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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보는 하나님 영광 11:36~40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예수님의 기도와 응답 11:41~44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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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해설
무덤을 막은 돌을 옮기라고 예수님이 명하십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난다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믿으면 하나님 영광을 볼 것’이라는 말씀을 상기시키십니다. 아버지께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외치십니다.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무덤에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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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보는 하나님 영광 11:36~40
유대인의 무덤은 대개 산지의 바위를 뚫어 만듭니다. 나사로의 무덤도 그러한 곳에 시신을 두고 입구를 돌로 막았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무덤은 비극과 절망의 장소입니다. 생명의 주권자이신 예수님이 무덤의 돌을 치우라고 명하십니다. 죽음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마르다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난다고 말합니다(39절). 그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지만(27절), 정작 현장에서 이를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40절)라고 다시금 확신을 주십니다. 믿음의 고백은 말이 아닌 중심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마음으로 진실하게 믿으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을 목격하게 됩니다.
●더 깊은 묵상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당면한 문제 앞에서 내게 필요한 믿음의 고백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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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도와 응답 11:41~44
예수님의 기도와 응답에서 믿음의 기도에 대한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기도하는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십니다. 하늘 아버지는 우리의 기도(말)를 ‘항상’ 들으십니다(41~42절).
둘째,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이유는 자신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임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42절).
셋째, 기도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외치십니다(43절).
기도는 때로 큰 소리로 해야 합니다.
넷째, 기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으로 죽은 나사로가 살아납니다(44절). 이와 같이 믿음의 기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줍니다.
● 더 깊은 묵상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하셨나요?
내가 믿음을 가지고 응답을 소망하며 담대하게 드릴 기도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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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유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신다. 그분은 슬피 우셨고 분노로 가득하셨다. 나사로 때문에 우셨을 리는 없다. 잠시 후에 그를 다시 살리실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슬퍼하고 노하셨을까? 그분은 사랑하는 인간과 창조 세계를 파멸에 빠뜨린 죄와 죽음에 격렬히 분노하셨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라고 밝히신다. 따라서 그분이 죽음에 격노하신 데는 큰 의미가 있다. 창세기에 그 근거가 나와 있다. 죽음은 본래 하나님의 설계에 들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늙어서 약해지고 병들어 죽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기껏 죽음으로 끝날 사랑의 관계를 위해 창조되지도 않았다. 죽음은 침입이며, 인류가 죄를 짓고 하나님을 등진 결과다. 지금 우리는 죽음의 세계에 갇혀 있지만 본래는 이런 세계에 살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그래서 불멸의 ‘성자 하나님’이 세상으로 보냄받아 우리처럼 연약한 인간이 되어 죽으셨다. 하지만 그분은 죽음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꺾으셔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셨다(히 2:15). 예수님이 우리의 빚을 완전히 갚아 주심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사망의 권리와 세력도 꺾였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더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이 기독교인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우리 삶을 무한히 더 나아지게 하는 것뿐이다.
팀 켈러의 답이 되는 기독교 / 팀 켈러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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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요한복음 11장 39절
믿음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나사로를 살리는 '부활의 영역'은 예수님의 몫이지만, '돌을 옮기는 것'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몫입니다. 많은 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돌까지 옮겨 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해야 할 몫이 없어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할 일을 주심으로 기적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참된 믿음에는 기꺼이 행하는 수고가 따릅니다.
주님께는 해결 못 할 문제가 없으며, 회복시키지 못할 관계가 없으며, 못 고칠 질병이 없다. - 캐럴린 레이시
오늘의 기도
주님, 소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저희의 믿음을 보길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깨닫습니다. 주님이 버려두신 것 같은 막막한 때에도 주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신 말씀에 힘입어 주님의 일하심을 온전히 신뢰하게 하소서.
요한복음11:36-44절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죽은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통해 사망과 죽음에 비통해 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로 보관한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나 하면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는데 살릴수 없었냐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38절에 "다시 속을 비통히 여기셨다" 고 했습니다
"다시"라는 말은 앞에서도 "비통히 여기셨는데" "다시 비통히 여기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비통히 여기셨다는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비통히 여기셨다"는 의미는 사망과 죄에 대해 분노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음과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땐 죽음을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죄는 죽음을 가져왔고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하니님이 창조하셨을때는 죽음을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죄로 인해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며 삽니다 그러나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기에
예수님이 비통히 여기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로 인해 죽을수 밖에 없는 영혼들을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사실을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을 통해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무덤에 돌을 치우라고 하셨고
마르다는 죽은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난다고 죽은 나사로가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 처럼 말하자
예수님은 40절에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의 의미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죄로 인해 죽음이 들어왔고 죽음이 인간을 지배하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죽음을 지배하시고 도리어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 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죽음이 지배하는 현실을 다시 하나님이 창조하실때의 모습
죽음을 보지 않는 생명으로 바꾸시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은 나사로를 부활시킨 사건에서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
예수님을 믿음으로 죽음에서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영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으로 감사하며 복음을 예수님 필요한 분들에게
흘려 보내며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가셔서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이다.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
무덤 앞에 모인 사람들은 아무도 죽은 사람이 살아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제 멋대로 떠들고 있다.
마르다 역시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다고 하면서 불가능한 구실만 이야기하고 있다.
그때 주님은 말씀하신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예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인간의 이성으로 납득할 수 없어도 그분을 신뢰하면 놀라운 역사를 볼 수 있다.
돌을 옮겨 놓으라
예수님은 무덤가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믿지 말고 말씀을 믿으라는 주님의 초대이다.
비록 장사지낸 지 나흘이 지나 시체가 썩고 가능성이 없지만 무덤을 막는 돌을 옮기라는 것이다.
원망과 불신의 돌, 고집의 돌, 상식과 이성의 돌, 부정적인 생각의 돌을 옮겨야 부활의 기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사로야 나오라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신 후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고 큰 소리로 부르신다.
그러자 죽었던 나사로가 몸을 베로 동인 채 걸어 나왔고 예수님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죽음 같은 절망의 상황, 각자의 독특한 상황 속에서 우리를 불러 주시고 죽음에서 건져주시는 분이시다.
우리에게는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시체 같이 아무 가능성도 없지만 예수님을 만나면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날마다 체험하면서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증언하는 사명을 감당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오늘도 우리 주변의 나사로를 주님이 불러내시도록 돌을 옮기는 역할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비통히 여기시며 나사로를 장사한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그때 주께서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으라 말씀하시자,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주여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하며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1:40)
그래서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님께서 먼저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1:41~42) 그리고 큰 소리로 나사로를 부르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요11:43) 그러자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서 얼굴은 수건에 싸인 채로 손발은 베에 동인 채로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요11:44) 참으로 우리 주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도 있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4:17) 우리 주님은 우리도 나사로처럼 사랑하시니 우리의 이름도 부르시고 사망에서 풀어 놓아 자유케 하실 줄 믿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1~25)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땅 끝에 있을지라도 다시 오게 하시고, 풀어 놓아 자유케 하실 줄 믿습니다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사43:6~7) 우리가 무슨 형편에 처해 있든지 다시 일어서게 하시고, 모든 묶임과 억눌림에서 풀어 놓아 자유케 하실 줄 믿습니다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시146:7)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의 주인공은 나사로도 아니요, 마르다와 마리아도 아닙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가 얼마나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셨는지를 보여 주는 애절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여기 예수님의 애절한 사랑의 표현이 있습니다.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나사로의 죽음 앞에 마리아와 유대인들은 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유대인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이유는 나사로의 죽음만이 아니라 거기 모은 유대인들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살아서 호흡하고 있지만 죽은 자와 똑같은 상태에 있는 자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서 무능한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전도서의 고백처럼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헛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죽음을 피할 갈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인간의 삶은 시작부터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무덤 안에 썩어져 가고 있는 나사로의 모습은 우리의 미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러나 여기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며칠 후에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처럼 무덤 안에 계셔야 합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자기 죽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 때문에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 썩어져 갈 것에 대한 공포 때문에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을 흘리시는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단절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영원 동안 함께 하신 하나님을 떠나 사망의 권세 아래로 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닙니다. 이 눈물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기 때문에 흘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사건을 통해서 무리를 믿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나사로와 같이 썩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사로의 무덤을 보아야 합니다. 그 무덤 속에서 나사로의 모습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수의를 입고 썩은 냄새를 내는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에게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죄로 인해 썩어져 없어질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는 무리(우리)에게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베풂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이기는 은혜를 증거하십니다. 이 은혜를 베푸시는 목적이 무리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위해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이 계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죽음 속에서 생명을 맛본 나사로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나사로를 통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라 하늘의 축복을 이 땅에서 누림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 연약한 믿음에서 온전한 믿음이 되기 때문입니다(32~35절).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린 마리아는 예수님이 이곳에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탄식을 합니다(32절). 마리아는 마르다보다 더한 감정을 표현합니다. 슬픔을 억누르지 않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우는 모습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33절) 여기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스스로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이는 마리아나 유대인들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그렇게 울 수밖에 없도록 만든 사망과 사탄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신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사람들이 흘린 눈물은 ‘방성대곡’하며 흘린 눈물이었다면, 예수님의 눈물은 조용히 쏟으신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세력하에 있지 않으시기에 나사로의 무덤을 바라본다 할지라도 통곡할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옆에 두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의 연약한 믿음에 대한 안타까움의 눈물이자, 그들을 향한 연민과 긍휼하심을 담은 눈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 자신이 겪는 고통과 슬픔을 깊이 공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상황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울음소리가 절망의 통곡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기도의 소리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마음을 잘 아셔서 긍휼히 여겨 주셨고, 동일하게 타인을 향해서도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아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알지 못한 채, 여전히 슬픔과 절망의 자리에서 통곡하는 자들의 슬픔과 아픔에 동참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인생의 모든 슬픔과 고통 그리고 질고에 대한 진정한 치료제인 복음을 전해 주는 하나님 자녀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내 삶에 절대 소망이 되시는 이유는 나의 연약한 믿음이 온전한 믿음으로의 변화된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일상의 영역에서 복음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36~37절).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보고 유대인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나사로를 향한 깊은 사랑 때문에 우시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또 한 부류는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분이기 때문에 우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해결하지 못하실 문제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능력은 한계가 없으십니다. 죽음의 문제도 해결하신 예수님은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자기 생명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일시적으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로서도 예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내 삶의 전 영역을 주님의 손에 맡겨 드려야 합니다. 복음으로 내 자신의 삶 전체를 바꾸시도록 주님께 내 자신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을 감당해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내 삶에 절대 소망이 되시는 이유는 일상의 삶을 복음으로 변화시키시는 능력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 불신의 걸림돌을 제거해야 합니다(38~40절).
예수님은 다시금 속으로 비통하게 여기시면서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커다란 돌로 입구를 막아 놓은 ‘돌을 옮겨 놓아라...’ 말씀하십니다. 이에 마르다는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난다...’(39절)고 말하였습니다. ‘...돌로 막았거늘...나흘이 되었으매...’ 이는 인간적인 방법과 세상의 가치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임을 나타내주는 표현입니다.
즉, 도저히 회복하거나 소생할 수 없는 상황, 완전히 죽은 상태임을 시사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로 하여금 진정한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40절)을 하시면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25절)라는 말을 믿으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앞서 예수님이 부활과 생명이시라는 선언과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을 세상에 오시는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27절)은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즉,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서 불신앙의 요소들을 마음에서 제거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읽고, 듣고, 묵상한 말씀이 기억나게 하시고, 또한 깨닫게 하시므로 진리로 이끄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그래서 기대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부활의 영광을 향한 믿음은 자기 확신과 자기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자신의 연약한 믿음을 인정하고, 온전한 믿음과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믿음을 위해 간절히 간구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불신앙의 걸림돌이 제거되어 부활의 영광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 죄악의 사슬에서 자유해야 합니다(41~44절).
사람들이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41~42절a)...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아직 살리시지 않았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나사로가 소생하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고, 그로 말미암아 공생애를 사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의 문제와 사역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공개적으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신 것은 바로 주변에 모여든 무리들을 믿도록 하기 위함(42절b)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43절)부르셨습니다. 이에 죽었던 나사로가 되살아나 무덤 밖으로 나왔고, 예수님은 그의 수족을 묶고 있는 천과 얼굴을 덮고 있는 수건을 풀어 자유롭게 다니도록 하셨습니다(44절).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즉 십자가에게 달리심으로 죄악으로 인하여 사망의 길로 나아가는 인생들이 생명을 얻어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관하시며 사망 권세를 깨드릴 수 있는 생명의 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무덤에 있는 나사로에게 소생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의 작은 목소리로도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바로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예수님 주변에 몰려든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살아 있지만 실상은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주시며,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악에 사슬에 묶여 있으니 자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죄의 종노릇만 하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음을 믿고, 주께서 허락하신 부활과 영생을 지금 이곳에서부터 누리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처럼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서 오직 살아도 주를 위해서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영생의 삶을 확신하므로 죄악의 사슬에서 자유할 때, 부활의 영광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 25:7-8)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눅 7:13-1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 요한복음 5:25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이 오늘의 이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살아 역사하심을 믿고 깨달아, 땅을 밟고 서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믿음을 굳게 지키고 세상을 향해 소금과 빛으로 담대하게
나아가도록 성령 하나님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어둠 가운데 신음하는 길 잃은 양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리 이심을 바로 증거할 수 있도록 말씀으로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생명과 평안을 누리고 드러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노래하며,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만으로 충분한 인생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곳곳마다 주님의 향기가 되어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세상의 밀알이 되어주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위에 기름 부어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우시고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고통과 질병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열방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사,
회복과 치유의 손길로 덮어 주시옵소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다툼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이 나라와 백성을 거룩한 제사장의 사명으로 다시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