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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색 기록은 고구려 자체 기록(추정도 포함)이고 검정색 기록은 중국 측 기록이고 파랑색 기록은 백제와 신라의 기록으로 추정되고 초록색 기록은 일본 측 기록입니다. 이견이 있을 수 있는 부분을 거론하자면 412년을 장수태왕의 원년 기년을 조정하였으며, 백제정벌전은 일본서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에서 475년으로 기록된 반면 신라 본기에는 474년으로 기록됐는데, 전자가 타당하다고 생각되기에 이를 따랐고 따라서 이와 연쇄적인 자비 마립간의 명활성 이거 기록을 476년으로 비정하였습니다. 보통 464년으로 비정되는 일본서기 웅략 8년조의 기록은 정황상 454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되어 454년으로 비정했으며, 김현구 선생의 설을 따라 임나일본부를 백제 사령부로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고구려와 북위의 혼담시기들은 앞서 쓴 글을 근거로 했음을 알려드리며 더 추가하거나 수정할 기록이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원년(AD 412) 장수왕이 왕위에 올랐다. 장수왕(長壽王)의 이름은 거련(巨連)<또는 연(璉)이라고도 한다.> 이고 광개토왕의 맏아들이다. 신체가 크고 기개가 호탕하고 뛰어났다. 광개토왕이 [재위] 18년에 태자로 삼았고, 22년에 왕이 죽자 [태자가]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2년(413) 왕이 장사(長史) 고익(高翼)을 진(晉)에 보내 표(表)를 올리고, 붉은 무늬 있는 흰 말을 바쳤다. 안제(安帝)가 왕을 사지절(使持節) 도독영주제군사(都督營州諸軍事) 고구려왕(高句麗王) 낙랑군공(樂浪郡公)으로 봉하였다. 가을 8월에 이상한 새가 왕궁에 모여들었다. 겨울 10월에 왕은 사천(蛇川)의 들로 사냥 나가서 흰 노루를 잡았다. 12월에 서울에 눈이 다섯 자나 내렸다.
3년(414) 5월 연왕(燕王) 풍발(馮跋)이 예전에 우리나라로 피난 왔었던 동생 풍비(馮丕)를 귀국시켜줄 것을 요청하자, 왕이 허락하여 풍비를 연(燕)에 돌려보냈다. 9월 29일 왕이 선왕의 훈적비를 세웠다.
6년(417) 5월 신라(新羅) 마립간(麻立干) 실성(實聖)이 우리나라에서 볼모로 지낼 때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을 불러서 그에게 비밀히 알리기를 눌지(訥祗)를 보거든 죽이라 하고 우리나라의 군사들을 불러들여 드디어 눌지로 하여금 가서 중로(中路)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맞게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은 눌지의 용모와 기상이 명랑하고 단아하여 군자의 풍이 있음을 보고 눌지에게 이르길,
"그대 나라의 임금이 나로 하여금 그대를 해치라 하였는데, 지금 그대를 보니 차마 해칠 수 없다."고 하고 무기를 돌려 실성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삼은 다음 돌아왔다.
7년(418) 여름 5월에 나라의 동쪽에 홍수가 나서, 왕은 사신을 보내 위문하였다. 신라(新羅) 마립간(麻立干) 눌지(訥祗)가 사신 박제상(朴堤上)을 보내어 빙례(聘禮)를 닦았다. 박제상이 왕에게 청하길,
"신(臣)이 듣건대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도(道)는 성신(誠信)뿐이라고 합니다. 만일 볼모를 서로 보낸다면 오패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 참으로 말세의 일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임금의 사랑하는 아우가 여기에 있은 지 거의 10년이나 되니, 우리 임금은 척령(鶺鴒)이 들판에 있는 뜻으로서, 두고두고 생각하여 마지않습니다. 만일 대왕께서 은혜로 돌려보내 주신다면 대왕께는 구우(九牛)의 일모(一毛)가 떨어지는 정도와 같아서 손해될 바가 없으며, 우리 임금은 대왕을 덕(德)으로 생각함이 한량이 없겠습니다. 왕께서는 잘 생각하소서."라니, 왕이 옳다고 하며 함께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 백제(百濟) 왕 전지(腆支)가 왜국(倭國)에 사신을 보내어 백면(白綿) 10필을 보냈는데, 백제의 사신이 왜왕에게 우리나라와 신라가 왜국을 칠 것이라고 참소했다. 이에 왜가 신라 국경 밖에서 순회 정찰했는데, 우리나라가 마침 이를 발견하고 왜의 순라군을 모두 잡아 죽였다.
9년(420) 7월에 송(宋)의 고조(高祖)가 왕위에 오른 뒤 왕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말하기를,
“사지절(使持節) 도독영주제군사(都督營州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고구려왕(高句驪王) 낙랑공(樂浪公) 연(璉: 장수왕)과 사지절(使持節) 독백제제군사(督百濟諸軍事) 진동장군(鎭東將軍) 백제왕(百濟王) 영(映: 전지왕)은 함께 해외에 있으면서 바른 도리를 지키어 멀리서 공물(貢物)을 보내오고 있소. 이제 [宋나라의] 개국(開國)을 알리어 기쁨을 나누어 가지려 하오. 연(璉)은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으로, 영(映)은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으로 삼고, 지절(持節)·도독(都督)·왕(王)·공(公)의 칭호는 그대로 인정하겠소.”
라고 하였다.
11년(422)에 송(宋)의 고조(高祖)가 왕에게 산기상시(散騎常侍)와 독평주제군사(督平州諸軍事)라는 벼슬을 더해 주었다.
12년(423) 봄 2월에 신라(新羅)가 사신을 보내 수빙(修聘)하였다. 왕은 그들을 특별히 후하게 위로하였다. 가을 9월에 크게 풍년이 들었다. 왕은 왕궁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13년(424)에 3월 을사에 왕이 장사(長史) 마루(馬婁) 등을 송(宋)의 왕궁으로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이에 [宋의 황제는] 사신을 파견하여 그 수고를 치사(致謝)하였다.
“황제는 고하오. 사지절(使持節) 산기상시(散騎常侍) 도독영·평이주제군사(都督營·平二州諸軍事)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고구려왕(高句驪王) 낙랑공(樂浪公) 그대는 왕위를 동방(東方)에서 이어 선인(先人)의 공적을 계승하였소. 순종하는 마음은 이미 뚜렷하고 충성 또한 드러나 요하(遼河)를 넘고 바다를 건너 공물(貢物)을 본조(本朝)에 바쳤소. 짐(朕)이 부덕한 몸으로 분에 넘치게 대통(大統)을 이어 받아 길이 선인(先人)의 자취를 생각함에 이르러서는 그 끼친 은택에 깊이 감사하는 바이오. 지금 알자(謁者) 주소백(朱邵伯)과 부알자(副謁者) 왕소자(王邵子) 등을 보내어 짐의 뜻을 전하고 수고로움을 치사(致謝)하오. 그대는 어진 정치를 힘쓰고 닦아 그 공을 길이 융성케 하고 王命을 본받아 짐의 뜻에 맞게 하오.”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15년(426)에 왕이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고, 국호를 고려(高麗)로 바꾸었다.
22년(433) 2월에 백제 왕 비유가 신라 마립간 눌지에게 좋은 말 두 필을 보내고 9월에 또 흰 매를 보냈다.
24년(435) 여름 6월에 왕이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또 그 나라의 휘(諱)를 [알려줄 것을] 청하였다. 세조(世祖)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서 황실의 계보와 휘를 적어서 주게 하고,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를 보내, 왕을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郞將)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려왕(高麗王)으로 삼았다. 가을에 왕이 위(魏)에 사신을 보내 사은(謝恩)하였다.
겨울 12월에 위(魏)가 연(燕)을 자주 치니, 연(燕)이 날로 위태롭고 오그라들어서 위아래 사람들이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태상(太常) 양민(楊岷)이 다시 연왕(燕王)에게 속히 태자(太子: 풍왕인)를 파견하여 위에 입시하게 하라고 권고하였다. 이에 연왕(燕王) 풍홍(馮弘)이
“내가 차마 아직 이런 짓을 못하겠다. 만약 사태가 급하면 동쪽으로 고려에 의지하다가 후에 일어나기를 도모하겠다.”고 하였다. 양민이 말하였다.
"위는 천하를 들어서 한 귀퉁이를 치는데 이기지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고려는 신의가 없으니 처음에는 비록 서로 친하다고 하나 끝내는 변할까 두렵습니다."
연왕이 듣지 않고 상서(尙書) 양이(陽伊)를 몰래 보내 우리에게 자신들을 맞이해 줄 것을 청하였다.
25년(436) 2월 6일 연왕(燕王)이 사신을 위(魏)에 보내 공물을 바치면서 시자(侍子)를 보내겠다고 청하였으나, 위(魏) 왕이 허락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토벌하려 하였으며, 2월 10일에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와 [그 뜻을] 통고하였다. 3월 20일에 위의 평동(平東) 장군 아청(娥淸)과 안서(安西)장군 고필(古弼)이 정예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연을 정벌하는데, 평주(平州) 자사 탁발영(拓跋嬰)이 요서(遼西)의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과 화합하였다. 여름 4월에 위(魏)가 연의 백랑성(白狼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이에 왕이 장수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을 보내 2만 명을 거느리고 양이를 따라 화룡(和龍)으로 가서 연왕(燕王)을 맞이하였다. 갈로와 맹광이 임천(臨川)에 주둔하였다. 연의 상서령(尙書令) 곽생(郭生)이 백성들이 우리나라로 옮겨가기를 꺼리는 것을 이용하여 성문을 열어서 위의 군대를 받아들이려 하였지만, 위인(魏人)들이 그것을 의심하여 들어가지 않았다.
곽생이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서 연왕을 공격하였으나, 우리의 군대가 연왕과 함께 동문으로 들어와서 곽생과 궁궐 아래에서 싸웠는데, 곽생이 우리군사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갈로와 맹광이 성에 들어오자, 군사들에게 명하여 헤진 옷을 벗게 하고, 연(燕)의 무기 창고에서 예리한 무기를 가져다가 나누어 주었으며, 성 안을 많이 약탈하였다. 5월 5일에 연왕(燕王)과 용성(龍城)에 거주하는 가호(家戶)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옮기면서 궁전을 불태웠는데, 불은 10일이 되도록 꺼지지 않았다. 부인들에게는 갑옷을 입혀 가운데 있게 하고, 양이 등은 정예군을 통솔하며 바깥에 서게 하였다. 그리고 갈로와 맹광은 기병을 거느리고 대열의 맨 뒤에 서서 방궤(方軌)로 나아갔는데, 대열의 앞뒤 사이의 거리가 80여 리나 되었다.
고필의 부장인 고구자(高苟子)가 기병을 거느리고 우리를 추격하려고 하였지만, 고필이 술에 취하여 칼을 뽑아서 그를 제지하니, 그러므로 우리는 도망칠 수 있었다. 위의 주군이 소식을 듣고 화가 나서 함거(檻車)로 고필과 아청을 불러들였고, 평성(平城)에 도착하자, 모두 내쳐져서 문지기로 삼았다.
5월 8일에 위(魏) 왕이 산기상시(散騎常侍) 봉발(封撥)을 보내 연왕을 보내라고 하였다. 6월에 송(宋)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9월 2일 왕은 연왕을 위에 보내지 않고 사신을 위에 보내 표(表)를 올려 일컬었다.
"마땅히 풍홍과 함께 왕화를 받들겠습니다." 라고 핑계[稱]하였다. 위(魏) 왕이 우리가 조서를 어겼다고 해서 우리를 공격할 것을 의논하여, 장차 농우(隴右)의 기병을 보내려고 하였는데, 유결(劉絜)이 말했다.
"진농(秦隴) 사람들은 새로 편입된 백성이니, 마땅히 우대하여 세금과 요역을 면제해주어야 하며, 그들이 풍요롭고 충실해지는 것을 기다린 후에 그들을 이용하십시오."
낙평왕(樂平王) 탁발비(丕) 등이 말하였다.
"화룡이 새로이 평정되었으니, 의당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넓히고 닦아서 군대의 물자를 풍요롭게 한 후에 나아가 빼앗는다면, 고려는 한 번에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위의 주군이 마침내 정벌을 중지하였다.
26년(437)봄 2월에 사신을 위(魏)에 보내 조공하였다.
27년(438) 봄 3월 연왕(燕王)을 죽였다. 이에 앞서 연왕(燕王) [풍]홍이 요동으로 왔을 때 왕이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용성왕(龍城王) 풍군(馮君)이 벌판으로 행차하느라고 군사와 말이 얼마나 피곤하겠느냐.”고 말하였다. [풍]홍은 부끄럽고 화가 나서 천자(制)를 칭하면서 사신을 꾸짖었다. 왕은 그를 평곽(平郭)에 두었다가 곧 북풍(北豐)으로 옮겼다. [풍]홍이 평소 우리나라를 업신여겼는데, 여전히 정형(政刑)과 상벌(賞罰)을 마치 제 나라에서 하듯이 하였으므로, 왕은 그의 시자를 빼앗아 버리고 그 태자 왕인(王仁)을 잡아와 인질로 삼았다. [풍]홍이 이것을 원망해서 송(宋)에 사신을 보내고 표(表)를 올려 맞이해 줄 것을 구하였다. 송(宋) 태조(太祖)가 사신 왕백구(王白駒) 등을 보내 그를 맞이하고, 아울러 우리에게 명령하여 [풍홍에게] 노자(路資)를 마련해 주어서 보내라고 하였다. 왕은 [풍]홍이 남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장수 손수(孫漱)와 고구(高仇) 등을 보내 [풍]홍을 북풍에서 죽이고, 아울러 그 자손 10여 명도 죽였다. [왕]백구 등은 [자신이] 거느리고 온 군사 7천여 명을 이끌고 손수와 고구를 습격하여, 고구를 죽이고 손수를 사로잡았다. 8월에 왕은 [왕]백구 등이 제멋대로 사람을 죽였으므로 사신을 시켜 그를 잡아 [송나라로] 보내었다. 태조는 [고구려가] 멀리 있는 나라이므로 그 뜻을 거스르지 않기 위하여, [왕]백구 등을 감옥에 가두었다가 얼마 후에 풀어주었다.
28년(439) 겨울 11월에 사신을 위(魏)에 보내 조공하였다. 12월에 사신을 위(魏)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2월에 송(宋)이 북(北: 魏)쪽을 토벌하고자 왕에게 말을 바치라 조서(詔書)를 내리자, 왕이 말 8백 필을 바쳤다.
30년(441) 송(宋)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32년(443) 송(宋)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38년(449) 5월에 우리 태왕께서 신라 매금(寐錦)과 더불어 형제처럼 상하(上下)가 서로 화합하여 하늘을 지키고자 하여 동쪽으로 왔다. 태왕께서 신라 매금에게 의복을 하사하셨다. 12월 23일 갑인 날에 동이(東夷) 매금의 상하와 전부(前部) 대사자(大使者) 다우환노(多?桓奴)와 (主簿) 귀도(貴道)가 근처에서 3백 명을 모았다.
39년(450) 7월에 우리 변경의 장수가 실직(悉直)의 들에서 사냥을 하는데, 신라의 하슬라(何瑟羅) 성주(城主) 삼직(三直)이 군사를 내어 그를 기습해서 죽였다. 왕이 노하여 신라에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내가 대왕과 우호를 닦아 매우 즐거워하였는데, 지금 군사를 내어 우리의 변장을 죽이니 이 무슨 까닭인가?'하고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노하였다. 이에 신라(新羅) 마립간(麻立干) 눌지(訥祗)가 사신을 보내 공손히 자신을 낮추어 사죄하였으므로 군사를 물리었다.
40년(451) 태왕이 연호(年號)를 연수(延壽)로 개원(改元)했다. 3월 태왕이 교(敎)하여 은(銀) 세근 여섯 량으로 뚜껑을 만들었다. 10월 송(宋)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42년(453) 11월 송(宋)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43년(454) 가을 7월에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날랜 당주(幢主) 100명을 보내어 왜(倭)로부터 신라를 지켜 주었다. 얼마 뒤에 우리 당주 한 사람이 잠시 자기 나라에 돌아갈 때 신라 사람을 말몰이(典馬)로 삼았는데, 돌아보면서,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에게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하였다.[어떤 책에는 ‘너희 나라가 우리의 땅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하였다고 한다].
말몰이가 그 말을 듣고 거짓으로 배가 아프다고 하여 뒤에 처져 있다가 마침내 도망하여 신라로 돌아와 그가 말한 것을 설명하였다. 이에 신라(新羅) 마립간(麻立干) 눌지(訥祗)는 우리나라가 거짓으로 지켜주는 것을 알고는 사자를 급히 보내어 국인(國人)들에게,
“백성들이여,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
라고 하였다. 신라의 국인들이 그 뜻을 알고는 신라 안에 있는 우리 당주들을 모두 죽였다.
8월에 우리 군사가 촉족류성(筑足流城)[어떤 책에서는 도구사기성(都久斯岐城)이라고 한다]에 모여 진을 치고서 드디어 노래하고 춤추며 음악을 연주하였다. 신라 마립간은 밤에 우리 군이 사방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를 듣고 우리 군이 모두 신라 땅에 들어왔음을 알았다. 이에 사람을 시켜 임나왕(任那王)에게 “고려 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합니다. 지금의 시기는 깃대에 묶어놓은 술(綴旒)과 같고 나라의 위태로움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보다 더하여 나라 운명의 길고 짧음을 헤아릴 수 없을 때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백제에게 구원을 청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임나와 백제가 신라에 구원병을 보냈고, 우리 군과 서로 10여일을 대치하다가 밤에 지세가 험한 곳을 파서 지도(地道)로 삼고는 군대의 짐을 모두 옮기고 기습할 군사를 그곳에 배치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에 우리 군은 적군이 도망한 것으로 여기고 모든 군사로 뒤쫓아 왔다. 이에 백제, 신라, 임나가 기습군사를 풀어놓아 보병과 기병이 협공하여 그들을 크게 깨뜨렸다. 신라와의 원한은 이로부터 생겼다.
44년(455) 겨울 10월 군사를 보내 백제를 침략하니, 신라가 이를 구원했다. 11월 송(宋)에 장사(長史) 동등(董騰)을 보내 표문을 올리고, 국상(國喪) 3주기(周忌)에 대한 조문을 하고 방물을 바쳤다.
47년(458) 겨울 10월 송(宋)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48년(459) 11월 송(宋)에 숙신(肅愼)의 사신을 대동한 사신을 보내 또 다시 숙신씨(肅愼氏)의 호시(楛矢)와 석노(石砮)를 헌상하였다.
50년(461) 7월에 송(宋)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51년(462) 봄 3월에 사신을 위(魏)에 보내 조공하였다.
52년(463) 6월 왕이 연연(蠕蠕)의 사신을 대동한 사신을 송(宋)에 보내 방물을 바쳤다. 7월에 송(宋) 세조(世祖) 효무황제(孝武皇帝)가 왕에게 이렇게 조서(詔書)를 내렸다.
“사지절(使持節) 산기상시(散騎常侍) 독평·영이주제군사(督平·營二州諸軍事)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고려왕(高驪王) 낙랑공(樂浪公) 연(璉)은 대대로 충의로 섬기어 바다 밖의 번병(藩屛)이 되었소. 짐의 조정에 충성을 다하여 포악 잔인한 무리를 없애는데 뜻을 두었고, 사막의 나라와 교류하여 짐의 덕화를 크게 떨쳤소. 마땅히 벼슬을 더하여 절의(節義)를 드러내려 하오. 이에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과 개부의동삼사(開府義同三司)로 삼고, 지절(持節)·상시(常侍)·도독(都督)·왕(王)·공(公)의 칭호는 그대로 인정하오.”
54년(465) 봄 2월에 사신을 위(魏)에 보내 조공하였다.
55년(466) 위(魏)의 문명태후(文明太后)가 현조(顯祖)의 육궁(六宮)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왕에게 교서를 내려 왕녀를 올리라고 하였다. 3월에 왕이 위에 조공을 바치며 표를 올려 말하기를
“딸은 이미 출가하였으므로 동생의 딸을 보내겠습니다.”고 하였다. 이를 허락하고 안락왕(安樂王) 진(眞), 상서 이부(李敷) 등을 보내 국경에까지 폐백을 보내왔다.
56년(467) 9월에 사신을 위(魏)에 보내 조공하였다. 11월에 송(宋)에 방물을 바쳤다.
57년(468) 봄 2월에 왕은 말갈(靺鞨) 군사 1만 명으로 신라의 실직주성(悉直州城)을 쳐서 빼앗았다. 여름 4월에 사신을 위(魏)에 보내 조공하였다.
58년(469) 봄 2월에 사신을 위(魏)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8월에 백제군이 남쪽 변경으로 쳐들어 왔다.
59년(470) 봄 2월에 사신을 위(魏)에 보내 조공하였다. 11월에 송(宋)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60년(471) 9월 백성 노구(奴久) 등이 위(魏)로 달아나 항복하였다. [위나라가] 이들에게 각각 전택(田宅)을 주었다.
봄 2월에 사신을 위(魏)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사신을 위(魏)에 보내 조공하였다. 이때 이후로 공물 바치는 것이 이전의 배가 되었고, 그 보답으로 받는 것도 또한 조금 늘어났다. 8월에 백제가 위(魏)에게 관군장군(冠軍將軍) 부마도부(駙馬都尉) 불사후(弗斯侯) 장사(長史) 여례(餘禮)와 용양장군(龍驤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 사마(司馬) 장무(張茂) 등을 사신으로 보내 우리나라를 비난하면서 벌해달라고 청했다. 위(魏)의 주군은 백제가 멀고 궁벽한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조공한 것을 생각하여 예우를 매우 정중히 하고, 사신 소안(邵安)을 파견하여 백제의 사신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또 왕에게 조서를 내려 소안 등을 호송하라고 하였다. 소안 일행이 우리나라에 이르니, 왕은 옛날 부여경사(扶餘慶있음을 말하며 우리나라로 통과시키지 않았다. 소안 일행이 이로 말미암아 모두 되돌아왔다. 이에 위(魏)주가 왕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준절히 질책하였다. 겨울 11월 송(宋)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62년(473) 봄 2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8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63년(474) 봄 3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송(宋)에 보내 방물을 바쳤다. 가을 8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64년(475) 봄 2월에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왕이 위의 액정(掖庭)에 들일 여자를 바치겠다고 청하였다. 현조(顯祖)가 이를 허락하였다.
7월에 왕이 백제에 보냈던 승려 도림(道琳)이 백제로부터 돌아와서 왕에게 백제의 창고가 비고 인민이 곤궁하니 나라의 위태로움이 알을 쌓아 놓음보다 더하다고 고하니, 왕이 기뻐하여 장수에게 백제를 칠 군사를 내어주었다. 백제왕 부여경사(扶餘慶司)가 이를 듣고 아들 문주에게 이르기를,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사한 이의 말을 신용하고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태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누가 나를 위하여 힘써 즐겨하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을 위하여 죽겠지만, 너도 여기서 함께 죽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너는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을 잇도록 하라"
고 하였다. 문주(文周)는 이에 목협만치(木劦滿致). 조미걸취(祖彌桀取 )와 함께 남으로 갔다.
8월 위(魏)의 가산기상시(假散騎常侍) 정준(程駿)이 안풍남(安豐男) 작호와 복파장군(伏波將軍)을 가작 받고 절(節)을 가지고 여자를 맞이하러 우리나라에 갔다. 정준이 비단 백필을 갖고 평양성에 이르니, 어떤 사람이 왕에게 권하여 이르길,
“위(魏)는 예전에 연(燕)과 혼인을 하고도 얼마 안 되어 이를 정벌하였습니다. 이는 행인을 통하여 지리의 평탄하고 험함을 다 알았기 때문입니다. 본받을 만한 전례가 멀지 않게 있으니, 마땅히 방편을 내세워 이를 거절하여야 합니다.”라 하였다.
왕이 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며 글을 올려 그 여자가 죽었다고 설명하였다. 위(魏)는 그것을 거짓이라고 의심하였다. 9월에 왕이 몸소 대로(對盧) 제우와 재증걸로(再曾桀婁),·고이만년(古爾萬年) 등과 함께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략하여, [백제]왕이 도읍한 한성(漢城)을 포위했는데, 그 왕 부여경사가 성문을 굳게 닫고, 능히 나가 싸우지 못했다. 왕이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성문을 태우니,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결국 북성(北城)을 칠일 만에 함락시키고 남성을 치니 성중(城中)이 흉흉하였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부여경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도주하려 하였으나 우리 장수 재증걸루 등이 경사를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조금 있다가 경사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 그 죄를 세어 책망하면서 아단성(阿旦城) 밑으로 박송(縛送)하여 살해한 뒤 태후(太后), 왕자(王子) 등도 다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사로잡아서 돌아왔다.
한편, 경사의 아들 문주가 신라에게 도움을 구하여 신라 마립간(麻立干) 자비(慈悲)가 문주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었지만, 이미 한성이 함락되고 경사도 살해된 뒤였다. 겨울 10월 송(宋)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65년(476) 봄 정월 신라 마립간(麻立干) 자비(慈悲)가 우리나라의 침략이 두려워 명활성에 이거하였다. 2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때 위(魏)가 가산기상시(假散騎常侍) 정준(程駿)을 보내 심히 꾸짖으며.
“만일 그 여자가 참으로 죽었다면, 종실의 딸을 다시 골라서 보내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드디어 정준의 종자와 주식을 끊겼다. 왕이 정준을 핍박하고 욕보였으나, 꺼리는 바가 있어서 해치지는 못했다. 3월 백제 왕 (文周)가 송(宋)에 조공하려는 길을 막았다. 가을 7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정준을 돌려보냈다. 9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66년(477) 봄 2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67년(478) 5월 무오 왜왕(倭王) 무(武)가 송(宋)에 사신을 보내 우리나라가 왜국의 변방을 노략질하고 죽이는 것을 그치지 않으며 송에 조공하는 길을 막는다고 하소연하였다. 8월 물길(勿吉)이 위(魏)에 사신 을력지(乙力支)를 보내 백제와 연결하여 우리나라를 치자고 청하였으나, 위(魏)가 거절하였다. 백제의 은솔 연신(燕信)이 좌평 해구와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홀로 항복해 왔다. 겨울 12월 송(宋)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68년(479) 봄 3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왕이 위(魏)와 물길의 접촉을 끊고자 유연(柔然)의 수라부진가한(受羅部眞可汗)에게 사신을 보내 지두우(地豆于)를 취해서 분할할 것을 모의했다. 왕은 지두우를 취하기에 앞서 군사를 보내어 거란(契丹)을 침략했다. 이에 거란의 막불(莫弗) 하물우(賀勿于)가 그 부락을 인솔하여 수레 3천승, 무리 1만 여 명과 여러 가축을 몰고 위에 복속해 들어올 것을 청하고, 백랑수(白狼水) 동쪽에 머물렀다. 가을 9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69년(480) 우리나라와 유연(柔然)의 침략을 피해 도망간 지두우(地豆于)가 고막해(庫莫奚)를 약탈하여 고막해가 위에게 하소연하니, 위(魏)의 주군이 조서로 그들을 엄히 질책했다.
여름 4월에 제(齊)의 태조(太祖) 소도성(蕭道成)이 왕을 표기대장군으로 책봉하였다. 왕은 사신 여노(餘奴) 등을 보내 제(齊)에 조빙하게 하였는데, 위(魏)의 광주(光州) 사람이 바다에서 여노 등을 붙잡아 [위나라] 대궐로 보냈다. 위(魏)의 고조(高祖: 효문제)가 왕에게 조서를 보내 책망하였다.
『[소]도성이 친히 그 임금을 죽이고 강남에서 [황제의] 칭호를 도용하였다. 짐은 망한 나라를 옛 땅에서
다시 일으켜, 끊긴 대를 유씨(劉氏)에게 잇게 하려 한다. [그런데] 경은 우리 국경을 넘어 외국과 교섭하고, 찬탈한 도적과 멀리 통교하니, 이것이 어찌 번신(蕃臣)이 절개를 지키는 의리하고 하겠느냐? 이제 한 번의 잘못으로 경의 이전의 정성을 덮을 수 없어 사신을 돌려보내니, 그 용서함에 감사하고 잘못을 새겨 법도를 받들어 지킬 것이며, 그대의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동정을 보고하라.』
70년(481) 3월에 말갈(靺鞨)과 함께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입하여 호명(狐鳴) 등 일곱 성을 취한 후 다시 미질부(彌秩夫)로 진군하였는데, 신라가 백제, 가야의 구원병과 더불어 길을 나누어 막아 우리 군이 대패하여 물러갔다. 이에 신라 등이 우리를 추격하여 니하(泥河) 서쪽에서 우리 군사 1,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12월에 사신을 제(齊)에 보내 조공을 바쳤다.
73년(484) 7월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했는데, 백제가 신라를 도우므로 모산성(母山城) 아래에서 우리 군이 대패했다. 겨울 10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그때 위(魏)는 우리나라가 강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나라 사신의 숙소를 두는데, 제(齊)의 사신을 첫 번째로, 우리 사신을 그 다음으로 두었다.
74년(485) 여름 5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7월 백제가 내법좌평(內法佐平) 사약사(思若思)를 시켜 제(齊)에 가서 조공케 하였는데, 약사가 서해 중에 이르러 우리 군을 만나 가지 못하였다.
75년(486) 여름 4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76년(487) 여름 5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77년(488) 봄 2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윤8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78년(489) 봄 2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6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고 과현에 이르더니 겨울 10월에는 호산성(狐山城)을 함락시켰다.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79년(490) 정월 지난 해 12월에 제(齊)의 평남참군(平南參軍) 안유명(顔幼明)과 용종복사(冗從僕射) 유사
효(劉思斅)가 위에 사신으로 왔었는데, 위의 원회(元會)에서 지난 해 10월에 왔던 우리의 사신과 나란히 앉게 되었다. 이에 유명이 위의 주객랑(主客郞) 배숙령(裵叔令)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황제의 명을 받들고 경의 나라에 왔소. 우리나라와 겨룰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위(魏)가 있을 뿐이오. 다른 외방의 오랑캐는 우리 기마(騎馬)가 일으키는 먼지조차 볼 수 없소. 하물며 東夷의 조그마한 맥국(貊國)은 우리 조정을 신하로서 섬기고 있는데, 오늘 감히 우리와 나란히 서게 할 수 있소?”
하였다. 사효도 위의 남부상서(南部尙書) 이사충(李思沖)에게,
“우리 성조(聖朝)는 위의 사신을 대우함에 있어 작은 나라와 나란히 서게 한 적이 없음을 그대도 응당 알 것이오.”
라고 하자, 사충(思沖)은 이렇게 대답했다.
“사실 그렇소. 단지 정사(正使)와 부사(副使)가 전(殿)에 오르지 못하였을 뿐이지, 이 자리도 매우 높은 자리니 이것으로 갚음이 될 것이오.”
사효(思斅)가 말했다.
“지난 날 이도고(李道固)가 사신으로 왔을 때는 정말 예모(禮貌)에 거리가 있었소. 위의 사신이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온다면 어찌 쫓겨나는 일이 있겠소?”
유명(幼明)이 또 위의 주군에게
“두 나라가 버금가기는 오직 제(齊)와 위(魏) 뿐인데, 변경의 작은 오랑캐가 감히 신(臣)의 발꿈치를 밟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가을 7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9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80년(491) 여름 5월에 사신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2월에 왕이 죽었다. 나이 98세였으며, 왕호를 장수왕이라고 하였다. 위의 효문제(孝文帝)가 이것을 듣고, 흰 위모관(委貌冠)과 베 심의(深衣)를 지어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를 표했으며, 알자(謁者) 복야(僕射) 이안상(李安上)을 보내 [왕을]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태부(太傅)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려왕(高麗王)으로 추증 책봉하고, 시호(諡號)를 강(康)이라고 하였다.

첫댓글 오~이렇게 정리하니깐 보기 좋네요. ^^
한데 정리하다 보니 좋긴한데, 고구려 자체 기록이 전무하다시피 한 것에서 분노가...ㅋㅋ;;;
장수왕의 재위가 무려 80여년인데 남아 있는 기사는 몇줄 안되니 참으로 안타깝네요. 장수왕의 후비들과 왕자와 공주 그리고 정치구도를 파악할 수 있는 인물들 조차 전혀 확인할 수가 없군요. 고구려에 유기100권과 신집5권과 같은 사서가 분명히 있었을 터이고 나당연합군이 평양성을 함락한 후에도 나당이 고구려의 사서들을 수집할 수 있었을터인데도 어찌 이다지도 기록이 전무한지...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한데 모아놓고 보니 좋군요. ^^ 십육국춘추에 용성의 1만호를 데려왔다는 구체적인 수치가 있었던것 같은데 추가하심이 어떨지요.
추가했습니다, 잊고 있었는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겠습니다.
저도 감사합니다. 확실히 기록을 모아놓으니 일목요연하군요. 잘 읽겠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