리글자만을 조합해 보면 정천지무적보(正天地無敵堡)...! 오늘 날에 이르러 뜻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반 시진 여. 그렇게 시작되었던 각종 사안에 대한 결과를 묻고 답하는 시간이 끝나자 무사의 음성이 다시 울려 퍼졌다. “상오의 안건들에 대한 문답이 있었습니다! 다음은 하오에 생긴 새로운 문제사항이나 기안을 받겠습니다! 건의사항이 있으신 분은 차례로 나오셔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용은 역시 문서화 되어 보관됩니다!” 상오와 하오의 사안.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처음과 달리 그다지 나서는 인물이 없었다. 도천이 앞 서 일렀듯 눈치를 보면, 이곳 사자전의 회의는 오전과 오후, 하루에 두 번 차례가 열리는 것이었으므로 대부분 새로운 기안은 오전 회의에서 제시되는 편이었고,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오후에는 오전에 올린 기안에 대한 결과를 묻는 게 통례처럼 되어 있었으므로 별 건의가 나오지 않는 같았다. “천세...!”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자 마침내 상황을 살피던 도천이 툭, 훤백의 어깨를 친 후 백포노인의 앞으로 나가 깊숙이 부복지례를 취했다. “여타의 건의가 없는 듯하니 외람되오나 속하가 안건 하나를 올리고 싶습니다. 말씀드려도 될는지요?” 백포노인이 찬찬히 그를 살피며 예의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서 오너라. 네가 이 자리에 모습을 보이기는 참으로 오랜만인 듯한데 무슨 일이더냐?” 도천은 계속 포권자세를 취한 채 말을 받았다. “엿새 전 개별적으로 말씀드렸던 일에 관해서이온데, 아무래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기에...! 역시 모든 분들과 함께 상의를 하는 게 마땅할 것 같아 건의 올리는 것입니다.” 장내의 인물들은 순간 서로의 얼굴을 살피며 긴장된 기색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워낙 사람이 유쾌하여 가벼워 보였을 뿐, 훤백 역시 이곳에 와서야 그의 신분을 느낄 수 있었을 정도였지만, 본시 그가 맡은 추밀원의 업무는 여간해서 일반에 알려지지도 않을 뿐더러 정식으로 공표되는 일이라면 한 방파의 흥망이 오갈 정도로 큰 사안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백포노인은 잠시 입을 다물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한참 후에야 말문을 열었다. “추밀원의 일이란 결코 쉽게 발설해서 될 성질 것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니 역시 큰 어려움이 있었던가 보구나. 혼천소마의 회합문제이더냐?” ‘혼천소마가 회합...!?’ 찰나 봉공들의 얼굴에 일제히 놀라움의 기색이 떠올랐다. 눈치를 보면 아직 이를 아는 자가 없는 듯했다. 도천 역시 지금까지의 장난스러웠던 모습을 지우고 신중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가능하면 속하들 선에서 척결하려 했었던 문제가 계속 혼선을 빚고 있습니다. 첫째 어려움은 날짜 문제이온데, 하필 윤 구월이 들어 초이레라 명시는 되었지만 전혀 놈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달 초이레가 날짜라는 게 정설 같지만 이 역시 사실 같지 않아 난제가 되고 있습니다.” 백포노인의 하얀 눈썹이 가볍게 꿈틀거렸다. “첩지에 기재된 날짜가 사실 같지가 않다?”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서백은 간교하고 심계가 끝이 보이지 않는 자인 것입니다. 이런 자가 보란 듯이 서명과 날짜를 표기했다는 게 이상해 속하들이 중지를 모아본바, 이것은 결코 단순한 회합이 아니라 무림 전역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수 있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듣고 있던 인물들의 얼굴에 서서히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는 터였지만 도천의 입에서 이정도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상상을 벗어난 큰일임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포노인마저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재앙이라면... 어떤 내용을 지녔다고 여겼더냐?” 도천은 훤백이 이야기했던 것을 차분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본 무림맹에 대한 정면도전, 혹은 중원 무림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약은 자가 서명을 하였음은 싸울 준비가 끝났으니 누가 봐도 상관없다는 의미라고 사료되어...!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즉시 각 방파에 갑호비상경계령(甲號非常警戒令)을 내림이 옳을 듯 합니다.” 순간이었다. “갑호비상령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기에...?” 급기야 봉공들의 사이에 큰 소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기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게 본시 무림맹에서는 천하에 사뭇 중대한 난변이 벌어질 경우를 대비하여 각각 갑, 을, 병 세 가지의 비상령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이 중 병은 경계, 을은 동원, 갑은 전투를 의미하는 것으로, 갑호비상경계령을 내린다는 것은 전 무림이 전시체제로 돌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백포노인은 다시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다시 말을 꺼냈다. “일리가 있다. 나 역시 서찰을 본 후 여러 의문을 지닌 게 사실이지. 하나 독단적으로 처리하려다가 자칫 실수하는 날이면 무림에 더 큰 폐해가 올 수 있을 것인즉, 건의를 했으니 표결을 해보자꾸나.” 이어 백포노인은 열 지워 선 봉공들에게 눈길을 돌리며 처음으로 직접 사안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추밀원의 일이 워낙 중대하여 그간 함구했던 사안 하나를 거론키로 하겠소...! 내용은 천하에 해악을 끼치는 혼천소마에 관한 것인데, 보름 전 외부를 순시하던 도원주가 우연한 기회에 그들 중 하나를 척살한바 있었소.” 봉공들은 더욱 크게 긴장된 표정으로 경청했다. “그 때 품속에서 이러한 첩지가 하나 나왔건데 놀랍게도 이러한 내용이 적혀 있더구료.” 이어 백포노인은 품속에서 죽은 관구로부터 얻게 된 첩지를 꺼내 모두에게 보게 했고, 순간 봉공들은 급속도로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뭐야? 놈들이 규합을...?” “서백의 서명이 확실하군!” 백포노인은 첩지가 한바퀴 돌아 다시 자신에게로 전해지자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날짜는 구월 초아흐레, 보셨다시피 지금껏 개별적으로 움직여 왔던 그들이 회합을 한다는 내용이올시다. 미루어 서백이 실수를 한 것처럼도 보이는데, 사실이라면 혼천소마들을 일거에 소탕할 좋은 기회이지. 하나 서백이란 자가 그간 행해온 행적을 보면 결코 이런 실수를 할 리가 없는 터인지라 본좌 역시 가벼운 일이 아니다 싶은 기분이 드는구려. 이들이 한데 뭉쳐 일을 벌인다면 실로 막아낼 방파가 없을 터...!” 백포노인은 잠시 말을 멈춘 후 한 번 더 좌중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천려일실(千慮一失)...! 도원주는 방심하다 당하는 문파가 나오기 전에 이를 방비할 수 있도록 갑호비상경계령을 내리는 게 어떠냐는 것을 건의한 것 같소. 여러분의 의향은 어떠하시오?” “시월에 군림대회가 열리는 이런 중대한 시기에...!” 중인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역시 가장 문제는 군림대회가 되는 것 같았는데, 이때 사십 중반의 호면사내가 긴장된 표정으로 나섰다. “창천보를 대표해 신익이 한 말씀 올리고 싶사옵니다. 첩지의 내용을 보면 확실히 심상치 않음을 읽을 수 있사오나, 그렇기로 이것만으로 그런 위기상황이 오리라고는 쉽게 믿어지지 않는군요. 호랑이 간을 빼먹지 않은 이상 감히 놈들이 무림맹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다는 것도 쉽게 믿겨지지 않는 일이옵고, 모든 것이 예측일 뿐이지 않사옵니까?” 백포노인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오. 건네진 건 첩지 하나뿐...! 분명 확인된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소. 해서 천려일실이란 말을 쓴 것이오. 하나 분명한 것은 이들이 하나로 뭉쳐질 경우 그 위험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 미연에 불상사를 방지코자 함인 것이오.” 호면사내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곧 다가올 시월에는 군림대회가 개최될 터인데 갑호령을 내린다면 그것이 무산되지 않사옵니까?” 그러자 또 한 사내가 나섰다. “속하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특히 이게 어쩌다 정말 서백이 실수한 것이라면 비상령을 내림으로서 놈들이 잠적해버릴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그리되면 놈들을 소탕할 절호의 기회까지 놓치게 되는 셈이지요.” 확실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되자 백포노인도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신색이 되었는데...! “일리가 있소. 하다면 여러분들의 의향으로는 어찌 대처했으면 좋겠소?” 호면사내가 다시 포권을 취하며 말을 받았다. “아직은 모든 게 미지수니 비상령은 잠시 접어두고, 극비리에 각 방파의 수뇌들에게만 급전을 보내 상황을 귀띔한 후 각자 다른 명목으로 개별경계를 강화시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별다른 변고가 없을 시에는 예정대로 시월 군림대회를 개최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개별 경계령 속의 군림대회...! 백포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구려. 도천,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도천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기실 모든 것은 오로지 위험하다는 추측뿐, 정확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 예측만으로 군림대회라는 중대사를 중지시킬 수는 일이었다. 더욱이 첩지하나만으로 갑호비상령을 내려 무림전역을 전시체제로 몰아넣기도 대략 난감할 수밖에 없는 노릇...! “차선책으로서 좋은 의견인 듯 하온즉 속하는 받잡겠습니다.” “그럼 수렴키로 하겠다.” 백포노인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나열한 봉공들에게 말했다. “이것으로 결정된 것 같소. 지급 맹주령으로 명하는 바이니 여러분은 즉시 각자의 방파와 모든 방파들의 영백들께 급전을 보내 혼천소마들의 위험을 환기시키고 크게 경계를 강화시키도록 하시오.” “명(命)!” 봉공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한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이구동성으로 외침을 발했다. 도천은 다시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그 밖에 또 하나의 청이 있습니다. 역시 첩지와 더불어 말씀 올린 일이온데, 부족한 속하에게 이렇듯 일이 많아지니 오랫동안 보류해왔던 추밀원의 인원을 증강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사옵니다. 수락해 주십시오.” 백포노인은 눈에 번뜩 신광을 떠올렸다. “원사(院師)에 관한 것 말이더냐?” 이 역시 사전에 이미 어떤 이야기가 있었던 듯...!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추밀원은 오랫동안 인원을 늘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간부조차 두지 않았사온데, 갈수록 일이 늘어 마침내 속하 혼자로는 역부족이 되는 것 같아 올리는 청입니다. 최소한 속하 대신 집을 지킬 사람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라 여겨지는 터이오라...!” 백포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렇기도 하다. 도천 너는 추밀원주로서 오랫동안 많은 일들을 혼자 도맡아 해왔지. 하지만 문제는 네가 청한게 원사라는 직분인 터이라 역시 혼자서 결정할 사안이 아닌 것 같구나.” 이어 백포노인은 뒤에 시립하고 선 육대당주에게 물었다. “이는 외부와 상관없는 대내의 일이지. 한즉 너희에게 먼저 묻거니와 도천이 원사를 원하는구나. 어찌 생각 하느냐?” 그러나 시립하고 선 당주들은 머뭇머뭇 서로 눈치만 살필 뿐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결코 달가와 하는 표정들이 아니었다. 이러한 그들을 향해 도천이 가볍게 쐐기를 박았다. “충후한 사람이온즉 여하한 형님들께 어떤 불이익도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불이익도 돌아가지 않는다...! 하나 여섯 당주들은 거듭 망설이는 표정으로 눈치를 살피며 신중한 표정으로 그에게 질문해왔다. “도원주께서는 추밀원을 맡아 사실 그간 큰 고생을 해오셨소이다. 우리들과는 처지가 달라 홀몸으로 수 없이 사신(死神)과 맞부딪치기도 하셨고...! 이러한 터에 좋은 분을 찾으셨다니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 알고 싶구려. 원사에 임하실 분이 어떤 분이신지?” 도천은 여섯 당주들을 번뜩이는 눈으로 보며 힘 줘 말했다. “맹주부의 사람이 아닙니다. 지난 무림행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아우인데 의리가 있고 여러 일을 처리함에 빈틈이 없더군요. 이렇다할 무공 역시 없습니다만 하나 소제가 필요하다 여겨지는 사람이고 무례를 범할 일도 없을 터이니 어여삐 손을 들어 주셨으면 싶습니다.” “본 맹의 사람이 아니고 무공조차 지니지 않았다? 그런 인물을 추밀원의 원사로...?” 당주들의 표정에 일순 뜻밖이라는 듯 크게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하나 그들은 곧 도천의 속이 뭔지 대충 짐작하게 되었다. ‘분명 본인에게 필요하다 여겨지는 사람이라 했겠다? 또 무례를 범치 않을 것이라 미리 언질했으니 이는 자격 따위와는 관계없이 다만 키워주고 싶다는 의미...!’ 그들은 빠르게 염두를 굴리며 다시 물었다. “한 가지만 더 묻겠소이다. 도원주께서는 그 분을 어떻게 알게 되셨던 것이오?” 도천은 히죽 웃었다. “소제가 잠행(潛行)을 하면 언제는 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이번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도움을 받아 인연이 된 것이온데, 각설하고 함께 일하기에는 무조건 최상이라 여기는 터입니다.” 무조건 최상...! 실로 황당하기 짝이 소리였다. 하나 여섯 당주들은 설명을 듣자 곧 짐작이 맞았음을 깨닫고 실소를 머금었다. “속하들은 이의가 없사옵니다. 맹주께서 헤아리시기를...!” 백포노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반대가 없으니 수락하겠다. 이 자리에 있으면 나오라 일러라.” “아우, 나오게.” 이에 도천은 곧 훤백을 향해 말했고, 훤백은 특유의 대담성으로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백포노인의 앞으로 나아갔다. 찰나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훤백의 몸에 쏟아졌고, 그 시선들은 다시 크게 의아한 것으로 바뀌어졌다. ‘뭐야...? 이제 고작 약관에도 못 미친 소년 아닌가?’ 전혀 예기치 못했던 눈치였던 것 같았다. 하지만 훤백은 어차피 나선 마당, 그대로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백포노인 앞으로 가 휙, 포권부터 취해보였다. “말학 낙양 숭양이가의 훤백입니다. 천수를 누리시옵기를!” 순간이었다. 백포노인의 눈에 유독 까닭을 알 수 없는 놀라는 듯한 빛살이 스쳤다. “도천에게 이야기는 들었다. 무림과 무관하게 성장한 사람으로서 학문(學文)에 조예가 깊고 나이에 비해 대범할 뿐 아니라 어떤 일이거나 처리함에 빈틈이 없다고 하더구나.” “과찬입니다. 분명 향리의 적산서원에서 수업을 했사오나 특별히 잘하는 점은 없습니다. 무림에 관심이 지극하여 수업을 쌓고자 나선 터입니다.” “얼굴을 들어 보거라.” 훤백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그와 함께 마침내 그는 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백포노인의 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젊어 일찍이 천하를 얻은 후 무려 이십여 년 간이나 천하 무림을 다스려온 유목공! 하나 뜻밖에도 그는 그저 수수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다소 마른 듯한, 그러나 첫눈에 호감이 가는 화색 감도는 얼굴에 은빛 머리카락, 따스한 온기 번지는 눈이 타의 어떤 잘못이라도 감싸줄 듯한 느낌을 주는 그런...! 기도 역시 일반의 노인들과 유사해 무공의 흔적도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미루어 이미 체내의 기를 완전히 안으로 갈무리한 느낌으로 입신의 경지를 넘어선 인물인 듯...! 인상자체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오로지 미간사이에서 이마 복판까지 올라간 한 가닥 깊고도 긴, 세로로 세워진 주름뿐이었다. 바늘을 거꾸로 세워놓은 것 같다고 해서 현침문(玄針紋)이라 일컫는 것...! 이러한 주름을 지닌 인물을 상학(相學)에서는 하늘이 무너져도 꿈쩍하지 않는 배짱을 지녔다 하여 제왕(帝王)의 상(相)이라 이르는데, 백포노인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는 무척 생각을 많이 하는, 지극히 심계가 깊은 인물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훤백의 모습을 살피던 유목공의 입가에 이윽고 빙그레 한 줄기 웃음을 머금었다. “나이에 비해 크게 용기가 있어 보이는구나. 눈의 빛은 맑고도 밝다. 또한 남다른 큰 지혜가 있는 것이지. 하나 무공을 모른다 한 것과는 달리 적잖은 정기가 안으로 갈무리된 것을 보면 실로 예사롭지 않은 절기를 지닌 듯 한데 누구에게서 사사 받은 것이더냐?” 무공...! 실로 기이한 소리였다. 황보욱이 거론했던 일을 천하의 웅주인 유목공 역시 똑 같이 이야기한 것! 하나 훤백은 그대로 대답했다. “달리 사문을 섬기지 못했던 터이므로 향리에 있는 관서표국의 담장 너머로 몇 수 검식을 훔쳐 배웠습니다. 별호조차도 오늘에서야 스스로 지었습니다.” 유목공의 눈에 다시 얼핏 기이한 빛이 순간적으로 스쳐갔다. 하나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다른 것을 물었다. “스스로 지은 별호라 함은?” “있지도 않은 별호라 만들기 싫었지만 방명록에 기재해야 했으므로 부득이 추서소년이라 지어봤습니다.” “추서소년...?” “향리에서 불렸던 별명이 쥐새끼였습니다.” “핫핫핫핫핫...!” 순간 지금껏 엄숙하게만 진행되어 오면 집무전 안이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다. “헛헛... 매우 재미있구나.” 유목공 역시 뜻밖이었던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건 도천은 너를 추밀원사로 일임해줄 것을 청했다. 잘 수행할 수 있겠느냐?” “미력한 몸이나마 소신을 다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결코 무림맹에 누를 끼치지는 않겠습니다.” 유목공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추밀원사로 임명할 테니 도천과 함께 잘해보도록 하거라. 와중에라도 어려운 점이 보이거나 난해한 문제가 생기면 즉시 여기 육대당주와 상의토록 하고.” “은전에 감사드립니다!” 훤백은 곧 한쪽 무릎을 꿇고 한손으로 바닥을 짚어 부복지례를 취해보였고, 유목공은 다시 중인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예기치 못하셨던 일이나 보시다시피 추밀원이 새롭게 원사를 받아들이게 되었구려. 한즉 여러분께서는 혼천소마에 관한 급전과 함께 이 사실을 각 방파에 통고해 주시고 추밀원에 용무가 생기면 이원사를 통해 도원주와 상의해 주시기를 바라겠소.” 그러자 순간이었다. 실로 예기치도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지금껏 웃음과 더불어 훤백을 지켜보던 중인들이 유목공의 말이 떨어지자 일제히 이구동성으로 대전이 떠나갈 듯 큰 외침을 발하는 게 아닌가? “백대봉공이 원사의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일...! 하나 훤백이 놀랄 틈도 없이, 유목공은 빙그레 웃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것으로 회의를 마치겠소.” 이어 그는 더 남을 일도 없다는 듯 여섯 당주들과 더불어 훌쩍 걸음을 옮겨 측면의 휘장이 드리워진 통로로 사라졌다. * 그로부터 일다경 후. “좋았어! 등장식 한 번 빵빵하게 치뤘군! 이건 나로서도 기대 이상이야! 으히히히...! 훤백은 황당한 심정으로 도천과 함께 사자전에서 물러나와 나란히 추밀원 쪽으로 걷고 있었다. “이건 정말 사상초유의 일이다! 별호조차 오늘 만든 놈이 대무림맹의 추밀원사가 되었으니 확실히 그럴싸 하잖냐? 역시 도천님의 힘은 대단하단 말씀이야?” 도천은 연신 짓궂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낄낄거렸으나 훤백은 여간 부자유스럽고 찝찝한 기분이 아니었다. “대체 뭐야...? 왜 거짓말을 했어? 이거야 말로 완전히 바보가 된 기분이잖아?” 크게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별원이나 지키고 서류나 대충 정리하면 되는게 원사라고 하더니 이건 전혀...! 천하를 대표하는 봉공들이 축하인사 올리질 않나, 맹주가 망설이는 눈치를 보이질 않나, 솔직히 말해 봐! 추밀원사라는 직책은 대체 어떤 거야?” 하나 도천은 변함없이 재미있다는 듯 낄낄 거렸다. “히히히... 말한 대로지! 별거 아냐, 그냥 마음 편하게 지내기 좋은 감투야. 이름 그대로 원(院) 사(師)인거지! 즉 군사(軍師)와 같은 의미인데, 대충 나랑 비슷한 직위라고 보면 돼. 추밀원의 작전참모 직이니까.” 추밀원의 군사(軍師)...! “어쨌건 기다려봐! 조만간 그 희안치도 않은 쥐 잡는 별호가 천하를 뒤집어 놓게 될 테니까!” “맙소사...!”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이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직분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기실 무림이나 군부(軍部)나 이 하나는 어디건 동일하지만 하나의 수장의 옆에는 반드시 참모라는게 존재하기 마련...! 또한 수장은 일선에서 군을 지휘하고 전투를 치루는 역할을 맡지만 군사란 그 전투에 대한 모든 작전권을 지니는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원주와 원사의 신분은 대동소이한 것으로 거의 별 차이가 없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도천이 맹주 유목공 외의 명령을 아무에게도 듣지 않는다면 훤백 역시 마찬가지! 결국 추밀원이 모든 인물들의 비리를 파헤치고 유사시에 각당의 동원령 등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음을 생각해 보면 이는 최소로 쳐도 당주 이하의 신분이 아니라는 의미인 것이니...! “말도 안돼...! 어쩐지 직책을 두고 다들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더니만...!” 하나 도천은 그래도 변함없이 웃었다. “히히히... 부담가질 것 없어! 어차피 뭘 기대해서 올려 세운 직책은 아니니까. 그냥 마음 편하게 지내라는 의미로 한거야. 직분이 그만하니 맹주 외에는 참견할 놈도 있을 수 없고... 무림맹에서거나 어디서거나 무(武) 자가 들어가는 한 넌 뭐건 마음대로 할 수가 있지. 아무렴 이 도천이 생명의 은인인 널 하찮은 자리에 앉힐 성 싶으냐? 올 때도 말했지만 팍팍 키워줄게!”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훤백은 이러한 도천의 마음 씀이 너무 고마웠다. “이만하면 됐지, 여기에서 더 어떻게 커질 수 있겠어. 형은 정말 통이 너무 큰 것 같아. 형 같은 사람이 맹주가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싶어.” 도천은 히죽이 웃었다. “그런 건 해서 뭐하게. 해봐야 골치만 아프지.” 훤백은 기묘하게 눈을 반짝였다. “명예가 있잖아. 야심 같은 거 없어? 내킨 김에 나서서 형을 맹주로 만들어 줄까?” “히히히... 자식, 무림맹주가 애들 이름인줄 아나? 아무튼 난 부담스러운 일 따윈 딱 질색인 성격이야. 게다가 너무 기분파라서 신중히 뭔가를 이끌어갈 능력도 없어.” 확실히 그런 점은 없지 않았다. 하지만 훤백의 생각은 또 다른 것이었다. “그야 보좌해줄 사람을 따로 두면 되지. 형이 맹주가 된다면 진짜 내가 보좌해 줄 수도 있어.” “자식, 무림인 같은 건 되고 싶지는 않다고 하더니만...!” 도천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쨌건 내 주제엔 지금도 넘쳐. 원래 난 찢어지게 가난한 마부(馬夫)의 아들로 태어났지! 가난이 싫었던 어머니는 다른 사내와 어디론가 달아나버렸고, 아버진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셨어. 그랬던 내가 철기보로 들어오게 된 건 돌아가신 아버님이 말(馬)을 돌보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시 이를 살피게 했던 철기보 무사들 이 불쌍히 여겨 입부시켰던 거야.” 처음 듣는 도천의 출신내력이었다. “그때가 열두 살이었고... 이후부터 난 잔심부름을 하며 지내기 시작했지. 와중에 재질이 맹주의 눈에 들어 정식으로 무림인이 된 거다. 그랬던 내가 전신(戰神)이란 별호를 얻고 추밀원주까지 됐으니 엄청나게 출세를 한거야.” 마부의 아들...! 실로 생각지도 못한 내력이었다. “대단해...!” 훤백은 마음속에 적잖은 감동의 물결이 일었다. 말이 쉬울 뿐, 사실이라면 도천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상상을 불허할 만치 피나는 노력을 했을 것이었다. “부족함 없이 멋대로 자란 내가 부끄러워지는군? 그럼 유목공은 형에게 은인이 되겠네?” 도천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겐 아버님과 같은 분이지. 그분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기꺼이 버릴 수 있어. 토조(土爪)말인데, 이제야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도 맹주께서 가르쳐 주신거야.” 토조! 구문옥들을 만나 한 순간에 거대한 절벽을 다섯 줄기로 찢어놓았을 만큼 무서운 위력을 보여줬던 브라흐만의 것이라 한 괴공! 훤백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게 유목공의 것이었어?” 도천은 히죽이 웃었다. “히히... 그런 셈이지. 젊은 시절 맹주께서는 여행을 즐기셨는데 천축으로 가셨다가 우연히 한 비동(秘洞) 속에서 얻었다고 하셨지. 결국 그걸 가진 사람은 너와 나, 그리고 맹주과 유진학 형님, 이렇게 네 사람만이 가진게 된 셈이지.” 천하웅주의 독문무예! 뜻밖의 말에 훤백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몰랐군. 어쩐지 알려지면 살신지화를 입는다 하더니만...! 그렇다면 나도 생각을 좀 바꿔야겠어. 사실 난 지금까지 유목공에 대해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거든? 하지만 그가 이렇게 형을 생각한다니 앞으로 조금쯤은 존중해봐야겠어.” “히히... 자식, 꽤 인심 써주는 척 하는군!”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어느새 다시 원래대로 철기보의 뒤편에 위치한 추밀원의 숲에 들어서고 있었다. “앗...! 댁에!” 뜻밖에 기다렸다는 듯 저만치에서 황보소미가 달려 나왔다. “어떻게 되었어?” “어떻게 되다니 뭐가?” 훤백이 묻자 황보소미는 뭘 시침 떼느냐는 듯 다구쳤다. “원사직함 말이야! 물을만한 게 그것밖에 더 있어? 유목공은 만나봤어?” 도천이 특유의 싱거운 웃음과 함께 대신 대답했다. “히히... 그야 도천님이 주선한 일인데 문제 있겠어? 앞으로는 깎듯이 이원사님라고 불러.” “정말 됐다고...?” 순간이었다. 황보소미는 얼굴에 실로 커다란 놀라움과 얼떨떨한 기색을 번갈아 떠올리더니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믿기지 않지만 역시 그렇게 되었군? 도천오라버니가 나서는 한 철기보에서는 안 되는 것이 없다던 소문이 사실이었어.” 훤백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런 이야기가 있어?” “흥, 우습지 뭐야. 도천 오라버니 별로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소문에 의하면 유목공이 철기보를 줄 테니 후계를 이어보라고까지 했었다나 봐. 거절했다는 말이 파다하던데 지금 보니 사실 같아.” 철기보...! 훤백은 아연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일이 있었단 거야? 유목공에게는 아드님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분은 어쩌고?” 황보소미는 귀엽게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렇긴 하지만 그는 워낙 무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소문이라서... 때문에 유목공도 늘 고민을 한다지? 관심 없는 사람에게 철기보를 물려줘봐야 가업이 유지될 리가 없고 믿음이 가는 사람은 물려주려 해도 거절이나 하고...!” 천비도룡(千臂屠龍) 유진학(柳眞學)에 관한 도천의 이야기가 사실이었던 것 같았다. “믿기지 않는군...! 대체 무슨 그런 일이...! 도천형은 워낙 성격이 소탈해서 사양했다고 치고, 유목공의 아드님도 이해가 안가는 사람인데?” 황보소미도 계속 쫑알댔다. “둘 다 세상에서 가장 바보가 아니라면 가장 현명한 사람일거야. 물론 내 생각엔 바보에 더 가깝지만... 어쨌건 댁에가 추밀원사가 된 것도 이런 이유였을 걸?” 잠자코 걷던 도천이 웃었다. “히히히... 사람을 옆에다 세워놓고 올렸다 내렸다 아예 바보로 만드는구먼. 하지만 소문이란 것은 결코 믿을 게 못돼.” 무슨 다른 의미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더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또 다른 음성이 들려오며 추밀원 쪽으로부터 하나의 인영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형님!” 훤칠한 키에 빙기옥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백의청년. 바로 옥수검 황보선이었다. 도천은 반가운 기색을 떠올렸다. “와 있었군. 대충 돌아봤어?” 황보선은 앞까지 다가와 가볍게 포권을 취해보였다. “흔적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필경 날짜가 내달이거나 계획이 변경되지 않았나 싶더군요.” 도천은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꼬릴 잡긴 틀린 것 같군. 할 수 없지. 각 방파에 경계령이 내려질 테니 이제부터는 그냥 추밀원 선에서 암암리에 행동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군림대회에 출전해야 할 테니 너도 무공수련에 전념하고.” “알겠습니다.” 이어 황보선은 훤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네에겐 별도로 축하를 해야겠어. 얼핏 들었지만 원사가 되었다지?” 훤백은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어쩌다보니 이상하게... 형님께서 많은 가르침 주십시오.” “부럽군.” 황보선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말뿐 아니라 확실히 그의 얼굴에는 적지 않은 부러운 빛이 머물고 있었다. 도천은 큰 소리로 안으로 들어가기를 재촉했다. “죽어라 달려온 보람도 없고, 한바탕 혼천소마들과 사투가 벌어지나 했더니만 그것도 아니고... 어쨌건 어서 들어가자. 축하주부터 한 잔 해야지? 천하에 초유의 대명을 떨칠 추밀원사님께서 탄생하셨잖아.” 초유의 대명...! 부지불식간에 벼락감투를 쓰게 된 훤백으로서는 실로 민망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도천의 말은 확실히 그릇된 게 아니었다. 업적이야 있건 말건, 또한 능력이야 어떻게 되었건, 무림맹의 추밀원 원사가 되었다 함은 그 하나만으로도 무림에서 대명을 얻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한갓 무명의 소년에서 일약 추밀원사. 소문이 퍼져나가면 그야말로 무림이 통째로 들썩일 만치 엉뚱한 등장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 하지만 그것은 실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로 이날 밤! 이러한 일마저 흔적 없이 묻혀버릴 만큼 가공할만한 하나의 사건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으니...! 장소는 태화성에서 동쪽으로 약 삼백여 리가 떨어진 건원성(建元城)의 중심부, 부용원(芙蓉院)이라 불리우는 기원(妓院)의 한 내채였다. 시각은 술시(戌時) 반 정도. 주객들로 한창 붐비고 시끄러워야 할 무렵이었다. 하지만 유독 부용원만은 전체에 완전히 불이 꺼져있었고, 문까지 굳게 걸어 잠군 채 생쥐 하나 얼씬거리지 않는 질식할 듯한 상태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내채 역시 불이 꺼져있는 것은 같았으나,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에는 칠십여 명의 각양각색의 차림을 한 남녀들이 어둠 속에 빙 둘러앉아 괴수처럼 퍼렇게 눈을 번쩍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모습이나 행색은 모두 달랐지만 대체 이 넓은 무림, 어디에서 이렇게 대단한 자들이 모여들었는지 의구심이 갈 정도로 하나같이 기도가 출중했다. 특히 중앙에서 뒷짐을 지고 홀로 우뚝 서 있는 백의장삼인의 기도는 더욱 더 그러했다. 천하 어디에 이같이 대단한 기도를 지닌 인물이 존재해 있었던지...! 그는 일신에 눈같이 흰 백의장삼을 걸치고 얼굴 역시 흰 면사로 가리고 있었는데, 눈을 깜박일 때마다 동공에서는 연신 도깨비불을 연상하리만큼 섬뜩하고도 시퍼런 신광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분명 이 자리에 모인 어느 누구보다 강력한 무공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을 추측케 하는 것은 오로지 눈빛 뿐, 그밖에 그의 몸에서는 다른 이들에게서 풍겨지는 잠력과 같은 무공의 흔적 따위는 실올만치도 발견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전신에는 선정에 든 승려와 같은 고요함이 머물러 흡사 바람조차 숨을 죽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으니...! 완전한 정(靜)! 미루어 백의인은 이미 유목공이나 마찬가지로 거의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른 무공을 지녔다고 봐야 하는 것이었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천하를 다 뒤져야 이만한 무공을 지닌 인물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이들은 반 시진 가량이 흘렀음에도 일절 입을 열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해시(亥時). 시간이 여기에 이르자 침묵하고 있던 백의인이 마침내 혼을 빼놓고 있는 듯 무심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끝까지 관(冠)아우는 안 오려는 모양이군.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거나 아닌지...!” “…….” “마냥 기다릴 수 없으니 우리끼리 먼저 시작하도록 하지. 우선 미흡한 형의 부름에 응해 달려와 준 아우들에게 크게 감사하는 마음일세. 모이라한 이유는 사전에 언급했듯 무림맹과의 한판 승부를 벌이기 위해서이고.” 무림맹과 한 판 승부! 그야말로 무림 천하가 한꺼번에 경악해 마지않을 만한 발언...! 하지만 백의인은 눈 한 번 깜박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아우들도 절감하고 있겠지만... 사실 우리 혼천소마는 너무 오랫동안 그들에게 쫓겨 왔네. 까닭이야 자유분방하게 지내온 우리에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놈들도 너무 심했어. 쥐도 도망갈 자리를 봐서 쫓으라고 했는데, 지난 이십 년 내내 우리에게 내린 척살령(刺殺令)을 철회하지 않아 설 자리조차 없게 만들었고, 그로인해 일백에 달했던 형제들이 칠십여 밖에 남지 않을 만큼 곤욕을 치루었던 것도 사실이니까.” 실로 놀랄만한 말이었다. 어둠 속의 인물들이 모두 현 무림 최대의 사인(邪人)들로 불리우는 혼천소마...! 하다면 이들은 역시 첩지대로 집결을 한 것이고, 말을 하는 백의인은 이들의 맏형 격이자 무림 최대의 흉수로 일컬어지는 청사(靑舍)의 만가무불살(萬家無不殺) 서백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이들이 모인 날짜와 장소였다. 첩지에 기재된 바에 의하면 이들이 모일 날짜는 구월 초이레! 그러나 정작 회합이 시작된 것은 바로 오늘인 구월 열이레였고, 장소 역시 태화성이 아닌 건원성이었던 것인데...! 이쯤 역시 첩지는 크게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훤백이 말했듯 속았다고 봐야만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태화성이나 건원성이나 모두 무림맹에서 지척인 것은 한 가지! 서백은 계속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해서 일렀듯... 이 우둔한 형은 계속 이대로 무림맹에 쫓기기만 하느니 차라리 그들과 한판 승부를 벌이는 게 어떨까 싶어서 아우들을 청한 걸세. 한즉 앞으로의 거취를 한 번 상의해 보세나. 아우들의 생각으로는 어찌했으면 좋겠나?”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인물들 중 왼쪽 뺨에 흡사 시뻘건 지렁이가 꿈틀대듯 보기조차 섬뜩한 검흔이 있는 사십 중반의 사내가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소제 살무흔(殺無痕) 이소량(李小良)... 먼저 한 말씀 여쭙겠소. 맏형의 뜻은 충분히 알겠는바... 확실히 무림맹과 유목공은 이가 갈리는 존재요. 무림맹이 선 이래 우린 이십 년을 한결같이 숨어 지내다시피 살아온 처지이니 싸우자는 데는 이견이 없소. 하나 의문인 것은 그게 왜 하필 지금인 것이오? 이런 자리라면 보다 일찍 마련되었어야 할 것인데, 지금에서야 무림맹과 싸움을 벌이자는 데에 어떤 이유라도 있소?” 서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질문을 해줬네. 또한 매우 합당한 질문이기도 하고...! 하나 우린 놈들에게 쫓기면서도 내내 개별적으로 행동을 해오지 않았었던가? 연락을 취하기 시작한 것도 고작 일년여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전엔 계획을 세우고 말고 할 것도 없었을 뿐더러... 특히 때가 좋지 않았네. 철기보나 무림맹의 기세가 워낙 강성해서 맞서고 싶어도 대책이라 할만한 게 없었던 것이지. 하지만 작금에 들어 마침내 저 원수 같은 유목이 은퇴를 발표했고... 이로 인해 큰 혼란이 예고되는 터라 우리가 덕을 볼 기회는 지금이 최적이라 여겨졌기 때문일세.” 살무흔 이소량, 그는 연신 음산한 안광을 번쩍이며 입을 열었다. “한들 너무 늦은 감이 있지 않소? 분명 천하는 혼란의 조짐이지만 그러나 우리와는 그다지 관계가 없는 상태이고, 유목 역시 은퇴를 천명했으니 결국 무림에서 발을 빼게 될 것. 그렇게 되면 무림맹이 해산될 수도 있고, 우리에게 내려진 척살령도 자연히 없어질게 아니겠소? 이런 상황에 놈들을 상대해 무슨 이득이 있겠냐는 것이오.” 서백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네. 그러나 내 판단으로는 결코 무림맹은 해산되지가 않아. 그것을 뒷받침하자면 은퇴와 더불어 퍼져나가는 또 다른 소문인걸세. 요즘 항간에는 시월 군림대회에서 백대봉공이 나올 경우... 그 중 걸출한 인물 몇을 뽑아 미리 무림맹의 일을 맡게 해보자는 말이 떠돌고 있네. 어차피 백대 방파가 최대의 명문인 만큼 차기 후계도 그중에서 나올게 당연하다는 것이지. 이후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을 뽑아 다음 맹주직을 잇게 하자고 했는데, 각 방파에서는 이를 환영하고 있지. 따라서 무림맹은 존속되기가 십상인데 우리에게 내려진 척살령이 철회될 것 같은가?” 순간 이소량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런 경우라면 자신들은 여전히 발붙일 땅이 없어질게 확실했던 것이다. 쐐기라도 박듯 서백은 계속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특히 무림맹이 존속될게 분명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유목의 은퇴 후에 예고되는 혼란 때문일세. 소위 사마외도라 일컫는 친구들이 들고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따라서 몇몇 힘 있는 자들이 맹주직을 차지하려고 눈꼴 시린 짓을 한다 치더라도... 보다 안정을 원하는 자들이 훨씬 많은 만큼 무림맹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게 내 지론일세.” 상당히 현실에 근접된 견해였다. “특히 우형이 더 우려스러운 것은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에게 후계를 물려주자는 내용 속에 있네. 알다시피 현 무림은 안정세로... 차기에 오를 만큼 큰 공을 세울만한 건수는 그리 흔치가 않아. 결국 차기를 노리는 자들은 저마다 공을 세우고자 혈안이 될 터인데, 혹시 그 표적이 우리가 되지 않으리란 법이 있나? 적어도 우리 혼천소마를 쓸어낼 정도의 공을 세운다면 그건 분명 차기를 이을만한 큰 공일수도 있지 않은가?” “이런...!” “설마 그런 미친...?” 분분히 소란이 터져 나왔다. 확실히 서백의 말은 하나하나가 모두 정곡을 찌르는 것이고 일이 정말 그렇게 된다면 혼천소마로서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태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서백은 서릿발 같은 냉광을 쏟아내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대책을 세워야 옳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일세.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으니까.” “그럼 맏형의 의견은...? 기회가 썩 좋다고 하셨는데 무림맹과 맞서기에 좋은 방법이라도 있소?” “그들의 취약점을 노리는 걸세. 이야기 했지만 대부분의 무림인들이 원하는 것은 안정된 세월이지. 하지만 힘 넘치는 몇몇 방파들 중에는 은근히 이를 반대하는 경향도 없지 않는데, 힘이 넘치는 만큼 영지를 더욱 넓히려 하는 것이지. 그러자면 무림맹 따윈 그들에게 한갓 걸림돌에 지나지가 않아. 또한 유목에게는 보이지 않는 적이 많네. 그는 혈해(血海) 위에 현 무림맹을 세웠어. 수많은 방파들을 괴멸시키고 일어선 만큼 당시에 잠적한 후인들이 계속 유목에 대해 칼을 갈고 있고 기회만 기다리는 것일세. 그들과 더불어 보조를 맞추면 분명 승산이 있는 것이지.” 둘러앉은 인물 중 실로 뜻밖의 사람이 하나 일어섰다. 눈같이 흰 백의궁장을 입고 손에 큰 부채를 쥔 여인! 바로 진광(晋光)과 함께 사라졌던 구문옥(九門玉)이었다. “오라버니의 말씀 충분히 알 것 같아요. 개요(槪要)는 이것으로 된 것 같고, 그럼 그들을 어떻게 등에 업으실 건가요?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면 이미 보조를 맞출 자들과 모종의 이야기가 있으셨던 것 같은데 혹시 그러신가요?” 백의인의 눈에 언뜻 기묘한 안광이 스쳐갔다. 그러나 그는 곧 그러한 눈빛을 지우며 다시 원래의 서릿발 같은 신광을 발했다. “대단한 직관력이군. 첩지를 돌리기 전에 나는 이미 꽤 많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좀 했었지. 그들의 힘은 수효만도 십만(十萬)이 넘어. 무림맹을 상대하기에 손색없네.” 십만의 힘! 실로 놀라운 말이었다. 무력 자체는 고사한다 치더라도 이만한 수효의 인원이라면 실로 한 나라를 상대할만한 것이니 결코 쉽게 생각할 수가 없지 않겠는가? “오...!” 주위에는 다시 분분히 웅성거림이 일었고, 구문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누구인가는 말씀해 주시지 않겠죠?” 백의인의 냉광이 흐르는 눈에 가벼운 웃음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지금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것은 다만 충분한 승산이 있단 거야. 해서 아우들도 청한 것이고. 이로서 세상이 바뀌게 되면 우리 혼천소마들도 제법 살만해질 걸세.” 서백은 무심했던 태도에서 벗어나 힘 있는 어조로 모두에게 물었다. “자, 그럼 남은 것은 이제 찬반뿐이군. 다시 말해 나는 오늘 이후 무림맹을 칠 것이고, 설령 아우들이 동참하지 않는다 해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칠걸세. 다들 어찌할 텐가? 지금까지는 따로 놀았지만 십만과 더불어 우리의 뭉쳐진 힘을 한 번 시험해보지 않겠나?” 혼천소마의 뭉쳐진 힘! 살무흔 이소량이 시뻘건 칼자국을 꿈틀거리며 가장 먼저 일어섰다. “재미있구려. 쫓기긴 했지만 개별적으론 일개 방파 따윈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요. 뭉쳐졌을 때는 그게 어느 정도인지 소제 꼭 한 번 보고 싶소. 어차피 무림맹이 존속하는 이상 계속 쫓겨야 할 판이니 이판사판 아니겠소?” 그러자 나머지 인물들도 하나 둘씩 음침한 웃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흐흐흐... 그렇다면야 당연히 해야지. 기실 우리가 합심하면 무서울 게 없을 터인데 어찌 이렇게 좋은 일을 하지 않겠소?” “해봅시다. 다른 것은 다 고사하고라도 서백형이 어디 손해 볼 싸움을 하겠소? 소제는 찬성이오.” 결정! 그들은 마침내 모두 서백의 말에 찬성을 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자 일어선 인물들 중 낯익은 인물 하나가 다소 망설이는 듯한 기색으로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팔척의 거대한 체구에 용맹하기 그지없는 인상을 지녔지만 어딘가 우직해 보이는 얼굴...! 호면천왕 진광이었다. “다들 할 생각이라니 동참해야겠지만... 개전(開戰)은 언제요? 아무리 우리가 세다 해도 천하를 상대로 싸울 판국인데 방법은?” 변함없이 어딘가 어수룩해 보이는 말투, 서백의 눈에 한줄기 호감어린 웃음이 걸렸다. “진광 아우로군. 자네라면 우리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데... 개전은 군림대회가 끝날 즈음으로 잡고 있네. 방법은 그때 가서 제시하도록 하지.” 길어야 두 달이면 무림 전역이 피비린내 나는 살겁에 휩싸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알겠소. 맏형께서 현명하니 따를 수밖에... 그때까지 우리들은 이대로 대기하는 것이오?” “불편하더라도 그렇게 해줬으면 싶네. 바깥출입을 못하는 게 좀 갑갑하겠지만 여기도 꽤 지낼만할 걸세. 넉넉잡고 두 달만 참고 지내주게나.” 진광과 소마들은 별다른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십 년을 쫓겼는데 까짓 두 달 정도야! 즐겁게 기다리겠소.” “의미가 깊은 날일세. 술 삼배는 필히 있어야할 터이니 그럼 이야기라도 주고받게.” 그러자 서백은 두어번 턱을 주억여 보인 후 곧 바깥으로 나갔다. 말대로라면 술상이라도 준비하고자 나가는 것 같은 자연스런 행동이라 이런 그의 모습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 뜻밖에도... 실내를 나온 그가 향한 곳은 후원의 곡간이었다. 그곳에는 또 하나의 백의장삼에 얼굴에 복면을 뒤집어 쓴 인물이 서 있었다. 칠 척의 후리후리한 키에 서백에 비해 오히려 한 수 위의 기도를 지닌 듯 느껴지는...! 그것은 실로 이상한 일이었다. 기실 서백이라면 현 무림 최대의 흉살들인 혼천소마의 수뇌격인 인물로서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극강의 무공을 소지한 초고수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 백의장삼인은 오히려 서백이 왜소해 보일 정도로 가공할 기도를 보이고 있었으니...! 중원을 다 뒤져봐야 고작 한둘이나 만날까 말까한 초유의 인물들이 이렇게 무더기로 모습을 드러내다니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삼인은 누구라도 변성(變聲)시켰음을 알아차릴 만큼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소득이 좀 있느냐?” 수하를 대하는 말투였지만, 그러나 당연하다는 듯 서백은 조심스럽게 백삼인에게 포권부터 취해보였다. “그렇습니다. 이르신 대로 설득했더니 역시 모두 찬성을 한 터... 개전(開戰)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끌어냈습니다만...!” 서백만한 인물까지 자신을 낮춘 인물...! 백의장삼인은 섬전같이 눈빛을 쏘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 하나 일에 차질이 하나 생겼다.” 서백의 눈에 크게 흠칫하는 기색을 떠올랐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진행된 것을 보면 전체적으로 무난한 느낌이온데...?” 백삼인은 간략히 잘라서 대답했다. “관구가 도천에게 사로잡혀 버렸다. 그로인해 네가 보낸 첩지가 모두에게 알려지고 벌써부터 회합의 전모가 드러나 버린 것이다. 이게 사자전에서 거론되었다.” 깜짝...! 그야말로 실로 경악해 마지않을 일이었다. 기실 사자전에서의 일이라면 지난 오후에 있었던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외부에 알려질 수 있었단 말인가? 특히 사자전의 회의라면 모든 사안들이 극비에 넘겨지는 것이라 한자리에 있었던 백대봉공 외, 같은 무림맹 내의 인물이라도 결코 쉽게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백삼인은 회의에서 거론된 일을 이렇게 언급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백삼인은 필경 회의에 참석한 인물 중 하나이거나 최소한 그들과 연관이 있는 인물로 봐야 하는 것이었는데...! “어쩐지 그가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했더니만...!” 서백의 음색이 다소 굳어지는 듯싶었다. “하나 상관없는 일인 것입니다. 어차피 첩지야 누구건 보라고 일부로 서명까지 해서 돌린 것이고, 다른 변고가 없음을 보면 관구가 의리를 지켰다는 것인즉, 오히려 의도대로 된 것이지요.” “…….” “혹시라도 벌어질지 모를 이런 불상사를 대비해 한 발 앞 서 언질을 해두었습니다. 날짜가 첩지에 기재되면 진짜는 그로부터 열흘 후로, 장소는 첩지에 적힌 성에서 가장 가까운 첫 번째 성(城) 앞이라고. 따라서 문제될 일은 전혀 없다고 봅니다.” 또한 놀랍기 그지없는 일...! 하다면 이는 훤백이 예측했던 상황이 십중팔구 적중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백삼인은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물론 그런 의미로는 차질이라 할 수 없지. 하지만 문제는 무림맹 쪽에서 너무 빨리 일을 알아버렸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천하전역에 곧 개별경계가 시작될 예정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서백은 담담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상관이 없습니다. 개전(開戰)과 싸움의 방식은 한둘이 아닌 터라...! 치밀하게 포석을 깔아 두고 있습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좋을 것입니다. 시작하면 바로 무림맹은 뒤집어질 터이오니...!” 백삼인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 지는가 싶었다.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믿고 일을 맡긴 것인즉 신중을 기하도록.” 같은 순간이었다. 장내에는 또 한 번 실로 경악스럽기 그지없는 일이 벌어졌다. 말과 함께 백삼인의 어깨가 가볍게 한 번 흔들, 하는가 싶었는데, 찰나 그의 모습이 언제 있기라도 했냐는 듯 연기처럼 퍽! 자취를 감춰버렸던 것이니...! 아무리 무림이 넓다 해도 이 정도의 신법을 지닌 인물이 몇이나 될 것인가? 변방의 일개 기원에 불과한 부용원(芙蓉院)! 기억해 둬야 할 곳이었다. 이곳에서 감도는 심상치 않은 냄새는 분명 코를 찌르는 물컹한 피 비린내! 이십여 년 간의 평화를 깨뜨릴 무림대란의 조짐인게 확실한 것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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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독했어요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요
감사합니다.
즐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