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1월 25일 전라남도 해남군 북일면 신월리에서 태어나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 재수하여 1972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미학과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1973년 박정희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강제로 감옥에 수감되었다. 1980년 봄에 5.18 민주화운동 가담으로 구속되었는데, 1979년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서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었던 그는 구속된 탓에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당했다.
경찰에서 고문 끝에 풀려난 뒤 1981년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하여 1985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에 들어가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1994년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활동하다가 1997년에 한국예술종합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 한예종의 총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연혁'을 입선하였고 '나는 너다'는 시문에서 마르크스주의적인 내용으로 한 때 논란이 되었으나 이것은 승려로 있던 형과 철학자이자 노동 운동가였던 동생 황광우에게 주는 헌시(獻詩)로 알려졌다.
한국 해체시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수 없는 시인으로 도표나 특수 문자, 그림들을 도입해 혁신적인 시작법으로 유명해졌다. 후기로 갈수록 연극에 관심이 많아져 연극적인 요소들이 강해지는 편. 가족 이력 때문에 불교적인 색채도 있는 편이다.
전반적으로 군부 독재 시절 한국의 암울함을 풍자하거나 저항하는 내용들이 많으나, 서정시도 자기식으로 구사해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획득했기도 했다. 친구였던 이성복과 더불어 1990년대 젊은 시인들에게 많이 영향을 줬다.
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시
공혜경 낭송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곱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 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