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매 공식으로 계산해 본거라 사실일 가능성이 낮으니 재미로 봐주세요.
순조시기와 고종시기의 가치차이, 통용되는 은의 순도차이, 신대륙산 인삼의 존재, 중원의 혼란으로 인한 주요 인삼 수입국의 구매력 감소, 소수점 이하 탈락, 유통비 재배비등 원가 추정불가 등 오만가지 오차들이 존재하는 계산입니다.
"순조기 인삼 1근은 은 700냥으로 약 43.75근. 순도 감안해도 30근은 넘어가는 양"이라는 알리시아크리스틴님의 전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봅니다.
인삼 1근의 값을 순은 31근으로 가격을 상정하고 갑오경장이 일어난 1894년의 국제 시세로 계산할 경우
인삼 1근 = 은 31근 = 은 656온스 = 금 20.1온스 = 415 미국 달러가 됩니다.
인삼 일만오천근은 약 622만 달러의 가치가 되고, 인삼이 고가의 사치품인 만큼 마진률이 높을것이라 상정하고 마진률을 50%라고 칠 경우 약 300만 달러의 수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다시 같은해 일본엔환율인 1달러 = 2엔으로 하면, 600만엔.
같은 해에 미쓰비씨 물산이 25만엔을 주고 석탄운반선을 구입해 9년후 50만엔에 대한제국에 판매합니다.
시간이 좀더 지나
1917년 일본이 한국 최초의 기계식 방적/방직 회사인 조선방직을 세울때 자본 500만엔을 투입했습니다. 그리고 이 조선방직은 1925년 공장규모를 2배로 키우고 난 후 1928년에 조선 면포시장의 25%를 점유하였다고 합니다.
(1917년에는 은 656온스 = 금 25.6온스 = 20.6달러 = 527달러. 인삼 일만오천근 = 790만 달러 = 387만 엔(1달러 = 0.49엔) = (인삼 마진)190만엔)
첫댓글 현실은 시궁창
(역개루펌) 조선의 당대 인삼생산능력은 건조삼 기준으로 약 10만근. 맥시멈으론 20~30만근.
최대한으로 잡아서 30만근으로 잡고 편의상 1근 600그램 가정하면 중국인 두당 0.4그램 공급.
근당 은 50냥으로 가정하고 판매시 연 1500만냥의 은 수입가능.
이정도.
인삼가격은 겐로쿠 시대 가격 절정일 때에 에도에서 1근에 금 1.5근, 은 9근에 해당.
순조기에는 인삼 1근은 은 700냥으로 43.75근. 순도를 감안하면 35근. 금으로는 2.5근.
은 1냥은 약 1엔 혹은 1석으로 환산이 가능하나 나라별로 가치가 다른 것을 감안 필요.
즉 인삼 5000근 혹은 35000근은 은으로 170만냥, 달러로 85~170만 달러.
150000근 혹은 10.5만근은 은으로 500만냥. 달러로 250만~500만 달러.
(마찬가지로 역개루 펌)
@알리시아크리스틴 낮게잡아서 30근이라고 했는데 여기선 35근이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좋.
1만 5천근은.... 아마 15만 오타 친거일거같.
19세기 미친듯이 증가한 은 생산량을 감안한다면 들어오는 은 양도 더 많을거고.
@알리시아크리스틴 기술 투자 이런거 상관없이 (애초에 인삼은 화학비료 들어가면 영... 현대 한국에서 인삼 재배에 비료 못쓰게 하는덴 (근데 지켜지는지는 모름) 이유가 있) 1920년대 일본 통제하에 20만근까지 인삼 늘어난거 보면 마냥 안될건 아닌.
@알리시아크리스틴 최대 15만근으로 그쪽 계산법대로라면(1달러 = 2엔) 1000만엔 들어오는데
사실 이런거 다 필요없이 1달러 = 2엔 이면 300만 달러 수익에 600만엔 이긴 합니다만.
1894년
KRY/JPY : 5.00
KRY/USD : 9.20
뭐 이런거 저런거 감안해도 1달러 = 2엔은 대충 맞는데 어떻게 그 공식대로 했는데 두배가 안되고 반쪽이 되는지 잘 모르겠네여.
더이상 키보드 두드릴 시간도 이유도 없는데 계속 걸어대서 쓰긴 써야하고 아오... 여하간 계산 할거면 똑바로 합시다.
@알리시아크리스틴 중간에 정줄 놨는지 산수도 잘못해서 곱해야할걸 나눠서 600만을 150만이라고 썻었네요
@Irea 어차피 당대 조선 정부 수준에 딱히 해낼 수 있는 일로도 안보이고 그냥 굳이 자본을 뽑자면 거기서 뽑을수 있다~ 고. 거기서 대충 반박하려고 쓴글인지 뭔지 나온 님의 글을 참조해도 조선 방직 세울때 쓴 돈보다 더 많은 돈이 남네요.
@Irea 1만 5천근이 아니라 15만근이고 당대 조선이 일본처럼 좀 쥐어짜서 인삼 재배했으면 돈 뽑는것도 가능하긴 했슴다. 그쪽 글이 논거가 되고. 인삼재배는 적어도 1920년대까지 큰 진보 없었고 비료도 쓰면 상품가치 떨어지는거 감안해도 20만근 뽑은거 보면 좀 중점적으로 인삼 뽑아서 돈모으면 되네요. 근데 자영이/개똥이 수준에 어차피 못하니 이야기 끝. 어후 피곤해라.
@Irea 그냥 제글 지워야겠어요. 계속 이런데서 시간 소모하고 자료찾으니 시간이 너무 아깝.
그렇게 많이 팔면 가격 뚝 떨어지죠.
그당시 이미 화기삼 미친듯이 들어오던 상황.
19세기 인삼판매량이 수십배로 늘었는디 가격은 결국 비슷비슷. 뭐 이건 조공무역탓이긴 하지만 애초에 중국에서 조선삼은 없어서 못먹던거고...
@알리시아크리스틴 은 유출량이 커지면 영국한테 했던것처럼 갑질할거 같네요.
그냥 단순하게 말해질 문제가 아님. 누군들 그생각 안했겠나. 북경루트로 극히 일부만 쓰였고 일부지역에선 분명 아편 해독제로 잘써먹. 대부분 지역은 구경도 못해봄. 강남대부분이라던가. 여기에 직접 판로 개척하고 팔면 (+화기삼 유입으로 인삼류 효과 홍보도 됨) 가격대는 결국 비슷비슷한 수준에서 유지가능할거라는게 역개루에서 이야기됫 최종 결론으로 기억. 머리아프고 모바일이라 뭐 해보기가 힘든데 여튼.
@Boollk 그 갑질 문제도 이타저타 포함해서 조선 정부의 역량에 달렸. 그리고 애초부터 난 조선정부의 역량은 이타저타 포함한걸 해내기에 태부족 상황이라 그당시 조선 정부가 손에 쥔걸로는 다메라고 한거고...
@알리시아크리스틴 이젠 진짜로 끝냅니다.
@알리시아크리스틴 아니 뭐 시작은 그쪽이 했는데 왜 나한테 그러는진 몰라도 끝낼라면 끝내시죠.
@Boollk 엌 저밑댓글에 달거였는디.
시간 아까워서 더이상은 다메. 알아서 물어뜯으시던가 이 이야기가 전에 이뤄진 역개루 가서 말해보셈.
아 그냥 내가 다 틀렸음. 이제 그만.
인삼 생산이 절정기였다는 1~20년대 자료(최대치만)입니다.
1922년 6년근 수삼 수확량 84만 근
1921년 수삼 수납량 14만 근 (근당 평균 9.3엔)(수삼 생산량의 16.6%)
1928년 홍삼제조량 5만근 (본삼과 끽삼의 생산비율 1대1)
1925년 홍삼평균가 본삼 근당 86.9원, 끽삼 48원(끽삼은 년도 관계없이 40원대를 유지)
1921년 백삼(건조삼) 제조량 21만근
1917년 홍삼 수출량 5만근, 192만 원(근당 38.5원)
1928년 백삼수출량 46702근(중 중국 1만 근), 34만 8300원(근당 7.4원)(생산량 127448근 중 36.6% 수출)
1) 1908년부터 32년까지의 통계상 홍삼 제조량은 5만근을 안넘어 갑니다. 홍삼전매제로 홍삼수익을 독점하는(유통은 미쓰비시 물산이 하니 갈라먹기?) 총독부가 수삼이 80만근 생산되던 50만근 생산되던 홍삼 생산량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을 볼때, 홍삼시장의 적정 공급량/기대 소비량이 4만근 중반 정도였을것으로 짐작 할수있어보입니다.
2) 홍삼의 생산원가는 65원(24년 매일신보 기사에서 홍삼의 산지가를 65원으로 보도), 시중판매가는 위의 평균가로 86.9원(33%증가)(같은 비율로 끽삼은 시중가 48원일때 원가 36원). 같은 기사에서 중국에서는 홍삼을 근당 150~200원(같은 비율로 끽삼은 97원) 받을수 있다고 하였으므로 생산원가에서 중국 판매가의 차익은 가장 비쌀때 평균가에서 110원정도(끽삼은 61원)의 수익을 얻어 홍삼수출로 1년에 (본삼 5할 275만+끽삼 5할 152만) 427만 원의 무역수지를 얻을 수 있어 보입니다(17년 수출량과 액수로 봐서는 반반이 아니라 홍삼보다 끽삼이 더 많이 수출된것으로 보이나 무시하고 생산비율로 계산).
3) 인삼 생산량의 다수를 차지하는 백삼의 경우 단가가 낮고, 경쟁상대가 있어 수출상품으로 가치가 낮습니다. (1915년 중국 인삼시장에 16만 근의 미국산 백삼(근당 20원), 14만 근의 일본산 백삼(근당 5원)이 유통)
@Irea 1904년 대한제국의 재정수입이 1400만원이고 그해 대한제국 원과 미국 달러의 환율이 1달러 당 4원이니 대한제국의 재정수입은 350만 달러고,
1924년의 420만엔이 1920년대 환율인 100엔 = 49.8달러로 해서 209만 달러이고, 1924년과 1904년의 금-달러 태환비율이 동일하니 이 돈을 당시 대한제국 원 환율로 계산하면 836만 원, 1904년 시점으로 대한제국 예산의 59.7%에 달하는 돈을 홍삼 수출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야매계산이 나옵니다...
@lhsz 윤택영의 개인이 싸지른 빚이 350만원이었다니 이건 뭐 저만큼 돈이 있어도... 레벨이긴 하죠.
@lhsz 내탕금의 규모가 어느수준이고 그게 국가재정에 어느정도 해를 주었는지부터 말씀하시는것도 나쁘지않아 보입니다. 왕정국가에서 국고와 왕 개인재산의 분리는 필연적 아닙니까.
@모리야 전제국 이게 다 이성계때문이다
@아즈텍 이성계 보다는 내수사를 부활시킨 세조를 까야...
일단 내탕금의 규정을 먼저 정의해야 하죠. 일단 내탕금은 국세가 아닙니다. 즉 지세, 소작세, 고리금에서 나오는 수입니다. 일단 왕실이 아무리 크도 왕실의 인원수는 한계가 있습니다. 즉 왕실이 아무리 사치를 한다고 해서 국세를 포함한 사치가 아니고 왕실의 돈이 국세에 비해서 상당히 많았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왕실의 토지규모도 전국의 토지중 1/10이고 이도 최고로 잡을 때입니다. 조선은 일단 왕실의 견재를 위한 권신들의 주도권이 높아서 왕실의 재산이 마냥 늘어나는 것을 좋게 본적이 없습니다. 즉 국토에서 왕실 직영지는 생각하는 것보다 많지 않았고... 인삼의 상세를 내탕금으로 돌렸다는 하는데.. 그것은 일제이전때
일본으로 부터 왕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고.. 순조~고종중기 까지 인삼세는 왕실에 받치는 것이 아닌 국세로 잡혔고.. 현종조때 상세가 조정의 조세의 40%이상 수준에 달할 정도로 이미 자영농의 몰락이 심해지고 그것의 대체로 상업세가 조세의 주류가 됩니다. 일단 조세중 상업센 그 강도가 높은데.. 조선은 중농주의를 지향해서 농민에서 적은 세금을 주고 상인에게 세금을 크게 물리는 구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