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1월 7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토요일
제1독서 : 1요한 5,14-21
복 음 : 요한 2,1-11
그때에
1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2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3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4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5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6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두세 동이들이였다.
7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셨다. 그들은 곧 그것을 날라 갔다.
9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물을 퍼 간 일꾼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방장이 신랑을 불러
10 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11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긍정적인 생각만 있고, 부정적인 생각이 없으면 과연 행복할까요?
고통은 없고 기쁨만 존재하는 것이 과연 이상적인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인간의 DNA 안에는 부정적 감정이 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사시대에 가장 약한 존재인 인간이 멸종되지 않고
오히려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다고 하지요.
왜냐하면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어서 자그마한 소리에도 얼른 피하고,
멀리 사나운 짐승이 보이면 얼른 도망칠 수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나와 친구가 될 거야.”라는 생각으로 사나운 맹수에게 다가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도 실수를 줄이고 자신의 안정을 위한 부정적 생각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100% 부정적 생각만 있으면 당연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의 연구 조사 결과 긍정적인 정서와 부정적인 정서의 비율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즉, 3:1. 정확히 말하면 긍정적인 정서 2.9: 부정적인 정서 1의 비율이었습니다.
이런 비율을 갖춘 사람이 직업 성취도, 대인관계 원만도, 상사의 긍정 평가도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높았습니다.
부정적인 정서가 많아지면 신체에서부터 불면증, 두통 등이 나타납니다.
긍정적인 정서를 높여야 할 때인 것입니다.
부정적인 정서가 하나 생기면, 얼른 3개의 긍정적인 정서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를 묵상하면, 성모님께서 너무 막무가내가 아닌가 싶습니다.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의 관여를 은근하게 청합니다.
그러나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면서 거절하시지요.
하지만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단순히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긍정적인 정서를 가지고 예수님께 청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부정적인 정서가 아닌, 긍정적인 정서가
예수님의 첫 기적을 가져오게 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3:1이라는 긍정적인 정서와 부정적인 정서의 비율이 아니라,
오히려 계속해서 부정적인 정서만 보였던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안 되는 이유만을 찾게 되면 주님의 섭리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행복의 길에 들어설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요한 사도가 말씀하신 이 믿음을 우리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1요한 5,14)
“포도주가 없구나.”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는 참으로 풍부한 의미들이 담겨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일 '주님 공현 대축일'을 앞두고,
아기가 결정적으로 구세주로 드러나는 “때”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의 핵심적인 단어는 “때”, 곧 “그리스도의 때”라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등장하는 “때”는 혼인잔치가 벌어진 날입니다.
곧 “사흘째 되는 날”(요한 2,1)입니다.
“사흘째 되는 날”(요한 2,1), 이 날은 시나이 계약과 연결됩니다.
곧 주님께서 모세에게
“셋째 날에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이 시나이 산에 내릴 것이다.”(탈출 19,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영광이 시나이산에서 드러났듯이,
카나의 혼인잔치에서도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때’임을 알려줍니다.
동시에 이날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일어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 사건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날은 세례자 요한이 증언한 날로부터는 일곱째 되는 날로서, ‘새 창조’의 날입니다.
요한복음은 “첫 번째 표징”을 통해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을
바로 새로운 인류의 출현으로 알려줍니다.
두 번째 등장하는 “때”에 대한 암시는
마리아께서 알아채신 “포도주가 다 떨어진 때”(요한 2,3)입니다.
곧 옛 계약이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곧 새 포도주, 곧 새 사랑이 필요해졌고, ‘새 계약의 때’가 다가왔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마리아께서는 포도주가 다 떨어진 바로 이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때”가 왔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는 동시에 혼인잔치 집에 놓여 있었던
“유다인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요한 2,6)가 암시해주는 “때”이기도 합니다.
‘여섯 개의 돌 항아리’는 가혹하고 엄격한 율법주의의 경직성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과의 맺는 관계에 사랑이 결핍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돌 항아리’는 결핍을 나타내는 숫자인 ‘여섯 개’이며,
모두 비어 있어서 더 이상 줄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결국 결정적으로 십자가에 매달려있는 ‘일곱 번째의 항아리’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나와 온 세상을 적셔줄 “때”를 향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등장하는 “때”는 바로 예수님께서 직접 밝히시는 ‘당신의 때’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의 때”가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이는 당신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일을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욕구에 의해서 활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뜻대로 활동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네 번째의 “때”는 과방장이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서
이 “좋은 포도주를 이제까지 보관하고 계셨군요.”(요한 2,10)라고 선포한 “때”입니다.
그러나 이 혼인잔치에서는 과방장이 단지 포도주의 맛을 보았을 뿐,
그 누구도 아직은 포도주를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요한 2,11).
결국 카나에서 드러내신 이 표징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모든 이에게 드러나게 될 ‘예수님의 영광’을 미리 밝혀줍니다.
과연 이제 우리가 새 포도주를 마셔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함께 혼인잔치를 거행할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우리는 곧 “성찬례”에서 이 은혜로운 ‘사랑의 포도주, 새 계약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거룩한 일인지요!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
주님!
새 포도주가 필요합니다.
제 안에 당신 사랑이 필요합니다.
당신 사랑에 취하게 하소서.
당신이 나의 님, 나의 신랑인 까닭입니다.
아멘.
카나의 혼인 잔치.
조욱현 토마스 신부
카나 혼인 잔치의 기적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새로운 구원의 장이 열리고 그것은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신비스러운 회개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께서는 잔치에 온 모든 사람이 좋아할 새로운, 더 좋은 포도주를 주신다.
그것은 새로운 구원의 은총을 의미한다.
그 카나 혼인 잔치에 마리아께서 함께 계셨다.
마리아의 모습은 들러리의 모습이 아니라, 결정적이고 능동적이다.
“포도주가 없구나.”(3절) 는 말로 예수께서 그 일에 개입하시도록 하셨다.
이 말이 어떻게 해석되든지 간에 우리가 잘 보아야 할 것은
마리아께서 다른 사람들의 문제와 어려움에 동참하는 사랑과
나아가 아드님까지도 그 일에 개입시키려는 그 노력이다.
즉 마리아의 깊은 사랑과 신뢰심의 태도이다.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4절)
그 “때”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는 때이며,
당신이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때를 의미한다.
아버지의 뜻은 모든 인간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거절의 뜻이 아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일렀다.”(5절).
이 말은 시나이산에서 백성들이 응답한 것과 같은 내용이다.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우리가 실천하겠습니다.”(탈출 19,8)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는 따라야 한다.
그때 우리는 구원의 혼인 잔치에 참석할 수 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였을 때,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구세주의 포도주를 얻는다.
이렇게 카나의 혼인 잔치의 기적은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셨으며,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어머니가 된 마리아와 함께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세상을 위해
봉헌되는 잔치가 벌어질 갈바리아에 오르도록 초대하고 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11절).
이것은 물을 포도주로 만든 권능 때문이 아니라,
더 큰 기적,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에 딱딱한 침대 위에서
혼례식을 치르게 되는 십자가의 기적과 연결되어있다.
더 나아가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11절).
그 기적은 신앙을 불러일으켰고, 그 기적을 더 큰 기적에 대한 표징으로 이해하게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의 신앙은 참된 신앙의 모범이다.
아드님 예수님의 모든 것을 신뢰하셨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이러한 신뢰심은 사랑에서 생기는 것이고 사랑으로 넘쳐흐른다.
우리가 만일 형제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멀리하여
그들의 기쁨 또는 고통까지도 함께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거짓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신앙을 우리도 살아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우드사이드 성당의 신부님이 성탄판공성사를 준비하느라
수고하신 신부님들을 위해서 맛있는 저녁식사를 준비했습니다.
9명의 신부님들을 초대했는데 6명만 왔습니다.
한 분은 몸이 좋지 않아서 못 왔고, 한 분은 장례가 생겨서 못 왔고,
한 분은 온다고 했는데 그만 시간을 착각해서 못 왔습니다.
덕분에 6명이 9명이 먹을 음식을 맛나게 먹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나라는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과 같다.’는 비유가 생각났습니다.
하늘나라의 잔치에 초대받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어떤 사람은 친구와의 약속 때문에 못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 때문에 못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또 다른 잔치에 가려고 못 왔습니다.
혼인잔치의 주인은 길가에 나가서 아무나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얼떨결에 하늘나라의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번 모임은 단순히 식사 초대였지만,
저 역시도 하느님께서 저를 초대하는 자리를 외면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장 가난한 이들의 모습으로, 가장 굶주린 이들의 모습으로,
가장 헐벗은 이들의 모습으로 주님께서는 저를 초대하셨는데 외면한 적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비유도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밭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큰아들은 안 간다고 했지만, 마음을 바꾸어서 밭에 나가 일을 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간다고 했지만, 마음이 바뀌어서 밭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아들은 결국 밭에 나가서 일을했던 큰아들이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은 주님의 성탄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서
지난 1년 동안 가톨릭평화신문에 연재되었던 파우스타 수녀님의 교리여행 문제를 공부하였습니다.
저도 매주 문제를 풀면서 즐거운 교리여행을 했습니다.
350문제를 나누어 주었고, 12월 11일에 ‘교리경시대회’를 하였습니다.
말로는 공부를 못했다고 했는데 교리경시대회에 참가했던 분들은 모두 문제를 잘 풀었습니다.
100점을 맞은 분이 7명이나 되었습니다.
교리경시대회에 참가한 모든분들은 주님의 성탄을 잘 준비했다고 생각합니다.
동방박사들은 황금, 유향, 몰약을 준비했지만
부르클린 교우들은 교리시험 문제지를 성탄선물로 준비했습니다.
신앙은 그리고 종교는 ‘꿈’을 꾸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꿈입니다.
그 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꿈은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에서 시작됩니다.
그 꿈은 세상의 모든 권한을 가지신 분께서
기꺼이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는 겸손함에서 시작됩니다.
'말'을 늘려서 발음하면 '마알'이 됩니다.
이를 풀이하면 '마음의 알갱이'란 뜻이 됩니다.
말은 마음의 알갱이에서 나옵니다.
말이란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을 곱게 쓰는 사람은 마음을 곱게 쓰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말을 험하게 쓰는 사람은 마음을 험하게 쓰는 사람입니다.
말에는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들어 있습니다.
새해에는 말씀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말씀으로 희망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떠오르는 기억이 있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수능을 마친 학생의 어머니가 추천서를 써달라고 하였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모임이 있었지만,
한 학생의 앞날이 결정될 수 있기에 학생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학생이 추천서를 가지고 왔고, 기쁜 마음으로 추천서를 작성해서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에 학생의 어머니가 전화를 하였습니다.
아이가 전공과목을 바꾸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추천서를 새로 작성해 줄 수 없는지 부탁을 하였습니다.
역시 학생의 앞날에 중요한 일이기에 오시라고 해서 추천서를 다시 만들어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힘은 역시 강한 것 같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도 가끔 제게 부탁을 하셨습니다.
대녀의 친구의 딸이 혼인을 하는데 혼배 주례를 해 줄 수 없느냐는 전화를 하셨습니다.
아마 다른 분들의 부탁이라면 거절했을 것입니다.
다른 분들은 차마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용감(?)하신지, 저를 너무나 믿는 것인지 가끔 그런 부탁을 하시곤 합니다.
같은 레지오 단원이 다치셔서 의정부 성모병원에 입원했다고 하시면서
병자성사를 부탁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역시 어머니의 부탁인지라 거절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시고, 어린 시절 모든 것들을 해결해 주신
어머니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어머니는 제게 누군가를 도와 줄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하였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삶의 중심; 주 예수님
-구원의 표징, 영광의 표징, 믿음의 표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어제 뜻밖에 좋은 책을 읽었습니다.
2016년도 교황청에서 마리아의 종 수도회의 에르메스 론키 수도자가
사순시기 동안 행한 피정 강의들을 모은
<복음이 나에게 물었다; 물음표는 복음이 우리 내면에 던지는 낚시바늘입니다> 제목의 책이
휴게실에 굴러다니기에 단번에 읽었습니다.
무엇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책의 머리말에 이어
후기의 마침 감사 인사가 좋아 그 전문을 인용합니다.
유머와 겸손, 진심이 가득 담긴 아름다운 명문입니다.
“에르메스 론키 신부님,
신부님의 노고와 묵상과 열정에 대해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을 대신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신부님은 아낌없이 많은 것을 나눠주셨습니다.
저도 복음을 읽고 복음을 꿈꾸라는 말씀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푸르게 그리듯이 꿈을 하나의 환상이라고 생각하지만 꿈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꿈꾸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성인들이 가졌던 그 용기 말입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 중국에 도착하기 위해 그 땅을 마주하고 가지셨던 용기를 떠올려 봅니다.
저는 교황청에서, 책상에서, 감실 앞에서, 같은 꿈을 위해 싸우는 겸손한 봉사자를 생각합니다.
신부님은 아십니다. 교황청에 꿈을 꾸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일 우리 모두가 좀 더 많은 꿈을 꾼다면 교황청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스갯 소리지만 소방관들을 불러야 할지도 모릅겠습니다.
에르메스 론키 신부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성서의 인물들이 한결같이 하느님을 꿈꿨던 사람 꿈쟁이였습니다.
창세기의 요셉은 물론이고 복음의 예수님도 평생 하늘나라를 꿈꿨던 분입니다.
우리의 꿈 중의 꿈은 아마도 “주, 예수님” 꿈일 것입니다.
얼마 전 선종하신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이 그 대표적 꿈쟁이였습니다.
평생 예수님 얼굴을 그리워하여 평생 예수님을 꿈꿨던 분이라 마지막 임종어,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말마디도 교황님의 전 삶을, 꿈을 요약합니다.
저는 ‘저는’ 과 ‘당신을’이 생략된 짧은 “주님, 사랑합니다.”라는 우리말이 더 좋습니다.
여러분도 주님을, 하느님을 꿈꾸는 꿈쟁이가 되고 싶습니까?
답은 단 하나 주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제 행복기도 서두가 좋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하느님 꿈의 실현을 위해 자나 깨나 호흡에 맞춰
“주 예수님, 사랑합니다” 끊임없이 기도로 바치시길 권합니다.
22년 전 써놓고 애송했던 “별꿈”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늘 예수님을 그리며 꿈을 꾸는 저에게도 꿈이란 주제는 너무 중요합니다.
“풀잎들
밤새
별꿈 꾸며 뒤척이며
잠 못 이루더니
아침
풀잎마다 맺힌
영롱한 별무리
이슬방울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네”- 2000.10.1.
정말 평생 꿈꿔야 할 대상은 “주 예수님”입니다.
제가 볼 때 주님의 애제자 요한 역시 평생 예수님을 꿈꿨던 분입니다.
꿈은 이뤄진다는 결정체 말씀이 제1독서에서
사도 요한을 통해 다음처럼 아름답게 고백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자녀 여러분,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꿈꿀 때 주님을 점점 잘 알게 되고
주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게 되니 기도는 응답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절로 우상들은 멀리하게 될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시니
주 예수님을 꿈꿀수록 참 하느님을 꿈꾸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점점 잘 알아갈 수 뿐이 없습니다.
오늘 카나의 혼인잔치는 얼마나 멋진 꿈의 실현입니까?
예수님의 꿈과, 성모님의 꿈이 하느님의 뜻과 일치되니
이런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의 표징이 일어납니다.
일곱의 표징 중 첫 번째입니다.
예수님의 꿈은 이렇게 표징을 통해 이뤄짐을 봅니다.
참고로 예수님의 꿈이 이뤄진 일곱 표징을 소개해 드립니다.
1. 카나의 혼인 잔치(2장)
2.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심(4장)
3.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심(5장)
4. 오천명을 먹이심(6장)
5. 물위를 걸으심(6장)
6. 태생 소경을 고치심(9장)
7. 라자로를 살리심(11장)
얼마나 멋진 꿈쟁이 예수님이요, 꿈을 이뤄주신 멋진 하느님이신지요!
표징마다 따라붙는 두 말마디도 은혜롭습니다.
1.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2.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영광의 표징, 믿음의 표징, 구원의 표징으로 드러나는 예수님 꿈의 실현입니다.
오늘 카나의 혼인 잔치를 통해 이뤄지는 꿈의 실현은 얼마나 흥겹고 가슴 설레게 하는지요!
성모님의 확고한 인내의 믿음은 그대로 성모님의 꿈이 얼마나 견고한지 보여줍니다.
철석같이 아드님을 믿으시는 성모님입니다.
누구보다 주 예수님을 사랑하신 성모님의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스런 모습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지체없이 성모님께 달려가 전구를 청하십시오.
어머니의 청은 예수님께는 0순위입니다.
“포도주가 없구나.”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기탄없이 믿고 사랑하는 아드님께 속내를 털어놓으신 성모님이요,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예수님의 속 깊은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이어 꿈이 이뤄지는 과정이 참 은혜롭고 아름답습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예수님 아드님에 대한 성모님의 절대적 신뢰와 순종을 반영합니다.
성모님의 믿음과 사랑의 순종에 감격하신 아드님 예수님이요
때가 되자 하느님의 응답이자 꿈의 실현입니다.
“물독에 물을 채워라.”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얼마나 멋진 예수님이요 하느님이신지요! 과방장은 신이 나서 신랑을 불러 말합니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참으로 주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한결같이 열렬히 사랑하며 꿈꿀 때,
주님은 구원의 표징, 영광의 표징, 믿음의 표징을 통해 우리의 꿈을 이뤄주시며
우리 또한 당신 구원의 표징, 영광의 표징, 믿음의 표징이 되어
주님 꿈을 현실화하며 살게 하십니다.
삶의 중심에 주 예수님을 모시고 살 때 꿈은 이뤄져 고해인생은 축제인생으로 바뀝니다.
저절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란 고백이 나옵니다.
위에서 언급한 책에 나오는 신부님의 고백 일부 내용을 인용합니다.
“제가 믿는 하느님은 카나의 혼인잔치의 하느님, 유쾌한 사랑이 넘치는 축제의 하느님,
술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베타니아의 향유를 좋아하시며,
사랑을 기적이 싹트는 자리로 만드시고, 연회를 즐기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고, 존재의 기쁨, 신앙의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잔치를 통해 당신 향한 우리의 꿈을 이뤄주시고
고해인생을 축제 인생으로 바꿔주시며, 우리 모두 당신 구원의 표징, 영광의 표징,
믿음의 표징이 되어 신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하느님 나라, 커다란 내 포도주잔에 양질의 포도주가 철철 흘러넘치는 곳!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여운 이웃 어린이들이 우르르 몰려왔습니다.
다들 바쁜 관계로 홀로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피정 센터 넓은 주방이 엄청 춥더군요.
손을 호호 불어가며 소시지를 썰고, 채소를 다듬다 보니,
무척이나 처량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내가 서품 30년 차가 다 되어가는데,
지금 이 나이에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살짝 슬퍼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생각하면 안 되지?’ 하면서 즉시 마음을 바꿔 먹었습니다.
소시지 하나 썰면서 아이들 한명 한명 얼굴을 떠올리면서
그 아이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부모 없이 자란 아이들이지만, 하느님께서 아버지 역할을,
성모님께서 어머니 역할을 해 주십사고, 기도하면서 소시지를 썰었습니다.
그랬더니 일이 그렇게 힘들지 않았습니다.
기쁘고 보람된 사도직으로 바뀌었습니다.
돈보스코가 그랬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아이들
의식주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늘 바빴습니다.
총책임자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재정적인 부분에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틈만 나면 부자들, 귀부인들 식사 초대에 응해서,
그들에게 좋은 이야기도 해드리면서 후원을 끌어내야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즉시 아이들 사이로 들어가셨습니다.
선생님들 후배 살레시안들 격려하고 고무해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집필도 해야 했고, 출판사도 운영했습니다.
자연스레 성당에 오래 앉아 기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돈보스코는 자신만의 기도 방법을 찾았습니다.
일을 기도화한 것입니다. 일을 기도화한다는 것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만나면서도 기도했습니다.
그 아이들을 축복하는 마음으로 만나니 그 만남이 기도가 된 것입니다.
돈보스코를 만난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 이구동성으로 증언했습니다.
“돈보스코를 만나는 시간은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 같았습니다.
그 시간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분을 바라보는 것, 그 자체가 기도였습니다.”
제가 준비한 보잘 것 없는 요리들을 맛있다 맛있다 하면서 먹어주는 아이들,
설거지며 마무리 주방 청소까지 깔끔히 해주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제 마음이 얼마나 풍요로워졌는지 모릅니다.
어느새 훌쩍 자란 아이들이 알아서 척척 제 몫을 해내는 모습에
제 마음은 즉시 풍성한 결실로 충만한 풍년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우세한 특징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풍성함이 아닐까요?
궁색하거나 결핍된 곳이 아니라 커다란 내 포도주잔에
양질의 포도주가 철철 흘러넘치는 곳, 더 이상 굶주림이나 갈증이 존재하지 않는 곳,
아쉬움이나 불평불만이 완전히 사라진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치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처럼 말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어쩔 수 없는 궁핍함을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니 즉시 상황은 반전됩니다.
여섯 개의 큰 돌 항아리에 가득 채워졌던 물이 순식간에 격조 높은 포도주로 변화됩니다.
그 양이 어마어마합니다. 600리터의 포도주입니다.
포도주가 넘치도록 풍성한 것은 언젠가 맞이하게 될
하느님 나라의 풍요로움과 행복,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상징하는 예표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