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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나무 가지와 어린 나귀 12:12~15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12:16~19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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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명절에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큰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나가 “호산나…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표적에 대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바리새인들은 온 세상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며 경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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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나무 가지와 어린 나귀 12:12~15
예수님을 환호하는 무리는 자신들을 로마 제국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 왕을 기대했습니다. ‘종려나무’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닉스’는 ‘불사조’(phoenix)를 뜻합니다. 유다 마카베오가 수전절에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성전에 들어왔고(주전 164년), 그의 형 시몬이 예루살렘을 되찾았을 때도 유대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했습니다(주전 141년). 이렇게 종려나무는 승리와 구원을 상징합니다. 무리가 “호산나”(“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를 외치며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환호합니다(13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마치 왕의 대관식과도 같지만, 예수님은 무리가 바라는 혁명적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스가랴의 예언처럼 어린 나귀를 타신 겸손의 왕이요(슥 9:9), 두려워하는 백성을 위로하시는 평화의 왕입니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내가 직위나 권위를 내려놓고 겸손하게 행동할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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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12:16~19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자 사람들의 반응이 각기 다릅니다. 먼저 제자들은 그 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영광을 얻으신 후, 곧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것을 본 후에야 그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16절).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려 내신 일을 보거나 들은 무리는 그분이 그러한 표적을 다시 보이실 것을 기대하며 환호합니다(17~18절). 한편 바리새인들은 온 세상이 예수님을 따른다며 분개합니다(19절). 교만한 자들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연약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의미를 결코 알지 못합니다.
● 더 깊은 묵상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두고 무리와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각각 어떠했나요?
나 중심으로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할 일은 무엇인가요?
한절묵상:요한복음 12장 19절
진리는 그 무엇으로도 감출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온갖 방해와 비방, 심지어 공격과 위협을 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이 사실을 인정합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연약하고 교회와 복음이 공격받는 것처럼 보여도, 진리의 복음은 계속해서 땅끝까지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종국에는 하나님 나라가 승리할 것입니다.
신앙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주님께만 충실하겠다는 의지와 실천적 결단의 약속이어야 한다. - 조이스 허기트
오늘의 기도
주님, 세상의 주인이자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제 삶의 구원자이신 주님께 제 마음의 왕좌를 내어 드립니다. 군림하는 이 땅의 왕들과 달리 나귀를 타고 왕으로 오신 예수님처럼, 저도 보냄받은 자리에서 겸손하게 행하며 주님을 온전히 따르게 하소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두고 무리와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각각 어떠했나요?
나 중심으로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할 일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2-16절 “호산나”(이제 구원하소서)를 외치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 환영하던 군중과, 예수님이 타신 어린 나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바라던 일과 예수님이 하시려는 일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심으로 스가랴 9:9의 말씀을 성취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이 칭송하고 우러르는 영웅이 아니라 낮고 천한 곳, 죄인들의 깊은 곳을 찾아가실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의 기대와 환호에 부응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들의 그릇된 비전에 도전하고 환상을 깨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군중은 준마를 타고 로마 대신 자신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되어 달라고 요구했지만,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 할”(마 1:21) 분이 되는 일에 생명을 드리셨습니다. 내 환호와 찬양은 나를 골고다까지 주와 함께 오르게 하는 고백입니까?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17,18절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을 곁에서 목격한 사람들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예수님이 하신 일을 목격한 증인도, 증언도 사라져 버립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려 낸 신비한 일의 증인은 자처했어도, 사형을 언도한 빌라도 앞에 계신 예수님의 무죄함은 증언하지 않았습니다. 눈으로 보고도 예수님이 행하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오해한 제자들과 증언자들은 그들이 예수님께 가장 필요한 상황일 때는 그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나는 증인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19절 바리새인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쏠리는 사람들의 관심을 차단하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고백한 대로 모든 것이 쓸 데 없는 허망한 수고였습니다.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온 세상이 예수님을 따를 때, 그리고 다시 오신 예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실 때, 그들이 한 일이 정말로 쓸데없었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 날이 오기 전에 어서 쓸데없는 일을 멈춥시다.
기도
공동체-제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하소서.
요12:12-19절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나사로가 준비한 잔치 다음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예루살렘 입성하시는데 선지자 스가랴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실때 큰 무리가 있었고 종려나무를 가지고 그리고 "호산나 찬송히라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
여기서 종려나무는 승리와 구원을 상징합니다 호산나 불렀는데 호산나의 뜻은 구원하소서
다음으로 이스라엘 왕이여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이여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구원해달라고 노래 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보셨고 나귀를 타셨습니다
여기서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을 보면서
에수께서 선지자 스가랴의 말씀을 성취하고 계심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깨달은 것은 16절에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영광을 얻으신 다음에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즉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하실때까지는 그 의미를 몰랐다고 할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때 어린 나귀를 타고 가셨다고 하는 것은 다음의 의미가 있습니다
선지자 스가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메시야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메시야로 오신 에수님은 세상적으로 군림하시고 정복하시기 위한
정치적인 왕이 아니시라는 말입니다
어린 양의 나귀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방법인 겸손과 섬김과 사랑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을 낮추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섬김과 사랑은
죄인이 우리를 섬기시고 사랑하심을 말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통치 방식을 군림하며 다스라려고 하는것은
하나님나라의 방식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겸손과 섬김과 사랑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 방식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여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무리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하는 광경이다.
어린 나귀를 타신 왕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르고 호산나, 즉 자기들을 구원해 달라고 외치며 예수님이 가진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겸손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셨다.
예수님은 왕이셨지만 유대인들이 환호하고 기다리던 왕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의 구주(왕)가 되시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무리의 환영
유월절을 맞아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큰 무리를 이루어 예수님을 환영했다.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격하게 환영했지만 저들이 원하는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는 왕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환영은 자기들의 욕심이 투영된 것일 뿐, 자기들의 기대에 어긋나자 금방 침묵과 비난으로 바뀌었다.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과 순종의 경험이 없으면 넘어지고 배도하는 것도 순식간이 되고 만다.
바리새인들의 반응
사람들의 열광에 바리새인들은 절망하고 있다.
자기들을 따르던 군중이 자기들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인기, 권력, 재물 등 세속적인 것이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욕망을 이루어주는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중요시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만을 신뢰하며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기대를 품고 예수님을 맞이하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에 맞춰 당신의 가야 할 길을 바꾸지 않으셨다.
우리도 사람들의 인정이나 사회적 지위 등을 이유로 교묘하게 예수님을 이용하지 말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묵묵히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데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이것은 기록된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그때 유월절에 모인 큰 무리, 곧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보고 믿게 된 많은 백성이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종려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요12:13)
이 역시 기록된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시118:25) 그때 원수들은 절망하며 푸념했습니다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요12:19) 참으로 주께서 그들이 하는 일은 쓸 데 없게 하시고,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허무한 것 같이 되리니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사41:12~13)
주께서 하시는 일은 완전무결케 하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할 때에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눅13:31~32)
참으로 우리는 주께서 어린 나귀를 타심을 통해 겸손의 왕이심을 볼 수 있고, 호산나 외침을 통해 구원의 왕이심을 볼 수 있고, 종려 가지를 통해 완전한 왕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종려나무는 히브리어로 "תמר"(타마르)인데, "완전"을 뜻하는 "תמ"(탐)과 "군주"를 뜻하는 "מרא"(마레)에서 온 것으로 "완전하신 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종려 가지를 들고 주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아멘 하더라"(계7:9~12)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삶 속에서도 우리의 길을 완전케 하시고 실족하지 않게 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를 실족하지 않게 하셨나이다"(시18:32~36)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큰 무리가 즐거움으로 예수님을 맞이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선언하신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외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큰 무리는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특히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모인 자들 앞에서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증거를 들은 큰 무리는 흥분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메시아를 기다려 왔습니다. 다윗 왕처럼 그들에게 물질의 풍요로움과 번영을 누릴 수 있게 해 줄 메시아를 기다려 왔습니다. 특히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의 통치로부터 해방해 줄 메시아를 열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했던 바리새인들의 탄식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맞이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그런데 예수를 보고 열광적인 찬사를 보냈던 큰 무리가 며칠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성난 군중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왜 이들이 변했을까요? 그들이 생각했던 메시아의 모습과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모습이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사자와 같은 용맹스러운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는 세상을 칼로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로마의 병정 앞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십니다.
큰 무리는 이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칼을 들고 로마를 정복하기 위해 싸우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로마의 힘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평범한 모습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배신감을 느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것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은 스가랴 9장 9-10절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이 예언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자 스가랴서의 예언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영광을 보고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자 드디어 스가랴서에서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왕으로 인해 유브라데강에서 땅끝까지 화평이 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사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실 때가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심판하러 오실 때입니다. 그러나 2000년 전에는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어린 양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메시아를 찾고 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깨닫고 온전히 주 하나님만을 찬양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는 마술램프의 지니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며 그의 다스림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누리기 원하시는 우리의 왕이시오, 주님이십니다. 오늘 하루의 삶을 살 때 그리스도의 통치로 인해 하늘나라를 맛보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 구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12~13절).
예수님은 이튿날 저녁 식사가 마련되어 있었던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명절을 지키기 위해 큰 무리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환영하며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도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말입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찬송하고 환호를 했지만,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외침 속에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메시아로 예수님을 인정하는 샘이 된 것입니다.
죄악에 사슬에 묶여 살아야만 했던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왕이시며, 구원의 왕이십니다. 그럼에도 구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깨닫지 못한 채 내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바라며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던 군중들은 정작 자신들을 위해 유월절 희생제물로 오신 분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압제에서 그들을 해방할 정치적인 왕으로 기대하며 환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하여 주시는 분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죄와 사망에서 해방하여 자유케 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구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이 걸으신 왕의 길을 따라 걷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겸손한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14~16절).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보시고, 그 위에 타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찾아서 타신 것은 예언자 스가랴를 통해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슥 9:9)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임을 보여주는 것(14~15절)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제자들은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였으나,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야 비로소 이 말씀이 예수님에 관해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16절).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인식은 엄청난 세상적인 힘을 가지신 왕으로 믿고,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은 겸손하고 낮은 모습으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이렇게 입성하신 이유는 만왕의 왕이시며,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겸손히 십자가를 지시고 그 위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실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시는 동안에 스스로에 대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대(마 11:28~29)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위용과 전쟁을 상징하는 군마를 타신 것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화평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삶을 통해 내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를 화평하게 하는 만드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걸으신 왕의 길을 따라 걷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완전한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전파해야 합니다(17~19절).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그 일어난 일을 증언하였습니다(17절). 이들은 예수님이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다시 살리신 과정 전체를 지켜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무리가 예수님을 맞으러 나온 것은 예수님이 이런 표적을 행하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18절)입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19절,새번역)... 예수님을 향한 시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제자들과 무리들은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후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담대하게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 예수님과의 만남 속에서 깨달은 놀라운 은총을 세상 끝까지 증거하고, 전파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전하고, 선포하는 자가 있어야 복음의 메시지를 세상 사람들은 듣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항상 힘쓰는 삶(딤후 4:2)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완악한 바라새인들처럼 결코 마음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부활이여 생명이요 완전한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당당하게 전파하여 예수님이 걸으신 왕의 길을 따라 걷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겸손하게 오신 예수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의 고백을 담아 만왕의 왕으로 영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구원을 이루시는 왕 되신 예수님만을 온전히 믿으며, 영원히 찬양하며 따라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요 12:12~19절)...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시 118:25~26)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사 40:9)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마 27:37)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막 11:1-6)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 스가랴 9:16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향하여 사랑과 긍휼로, 은혜와 진리로, 그 십자가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신 주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일하심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여전히 우리는 갈 바를 알지 못 하나, 오직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한걸음씩 지치지 않고 그 진리에 길 위로 걸어가길 소망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과 꺼지지 않는 주님의 사랑이 날마다 새로워지게 하시고, 이전보다 더 주님을 알고 따르고 배우는 거룩한 삶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구원의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이 발걸음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아버지께서 풍성하게 채워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환우들과 전쟁 가운데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위로와 회복과 치유와 생명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분열과 다툼, 분노와 미움의 사로잡혀, 어둠 아래 허덕이고 있는 이 나라와 백성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제사장으로 주어진 거룩한 사명을 순종과 겸손으로 행하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생명과 평안으로 선하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부활과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