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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서전ㆍ국민학교 시절 - 서문 ㅡ어줍잖은 내가 삶의 궤적을 되집어 보는 이유이다.
지구상에 현재 살거나, 살다간 인구를 합하면 약 140억 명 정도란다.
그중에 나와 동시대, 동일한 공간에서 부대끼며 산 분들은 정말 인연이 깊다고 볼 수 있다!
삶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그분들에게 감사하고 싶어서이다!
1.국민학교 시절까지.
아버지께서는 고창에서 부농의 삼대독자로 태어나셨다.
일찍 할머니를 여읜 할아버지의 방황으로 가산을 탕진하시고 돌아가셔서 고아로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셨으나 한글은 깨치셨다.
어머니는 중농의 가정에서 태어나셔서 일찍부터 서양 선교사로부터 교육을 받고 미국유학을 권유받으셨는데 완고한 부모님의 거절로 스무살도 안된 나이로 결혼하셨다.
불신자였던 남편에게 첫약속이 "주일날 예배에 출석을 허락해달라"
였는데, 신혼시절에는 허락하더니 아이가 한둘 생기자 교회에 다녀오면 낯꽃이 변하시더란다,
어머니는 결국 신앙을 포기하셨다.
삼대독자였던 아버지는 자식 욕심이 많았다.
쌍둥이 누나를 포함 5남6녀를 생산하셨다.
부모님은 고창이 너무 산골이라 장래가 없다고 판단하셔서, 큰 이모님이 유복하게 사시는 군산까지 수백여 리를 소구루마를 끌고 자식들을 태워 이사하셨다.
천성이 부지런하셨고 건강하셨던 아버지는 이모부가 운영하시는 방앗간에서 머슴살이를 하셨다.
그러나 유일한 피붙이였던 이모의 냉정함으로 상당한 모멸감을 겪으셨던 모양이다.
두분이 밭일을 하시다가 "여보! 나 배아파! 먼저 가서 애 낳을께!" 하시고는 혼자 산고를 치루시면 저녁에 아버지가 일을 마치시고 귀가하셔서 미역국을 끓여 같이 잡수시고 다음날 새벽에 다시 일터로 같이 나가셨다.
열배를 이 년에 한번 출산하셨으니 임신기간만 이십 년이다.
후일 며느리가 출산하고 두 주동안 산후조리를 하며 누워있는 모습을 보신 어머니, "야! 너만 애낳아 봤냐?"
염화시중의 미소를 띠셨다.
십남매 중 여덟번째인 나는 위로 네 딸 출산 후의 아들이기에 관심을 받은듯 하고 더우기 임신중독증으로 생명의 위험까지 감수하셨기에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거 같다.
젖이 없어 동냥젖이나 홍시감, 또는 맑은 미음을 젖 대신 먹었으니 애처로움이 더했을 것이다!
내 생애의 첫기억은 어머니의 등에 업혀 고창의 친척집에 갔는데 시골 오두막집이었고, 아마 수수밥이었던 것 같은데 난 "피밥"이라고 먹지 않겠다고 떼를 쓴 그때 어머니의 계면쩍어 하시던 표정이 떠오른다.
얼마나 그 친척께서 계면쩍으셨을까?
어머니께서는 얼마나 송구하셨을까?
두분께 너무 죄송합니다!
용서하소서!
그때가 서너 살 때 쯤일 것이다.
우리집 식구는 부모님과 외할머니, 십형제와 머슴 한 명, 도합 14명이 항상 같이 식사했으니 어머니와 큰 누나들의 수고가 어떠하셨으랴!
친척이 없어 명절에는 남의 산소에 따라가서 같이 절하고 과일이나 송편 등을 얻어 먹곤 했다.
뒷동산이 내 놀이터였다.
거기서 용식, 동일 등의 수십 명 친구들이 모여 씨름도 하면서 뛰어놀았다.
낮으막한 뒷동산에 올라 대야(大野, 큰 들판)에서 만경평야에 이르는 거대한 들이 보였다.
겨울의 텅빈 들판, 봄의 갓 모내기를 마친 초록 화판, 가을의 거대한 황금물결로 출렁이는 황금빛 바다를 바라보며, 이 지구가 영원할 거라는 밑도끝도 없는 생각에 잠기곤 했다.
안개가 낀 날 끝이 안보이는 쭉곧은 들판 한가운데 난 신작로를 보며 세상이 참 넓다고 생각했다.
성실과 근면을 신조로 사셨던 부모님께서는 결국 중농의 부를 일구셨다.
어머니는 항상 중노동을 감당하시는 아버지의 식사를 잘 챙겨주셨던 모양이다.
한번은 식사 도중 손님이 오셔서 아버지가 잠깐 밖어 나갔다 오셨는데, 내가 아버지 국그릇의 돼지고기를 몽땅 집어 먹었단다.
왜 먹었냐고 물으니 "돼지가 살아서 국그릇 밖으로 나가려 해서 먹었다"고 해서 온가족이 폭소했단다!
아마 서너살 적이어서 난 기억이 없다.
어머니는 친구들 어머니보다 조금 나이가 많으신데, 어느날 하교하니 새빨간 치마와 초록색 저고리를 입은 새댁이 부엌에서 저녁준비를 하고 있지 않은가?
너무 기쁘고 깜짝 놀라 다가서니 어머니시다.
내 마음 속해 은근히 젊은 엄마를 부러워했던 모양이다!
두 동생과의 국민학교 3키로의 등교길을 멀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다.
아버지는 하교길에 큰 하천에서 수영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셨는데, 난 6년 동안 한번도 어긴 적이 없다.
좀 잔망스런 막내는 겨울철 차바퀴 자국의 얼음을 발로 깨고 다니다 양말까지 흠뻑 젖어 아버지께 꾸지람을 듣곤 했는데, 한번은 소구르마를 타고 가다가 떨어져 뒷바퀴에 가슴을 갈려 크게 놀랐던 적이 있다.
동네에서 1.5키로 떨어진 산하나 너머에 있는 탑골에 교회가 세워져 형과 누나들을 따라다녔다.
한쪽발에 심한 장애를 가지신 청년 한분이 열심히 찬송하며 가르치셨다.
벽돌로 지은 교회당에 바닥은 땅바닥에 지푸락으로 짠 가마떼기를 깔았다.
거기서 배운 찬송가와 성경동화가 매우 재미있었다.
대야국교 1학년 때부터 계속 반장을 맡았다. 성적이 비교적 좋았던 편이어서 학교를 다녀오신 어머니는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으시곤 하셨다.
이부옥 담임선생님께서 가정방문을 오신다기에 너무 황송하여 이버지께 초가지붕을 기와로 갈아 덮고 선생님을 맞이하자고 졸랐다!
2학년 양미자 담임선생님께서 나를 무척 아껴주셨는데 시집을 가셔서 무척 서운했다.
반장인 나는 선생님이 결근하신 날엔 급우들을 이층 계단에 모두 앉히고 구구단을 외우게 했다.
그즈음 나는 첫사랑에 빠졌다!
부반장인 그녀는 넘 예뻐서 자주 마주칠 때마다 내 가슴이 마구 뛰었고 자꾸만 웃음이 나왔고 말도 더듬거렸다.
내가 그녀보다 공부를 조금 더 잘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삼학년 때부터 남녀 분반이 되어 서운했으나 , 복도에서 마주칠 때면 가슴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려서 도망치곤 해서 말도 제대로 걸지 못했다.
3년을 담임해 주신 엄격하신 백원기 선생님께서 유난히 사랑해 주셨다.
또한 교감선생님께서 유난히 귀여워해 주셨다.
교무실로 부르셔서 음악시간에 배운 노래의 계이름으로 노래를 시키시고, "솔솔솔솔"을 "똘똘똘똘"로 알아들으셨나보다!
큰소리로 웃으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하셨다.
5학년 때 키가 큰편이어서 고적대 지휘자로 뽑혔다.
근사한 고적대 복장에 대열 앞에서 지휘봉을 휘두르며 행진을 선도하는 것은 어리지만 자부심을 갖게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지휘봉을 휘두르는 것보다 악기를 한가지 배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간절하다.
졸업식날 부모님을 오시지 말도록 요청했다.
다컷으니 바쁘신 몸이시라 혼자 다녀오겠다 말씀드렸다.
육년 개근상과 우등상을 받았다.
2.중학 시절 - 5학년 때 아버지께서 내 몸에 딱맞는 신사복 웃도리를 사오셔서 입고 다녔는데, 전교에서 유일했다.
그래서 내 별명이 "국제 신사"였다.
비교적 성적이 좋은 친구들을 골라 이리시의 한 명문 중학교에 시험쳤는데 낙방했다.
실망하시는 아버지께 너무 죄송했다!
아! 이러면 안되는데!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중학교 등교 첫날 교문 앞에서 클러치를 양손에 짚은 손에 무거운 책가방까지 든 신입생의 가방을 들어 주었다.
그가 바로 장은수 친구다!
다행히도 3년 동안 같은 반이어서 책가방을 들어다주는 단짝으로 맺어졌다.
학교 앞에 이모님 댁에서 자취하고 있어 그 방이 자연스럽게 우리 친구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그때 20원 하는 라면을 처음 먹어 봤다.
왜그리 맛이 있는지! ㅎ
하교 후 열차를 타러 역전으로 오면 배가 고팠는데 5원 짜리 "라면땅"을 돈이 없어 사먹지 못했다.
어쩌다 친구들에게 얻어 먹기라도 하면 그 맛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의기가 투합되어 형제같이 지낸 친구들이 석환, 중현, 생구, 금택 등이다.
은수 친구의 부모님을 시골집에 여러번 놀러가서 뵈니 얼마나 가정이 화목하고 자녀들을 아끼시는지 성자 수준이셨다.
얼마나 성품들이 좋으신지!
"자녀가 장애가 있으면 부모는 성자가 된다"는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은수 이모님께서 한번은 "은수를 잘 도와줘서 고맙다"고 통닭을 몇마리 삶아 주셨다.
난생 처음으로 통닭 한마리를 혼자 먹는 흡족한 기분이란? ㅎㅎ
시골 출신인 나는 전화를 한번도 사용해 본적이 없었는데 동급생의 집에 전화가 있어 공중전화로 처녀통화를 해보는데 친구인데도 어찌그리 떨리는지 ㅋㅋ
나에게는 중학생이 된 후 부터 큰 즐거움이 생겼다.
오산면으로 시집간 옥희 누나의 광웅 매형의 사무실에 토요일 학교가 파하면 들리곤 했는데 여간 반갑게 맞아 주시는게 아니다.
진짜 내 마음은 자장면을 대접받는 것이었다!
국민학교 시절엔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자장면이 어찌그리 맛있는지! ㅎ
군산선 임피역에서 여섯시 열차를 타고 이리역까지 통학했다.
어떤 때는 너무 통학생이 많아 매달려 갈 때도 있었는데, 국민학교 여동창생들의 새하얀 교복을 입은 모습을 훔쳐보는 재미가 컷다.
이즈음 난 큰일나는 일이 생겼다.
젖꼭지가 아파서 손을 댈 수가 없을 정도여서 어머니께 여쭤봐도 모르신댄다.
화장실에서 소변누다 깜짝 놀랐다.
꼬추 위에 굵은 수염이 자라나고 있질 않은가!
게다가 어쩌다 꼬추에 손이 닿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햐! 이 무슨 해괴한 징조인고?
부끄러워 단짝들에게도 말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았다!
한통의 카드가 내게 왔는데 발신인도 없고, 아무 글도 없는, 엄마가 아기를 업고 광주리를 메고 걷는 그림만 그려져 있다.
누가 나한테 시집오겠다는 뜻일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나를 좋아할 법한 여학생들을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우리 동네에서 임피역 까지 2키로 인데, 늦었을 때는 뛰어서 십분 만에 주파하기도 했고, 빨리 걸으면 15분이 걸렸다.
내 속보실력은 이때 단련되었다.
한번은 순간적인 돌풍이 불어 레일 위를 걷던 여학생이 철길어깨길로 날려가기도 했고, 고교생이던 옆집 형은 열차가 지나가며 떨어지는 대변 덩어리가 목덜미에 묻기도 했다.
이리역에 도착하면 여섯 시 반, 어떤 선배의 안내로 통일교에 나가게 되었다.
매일 아침에 교회당에 들러서 등교할 정도니 열심이 대단했으리라.
당시 "원리강론"이라는 책으로 공부했는데, 모든 세상의 원리를 음양으로 푼다.
예를들면 남녀, 암수컷, 암수술 하는 식으로 풀며 문선명과 "피가름"을 해야 원죄가 용서받는단다.
당시 내 지성과 영성으로는 그것이 진리인지 분별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침마다 이렇게 기도드렸다.
"하나님! 통일교가 바르다면 목숨을 바치겠나이다. 분별할 지혜를 허락하옵소서!"
한번은 그 교회 지도자가 통일교에서 발행하는 "주간종교"를 강매하면서 그 휘호를 하나님(문선명 교주)이 쓰셨다고 한다.
나는 "왜 사람을 하나님이라고 하느냐"는
강한 의심이 들어 그후로 발길을 끊었다.
한번은 중간고사에서 학년 수석을 해서 나에겐 제법 큰돈을 장학금으로 받았다.
아버지께 드리고는 싶었으나 때마침 사주신 새 운동화를 잃어 버려서 그돈으로 새 운동화를 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며칠 못되어 연거퍼 세번이나 운동화를 잃어 그 장학금을 다 써버리고 난 후 아버지께 이실직고 드리니 아버지의 얼굴엔 자식이 일등했다는 자랑스러움과 자식의 정직하지 못함에 대한 서운함이 교차하셨다.
어린나이였지만 부모님께 너무 죄송스러워서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싶었다!
"정직"과 "신뢰"를 평생에 가슴에 새겨야할 뼈아픈 패배였다!
어느날 영어 콘사이스를 사주시라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500원을 주시며 "이 돈이면 우리 가족이 하루 먹을 쌀값이다"고 하셨다.
나는 부모님께로부터 물려받은 근면과 절약정신으로 이순이 넘도록 불필요한 전등을 끄고 다닌다.
남의 집이든 공공기관이든 가리지 않고 ㅋ
우리 단짝들을 정헌효 담임선생님께서 유난히 아껴주셨다.
한학년 높은 장석형이 찾아와 자기가 전교 학생회장, 내가 부회장으로 동반출마하자고 권해서 전교 부회장 감투를 써봤다.
중3 체육시간에 축구를 하다가 오른쪽 대퇴골이 빠져버려 며칠 입원한 적이 있다.
예쁜 간호원 누나가 어찌나 잘해 주는지 넘 감사해서 집에 있는 문학전집 중 한권을 선물하려 가져갔으나 수줍어 전달하지 못했다.
비교적 큰키로 대대장으로 발탁되어 조회시간에 전교생 앞에서 "열중 쉬어! 차려!"를 구령하는데, 티비 흉내를 내느라고 "차리어엇!" 하고 멋 좀 부리려다 지적을 받기도 했다.
중3때 난생처음 경주로 나팔바지를 펄럭이며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첨성대, 불국사, 석굴암, 안압지 등을 보았는데, 단짝들과 노는 것이 더 좋았다
!3.고교시절ㆍ흥사단 - 비교적 성적이 좋은 친구들 몇이 전주의 명문고에 응시했으나 난 낙방해서 또다시 아버지를 실망시켰다.
낙방소식이 전해진 날 아버지는 들었던 숟가락을 놓으시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식사자리를 떠나셨다.
다시 쥐구멍이 찾아졌다.
그렇구나! 공부만 잘해도 효도하는 거구나!
진학한 고교는 아늑한 중화산동의 미국 선교사들이 터잡아 놓은, 기린봉이 내다보이는 전망좋은 서양식 벽돌 건물이었다.
입학성적이 비교적 좋았던 탓에 구예수병원 터에 있는 장학숙에서 고교생활을 시작했다.
신입 초에 풍체가 좋으신 박금규 선생님과 명재ㆍ형환 선배께서 몇 친구를 부르셨다.
그리고 이름도 생소한 <흥사단 전주 아카데미 >란 이름으로 불리는 고사동의 한 낡고 삐걱거리는 목조 이층건물로 인도하셨다.
그곳에는 전주의 각 남여 고교의 내노라 하는 모범생들이 눈빛을 반짝이며 빼곡히 모여 있었다.
어쩜 그리 잘생기고 예쁜 것들이 공부도 잘해서 뽑혀왔을까?
목에 잔뜩 힘을 주어 목소리를 내려 깔고 후배들 앞에서 군기잡듯 일장 훈시를 하는 똑똑한 태주 선배의 연설에 채청, 문갑, 병훈, 보근, 구희와 나는 잔뜩 쫄았다.
우선 <도산전서>라는 두꺼운 안창호 선생의 전기를 공부하며 그분이 한민족의 선각자임을 처음 알게 되었다.
민족의 암울한 구한말 도미한 도산은 재미교포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 그들에게 뛰어들어 각성운동을 펼치신다.
민족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손수 천을 박음질하여 커튼을 만들어 달아주고, 똥지게를 지고 퍼세식 화장실을 치워주시고, 수감 중인 독립군 가족을 돌보려 노가대를 해서 그 임금 전부를 생활비로 드리기도!
"지도자 없다고 불평하는 그대는 왜 지도자 공부를 하지 않는가?"
도산은 "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고 그의 신앙을 고백하신다!
나는 도산사상에 매료되었다!
민족과 지도자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애국가를 4절까지 암송시켰고, 사상과 지도자를 키우는
<3분 스피치>라는 독특한 훈련이 있다.
글자 그대로 3분 동안 어떤 주제로라도 자기의 생각을 모든 기러기
(회원들) 앞에서 연설해야 한다.
처음에는 머리가 하얗고, 논리가 꼬여 말을 더듬기가 일쑤여서, 나서기가 매우 망설여졌으나 정말 지도자 훈련으로는 멋진 프로그램이다!
겉으로는 활달했으나 내면으론 수줍음(?)이 많았던 나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한 <희락시간>이란 독특한 오락시간에 유머가 많은 기러기를 리더로 해서 건전가요와 몸짓을 섞어 크게 유쾌한 기분업을 시켰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는데 최고의 훈련이다.
요즘 유행하는 웃음교실의 원조격이다!
3.1만세운동을 기리는 3월1일에 모악산에 등산하는데, 눈이 녹지 않아 변변한 등반도구가 없던 시절이라 쭉쭉 미끄러지는 상황이 정의돈수(관계형성)에 상당한 효과가 있다.
무실(務實)ㆍ역행(力行)ㆍ충의(忠義)
ㆍ용감(勇敢)이 4대 강령이다.
예쁜 기러기 모양의 스텐레스 뱃지는 넘 예뻐서 그 의미와 함께 자랑스러웠다!
한눈에 척봐도 범생이 경오,
선한 얼굴에 가려진 깊은 내공의 기돈이,
지성이 반짝이는 철성이,
시조와 한자에 능하고 인생을 조기통달한 구희,
사람좋고 너그러운 문갑이,
키만 부족한 천하대장군감인 영춘이,
클레오파트라 닮아 고품격의 깐깐한 봉덕이,
내실이 가득한 순수 시골처녀같은 순복이, 반듯한 성희,
좀 늦게 입단했으나 범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던 삼성이,
다부져 큰 일할 것 같은 백숙이,
청초하고 요조숙녀감인 명신이,
부잣집 맏며느리가 될것 같은 명숙이,
속이 알찬 멋쟁이 은숙,
막걸리 타입의 사업의 달인이 될 것 같은 종용,
뭔가 대가가 될 것 같은 연규,
인간관계에 달인이 될 것 같은 보근이,
목이 길어 슬픈 사슴같은 근희, 순수하나 다해낼 거 같은 선정, 서글서글해서 누구나 친구할 것 같은 재택, 사람좋으나 내실 있는 안준,
범생이의 원조 같은 영숙,
타인을 즐겁게 하는 달인의 원옥,
틀어진 우정을 화해시키는데 달인일듯한 철우,
깐깐하게 보이나 내실있는 철규,
서양 귀족의 후손인 것 같은 고고한 품격의 희석,
여리고 착하디 착한 평곤,
속에 뭔가를 품고 있는데 잘내놓지 않는 느글느글한 민철,
어리숙하게 보이나 보석을 품은 성룡,
눈빛이 날카로우나 성품 좋은 승균,
21세기 아이돌 빰치게 여리여리하게 잘생긴 성호,
여러 친구가 더있는데 50여 년 동안 불러보지 못해 얼굴을 기억나는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얼결에 이학년 전반기 회장을 맡게 되었는데, 매사에 치밀하지 못했던 나는, 부회장 깐깐이 봉덕의 잔소리를 소금치듯 들어야 했다.
"햐! 백합같은 여고생에게도 가시가 있구나!"
졸업 모임에서 뜻은 잘 모르지만 이말을 마지막 스피치 시간에 했다.
"역사가(歷史家)가 되지 않고 역사인(歷史人)이 되겠다!"
그 의미는 방관자가 되지않고, 치열하게 역사의 주인의식을 가지고 살겠다는 결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