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사의 부자놀이
김 범 송
광명사거리재래시장 입구, 한소쿠리씩 표고버섯을 담아 파는 좌판 앞에서 김여사가 한 개라도 더 올려져있는 것을 고르느라 들었다 놓았다, 한참을 눈대중하고 있다. 그 짓을 지켜보던 장사꾼아저씨가 “다 똑같아요!”
결국 볼멘소리를 듣고서야 김여사가 소쿠리 하나를 집어 든다. 아저씨는 어서 가라는 듯 검은봉지에 버섯을 냉큼 쏟아 부어 건넨다.
알뜰장보기에 이력이 난 김여사는 길거리좌판을 쓱 훑어보더니 이내 시장 안으로 들어간다. 두부 만드는 가게에서 뜨끈한 두부 한모를 사고, 골목끄트머리 총각네 채소가게가 싸다는 것을 알고 복닥거리는 가게에 들어가 청양고추 한 봉지와 애호박 한개 머위줄거리 한단을 사서 나온다. 시장을 돌고 돌아 시장 가방이 무겁게 느껴지자 김여사는 한숨을 돌리며 5만원을 넣어온 지갑 속을 헤아려본다. 시퍼런 배춧잎 1장이 접쳐있고 잔돈 8천원이 남았다.
생선가게 앞에서 남편이 좋아하는 갈치를 보고 걸음을 멈추다가. 한 마리 1만 오천 원 써 붙인 가격표 앞에서 체념한 듯 지나쳐 버린다. 김이 펄펄 나는 손 만두도 먹고 싶고, 쫄깃한 쑥 가래떡도 먹고 싶지만 손자에게 줄 닭강정 만원짜리를 포장해 달래서 시장을 나온다. 재래시장이 살아야 서민경제가 살아난다는 덕을 김여사가 톡톡히 보고 사는 셈이다.
김여사는 장보기 해온 것을 부리나케 냉장고에 정리해 놓고 샤워하기에 바쁘다. 30년지기 친구가 1년 전 남편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혼자가 된 엄마생신을 맞아 그의 딸이 김여사하고 둘이 소공동조선호텔에서 식사를 겸한 1박 투숙을 예약해 놓았다니, 친구 딸 덕에 문전에도 가지 못했던 조선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생겼다.
남편에게 특별외박을 허락받은 김여사는 조금 전 재래시장을 휘젓고 온 냄새를 감추기라도 하듯 옷치장에 꽤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날마다 손자 뒷바라지에 씨름하고 사는 할머니 옷장이 그렇지 멋 내기에는 속수무책이다. 때만 되면 입어오던 원피스에 하늘하늘한 연보라스카프로 포인트를 살려 전철에 오른다.
호텔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를 만나 20층 스카이라운지에 들어선 김여사가 전망 좋은 자리에 친구와 마주 앉았다. 재래시장에서 발품을 팔아 식재료를 냉장고에 가득 채워놓고 뿌듯해하던 김여사가 고급 진 분위기에 살짝 긴장이 되는가 싶더니, 호텔 라운지에 익숙한 척 여유롭게 의자에 기대앉은 모습이다. 칸이 다른 안쪽으로 간단한 음식과 여러 종류의 와인, 양주, 맥주가 어름위에 시원하게 올려져있다. 옆자리에 서양인이 음식을 먹으며 와인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멋지다.
음식을 탐하지 않기.
김여사가 하얀접시에 연어샐러드를 조금씩 두 번 집어 예쁘게 담고, 아스파라거스 볶은 것 세 개를 담는다. 뷔페 음식 앞에서는 실컷 먹어야 입이 행복해지는 김여사가 내숭을 떨고 있다. 영어로만 쓰여 있는 커피머신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김여사를 보고 종업원이 도와주려 하자 살짝 거부의사를 보이며 그 옆에 뜻 없는 토마토주스를 유리컵에 따른다.
하늘로 치솟는 빌딩숲 여기저기서 네온사인이 반짝이기 시작 할쯤에 친구는 저녁을 먹기 위해 김여사를 일식당 스시조로 데려 간다. 오밀조밀 정갈한 실내가 전형적인 일본식당이다. 검은 정장을 입은 단아한 여종업원은 두 사람이 식사할 수 있는 작은 홀로 안내하더니 메뉴판과 녹차를 가져온다. 친구는 둘이서 먹기는 에비스코스(146,000원)와 도미머리조림(90,000원)이 좋겠다고 주문을 한다.
음식가격에 태연하기.
도미 한 마리도 아니고 도미머리조림이 9만원이라니? 9만원이면 시장에서 15,000원하는 갈치 6마리를 살 수 있는데 생선대가리 값이 경탄스럽다. 애피타이저로 끈이 달린 둥근 바구니에 스틱모형으로 잘라 담은 싱싱한 야채가 나온다. 이것들을 선두로 “송로버섯계란찜입니다” “모둠스시입니다” “토마토 소스의 흰새우크로켓입니다” 드디어 큼지막한 도미머리찜이 등장했다. 값을 생각하면 눈알까지 다 파먹어도 직성이 풀릴 것 같지 않지만, 대가리에 붙은 몸통살을 한 점 한 점 발라먹는 김여사의 젓가락질이 천연덕스럽다. 디저트로 달콤한 모나카와 따뜻한 녹차를 마시고 식당을 나오는 김여사의 표정이 걸쭉한 바지락칼국수 한 그릇 먹고나온 것만 못한 표정이다.
15층 객실에 들어가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3층 사우나장에서 몸을 풀고 나온 김여사의 얼굴이 반질반질하다. 객실 TV 채널이 온통 중국 일본 채널만 있고 그나마 끄트머리에 한국채널이 한 개 있지만 연속극 보기를 포기하고 침대에 누워 이야기하던 두 할머니가 피곤한지 이내 잠들었다.
아침 일찍 눈을 뜬 친구는 욕탕에 따끈한 물을 받아 놓고 김여사에게 반신욕을 하라고 밀어 넣는다. 서울 한복판 호텔에서 반신욕을 하는 김여사 팔자가 늘어졌다.
반신욕을 마친 김여사가 하얀 가운을 입고 나와 화장대 앞에 앉자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이 커피머신에 캡슐커피를 넣어 모닝커피 두 잔을 만들어낸다. 커피잔을 들고 창가로 다가가 시청광장 쪽을 내려다본다. 덕수궁이 보이고 암적색지붕의 성공회가 파란나무와 어우러져 유럽의 어느 풍경처럼 아름답다.
날마다 노동쟁의 함성에 시달리며 피곤에 지친 시청건물이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체 무거운 몸을 웅크리고 있다. 그 앞으로 신호등에 멈추고 출발하는 자동차들이 줄달아 아침 햇살을 빠르게 가르며 달린다. 한참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김여사는 제 놀던 자리로 내려가야 할 것처럼 높은 곳이 낯설다. 어젯밤 9만 원짜리 생선대가리를 쪽쪽 발라먹지 못한 아쉬움을 입가심하듯, 뜨거운 커피를 시원하게 마셔버린다.
잼과 치즈를 바른 토스트와 열대과일로 아침식사를 마친 김여사의 표정이 어제보다 사뭇 차분하다. 로비에서 체크아웃 계산을 끝낸 친구는 승용차를 주차해 놓은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고, 김여사는 전철역으로 향한다. 출근시간이 훨씬 지나 한가로워진 인천방향 전철 안에 김여사가 익숙하게 자리에 앉아있다. 다리가 불편한 남자아이가 장애인소년가장이라고 호소문이 적힌 종이쪽지를 손님들 무릎위에 올려놓는다,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김여사가 지갑에서 2천원을 꺼내 종이쪽지와 함께 소년에게 건네주며 구일역에서 내린다. 김여사의 어깨가 싱겁게 건들거린다.
한국산문 2016. 7월호
첫댓글 역시 사람 냄새 풀풀 풍기는 범송표 수필입니다.
제 어깨도 덩달아 건들거립니다.
고맙습니다. ㅎㅎ
역시. 유쾌하신 범송샘~~어제 이 글 읽으면서 입꼬리에 웃음이 걸렸습니다.
가난하기도 했다 부자이기도 했다, 오락가락 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같습니다.
저도 매일 그리삽니다. ^^*
멋진 제목만큼 내용도 유쾌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평범하게 느꼈던 소재들도 이렇게 잘 쓰여진 글로 다시 태어나면 한 편의 수필이 됨을 느끼고 갑니다.
ㅎㅎㅎ 모두 즐거워 하시니 이 또한 부자가 된 기분입니다.
주말 아침 헤버 굿데이~!
유쾌한 글 잘 읽었습니다.
부자 놀이 그거 아주 재미있는 거군요.
선생님, 친구 잘 두셨네요.ㅎ 전 그런 친구도 없으니 부자 놀이도 못해보고.....^^ 제 친구들은 '부자 연습'이라는 말을 가끔 쓰기는 합니다.ㅎ 김여사 일상의 무겁지 않은 터치가 매력적이고 일품이네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백화점을 활개치고 돌던 내가 어느날 부턴지 마트에서도 비싼것을 보면 흠칫 놀라며 "이.. !?" 하는 소리를 내자
우리 아이들 " 엄마 제발 그 소리좀 내지마!" 단속 받는 촌부로 바뀌었습니다.
<김여사의 부자놀이> 우리 모두 내 안에 살고 있는 두 모습이지요. ㅎㅎㅎ
조한금 선생님 촌부놀이도 즐겁지 않나요? 일당도 받으시고요.
부자놀이 그거 속 다르고 겉 다르게 폼 잡느라 재미있지요.
오승희선생님 장은실선생님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호텔에서 커피 한잔 마셔본 적 없지만, 김여사님을 눈으로 따라 다니다 보니 저도 부자놀이 한 느낌입니다. 버섯 한 개라도 더 많은 걸 사고 싶은 마음, 갈치를 살까 말까 지갑 속을 헤아려보는 그런 모습은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호텔에서 아무리 비싼 음식을 먹어도 배가 부르기는커녕 바지락칼국수보다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에 동감합니다. 그래도 친구분 덕분에 멋진 체험을 하셨네요. 생생하게 그려지는 풍경과 맛깔스런 표현이 녹아있는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장미숙님 전 재래시장에서 물건사고 보따리가 묵직해지면
거기 선 남부럽지않은 부자가 되죠.
오두막도 내 아랫목이 편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요.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저도 좋습니다.
장마 속이지만 헤버굿데이~!
심화된 양극화 시대에서, 선생님의 '부자놀이'는 진한 페이소스를 느끼게 합니다. 리얼리티가 잘 녹아난 작품이네요.
좋은 글 올려주서셔 감사합니다.
이문봉 선생님 뵙게되면 언제나 반갑게 인사해주시는데
제글에 댓글까지 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하루 되세요.
장미꽃밭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온통 붉은 색말입니다. 근데 그게 그렇게 아름답지 못했지요. 다 똑같으니 어지럽다는 느낌, 서로 달라야 더 아름답다는 원리, 수필에서도 같다고봅니다. 선생님의 책<아내의 생일 꽃>에서의 작가, 그리고 이 글, 딱 작가의 모습입니다. 나다운 글이 가장 좋은 글입디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상렬선생님께서 좋은 평가를 해주시는 것 같아
기쁜데 <아내의 생일꽃>까지 기억해 주시니 더욱
기쁘고 감사드립니다.
책을 내고 변신해보려 해도
결국 내 속이 보이는 글로 나가게 됩니다.
정말 재미있는 수필입니다. 읽는 내내 웃음이 벙긋벙긋 나오네요. 누구나 경험해 보았음직한 이야기. 친구랑 노가리를 밤새 풀었을 것인즉, 그부분은 싹 빼고 부자놀이에만 집중하는 이 솜씨. 물론 아내의 생일꽃 책도 끝까지 즐독한 일인입죠. 아, 글 참말로 좋네요, 김범송샘.
조성자샘 반가워요.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기분도 좋구요.
언제 우리만나는 날 있겠지요?
호시탐탐 노리다가 일년에 한번쯤은 꼭뵈어요, 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