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을 돌려대라”(마태 5:39)는 말씀은 지키기가 어렵지만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마 5:40)라는 말씀은 지키기가 쉬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내용의 말씀들을 예수님의 윤리라든지 기독교의 윤리와 도덕으로 배워왔다.
마태복음과 달리 누가복음 6:29에는 “네 겉옷을 빼앗은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키토온(citw/n)과 히마티온(i`ma,tion)이란 단어는 속옷과 겉옷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기도 한다. 키토온이 속옷인지 히마티온이 겉옷인지 구분을 정확하게 하지 않고 있다.
원문 검색으로 분명하지 않지만 키토온을 속옷으로 히마티온을 겉옷으로 보는 분도 있고 반대로 구분하는 분도 있다. 겉옷은 낡은 옷(히 1:11), 좀 먹은 옷(막5:2), 피 뿌린 옷, 화려한 옷으로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 시대는 화려한 옷을 요구하여 겉옷 투성이로 외식적이며 형식적인 것이 가득한 세상이다.
요한일서 2:16과 같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한 옷을 의미하고 있다.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을 주라는 말씀이 낡은 옷을 달라고 하면 새 옷을 주라는 말씀이며 좀 먹은 옷을 달라고 하면 좀 먹지 않는 옷을 주고 피 뿌린 옷을 달라고 하면 피 뿌리지 않은 옷을 주라는 말씀이다.
화려한 옷을 달라고 하면 화려하지 않은 옷을 주라는 말씀으로 본다면 옷은 사람의 몸을 보호하며 감싸주고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문화에서 겉옷은 이불 역할을 하여 일상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도구라는 것이다. 따라서 옷을 달라고 하는 것은 내가 갖고 있는 전 재산을 달라고 하는 같은 뜻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을 돌려대라는 말씀을 지키는 것이 더욱 쉬울 것이다. 즉 현재 내가 사용하는 침대를 달라는 것이 아니라 살고 있는 집을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송사하여 재판으로 인해 생긴 문제로 저당을 잡을 수 있게 집을 달라고 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나를 감싸주는 겉옷, 추위를 막아주는 이불과 같은 잠잘 때 없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옷을 달라고 하는 말씀이라고 한다면 과연 줄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옷이란 단어가 성경 제일 먼저 나오는 곳은 창세기 3장에 아담과 하와가 범죄를 하고 난 뒤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하나님께서 직접 입혀 주신 옷이 가죽옷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표징이며 은혜의 상징으로 옷을 입혀 주신 사건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입힘을 받은 옷을 달라고 하면 내 주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구원의 상징이며 은혜의 표징이 되는 겉옷을 달라고 한다면 속옷까지 주어야 한다는 말씀은 내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형상의 옷까지 주라는 말씀이다.
히브리어로 겉옷은 삐게도라는 단어인데 어근 바게드라는 단어로 “덮는 것, 외투, 겉옷” 이라는 개념으로 정리되어 있다. 겉옷은 갓씨로 말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일용할 양식으로 하늘에서 내려졌던 만나를 의미한다. 따라서 겉옷을 달라는 말씀은 만나를 달라는 말씀으로 자신의 영혼이 살아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러나 만나는 오래 보관할 수 없는 양식으로 그날, 그날 밖에 먹을 수 없는 양식이다. 그것을 달라고 하는 영혼들에게는 영원히 썩지 않는 양식을 주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깨달아진다면 오른 뺨을 치거나 왼 뺨까지 돌려대라는 말씀이나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동행해 주라는 말씀까지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한낱 윤리적이나 도덕적인 논리를 전개하고자 이런 말씀을 거론한 것이 아닐 것이다. 단순한 행동을 요구하는 말씀일 수 없다는 것은 성경을 읽다보면 깨달아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말씀 속에 엄청나게 숨겨져 있는 비밀을 단순한 문자로 기록되어 쉽사리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말씀 속에 원형과 본질을 찾기를 원하는 이들이 바로 오른 뺨을 치거나 겉옷을 달라고 하며 오리를 가자고 요구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진리를 찾고 생명을 간절히 얻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접할 때마다 얼마나 절실히 찾아다니고 있는지 내가 과연 오른 뺨을 치고 왼 뺨까지 내놓으라고 뗑깡를 부리고 있는지, 겉옷을 달라고 떼를 쓰고 있는지, 아니면 오리를 가 달라고 조르고 있는지 아니면 오른 뺨을 맞고 왼 뺨을 내놓고 있는지 겉옷을 주고 속옷까지 벗어 내놓고 있는지 아니면 십리까지 동행하려고 신발을 고쳐 신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겉옷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겉옷, 구원의 표징이며 은혜의 상징인 옷을 달라고 하면 내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형상까지 내놓을 수 있는 속옷까지 주어야 할 것이다. 하루만 지나면 썩어질 만나만이라도 달라고 하면 그 만나뿐만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않는 양식까지 주어야 할 것이다.
이제 왜 말씀의 원형과 본질을 찾아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면 천만다행이다.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을 돌려댈 수 없으며 오리를 가기를 원한다면 십리를 동행해 줄 수 있으려면 말씀의 원형과 본질을 찾는 일에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 큐티 정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며 전문적인 성경공부에서나 신학교에서까지 말씀의 원형과 본질을 찾아주는 교육과정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나의 재산 전부인 겉옷을 달라고 하면 줄 수 있을 만큼 아니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속옷까지 줄 수 있는 이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인 것이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