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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때를 아시는 예수님 11:1~6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유대로 다시 가시려는 예수님 11:7~16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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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이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십니다. 예수님은 그 병이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 아들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있다 제자들에게 유대로 가자 하십니다. 이는 나사로를 살리시고 제자들로 믿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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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때를 아시는 예수님 11:1~6
인간의 약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입니다. 베다니 마을에 ‘하나님이 도우신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나사로가 살고 있습니다. 그의 여동생은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을 만큼(12:3), 그들은 예수님과 친밀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5절).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은 죽을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을 통해 역사하실 ‘하나님 영광’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4절). 예수님은 나사로에게 곧바로 가지 않으시고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십니다. 하나님 영광을 위한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 더 깊은 묵상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곧바로 가시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 영광을 기대하며 내가 더 인내할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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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로 다시 가시려는 예수님 11:7~16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마을로, 예루살렘 동쪽 약 3km 지점에 위치합니다(11:18).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7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유대’는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잠든(죽은) 나사로를 깨우러(살리러) 가겠다고 하십니다(11절). 예수님이 유대로 가자고 하신 또 다른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성전에 계속 빛을 밝혀 실족하는 사람이 없게 하시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9~10절; 9:5). 또 유대에서 빛의 역할을 감당하다가 순교하시겠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16절)라는 도마의 말이 이런 가능성을 뒷받침합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가 따릅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유대로 다시 가시려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복음의 빛이 필요하기에 내가 순종하는 마음으로 가야 하는 곳은 어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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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줌 아웃’ 렌즈
사진을 찍다 보면 카메라의 줌(zoom) 기능을 활용할 때가 있습니다. 멀리 있는 대상을 가까이 찍으려고 할 때에는 ‘줌 인’ 기능, 전체적인 모습을 담고 싶을 때에는 ‘줌 아웃’ 기능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 기능이 비단 카메라나 스마트폰에만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살다 보면 원치 않는 고통과 아픔, 위기와 어려움, 능력 부족과 한계 등을 만납니다. 그럴 때 우리 내면에서 렌즈가 작동합니다. ‘줌 인’ 기능을 사용해 위기와 문제를 확대해서 보면 절망감과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문제는 너무나 크고, 나는 너무나 작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같은 경험을 하면서도 ‘줌 아웃’ 기능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려움을 먼 시선으로 보는 것입니다. 당면한 문제와 위기, 부족함을 크신 하나님의 관점으로 ‘줌 아웃’ 한 후 해석합니다. 그러면 문제와 위기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아집니다.
매일매일 ‘줌 인’ 렌즈를 사용해 한숨 쉬고 답답해하며 불평과 원망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줌 아웃’ 렌즈를 장착해 ‘오늘 일어나는 일은 삶의 결론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큰 그림 속에 이루어지는 과정’이라 여기며 오늘의 만남과 훈련을 묵묵히 감당합니까? 오늘 마음의 창에 ‘줌 아웃’ 렌즈를 장착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현재의 상황에 이유가 있음을 믿고 인내의 훈련을 잘 통과하길 바랍니다.
군복 입은 연금술사 / 김영호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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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요한복음 11장 4절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다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상황을 들으시고 즉각 고쳐주시는 기적을 행하셨다면 이 사건은 '치유 사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덤에 안치된 나사로를 밖으로 걸어 나오게 하는 기적을 베푸심으로 치유와 비교할 수 없는 '부활 사건'이 되게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나사로 사건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선언하신 까닭입니다. 지금 겪고 있는 고난과 어려움은 그것을 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 모든 일 가운데 주님의 계획을 벗어나 일어나는 일은 없고, 주님의 모든 목적은 결코 좌절되지 않는다. - 리처드 L. 프랫 2세
오늘의 기도
하나님, 질병과 고난 같은 인생의 어려움을 통해서도 영광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상황이 저희를 압도할 때도 선하신 주님을 신뢰함으로 믿음을 잃지 않게 하소서. 주님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빛 가운데 거해, 불신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소서.
요한복음11:1-16절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세례장소 즉, 요단 동편에 계셨습니다
이때,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나사로의 누이가 사람을 보내 예수님께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사람을 보낼 정도면 매우 위급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소식을 들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틀을 더 머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틀을 더 머무시고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에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얼마전 수전절 예루살렘에 계셨을떄유대인들이 돌로 죽이려고 하던 것을
상기시켜주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시면 이번엔 죽을수도 있음을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낮이 열두시간이 아니냐면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한다는 말씀을 하시고 나사로가 있는 유다 베다니로 가십니다
참고로 지금 계신 유다 동쪽에서 유다 서쪽 베다니에 가시기 위해서는
거리로는 30여 km 되지만 이틀이 걸리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말씀하시고 우리 친구 나사로를 꺠우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죽음에서 일으키는 것으로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아직 나사로가 죽지 않고
병들어 자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생각을 아시고 분명히 나사로는 죽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나서 15절에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섰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나사라가 죽었습니다
이것처럼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에게 고난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현실은 고난이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도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다 나오지 않지만 본문이후에 예수님은 죽은지 나흘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병든자가 아닌 죽은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고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 앞에 이해할수 없는 고난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나의 고난이 예수님이 나타내시고자 하는하나님의 영광이 될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고난이 있다고 한다면그것이 이해 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것을바라보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14절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가 그런 의미라 할수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자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이 유대로 가신다.
나사로의 병
베다니에 사는,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사는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세 남매 중 나사로가 병이 걸렸는데 예수님은 이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이나 사건은 모두 하나님이 주권자이시고 또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사용하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나사로의 누이들이 나사로가 중병에 걸린 사실을 예수님께 알리면서 속히 오셔서 고쳐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누이들은 나사로를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로 칭했고 요한복음 저자도 이 세 남매에 대한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명시했음에도 예수님은 바로 오시지 않고 나사로가 완전히 죽도록 이틀을 더 머물고 계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시는 것이며 우리의 자아가 완전히 죽을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죽어야 주님이 일하신다.
내가 깨우러 가노라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일을 위해 유대로 출발하시면서 내가 깨우러 간다고 말씀하신다.
나사로뿐만 아니라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도 예수님이 깨워주셔서 이렇게 믿음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병들어 죽어가는 또 다른 나사로를 깨우실 수 있도록 우리가 마르다, 마리아 역할을 감당해야 하겠다.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만 드러나고 높임 받으시기를 소망합니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도우심"이란 뜻이며, 베다니는 "고통받는 자의 집"이란 뜻입니다 나사로는 그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즉, "도우심"이란 희망의 이름을 가졌으나, "고통받는 자의 몸" 가운데서 수고와 탄식뿐인 삶을 살다가 병들어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 모든 인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런 비극을 외면하려고 죽음을 가볍게 여기거나, 죽음의 강함을 몰라서 도마처럼 죽음을 걸고 결연한 맹세를 하기도 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1:16) 그러나 실상 죽음에 직면하면 공포에 질려 다 도망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를 이러한 비참한 운명에서 건지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11:11) 주님은 나사로가 죽었다 하시지 않고 잠들었다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죽어도 주 안에 살아 있고 장차 깬 후에는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
그래서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다 말씀하셨고, 따라서 우리는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요 주 안에 잠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부활의 아침에 우리를 깨어나게 하실 때에 우리가 주의 얼굴의 형상을 보고 영원한 만족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17:15)
그런데 여기서 흔히 범하는 오류는 이 부활의 능력과 이 깨어나는 만족을 너무 먼 미래의 일로 치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부활의 주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부활의 주 안에서 깨어나기 원합니다 불안증에서 깨어나 소망 가득하게 되고 주의 도우심을 보기 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2:5)
희망이 없어질 때에도 깨어나 아뢰기 원합니다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13:15) 마음이 약해질수록 깨어나 주께 부르짖기 원합니다 그리하면 부활의 주께서 약할 때에 강하게 하시고, 슬플 때에 기쁘게 하시고, 희망이 없어질 때에 소망 가득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시61:2~3)
✔ 시련 속에서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목적에 주목해야 합니다(1~4절).
유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와 그의 누이인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특별히 마리아는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에게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겼던 여인(12:1~8, 마 26:6~13, 막 14:3~9절)이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그녀들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중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예수님께 전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4절)고 말씀하십니다. 나사로는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겪는 시련은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믿음 생활 잘하는 사람에게도 여지없이 커다란 시련은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3절)이라고 부를 정도로 나사로의 집안과 예수님은 매우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죽음이라고 하는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런 절망적인 시련을 겪을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고통 뒤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볼 수 있는 믿음의 안목이 필요합니다. 결국 직면하는 시련은 내 자신의 믿음을 단련시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할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은 결코 내 인생을 즐겁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시련이 나의 믿음을 자라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하는 은혜와 축복의 도구로 여길 수 있다면 이는 더한 즐거움을 안겨다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한 갈대와 같은 처지에 있는 내 자신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며, 살려 주실 것이라는 심령으로 주님을 찾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주님의 음성을 따라 그분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문제 해결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내 자신이 겪는 시련을 세상 사람들이 겪는 시련으로 여기지 말고,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목적에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5~10절).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십니다(5~6절). 예수님은 고의적으로 나사로가 죽기를 바라고 이틀을 머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시기 위해서 이틀을 그곳에 머무르셨습니다. 그런 후에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7절)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8절)라고 만류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유대로 가는 것이 예수님에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위해 당신에게 허락된 낮과 같은 시간임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9절b~10절).
예수님의 관심과 사역의 중요한 방향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있었습니다.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절)는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계획과 시간에 철저하게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더 큰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이틀 동안 지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원하는 방식대로 그리고 원하는 때에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비록 예수님의 계획과 뜻을 다 알 수 없다하더라도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셨던 모습을 기억하여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며 기다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침묵하시고, 지체하시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묵묵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순종의 자리에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내 자신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작정과 시간표대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아울러 고백한 것처럼 사나 죽으나 주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모든 일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해야 합니다(11~16절).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표현 하시면서 ‘...내가 깨우러 가노라...’(11절)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실제로 나사로가 잠들어 쉬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잠들었다면 낫게 될 것...’(12절)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실제로 죽었다는 뜻으로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단순히 나사로가 잠이 들어 쉰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13절).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사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이 너희를 위해서 도리어 잘된 일이므로, 기쁘게 생각한다. 이 일ㄹ 말미암아 너희가 믿게 될 것이다. 그에게로 가자...’(14~15절,새번역).. 그 때 디두모라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16절)라고 말합니다. 비록 예수님이 유대로 올라가자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유대로 올라갔을 때 당한 위험을 예상하고 그분과 함께 죽기를 각오했다는 의미로 보아 긍정적인 면을 엿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에 대하여 기뻐하셨다라고 하신 이유는 나사로가 죽은 현장에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는 현장에 계셨더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순히 나사로가 죽지 못하도록 질병을 치유해 주신 것으로 끝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제자들의 믿음이 자라길 원하셨습니다.
십자가가 없는 부활이 없듯이, 성도에게 연단 없는 영광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면한 시련에 대하여 결코 절망할 이유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이 겪는 시련과 죽음까지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부활의 생명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련은 내 인생의 장애물이 아니라 더 큰 믿음과 영광으로 나아가게 하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까닭 없이 당하는 시련 속에서도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목적을 주목하여 묵묵히 신뢰하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응답이 지체되는 상황 속에서 그래서 주님의 계획을 다 알 수 없더라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순종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요 11:1~16절).
요한복음 11장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의 서론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저자인 요한은 우리에게 예수님과 나사로의 관계를 알기 원합니다. 나사로의 누이(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나사로를 "사랑하시는 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상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6절에 보면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나사로를 진정으로 사랑하셨다면 그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베다니로 가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4절을 보면, 나사로의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곧장 베다니로 가시지 않으셨을까요?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결론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질문하지 않고 쉽게 넘어갑니다. 그러나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죽을병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왜 예수님께서는 이틀을 더 유하시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시는 일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가를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멀쩡한 사람을 병나게 하고 죽게 한 다음에 살려내신다고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멀쩡한 사람을 소경 되게 하고, 암에 걸리게 하여 병을 고치시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이 되며, 병든 자에게 행복한 일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특별히 다른 사람이 당한 일에) 종교적 열심히 이런 표현을 습관적으로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심하게 다쳤을 때 한쪽 다리가 무사한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본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전능하시고 당신을 사랑하신다면 한쪽 다리를 다치지 않도록 하셔야지!”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떤 답변을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은 구원의 이야기 속에 드러나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더 슬픈 것은 나사로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종착역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나사로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 그의 죽음을 자기 죽음으로 삼으신다는 것이 나사로의 기적에 핵심 메시지입니다.
조금 있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시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은 그를 살리시는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나사로의 소식을 들으신 후, 이틀이 지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유대로 다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반응은 “조금 전에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했는데 왜 그곳으로 가시려 합니까”입니다. 그들의 질문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이 이렇습니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9- 10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해도 지금은 죽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도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16절) 이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멋있는 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없이 나오는 말이기에 위험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러 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서 도망가는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다시 한번 인간의 연약한 존재를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멋있는 말로서 고난과 고통을 망각하려고 합니다. 이단들은 마약 중독처럼, 모르핀을 맞는 것처럼 고통을 잊혀버리게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고난을 견디어 내면서 걸어갑니다. 죽음의 고통을 느껴야 합니다. 나
사로가 느꼈던 죽음의 고통이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나사로의 몸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것처럼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냄새가 나는 우리의 모습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붕대를 감고 무덤에서 나오는 나사로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한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발견하는 오늘 하루가 되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3-6절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즉각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첫 번째 표적 때도 그랬듯이(2:4,11), 마지막 표적에서도 사람들의 조급한 상황보다 하나님의 때를 따라 걸어가십니다. 결국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을 드러내는 표적이 됩니다. 내가 처한 다급한 상황과 막막한 기다림마저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실 주님을 신뢰하십니까?
7-10절 위험이 도사리는 ‘유대’로 가자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는 빛이심을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계시는 한 세상은 낮이기에(9:4,5) 그분과 동행하는 자는 안전합니다. 우리가 넘어지는 것은 세상이 어둡기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밖에서 날아오는 돌보다 내면의 빛이 꺼지는 일을 경계해야 합니다.
11-15절 나사로는 이미 죽었지만,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죽으셔야 나사로의 죽음이 잠이 됩니다. 예수님은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가장 큰 사랑을 몸소 보이셨으며(15:13), 우리를 깨우기 위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 15:20). 부활의 복음으로 깨워야 할 이가 주변에 있습니까?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1-3,5,6절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는 예수님께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집’ 베다니에 살아도,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 나사로가 중병에 걸려도, 그들은 변함없이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지체되는 응답 속에서도 여전히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성공이 아니라 실패의 자리에서, 풍요가 아니라 가난의 자리에서도 여전히 자신을 예수님의 사랑받는 자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16절 제자들이 자주 그런 것처럼, 도마는 자신도 모르게 진실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과 함께 죽는 일입니다. 도마가 훗날 고백하듯이, 부활의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20:28)으로 믿는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죽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주와 함께 사는 길은 주와 함께 죽는 길입니다.
기도
공동체-제 필요보다 주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당장 임박한 그 고난 앞에 답이 없고 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더라도,
주님이 그 어둠 한가운데로 들어가 빛으로 밝히고, 너희를 건져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드러나고, 그 독생자가 영광을 받게 되는 계기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절망의 길 중심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만 완전히 이뤄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삶을 사모하고, 거룩과 순결로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일로 인해 너희가 믿게 될 것이다(15절)”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구해내기 위해 자신의 죽음으로 나아가십니다.
베다니가 있는 유대 지방에서 최근 수전절에 돌을 들어 죄의 분노를 표출하는 유대인들을 피할 수밖에 없었던 기억 때문에 제자들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게 하는 하나님의 일을 자신이 그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행할 수 있는 낮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씀하시며, 나사로가 확실하게 죽었음을 알려주십니다.
주님은 말씀을 천지로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과거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공간을 초월하여 낫게 하신 것처럼, 지금 그 자리에서도 나사로를 일으키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나사로만을 살리시는 것이 그 땅을 밟은 목적이 아니셨으므로, 이제 사망의 권세로 들어가려 합니다.
제자들은 ‘지금은 위험하다, 같이 죽으러 가자‘라고 다양한 반응을 보이지만, 실제적으로 주님께서 지실 십자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지한 상태임에 틀림없습니다. 자신의 죽음이 생명의 길이며, 죽음을 죽음으로 훼파 시키지 않으면 무지는 깊어지고 구원은 더 멀어질 수밖에 없는 상태였습니다. 서
머나 교회를 향해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신 것은 자신이 죽음을 통해 충성하여 구원을 이루신 분이심을 더 분명하게 알고 행할 수 있게 하시는 도전이 됩니다. 신실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제자의 삶 살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시23:4 깨우러가자 /행7:60 / 벧후 3:9 / 마27:52/ 마26:46/행7:50 / 요13:31 / 요12:23 / 요17:1 고난을 대하는 푸는 방식은 시121:1~2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 15:26)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혼란과 책망을 내리사 망하며 속히 파멸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마침내 너를 멸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염증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하게 할 것이라.(신 28:20~2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막 9:23~24)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요 4:50-54)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4~16)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 요한계시록 2:10
사망의 권세를 자신의 생명을 드려 이기심으로
죽음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보게 해주신 놀라운 은혜를 찬양합니다.
주님 베푸신 사랑을 바라보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아니실지라도의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의 반석위에 서서 이기는 거룩한 군사되길 소망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이 땅 가운데 맡겨진 소명과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도록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도 열방 가운데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땀흘리고 애쓰시는 선교사님들을 축복하시고,
그 가정과 사역과 만나는 영혼들 위에 넘치는 기름부으심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주님 한분만 바라보며, 거룩한 제사장으로
세상을 밝히는 등불로, 새롭게 하는 소금으로 쓰임 받도록 선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