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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楚漢誌) (122) 가을 달밤 옥퉁소에 무너지는 초군 병사
한신은 항우를 생포하려고 구리산에 <십면 매복>의 덧을 설치 했다가 실패하고 나자 크게 낙심하였다.
그리하여 이좌거를 불러 상의한다.
"항우가 워낙 천하 제일의 맹장이어서, 우리는 그를 생포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전차(戰車)로 구리산을 포위하고 있으면, 항우가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노라면 초군은 군량이 떨어지고 구원병은 오지 못해 결국은 항복하지 않을 수가 없겠는데, 선생께서는 이 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
이좌거가 대답한다.
"항우의 용맹이 제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필부의 만용에 지나지 않습니다. 염려되는 것은 그의 곁에는 계포, 주란,종이매 등 몇몇 용장들과, 항우를 근거리에서 밀착하여 그를 호위하고 있는 8천여 명의 친위 부대(親衛部隊)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군량이 떨어지더라도, 끝까지 거세게 저항을 해올 것이 분명한데, 우리가 그들을 이겨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굳게 뭉쳐 있는 항우의 친위 부대를 어떻게 해야 흐트려 놓을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 이번 싸움에서의 최대에 관건이라고 생각하옵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의 포위망을 뚫고 강동으로 이동하여 군비(軍備)를 새로 갖추게 되면 그때에는 항우를 영원히 정벌할 수가 없을 것이오니, 원수께서는 그 점에 각별한 고려가 있으셔야 하옵니다."
한신은 머리를 무겁게 끄덕이며 말한다.
"선생은 참으로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아무리 궁리를 하여도 좋은 계략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장량 선생을 모셔다가 함께 의논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
"그거 참 좋은 생각입니다. 장량 선생이라면 반드시 좋은 묘책을 말씀해 주실 것이옵니다."
그리하여 한신은 즉석에서 육가를 보내어 장량을 모셔 왔다.
그리고 그간의 경과 내용을 낱낱이 말해 주고 나서 물었다.
"항우에게는 계포,주란,종이매 등 몇몇 충신들과 8천여 명의 친위 부대가 철통같이 뭉쳐 있어서 그들의 단결을 무너뜨리기 전에는 우리가 승리할 가망은 전혀 없사옵니다.
어떻게 하여야 그들의 결속을 무너뜨릴 수가 있을지, 좋은 지혜를 가르쳐 주소서."
장량은 즉석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걱정을 하시오 ? 장수들의 충성심을 무너뜨리고, 친위 부대를 뿔뿔이 흩어 놓기만 하면 항우를 생포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오."
한신은 그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뻤다.
"무슨 수를 써야 그들을 뿔뿔이 흩어 놓을 수가 있을지, 구체적인 계획을 들려주소서."
장량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들의 마음을 산산조각으로 부수려면 옥퉁소 한 가락이면 충분할 것이오. "
하고 지극히 간단하게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
한신과 이좌거는 너무도 뜻밖의 대답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옥퉁소 한 가락이면 적의 결속을 산산조각으로 부술 수가 있다니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
장량은 너털 웃음을 웃어가며 말한다.
"두 분은 퉁소도 모르시오 ? 퉁소, 이 퉁소 한 곡조만 잘 불면, 친위 병사들의 결속을 산산조각으로 와해 시킬 수가 있다는 말이오."
"퉁소 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소리는 들어왔사오나, 그같은 옥퉁소를 언제 누가 ,어떤 방법으로 분다는 말씀입니까 ?"
"누가 불기는..퉁소를 제대로 불 줄 아는 사람이 나밖에 누가 있겠소 ? 결국은 내가 불어야 하겠지요."
"에엣 .... ? 선생께서 퉁소를 ? "
한신은 장량의 대답에 또 한번 놀라며,
"선생께서 퉁소를 잘 부신다는 말씀을 한 번도 들어 본 일이 없사온데, 선생께서는 퉁소를 그 처럼 잘 부시옵니까 ?"
하고 물었다.
장량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한다.
"내가 퉁소를 배우게 된 연유를 말슴드리지요. 그 옛날 내가 젊었을 때, 나는 하비라는 곳으로 놀러 갔다가, 퉁소를 잘 부는 기인(奇人)을 한 사람 만난 일이 있지요.
그 사람은 퉁소를 기가막히게 잘 불었는데, 그 사람 말에 의하면 <퉁소는 모든 고락(古樂)의 근본으로서, 황제께서 창시(創始)한 악기>라는 거였소.
그 사람은 퉁소를 어떻게나 잘 불었는지, 그 사람이 퉁소를 불기만 하면 공작(孔雀)과 백학(白鶴)들이 몰려와 춤을 추는 것이었소. 그러나 그뿐이오 ?
그 사람이 퉁소를 기쁘게 불면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가 기뻐하였고, 그 사람이 퉁소를 슬프게 불면 고향을 떠나 있던 사람들은 고향 그리움에 모두들 눈물을 짓더란 말이오.
그 사람이 퉁소를 그렇게도 잘 불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를 <선인 소사(仙人蕭史)>라는 별칭으로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의 퉁소 소리에 반해, 며칠을 두고 퉁소 소리를 즐기다가, 결국은 그 분에게 퉁소를 배우기로 했지요. 물론 <선인 소사>에게 비하면 나의 퉁소 실력은 문제가 안 되오. 그러나 나도 퉁소를 어느 정도는 불 수 있다오."
한신은 그 소리를 듣고 또 한 번 놀라며,
"그러면 선생께서 퉁소로써 항우의 친위 부대의 결속을 산산조각으로 분쇄해 주시옵소서. 수고스러우시겠지만, 꼭 부탁드리옵니다."
하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장량이 웃으면서 대답한다.
"나의 퉁소는 <선인 소사>처럼 신의 경지에 도달해 있지는 못하오. 그러나 때마침 고향을 떠나 싸움터에 있는 병사들이 감상(感傷)에 젖기 쉬운 가을철이라, 내가 퉁소를 불어도 효과는 반드시 있을 것이라 생각되오."
한신과 이좌거는 장량의 말을 듣고 머리를 수그리며 간곡히 부탁한다.
"선생께서 그런 비술(秘術)을 가지고 계시면, 퉁소를 꼭 한 번 불어 주시옵소서. 그래 주셔야만 저희들이 쉽게 승리할 수가 있을 것이 아니옵니까 ?"
장량이 대답한다.
"두 분께서 이처럼 부탁하시니 내 어찌 거절할 수가 있겠소. 그러나 퉁소를 불어서 신효(神效)를 거두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걸맞는 노래가 따라야 하는 법이오.
가사(歌詞)는 물론 내가 짓겠지만, 퉁소의 곡에 따라 그 노래를 불러 줄 가수(歌手)도 백여 명 가량 연습을 시켜야 하오. 그러므로 아무리 빨라도 준비 기간이 4,5일 걸릴 것이니 원수는 그동안 포진(布陳)을 단단히 쳐 놓고 기다리시오."
한신은 장량의 권고대로 군량을 풍부하게 비축함과 동시에, 번쾌를 산상에서 적의 동태를 계속 정찰하며 관망하도록 시키고, 관영을 초군 진지 좌우에 매복시켜 놓았다.
이렇게 항우가 나타나기만 하면 즉각 생포해 버릴 태세를 갖춰 놓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항우는 성녀산(聖女山)기슭에 진을 치고, 날마다 적의 움직임을 상세하게 알아 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계포와 항백이 달려와 아뢴다.
"지금 우리는 군량도 떨어져 가고, 마초(馬草)도 떨어져 가고 있어서, 군사들의 사기가 말이 아니옵니다. 이런 때 적이 쳐들어 오면 우리는 속수 무책으로 무너지게 생겼습니다.
하오니 목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우선 철수하는 것이 상책일 것 같사옵니다."
항우는 그 보고를 받고 기가 막혔다.
"우리가 지금 적에게 물샐 틈 없이 포위되어 있는데, 어디로 철수하자는 말인가 ?"
"폐하께서는 친위대 8천 명을 거느리고 이곳을 먼저 떠나시어 형주,양양을 거쳐 강동(江東)으로 가시옵소서. 그러면 저희들도 뒤따라가, 강동에서 재기(再起)를 노리도록 하겠습니다.
"적의 포위망을 어떻게 돌파할 수가 있을지, 그게 문제가 아니오 ?"
항우의 입에서 이처럼 나약한 말이 나올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기에 계포는 크게 낙심하여 대답한다.
"8천여 명의 친위 부대만은 아직도 사기가 꺾이지 않았사오니,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데는 큰 문제는 없을 것이옵니다.
폐하께서는 지금까지 보여 주신 용력(勇力)으로 적의 포위망을 돌파해 주신다면, 저희들은 우후(虞后)를 모시고 뒤따라 철수하겠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항우는 비장한 어조로 말한다.
"그러면 내일 밤 야음(夜陰)을 틈타 철수하기로 합시다."
이리하여 항우는 전군에 철수 준비령을 내렸다.
때마침 고향이 그리워지는 가을철인지라, 초군 병사들은 지루한 싸움을 뒤로 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에 부풀어, 모두들 <싱숭생숭>마음이 몹시 산란하였다.
초군 병사들은 철수 준비를 서두르며, 자기들끼리 서글픈 말을 지껄여대고 있었다.
"제길헐, 싸움에 이기고 있었다면 별 탈이 없을 것인데, 이건 마냥 지고만 있으니 어느 세월에 고향으로 돌아가 볼까나 ?
그나저나 전쟁통에 고향에 부모 처자는 생사조차 모르고, 우리는 배를 곯고 있으니, 이런 신세로 어떻게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한나라 군사들을 뚫고 나갈 것인가 ?"
"그러게나 말이야 ! 이번 싸움에서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어."
때마침 가을 바람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달빛은 휘엉청 밝은데 풀벌레 조차 <씨렁씨렁> 울고 있었다.
이렇게 병사들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삼삼 오오 무리 지어 고향 생각에 잠겨 있는데, 홀연 저 멀리 산 위에서 퉁소 소리가 바람을 타고 아득하게 들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저게 웬 퉁소 소리야 ?"
초군 병사들은 하나 둘 하던 말을 멈추고 아득히 들려 오는 퉁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폐부를 파고드는 듯이 애절한 퉁소 소리였다. 모두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듣노라니까,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눈물을 흘러내리게 할 슬프고 애절한 퉁소 소리는 저절로 이를 듣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애간장(肝腸)을 녹이는 것이었다.
초군 병사들은 가슴이 메어 오는 슬픔을 느끼며, 아득히 들려 오는 퉁소 소리에 정신없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윽고 퉁소 가락에 맞추어 노래 소리가 여기저기서 아득히 울려 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九月深秋兮 四野飛霜 : 구월심추혜 사야비상
구월의 가을은 깊어 들에는 서리가 날리고
天高水후兮 寒雁悲愴 :천고수후혜 한안비창
하늘은 높아 물은 말라 가고 기러기떼는 슬피우네
崔高戌邊兮 日夜疆場 : 최고술변혜 일야강장
싸움은 마냥 고달퍼서 밤과 낮이 모두 괴로운데
披堅執銳兮 骨立沙岡 : 피견집예혜 골입사강
적은 세차게 몰아쳐 와서 모래 언덕에 백골을 쓰러뜨리네
고향을 떠나 어언 십여 년 부모와 생이별을 했고
難家十年兮 父母生別 : 난가십년혜 부모생별
처자식인들 얼마나 외로우랴 가도가도 독수 공방인 것을
妻子何堪兮 獨宿閨房 : 처자하감혜 독숙규방
메말라 가는 고향의 밭은 그 누가 가꿀 것이며
故山수土兮 孰與之守 : 고산수토혜 숙여지수
이웃집에 술이 익더라도 누구와 더불어 마실것인가
隣家酒熱兮 誰與之嘗 : 인가주열혜 수여지상
늙은 부모는 문간에 기대어 가을 달만 처량히 바라보고
白髮倚門兮 望穿秋月 : 백발의문혜 망천추월
어린것은 굶주림에 울어 애간장이 끊어질 노릇이네
穉子啼飢兮 沮斷肝腸 : 치자제기혜 저단간장
말이 바람에 울부짖음도 또한 고향을 그리워 함이려니
胡馬嘶風兮 尙知戀土 : 호마시풍혜 상지련토
나그네 길이 아무리 오래기로 어찌 고향을 잊고 지내리오.
人生客久兮 寧忘故鄕 : 인생객구혜 영망고향
...
슬픈 노래는 옥퉁소 가락을 타고 끊길 듯 이어지며 한없이 계속되어, 이를 하염없이 듣고 있는 초군 병사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말할 것도 없이 폐부를 후벼파는 슬픈 곡조의 욱퉁소를 불고, 가을 달밤에 고향 생각에 빠져들도록 처량 맞기 그지 없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장량과 그의 부하들이었다.
이렇게 장량과 그의 부하들이 계명산을 오르내리며 옥퉁소를 높고 낮게 불며 노래를 함에 따라, 그 여운은 때로는 만학(萬鶴)이 구천(九天)에서 흐느껴 우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철석 간장을 속속들이 녹여 내는 것 같이 들리기만 하였다.
더구나 달빛은 밝고 바람은 차거워서 퉁소 소리와 노랫소리는 초군 병사들의 오장 육부를 자꾸만 파고들어 이들은 고향 생각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노랫소리에 심취한 초군 병사들은 눈물을 흘려가며 저희들끼리 중얼거린다.
"천지 신명께서 우리를 살려 주시려고 신선을 보내 퉁소를 불게 하심이 분명하지 않은가 ?"
"조만간 한군이 쳐들어 오면 제대로 먹지도 못한 우리가 어떻게 싸울 수가 있을 것인가 ?"
"그러려니 천지 신명께서는 우리를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저렇듯 애절한 가락을 들려 주시는 것이 아닌가 ?
이제 우리가 이런 계시를 무시하고 끝까지 이번 싸움에 나서는 것은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아니겠나 ? 때마침 닭이 밝아 고향으로 떠나기도 적절하니, 나는 군영을 벗어나 고향으로 떠나겠네."
몇몇 병사가 이런 말을 하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누군가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좋은 생각이야. 우리가 도망을 가다 붙잡히기로, 한왕은 설마 우리를 죽이기야 하겠어 ?
그러니 더 이상 주저말고 모두들 고향으로 가기로 하세 ! "
상황이 이렇다 보니, 초군 병사들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무기와 갑옷을 던져 버리고 총총히 고향 하늘이 보이는 길로 떠나기 시작 하였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그 수효가 불어나 나중에는 10여 명씩, 20명씩 공공연하게 떼를 지어 나서는 것이 아닌가 ?
이렇게 밤이 삼경에 이르렀을 때에는, 그처럼 충성심이 강했던 항우의 친위대 병사들은 거의 모두 고향으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계포와 종이매 항백등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크게 당황하며 중군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이미 때는 삼경을 넘긴 시간으로, 항우는 우미인과 함께 깊은 잠에 잠긴채 아무리 인기척을 하여도 대답조차 없었다.
항백은 한숨을 쉬며 계포, 종이매에게 묻는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던 친위병들조차 모두 뿔뿔이 달아나 버려서 이제는 우리만이 남게 되었소.
만약 한나라 군사들이 이런 때 쳐들어 오게 되면 주공은 포로가 되어 생명을 건질 수가 있겠지만, 우리들은 죽음을 면하기가 어려울 것이오.
그렇다면 우리들도 군사들과 같이 도망을 갔다가 후일 좋은 때에 다시 모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는 데. 장군들의 생각은 어떠하시오 ?"
계포와 종이매도 한숨을 쉬면서 대답한다.
"아닌게아니라, 모두가 여기서 함께 죽는 것은 그야말로 개죽음이오. 우리도 병사들 처럼 도망을 갔다가, 후일을 기약하기로 합시다."
이리하여 초나라 대장들조차 자고 있는 항우를 그냥 내버려둔 채, 제각기 보따리를 싸들고 뿔뿔이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항백은 친구인 장량을 찾아 가기로 하고, 발길을 한군의 진영을 향했다.
나름 항백의 생각으로는 자신이 한왕과 처남 매부지간이므로 잘만 하면 항우를 대신해, 후일 초왕후(楚王后)로 책봉되어 영화를 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조차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주란과 환초는 도망가는 동료들을 눈물로 비웃으면서,
"명리에 눈이 어두워 의리를 배반하는 자는 개만도 못한 놈들이다. 우리 두 사람은 주공과 생사를 끝까지 같이하면서 최후의 순간까지 초나라를 지키리라."
하고 말하며 남아 있는 군사 8백여 명을 규합하여 진중을 굳게 지켰다.
이렇듯 초패왕 항우는 이미 바람앞의 등불의 신세가 되어 버렸건만, 주란과 환초만은 끝까지 남아 있었으니, 이것을 불행중 다행이라고 하여야 할까 ?
도대체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무엇이란 말인가 ?
...
사면초가(四面楚歌)
: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고립무원의 상태
초나라와 한나라가 휴전을 한 지 두 달이 채 못 되어, 유방은 한신·팽월·영포 등 세 장군이 거느리는 세 군대를 한데 모아서 한신이 통수하게 하여 항우를 추격했다.
기원전 202년, 한나라군은 항우를 해하(垓下, 안휘성 영벽현 동남쪽)에서 포위했다.
한신은 해하 주변에서 그 유명한 십면매복(十面埋伏) 전술을 행했다.
항우의 군대는 군사와 말이 줄어들고 식량마저 바닥이 났다.
그래서 포위를 뚫고 나가려고 애를 썼으나 한나라군과 다른 제후들의 군대가 겹겹이 포위하고 있어서 도저히 뚫고 나갈 수가 없었다.
뚫고 나가면 포위망이 조여들고 물리치면 또 적들이 조수처럼 진격해 들어와서 기진맥진한 항우는 해하에다 진을 치고 방어를 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날 저녁에 항우가 군막 안에서 수심에 잠겨 있을 때 그가 총애하는 우희(虞姬)라는 미인이 술을 권했다.
그런데 자정이 되자 서풍이 불어오더니 이어서 구슬픈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귀기울여 들어보니 한나라 군영에서 나는 소리였는데, 노래는 초나라 노래였고 부르는 사람 수가 대단히 많은 것 같았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 노래를 듣던 항우는 실성한 사람처럼 외쳤다.
“큰일났군, 큰일났어. 유방이 초나라를 점령한 모양이군.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많은 초나라 사람이 한나라 군영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항우는 수심에 잠겨 비장한 노래를 불렀다.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천하를 덮을 만하건만
시운이 불리하여 오추마(항우의 애마)도 나아가지 않네.
오추마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을까!
우희여, 우희여!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항우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곁에 있던 우희와 시종들도 모두 슬픔에 잠겨 눈물을 흘렸다.
그날 밤, 항우는 오추마에 올라 자제병 8백을 데리고 한나라 군영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뚫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날이 밝은 후에야 항우가 도망쳤음을 안 한나라군은 기병 6천을 보내어 추격했다.
항우가 회하에 이르렀을 때 수하에 남은 장병은 겨우 1백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추격해 온 유방의 군대가 또다시 포위해 오자, 항우는 수하 장병들에게 말했다. “내가 군사를 일으킨 지 8년이다.
그 동안 큰 싸움을 70여 차례 치렀으나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천하의 패왕이 되었는데 오늘 이렇게 놈들에게 포위당하다니, 이건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지 내가 그들한테 진 것이 아니다.”
말을 마친 항우는 겹겹의 포위를 뚫고 나가 오강(烏江, 안휘성 화현 동북쪽)에 이르렀다.
그때 항우의 곁에는 이십여 명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마침 이때 오강의 정장이 배를 몰고 왔다.
배를 기슭에 댄 정장은 속히 배에 오르라고 항우를 재촉했다.
“강동은 비록 작지만 1천여 리가 넘는 땅이 있고 수십 만이 되는 인구가 있습니다.
강을 건너 강동에 이르면 왕위에 오르실 수 있습니다.”
그러자 항우는 슬픈 미소를 띄며 말했다.
“애당초 내가 회군에서 군사를 일으켰을 때 8천 강동 자제병을 거느리고 장강을 넘었소.
그런데 그들은 한 사람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소.
그러니 비록 강동의 고향 사람들이 나를 동정해 왕으로 세운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들을 볼 면목이 없소.”
항우는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오추마를 정장에게 넘겨주었다.
수하 장병들도 모두 말에서 내렸다.
손에 단도를 틀어쥔 그들은 추격해 온 한나라 병사들과 육박전을 벌였다.
몇백이 넘는 한나라군이 쓰러지는 와중에 항우의 군사들도 하나둘씩 쓰러졌다.
가혹한 싸움에서 열 군데가 넘는 상처를 입은 항우는 오강 기슭에서 목을 베어 자살했다.
위 그림은 虞姬가 자결 직전 項羽의 칼을 빌려 칼춤을 추는 모습입니다..
자기 힘만 믿고, 우직하지만, 오로지 虞姬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項羽를 전쟁터에 보내는 心情은 남편이기 前에 마치 어린아이를 물가에 보내는 안타까운 母性愛가 겹쳐졌을테니 그의 죽음을 어찌 눈뜨고 지켜 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차라리 먼저 죽고 말지..
두 사람의 운명적 절실한 사랑과 이별이 2천2백년이 지난 지금도 심금(心襟)을 울립니다..
초한지 (楚漢誌) (123) 우야 우야 이를 어쩔 것이냐 (虞兮虞兮 可奈何 : 우혜 우혜 가내하)
항우는 밤 사이에 이변(異變)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우미인과 함께 잠을 자다가 문득 잠결에 들으니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랫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고 있지 않은가 ?
"아니, 이게 웬 초나라 노랫소리냐 ? 내가 지금 고향에 돌아왔더란 말이냐 ?"
항우는 소스라치게 놀라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 보아도 잠을 깬 곳은 틀림없는 군영(軍營) 막사가 아니던가 ?
그리하여 항우는,
"밖에 누구 없느냐 !
하고 큰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그러자 주란과 환초가 부리나케 달려와 울면서 아뢴다.
"폐하 ! 한신이란 놈이 간밤에 산상에서 퉁소로 초나라 노래를 불러대는 바람에, 우리 군사들이 산란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고향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8천여 명에 달하던 병사들은 물론, 계포와 종이매조차도 달아나 버려서, 이제 남은 군사는 우리 두 사람과 8백여 명의 결사 대원들뿐이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기절 초풍을 할 듯이 놀랐다.
"뭐야 .... ? 계포와 종이매까지 달아나 버렸다구 ? "
"그러하옵니다. 폐하. 모두 달아나 버려서 이제는 적을 막아낼 수가 없사오니, 폐하께서도 몸을 피하셔야 하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한다.
"세상에 이럴 수가 ! 세상에 이럴 수가 ....! 오오, 하늘이 정녕 나를 버리신다는 말인가 ?"
그 탄식성이 너무도 비통하여 계포와 종이매조차 흐느껴 울기까지 하였다.
우미인은 너무도 놀라운 사실을 항우와 함께 듣고,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온 몸을 떨고만 있었다.
항우는 그러한 우미인을 돌아보며,
"내가 당신과 함께 창검과 화살이 난무하는 적의 포위망을 뚫고 무사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당신은 내가 적의 포위망을 뚫고 싸움을 하는 틈을 보아서 허술한 곳으로 스스로 도망을 쳐라.
이제 내가 당신과 헤어져 어디론가 도망을 갈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구나.
당신과 더불어 부부의 정을 나눠 온지가 이러구러 7,8년. 천군 만마의 진중에서도 떨어지지 않았던 우리였건만 이제 기약없는 이별을 하려니 가슴이 메어 오는구나 !"
하고 말하며 땅을 치며 통곡하는 것이었다.
항우에게는 나라가 망하게 된 목전의 위기도 슬픈 일이었지만, 내 몸같이 사랑하는 아내와 영원히 헤어진다는 것은 더 한층 슬픈 일이었던 것이다.
우미인은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땅에 쓰러져 울기만 하였다.
숨막히는 슬픔이 계속되자, 항우는 아내의 어깨를 두드려 주면서 말한다.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 당신은 속히 일어나 살 길을 찾아가거라 ! "
우미인은 정신없이 흐느껴 울다가, 문득 얼굴을 고즈녁이 들어 남편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나무라듯 말한다.
"폐하 ! 지어미가 지아비를 내버리고 어디로 가라고 신첩더러 도망을 가라고 하시옵니까 ! 신첩은 폐하의 말씀이 너무도 원망스럽사옵니다 ! "
항우는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씹어 삼키며 냉정한 어조로 아내를 달래듯이 말한다.
"당신은 아직도 젊은 몸이니, 어디를 간들 살 길이 없겠는가 ? 나를 생각지 말고 빨리 이곳을 떠나도록 하거라."
우미인은 탄식하듯 말한다.
"신첩은 오랫동안 폐하의 은총을 입어 오면서, 언제든지 폐하와 생사를 같이할 결심을 해왔사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혼자만 살 길을 찾아가라고 하시니, 그 무슨 무정한 말씀이시옵니까."
항우는 가슴이 메어 와서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말한다.
"나라가 망했으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할 몸이다. 그러나 앞길이 구만 리 같은 당신까지 나를 따라서 죽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
항우는 그 한 마디를 씹어 던지고 부랴부랴 갑옷을 추스려 입고 밖으로 달려 나가 애마(愛馬) 오추의 등에 올라타며 박차를 가했다. 아내를 내버려둔 채 자기만이 죽을 길을 찾아 나서려는 것이었다.
항우가 우미인을 내버려두고 혼자 적진을 향해 돌파하려는 것은 어쩌면 우미인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항우가 말 위에 올라 아무리 박차를 가해도, 오추는 웬일인지 그 자리에 선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 우미인이 허둥지둥 쫒아 나와 항우의 옷소매를 움켜 잡으며 애원하듯 말한다.
"폐하 ! 아무리 떠나시더라도 신첩의 이별주(離別酒)를 한 잔 드시고 떠나셔야 할 것이 아니옵니까 ?"
"오오, 당신이 주는 이별주라면 내 어찌 마다 하겠는가. 어서 술을 가져오거라."
우미인은 몸소 술상을 들고 나와 마상의 항우에게 이별주를 따라 올리며 말한다.
"폐하께서는 신첩의 선녀무(仙女舞)를 무척 좋아하셨으니, 마지막으로 선녀무를 한 가락 추어 올리겠나이다."
그리고 우미인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려 가며 아리따운 몸매로 선녀무를 너울너울 추기 시작하였다.
우미인의 선녀무는 그야말로 천하의 일품이었다.
그녀의 사뿐사뿐 옮기는 발걸음에서는 삼현 육각(三炫六角)이 소리 없이 울려 퍼지는 것 같았고, 기나긴 옷소매를 허공에 높이 치켜 올릴 때에는 선녀가 바야흐로 우화등선(羽化登仙) 하려는 것 같아서 그지없이 아름다웠다.
그러면서도 그 춤에서는 슬픔이 안개처럼 솟아올라 보여서, 손에 술잔을 든 채 우미인의 선녀무를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는 항우의 눈에서는 구슬 같은 눈물이 연실 흘러 내렸다.
항우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가며 춤을 추고 있는 우미인(虞美人)을 정신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춤사위에 맞추어 즉흥시를 읊기 시작하였다.
...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천하를 덮건만
力拔山兮 氣蓋世 ( 역발산혜 기개세 )
시세가 불리함에 말조차 나가지 않네
時不利兮 추弗逝 (시불리혜 추불서)
말이 나가지 않으니 이를 어쩔 것이냐
추弗逝兮 可奈何 (추불서혜 가내하)
우야 우야 이를 어쩔 것이냐
虞兮虞兮 可奈何 (우혜우혜 가내하)
우야 우야 이를 어쩔 것이냐
虞兮虞兮 可奈何 (우혜우혜 가내하)
...
항우가 즉흥시를 슬프게 읊고 나자, 우미인은 춤을 추어 가며 화답(和答)을 한다.
한나라 군사가 쳐오면서 사방은 노래뿐이고
漢兵巳略 四方楚歌聲 (한병사략 사방초가성)
대왕께서 의기를 잃었으니 신첩인들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
大王意氣盡 賤妾何聊生 (대왕의기진 천첩하료생)
...
항우와 우미인은 이별이 서러워 노래를 주고 받으며 언제까지나 헤어질 줄을 몰랐다.
부부의 애절한 이별을 눈물로 지켜 보던 주란과 환초는 먼 동이 터오는 하늘을 손으로 가르키며 항우에게 아뢴다.
"폐하 ! 동이 터오기 시작하니, 적의 무리가 언제 덤벼올지 모르옵니다. 어서 빨리 떠나셔야 하옵니다."
항우는 그제서야 아내에게 달래듯 말한다.
"적들이 몰려오기 전에 나는 어디론가 떠나가야만 하겠다. 당신도 속히 피신하여 목숨을 보존토록 하라. 우리들의 운명이 다하지 않았다면, 언제 어디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우미인은 항우의 옷소매를 부등켜잡고 울면서 호소한다.
"낭군 혼자만 떠나시면, 저더러 어디로 가라는 말씀이시옵니까 ?"
항우가 대답한다.
"당신은 얼굴이 아름다워 유방도 당신만은 결코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죽을 걱정은 하지도 마라."
그러자 우미인은 몸부림을 치며 앙탈하듯 외친다.
"신첩은 폐하와 함께 도망을 가다가 적의 손에 붙잡히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결심이옵니다. 설사 육신이 진토가 되더도 혼백만은 폐하를 따라서 초나라로 돌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항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안 될 말이다. 아무 죄도 없는 당신을 내 어찌 나와 함께 죽자고 할 수가 있겠는가 ? 나는 도망을 치다 죽을 결심이지만, 당신까지 죽게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미인은 항우의 옷소매를 움켜잡으며 다시금 애원하듯 말한다.
"정말로 그러하시다면 신첩의 마지막 소원을 하나만 들어주시옵소서."
항우도 <최후의 간청>만은 거절할 수가 없어서,
"이 판국에 무슨 소원이 있단 말이냐. 그것만은 들어 줄테니, 어서 말해 보아라."
하고 재촉하였다.
우미인이 말한다.
"바라옵건대 폐하의 보검(寶劍)을 신첩에게 이별의 정표로 내려 주시옵소서. 신첩은 어디로 가나 그 보검을 폐하로 알고 받들어 모시겠사옵니다."
눈물겹도록 슬픈 아내의 마지막 간청이었다.
아무려니 항우도 그것만은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허리에 차고 있던 보검을 아낌없이 풀어주면서 말한다.
"그런 소원이라면 어찌 들어주지 않겠냐. 어서 받아라."
우미인은 보검을 받아들고 나더니, 비장한 어조로 항우를 힘차게 부른다.
"폐하 ! "
"무슨 일이냐 ? "
"신첩이 폐하를 따라 나서면 폐하는 저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실 것이옵니다. 그러기에 신첩은 이 자리에서 죽기로 결심하였으니, 폐하께서는 이 순간부터 신첩을 잊으시고 신속히 피신하시옵소서."
우미인은 그 한 마디를 남기고 그자리에서 항우로부터 받아든 보검으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것이었다.
우미인이 항우에게 이별의 보검을 달라고 한 것은 스스로 자살을 하기위한 구실이었던 것이었다.
말릴사이도 없이 벌어진 참극을 눈앞에서 당한 항우는 말에서 뛰어내려 우미인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통곡을 하였다.
그러자 한참을 지켜보던 주란이 다가와 항우를 잡아 흔들며 간한다.
"폐하께서는 이 판국에 천하 대사를 잊고 슬픔에 잠기실 때가 아니옵니다. 사태가 위급하오니 속히 이 자리를 떠나셔야 하옵니다."
항우는 눈물로써 우미인의 시체와 작별 하고, 8백여 기의 부하들과 함께 울면서 도망길에 올랐다.
얼마를 앞으로 가니, 한군의 포위망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자 항우는 일행을 두 패로 나눠, 항우가 먼저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데. 한나라 대장 관영이 많은 군사들로 앞길을 막아선다.
항우가 폭풍처럼 달려 나가 관영과 싸우기를 10여 합, 관영이 힘에 부쳐 도망을 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항우는 추격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 길만 달려나갔다.
이때 번쾌가 산상에서 이 광경을 보고 붉은 깃발은 사방으로 휘두르니, 이번에는 한나라 군사들이 사면 팔방에서 일시에 들고일어나는 것이었다.
한편, 주란과 환초도 항우의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한장(漢將) 조참이 유가,왕수,주종,이봉 등의 네 부장들과 함께 총공격을 퍼부어 오는 것이었다.
주란과 환초는 결사적으로 싸워 적들을 가까스로 물러가게 하고 뒤를 돌아 보니, 이제는 남아 있는 병사라고 해 보아야 고작해야 20여 기만 남았을 뿐이 아닌가 ?
"이제 앞으로도 적군을 수없이 만나게 될 터인데, 20여 기로서야 어찌 그들을 막아낼 수가 있을 것인가 ? 그렇다면 적의 손에 처참하게 죽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어 버리자 ! "
주란과 환초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해 마지 않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니, 나머지 20여 명의 친위대의 남은 군사들도 두 사람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항우는 주란과 환초가 자결한 사실도 모르고, 1백여 기의 부하들과 함께 한군의 포위망을 뚫고 앞으로 앞으로만 달려 나갔다.
그리하여 회하(淮河)에 당도하니, 마침 물가에 나룻배 한 척이 있었다.
"모두들 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자 ! "
몇 번의 나룻배 행보로 항우를 비롯한 남은 백여 명의 친위대는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10여 리를 더 달려 음릉(陰陵)이라는 곳에 당도하니, 산길은 두 갈래로 갈려져 있어서, 어느 길이 강동으로 가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마침 늙은 농부 하나가 밭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항우는 농부 곁으로 달려가 다급하게 물었다.
"여보게 ! 강동으로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 하는가 ?"
"....."
농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항우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리고는 마음 속으로,
(이 사람이 비단 전포(戰袍)에 황금 투구를 쓴 것으로 보아, 보통 사람이 아닌게로다 ! 그렇다면 초패왕이 아니런가 ? 초패왕이라면 우리네 백성들을 무던히도 괴롭혀 온 인물이니, 이런 자를 구해주었다가는 천벌을 받게 되리라...)
늙은 농부는 이런 생각이 들어, 대답을 아니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항우는 다급한 어조로 다시 묻는다.
"이 사람아 ! 나는 초패왕일쎄. 한나라 군사들에게 쫒겨 강동으로 피신하는 길이니, 길을 빨리 알려 주게 ! "
농부는 상대방이 항우라는 것을 확신하자,
"강동으로 가는 길은 왼쪽 길이옵니다."
하고 일부러 엉뚱한 길을 가리켜 보였다.
항우는 농부의 말을 믿고 그 길로 달려 가다가 깊은 수렁에 빠져 무진 애를 먹었다.
가까스로 수렁에서 빠져나와 얼마를 더 달려가다가 우연하게도 그 지방 태수(太守)인 양희(楊喜)를 만나게 되었다.
양희는 한 무리의 군사를 몰고 급히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항우는 크게 기뻐하며 양희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여보게 양희 장군 ! 그대는 과거에 나의 부하가 아니었던가 ? 나는 지금 강동으로 가는 길이니, 그대도 나와 함께 강동으로 가기로 하세.
내가 강동에서 재기(再起)하는 날에는 자네를 만호후(萬戶侯)에 봉해 주기로 하겠네."
양희가 냉소를 하면서 대답한다.
"당신은 현사(賢士)들의 충간(忠諫)을 듣지 않았다가 오늘날 이꼴이 된 게 아니오 ? 당신이 강동으로 도망을 간다 한들 어떻게 재기를 할 수 있단 말이오 ?
나는 이미 한왕에게 귀순하여 당신을 잡으러 나온 길이오. 그러나 옛날의 의리를 생각해 당신을 차마 내 손으로 잡아 갈 수는 없구려. 당신도 나처럼 한왕에게 귀순하여 오래도록 부귀와 영화를 누리도록 합시다."
항우는 양희에게 <항복 권고>를 듣는 순간, 모욕감이 열화같이 치밀어 올랐다. 그리하여 장창을 번개같이 휘둘러 양희를 찔러 죽이려고 하니, 양희가 몸을 번개같이 피하며 정면으로 대들었다.
두 장수가 무섭게 싸우기를 20여 합, 항우가 양희의 머리 위로 최후의 철퇴를 내려갈기려는 바로 그 순간, 벼락같이 양무,왕익, 여승,여마통 등의 맹장들이 일시에 함성을 울리며 항우에게 덤벼들었다.
항우는 그 많은 한군 대장들과 단독으로 싸우기 시작하였다.
생사를 걸고 싸우는 무서운 싸움이었다. 항우의 용맹이 어떻게나 뛰어났던지 7,8명의 맹장들과 싸워도, 오히려 항우가 유리해 보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영포,팽월,왕릉,주발 등이 한꺼번에 몰려와 항우에게 덤벼드는 것이었다.
항우는 그들을 상대로 10여 합을 더 싸우다가 승리할 가망이 없어 보이자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동쪽으로 비호같이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항우가 타고 있는 <오추>는 천하의 명마인지라, 그를 따라잡을 장수는 아무도 없었다.
항우는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깊은 산길을 한없이 달려 나갔다. 그리하여 5,60리쯤 쫒겨가 뒤를 돌아다보니, 그를 따라오는 부하는 불과 50여 기에 지나지 않았다.
항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 보니, 어느덧 해는 서산너머로 저물어 가는데, 문득 깨닫고 보니, 모두들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부하들이 항우에게 아뢴다.
"말도 말이지만, 우선 저희들이 배가 고파 더 이상 달릴 수가 없사옵니다. 적들이 여기까지는 쫒아오지 못할 것이니, 오늘 밤은 가까운 민가(民家)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야간 행군을 무리하게 계속하다가는 어떤 불상사가 있을 지 염려 되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옳게 여겨 사방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 아득한 숲속에 가냘픈 불빛이 하나 보였다.
"저기에 인가가 있는 모양이니, 저기로 가보자."
일행이 말을 끌고 불빛을 찾아가 보니, 그 집은 여염집이 아니라 흥교원(興敎院)이라는 고원(古院)이었다. 그곳은 뜰 앞에 시냇물이 흘러가고 있고, 마당가에는 기암 괴석들이 층층을 이루고 있었다.
안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오건만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항우는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부하에게 말했다.
"칼이 무뎌졌으니, 여기서 내 칼을 좀 갈아 다오 ! "
그러나 부하들은 일어날 생각도 아니 하고 주저앉은 채 대답한다.
"지금은 한 걸음도 움직일 기운이 없으니, 저녁이나 먹은 후에 칼을 갈아 드리겠습니다."
어명을 거역하는 것은 참형(斬刑)에 해당한다.
그러나 항우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를 따라온 그들의 충성이 너무도 고마워, 누구 하나라도 벌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칼만은 미리 갈아 두지 않을 수가 없기에, 항우는 몸소 물가로 걸어가 자기 칼을 손수 갈기 시작하였다.
항우는 장군이 된 이후로 자기 손으로 칼을 갈아 보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항우는 칼을 다 갈고 난 뒤에, 애마 <오추>에게 물도 손수 먹여 주었다.
이렇게 부하 군사들 조차도 꼼짝도 할수 없도록 피곤에 지쳐 있었던 것이다.
항우는 말에게 물까지 먹여 주고 나서 홍교원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후원으로 들어가 보니 4,5명의 호호 백발 노인들이 화롯가에 둘러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 원에는 사람이 이렇게나 적으니 웬일이오 ?"
항우의 질문에 노인들이 대답한다.
"이곳의 원생(院生)들이 20여 명이나 있었으나,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모두들 피난을 가버리고, 우리 같은 늙은이들만이 원을 지키고 있다오. 그런데 귀공은 누구시길래 이 밤중에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
항우가 대답한다.
"나는 초패왕이오. 싸움에 져서 몸을 피하며 오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소."
노인들은 그 말을 듣고 일제히 땅에 엎드리며 말한다.
"폐하이신 줄도 모르고 대죄를 지었습니다.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항우는 그들을 일으켜 앉히며 말한다.
"그대들은 속히 일어나 밥을 지어 주시오. 우리들은 지금 하루 종일 싸우기만 하였지, 밥을 먹어 보질 못하였소. 그리고 지금 밥을 지어 준다면, 고마움의 표시로 강동에 돌아가는 길로 백 섬의 쌀로써 갚아 드리겠소."
노인들 중에 유식한 노인 한 사람이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이곳은 초나라의 경계 안에 있는 땅이옵니다. 저희들이 폐하께 진지를 지어 올렸기로, 어찌 황공하게도 보상을 바랄 수 있으오리까. 진지를 넉넉히 지어 올릴 터이니, 마음껏 드시옵소서."
그리고 노인들은 온갖 정성을 다해 저녁상을 차려 왔는데, 식탁에는 온갖 산채(山菜)가 골고루 갖추어져 있었다.
항우와 그 부하들은 노인들 덕택에 여러 날 만에 밥을 배불리 먹고, 그날 밤을 편히 쉴 수 있었다.
이렇게 잠자리에 들게 된 항우는 새벽녘에 있었던 사랑하는 아내, 우미인(虞美人)과의 이별시(詩)의 마지막 구절이 자꾸 되뇌어지어, 좀체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우야 우야 이를 어쩔 것이냐
虞兮 虞兮 可奈何
우혜 우혜 가내하 .....
우혜 우혜 가내하 ....
우혜우혜...
우..
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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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