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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무림(靑春武林) 제 8 장 무장원.-1 -급보(急報). 횡형님께 훤백이 알림. 무림과 무림맹(武林盟)에 난변(亂變)의 조짐. 혼천소마(混天素魔)들이 하나로 규합, 대(對) 무림맹에의 공격기미. 부내(府內) 경계를 최대한 강화하고 날짜 앞당겨 속히 태화로 와주시기 바람. * 하지만 이러한 사실 따윈 전혀 알 바 없이...! 훤백은 오랜만에 죽은 듯한 긴 잠에서 깨어났다. 무창에서 태화까지 무려 이십 일, 거의 쉴 틈 없이 달려왔던 덕분에 잠자리가 바뀌었음에도 인사불성 상태의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해가 중천에 떠 방안은 눈이 부실 정도로 햇살이 가득했다. ‘너무 깊이 잤잖아! 진시(辰時)가 넘었겠어.’ 훤백은 황급히 바깥으로 나왔다. 그가 머무는 곳은 추밀원 외채의 숙소 중 비어있는 한 객실이었는데, 짐작대로 시각은 진시 말경으로 아침이 훌쩍 지난 상태였고, 뜨락에는 황보소미가 뒷짐을 진채 서성거리고 있었다. “앗... 댁에! 마침내 일어났군!” 꽤나 무료했던 모양으로 훤백을 보자 크게 반색을 하며 달려왔다. “잠 고래야? 이래서야 추밀원사 일... 제대로 할 수 있겠어?” 훤백은 다소 계면쩍은 미소를 지었다. “오던 길이 좀 피곤했던가봐.” 황보소미는 탱하고 코웃음쳤다. “어제만 해도 나 보다 몇 배는 더 생생하더니?” “그거 순 깡다구였어. 우물이 어디였지? 세면부터 좀 해야겠는데...!” 훤백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황보소미는 휙, 몸을 돌렸다. “추밀원의 사람이 우물이 뭐야. 따라와 봐. 좋은 걸 구경을 시켜줄게.” 그녀는 냉큼 추밀원의 장원 밖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훤백은 잠자코 뒤를 따랐다. “도천형과 황보형은?” “댁에 같은 줄 알아? 다들 바쁜 사람이야. 도천 오라버닌 혼천소마의 일로 새벽부터 순시에 나섰고, 오빠는 군림대회에 나가야 하므로 무공 수련으로 바쁘지.” “황보세가도 군림대회에 나가는군? 황보형이 직접 출전(出戰)하는 거야?” 황보소미는 크게 못 마땅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되려나봐. 아버진 반대하시지만... 다른 세가들과 달라서 무림 일에 관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거든.” 확실히 그런 점이 있었다. 도천이 말했듯 황보세가는 중원사세가에 속하면서도 다른 세가들과는 매우 형태가 판이했다. 서문세가만을 봐도 알 수가 있는 일이지만, 나머지 세가들은 역대로부터 칠대문파와 나란히 천하를 주도해 오는 형태였는데, 유독 황보세가만이 십중팔구 무림사에 참여를 않고 있었던 것이다. 장원만을 봐도 알 수 있었지만 가세(家勢)를 늘린다거나 명성조차 관여치 않고 유유자적 학(鶴)같이 지내온 그런 문중. 이로 인해 현존하는 백대 문파 중에도 황보세가는 빠져있는 상태였고, 맹주부내에서도 황보세가의 전혀 아무런 발언권이 없는 처지였다. 한데 유독 이번 군림대회에 황보선이 참여할 뜻을 비친 것이니...! 훤백은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꽤 궁금해. 이야기도 그렇고 본 것도 그렇고... 황보세가는 무림 일에 거의 손을 놓고 있는 것 같은데 이유가 뭐지? 역시 황족(皇族)이라서 그런 거야?” 순간이었다. 황보소미의 눈에 불쾌한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곧 그런 빛을 지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 용서해 줄게. 솔직히 그런 면도 있지. 몇 세대만 거슬러 올라갔을 것 같으면 이 몸 역시 한(漢)의 공주였을 거란 말씀이야. 이런 마당에 우리가 무림인들과 명예 따위를 다툴 일이 뭐겠어?” 몇 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공주의 지고한 신분...! 황보소미는 으쓱 어깨를 추스러보였다. “하지만 그런 소리는 하지 않기 바래. 우리 집안사람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모욕으로 알거든? 몰락한 황족이 자존심만 세운다는 비웃음 같이 들려서...! 듣는 입장에서는 정말 유쾌하지가 않아.” 전혀 생각지도 않은 이야기였지만 입장을 바꾸고 보면 확실히 그렇게 들릴 수도 있었다. 훤백은 다소 당황한 심정이 되었다. “오해 한거야. 난 전혀 그런 뜻으로 이야기한 게 아니거든?” 황보소미가 말을 끊었다. “알아. 댁에에 대해선 이제 어느 정도 아니까. 어쨌건 우리가 무림에 관여를 않는다거나 세를 확장시키지 않는 것은 황족의 체면 때문만이 아니야. 보다 평온함을 사랑하는 거야. 세상사에 끼어들지 않아도 적당히 지닌 명예가 있고, 크게 화려하지 않아도 부(富) 역시 있잖아. 그러면서도 천하가 어지러워지면 나서는 의리도 있고. 뭘 더 바라겠어?” 사실이었다. 실상 사람이 살아가기에 필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와 부족함 없는 의식주, 그리고 적당한 명예와 일신의 자유로움인 것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황보세가는 확실히 모든 게 고루 갖춰진 가문이었다. 여기에 천하가 흔들릴 때 뛰어들 정의감까지 갖춘 가문이니 참으로 타의 귀감이 될만한 집안이 아닌가? 이에 훤백은 오히려 그런 질문을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더불어 고요하던 무창의 황보가의 장원이 얼마나 탈속한 대인의 집안인가를 여실히 알 수 있기도 했는데...! “듣고 보니 새삼 황보가의 뛰어난 점을 알겠어. 오히려 지닌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나방같이 세상사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어리석은 거지.” 황보소미의 얼굴에 비로소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댁에의 소탈함 역시 참 좋아. 도천오라버니도 그런 편인데, 두 사람이 많이 닮았어." “그래?” “한데 집안에서 유독 오빠가 문제야. 혈기가 왕성해서인지 항상 무림에 뛰어들고 싶어 하거든. 아버지께서 극구 말려왔는데 잘 되질 않았어. 그러더니 결국 혼천소마를 핑계로 여기까지 온 셈인데...! 군림대회에 참여할 것을 결심한 것 같아. 이런 면에서 오빤 아직 꽤 철이 없지.” 훤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부와 명예 따위의 욕심을 떠나서라도 남자에겐 야심이란 게 있거든. 갈고 닦은 실력으로 크게 기략을 떨쳐보고 싶은 거지. 황보형은 훌륭한 가문과 높은 무공을 지녔으니 필시 천하에 큰 도움이 될 사람이 될 거야.” 황보소미는 말이 마음에 드는 듯 생긋 웃었다. “댁에도 그렇게 생각해? 사실 그런 점은 나도 이해하지만...! 아버지도 그래서 딱 잘라서 못하게 하지 않으신 것이라고 믿어.” 이즈음 두 사람은 장원을 빠져나와 어느새 추밀원의 뒤편 숲으로 이어진, 울창한 나무들 사이의 소로 길을 걷고 있었다. 갈수록 숲은 더 깊어졌고, 멀리서 들려오던 폭포수(瀑布水) 소리가 차츰 더 크게 다가와 마침내는 땅이 진동할 정도로 변해 있었다. 훤백은 비로소 황보소미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벼랑의 폭포였군? 세면하려고 여기까지 오는 거야?” 황보소미는 크게 웃었다. “맞았어! 천룡폭포가 꽤 절경이지, 아마? 추밀원의 영역이라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니 한적하기도 하고...!” 그리고 마침내 빽빽이 우거진 숲의 한 모퉁이를 돌아 소로를 벗어나게 되었을 때! “오...!” 훤백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경탄성을 토해냈다. 눈앞에 전혀 상상 밖의 절경이 펼쳐졌던 것이다. 황보소미의 말에 의하면 천룡폭포(天龍瀑布)...! 철기보의 성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보였던 천길 벼랑 끝에서 떨어지던 폭포가 그 웅장한 모습을 눈앞에 드러내었던 것이다. 깎아지른 듯 시커멓게 치솟은 벼랑 위에서 무려 십오 장이 넘는 폭으로 때려 박듯 떨어지는 거대한 물줄기! 쿠콰콰콰콰...! 그로인해 사방은 온통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으로 진동을 일으켰고, 물안개로 뒤덮인 주위 여지저기에는 수많은 오색 무지개가 뻗치고 있었다. 훤백은 금새 축축히 옷이 젖어듦을 느끼며 거듭 경탄성을 터뜨렸다. “굉장하다! 난 지금까지 이렇게 엄청난 폭포를 본적이 없어!” 황보소미는 거 보란 듯 귀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역시 그렇지? 사실 무창에도 폭포는 여럿 있지만 이런 굉장한 기세를 지닌 것은 없거든? 철기보가 막고 있지만 않았다면 천하의 명승지가 되었을 거야.” 훤백은 물줄기가 떨어지는 암반 끝으로 좀 더 다가서며 혀를 내둘렀다. “왠지 가슴이 섬뜩해지는 기분인데? 금시 이무기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 확실히 암반 끝에서 굽어보자 아래쪽은 겁이 날 만치 시퍼런 물결이 엄청난 기세로 소용돌이치는 넓은 소(沼)가 너울거리고 있었다. 주위는 검은색 자갈과 바위들이 깔린 삼백여 평 정도의 공간! 수천 길의 절벽 위에서 떨어진 폭포가 암반을 부숴 자갈로 만들고 숲 사이로 흐르는 것이었다. 한데 바로 이때였다. “저건...!” 훤백의 눈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정경이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태산이라도 으깨버릴 듯 퍼부어지는 폭포수 속이었는데, 그 엄청난 물기둥 속에 하나의 인영이 서 있는 듯하지 않는가? “사람인가...? 맞아?” 이에 훤백은 눈을 크게 떠 거듭 자욱한 물보라 속의 흐릿한 물체를 살폈는데...! 찰나였다. “맙소사! 황보형이잖아!” 훤백은 한 번 더 경악의 기성을 터뜨렸다. 그러했다! 때려 박듯 퍼부어지고 있는 폭포의 물줄기 속! 흐릿하게 보였던 인영은 확실히 옥수검 황보선이었다.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그는 장검을 뽑아든 채 꼿꼿하고도 완강하게 때려 박듯 퍼부어지는 거대한 물기둥에 속에 버티고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은 그야말로 부동명왕을 방불케 했다. “저렇게 퍼부어지는 압력을 견뎌 내다니...!” 하나 이것은 약과였다. “앗...!” 훤백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황보선을 주시하다 말고 한 번 더 경악의 외침을 토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게...! 저 엄청난 폭포수를 맞으며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한데 보다 놀라운 것은 황보선이 선 발밑! 아무리 봐도 그의 발밑은 오로지 으깨어져 튀어 오르는 물의 소용돌이뿐, 전혀 발 디딤을 할 바위라거나 그런 것이 보이지 않지 않은가? “맙소사...! 설마 저 엄청난 물줄기를 맞으면서도...! 형은 지금 물위에 서 있는 거야?” “촌스럽게시리!” 그러나 황보소미는 별로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뭘 그리 자꾸 놀라? 오빤 지금 수련 중이잖아? 등평도수(登平度水)도 몰라?” 훤백의 눈이 더욱 찢어질 듯 크게 휩뜨여졌다. “말로만 듣던...! 하지만 아무리 등평도수가 최상승의 신법이라 해도 그렇지, 저 엄청난 폭포의 악력을 받으면서 어떻게 물위에 서 있을 수 있지?” 황보소미는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었다. “호호... 오빤 지금 호신강(護身?)까지 전개하고 있어. 그냥 물줄기를 맞고 있는 게 아니라 진력을 끌어올려 쏟아지는 폭포수에 대항하며 서 있는 거야. 물론 일반의 고수들로는 쉽지 않은 것이지만... 어쨌건 댁에도 충분히 할만한 것일 텐데 왜 그래?” 훤백도 충분히 할 수가 있다...! 훤백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황보소미를 바라봤다. “뭔소리야? 내가 저런 상승의 무공을 전개할 수 있다니? 솔직히 말해서 아는 무공이라고는 무당소천성(武當小天星)의 몇 수 검법과 그에 따른 보법(步法)뿐이라구. 호신강은 커녕 몸을 솟구치는 신법조차도 모르는 난데 혹시 뭔가 착각하는 것 아냐?” 사실이었다. 말 그대로 훤백은 지금껏 특별히 어떤 사문을 섬기거나 한 적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지닌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담장 너머로 훔쳐 배운 소천성과 도천에게서 전해 받은 토조(土爪)라 불리는 격공술수 하나뿐이었다. “말도 안돼.” 그러나 황보소미는 단호하게 그의 말을 부정했다. “댁엔 꽤 솔직한 줄 알았는데, 대체 무공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숨기려 하지? 아무리 숨기려 해도 비슷한 수위의 무공을 지닌 사람들은 대충 알아보는게 서로의 힘이잖아. 확실친 않지만 느낌에 의하면 댁엔 분명 내 아래가 아니야. 처음 봤을 때 난 순간적으로 오싹한 위기감까지 느꼈거든?” 그녀가 오싹한 위기감을 느꼈다...! 하지만 사실 지닌게 없었으므로 훤백은 낭패한 기색을 지었다.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난 정말 아는 무공이 거의 없어. 실제로 내공을 밖으로 쏟아내는 격공수 조차 도천형을 만나서 간신히 배우게 된 건데, 저런 호신강이나 신법을 배우는 건 내 꿈이야.” “자꾸 말도 안되는 소리를...!” 황보소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미를 찡그렸다. “사실이라면 어디 손을 좀 내밀어봐!” 그녀는 금나수의 한 수법으로 다짜고짜 휙, 훤백의 완맥(緩脈)을 나꿔챘다. “응...?” 그러나 황보소미의 표정은 순간 크게 기묘하게 바뀌었다. 기실 완맥혈이란 체내의 기(氣)가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곳으로 이곳을 짚어보면 신(神)의 경지에 이른 사람도 지닌 공력(功力)을 숨길 수 없게 마련인 것이다. 한데 실제 훤백의 몸에서는 어떤 강력한 기의 흐름 같은 것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니...! “이건 또 뭐가 이래...?” 설상가상 더더욱 기이한 것은 훤백의 기 흐름이 일반 사람보다 훨씬 더 약하다는 점이었다. 일반의 경우는 대개가 심장의 박동이 비슷함에 따라 맥박이 뛰듯 기의 흐름이 고정적으로 흐르는게 상례인 것인데 훤백의 맥박과 기 흐름은 이를 무시하기라도 하는 듯 지극히 느리고도 천천히 뛰었다. 황보소미는 크게 안색이 일변했다. “어떻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공력(功力)은 고사하고 기의 흐름이 말도 안 되게 느려! 대체 어찌된 거야, 이게...?” 훤백은 씁쓸히 웃어보였다. “기 흐름이 느린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어쨌건 난 무공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고 호신강은커녕 확실히 신법도 몰라.” “어떻게 이런 일이...! 겉보기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고수(高手)같이 여겨지는데... 뭐가 뭔지 영문을 모르겠어.” 훤백은 그녀에게 잡힌 손목을 빼어내며 빙긋 웃었다. “그래도 우습게 봐서는 곤란해? 한수 정도라면 황보소저보다 나은 게 있을지도 모르니.” 한수 정도...! 황보소미는 결국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슬그머니 미안한 마음이 든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확실히 내가 실수를 했군. 그런 뜻에서 신법을 가르쳐줄까?” 신법! 훤백은 순간 귀가 번쩍 뜨이는 느낌이었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고맙지만 도천형이 무장원(武臟院)에서 배우라 했으니 그렇게 하고 싶어. 거기에도 쓸만한 게 꽤 많다고 했으니까.” 황보소미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아. 사실 철기보의 무장원은 대단하다고 들었어. 단계도 엄격하니 무리 없이 무공을 배울 수 있을 거야.” 훤백은 다소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단계가 엄격하다는 건 무슨 소리지?” 황보소미는 아는데로 대답했다. “나도 확실한 것은 몰라. 다만 그곳에는 칠대문파를 비롯한 천하각파의 무공이 소장되어 있고, 철기보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배울 수 있다고 하지. 하지만 실력이 안 되는 사람이 욕심껏 높은 무공을 배우려 들면 크게 부작용이 생길 수 있으니까, 초급에서부터 다섯 단계의 수련장을 뒀고, 능력이 되야 윗 단계로 가도록 규율을 정해뒀다더군. 따라서 수준이 안 되면 결코 윗 단계의 무공을 배울 수가 없는 거지.” “단계를 시험하는 방법은?” “사범이 결정한다는 것 같아. 시험해 봐서 실력이 되면 윗 단계로 보낸다는 소리지.” “괜찮군.” 훤백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다시 황보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황보형은 언제까지 저렇게 있을 거지? 서 있기만 해도 수련이 되는 거야?” 의혹을 떨쳐버린 황보소미는 비로소 생긋 웃으며 차근차근 일러줬다. “저건 지구력을 기르는 거야. 최소로 내력을 소모하면서 최대한 오래 버티는 것. 장시간 접전에서 버틸 수 있는 힘과 정신력을 기르는 수련이지.” “대체 얼마 동안이나 저러고 있은 거지? 우리가 온 것만 해도 꽤 됐는데...!” “두 시진 정도 됐을 거야. 묘시 초경에 시작했으니까.” “…….” 훤백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입이 쩍 벌어졌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인내심에 초인적인 정신력인 것이다. 기실 일반 사람이라면 평지라 해도 반 시진을 꼿꼿이 서 있기 힘들지 않는가? 한데 이때였다. 퍼부어지는 물줄기 속에서 지금까지 털끝만한 미동도 하지 않던 황보선의 자세에 크게 변화가 생겼다. “하아-아앗!” 홀연 하늘을 찌르는 듯한 기합이 터지는가 싶더니 그의 전신에서 눈이 현란해질 만큼 눈부신 수천, 수만의 백광(白光)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온 것이다. 빛의 정체는 바로 검광(劍光)이었다. 폭포수 속에서 미동조차 않고 있던 그가 한순간 기합과 함께 장검을 휘저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더불어 황보선의 전신은 삽시간에 대체 몇검이나 휘둘렀는지도 모를 무지한 칼 그물 속에 가려져 하나의 빛 덩어리로 화해버렸는데, 그 기세는 그야말로 쏟아지는 물조차 뚫고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흐아아-아!”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황보선은 계속 용트림하듯 몸을 솟구쳐 곧장 폭포수를 가르며 위로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눈부신 백광에 뒤덮인 한 마리의 거대한 잉어가 폭포를 차고 오르는 듯한 장관! “저럴 수가...!” 훤백은 거듭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그러나 황보소미는 멀었다는 듯 피식, 쓴 웃음를 머금었다. “저기까지가 한계인 모양이군. 역시 오빤 부동력(不動力)을 더 길러야겠어.” 오빤 더 길러야 한다...! 삼랑일연을 제치고 이는 역시 그녀가 더 위인 듯한 말투...! 한데 이때였다. 장내에는 또 한 번 실로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 발생했다. “핫핫핫핫... 실로 대단한 검기로군. 젊은 나이에 이런 성취를 이루기란 실로 힘드는 일인 것인데... 흥도 오르는데 우리 한 번 같이 놀아보겠나?”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는 듯 했던 이곳에 돌연 수백 개의 종이 한꺼번에 울리듯 호방한 웃음이 위치조차 사면팔방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 것이었다. 비단 웅후할 뿐만 아니라 어디서 들려오는지 방향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천리사자후(千里獅子吼)!” 황보소미의 안색이 순간 싹 돌변했다. 웃음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이 음성의 주인이 얼마나 심후한 내공을 지닌 인물인지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그녀가 음성의 주인을 찾아 막 고개를 돌리는 찰나, “훕...!” 훤백은 다시 대경실색을 금치 못했다. 불과 십여 장이나 떨어졌을까 싶은 뒤쪽 숲 속에서 하나의 흑의인영이 구름처럼 허공으로 떠오른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떠올랐다 싶은 순간, 인영은 즉시 한 덩어리의 커다란 흑색의 빛 무더기로 화해 폭포수 아래로 쏘아들더니 곧 물기둥을 뚫고 위로 치솟아 올라갔다. “조심하게나.” 콰차차차차...! 아래에서 위로...! 내막을 알 수 없는 흑색 검기로 전신을 휘감은 채 먼저 치솟아 오른 황보선을 뒤쫓아 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흡사 또 하나의 흑룡이 앞 서 가는 백룡을 쫓아 물줄기를 가르고 치솟는 듯한 장관! 더욱 놀라운 것은 인영의 치솟아 올라가는 속도였다. 뒤늦게 폭포수 속으로 뛰어든 그였지만 일단 솟구쳐 오르기 시작하자 움직임이 황보선에 비해 두 배나 될 정도로 기쾌했다. “뭐야! 오빤 지친 상탠데...!” 황보소미의 안색이 크게 일변했다. 그녀는 빠르게 몸을 돌려 손을 뒤의 한 나무쪽으로 떨쳐냈다. 우직끈...! 그러자 장내에는 또 한 번 놀랍기 이를 데 없는 정경이 벌어졌다. 황보소미가 손을 뻗치자 이십여 장이나 뒤편에 있던 나무의 길게 뻗은 가지가 즉시 칼로 베어낸 듯 목검 크기로 잘려져 빨려들 듯 그녀의 손으로 날아온 것이다. “격공탄기(隔空彈氣)! 능공섭물(能空攝物)!” 훤백은 자신도 모르게 놀라움의 외침을 토하고 말았다. 기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전개된 황보소미의 손속! 이는 여간한 고수 측에 드는 무림인이라도 전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공력을 격출해 내는 차원을 벗어나 뻗어낸 내력을 손발처럼 움직일 수 있어야 가능한, 그야말로 내공이 최상승의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간신히 전개할 수 있었던 것! 그러나 훤백의 놀란 시선이 계속 여기에 머물 수는 없었다. “흐아아아압!” 콰차차창-! 찰나 폭포수 속의 흑의인과 황보선 사이에 고막이 터질 듯한 외침과 더불어 상상을 불허하는 격돌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뒤늦게 황보선을 따라 올라간 흑의인영이었지만 삽시간에 그를 추적해간 인영이 거대한 물기둥 속에서 그를 쇄도하기 시작했던 것! 즉시 시커먼 인영의 검기가 황보선의 백색 검기와 뒤얽히며 불꽃을 튀겼고, 삽시간에 억수같이 퍼부어지는 폭포수 속은 두 사람의 숨 막히는 접전장으로 화해 변했다. 퍼부어지는 물기둥 속을 헤치며 치고받는 격렬한 공방! 하나 워낙 무지하게 퍼부어 물줄기로 인해 대체 누가 유리하고 불리한건지 훤백으로서는 분간조차 할 수가 없었다. “…….” 와중에도 황보소미는 뭔가가 보이는 듯 찢어질 듯 크게 눈을 휩떴으며 안색 또한 점차 변하기 시작했는데...! 미루어 황보선이 불리한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흐아아아아...!” “야하!” 콰차차창...! 흡사 이를 대변해 주기라도 하듯... 격렬히 폭포수 속에서 뒤얽히던 두 사람의 사이에 또 한 번 귀를 찌르는 호통이 터지는가 싶더니, 돌연 황보선의 몸이 더 이상 흑영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듯 촥! 물기둥 밖으로 튕겨 나와 허공으로 떠올랐다. “핫핫... 지친 것인가? 흥겨운데 좀 더 놀아보세.” 하나 흑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대로 흑색의 빛 무더기로 화한 채 폭포수 속에서 쏘아나와 계속 그를 바싹 따라붙었다. “감히...!” 순간이었다. 황보소미의 표정이 크게 달라졌다. 분명 지금까지는 어린애 같이 귀엽기만 하던 그녀의 모습이 찰나지간 어마어마한 살기로 뒤덮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디 이런 면모가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뿜어 나오는 벼락같은 눈빛! “호옷-!” 더불어 황보소미는 즉시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손에 쥔 나뭇가지를 앞으로 쭉! 뻗어냈다. 쉬익...! 순간 귀청을 찢는 듯한 파공음이 울리는가 싶더니... 장내에는 또 한 번 경악스럽기 그지없는 정경이 펼쳐졌다. 홀연 뻗어낸 나뭇가지 끝에서 대뜸 내용을 알 수 없는 어떤 칼날 같은 기류가 갈래갈래 폭출, 곧바로 흑의인영을 향해 벼락같은 기세로 쏘아져 간 것이었다. “검기(劍氣)!” 이를 본 훤백은 다시 자신도 모르게 경악의 외침을 터뜨렸다. 그러했다. 황보소미가 격출해낸 것은 분명 체내의 공력을 칼끝에 운집해 장력을 날리듯 한 순간에 발출해 내는 수법이다. 하지만 그 강도란 일반적인 장력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장력이란 공력을 끌어올려 강력한 기의 폭풍을 일으키는 것이지만, 검기란 기를 한끝에 모아 쳐내는 것이기에 밀집성이 있었던 것! 따라서 장력과 검기가 부딪치면 장력은 대개 검기에 의해 뚧혀 버리거나 사방으로 찢어져 분산되게 마련이었는데...! 이는 내가장력에 비해 몇 수나 위의 수법으로 일반 고수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최상승 무공인 것이다. “헛...!” 아니나 다를까? 황보소미의 이 한수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창졸간에 무시무시한 검기가 덮쳐오자 흑의인영은 멈칫! 부득이 황보선을 추적하던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멋대로 기습을 했으니 너도 당해 봐!” 동시에 황보소미의 입에서 다시 귓청을 흔드는 외침이 터지더니 자그마한 몸이 콰아앗! 그대로 손에 쥔 나뭇가지와 더불어 한 줄기 백색섬광으로 화해 허공의 흑영을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 올랐다. 허나 흑의인 역시 예사의 고수가 아니었다. “어검술이군!” 그는 황보소미의 몸이 벼락치듯 코앞까지 짓쳐왔음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즉시 몸을 좌우로 흔들어 황보소미의 두 번째 습격을 무산화 시킨 후, 손에 든 병기를 휘둘러 단숨에 백팔십변, 오히려 기기묘묘한 수법으로 반격까지 들어간 것이었다. “헛헛... 이만한 기세를 지닌 자는 오로지 아버님과 도천뿐이었거늘...! 천일섬(天一閃)!” 콰아아아-! 순간 흑영이 뿌려낸 검기가 흡사 파도가 밀리듯 웅장하게 황보소미에게로 덮쳐들었다. “이게...!” 어쩌겠는가? 해일 같은 검기가 겹겹이 일렁이며 덮쳐오는 만큼 황보소미 역시 주춤거릴 수밖에! 하지만 그녀의 무력 또한 실로 놀라웠다. “그 정도로는 어림없어!” 대체 어디에 이런 표독함이 숨겨져 있었나 싶을 정도로 황보소미는 더욱 무시무시한 맹독을 품고 곤두박질, 몸을 회전시켜 일단 흑영의 기세를 피해냈다. “황보일기(皇甫一技)! 명옥회천(明玉回天)!” 더불어 그녀는 또 한 번 날카로운 외침과 더불어 벼락같이 나뭇가지를 휘저으며 흑의인영을 향해 재반격에 나섰는데...! 후와아앙-! 폭풍이었다. 흑의인의 검기가 해일과 같다면 재반격에 나선 황보소미의 검기는 그야말로 폭풍에 가까웠다. 자그마치 주위 사, 오 장여를 온통 회오리 같은 검기로 뒤덮으며 가차없이 흑의인영을 쇄도해 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나 흑의인영도 역시 결코 물러서거나 피하지 않았다. “철기운(鐵騎雲)!” 콰차차창...! 호통과 더불어 즉시 허공중에서 몸을 앞으로 돌진시키며 그대로 황보소미의 검기에 맞선 것이다. 그러자 허공에는 또 한 번 먹구름이 몰려오듯 막강한 검기의 파도가 생성되었고, 연신 귀를 찢는 듯한 격돌음이 터지며 두 사람은 거의 한 덩어리가 되다시피 밀고 밀리는 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빠름은 실로 번갯불이 무색할 지경이라 멀리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훤백으로서는 거저 여기저기서 노도 같은 검기만 번쩍번쩍 치솟는 가운데 형체조차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두 인영이 벼락같이 서로를 밀고 밀리며 날아다니는 정도로만 보였다. 그러기를 무려 일각여, 한동안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팽팽하게 맞서던 두 사람의 기세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흐아아압!” 콰차창...! 난무하던 황보소미의 검기가 점차 엷어지기 시작하면서 반대로 흑영의 검기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강력하게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확연히 황보소미가 흑의인영에게 밀린다는 증거였다. “대단하군! 그만하면 실로 천하에서 둘도 보기 드문 초고수임을 알겠소! 하지만 우리 황보가의 두 남매를 이겨내겠소?” 찰나 싸움에서 밀려난 채 초조하게 두 사람의 격돌을 지켜보던 황보선이 번쩍 몸을 솟구쳐 다시 싸움에 가담했다. 콰퉁-! 그러자 또 다시 엄청난 격돌음과 함께 황보선이 뿌린 검기의 소용돌이가 흑영을 휩쓸어 가기 시작했고...! 흑의인영도 더 이상은 부딪칠 방도가 없다는 듯 황보소미를 밀어 붙이다 말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껄껄... 절대 불가능하지! 본시 한손이 두 손을 이기기는 힘든 법, 황보남매의 협공을 당해낼 사람은 무림 천지를 다 뒤져봐야 없을 걸세.” 하지만 말뿐이었다. “철기살(鐵騎殺)!” 콰아아앗-! 호통과 함께 흑의인영은 즉시 수법을 바꿨는데 찰나 파도처럼 일었던 검영이 한꺼번에 수천 개 화살이 터지듯 변화한 것이었다. 검기! 그리고 폭발! 그대로였다. “앗...!” “이럴 수...?” 순간 황보소미와 황보선은 모두 낯빛이 사색으로 돌변했다. 한둘도 아닌, 한꺼번에 수 천 가닥으로 퍼부어져 나온 불가항력적인 검기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두 사람은 감히 부딪칠 생각조차 못하고 몸을 뒤집어 피해가기조차 급급했는데...! 하지만 그나마도 늦었다. 찌이익...! “앗...!” “훕...!” 흑의인영이 격출한 검기는 너무도 범위가 넓었을 뿐아니라 수 많은 것이라서 서둘러 피했다지만 두 사람의 옷이 곳곳이 찢겨져 나간 것이었다. 하나 다행히 흑의인영은 여기에서 손을 거뒀다. “헛헛... 놀이도 심하면 진짜가 되니 이쯤에서 그만두는게 좋겠어.” 살수를 쓸 생각이 없는 듯 손을 거두고 마침내 표표히 암반위로 내려선 것이었다. 훤백이 선 곳에서 불과 스무 자 가량이 떨어진 옆자리! 그러자 급기야 드잡이질을 하던 그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허름한 흑의문삼에 갓 마흔 가량의 나이로 보이는 중년인...! 슬기로운 비둘기의 눈에 크게 후덕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맙소사...!’ 하나 보다 훤백의 눈길을 끈 것은 지금껏 접전을 벌인, 그가 쥐고 있는 병기였다. 어이없게도 그 역시 손에 나뭇가지를 쥐고 있었다. 황보소미가 목검삼아 새로 나뭇가지를 꺾어 들었다면 그는 그냥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썩은 가지를 주워든 듯 시커멓게 색까지 바랜...! ‘…….’ 비로소 공격을 피해 물러섰던 황보소미와 황보선도 흑의문사 앞에 내려섰다. 여기저기 옷이 찢어진 채 크게 경악한 표정으로...! 황보선이 크게 긴장한 표정으로 먼저 포권을 취해보였다. “황보가의 옥수검 황보선입니다. 선배께서는 누구신지...?” 흑의문사는 껄껄, 호방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헛헛... 초면에 실례가 많았군. 산책 차 나온 길에 본의아니게 자네의 수련광경을 보고 말았지. 모처럼 크게 흥이 치솟아 그만...! 나 천비도룡(千臂屠龍) 유진학(柳眞學)일세.” 순간이었다. “훕...!” “천비도룡...?” 황보선, 황보소미 남매는 물론이고 훤백조차 그의 이름을 듣고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의 탄성을 토해내고 말았다. 천비도룡 유진학! 기실 이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본시 그의 이름을 아는 이는 천하에 그리 많지가 않았다. 하나 그러면서도 무림의 내노라 하는 인물들과 영수급 인물 중에서는 또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까닭은 그가 바로 구름속의 용! 여하한 무림의 일에 나서길 싫어한다는 유목공의 하나뿐인 아들이었기 때문! 황보선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급급히 포권을 취해보였다. “후배 황보선이 다시 인사 올립니다! 어쩐지 술수가 하늘을 덮는다 했더니만 바로 유선배님이셨던 것이군요.” 유진학은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내던지며 호방하게 웃었다. “치우게 이 사람아. 한바탕 드잡이질로 인사를 했으면 됐지, 무슨 예의인가? 그냥 편히 친형처럼 대하게나.” “후배가 어찌 감히...!” 황보선은 계속 포권을 취한 채 몸둘바를 몰라 했고, 유진학은 그러한 황보선이 못내 흡족한 듯 손을 뻗쳐 부드럽게 어깨를 두드렸다. “헛헛... 괜찮네! 내가 이리 못난 사람인데 자네만한 아우를 두면 얼마나 좋겠나.” 그는 시선을 황보소미에게로 돌리며 계속 후덕하게 웃었다. “소저께서는 황보가의 금지옥엽이신 것 같은데 역시 소문 그대로...! 황보가에 백가지 병기를 다루는 무서운 따님이 계신다고 하더니만 진정 명불허전이었소이다.” 온통 살기로 뒤덮여 작은 마녀 같았던 황보소미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원래의 귀여운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불만이 많은 듯 입술을 삐죽이며 휙 고개를 돌렸다. “흥, 그래봐야 백초지적도 안되었는걸요, 처음부터 살수를 쓰셨으면 지금쯤 저승길을 헤매고 있었을 거예요.” 유진학은 빙그레 웃으며 가볍게 포권을 취해보였다. “부끄러운 말씀. 살수를 전개하지 않은 건 소저 역시 마찬가지셨잖소. 정말 생사를 겨뤘을 것 같으면 첫 공격에 불초가 먼저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을 거외다.” 군자의 모습이었다. “패전지장에게 금칠해 주실 것 없어요. 여자지만 인정할 것은 하니까. 우리 남매는 패한 거예요.” “헛헛... 무례를 범했으니 나중에 벌주를 받겠소.” 유진학은 계속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훤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데 소형제는...? 얼핏 이야기 전해 듣긴 했지만 혹시 추밀원에 새로 오셨다는 이훤백, 이소제신가?”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호감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이에 훤백은 특유의 시원한 태도로 포권을 취했다. “그렇습니다. 도천형에게 높으신 인품을 들었지만 과연 그대로시군요.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유진학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눈에 봐도 인중지룡이로군! 학문의 냄새가 짙지만 정기가 안으로 갈무리된 게 감추어진 무공이 필시 누구보다 무섭겠어. 오히려 내가 잘 부탁하네.” 묘한 소리였다. 기실 몇 번이나 거론된 일이지만 훤백은 분명 무공에 대해서 결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황보소미가 훤백에게 두려움을 느꼈다고 했고 이젠 천하의 절정고수인 유진학까지...! 대체 까닭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훤백은 실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천형의 힘으로 원사가 되었을 뿐 아무런 능력도 지닌 것도 없는 몸입니다. 눈 밖에 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요.” 유진학은 친근하게 손을 뻗쳐 훤백의 손을 잡았다. “무공을 배우지 않아도 특이하게 정기가 강한 사람이 있긴 하지. 어쨌거나 도천이 자넬 아우라 여겼으면 나 역시 남이 아닐세. 형이라고 부르게나.”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한데 순간, 어느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훤백의 손을 잡은 유진학의 눈속 깊숙이에 적잖게 의아한 기색이 빠르게 스쳐간 갔다는 것! 이는 완맥혈을 잡아본 후 당황한 기색을 비췄던 황보소미의 것과도 흡사했다. 하지만 이런 따위야 알바 없이 훤백은 쑥스러움에 손을 빼며 다시 포권을 취해보였다. “후배가 어찌 감히...!” 유진학은 고개를 쳐들며 더 크게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 보기보다 숫기가 없구먼! 아무튼 자네야 어찌 생각을 하던, 도천과 나는 형제사이니 동생으로 여기고 지내겠네.” 이어 나타날 때 그러했듯, 유진학은 호탕한 웃음과 함께 다시 숲 속으로 사라져갔다. 묘하다는 듯 황보소미가 다시 훤백을 향했다. “어때? 유대협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 확실히 댁에 한테는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어. 혹시 뭔가 숨기고 있는 것 아냐?” 훤백은 억울하단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숨기긴 뭘! 유대협도 내가 특이체질일지 모른다고 했잖아. 무장원으로 가야겠어. 이런 소릴 듣기 싫어서라도 상승무공을 익혀야지.” 황보소미가 열 받지 말라는 듯 생긋 웃어보였다. “같이 가,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구경도 할 겸.” 쫄랑쫄랑 훤백의 뒤를 따라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람... 어쨌건 무서웠어. 공력의 일부만 사용한 것 같은데 이 정도라니...! 유목공이나 되면 모르려나 천하에 당할 사람이 없겠는걸?” 유진학을 두고 하는 말임이 분명한 것이었다. |
첫댓글 잘밧어요
즐독했어요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요
즐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