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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후, 근세에 이르러 급격하게 진행된 합리화와 물질문명의 결과가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 확대는 오히려 개인의 행복을 예전보다 감소시키고 인간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여기서 현대인의 정신적 방황은 시작된다.불안은 사람을 고민하게 만들고 소위 철학적으로 만든다. 즉, 인생의 목적, 살아 간다는 것의 의미, 사랑의 의미, 죽음의 의미...등의 물음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책의 저자는 100년 전 사람들의 작품인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과 <막스 베버의 사회학문>을 통해 현대인들의 고민을 해결해 가는 실마리를 찾으려고 한다. 그들 모두 '고민하는 힘'을 발휘해서 근대라는 시대가 내놓은 문제와 마주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위에서 말한 두 사람의 저서들로부터 자신의 고민들에 대한 답을 발견하고 있다. 그것은 저자가 재일 교포로서, 젊은 시절에 체험 했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불안을 극복하려는 절실한 방법론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인간의 지성은 어떤 것인가,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등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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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제기하는 문제의식들의 복잡성에 비해 그가 제시하는 해법들은 비교적 단순해 보인다. 솔직히, 불연속적으로 지나가는 듯한 그의 가벼운 독백은 내게 감탄을 자아낼 만큼의 철학적 깊이와 논리적 설득력을 주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저자가 던지는 '인생의 문제들'이란 것들이 이미 과거에 수없이 많은 철학자들과 문인들에 의해 매우 심도 있고, 너무도 샅샅히 파헤쳐 졌기 때문에 크게 새로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결론들은 매우 요약적이고 실용적인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막스 베버와 나쓰메 소세키, 두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핵심 사상을 (마치 우리가 매일 복용하는 비타민제 처럼) 추출해 냈다. 저자는 비교적 명쾌하게 '우리는 무엇을 , 그리고 어떻게 고민해야 하는가'를 설명한다. 아래의 글은, 그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필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어느 정도 가미 되었음을 알린다.
1. 나는 누구인가?
자아와 자기중심주의는 다르다. 자아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의식적으로 자기에게 묻는 '자아의식'을 말한다. 19세기 이후 근대과학과 합리주의의 급속한 진전으로, 개인주의(이는 사회의 해체의 위기를 의미한다)시대가 찾아오면서 '자기와 타자를 연결하는 회로를 어떻게 만들어야 공통의 세계상을 형성할 수 있을 까' 라는 것이 철학자들이 고민해야 하는 근본적인 주제가 되었다. 자아가 비대해질수록 자기와 타자의 사이는 잇기 힘들어진다.'자아의식'은 결국 신경쇠약을 낳는다. '신경쇠약은 20세기(이후)의 모두가 공유하는 병이 될것이다' 이는 나쓰메 소세키의 말이다.
정신병리학자이며 철학자엿던 카를 야스퍼스 는 '자기의 성을 쌓는 자는 반드시 파멸한다'고 말하며 그 이유는 자아(나)라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스탕달도 비슷한 말을 했다. 타자와의 상호 인정을 하지 않는 일방적인 자아란 존재할 수 없다.
나라고 하는 '존재와 성격'은 타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깨닫는 일이 '고민'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진지하게 타자와 마주 하는 것, 거기에 돌파구가 있다. 즉 자아의 고민의 밑바닥을 진지하게 계속 파고들어 가다 보면 그 끝이 있을 것이고 어딘가, 타자와 만날 수 있는 장소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2, 돈이 세계의 전부인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자본주의의 기원이 인색함의 철학이 아니라 오히려 금욕적인 에토스(ethos)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1723-1790)는 <국부론>에서 그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자유로운 경쟁이 부를 만들고 풍요로운 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후 제국주의의 출현으로 이상하게 부풀린 오만과 영혼을 잃어버린 사고가 팽배하게 되었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 국제 금융의 모험가들은 과거처럼 식민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제 '월 스트리트'에 앉아서 국경을 넘어 세계 곳곳에 IT 기술을 구사해서 그로벌 머니 네트워크(global money network)를 구축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이윤을 얻고 있다. 이렇게 초기 자본주의는 변질되었다.
돈에 대하여, 저자는 '검약은 미덕이다'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고 말한다. 오늘날 '청빈'에서는 그 어떤 문화가 생기기 힘들다. '가난하다'는 것에 어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이제 '우동 한 그릇'을 읽어도 현대의 우리는 곧바로 감동을 느낄 수 없다.
저자는 나쓰메 소세키의 생각처럼 가능한 범위내에서 돈을 사용하고 그러면서도 돈 때문에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윤리를 고민하면서 자본의 논리 위를 걸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면, 너무 평범한가? 라고 반문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모든 가치가 변화 하는데 돈 만은 불변의 가치를 지닌 일종의 기호로서 계속 존재해 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삶을 위해 매우 가치 있는 것이지만 우리가 돈의 노예는 되지 말아야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윤리와 덕성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저자의 돈에 관한 결론이다. 돈을 찬양하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조하는 말처럼 들린다.
3. 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지성은 '박식한 사람'이나 '정보통'과 엄격하게 구분된다. '알고 있다(know)'와 '사고하다(think)'는 다르다. 즉 정보(information)와 지성(intelligence)'은 같지 않다. 인간의 지성이란 원래 학식과 교양 같은 요소와 이에 더해 협조성과 도덕관이라는 요건을 갖춘 종합적인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19세기 말부터 지성의 파편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문명(과학)이 인간의 한쪽 면만을 합리화하게 되어, 인간의 조화롭고 종합적인 지성획득을 단념하게 되었다.톨스토이의 경우, 과학은 인간의 행위가 원래 품고 있던 소중한 의미를 하나씩 빼앗아 간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현상은 시대의 필연적 결과일지 모른다.
막스 베버는 '인식의 나무 열매를 먹은 사람은 다시 뒤로 돌아갈 수 없다.'라고 말했다. 나쓰메 소세끼의 소설역시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로 시대의 흐름에 휘말리는 것이 싫다고 해서 구시대에 매달리는 것은 더 바보같은 짓이다' 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저자는 문명의 발전의 흐름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지성은 진,선,미와 관련이 있었다. 지성이 파편화 되고 전문화 된 현대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좋아해야 하는가? 칸트가 던진 이 세가지 '문제 의식'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지성을 믿거나 선택하면 좋을까? 여기에는 두가지의 방향성이 있다.
하나는 탐욕스럽게 지의 최첨단으로 달려가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브리콜라주(bricolage)'적인 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는, 바로 눈앞에 있는 것들로 필요한 무엇인가를 만드는 작업)이다. 이 말은 천천히 시대의 흐름을 최대한 이용하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일종의 중용지도라고 해야 할지? 현대 지성의 '문제 의식'에 비해, 후자를 옹호하는 그의 해답에는 정교함이 모자란다. 그저 근본적인 질문들을 통해 지성인이 해야 할 '고민'을 안겼다는 데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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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colage(브리콜라주)’는 원래 프랑스어로 ‘여러 가지 일에 손대기’ 또는 ‘수리’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말이다.
4. 청춘은 아름다운가?
저자의 경우, 청춘 시절은 고민의 바닥에 깊이 가라앉아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창백한 고뇌'의 시기였다. 청춘이란 한 걸음만 잘못 떼어 놓으면 골짜기 아래로 추락하고 마는 위험한 시기이다. 그는 청춘의 시기에는 의혹이 없을 때까지 본질의 의미를 계속 묻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고뇌없는 청춘은 마싹 마른 건조한 청춘이다. 스킬, 전문지식, 혹은 유용한 것에만 매달리는 엘리트 학생들을 보면 그들은 내면의 열정을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든다. 청춘은 나이가 아니고 열정이다. 또한 청춘은 좌절과 실패가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 청춘이란 자기 삶의 의미,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할 시기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에 큰 고독에 시달릴 것이다.
5. 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근세 이전의 종교는 공동체가 믿는 제도로서 사람들의 생활 그 자체였다. 과거의 사람들은 '내 인생은 도대체 무엇일까?'와 같은 허기를 별로 느끼지 못하면서 공동체 적인 삶 속에서 만족하게 일생을 살았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와 이성, 개인에게 모든 판단이 맡겨진 근대에 이르러 해결하기 힘든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것들은 개인들에게 너무도 큰 부담이기 때문에 마음의 의지를 위해서도 종교가 필요해지게 되었다.
'무엇을 하든, 무엇을 믿든, 자유다'라는 말은 사실 괴로운 말이다. 사람들의 내심 한편에서는, 자유를 벗어나 절대적인 것에 속하기를 바란다. 저자는 사람들이 종교적 믿음을 통해 개인적인 해답이나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종교역시 개인의 자유선택이라는 것이다.저자는 '믿는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을 믿는다'가 아니고 '자기를 믿는다'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얼핏, 불교적인 색채가 느껴진다.
선택은 두가지이다. 종교에 완전히 의지냐? 아니면 '자아' 혹은 '무엇을 믿을까?' 라는 문제에 대하여 이성적으로 혼자 맞서는 것인가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후자를 옹호한다. 그는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무언가 초월적안 존재에 의지하는 '타력본원(他力本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즉 확신할 수 있는 것을 얻을 때까지 계속해서 고민하거나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옹호하고 있다. 일종의 불가지론적 입장이다. 저자의 생각처럼 '구원'이란 '고민하는 과정' 그 자체일까?
6.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가?
모든 사람은 '사회 속에서 자기 존재를 인정받는 것'을 원한다. 이 사실의 밑바닥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사람은 왜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래와 같다;
그것은 '타자로부터의 배려를 받기 위함'이고 동시에 '타자에 대한 배려를 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어서 좋다는 실감을 얻기위해서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
7.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
지식인은 '연애가 지닌 환상의 비극'을 경험한다. 사랑은 형이상학(비 일상) 속에 있기 때문에 싱싱하고 아름답게 보이고 형이하학(일상)으로 떨어지는 순간 뼈대만 남고 숨이 끊어진다. 그것이 대부분 일탈을 꿈꾸는 이유이다. 즉 사람들은 모험적인 연애를 동경한다. 비일상의 환상을 맛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사랑에 대한 개인의 보장된 자유는 오히려 사랑을 못보게 하고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과거, 사랑에 대한 자유가 없을 때에는 사랑,비사랑의 구분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너무 자유로워서 어느 것이 사랑인지 구분 못하게 되었다. 이제는 상대방의 수입이나 직업,가정 환경 등 객관적인 조건이 남녀의 사랑을 결정한다. 따라서, 현대에는 순애와 즉물적 섹스의 양 극단 사이에 소모품같은 사랑이 가득하다.
사랑의 모습은 시시각각 변한다. 사랑의 목적은 영원히 행복해 지는 것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사랑도 변하거나 곧 형태가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이 식을 것을 처음부터 겁낼 필요는 없다.
8. 왜 죽어서는 안되는 것일까?
톨스토이는 '무한히 진화해 가는 문명 속에서 인간의 죽음은 무의미하다. 죽음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삶 또한 무의미하다.'라고 말했다. 저자는 자연의 섭리에 잘 따르지 않는 (현대의) 삶 속에서 사람들은 변화 속에서 결국 만족하지 못하고 죽기 때문에 삶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이는 현대인이 방황 속에서 삶의 의미를 못 찾으면 죽음을 의미한다는 그의 가설을 입증한다.
우리에게 무엇이 살아갈 힘이 될까? 그것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내면에 깃드는 충족감', 즉 '자아'이다.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이며, 상호 인정 속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것이다.
9,늙어서 최강이 되라
노인은 '분별이 있고 원숙하며 꾸밈이 없고 담백한 존재'라는 과거의 이미지는 현대에 와서 거의 무너졌다. 고령화 사회에서, 육체적으로는 과거보다 젊어졌지만, 무직으로 이제는 더 이상 사회인이 아닌 노인들의 힘을 저자는 '교란하는 힘'이라 말한다.
노인들에게는 제2의 인생이 필요하다. 이제, 노인들은 그들의 문화를 만들어야 하는 시대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뻔뻔함(용기)이 필요하다. 그러면서도, 노인은 죽음을 두려워 말고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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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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